[정의]강이식을 시조로 하고 강종덕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안동시 세거 성씨.
[개설]안동의 진주강씨는 옹천강씨(瓮泉姜氏)로도 불리며 강이식(姜以式)을 도시조로 하고 강계용(姜啓庸)을 중시조로 하는 진주강씨 박사공파(博士公派)의 후예 강종덕(姜宗德)이 조선 초 안동에 정착한 후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형성된 가문이다.
[연원]진주강씨는 고구려 때 도원수를 지낸 강이식의 후손 강진(姜縉)이 통일신라 때 진양후(晉陽侯)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강이식을 시조로 진주를 본관으로 삼아 형성되었다. 박사공파 외에 강위용(姜渭庸)을 파조로 하는 소감공파(少監公派), 강원용(姜遠庸)을 중시조로 하는 시중공파(侍中公派), 강민첨(姜民瞻)을 중시조로 하는 은열공파(殷烈公派), 강감찬(姜邯贊)의 아버지 강궁진(姜弓珍)을 중시조로 하는 인헌공파(仁憲公派) 등 다섯 파가 있는데 시조로부터 각 파조까지의 계대가 불분명하여 각 파조를 중시조로 삼아 계대를 이어오고 있는데 인헌공파는 강감찬의 출생지를 따라 금천강씨(衿川姜氏)로도 부른다.
[입향경위]강계용의 7세손인 강회백(姜淮伯)은 1376년에 문과에 올라 정당문학, 대사헌을 역임하다가 고려가 망하고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강회백의 아들 강종덕은 고려가 쇠망하자 사헌부감찰을 사임하고 안동으로 낙향하였고, 강종덕의 증손 강두전(姜斗全)이 풍기에 살다가 세종 연간에 안동 물한리(현 북후면 물한리)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북후면 일원에 자리 잡은 진주강씨는 입향 이래로 현달한 인물이 비교적 적은 편이다. 영조 때 옥계(玉溪) 강봉문(姜鳳文, 1735~1815)이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있어 저서로 『옥계유고(玉溪遺稿)』가 간행되었다. 정조 때 옥천(玉泉) 강주호(姜周祜, 1754~1821)는 성균생원에 올랐고 아우 사익재(四益齋) 강주우(姜周祐)가 옥산 기슭에 서당을 지어 많은 후진을 길렀다. 강영서(姜永瑞, 1840~1917)는 고종 때 궁내부주사에 임용되어 선산부사 등을 역임하고 은퇴하여 청송에 옮겨 살았고, 만주 등지에서 항일운동에 활약한 강인수(姜寅秀)는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현황]안동의 진주강씨는 북후면 옹천리와 장기리에 집성촌이 있으며 인근 북후면 물한리·두산리·월전리 등지에 수백 호가 세거하고 있다.
[관련유적]강봉문을 제향한 벽계서원(碧溪書院), 강주우가 후진을 가르치던 사익재(四益齋)가 북후면 옹천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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