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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보루터에서는 서울을 감싸고 도는 한강과 중랑천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한내 중랑천 주변 너른 들판는 아주 이른시기에 서울의 문명이 싹튼 곳이다. 한북정맥으로 이어온 망우산 봉화산과
아차산이 한양의 외청룡으로 서울의 동쪽을 병풍처럼 지켜주며 자양동 한강 앞에서 멈춘다.
그 산 기슭에는 한내 중랑천이 흐르고 있다. 가장 이른시기 구석기시기의 문명이 거기에 있었다.
망우산을 중심으로 삼각점이 되는 봉화산과 용마산 지역에 구석기·청동기 시대의 각종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된 서울시 유일의 구석기시대 유적이다.
면목동 구석기 유적은 한강 서울 유역에서 발견된 유일한 구석기 유적이다.
중랑구 면목동의 아차산 서쪽 사면 끝 기슭 면목고등학교 인근의 산기슭에 해당된다.
유적의 앞쪽으로 중랑천을 배경으로 한 들판이 펼처있어 구석인들의 일시적인 생활주거지로 좋은 여건을
형성하고 있다.유적의 입지적 조건은 뒤에 산을 등지고 앞이 트였으며 중랑천이 이루어 놓은 들이 눈 앞에
트인 곳이었다. 유적에서는 타제석기만 출토되었다. 채집된 석기는 대부분이 몸돌석기이며 몇 개의 큰 격지석기도
끼어 있다. 특히 상봉동 봉수대에서 면목동에 이르는 지역에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후기 청동기시대 초기 철기시대의 성읍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중랑천은 한강의 여러 지류중 하나다.
경기도 양주시에서 발원해 의정부시를 거쳐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과 성수동 1가의 강변북로 다리에서
한강과 합류하는 하천이다. 경기도부분의 중랑천은 지방하천으로 분류되며 서울특별시에 접어들면 국가하천으로
등급이 바뀐다. 또 동부간선도로 강북 구간이 서울특별시 구간부터 중랑천과 나란히 뻗어있다.
중랑천의 위치와 옛날 중랑천은 길이 20km. 최대너비 150m. 유역면적 288㎢.
큰 내 한천 중랑천은 총13개의 지류를 지니며, 총길이는 45.3㎞나 되는 서울의 어느 하천보다도 길다.
중랑천 주변은 높이 348m의 용마산을 비롯하여 280m의 망우산, 177.9m의 구릉산,
137.9m의 봉화산 등이 오랫동안 침식을 받아서 산맥이 낮아진 구릉지로 형성된 곳이다.
백제시조 온조는 졸본지역에서 한강 유역인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
노중국 교수(계명대 사학과)는 한강유역의 첫 도읍은 중랑천 근처라고 주장한다.
졸본(환인지방)을 출발한 온조 일행은 개마고원을 넘어 원산지역으로 내려와
그 곳에서 추가령구조곡을 타고서 한강유역에 이른 것같다. 그때가 기원전 18년이다.
이때 온조 일행이 백제 최초의 왕성 하북위례성 터를 잡은 곳이 중랑천 주변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서울 동대문구 중랑구 성동구 일대 중랑천변이 하북위례성이 들어섰던 곳이라는 주장이다.
“하북위례성의 옛 자리는 경성 동북쪽 십리되는 곳 삼각산 동록(東麓)에 있다.”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그의 저서 <여유당전서> ‘강역고’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삼각산 동쪽 기슭을 세검정 계곡 일대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내 생각은 지금의 서울 청계천을 끼고 있는 중랑천 청계천을 끼고 있는 지금의 수도 위치가 아닌가.
고려시대 때도 남경은 바로 그 한양부라는 데가 바로 지금의 도성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옛날 도성이었던 데서 계속 성장 발전했다고 생각되지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생각돼요.
지금 부아악이라는 것도 북악산이라고 한다면 청와대 뒷산인데
바로 그 지역이 아니었는가 하북위례성이."<이형구선문대교수>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온조가 재위 14년에 낙랑과 말갈의 잦은 침략을 피해서 하북위례성에서
한수의 남쪽인 한산 아래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례성을 중랑천 주변에서 하남으로 옮긴 것은 천도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나온다.
"중랑천이나 세검정에 둔 하북위레성에서 바로 코앞의 하남으로 도읍지를 옮긴 것을 두고
천도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화재연구소에서 고구려의 적석총 무덤이 발굴된 한탄강 유역이
오히려 하북위레성일 가능성이 높다."(임영진 전남대 교수)
옛날 중랑천은 도봉동 부근에서는 서원천 상계동 부근에서는 ‘한강의 새끼 강’ 이라는 뜻으로 ‘샛강‘이라고 불리웠다.
한강의 위쪽에 흐르는 냇물이라는 뜻으로 “한천, 한내”라고도 불리웠다.
최욱래 한양대 교수(국문학)가 전하는 중랑천의 전설이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조성할 때이다. 능역에 백성들의 동원령이 떨어졌다.
근처 면목동에 사는 병든 노인도 동원령을 받았다. 그 노인에게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제가 대신 능역에 나가겠어요.”
나이 어린 딸 ‘중랑‘이 자청하고 나섰다.
그 중랑은 남장으로 낮에는 능역에 참여하하였다.
그는 낮에는 능역에 일을 하였고 밤에는 아버지는 병간호를 하며 정성껏 모셨다.
공사가 끝날 무렵 중랑이는 최우수 일꾼으로 선발되어 표창을 받게 되었다.
그는 표창식 직전 건원릉을 도망쳐 나왔다. 남자로 변복을 한 일이 발각될 것이 두려웠다.
관리들은 중랑이를 추격했으나 중랑이는 이를 따돌린다.
관리들은 한내 물가에 빨래하고 있던 처녀에게 물었다.
그 처녀는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었다.
“바로 네가 능역을 하다 도망친 그 놈이지!”
군졸대장이 그 처녀에게 따져 물었다.
그는 도망쳐 집에서 남장을 여자의 옷으로 갈아 입고 한내로 나와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대로 신고온 짚신에 묻은 황토를 다 씻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발각된 것이다.
정부는 중랑이의 속 사정을 듣고 후하게 상을 주었다고 한다.
그 중랑이의 충효의(忠孝義)를 높이 사서 표창하고 한내를 중랑의 이름을 따서 ‘중랑천’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옛날 옛날 어느 옛날.
서울에서 전국 장사모임이 열리게 되었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경상도 장사가 허겁지겁 짐을 꾸려
서울로 가던 도중 집으로 돌아가는 강원도 장사를 만났다.
"서울의 도성문을 닫을 시간이 다 되었고 여기까지 오느라 기운이 빠졌을테니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 " 강원도 장사가 말하는 것이었다.
경상도 장사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더욱 서둘러 길을 재촉하였다.
상봉동까지 왔을 때는 갈증이 나 더 이상 발을 옮길 수 가 없었다.
때마침 옆으로는 중랑천이 흐르고 있었고 그 물을 마시기 위해 바위에 몸을 기대 엎드렸다.
물이 별로 흐르지도 않거니와 짚었던 바위에 손과 무릎의 자국이 깊게 패여져 있는 게 아닌 것인가.
아마도 바로 직전에 강원도 장사가 물을 마시고 갔나보다 생각하고
목을 축일 정도의 물만 마시고 일어서려 했다.
"저 사람이 냇물을 모두 마셔 농사를 지을 수 없음은 물론이고 식수마저도 없어져 버렸으니
이는 분명 사람이 아닌 요물임이 틀림없다"
갑자기 포졸을 앞세운 마을 사람들와서는 애워싸는 것 이었다.
"나는 요물이 아니고 사람이며 내가 오기 전에 강원도에서 온 장사가 먼저 거의 모든 물을 마시고
남은 물을 조금 마셨는데 그것도 죄가 되느냐"
경상도 장사는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는 관아로 끌려가 버리게 되었다.
"내 한이 물을 말려 사람이 살 수 없는 검은 땅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며
중랑천은 해마다 홍수로 넘쳐흘러 농사가 망치게 될 것이다'
매일 모진 고문을 받은 그는 죽음을 직전에 이런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 후 해마다 중랑천은 범람하였고 엎드려 자국이 생긴 바위가 있던 마을 일대는
검은 가루가 날리는 곳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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