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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서원 상서초-관청에 진정서로 올린 글이다. 안타깝게도 경매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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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경상북도 봉화읍 문단리(옛 순흥군) ❏배향인물: 김 담(金 淡) ❏창건연도: 1618년 |
단계서원은 세종조의 집현전 학사로 조선조 천문(天文) 연구에 뛰어난 업적을 남김 문절공(文節公) 김 담(金 淡) 한 분만을 모신 서원이다.
단계서원 건립의 연원은 1558년 이산서원(伊山書院, 영주소재, 퇴계 이 황의 첫 사액서원) 건립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상략) 가정 무오년(명종 19, 1558년)에 군수 안상(安瑺)이 영천(榮川, 영주) 수령으로 와서 학사(學舍)인 이산서원(伊山書院)를 건립하고 향사할 선현을 의논하고자 퇴계 선생에게 가서 물으니 퇴계께서 대답하시길 “본군(本郡)에 김문절공(金文節公, 김담)이 있지 않은가” 하셨으니 이것이 본원을 설치한 연유입니다. (하략)(단계서원 유림들이 예조에 올린 글)
단계서원의 건립은 퇴계 이황의 “본군(本郡)에 김문절공(金文節公)이 있지 않은가”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어떤 연유에 의해서인지 퇴계 선생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산서원에 문절공이 배향되지 못하고 학사로만 사용되다가 1573년 퇴계가 배향되었고 그 후 1615년 구성(龜城)의 삼판서고택 옆에 김 담을 배향한 향현사(鄕賢祠)를 건립하여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이것이 문절공을 모신 영천(榮川, 지금 영주)의 첫 사당이었다. 그 후 소고 박승임과 백암 김륵이 배향되고 이어서 망와 김영조가 배향된 귀강서원이 되었다.
이 후 1618년에 귀강서원과 별도로 옛 순흥 문단리에 문계서당(文溪書堂)을 세우고 이어서 단계서원으로 승격되면서 김 담 한 위 만을 배향한 서원이 건립되었다. 1800년 경 증축 중수하고 사당을 존도사(尊道祀), 강당을 명교당(明敎堂), 삼문은 지도문(志道門), 누각은 육영루(育英樓), 동,서재와 서고, 전사청, 주사 등 10동의 품격을 갖춘 건물이 기록되어 있었으나 1868년 훼철령에 따라 없어지고 지금은 서원터와 기록물만 남아있다.
입원록에는 총 2756명의 명단이 실려 있으며 그 중 문과 급제자가 40명, 사마급제자가 102명이 배출 되었다. 옛 순흥에서는 소수서원과 함께 단계서원이 대표적인 서원으로 이름이 높았다.
봉안문은 하당 권두인(荷塘 權斗寅), 상량문은 옥천 조덕린(玉川 趙德鄰), 상향문은 창설재 권두경(蒼雪齋 權斗經)이 지었고 중수시 봉안문은 눌은 이광정(訥隱 李光庭), 상량문은 강좌 권 만(江左 權 萬), 묘우 중건 상량문은 가은 성언근(家隱 成彦根)이 지었다. 현판의 글씨는 당대의 명필 옥동 이 서(玉洞 李 漵)가 썻다.
1)김담(金淡 1416~1464)
김담(金淡, 1416년 ~ 1464년 7월 10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 유학자, 천문학자이다. 세종, 문종, 세조 때의 문신이자 천문학자, 지리학자이자 월력 연구가이다. 이순지 등과 함께 조선 전기의 월력과 천문을 연구하였다.
1435년(세종 17) 과거에 급제한 뒤 홍문관정자, 집현전 정자가 되었으며 1433년 이순지와 함께 조선의 달력인 칠정산내편을 편찬하였다. 이후 중시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이순지와 함께 당대에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로서, 세종대의 천문ㆍ역법사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장영실, 이순지, 이위 등과 함께 간의규표, 앙부일철, 자격누등의 천문 관측 기구의 개발에도 참여하였다. 박팽년, 하위지 등과 친분이 있었으며 이들과 담론하며 시류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가 문제시되기도 하였다. 세조 반정 이후 반정에 동조하지는 않았으나 관직에 있게 되었다. 이후 그는 외직을 자청하여 안동부사, 예조 참의, 경주부윤, 충주목사 등을 거쳐 이조판서로 승진했고 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본관은 예안으로, 자는 거원(巨源), 호는 무송헌(撫松軒)이다. 조부 김로(金輅)는 고려때 좌우위보승랑장으로 고려 절신이고, 아버지는 영유현령을 지낸 김소량(金小良)이다. 어머니는 평해 황씨(平海 黃氏)로 고려 때 공조판서를 지낸 황유정의 딸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출신.
생애 초반
영유현령으로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된 김소량의 3형제의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 김증(金曾)에 이어 그가 현달함으로서 집안 가세를 일으켰다. 후일 형 김증은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등과 함께 홍무정운을 번역하고 역대병요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독서를 좋아했다 한다.
집현전학사로 있으면서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했고, 특히 천문과 관측 분야에 뛰어나 간의대(簡儀臺)로 발령받아 이후 간의대에서 활약, 1433년(세종 15년)에는 17세에 세종의 영을 받아 이순지와 함께 달력 연구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는 이순지와 함께 해와 달의 기울음을 연구한 뒤 원나라의 접시력, 명나라의 대통력을 종합하여 조선편 달력을 칠정산내편을 간행하였다. 이후 세종대왕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어 이순지, 이위, 장영실 등과 함께 간의규표, 앙부일철, 자격누등의 천문 관측 기구를 개발하였다. 김담은 천문·지리·풍수등에 두루 박식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성삼문, 신숙주, 장영실, 정인지 등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었다.
그뒤 다시 중시(重試)에 제 2등으로 합격하였다.[1]
김담은 나이 25세에 전료(殿僚)와 더불어 국어와 음의(音義)를 보정해 올렸다. 28세 때에는 봉상시주부가 되었고, 이듬해 정인지, 이순지, 박윤장 등과 함께 경기도 안산에서 양전을 시행했다. 29세 때는 이조정랑이 되었고, 제언종사관이 되어 이순지와 더불어 언제공사(堰堤工事)에서 계산을 맡았다.
1434년(세종 16년) 이조정랑이 되고, 그해 제언종사관(堤堰從事官)이 되어 이순지와 더불어 언제공사(堰堤工事)에 참여하여 계산을 맡았다. 1437년 승문원부교리가 되었다. 승문원부교리로 있을 때, 명을 받아 토지를 측정 연구하여 토지분할 정책인 「전부구등지법(田賦九等之法)」을 찬정하였다. 이후 이조 정랑, 집현전 직제학 등을 지냈다.
1437년 집현전저작랑을 거쳐 1439 집현전박사가 되었다. 그해 이순지와 함께 《칠정산외편 七政算外篇》을 교정해서 올렸다. 그뒤 세종대왕의 명으로 정인지(鄭麟趾), 정흠지(鄭欽之), 정초(鄭招) 등과 함께 수시력법(授時曆法)과 대통력태양태음통궤(大統曆太陽太陰通軌) 등에 대하여 그 계산법을 밝히고, 약간의 수정을 가해서 《칠정산내편 七政算內篇》을 만들었는데, 《칠정산내편》과 《태양통궤》·《태음통궤》 등이 모두 이순지와 김담가 편찬한 편찬본의 규장각판 사본만이 현재 전한다.
1448년 서운관 부정이 되었고, 이듬해 친상을 당하였으나 계속 출사하여 역법과 측후의 일을 하였다. 1448년 전라도 관찰사, 1451년 사헌부장령이 되어 불사를 배척하는 상소를 여러번 올렸으며, 1452년(단종 즉위년)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고, 이어 상주목사, 충주목사를 지냈다.
그는 이순지와 더불어 당대에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로서 천문·역법 사업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정인지·정초·정흠지·이순지 등과 더불어 《칠정산내편》·《칠정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 七政算內篇丁卯年交食假令》·《칠정산외편》·《칠정산외편정묘년교식가령》·《대통력일통궤 大統曆日通軌》·《태양통궤 太陽通軌》·《태음통궤 太陰通軌》·《교식통궤 交食通軌》·《오성통궤 五星通軌》·《사여전도통궤 四餘纏度通軌》·《중수대명력 重修大明曆》·《경오원력 庚午元曆》·《선덕십년월오성릉범 宣德十年月五星陵犯》등 많은 천문역서를 교정·편찬하였다.
역법에 재능이 있어 당대의 천문학자인 이순지와 더불어 《칠정산내편》, 《칠정산외편》 등의 편찬에 관계하였으며, 이밖에 토지정리 사업과 《역대병요》 등의 서적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51년 사헌부장령이 되어 불사(佛事)를 배척하는 소를 여러 번 올렸고, 1452년(단종 즉위년)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그는 박팽년, 하위지 등과 교분이 있었는데 이들을 만나 시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이 후일 문제가 되어 비판거리가 되기도 했다.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이 1455년 단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자 중앙 벼슬을 피하여 자청하여 안동부사, 충주목사등의 외직으로 나갔다. 1456년 이후 안동부사로 나갔다가 예조 참의를 거쳐 1458년 경주부윤 등을 역임했다. 그의 사위 이수형은 단종 양위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는데, 그와 긴밀히 교류하였다. 이수형은 장인의 고향인 영주 도촌으로 낙향하였다.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있던 매월당 김시습과 자주 만나 동병상련의 정을 달래며 신라의 고적을 중수하는데 힘쓰기도 했다. 당시 세조가 이조판서의 벼슬을 내리며 두번씩이나 불렀으나 사양, 승정원일기에는 「사판삼신이일」로 기록되어 있다. 서거정과도 교유하였는데,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봉명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서거정 등이 오자 감사와 함께 그를 환대하며 고적 정비에 나서는 것으로 시름을 달랜다 하였다.
'자네가 내 마음을 먼저 알고 있네. 이미 통판과 의논하여 장차 객관을 중수(重修)하기로 하고, 재목을 축적하고 기와를 구우면서 시일을 기다리고 있을 뿐일세.'
그가 충주목사로 재직할 때 관내에 도적이 많아 고을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하였는데 그는 이 도적을 잘 다스렸으며, 장물의 증거를 발견하면 비록 그 양이 적더라도 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한다.
1463년 이조판서로 승진했다가 1464년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이르렀다. 문하에서는 이수형 등을 배출했는데, 이수형은 그의 제자이자 사위였다. 그해 7월 10일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48세였다.
세조 반정에 반발하여 낙향한 사위 이수형,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 학자이자 문인인 서거정 등과 교류하였고 사후 바로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2]
광해군 때에 영주 사림에서 향현사(鄕賢祠)와 문계서당(文溪書堂)에 제향되었으나 뒤에 구강서원(龜江書院)과 단계서원(丹溪書院)으로 이축, 개명되었다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때에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고, 현재 경상도 순흥의 단계서원과 영주의 구강서원, 영주 향현사(鄕賢祠) 등에 배향되었다.
세종 때 정인지·이순지·박윤창(朴允昌)과 더불어 경기도 안산(安山)에서 양전(量田)을 시행할 때도 공이 컸다[4]고 평가된다.
또한 이순지와 더불어 당대에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로서 세종대의 천문·역법 사업에 크게 공헌했다[4]는 시각도 있다.
사당(祠堂) : 존도사(尊道祠),
강당(講堂) : 명교당(明敎堂),
삼문(三門) : 지도문(志道門),
동․서재(東․西齋),
강학루(講學樓) : 육영루(育英樓),
서고(書庫)
전사청(典祀廳).
광풍재(光風齋),
주사(廚舍)
단계서원 현판 글씨 : 옥동 이서(李漵,1662~1723)가 썼다. 여주이씨(驪州李氏)로 호는 옥동(玉洞)또는 옥금산인(玉琴散人)이다.
격식을 갖춘 10동의 건물이 기록되어 있어 품격을 모두 갗추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중요 유물
단계서원 임사록(任事錄) : 1711년부터 1866년 까지 단계서원의 역대 원장과 유사의 명단.
입원록(入院錄) : 서원에 출입 한 유생의 명단. 총 2756명 등재, 그 중 문과 40 명, 사마급제자 102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전답록(田畓錄) : 서원의 재물 목록, 소출 200석의 토지 위치와, 노비 33구(구)의 소재 및 이름.
단계훼철사적(丹溪毁撤事跡) : 1868년 서원훼철 당시의 경과기록과 상소문.
목판류: 단계서원 현판, 명교당 현판, 각종 기문 현판 다수.
기타 서적류 : 다수
단계서원(丹溪書院)에 대한 고찰 1
- 김태환(영주향토사연구회장)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을 배향했던 서원은 단계서원과 귀강서원(龜江書院)이 있었는데 귀강서원은 여러위(位)를 모신 서원이고 단계서원(丹溪書院)은 문절공 단위(單位)만을 모신 서원으로 그 의미가 깊다. 그동안 단계서원에 관한 연구와 논의는 거의 이루어진것이 없고 각종 문헌에도 서원의 건립 연도와 문계서당(文溪書堂)과의 관계 등이 정리되거나 기록되어 있지 않아 단계서원의 창건과 위치, 서원의 운영 등 전반적인 기록을 찿아 볼수 없다. 본고에서는 단계서원 관련 자료와 『무송헌문집(撫松軒文集)』그리고 지역의 각종 향토지 등을 통해 미력이나마 단계서원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서원(書院)의 연원
단계서원(丹溪書院)이 어던 연유로 건립되었는지에 대한 고찰은 단계서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단계서원의 건립 연원은 「단계서원 사림들이 예조에 올린 글」에 잘나타나 있다.
(상략) 가정 무오년(명종 19, 1558년)에 군수 안상(安瑺)이 영천(榮川, 영주) 수령으로 와서 학사(伊山書院)를 건립하고 향사할 선현을 의논하고자 퇴계 이선생에게 가서 물으니 퇴계께서 대답하시길 “본군(本郡)에 김군절공(金文節公, 김담)이 있지 않은가” 하셨으니 이것이 본원을 설치한 연유입니다. (하략)
단계서원의 건립은 퇴계 이황의 “본군(本郡)에 김군절공(金文節公)이 있지 않은가”라는 말에서 연유했다. 하지만 어떤 연유에 의해서 인지 퇴계 선생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산서원에 문절공이 배향되지 못했다. 그 후 57년 후인 1615년 구성(龜城)의 삼판서고택 뒤에 김담을 배향한 향현사(鄕賢祠) 건립이 논의 되다가 1620년(광해군 12)에서야 사당이 건립되어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향현사의 사호(祠號)는 ‘상현사(象賢祠)’, 당호(堂號)는 ‘입교당(立敎堂)’ 이었는데 이것이 문절공을 모신 영천(榮川, 지금 영주)의 첫 사당이었다. 이후에 단계서원과 향현사가 승격된 귀강서원(龜江書院)에 배향된다.
2. 서원(書院)의 창건.
단계서원이 언제 창건되었는지 창건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문헌들이 서로 상반되게 기록하고 있다. 먼저 서원 건립의 창건연대를 고찰해 보기전에 단계서원 창건에 대한 여러 문헌들의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상략) 서원의 창건은 만력 무오년(광해군 10, 1618년)에 있었고, 단계서원으로 이름하기는 순치 임진년(효종 3, 1652년) 이었는데 (하략) 「단계서원 사림들이 예조에 올린 글」
무오년(광해군 10, 1618년)에 문계서당(文溪書堂)을 문단(文丹) 옛마을에 창건하였다. 순흥부에서 동쪽으로 30리쯤에 있는데 지금은 봉화군에 속한다. 사림들이 선생께서 머물러 거처하신 곳과, 묘소 아래에 가히 조두(俎豆)의 행사가 없어서는 안될 일이라하고 의논이 일어나 서당(書堂)에 사당(祠堂)을 세웠다.「연보」
1712년(숙종 39) 문계서당을 승격시켜 단계서원으로 하고 옛터의 서쪽에 옮겨 건립한후 위 판을 봉안하였다. 사호(祠號)를 존도사(尊道祠), 당호(堂號)를 명교당(明敎堂)이라 하였다. (하략)「연보」
고을 동남쪽 30리 수민단면에 있다. 옛날에 문계서당이었다. 숙종 임진년(1712, 숙종 38)에 이름을 고쳤다. 김문절공을 봉안하였다. 금상 경신년(1800년)에 중수하면서 옛날터에서 뒤로 조금 높은 곳으로 옮겼다. 명륜당, 동서재와 식루가 있다.『재향지(榟鄕誌)』1849년 안정구 편찬
위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단계서원의 시작은 문계서당(文溪書堂)에서부터 시작된다. 1618년(광해군 10)에 문계서당(文溪書堂)을 문단(文丹) 옛마을에 창건하고 그곳에 문절공의 사당을 건립하면서 시작되었다. 결국 문계서당의 창건 년도는 1618년(광해군 10)이 정확한것 같다.
그러면 문계서당의 단계서원 승격은 언제인가? 「단계서원 사림들이 예조에 올린 글」에는 1652년(효종 3)에 단계서원으로 승격되었다고 적고 있으며, 「연보」와 『재향지(榟鄕誌)』에서는 ‘1712년(숙종 39) 문계서당을 승격시켜 단계서원으로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단계서원의 승격 연도는 1652년(효종 3)과 1712년(숙종 39)으로 서로 다르게 기록 되어 있다. 서원으로의 승격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좀더 연구해야 할것 같다.
3.서원(書院)의 명칭.
단계서원의 명칭은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서원초기 죽계서원(竹溪書院)으로 불렸던것 처럼 서원의 옆을 가로질러가는 ‘단계(丹溪)’라는 냇물에서 가져온 것 같다.
단계(丹溪)의 근원은 빈동(賓洞) 동남쪽에서 나와 단계서원과 사암(蛇巖)을 지나 동쪽으로 영천(榮川)의 신천(新川)으로 들어 간다. 단산(丹山)은 단계서원의 주산(主山)이다. 『재향지(榟鄕誌)』1849년 안정구 편찬
4.서원(書院)의 위치와 규모.
단계서원의 구지(舊址)는 현재 경북 봉화군 봉화읍 문단 1리 서원마을(후동재사 앞)로 서원과 관련된 유적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러면 영주에 건립해야할 서원이 왜 이곳 문단에 건립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왜 문단에 단계서원이 건립되었는지는 서원 관련 각종 자료에 잘나타나 있다.
(상략)작은 냇물은 띠 두르듯 흐르고 얕은 산은 소라모양으로 둘렀다. 멀리 당시를 생각하니 이곳이 거처하신 곳이로다. (하략)「단계서원 봉안문」
(상략) 그로부터 61년후에 김 선생께서 평일에 거처하시던 곳에 이 원우를 창건하여 춘추로 향사를 받들어 오고 있습니다만 (하략)「단계서원 묘우이건 상량문 」
(상략)그후 일도의 선비들이 순흥의 단계(丹溪)에다 사우(祠宇)를 건립하였으니 이곳은 김담이 평일에 머물러 거처하던 곳으로 공경히 영령을 모시고 향사(享祀)한지 이미 많은 햇수가 되었는데 원액(院額)이 공포되지 못하고 지금까지 미루어 왔으니 어찌 조정의 잘못된 법전과 다사(多士)의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하략) 「단계서원 사액을 청한 상류(영조 을유) 」
위의 글들을 통해 현재 단계서원이 건립된 곳은 문절공이 평시에 머물러 거처하신 곳이라 하였다. 그러면 문단에 문절공이 ‘평일에 거처하던 곳’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 거처하던 곳이 살림집인지 아니면 일상을 멀리하고 쉬던 공간인지는 알수없으나 단계서원이 건립되었던 문단리 서원 마을은 문절공과 각별한 관계가 있었던 마을 임에는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그 예는 소수서원의 건립에서도 찿아볼 수 있는데 소수서원은 숙수사가 있던 곳으로 일찍이 회헌 안향이 공부하던 곳이었다. 신재 주세붕은 이 유서깊은 곳에다 사당을 세우고 회헌 안향의 위패를 봉안하고 소수서원을 건립 했다. 단계서원도 이와 같이 문절공이 머물던 유서 깊은 이곳 문단에 사당을 건립하고 서원으로 승격 시켰다고 볼수 있다.
순흥부 동쪽 30리 문단촌에 있었다. 1610년(광해군 2) 설립 문절공 김담을 제향했는데 1868년 훼철되었다. 『순흥지(順興誌)』
고을 동남쪽 30리 수민단면에 있다. 옛날에 문계서당이었다. 숙종 임진년(1712, 숙종 38)에 이름을 고쳤다. 김문절공을 봉안하였다. 금상 경신년(1800년)에 중수하면서 옛날터에서 뒤로 조금 높은 곳으로 옮겼다. 명륜당, 동서재와 식루가 있다.『재향지(榟鄕誌)』1849년 안정구 편찬
(상략)옛 재목을 사용하여 중수하였으니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지도 않으며 예전 제도를 보아 조금 넓혔으니 바르고 휼륭하다. 규모는 전후로 10동이요 모양은 동서로 두 기둥이도다. 얕은 뫼가 서로 둘러 쌓여 (하략)「단계서원의 사액을 청한 일로 순찰사에게 올린 글 」
서원의 건물로는 전후로 10동의 건물이 있었는데 사당(祠堂)을 존도사(尊道祠), 강당을 명교당(明敎堂), 삼문(三門)을 지도문(志道門), 동․서재(東․西齋), 육영루(育英樓), 식루(食樓), 서고(書庫), 전사청(典祀廳). 광풍재(光風齋), 주사 등의 건물이 있었다. 이는 서원으로서의 품격을 모두 갗추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당시 이정도의 건물이었다면 영남에서도 큰 서원으로 불려질만 했을 것이다.
5.‘단계서원(丹溪書院)’ 편액 글씨.
단계서원’ 현판은 당대의 명필인 옥동 이서(李漵,1662~1723)가 썼다. 이서는 여주이씨(驪州李氏)로 조선 중기의 문신 서예가로 호는 옥동(玉洞)또는 옥금산인(玉琴散人)이다. 대사헌 하진(夏鎭)의 아들로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형이다. 충북 충주(忠州)에서 살다가 1694년(숙종 20) 박세채(朴世采)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으나 벼슬은 찰방에 그쳤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왕희지의 소해법첩인 악의론(樂毅論)에서 필력을 얻었다고 하며 행초도 잘하였다. 필법을 역(易)의 음양원리에 바탕을 두어 설명한 조선서예사상 최초의 서론(書論) 필결(筆訣)을 지었다.
스스로 필체를 개발하여 『성재집(性齋集)』에서 이르기를 “동국의 진체(東國眞體)는 이서(옥동)에서 비롯되었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 동국진체는 공재 윤두서(1668∼1715)에게 전해졌고 다시 백하 윤순(1680∼1741)에게 전해졌으며, 원교 이광사(1705∼1777)에 의하여 집대성되었다.
옥동의 글씨로는 고산 윤선도가 시작(詩作)에 정진했던 곳으로서 사적 제 167호로 지정된 해남 윤씨의 종가 연동 녹우당(綠雨堂) 편액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