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와 함께 떠나는 배낭여행(터키/그리스/이집트 편)
... I S T A N B U 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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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세계 7대불가사의 하나인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 성당에 석양노을이 지고 있다. |
◈ 신화와 동족의 나라 속으로....
"메.르.하.바...."(안녕하십니까?)
"메르하바"
2002년 10월 9일 오후 1시 30분, 인천공항을 이륙한 터키항공 소속 TK 91 비행기는 아시아 대륙을 지나 이스탄불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이스탄불까지는 논스톱으로 10시간 이상 걸립니다. 허리가 아프고 팔다리가 뻐근한걸 보면 아마 서울에서 출발한지 상당히 많은 시간을 날아 온 모양입니다.
비행기가 이륙하면서부터 나는 토마스 벌핀치(1797~1867)의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이윤기 역/1996년판/원문이 충실하게 번역되어 나에게는 웅진출판사에서 나온 같은 제목의 책 보다 훨씬 좋았음) 를 정신없이 읽어 나가다가, 눈도 피로하고 하여 잠시 책을 덮고 옆 좌석의 터키인에게 더듬거리며 터키어로 말을 걸었습니다.
토마스 벌핀치의 책은 산드로 보티첼리의 '봄(Primavera)'이 멋지게 표지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 장면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그의 아들 에로스(사랑의 신)와 꽃으로 장식한 봄의 여신을 거느리고 있는 눈에 확 띄는 장면입니다. 그림속의 주인공들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거의 나체의 형태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까부터 옆 좌석의 터키인은 내가 읽고 있는 책 표지를 슬금슬금 훔쳐보며 씨익 웃곤 하였습니다. 그 미소가 친숙하기도 하여 나는 그에게 서투른 터키어로 인사말을 건넷던 것입니다.
서울을 떠나오면서 배낭속에 넣은 책을 무겁다고 아내가 몇 번이나 빼 놓았었는데, 나는 이 책과 성경책 한권 그리고 여행 안내 책자 두권을 내 배낭속에 아내 몰래 다시 챙겨 넣었습니다.
나는 몇 년 전에 이미 이 책을 한번 읽은 바 있지만, 그 때는 등장하는 신들이 너무 많은데다 얽히고 설킨 내용들로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뿐 도저히 소화를 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화의 현장무대로 날아가는 지금의 입장은 사뭇 다릅니다. 신화의 현장으로 가까이 날아갈수록 나는 마치 그 신화가 전개되고 있는 동시대에 현존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 들어가며 책 읽기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저자인 토마스 벌핀치는 미국에서 30년간 은행 생활을 한 은행원 작가라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관심을 더 갖게 했던 책이었습니다. 비록 135년전의 일이지만 이는 우연히도 내가 30년간 은행에서 일한 환경과 일치하여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게 하는 저자여서일까요?
은행원이었던 그가 신화에 몰입하여 위대한 작품을 펴낸 것과, 내가 이제 겨우 그 신화의 무대를 돌아보기 위하여 날아가는 것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 되겠지만, 어쨋던 나는 그와 같은 은행원이라는 대등한 입장에 서서 책을 읽어나간다는 것이 더욱 흥미를 돋구어 주었습니다.
그는 은행원 생활을 하면서도 보스턴 박물학회 회장으로 6년간 재직하는 등 과거로 흘러간 역사와 신화에 대한 끈임없는 탐구를 멈추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59세 되던 뒤늦은 나이에 이 위대한 책을 완성했습니다. 나는 그 때의 그보다 몇 살 아래에 있지만 어떻든 같은 50대 나이에 그가 저술한 역사와 신화의 현장으로 진한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 나선다는 점이 또다시 나를 흥분시키고 있었습니다.
그의 책은 나로 하여금 이 신화의 무대인 터키, 그리스, 이집트로의 길을 재촉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로마는 유럽을 여행할 때에 들릴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리스를 비롯한 이 3개국은 귀가 빠진 사각지대처럼 좀체로 둘러 볼 기회가 나질 않았습니다.
이 나라들은 같은 유럽권의 국가들이지만, 지금까지 가보지 못했던 나에게 있어서는 마치 먼 신화속의 베일에 가려 있는 갈 수 없는 나라 같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토마스 벌핀치가 저술한 신화의 무대는 그리스와 로마뿐 아니라, 터키와 이집트의 아주 깊숙한 곳까지도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거기에다 신화와 관련된 시인과 작가들의 글과 시가 시대별로 꼼꼼하게 인용되어 있어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과연 문학성을 풍부하게 갖고 있으면서도 은행원다운 촘촘한 걸작품입니다.
◈ 비행기에서 만난 터키의 주방장
콧수염을 긴 터키 사내는 의외로 너무 반갑게 응수를 해주었습니다. 오스만 터키족인 그의 핏줄기 속에는 어쩌면 내 몸속에 있는 똑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터키인의 조상이 몽골의 초원을 누비던 흉노와 돌궐의 후예들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였던 고조선 시대에 같은 피가 섞인 이웃 민족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10세기경부터 흉노와 돌궐의 후예들은 일부는 아시의 서쪽 아나톨리아 반도로 흘러가 역사적으로 최강대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고, 일부는 아시아의 동쪽 고구려와 백제로 이동하여 동서의 끝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피를 나눈 이 동족들은 서로 헤어진지 1300여년이 지난 1950년도에 아시아의 서쪽 끝자락에서 동쪽 끝자락으로 달려와 피를 흘리며 동족을 돕는 기구한 운명의 역사적인 만남을 이룩하였습니다.
금년도에 월드컵이 한국에서 치루어 진 뒤 터키와 한국은 더욱 친숙해지고 있으며, 이번 여행길에서도 실제로 곳곳에서 피를 나눈 형제애를 진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터키인이 그 먼 옛날 나와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라고 그 누가 부인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이 터키인을 나의 형제(브러더)로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여행안내 책자에서 겨우 찾아낸 터키어로 인사를 하긴 했지만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애궁, 어쩔 수 없지. 영어로 말을 할 수 밖에.... 그런데 이번엔 그 쪽에서 더듬거렸습니다. 그는 영어를 나만큼 못하는 모양입니다. 뭐 언어가 대순가요? 궁하면 통한다고. 우린 손짓 눈짓을 해가며 보디랭기지로 의사소통을 해나갔습니다.
내가 알아낸 그에 대한 정보는 이렇습니다. 이 형제의 이름은 알리 폴라트 Ali Polat. 이스탄불 거주. 그는 서울의 신사동에 위치한 터키요리점의 주방장으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잠시 터키를 다니러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나에게 서울 신사동의 요리점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적어주며, 귀국 후에 꼭 한번 찾아오라고 신신 당부를 하였습니다.
“아드느즈 네?”(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베니 아둠 오우케이"(내 이름은 O.K입니다) (이름을 묻는 그에게 나는 내 이름의 이니셜 O.K를 따서 소개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나라밖에서 내 이름은 오우케이로 통하고 있습니다)
"OK?... 베리 굿 네임.."
내 이름을 OK라고 소개를 하니 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부르기 쉬운 이름이라고 하면서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이보게 콧수염 기른 형제여! 이 형제의 이름은 만사 오우케이라네. 한국에서 어려움이 있거덜랑 이 형제를 찾아오시게나. 만사 오케이로 처리를 해 줄테니"
뭐 이런 내용의 대화를 그 터키인과 영어, 터키어, 한국어, 손짓, 몸짓으로 섞어서 전했더니, 그는 이 뜻을 어렵사리 알아듣고는 입이 함박처럼 찢어지게 웃었습니다. 그와 이런 저런 잡담을 하다보니 어느새 이스탄불에 가까이 왔다는 안내방송이 울렸습니다.
"귈레귈레"(안녕히 가시게)
"호쉬 차칼른"(안녕)
내가 알고 있는 터키어는 겨우 위에 언급한 인사말정도입니다. 그것도 여행 책자를 보면서 하는 말인데 그래도 터키어로 몇 마디 건 내온 것이 좋았던지, 그는 꼭 신사동에 있는 자기 레스토랑을 들리라고 다시한번 당부를 하였습니다. 오우케이 알겠다 오바! 형제가 공짜로 한턱 쏘겠다 이 말씀이지...^^
10시간여의 비행 끝에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Ataturk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5시 30분(현지시각). 터키는 우리나라보다 6시간 늦게 가는 나라입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이스탄불에 도착한 것입니다.
지도상으로 보면 이스탄불은 한쪽은 유럽의 붕어가, 또 한쪽은 아시아란 붕어가 마치 키스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양손의 엄지 손가락을 서로 맞대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런 모양을 보면서 이스탄불은 저에게 늘 신비하게만 느껴지졌던 곳입니다. 두 대륙을 가르는 보스포로스 해협은 가장 좁은 곳이 불과 698M로 매우 가까이에 있습니다.
"휴우~ 그 놈의 비행기 지겹기도 하네요."
터키의 땅에 내린 아내의 일성. 나도 그렇지만 아내도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걸 제일 싫어합니다. 시간이 좀더 걸리더라도 버스나 기차를 타고 육로로 다니는 여행이 우리 생리에 맞는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뉴욕테러 사건이후 그놈의 짐 검사, 몸 검사를 얼마나 여러 번 하는지... 허벅지, 아롱사태까지 다 만지며 검사를 해대는데다가 공항에서 죽치고 앉아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비행기라면 신물이 날 지경입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우리를 무사히 이스탄불에 안착 시켜준 비행기와 그 승무원들에게 아내와 나는 소리없는 박수를 치는 시늉을 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버스를 타고 공항에서 이스탄불 시내로 가는 길은 에게해와 연결된 마르마라 해변에 접해 있습니다. 석양노을이 곱게 물들기 시작하고 있는 마르마라 해변은 지금까지 비행기에서 지쳐있던 이 나그네의 피로를 녹여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멀리 석양노을 속에 술탄마흐메트 모스크와 아야 소피아 성당의 모스크가 바다위로 그림처럼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몽고족의 후예인 내가 서로 헤어진지 1350년이 지나서 피를 나눈 동족을 찾아 아시아의 동쪽끝에서 서쪽 끝에 있는 터키로 오는 것을 환영이라도 하듯 이스탄불의 첫인상은 무척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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