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에 사무쳐 잊을 수 없는 패전의 치욕./회계산(會稽山)의 치욕을 씻음 [동]와신상담[臥薪嘗膽]/절치액완(切齒扼腕).
[출전]『史記』 [내용] [오의 발전과 초나라와 전쟁] 오나라는 수몽왕 이전까지는 외부에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역사에 기록도 거의 없다. 다만 중국의 천자(周)와 동족인데, 그 백성은 남쪽의 만족으로 중원에서 보면 오랑캐 였고 초나라에 복속하고 있었다. 문명의 변방에 있던 오나라가 강대국인 초나라에게 이반하기 시작한 것은 수몽왕 때인데, 수몽 즉위 2년(BC 584년)에 초나라 대신 무신(巫臣)이 오나라를 방문하면서였다.
무신은 원래 초나라 사람으로 하희(夏姬)라는 희대의 요부에 반해 晉나라로 망명 가 진을 위해 초나라를 배후에서 견제하고자 오나라에 사자로 와서 아예 아들까지 연락관으로 남겨두고 오나라를 훈련시켜 군사강국으로 만들어 오나라를 부추켰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오나라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에 복속해 있던 이민족을 하나 둘 복속시켜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이 때부터 오나라와 초나라는 적대관계가 되었고 요 왕때 변방 시골에서 뽕나무를 둘러싸고 양국 처녀들의 싸움이 국가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어 공자 光(후에 합려) 이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 땅 두 성읍을 쑥대밭을 만들어 놓은 후 양국은 적대관계를 넘어 원수관계로 발전되었다.
그 후 오왕 여제 3년(BC 545년)에 제나라 재상이었던 경봉(慶封)이란 자가 오나라로 망명하였고, 합려 왕 때에는 초나라 관리였던 오자서 망명했고 손무를 중용하여 오나라 군대는 정비되고 개혁되어 중원을 넘보게 될 정도로 성장하였다.「춘추좌씨전에는 합려의 조부인 수몽시대(BC 585~561)부터 50년 동안에 오와 초가 10여 차레의 전쟁이 있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그 후 오초는 늘 전쟁상태에 있었으며, 오나라는 오자서와 손무의 전략에 따라 초를 공격하여 수도를 점령하고 초토화시켜 초왕이 피란가는 위기에 처하자 초나라 대신 신포서가 秦에 구원하여 진나라 군사가 초군과 합세하여 역공을 개시, 전세는 바뀌어 오나라는 수세에 몰려 오자서도 대패하였으며, 이 와중에 합려의 동생인 부개가 전쟁 도중 본국으로 돌아와 자립을 선언, 스스로 왕이 되었다.
[오월싸움의 시작] 이러한 형국에서 오나라 國元땅에서 예기치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오가 초나라 수도를 점령한 이듬해 오나라 남쪽에 있던 월나라 왕 윤상(允常)이 느닷없이 오나라를 공격해 왔던 것이다. 오나라는 전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 정벌에 나섰기 때문에 완전히 허를 찔린 형국이었다. 월나라가 합려가 대궐을 비운 사이 오나라 남쪽 절강(浙江)유역의 취리(聚里)에 난입하여 인근을 쑥밭으로 만들고 스스로 자기 땅으로 편입시켜 버린 것이다.
원래 월나라는 역사에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초기에는 미개하고 오랑캐로 취급 받아 왔으며 오나라의 속국으로 해마다 합려를 위해 공물을 보내오고 왕족이 오나라에 인질로 와 있던 형편이었다. 합려가 왕이 되기 위해 자객 전제 를 이용해 오왕 요를 죽일 때 사용한 칼 어장검(魚腸劍)도 윤상이 진상한 것이다. 합려로서는 그런 월나라가 오나라에 침입한 것이 분통이 터질 일이었으나, 월나라 입장에서 보면 전혀 괴이한 일이 아니었다.
지난해에 합려는 초나라와의 몇 번의 싸움에 월나라에 출병을 명령한 바 있으나 월왕 윤상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따르지 않자, 합려는 이것을 응징하기 위해 3만의 군사를 보내 월나라 땅 취리를 빼앗고 절강 지역을 오나라 영토로 편입해 버렸다. 이에 월왕 윤상은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중, 오나라가 초나라와 진나라의 공격에 패하자 이를 틈타 오나라를 기습하여 빼앗긴 것을 되찾겠다고 하니 잘못된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만큼 월나라는 국력이 그동안 크게 발전해 가 있었고 그 뒤에 벌어질 사태에 대해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오나라는 국내외 사정이 급박해 월나라에까지 손쓸 겨를이 없었고, 월나라도 절강유역을 잠식한 후 더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 않아 잠정적으로 두 나라는 잠잠한 상태가 되었다.
[이상한 싸움] 진초연합국에 패하여 초나라 수도에서 퇴각한 이듬해, 합려는 태자 부차에게 초나라 공격을 명하여 회수를 거슬러 번양(繁陽: 하남성 신채현 북쪽)에서 초나라 육상부대를 격파하였다. 초나라가 두려워 수도를 북쪽의 약(호북성 의현성 남쪽)지역으로 옮길 정도였다.
그 후 합려는 10여 년 간 국력을 키워가며 재기를 노렸다. 마침 월나라는 윤상이 죽고 아들 구천이 계승하자, 합려는 기회다 싶어 기원전 496년에 월나라를 치기 위해 군대를 지금의 항주시 동쪽 취리에 진을 쳤다.과거 월왕 윤상시절에 빼앗겼던 절강 유역의 영토가 아직 미결로 남아 있는 것을 기화로, 새 왕으로 등극한 구천에게 이의 시정을 요구한다는 것이 싸움의 동기였다.
그런데 이 싸움은 처음부터 이상한 전쟁이었다.양군이 절강너머 취리 산악지대에 대치하고 있는데, 이상한 일로부터 결전이 벌어졌던 것이다.이 이야기는 좌씨전과 사기세가에 자세히 적혀 있다.
며칠 동안 대치되던 어느날, 월나라 진영에서 구천이 자국 죄인을 3개조로 나누어 각 조마다 목에 검을 갖다 대게 하고 오나라 군대 앞으로 나아가서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외치게 하였다.
「우리들은 양국이 사우는 이 곳에서 군령을 어겨 죄를 지었다. 이에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으로 속죄하겠노라」
이렇게 외치고 스스로 자신의 목에 칼을 대어 베어 버렸다. 잠시 후에 또 다른 조가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하여 죽어갔다. 오나라 병사들이 어안이 벙벙해진 틈을 놓치지 않고 월나라 군사들이 공격해와 오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할 수 있었다.월나라 대부 영고부가 합려를 향해 달려들어 합려의 엄지 발가락에 상처를 입히고 신발 한 짝을 빼앗았다. 이후 퇴각하던 합려는 취리에서 약 3km 되는 곳에 있는 형땅에서 발가락 상처가 심해 세상을 떠났다.
합려가 죽기 전 부차를 불러 기필코 복수를 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중원의 맹주로 자처하며 일세를 풍미했던 호걸 합려가 그렇게 허무하게 간 것이다.합려의 시신은 곧 도성으로 운구되고 그의 무덤은 도성의 창문박에 자리 잡았는데,「오월춘추」에 따르면 이 문은 초나라 쪽을 향해 지어졌다고 한다.
부차는 왕으로 즉위하자 마자 사람을 마당에 세워두고 자신이 들고 날 때마다 외치게 하여 복수의 일념을 한시라도 잊지 않도록 자신을 채찍질하며 잠도 마굿간 같은 곳에서 섶을 베고 자면서 칼날을 갈고 있었다. 이것이 와신상담의 시작이었다.
[구천의 항복] 오왕 부차는 밤낮으로 병사들을 훈련시켜 월나라를 향항 복수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기원 전 494년, 합려가 죽은 지 삼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범려는 기선을 제압하고자 측근 범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다. 오나라는 월나라 군대를 부초라는 곳에서 격퇴하고, 구천은 패잔병 5천을 이끌고 회계산으로 들어가자 부차가 이를 포위해 버렸다.
구천은 범려의 계책에 따라 대부 種을 파견하여 화친을 요청하고 스스로 신하가 될 것을 맹세 하였으나 오자서의 반대로 무산되자, 대부 종은 오나라 대부 백비에게 뇌물을 주어 결국 부차는 구천을 용서하고 화친하였다.이 때 오자서는 다음과 같이 내뱉었다고 한다.「월나라가 앞으로 10년 동안 백성을 늘리고 재산을 불려서 다시 10년 동안 백성들을 가르쳐 깨우친다면, 20년 후에 오나라는 수렁에 빠질 것이다.」
[구천의 복수준비] 오나라에 도착한 구천 일행은 석실에 끌려가 말 사육하는 일을 하며 수모를 겪었으나 구천은 성실히 하여 부차의 눈에 들게 하여 마침내 귀국을 허락받고 돌아와 재기를 다졌다.사기 월세가에 따르면 구천은 언제나 자신의 옆에 肝을 달아 놓고 눕거나 앉을 때마다 그것을 보며 쓰라린 굴욕의 날들을 상기하며 복수를 맹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식사할 때마다 간을 핥으며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너는 회계에서의 치욕을 잊었느냐?」여기서 회계지치(會稽之恥)라는 말이 나왔다.
또한 오월춘추에 의하면, 구천은 간을 핥는 일 뿐만 아니라 장작위에서 자면서 복수를 맹세 하였다고 한다. 와신상담이라는 고사가 여기서 나왔는데,「십팔사략」에는 부차가 와신(臥薪) 하였다고 하여 와신상담의 주인공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부차와 구천이 복수를 위해 와신과 상담을 하며 절치부심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구천은 스스로 경작을 하였으며, 부인은 베를 짜고 식사때에도 육식을 하지 않았으며, 가나한 자를 돕고 백성들과 고학을 같이하며 재기를 다졌다고 한다. 구천은 이렇게 행동하면서 국정을 신임하는 측근들에게 맡겼는데, 월나라를 승리로 이끌게 한 중요 측근으로 범려와 대부 종,그리고 계연(計然)을 들 수 있다.
[오자서의 죽음] 오왕 부차는 월나를 제압한 뒤 관심을 중원 지역으로 돌려 陳나라를 공격하였고 채나라를 복속시켰다. 그 후 오나라는 제나라 도공(悼公)이 노나라와의 결혼문제로 분쟁이 생겨 오나라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노나라 정벌을 제안하였다가 결혼문제가 해결되자 다시 오나라에 노나라 출병은 없었던 것으로 취소하자 부차는 제나라가 오나라를 무시하는 것이라 하여 기원전 484년 노나라,주나라,담나라군과 연합하여 강대국인 제나라에 출병하였으나 마침 제나라 도공이 권력을 쥐고 있던 가신 田氏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 주춤하였다.
그해 가을 다시 제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려 하자 월나라 구천이 오나라로 선물을 보내오면서 오나라를 돕겠다는 뜻을 전해왔다.오자서는 구천을 죽일 것을 간언하였으나 구천에게 선물을 받은 백비가 부차를 설득하여 구천을 신임함으로서 구천은 의심받지 않고 오나라를 향한 복수준비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오자서를 미워하는 부차는 백비로부터 오자서가 아들을 적국인 제나라 대부에게 맡겼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오자서에게 검을 내려 자살을 명하였다.
[월나라의 공격] 기원 전 482년 여름, 부차는 황지에서 周나라, 노나라, 晉나라 제후를 참석시킨 가운데 회맹하였다. 한참 패자를 결정하는 맹약 의식을 준비하던 중, 복수를 벼르던 월왕 구천이 느닷없이 오나라 수도를 공격하였다. 오나라는 크게 패배하여 구천에게 많은 선물을 보내어 화목을 도모하였다.그러나 오나라의 국력은 급속하게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2년 후(기원전 480년)에는 지금까지 조용하던 초나라 군대가 오나라를 공격하여 오나라를 격퇴시켜 오나라의 국력은 차츰 소진되어가고 있었으나, 이에 반해 월나라는 국정에 힘을 쏟아 차근차근 국력을 축적하였다.
[오나라의 멸망] 구천은 신 땅에서 오나라 군대가 초나라 군대에 패한 이듬 해에 국력을 재정비하여 다시 오나라를 공격하였다.오왕 부차는 수도 남쪽에 있는 호수인 입택에서 월나라 군대를 맞아 호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예상치 못한 월의 공격으로 오나라 군대는 혼비백산하여 패주하였고, 구천은 더 이상의 공격은 하지 않고 그대로 퇴각하였다. 이 모두가 범려의 계책에 따른 것이다.
그 후 3년 뒤, 구천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의 수도를 포위하였다. 이러기를 3 년, 결국 견디다 못한 부차는 수치를 무릅쓰고 월나라에 화의를 요청하였다. 회계에서 있었던 화의와 같은 조건으로 이번 화의도 체결되기를 간청하였다. 회계에서는 오자서의 만류를 듣지 아니하고 부차가 화의를 받아 주었으나, 이번 화의에서는 범려가 반대하는 것을 수긍하여 화의는 받아들이질 않았다.
결국 부차는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죽기 전 죽어서도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하여 얼굴에 보자기를 씌어 달라 했다고 한다. 백비는 불충한 자로 구천에게 주살당하였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으나 「좌씨전」은 월나라에 출사하였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구천이 패업을 달성하자 월나라 재흥과 오나라 멸망에 큰 공을 세운 범려는 갑자기 구천에게 작별을 청하였다. 범려는 오왕 부차가 패업을 이룬 후 측근인 오자서를 가차없이 제거한 일을 뇌리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구천의 인상은 목이 길고 무척이나 새카만 얼굴색이었다고 한다. 여기다 눈꼬리가 위로 쭉 치켜 올라가고 눈썹은 다른 사람보다 흐린 편이었다고 한다.사기에 따르면 이런 인상을 가진 사람은 보통 불우한 시절에는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지만, 나중에 성공해서 번영을 이루면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없다고 한다. 범려는 구천의 인상을 보고 오자서의 운명을 생각했던 것이다. 범려는 구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나라로 건너가 많은 재물을 모아 주위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일본 에무라 하루키(江村治樹)교수의 『와신상담의 오월전쟁』>
[주(註)] 어장검(魚腸劍) --월나라의 구자야는 신의 경지에 오른 명공이었다. 명검을 만드는 솜씨는 중원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월나라 왕 윤상은 오나라에서 실질적으로 권세를 쥐고 있는 공자 光에게 선물할 보검 다섯자루를 구자야에게 만들게 하여 그 중 세 자루를 공자 광에게 보냈다.공자 광은 그 중 가장 우수한 검을 담로(澹盧)라 이름 붙이고, 다음으로 우수한 칼에는 반영(磐영) 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름붙이지 아니하여 무명검으로 남아 있는데, 광은 이를 오자서에게 주었던 것이다. 오자서는 이 칼을 전제에게 주어 왕 요를 죽이는데 사용토록 하였다, 전제는 요리사로 가장하여 생선속에 이 칼을 넣고 요왕에게 다가 가 요왕을 죽이는데 성공하였다. 쿠데타로 왕이 된 합려는 요를 처단한 검에 어장검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서 세 자루의 칼은 비로소 제 이름을 다 찾았다고 전해진다.
[참고]會稽之恥는 회계산(會稽山)의 치욕을 씻었다는 뜻으로 쓰인다. 중국 춘추(春秋)시대 월왕(越王) 구천(勾踐)은 저장성[浙江省]의 후이지산[會稽山]에서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하여 사로잡힌 몸으로 갖은 수모를 당하고, 겨우 본국으로 돌아가 20년간 상담(嘗膽)의 고생 끝에 오나라를 멸망시켜 후이지산의 수치를 씻었다는 고사에 의한다. 《사기(史記)》 <월세가(越世家)>에 그 유래가 전한다.<두산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