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저는 기독교신자이고 그렇다고 유태인에게 특별한 호감이 있는 것도 아니며,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의 무슬림들에게 특별히 악감정을 갖고 있지도 않음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다만 현대 역사에서 펼쳐지는 이스라엘과 아랍과의 갈등,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에 대하여 제3자의 시각에서 역사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구약성경에 사무엘상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장면은 유태인들이 인접 국가인 블레셋의 침략군을 맞아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다윗이 거대한 체구의 괴력의 거인 골리앗을 상대로 양치기하면서 익힌 돌팔매질 실력으로 한방에 그를 쓰러뜨리고 그의 장검을 뽑아서 목을 자르는 사건입니다. 다윗은 이 기적과 같은 승리로 인해서 훗날 이스라엘에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이사건은 누구나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맨위에 사진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스라엘군의 M60 탱크 앞에서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에 조그만 어린이가 겁도 없이 돌을 집어 던지는 모습입니다. 분명히 과거의 사건과 흡사한 상황이지만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골리앗인 셈이고 거대한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어린 아이가 다윗처럼 보입니다.
2차대전 후에 이스라엘은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 상대적으로 상대가 될 것 같지않은 거대한 아랍 국가들에 둘러쌓여 4회에 걸친 중동 전쟁을 벌이지만 모두 승리를 거두는 "다윗과 골리앗"과 흡사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내부적으로는 위에 첫번째 사진처럼 거인 이스라엘과 힘없는 팔레스타인 간에 끝없는 증오와 탄압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역사가 벌이지게 되었는지 오늘은 1948년 이스라엘 국가 건설부터 1차 중동전쟁까지의 상황을 차분하게 제3자의 시각으로 풀어나가 보겠습니다.
일단은.......... 1948년에 이스라엘은 분명히 자신보다 열배 넘게 큰 체구의 골리앗들을 상대해야 했던 돌팔매 소년 다윗이었습니다.이제 그들이 이룬 첫번째 기적을 소개해드립니다.
이스라엘 국가 건설
2차대전이 끝난 후에 영국은 하가나(영국이 식민지 통치를 위해 조직한 유태인 무장 조직)로 대표되는 유태인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영국 식민통치에 강경한 저항을 해온 아랍인들을 탄압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집안에 호랑이 새끼를 키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바로 영국군에 의해 정식 군사교육과 정보 교육을 받은 하가나가 어느새 이르군이나 레히와 같은 유태인 민병대 조직과 연결되어 영국에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수백에서 수천에 이르는 홀로코스트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태인들이 유럽에서부터 팔레스타인 땅으로 새로운 인생을 기대하며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조상의 고향을 찾아 몰려 들어온 유태인들을 영국은 집단 수용소를 만들어 수용하고 관리하려고 하였습니다.
(유태인 이주민들을 배에 가득 싩고 팔레스타인에 막 도착한 화물선)
유럽에서 이미 나치의 끔찍한 강제 수용소를 경험했던 대다수의 유태인들에게는 비록 무자비한 학살이나 개스실의 위협은 없더라도 영국의 이런 대접에 분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막 도착한 유태인 홀로코스트 생존자들, 그들의 옷에 뜯겨진 "다윗의 별"자국을
보면서 다시 한번 나치의 유태인 학살의 공포를 생각나게 합니다.)
(1947년 이스라엘 하가나의 군사 훈련 모습)
1947년이 되자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태인과 아랍인들의 갈등과 대립은 자신들이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음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 국제연합(UN)에게 뜨거운 감자를 넘겨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앞글에서 설명했듯이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에 아랍인들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독립 정부를 세울 것을 의결하게 됩니다. 독립 국가 건설을 갈망하던 이스라엘은 이런 국제연합의 의결을 받아들였지만 아랍 조직들은 유태인의 독립 정부 수립을 결사 반대하고 국제연합의 결의를 거부하게 됩니다.
(국제연합의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안 - 1947년 가결)
(1948년 5월 이스라엘 초대 총리 벤 구리언이 이스라엘 독립 국가의 개국을 선포합니다.)
제1차 중동전쟁 (1948년 5월~1949년 3월)
드디어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자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 공화국"(이집트와 시리아가 통합하여 세운 공화국)간에 전쟁으로 확대되게 됩니다.
이스라엘측 상황
독립 국가 수립이 되기 오래 전부터 이미 제대로 정비되고 훈련된 경찰/정보 기관으로 유지되어 온 하가나는 아랍인들의 1936년~1938년간에 폭동 이후로 그 세력이 급격히 커지게 되었고 1946년에는 2,000여명의 직업군인으로 구성되어있었고 추가로 한달에 3~4일 정기적인 군사 훈련을 자발적으로 받는 10,000여명의 지원자들이 대기 병력으로 확보된 엘리트 군사 조직이었습니다. 사실상 이스라엘 군부대로써 25살 이상의 지역 방위군(민병대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것 같네요.)과 연계되어 총 35,000명에 달하는 규모로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정부 수립 전까지는 제대로 모습을 갖춘 국가에 소속된 군사 조직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에게 필요한 무기를 조달하는데 여전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총리 데이빗 벤 구리온 (1886년 ~ 1973년)
하지만 1948년 5월 이스라엘 독립 정부 수립 후에 초대 총리로 선출된 데이비드 벤구리온은 총리 선출이 되기 전인 1946년에 지도자로써 유태인 공동체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 적절한 무장을 갖출 것을 명령하였고 이제부터 급격히 무장을 서두르게 됩니다. 1947년 9월 하가나는 1만정의 소총, 702정의 경기관총, 2,666정의 기관단총, 186정의 중기관총, 2인 박격포 672문과 3인치 박격포 92문을 보유한 강력한 군대로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10월에서 이듬해 7월 사이에는 자체적으로 무기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3백만발의 9mm 권총 탄환과 15만개의 수류탄, 1만 6천정의 기관단총, 3인치 박격포를 210문이나 생산하였고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무기를 구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무기가 부족한 상태로 평균적으로 하가나 대원 3명당 1개의 무기를 보유하는 실정이었으며 정예부대인 경우라도 3명당 무기 2자루 보유에 불과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제1차 중동전쟁 중에 重기관총, 대포, 장갑차량이나 탱크, 대공무기는 보유하지 못한 상태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아랍군 진영 상황
(나라 이름들이 워낙 많아서 도대체 어디 붙어있는 나라인지 저도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일단 참고용 지도 다시 한번 붙혀놓고....)
아래 아랍군들의 면면을 보면 이스라엘 한나라를 놓고 정말 끔찍하게 많은 나라들이 저마다 군대를 파견하였습니다. 솔직히 숫자나 지원 군사력만을 보면 아랍군 진영이 질 수가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전쟁 진행 상황을 소개하기에 앞서서 일단 각나라별 참전 현황을 소개해봅니다. (왠지 저는 삼국지에서 동탁 한명 잡자고 전국의 제후들이 새까맣게 모여들던 모습이 자꾸 겹쳐지네요. 그 당시 모여든 제후들의 문제점은 모두 한마음으로 일관된 지휘 체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었지요. 결국은 동탁을 이기지도 못하고 자중지란으로 뿔뿔이 흩어졌다는....)
(1948년 하가나 여성 대원의 경기관총 사격 모습)
1)팔레스타인 거주 아랍측 군사 조직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만들어진 것은 1964년에 만들어졌으므로 아직은 청년층의 무장조직, 즉 민병대 조직이 있었습니다. 약 11,000~12,000명 정도의 규모였는데 일반적으로 아랍 민족간에 단결이 쉽지 않은 것처럼 이미 이조직에서 두 파벌로써 반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파벌은 팔레스타인에 아랍 지도자이자 지난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골수 반유대주의 신봉자로 히틀러와도 교류를 가진 아민 후세이니 찬성파(후타파)와 반대파(나즈다파)로 나뉘었습니다. 1차 전쟁 발발과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 방위군이 새롭게 조직되었고 12월 아브 알 퀘디르 후세이니가 이끄는 아랍 성전군이라 불리는 부대가 에루살렘에 도착하여 소수의 지원병 및 영국군 출신 퇴역군인들까지 합세하게 됩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측은 애초 유태인 하가나 조직처럼 영국 식민통치하에 체계적인 조직력 및 지원을 받지 못했었던 탓에 무기 지원이 매우 빈약했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이스라엘 쪽 상황보다 훨씬 열악했습니다. 주로 예전 영국군에게서 얻은 무기가 전부였으며 1942년 하가나의 첩보에 따르면 약 5만여정의 구식 총기류를 보유하고있었지만 매우 낡고 고장이 잦은 물건들었습니다.
(1948년 1차 중동전쟁 기간 중 팔레스타인 민병대)
2)아랍 해방군
아랍 국가 연맹은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에 비해서 열세인 아랍인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아랍 해방군을 조직하고 사마리아 지역과 북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파견하였습니다.
(아랍 국가 연맹(League of Arab States)은 1945년
3월 22일 중동 지역의 평화를 위해 이집트,요르단,
시리아, 이라크,레바논,사우디 아라비아,이 만든
연맹입니다. 2008년 현재 22개국까지 회원국이
늘어나 있습니다.)
3)요르단
아랍 연맹의 최정예 군대로써 영국 장교들에 의하여 잘 무장되고 훈련된 8,000명 ~ 12,000명의 강력한 부대가 4개의 보병 및 기계화 연대로 조직되어 있었고 40문의 야포와 75대의 장갑차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948년 1월까지 요르단은 이에 더하여 지원병 3천 명을 증파합니다.
4)이라크
1948년, 이라크는 12개 여단 21,000여 명의 군대를 보유했으며 영국제 전투기 100여 대로 이루어진 공군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초기에 4개 보병여단 5,000여 명을 파견하였으나 최종적으로 15,000명 ~ 18,000명까지 증파하게 됩니다. 4월에 최초의 이라크군이 배치되었으며 5월 15일에는 이라크 공병대가 요르단 강에 가교를 건설하여 이스라엘 정착촌을 공격, 약간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이후,이스라엘 군과의 교전으로 격심한 손해를 입기는 하지만 선전을 펼쳤고 이라크 군은 예닌 지역을 사수하던 중 종전을 맞이했습니다.
5)이집트
1948년 약 40,000여 명의 병력을 전개할 수 있었으나 군사적으로 적정 연령에 있는 인구 중 80%가 병역을 거부했고 보급체계가 제한되어 있었기에 국가 경계선 지역에만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초기에 병력 10,000여 명으로 구성된 원정군이 팔레스타인에 파견되었으며 25파운드 포 6문과 6파운드 포 8문, 1정의 중기관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집트 공군은 30기의 슈퍼마린 스핏파이어와 4기의 호커 허리케인 전투기 20기 등으로 지상 폭격을 수행하였다.
(이라크가 보유하였던 영국제 호커 허리케인 전투기. 당시 이스라엘은 대공 무기조차 변변히 갖추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6)시리아
시리아는 3개 보병연대로 구성된 12,000명의 병력과 대대 규모의 기갑대대를 파견하였습니다. 시리아는 프랑스제 장갑차와 탱크로 구성된 기갑대대의 지원을 받은 1보병여단으로 지원했는데. 5월 15일 ~ 16일에 이들은 이스라엘의 제마크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한 바 있으나 며칠 뒤에 다가니아에서 패배합니다. 전반적으로 시리아군은 방어로 돌아선 6월 10일 이후로 소규모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스라엘의 정착민 촌락에 소규모의 공격을 가했습니다..
7)레바논
아랍연합군 중 레바논군은 규모가 작은 3,5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000여 명의 침공군은 북부 갈릴리를 지나 이스라엘군과 교전하였으며 1949년 3월 23일 휴전협정에 조인합니다.
.
8)사우디 아라비아와 예멘
사우디 아라비아는 800명 정도의 자원자를 파견하여 이집트군에 소속시켰습니다. 예멘도 소규모의 병력을 파견합니다.
전쟁 발발
1947년 11월 국제연합의 팔레스타인 분리안의 가결 후에 결정된 내용에 따라 1948년 5월 15일을 기해 영국의 팔레스타인 식민지 통치는 끝나게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유태인과 아랍인의 긴장은 극에 달했고 전쟁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 판단한 아랍의 몇몇 지도자들(사우디 아라비아, 이집트)은 비밀리에 영국측에 폭력 사태를 막기 위해서 최소한 1년만 더 식민지 통치를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948년 5월 15일 영국 식민 통지 종료
드디어 식민 통치 종료일은 왔고 예정된 대로 영국은 철수를 시작하였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스라엘 초대 총리가 되는 벤 구리온은 이스라엘 독립을 선언했고 그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독립 국가 건국을 반대하는 이라크, 이집트, 요르단 그리고 시리아가 위에서 설명한 병력의 규모로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해들어왔습니다. 초기 아랍 진영의 계획은 요르단과 이라크 부대가 동쪽에서 치고 들어오고 시리아와 레바논 부대가 북쪽에서 들어와서 나사렛에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후에 함께 하이파로 진격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남쪽에서는 텔아비브를 점령하기 위해 이집트군이 진격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결의안 유효일인 5월 15일에서 4일 전인 5월 11일에 아랍 국가 연맹은 다마스커스에서 모여서 이런 계획을 수립했는데 서로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아랍의 강국들은 서로의 욕심을 챙기기 위해서 옥신각신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어쨌든 다음 작전 상황 지도에 나온 것처럼 각자 맡은 경로로 5월 15일 당일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위에 지도에서 처럼 동쪽, 남쪽, 북쪽에서 이집트,이라크,시리아,요르단 등의 병력들이 공격해들어오자 이제는 이스라엘 정부 소속 군대가 된 하가나와 2개 민병대 조직과 아랍 침략군들간에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남부 전선 상황
전쟁이 서쪽을 제외한 세방향에서 서로 다른 국가들의 군대가 공격해오는 상황이므로 일단 나라별로 이스라엘과의 전투 진행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헷갈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선 남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이집트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남쪽으로 진격해들어온 이집트군의 공군은 전쟁 발발 몇주간 텔아비브 공습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농촌 거주지와 비행장도 공습을 가했는데 당시 이집트가 보유하고 있던 2대의 스핏파이어 전투기는 폭격기처럼 대규모 파괴는 불가능했지만 이스라엘군에게는 충분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군의 부실한 대공화기의 공격에 불구하고 이집트 공군기 한대의 격추에 성공하여 이집트 조종사는 즉시 이스라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 공군의 공습은 계속되었고 지속적인 공습으로 40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이들의 대부분은 무고한 시민들이었습니다. 5월 18일에는 텔아비브 중앙 철도역이 공습으로 파괴되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의 대공 화기로 격추된 이집트 스핏파이어, 공격을 잘했다고
해야할지, 조종사가 미숙했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네요.)
(이 지도 위에 격추된 이집트 스핏파이어가 바닷가에 있네요!
이집트가 공격한 텔아비브는 이스라엘 서쪽에 위치한 지중해 해변
도시입니다. 그리고 이집트 조종사는 바로 해변가에 추락한 것이구요.
지금부터는 지도를 봐가면서 글을 읽으셔야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텔아비브 위치 확인하시길!)
(1948년 5월 이집트 공군의 텔아비브 공습으로 발생한 부상자들을
운반하는 유태인들....)
아랍측 병력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집트군은 남쪽에서 2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진격해 올라왔습니다. 1진은 가자 지구를 지나서 텔아비브를 점령하기 위해 올라왔습니다. 또한 1진보다 좀 더 동쪽에서 올라오는 2진은 베르셰바가 목표였습니다. (이래서 이스라엘 지도가 필요합니다. 지명들이 막 나오는데 위치를 모르면 뭔 얘긴지 전혀 모를 것이거든요.) 이집트군은 진격로 갓길에 이스라엘군의 기습을 사전 봉쇄하기 위해서 네게브 지역 주변 이스라엘 농장 지역에 공격을 가했습니다.
(위에 마크 된 곳이 이집트 2진의 목표 베르셰바 위치입니다.)
이집트군 1진과 2진 모두 전쟁 첫주부터 그 지역 유태인 민병대와의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의외로 완강한 저항으로 이집군들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게 됩니다. 반면 미리부터 훈련을 하여 침략군에 대한 기습 공격을 준비해온 유태인 측은 이집트군들에 비해서 보잘 것 없는 소총 중심의 무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게릴라 공격으로 이집트를 괴롭힙니다. 하지만 워낙 무기나 병력면에서 이집트군과 소규모 이스라엘군과의 차이로 인해서 짧은 시간에 이집트군은 목표로 하는 텔아비브와 베르셰바까지 빠른 속도로 진격해 올라갑니다.
(여기서 한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집트군이 상대했던 농장 지역에 민병대들은 위에 사진처럼
집단 농장(약간 공산주의 느낌이 난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전혀 다른 민주적인 조직임.)으로 자급하여
운영하는 유태인 거주지역을 의미합니다. 생산 활동뿐만 아니라 거주민들이 유사시에 침략군들에게
저항하기 위하여 정기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유태인 농장(Kibbutz)에서 여성들이 군사 훈련을 받는 모습)
시간이 지나면서 이집트군과 이스라엘의 민병대와의 교전에서 양쪽 희생자들은 더 늘어나게 되는데 밀리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상황은 하가나가 보유한 장갑 트럭들을 활용하여 남부 지역에서 이집트군과 교전하고 있는 민병대에 보급을 지속적으로 해주면서 신속하게 농장의 노약자들을 후방으로의 옮길 수 있었다는 것과 당시에 한달에 무려 10,000명이 넘는 유태인들이 지중해 항구를 통해 이스라엘로 쏟아져 들어오는 상황이었으므로 전쟁에 대응할 병력들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불과 2~3주만에 이집트군은 텔아비브와 베르셰바 코앞까지 진격하게 됩니다.
(어른들이 이집트군과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서 하가나에서 보낸 대원들은 농장에 아동들을 보호하였습니다.
사진은 이집트와 교전 중인 네게브 지역 농장(키부츠)에 하가나 대원들이 영국군이 사용하던 장갑 트럭을
타고 와서 농장에 아이들을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얼마 후 하가나 대원들은
이지역에 아이들은 모두 안전한 후방으로 옮기게 됩니다.)
전쟁이 시작된지 14일이 지난 5월 29일 이스라엘군은 텔아비브로 진격하려는 이집트군을 저지하고 이집트군에게 점령된 이스둣과 아드할룸 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목적으로 프레쉿 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 당시 갓 조직된 이스라엘 공군은 체코슬라바키아에서 구입하여 수입한 Avia S-199S 전투기 4대로 애쉬돗으로 향하던 500대의 이집트 군용차량 행렬에 공습을 가하여 타격을 입히게 됩니다. 이스라엘 전투기는 70kg의 폭탄을 투하하였고 이집트군을 향해 기관총 사격을 가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사격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기관총이 고장나는 경우도 있었고, 4대중 2대는 추락하여 조종사들이 사망하였지만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공군의 임무는 이집트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는데는 성공하였습니다.
(Avia S-199S는 2차대전 중에 메서슈미트 Bf 109G를 생산하던 체코슬로바키아에 Avia社가 Bf 109 프레임에 Bf 109G가 사용하던
다이믈러 엔진 대신에 융커스 유모 엔진을 사용하여 생산한 일종의 "Bf 109" 짝퉁 모델입니다. 즉 이스라엘 공군의 최초의
전투기는 자신들을 학살했던 나치 독일의 주력기 Bf 109의 짝퉁이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합니다.)
공습에 이어서 이스라엘 방위군 소속 지바티 여단이 소규모 기습 공격을 가하였는데 하지만 전열을 재정비한 이집트군은 공격해오는 지바티 여단을 반격하여 큰 타격을 입히는데 성공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6월 6일 닛자님 지역을 수비하는 이스라엘군과 점령하려는 이집트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5일간 벌어지지만 이스라엘군은 항복하고 닛자님 지역은 이집트군의 수중으로 넘어갑니다. 닛자님 전투에서의 패배를 이스라엘은 두고 두고 매우 치욕적인 패배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일단 오늘은 이집트군의 초반 진격 상황을 설명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번 글은 동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요르단 군의 상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번에는 글을 읽고 '영광의 탈출(Exodus)'과 'Defiance'를 봤습니다. 'Defiance'는 좀 동떨어진 이야기였지만, Exodus는 이스라엘 국가 수립의 초기 이야기라서 어느정도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 영화가 더 재미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무모하게 보이는 무장투쟁으로 보였던 것이 이렇게 바뀌게 되는군요.
첫댓글 휴일 아침 재미있는글 잘 보았습니다.
탱크에 돌을 던지는 아이의 사진은 디오라마의 소재로도 좋을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모형에 컴백(?)하여 완성은 못했지만, 처음 만든비행기가 아카데미제 아비아 였습니다.
형님글로 아비아를 보니 새롭내요. ^^
오잉? 그거 흔치 않은 키트일텐데???? 아카데미에서 체코 전투기 키트가 있어요?
@따블오남편(김준만) 신기해서 찾아봤습니다. 정말 아카데이에서 출시했었네요?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전투기인데? 와! 정말 신기하네요!
전 그비행기 보관하다가 작년에 48 처분하면서 다 팔아 버렸네요....
좋은 리뷰잘보고 갑니다. 이집트랑 이스라엘은 고대시대부터 지금까지 참 많이 싸웠네요.ㅎㅎ
맞습니다!!! 하하
그런데 제가 쓰는 글은 리뷰가 아니라 그냥 글인데......리뷰라 하시니까......키트 리뷰가 아니라서.......^^! 거 뭐 별거 아니지만.........
그냥 그렇다는.......얘기지요......하하하.. ..극적극적.......
그럼 Essay란 말이 어울릴까요? ㅎㅎㅎ
그냥 글이죠....허허
김작가님 휴일아침 재미있는 선물 주셔서 감사합니다. 포항에 모임가는 중에 차에서 읽고있는데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김작가님 덕분에조만간에 중동박사학위 딸것 같습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어허! 김작가는 무슨! 쥐구멍 찾게 만드시네요! 즐서운 하루 돼세요!
요즘 정말 관심있게 또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댓글 남겨주시는 것이 큰힘이 됩니다.
이번에는 글을 읽고 '영광의 탈출(Exodus)'과 'Defiance'를 봤습니다.
'Defiance'는 좀 동떨어진 이야기였지만,
Exodus는 이스라엘 국가 수립의 초기 이야기라서 어느정도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 영화가 더 재미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무모하게 보이는 무장투쟁으로 보였던 것이 이렇게 바뀌게 되는군요.
007 다니엘 크레이그의 매력은 슈퍼맨 스타일의 천하무적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본드를 보여줬는데 이작품에서도 고뇌하는 리더의 모습을 잘 보여줬지요.
벤 구리온 공항이 초대 총리 이름에서 딴 거였군요. 이스라엘 출장이 나름 제 출장 중에 특이한 곳에 속하는 지라 기억에 남아요. 일만 하다 왔지만요. ^^
어유 이스라엘 출장도 가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