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 벤치에 병든 낙타가 누워 있다 드넓은 사막을 잃어버린 육봉은 알코올에 절어, 햇볕에 퉁퉁 불어 있다 사막으로 돌아가자는 어린 낙타의 성화에 초점을 잃은 눈동자 겨울 언 땅을 딛고 간신히 일어선다
굽어진 길, 물주머니 하나로 이어온 가계는 이제 약한 바람에도 고꾸라진다 알코올에 포박되어 길 밖으로 끌려갈 때마다 칭얼거리는 피붙이는 남자의 마지막 채찍이었다
소아암에 걸린 딸애, 자기 몸에 반점이 하나 둘 늘어가는 것도 모르고 나무등걸같이 말라붙어 있는 아비의 눈만 띄운다 텅 빈 정신의 한 가운데서 한 점 낙엽으로 굴러다니는 사내 한 때 커다란 혹이었다가 이제 다 말라들어 퍼석해진 등을 일으켜 무료급식소를 향해 한 발 한 발 걸음마를 한다 딸아이를 목발 삼아 짚고
구절초
공사판, 자갈에 깨지고 흙에 뒹군 하루를 등에 진, 사내가 방에 들어선다 장화에 곤죽이 되어 들러붙은 허기진 저녁도 그를 따라 들어선다 사내의 방에서 구절초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나날의 노동에 겨워 자신의 몸이 늪이 되는 밤, 붉은 꽃망울 터 올린 가로등이 탈진한 육신의 향기 진동하는 방에 무단 침입해 있다 저녁 끼니도 챙기지 못하고 잠에 떨어진 사내 장마 곰팡이들은 잠 속까지 번져든다 구절초 푸른 혈관을 쥐어 잡고,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일터에서 하얗게 버티던 시간들이 그가 잠든 동안 삐걱거리는 그의 식탁 위에 고봉밥으로 올라와 있다 그의 몸이 맑게 개여 다시 깰 때를 기다려 구절초 수북하게 차려져 있다
물렁가시붉은새우*
포구 어시장 막 건져진 새우들이 엉겨 있다 활기찬 몸놀림
피딱지처럼 붉은 색을 띤 물렁가시 붉은 새우 검은 색깔의 보호색으로 위장하여 물고기의 기생충을 잡아먹던 지난 날 왕성한 젊음을 얼마나 진지하게 살았던가 쉬 등이 굽고 쪼그라들어 유약해진 심신이 더 이상 위장할 힘이 없어 정지된 색깔, 붉은 껍질로 버둥댄다
권태로운 시간의 낚싯줄에 끌려 나온 생 어시장 옆 노인복지회관 마당에 놓여 있다 땡글땡글하던 눈매는 흐무러지고 정정했던 봄의 그리움도 백발이 되었다
사방분간 못해 더는 바다로 나설 수 없는 몸 정오의 끓는 태양아래 미동 없이 앉아 남몰래 속까지 바싹 구워지고 있다
*물렁가시붉은새우: 몸길이 약 15 cm로, 붉은색을 띠며 더듬이 비늘은 좁고 길다. 한국(동해) ·사할린 ·일본 등에 분포.
재생의 꿈
굴삭기 날카로운 이빨, 꽃밭을 파헤치고 집 한 채 단번에 삼킨 식욕 다시는 꽃 피지 못하도록 모든 밑둥치를 자른다 셋방 살던 거미들 황급히 도망간다
밀물처럼 거세게 밀고 들어오는 모래와 시멘트 자궁을 단단히 틀어막거나 아기집을 들어내며 통증 없는 불멸의 시간을 쌓고 있다
풀의 벌판에 우뚝 일어서는 도시, 훈훈하던 달빛마저 밀어내며 짙은 멍자국의 그늘을 만들어 낸다
꿈을 놓지 않으려는 왕거미 반쯤 헐린 건물 하초에 매달려 있다 파묻힌 삶 바람결에 훌훌 털며 진액을 허공에 뿌려대고 있다 벽에 갇혀 말라가는 본성이 다시 호흡하도록 혼신의 힘 쏟아 내일을 짓는 왕거미들 땅의 생식을 기억시켜줄 끝없는 저 발버둥
복날
영덕 대둔산 자락, 오십천 상류 용추폭포에서 갓 돌아나온 물이 은어떼처럼 팔딱거리며 흘렀다 신안리 입구, 교각 아래 짐승의 울음소리도 잠시 온몸 그을리며 개는 등신불이 되었다 짐승의 털을 태우며 사내는 왜 엄숙한 표정을 지었을까
배고프면 제 살을 뜯어먹는 짐승처럼 오늘 하루도 뜯어 먹었다
죽은 개 속에 들어 있는 벌레를 먹고 벌레 속에 들어 있는 풀을 먹고 풀 속에 들어 있는 무생물을 먹고 내가 나를 먹고
시간의 살점을 시간에게 뜯기면서 악착같이 살아 있는 것들의 살을 수많은 입들이 서로 먹고 먹힌다 붉은 피 흥건한 하수구 입구 태양이 질려 종일 토해낸 하오의 붉은 피,
허기의 올가미에 묶인 모든 개들에게 고함, 너희의 복된 살점을 단속하라
어머니의 새벽
죽천* 바닷가 어머니의 새벽은 싱싱하다 밤새 파도가 토해다 놓은 미역, 곤피 여명에 건져 올리는 손, 울컥대는 갯내음을 달게 마시며 탱탱해지는 어머니의 가슴은 새벽안개에 젖은 꿈으로 붉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깡마른 몸이 지게차처럼 함지박을 옮긴다
나날을 조이는 삶의 그물을 날렵하게 빠져 나오는 새벽마다 어머니 발걸음은 생선 지느러미보다 활기차다 한 꾸러미 옭아매던 근심들이 달아난다 짠내와 비린내가 어머니의 속 깊은 물결에 밀려난다
아직 기울지 않고 조각달 희미하게 떠 있는 읍내로 나가는 길목 해산물 냄새 퍼트리며
소리 없이 밝은 아침이 되시는 어머니
*죽천: 포항시 북구 흥해읍 죽천리
외줄타기광대
아버지 걸어간다 광장 한 모퉁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던 광대처럼 천천히 땅을 밟는다 공사판에서 다쳐 성치 못한 다리로 세상의 안개를 헤치며 비틀대는 몸 균형을 잡고 세 길 아래 바닥에 곤두박질치지 않으려 두 눈 부릅뜨고 안간힘으로 걸어온 길 구경꾼도 없는 외로운 외줄타기 인생은 허공에 이는 칼바람 맞으며 공사장을 누비던 위태로운 굴곡의 노동을 한 푼을 얻기 위해 얼마나 인내했던가 다리에 힘이 빠지고 눈은 침침해져 외줄타기 걸음이 불안하다 언제라도 바닥으로 추락하여 깊은 숲에 깔리는 어둠의 일부가 되어버릴
그 외줄타기 걸음의 끝에 지금은 폭설이 내리고 있다
2004[포항문학]특집시 해설
두 개의 시선
이문재(시인)
시선은 거리(距離)를 전제한다. 시선은 거리의 아들이다. 보는 눈과 보이는 대상 사이에는 반드시 거리가 있다. 너무 가까우면 볼 수 없다. 너무 멀어도 보이지 않는다. 가시 거리 안에서만 볼 수 있다. 시인의 눈과, 시인의 눈이 바라보는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가로지르는 것, 그것이 시인/시의 시선이다. 하지만 이 시선, 즉 시인의 눈이 내쏘는 눈빛은 일방적이 아니다. 시선의 에너지는 시인으로부터 발사되기도 하지만, 시인의 망막은 대상이 뿜어내는 이미지/메시지를 받아들이기도 한다. 보는 것(시점)과 보이는 것(대상)은 쌍방향이어서 무한 변주를 이룬다. 문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삼차원의 세계는 사물의 전모를 한꺼번에 보여주지 않는다. 사과 한 개, 책상 하나, 나무 한 그루의 전모를 우리는 볼 수가 없다. 사물은 자신의 한 측면만을 보여준다. 우리는 동시에 두 개 이상의 시점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선은 숙명적으로 피상적이다. 전방위적 시점은 시간의 산물이다. 사과 한 개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 우리는 전후좌우, 상하로 움직여야 한다. 시간과 공간의 이동을 통해, 다시말해 시점의 변화를 통해 사과의 외부 형태를 점차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사물에 대한 인지는 퍼즐 맞추기이다. 그러니 우리가 사과에 대해 안다고 말하는 것은, 사과에 대한 인지 경험이 누적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것은 모를 수밖에 없다. 시가 늘 기대고 있는, 그리하여 시의 특권으로 자리잡은 직관이나 통찰도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직관과 경험의 조화는, 이미지와 메시지의 조화처럼 모든 좋은 시가 만족시켜야 할 조건이자, 성취해야 할 경지이다. 여기 두 개의 시선이 있다. 외부를 바라보는 시선과 내부를 들여다보는 시선. 권순자의 시편들은 주로 관찰자의 시선이고, 이종암의 시편들은 자기 내면을 응시하는 고백의 시선이다. 전자의 관찰자의 언어는 차갑다. 외부 세계와 거리를 두고 대상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반면 후자인 고백의 언어는 따뜻하다. 자기 내면과 대화하기 때문이다.
먼저 권순자의 시를 함께 읽어보자. 권순자의 시에서 드러나는 시선은 분명하게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 바탕에는 연민이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그 연민의 시학은 시를 이끌어가는 화자가 아니라 시선이 포착한 대상 그 자체에서 발생한다. 시인은 모든 것을 볼 수 없다. 모든 것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봐야 할 이유도 없다. 시인은 볼 수 있는 것, 보고 싶은 것을 볼 따름이다. 시점과 시선은 엄연한 선택이어서, 시선 그 자체, 시적 대상 그 자체가 이미 의미를 내장하고 있다. 권순자의 시는 산업 자본주의의 그늘에 집중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그늘에서 무너진, 아니 무너져서 그 그늘로 추방된 존재들을 주목한다. 대부분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그리하여 현재도 없는 삶들이다. 소아암에 걸린 딸과 나무 등걸같이 마른 아비(「공원의 낙타」), 허기진 몸을 못이겨 자기 방에서 쓰러지는 노동자(「구절초」),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없어진 새우(「물렁가시붉은새우」), 굴삭기에 쓰러지는 왕거미들(「재생의 꿈」), 한여름날 불태워지는 개들(「복날」), 성치 못한 다리로 공사판에서 외줄을 타는 아버지(「외줄타기 광대」). 새벽이면 ‘소리 없이 밝은 아침이 되시는’ 어머니(「어머니의 새벽」)를 제외하면, 시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주류 세계로부터 버림받은 하찮은 삶들이다. 권순자의 시는 ‘시는 언제나 약자의 편이다’라는 전통적인 시인의 자의식에 충실하다. 일찍이 ‘권력에는 정의가 없다’라고 간파한 것은 아나키즘이지만, 진정한 시인들 또한 벌써부터 시는 강자의 반대편이라고 주창해 왔다. 시가 강자, 즉 권력에 동조하는 한 시는 시이기가 어렵다. 시는 ‘아니다’라고 말할 때 시이다. 특히 산업 자본주의 사회의 역기능을 말할 때 더욱 그렇다. 권순자의 시선에 포착된 한 부녀를 보자. 「공원의 낙타」에서 아버지는 딸은 병든 낙타와 어린 낙타로 의인화해 있다. 아버지는 알코올에 쩔어 있고, 딸은 소아암에 걸려 있다. 절망의 끝이다. ‘물주머니 하나로 이어온 가계’란 다시 말해 제 몸뚱아리 하나로 살아왔다는 의미이다. 제 살을 파먹으며 겨우 삶이라고 하기 어려운 삶을 영위해온 것이다. 딸아이라도 없었다면, 아버지는 이미 생을 포기했을 터. 알코올에 찌든 아버지는 딸아이를 ‘목발 삼아 짚고’ 무료급식소를 향해 발을 옮긴다. <공원의 낙타>에는 시인의 가치 평가가 거의 들어가 있지 않다. 냉정하게 피사체를 따라가는 다큐멘터리의 시선이다. 공간이 공터 벤치→굽어진 길→무료급식소로 이어지면서 부녀의 가계가 제시된다. 이 시가 전해주는 사실은 단 한 가지. 알콜 중독에 걸려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아버지이지만, 병든 딸아이에게 밥 한 끼를 먹이기 위해 무료급식소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공원에서 무료급식소로 이어지는 한 겨울 도시의 후미진 풍경은 사막이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도 없는 사막. 「구절초」에 등장하는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공사판에서 돌아오는 저녁, 노동자를 따라오는 것은 피곤과 허기가 전부다. 밤마다 몸이 늪이 되는 노동자에게 노동은 더 이상 신성하지 않다. 노동은 삶의 목표도 아니고 수단도 아니다. 노동을 통해 꿈을 이룰 수 없는 세계는 이미 지옥이다. 그런데 「공원의 낙타」와 달리, 노동자의 단칸방에는 구절초가 꽃망울을 터트린다. 저녁 끼니도 챙기지 못하고 쓰러졌지만, 장마철에 피어난 곰팡이들이 잠 속까지 침입하지만, 구절초를 놓지 않고 있다. 「공원의 낙타」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 발 한발 걸음마를 한다’는 대목이 「구절초」에 와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지금-여기는 비록 내일이 보이지 않는 삶의 극지이지만 꿈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원의 낙타」에 나오는 병든 아버지에게 피붙이(딸아이)가 있다면, 「구절초」의 노동자에게는 구절초가 있다.
구절초 푸른 혈관을 쥐어 잡고,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려고 몸부림친다 일터에서 하얗게 버티던 시간들이 그가 잠든 동안 삐걱거리는 그의 식탁 위에 고봉밥으로 올라와 있다 -「구절초」 부분
그러나 노동자의 꿈은 현실과 맞서게 하는 꿈이 아니다. 자신의 삶의 전부를 바쳐 일구어내고자 하는 현실 속의 꿈이 아니다. 실패한 자의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이 꿈은 「물렁가시붉은새우」에서 또 다른 비극으로 나타난다. 어시장 옆에서 햇빛에 말려지고 있는 새우에게 보호색이며 ‘왕성한 젊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뭍으로 끌려나와 죽어가는 새우에게 젊음, 즉 기억은 고문일 따름이다. 낮의 세계, 즉 힘이 지배하는 강자의 사회에서 밀려난 변방의 삶은 아버지로 은유된다. 「공원의 낙타」에 나오는 아버지나 「구절초」의 노동자 「물렁가시붉은새우」의 새우, 「복날」에 나오는 ‘내가 나를 먹는’ 사내는 모두 「외줄타기광대」에 나오는 외로운 아버지, 상처받은 아버지, 미래가 없는 아버지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외줄타기 광대, 즉 아버지는 삶의 끝자락에 와 있다. 다리를 다친 데다, 구경꾼도 없으며, 눈까지 침침하다. 치명적이다. 그런데 이 차가운 시선은 「복날」에서 전환을 맞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죽은 개 속에 들어 있는 벌레를 먹고 벌레 속에 들어 있는 풀을 먹고 풀 속에 들어 있는 무생물을 먹고 내가 나를 먹고 -「복날」 부분
복날, 다리 밑에서 개를 잡아먹는 사내들을 지켜보다가 문득 그 사내들이 먹고 있는 음식의 실체를 파악한다. 개고기를 먹지만 결국은 ‘내가 나를 먹’는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새로운 시선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생명은, 심지어 무생물까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깊고 넓은 시야가 드러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생태학적인(화엄적이라고 말해도 무방한) 인식이 다른 시편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날」에 견주어, 다른 6편의 시들은 평면적인 관찰자 시점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물론 「어머니의 새벽」이 두드러질 수 있다. 다른 6편의 시들과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시들이 더 이상 삶의 중심으로 진입할 수 없는, 무너진 남성들을 조명하고 있다면 「어머니의 새벽」에 나오는 어머니는 전혀 다른 존재다. ‘어머니의 새벽은 싱싱하다’. 어머니는 깡말라 있지만 ‘지게차처럼’ 활력이 넘친다. 갯내음을 마시면 가슴이 ‘탱탱해’진다. 매일 ‘삶의 그물’이 어머니를 조여오지만 어머니는 새벽마다 날렵하게 그 그물에서 빠져나온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소리 없이 밝은 아침이 되’신다. 이쯤 되면 어머니는 신화적 인물이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남성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토록 큰 차이를 보이는 까닭을 필자는 쉽게 읽어낼 수 없다. 「공원의 낙타」의 걸음마, 「구절초」의 구절초, 「재생의 꿈」의 ‘땅의 생식을 기억시켜줄 끝없는 저 발버둥’, 「외줄타기 광대」의 폭설은 연민의 시학을 완성시켜주는 재생의 모티프들이다. 차가운 관찰자 시점을 연민의 시선이라고 강조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왜 그토록 큰 낙차를 보이는 것일까.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시선과 어머니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은 좋은 대비를 이룰지언정, ‘그렇다면 왜 어머니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지나치게 밝은 이미지는 다른 6편의 시와 함께 읽을 때 비약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시점과 상상력이 자칫 기계적인 것은 아닌가라는 혐의를 지우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이종암의 시들에서 시적 자아의 시선은 내부를 향한다. 권순자의 시와 같은 활달한 동선(動線)은 보이지 않는다. 시각적 움직임이 작은 대신 ‘소리’가 자주 들린다. 당연하다. 시적 대상이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 내면의 소리와 대화하는 그의 시는 당연하게도 반성과 각오로 이어진다.
싱거운 소리 다 걸러내고 그대 가슴 파고드는 소리, 그런 소리를 언제 불러내어 그 자리 하나 만들까. -「지우다에서 얻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 받아쓰기를 가르치다가 틀린 글자를 지우는 행위에서 문득 마흔 살 생애를 돌아보는 시적 자아는 ‘지우지는 않고 무엇 하나 자꾸 보태기만 해 온 삶’을 돌아본다. 반성이다. ‘심심한’과 ‘심오한’의 차이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 삶에 어떤 변화를 주고 싶다는 의지의 발로이다. 반성은 곧장 각오로 이어진다. ‘아직 서툴지만 내 소리가 제대로 나올 때까지 나는 떠돌며 궁리에 궁리를 해야 한다’. 시인의 시작 의도를 유추하는 여러 방법 중에 하나가 시가 동원하고 있는 동사에 유념하는 것이다. 이종암의 시에는 ‘파고들다’ ‘들어가다’ ‘들어서다’ ‘내던지다’ ‘다시 태어나다’ ‘(문을) 열다’ 와 같은 동사들이 자주 출현한다. 이 동사들을 지휘하는 주어는 자신의 전 존재이다. 파고들고, 들어서고, 내던지며 시적 자아는 마침내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다. 다시 태어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시적 자아는 흔들린다. 사랑 앞에서 흔들리고,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흔들린다. 시적 자아는 타인들이 보기에 그네를 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안부」). 이 흔들림은 ‘젖은 눈’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젖은 눈’은 막막함의 은유이다. 「안부」에서 시적 자아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사랑이나 낙엽에 눈을 맞추지 못한다. 눈이 젖어 있어 ‘오지 않는 그대의 안부’를 식별하기가 어렵다. 젖은 눈은 시력이 좋지 않아서, 젖은 눈의 행각은 미로에 빠진다. 사랑도 ‘어쩌다’가 빠져든다. ‘어쩌다 네 집에 들어서고’ 만 시적 자아는 ‘하루살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우연한 사랑이므로, 내일을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하루치의 사랑이었지만 그 사랑도 그물이어서, ‘나’는 그물에 갇힌다. 지우고 싶다는 시적 자아의 의지는, 지나온 길들이 하루치의 사랑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나온 사랑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지워지지 않는 사랑은 미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미궁」). 미궁은 밖에 있지 않다. 자기 안에 있다. 미궁에서 빠져나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미궁을 인정하고 미궁의 벽을 문으로 만들어야 한다. 시인은 「신태하」에서 ‘기억의 빗장’을 열고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몸의 문을 연다’. 자기 정체성과 마주치는 극명한 순간, 선명한 장면이다. 열여섯 살 때 처음 들었던 소리는 ‘늙은 음악선생’이 ‘젖은 눈빛’으로 연주하던 바로 그 바이올린 연주였다. 시적 자아는 열여섯 살 시절로 돌아가 자기 ‘몸 속에 들어온 소리’를 만나고 있다.
몸에 남은 그 소리와 눈빛 나도 모르게 오래 익고 익어서 언어로 노래로 지어 세상에 내보내네 강을 건너가겠네 -「신태하」 부분
「지우다에서 얻다」에서 갈구했던 ‘그대 가슴 파고드는 소리’가 「신태하」에서 강을 건너가는 ‘언어와 노래’로 성장해 있다. 미궁에서 빠져 나오는 길은 ‘훼손되지 않은 기억의 영토’를 호출하는 것이다. 기억은 에너지이다. 기억의 영토가 없다면, 삶은 이어지지 않는다. 기억은 과거이지만, 기억하기는 늘 현재이다. 과거로 돌아가되 기어코 미래로 나아가기-이것이 기억하기의 본질이다. 「신태하」에서 되찾은 기억의 영토는 「화살표를 끌어안다」에서 구체적 공간으로 재확인된다. 여름이면 원적이 있는 마을을 찾아 어린 시절 주먹을 불끈 쥐게 하던 꿈을 떠올린다. 원양에서 회귀하는 은어떼가 곧 시적 자아였다. 십대 초반에 원양을 향해 출발한 시인은 불혹의 나이에 모천을 꿈꾼다. ‘산다는 것은 다만 한정 없는 그리움인 것을’. 은어떼, 즉 화살표로 하여금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원동력이 그리움이라는 것이다. 소리 지우기→소리를 통한 기억의 영토 찾기→원적 찾기로 이어지는 이종암 시의 여정은 「노거수」에 이르러 탈출구를 찾는다. 다름 아닌 문(門)이다. 미궁의 벽이 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종암 시는 반복을 거듭한다. 이종암의 ‘젖은 눈’의 시는 지우기와 문열기 사이에서 방황한다. ‘어설프게 쌓아올린 언어를 지워내며’ 아직 길 위에 있기 때문이다. 반성과 각오는 삶의 국면을 전환시키는 강력한 계기이다. 독자로 하여금 자기를 반성하게 하고 각오를 다지게 하는 시만큼 힘있는 시는 없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시를 쓸 때 반성과 각오의 언어만큼 손쉬운 것도 없다. 반성과 각오, 특히 반복되는 반성과 각오는 전망의 에너지로 이어지지 못한다. 필자의 몇몇 시들이 그렇지만, 반성과 각오를 되풀이하는 시는 미성년의 시일 때가 많다. 지우기와 문열기는, 지울 때마다, 문을 여는 그때마다 매번 새로워야 한다.
디딤돌 권 순 자
횡계리 산간마을 노파가 황태를 말린다 덕장에서 건조시켜 온 수십 년의 세월 바람결에 실려 온 짠 물기에 몸속이 젖었다
맑은 물에 씻어 허욕의 피, 삶의 찌꺼기를 뺀 속이 빈 명태 통통한 몸이 세월의 한기에 얼었다가 풀리는 나날 속살, 속마음을 건조시키는 바람이 분다 젊음에 펄럭이던 몸 짠 내에 젖어 뜬 눈으로 추억을 말린다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아스라한 심해의 기억이 얼어 들어간 살 속을 파고든다 서서히 말라가는 지느러미
휘청이는 노인의 디딤돌이 되어 아들이 노파 곁에서 황태 비늘을 턴다 눈가루처럼 흩어지며 빛나는 노인의 살비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