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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 매일미사 스크랩 [대한문 매일미사_0531] 우리 교회에게 이웃은 누구인가? 사랑은 무엇인가?
예수사랑 추천 0 조회 34 13.06.03 11: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대한문 매일 미사 집전순서

 

 6/1(토 성 바오로      2(일)  예수회  

 3일(월 인천교구     4(화 인천교구  

 5(수)  수원교구      6일(목 전주교구    7일(금 예수회

 

  2013_05_31_금

 

  +++ 함께 해 주신 사제

 

  주례 이영우 신부(서울교구 해방촌성당)

  강론 : 박동호 신부(서울교구 신정동성당)

 

  서울교구 : 박동호, 이강서, 나승구, 임용환, 이영우 신부

  인천교구 김동건 신부

  예수회 : 김정욱, 최영민, 박종인 신부

  바오로 : 황인수 신부

 

  +++ 함께 해 주신 수도회

  

  성가소비녀회

  인보성체수도회

  마리아니스트 수도회

  예수회

 

 

 

 

                우리 교회에게 이웃은 누구인가?

          그리고 교회에게 사랑은 무엇인가?

 

                                          강론

박동호 신부(서울교구 신정동성당)

  

I.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

북한의 핵실험, 한미 합동군사훈련,

미국의 항공모함과 그 선단의 출현,

첨단 고가 무기 구입 계획

그리고 제주 강정의 해군기지 건설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미사를 봉헌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시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하는 기도문이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라청하는데 우리의 죄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쌍용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

용산 참사로 돌아가신 분들과 그 가족들,

한진, 현대, 재능교육, 콜트콜텍, 수많은 곳에서 품위 있는 삶은커녕

생존 그 자체를 위해, 그리고 노동의 존엄함과 기본적인 권리 곧 인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분들,

삼척, 고리, 울진 같은 곳에 있는 핵발전소 덕분에 삶의 터전을 내놓으라는 정부와 기업,

그리고 도시인들의 요구에 고분고분 응하지 않는 많은 분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미사를 시작하면서,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하며 바친

기도문이 또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우리가 고백해야 할 생각과 말과 행위로 범한 죄는 무엇이며,

소홀히 한 의무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오늘은 군비증강과 전쟁으로, 그러니까 무고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대가로

탐욕을 채우려는 군산복합체의 투자자나 패권주의 국가의 정부와 그 관료들,

그리고 그에 기생하여 빵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려는

일부 부역국가의 지도자들의 부도덕함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은 자본의 탐욕과 그 시장에의 충실한 봉사자로 전락한

정부와 일부 관료들의 부도덕함과 무능함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리 폭력과 탐욕이 극성을 부려도,

또 어둠이 빛을 이기려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평화와 정의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는 선의의 많은 지도자들과 시민이 있기 때문입니다.

 

 

II.

 

오늘은 우리 교회, 특히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을 성찰하고 싶습니다.

 

1) 먼저 우리 교회는 예수님께서 남겨놓고 가신 그리스도의 평화

잘 간직하며 드러내고 있는지 성찰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인류이 빛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 모인 이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며,

모든 사람을 교회의 얼굴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어 주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교회헌장, 1)

 

교회의 얼굴에서 빛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평화가 빛나는 것일까?

특히 남북의 분단과 무력증강과 대립,

또 이를 빌미로 동북아에서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남미일과 북중러 사이의 군사 블럭화,

곧 신냉전으로 치달을지도 모를 이 때,

한국 천주교회, 우리 교회의 얼굴에서는 무엇이 빛날까?

우리 교회가 평화의 사도로서의 임무,

곧 복음 선포의 사명을 얼마나 수행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남북의 긴장완화를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남북 사이의 군비축소를 위해,

더 나아가 평화의 실현을 휘해,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정전을 평화협정으로,

대립대신에 대화와 협력을 위해,

궁극적으로는 평화통일과 민족의 일치를 위해

이 땅의 우리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성찰 또 성찰하게 됩니다.

 

 

 

2) 둘째, 우리 교회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예수님이 계명을 잊지 않고,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는지 성찰합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이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는 인류와 인류 역사에 긴밀하게 결합하여 있음을 체험한다.”

(사목헌장, 1)

 

그러면 우리 교회에게 이웃은 누구인가?

 

나와 욕망을 공유하는 사람들, 성당을 꼭박꼬박 다니는 분들,

그들이 우리 교회의 이웃인가?

막강한 공권력과 탐욕스러운 자본 앞에 속절없이 내동댕이쳐진 강정 마을의 주민들,

밀양의 어르신들, 수많은 노동자들, 이들은 교회의 이웃인가? 아니면 그냥 남인가?

성당이라는 건물 안에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거룩한 경신례를 함께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은 교회의 이웃이 아니란 말인가?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는데,

우리 교회, 우리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는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그리고 교회에게 사랑은 무엇인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만 교회의 사랑인가?

인간, 이웃, 현대인,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에게 실천할 사랑은 무엇일까?

우리 교회는 사랑을

단순히 타인을 위한 행동의 주관적 측면에 한정”(사회교리 204)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의 처지에 동정심을 갖고

자선을 베푸는 정도로 우리 교회는 이웃 사랑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도 지극히 제한적이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 가운데 게으르고 뻔뻔한 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이들은 도와주지 말아야 한다고 하기까지 합니다.

무작정 퍼주기만 하면,

이는 오히려 그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의 버릇만 나쁘게 들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 보편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한국천주교회는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여러 측면에서, 사랑받아야 할 이웃은 사회 안에있으며,

따라서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하고, 궁핍하고 곤궁한 이웃을 도와주는 것은

개인 간의 관계라는 단순한 차원과는 다른 무엇을 의미할 수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 사회의 중개(사법, 제도, 재원)를 활용해

이웃의 삶을 개선하고 이웃의 가난을 초래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 이웃이 가난에 빠지지 않도록 사회를 구성하고 조직하고자 애쓰는 사랑의 행위

마찬가지로 반드시 필요하다.” 하고 말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글에서 사회의 중개는 무엇이며,

자기 이웃이 가난에 빠지지 않도록 사회를 구성하고 조직하는 것은 무엇인가?

 

 

III.

 

그런데, 우리 교회, 한국천주교회는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도,

평화의 실현에 있어서도, 참 인색한 것처럼 보입니다.

 

평화에 대해서는 세상일이라고 멀리하고,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는 타인에 대한 주관적 행동에 머물 뿐,

사회적 차원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 역시 세상일이라고 외면합니다.

 

그런데, 만일 이 같은 태도가, 저의 개인적인 잘못된 성찰이 아니라,

실재 우리 교회의 모습이라면,

우리 교회는 교회의 본질에서도 벗어나고, 사명에서도 일탈한 것입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첫째, 교회와 세상을 철저하게 분리하여 두 이질적 개체로 보는 태도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는 천상의 그 무엇을 찾고, 세상은 세상사를 꾸려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교회와 그리스도의 제자를 두 이질적 개체로 보는 태도 때문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만 봅니다.

당연히 머리는 핵심이고, 몸은 머리의 지시를 따르는 수동적 실체일 뿐입니다.

물론 머리는 예수님이지만 현실에서는 성직자들이며, 몸은 교우들입니다.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제자로 보지 않습니다.

 

셋째, 교회의 사명을 교회내의 문제로만 국한할 뿐,

교회 밖 세상의 문제에 대한 교회의 대화와 협력을 그 사명으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고, 세상과 대화 협력하는 일,

그 일은 문헌에만 있는 그럴듯한 구절일 뿐입니다.

 

넷째,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을,

그들을 세례를 받게 해서 교회 울타리 안으로 데려오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그들 안에, 세상 안에 복음적 가치,

곧 평화와 사랑, 정의와 진리를 열매 맺는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언젠가 불통이 화두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와 세상 사이의 불통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당연한 정도가가 아니라, 그 불통이 순수함이라고 믿기까지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불통은 교회 내에서도 형성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교회 내의 문제를 관심의 전부로 삼으며, 교회 밖의 문제에 무관심합니다.

당연히 교회 밖의 문제에 관심을 둔

교회 내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의 불통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아멘.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청와대 옆 청운동동사무소 노숙농성 모습.

                                                        (5월 31일 0시30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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