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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수천
한라산의 정상 서쪽 장구목, 서북벽 계곡에서 발원하여 천아오름 수원지 부근에서 많은 지류들과 합류하며 진달래소와 광령 8경을 지나 외도다리 바로 위에서 도근천과 만나 하류로 내려가면서 여러 곳에서 용출하여 정수 지대를 이루며 외도 수원지에 이르러서는 지표면 위로 흐른다. 외도동 바다까지 약 25㎞를 흐르는 큰 하천이다.
[명칭유래]
머리가 없는 내라고도 하고, 물이 없는 건천 무수천(無水川), 지류가 수없이 많아서 무수천(無數川), 계곡에 들어서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 하여 무수천(無愁川)이라고도 한다.
▶ 월대
외도2동 도근천 하류에 있는 여름철 놀이터.
‘월대’는 수백 년 된 해송들과 팽나무들이 우거진 곳에 놓인 반석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동쪽 숲 사이로 떠오르는 달이 맑은 물가에 비쳐 밝은 달그림자를 드리운 장관을 구경하며 즐기던 누대’라는 의미에서 ‘월대’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조선 시대 시문을 즐기던 선비들이 모여 시회를 열기도 했으며, 연회를 베풀기도 했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형태]
물이 깊고 맑으며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여 뱀장어의 서식지가 되었다. 특히 은어가 많은 ‘도그내’ 서쪽 천변(川邊)에는 수백 년 묵은 소나무, 팽나무가 수면에 닿을 듯 휘늘어져 있어 경관이 무척 아름답다. 이곳에서 나는 은어는 조선 시대 진상품의 하나였기 때문에 고기잡이를 금했다고 전해진다.
▶ 내도동
도근천(都近川)의 안쪽이 되는 마을로 내도그내, 내도그리, 내도근리, 안도근내로 불리다가 내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형성 및 변천]
1300년대 초 외도동에는 수정사라는 큰 절이 있었고, 도그내 하류 포구 일대에는 방호소와 수전소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포구 서쪽인 안도그내에도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말 문헌과 지도 등에 도근천리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그 당시까지는 ‘도그내 을’이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요 지명으로는 고넹이 바위, 담베목이, 마사이, 덤방소, 고도리 동산, 물한드르 등이 있다. 민간신앙 유적으로는 포제단과 하르방당, 두리빌렛당이 있다.
▶ 내도 알작지
내도 알작지는 제주도내에서 유일하게 자갈로 이루어진 역빈(graver beach)으로 족특한 경관적 가치와 외도동일대의 지질학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곳입니다.
이곳에 분포하는 자갈들은 흐르는 물의 높은 유속 속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이는 과거 50만년 전 외도동 일대에서 현재보다 더 큰 규모가 큰 하천이 존재했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파랑(wave)에 의해 수시로 모습이 변하는 알작지 해변은 자연의 변화를 알려주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파랑과 역빈이 어우러져 내는 소리는 교향악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내도 알작지 표지판>
▶ 도두봉
높이는 65.3m, 비고 55m, 둘레는 1,092m, 면적은 80,253㎡, 폭은 379m이며, 모양은 원추형으로 되어 있다.
제주시 도두마을을 대표하는 오름으로 구제주시 서쪽에 위치한 제주국제공항 너머의 도두리 해안을 끼고 있다. 정상부에 화구가 없는 원추형 화산체로, 도두마을 포구의 방파제로 들어가는 지점에 존재하는 노두(outcrop)로 볼 때, 도두봉의 구성물질은 해안부분에 화산재로 이루어진 응회암과 현무암 그리고 정상부분에 '송이'(scoria) 구성된 오름임을 알 수 있다.
오름 정상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도원봉수(道圓烽燧)터는 동쪽으로 사라봉수, 서쪽으로 수산봉수에 응했다고 전한다. 해질 무렵 오름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낙조가 아주 인상적이다.
▶ 용담동
해방 후까지 용담동에는 집들이 별로 없었고 서문시장 위로는 거의 소나무 밭이었는데, 시신을 묻는 묘지들이 그곳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한두기 근처나 부러리 근처 서문시장 앞 정도에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처럼 용담1동, 2동, 3동으로 구분하지 않고 해방 후 한참까지도 용담동에서 ‘다끄네(지명)’와 ‘비행장’ 지역만을 분리하여 구분 지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용담1동에만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용담2동은 전부 밭이었다고 한다. 용담3동은 래물 지역이라고 불렀는데, 용담과 도두리의 경계 지역에 위치한다고 한다. 당시 다끄네 만을 그렇게 구분 지었던 것은 용담1동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데, 다끄네 쪽 사람들은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했던 사람들이 살고 있던 동네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용담동 공간에 대한 급작스런 변화의 첫 발은 일제 합병 후 제주 목관아지의 성곽을 철회하고 새로운 도로를 개설하는 1920년대부터 나타나는 것 같다. 1913년 북문이 철회되는 것을 시작으로 1914년에는 동문과 서문이, 1918년에는 남문이 철회되었다. 용담동 지경에 해당하는 서문의 철회하다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서 관덕정을 거쳐 ‘산지’ 항구로 이어지는 전쟁 물자 수송 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1920년대 중반 이후 제주의 도시 공간은 새로운 도시 공간 질서 속에 본격적인 일식 관청 및 건축이 들어서게 되는데, 관아부지에 일제의 관청 건물이 들어서고, 그 주변으로 일식 상가와 건축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관덕정 우측(무근성 일대)으로는 한국 사람들이 살지 않고, 일본 사람들만 살았다고 한다. 관지기들이 모두 일본 사람들이었기 관청 인근에 살았다는 것이다.
1955년 8월 1일자 법률 제368호에 의하여 제주읍이 9월 1일 제주시로 승격되자 같은 해 12월 31일자로 제주시 25개 리가 40개 동으로 개편됨에 따라 용담리는 병문천 서측과 한천 동측을 용담1동으로, 한천과 도두동 다호부락 및 용두암을 연결하는 용담2동, 다끄네(수근동)와 어영부락을 용담3동으로 구분하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 수근포(다끄네)
제주시 용담3동에 있는 포구로 닷근내라는 자연마을에 있는 닷근개를 두고 이른 말이다. 수근포는 『여지도』등에 나와 있는 수근촌이라는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제주시 용담3동은 정드르· 어영· 닷근내라는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수근포는 닷근개의 음을 빌린 말이다. 이 마을 사람들이 정으로 쪼아 포구를 만들었다는 데서 닷근개라고 했으며, 그 주위에 형성된 마을을 닷근내라고 하였다.
「제주삼현도」에서는 수근포를 수포라 하였으며, 그 주변에 연대와 성곶(星串)을 그려 넣었다. 이 연대를 수근연대라 하였으며, 성곶은 지금의 넙개인 듯하다. 그리고 그 동쪽 물속에 새비여가 있다.
수근포에는 절망을 이겨내고자 몸부림쳤던 실향민들의 간절한 비원이 담겨져 있다. 수근포 일대는 원래 용담2동과 수근동 수십 명의 녀들이 소라·전복·문어· 우뭇가사리· 성게· 미역 같은 고급 어족들을 잡던 황금 어장이었다.
▶ 정드르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에 있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이 만든 육군 비행장.
[개설]
정뜨르비행장은 당시 제주읍에 있었던 일본 육군 서비행장을 일컫는다. 정뜨르비행장이란 이름은, 당시의 지역 주민들이 비행장 부지를 ‘정뜨르’라고 한 데서 연유한다.
[건립경위]
일제강점기 제주도에 들어선 정뜨르비행장과 교래리 비행장, 알뜨르비행장, 진뜨르비행장들은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까지도 일본 본토 작전 비행 부대의 후방 기지나 일본과 대륙 간 항공로의 연접 기지로서의 기능이 강하였다. 그러나 1945년 5월 15일 중국에서 제5항공군이 전용되어 온 이후 일본 본토 결전에 대비한 본격적 작전 준비 기능으로 전환되면서 기지 정비가 이루어졌다.
정뜨르비행장은 1942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여 1944년 5월 준공되었다. 비행장 공사에는 제주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동원되어 은폐와 엄폐, 활주로 공사 등의 작업에 투입되었다. 1945년 7월 말부터 8월 초에는 일본군 제96사단 병력이 경비를 맡았다.
▶ 38 연대
제주특별자치도에 제주시에 있는 산 정상부에서 횃불과 연기로 급한 군사 소식을 전하던 조선 전기의 통신 수단.
[개설]
『경국대전』에 의하면 봉(烽)은 불을 피워서 통보하는 것을 뜻하고, 수(燧)는 설나무에 불을 질러서 그 연기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 하며,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을 들어 통보하는 제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봉수는 높은 산이나 해안 구릉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다. 따라서 봉수제는 우역제(郵驛制)와 더불어 신식 우편과 전기 통신이 창시되기 이전의 근대 국가에서는 가장 중요한 군사용 통신이었다.
봉수는 역마(驛馬)나 인편보다는 시간적으로 단축되었다. 신속한 효용성을 발휘하여 지방의 급변한 민정상황, 국경지방의 적의 동태를 상급기관인 중앙의 병조에 연락하였던 봉수제는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정보를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중국의 주(周)나라에서 유래된 봉수제는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초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즉 삼국시대 초기의 기록에 봉화와 관련된 지명과 봉화를 올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에는 봉수가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봉수제가 처음으로 법제화된 것은 1149년(고려 위종 3)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조진약이 올린 장계에 의하면 “봉수식을 정하여 평상시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각각 하나로 하고, 2급 비상이면 둘, 3급 비상이면 셋, 4급 비상이면 넷을 올리도록 하고, 각 봉수대에는 방정(防丁) 2명과 백정(白丁) 28명을 배치하되 그들에게 평전(平田) 1결씩을 지급토록 하고”있다.
조선 시대 1419년(세종 1)에 이르러 종래에 계승되어 온 고려의 봉수제를 바탕으로 당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거화거수(擧火炬數) 등 관계규정을 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해안의 봉수와 연대를 새로이 축조하고, 나아가 봉수의 선로를 일제히 획정하였다. 즉 별일이 없을 때는 1개, 적이 해안에 나타나면 2개, 해안에 가까이 오면 3개, 우리 병선과 접전시에는 4개, 상륙시에는 5개를 올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주도의 봉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동사강목』에 탐라에 봉수를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되어 있다. 1439년(세종 21)에는 22개가 설치되었고,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탐라방영총람』에 비로소 봉수와 연대가 구분되었다. 정조 연간에 편찬된 『제주읍지』에 와서 정의현의 수산봉수와 종달연대가 설치됨에 따라 이 무렵에 도내 봉수 25개소, 연대 38개소가 정비되었다. 설치된 연대의 규모는 높이와 너비를 각 10자로 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제주도 내 연대중 제주목에 소속된 연대는 18개소, 정의현에 소속된 연대 11개소, 대정현에 소속된 연대 9개소로 모두 38개소이다.
제주목에는 두모연대 ↔ 배령연대 ↔ 마두연대 ↔ 죽도연대 ↔ 우지연대 ↔ 귀덕연대 ↔ 애월연대 ↔ 남두연대 ↔ 조부연대 ↔ 수근연대 ↔ 별도연대 ↔ 조천연대 ↔ 왜포연대 ↔ 함덕연대 ↔ 무주연대 ↔ 좌가연대 ↔ 입두연대 ↔ 남두연대 ↔ 정의현의 오소포연대와 상응한다.
정의현에는 오소포연대 ↔ 협자연대 ↔ 말등포연대 ↔ 천미연대 ↔ 소마로연대 ↔ 벌포연대 ↔ 금로포연대 ↔ 우미연대 ↔ 보목연대 ↔ 연동연대 ↔ 변수연대 ↔ 대정현의 마희천연대와 상응한다.
대정현에는 마희천연대 ↔ 대포연대 ↔ 별로천연대 ↔ 당포연대 ↔ 산방연대 ↔ 무수연대 ↔ 서림연대 ↔ 우두연대와 제주목의 두모연대와 상응한다.
[변천]
1439년(세종 21) 제주도안무사 한승순이 올린 장계에 의하면 제주에는 봉수가 22개소가 설치된 것으로 되어 있다. 제주목에 10개소, 정의현에 7개소, 대정에 5개소가 설치되었다. 그 후 봉수에 대한 정비를 통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봉수는 23개소로 제주목에 8개소, 정의현에 10개소, 대정현에 5개소가 설치되었다. 또한 봉수는 높은 산정에 위치하는 등 구체적으로 설치된 봉우리(오름)가 표기되어 있다. 또한 17세기에 기록된 『탐라지(耽羅誌)』에는 25개소로 제주목에만 2개소가 증설되었다. 그 후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탐라방영총람』에 비로소 봉수와 연대가 구분되었고, 봉수 24개소, 연대 37개소가 시설되었다. 그리고 정조 연간에 편찬된 제주읍지』에 와서 정의현의 수산봉수와 종달연대가 설치됨에 따라 이 무렵에 도내 봉수 25개소, 연대 38개소가 정비되었다.
그 후 봉수와 연대는 명칭만 다를 뿐, 25봉수와 38연대가 유지되다가 1811년(순조 11)에 연대 8개소가 폐쇄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에는 모슬봉수와 8개의 연대가 폐쇄되어 제주에는 24봉수와 30연대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현황]
제주도에는 38개 연대가 있는데, 대부분 해안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다. 연대는 가까이서 적선의 출몰과 어떤 곳에 와서 정박하는 가를 자세히 관찰하는 동시에 해안 변경인 최전방에 위치한 연변봉수의 기능을 수행했다. 따라서 연변봉수의 기능을 돕기 위하여 요새적인 시설인 연대를 구축하였다. 해안 구릉에 위치한 연대는 급한 소식을 서로 상응하는 연대에 전하는 한편, 동시에 가까운 봉수에도 연락을 취하고 있다.
도내의 연대 중 형태 확인이 가능한 17개소 중 15개소가 방형으로 허튼층쌓기로 석축되어 있다. 하지만 왜포와 연동연대는 원형이고, 왜포연대는 내·외벽의 2중 벽체이다. 연대의 규모는 한 변의 길이가 6~10m 내외가 대부분이다. 연대의 규모의 평균치는 장축이 7.9m, 단축이 7.2m로 자연지형에 적합하게 축조되었다. 또한 해안과의 이격거리가 100m 미만이 21개소이고, 나머지는 200m 이내가 대부분이다. 상응하는 연대와의 이격거리는 7㎞ 이내가 29개소이고 가장 먼 거리는 함덕연대와 무주연대로 13㎞ 정도이다.
▶ 용두암
「용머리바위」는 용담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용머리」와 같은 지명담의 일종인데, 두 이야기 모두 흥미롭게도 힘센 장사와 백마가 등장한다. 그러나 「용머리」가 ‘아기장수 설화’를 모티프로 했다면 「용머리바위」는 백마를 잡은 힘센 장사 이야기가 주요 모티프로, 전혀 다른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다.
[채록/수집상황]
1959년 8월 제주시 용담동에 사는 강성보가 구연하고 진성기가 채록한 것으로, 2001년 출판한 『신화와 전설』에 실려 있다.
[내용]
옛날 용담동 서북쪽 바다에 백마가 한 마리 살았는데, 용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다. 바다 속에서 산다는 백마 이야기가 퍼지자 하루에 쌀 한 섬, 돼지 한 마리를 먹는다는 힘센 장사가 백마를 잡겠다고 찾아왔다. 그런데 백마는 바닷가에서 놀다가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면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며칠 동안 백마를 기다리던 장사는, 갑자기 사람 크기만한 허수아비를 만들더니 바지와 저고리를 입히고는 바닷가 한쪽에 세워 두었다. 허수아비가 세워지고 며칠 동안 백마는 바다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수아비가 움직이지 않은 채 한 자리에만 서 있자 백마는 조심스레 바닷가로 나왔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다. 이제 백마는 허수아비가 서 있는 바닷가에서 예전처럼 마음껏 뛰어다니며 놀기 시작했다. 허수아비 옆으로 와서 놀기도 하였다. 그 모습에 장사는 '됐다!‘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며칠 후, 장사는 한밤중에 허수아비 대신 허수아비가 입었던 옷을 입고 서 있었다. 날이 밝자 백마가 나와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장사가 서 있는 곳으로 왔다. 그 순간, 장사는 백마의 목덜미를 꽉 붙잡았다. 백마는 달아나려고 요동을 쳤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백마는 하늘을 향해 세 번 큰 소리로 울었는데, 울음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먹구름이 일고 천둥이 치더니 바람과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 얼마 후, 날이 개어서 보니까 백마는 사라지고 없고, 대신 물 속에 용의 머리와 같은 바위가 서 있었다. 사람들은 용이 되고 싶었던 백마가 바위로 변한 것이라고 믿었다.
[모티프 분석]
「용머리바위」는 자신의 용력을 자랑하기 위해 백마를 죽인 힘센 장사 이야기이다. 장사가 기지를 발휘해 허수아비를 세우고 결국 백마를 잡는 데 성공하였으나 백마는 간 데 없고 용머리바위만 남았다는 이야기로, 지명담에 기지담이 덧보태진 형태라고 하겠다.
▶ 용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암1동과 용담2동의 경계에 있는 못과 바위.
한천 하구에 형성된 깊은 소(沼)인 용연은 영주 12경중의 하나인 '용연야범(龍淵夜泛)'의 장소로 '취병담(翠屛潭)'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제주도에 부임한 목사들이 용연에서 여름밤 뱃놀이를 풍류로 즐겼다고 한다.
[명칭유래]
용이 살았던 연못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용두암은 용이 머리를 처든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자연환경]
용연을 구성하고 있는 지질은 수직절리가 잘 발달된 두꺼운 현무암질 용암과 깊은 V자 계곡의 형성으로 특징 지워진다. 바다와 만나는 하구에는 자갈과 모래로 된 하천 퇴적물이 쌓여 있으며, 암석면에는 마애각들이 있다.
용두암 부근은 높은 절벽을 이루고 있고, 동쪽과 서쪽으로는 지형이 완만해지는 것으로 보아 두꺼운 용암이 흘렀을 것으로 추측된다. 용두암을 옆에서 보면 용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얇은 판을 길게 세워 놓은 모양이다.
이러한 용두암은 클링커(clinker)가 발달된 두꺼운 아아용암류(aa lava flow)에 나타나는 형태로, 이 용암류가 흘러오면 용암류의 상하부에는 두꺼운 클링커 층이 형성되는데, 용두암은 클링커 층을 뚫고 뿜어져 나온 용암의 특이한 구조라고 한다.
[현황]
용연에는 매년 여름밤 '용연야범'을 재현한 선상음악회가 열리는 연못으로, 구름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용연에는 동한드기와 서한드기를 연결한 구름다리가 설치되어 있으며, 조명 시설이 되어 있어 밤에는 야경이 아름답다. 용두암은 용연 서쪽 해안가에 솟아 있는 용의 머리를 닮은 바위로, 제주도의 상징적인 관광지로 이름나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바위이다.
▶ 용연과 기우제
용담1동에서 가장 유명한 설화 중의 하나가 기우제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기우제와 관련된 설화만도 여러 개의 버전이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가뭄이 들 때 용연에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것이었다. 물이 많은 동네인 만큼 물에 관련된 설화도 많고, 그 버전도 많았다. 다행히 노인회 사람들의 소개로 몇 권의 책을 통해 문자로 정리되어 있는 설화를 접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용연과 관련된 두 가지 버전만 소개하겠다.
[버전 1]
『제주도의 문화유산(제주도, 1982)』에는 용소라고 불리는 곳이 예로부터 동해 용이 와서 풍치를 즐겼던 곳이라는 것이다. 몇 백년 전엔가 크게 가물어 제주 백성이 다 굶어 죽게 된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목사가 크게 걱정하여 몇 번의 기우제를 지내도 비는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때 무근성에 유명한 고씨 심방(巫)이 살고 있었다. 고씨 심방은 어느 날 주막에 앉았다가 지나가는 소리로 ‘용소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올 것을……’하고 말했다. 이 말이 목사의 귀에 들어가 고씨 심방은 동헌(東軒)에 불려갔다.
“네가 용소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온다고 했다는데 사실이냐?”“예, 그리 말했습니다.”“그러면 곧 기우제를 해서 비가 오도록 해라, 비가 안 오면 너는 각오해야 하느니라.”
고씨 심방은 수심이 가득 찼다. 목사의 영이라 할 수 없이 기우제를 올리기로 했다. 이레 동안 목욕재계하여 몸 정성하고 쉰대자 용을 짚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용소 바로 옆 당밭에 제단을 꾸몄다. 쉰대자 용의 꼬리는 용소물에 담그고 머리는 제단 위에 걸쳐놓아 이레 동안의 굿을 시작했다. 고씨 심방은 천상천하의 모든 신들을 청해 들이고 이레 동안 단비를 내려 주도록 빌었다. 굿을 끝마쳐 모든 신들을 돌려보내게 되어도 하늘은 쾌청하게 맑아 비는 내릴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든 신들은 상을 받고 고이 돌아섰건마는 이내 몸은 오늘날 동헌 마당에 가면 목을 베어 죽게 됩니다. 명천같은 하늘님아 이리 무심하옵니까?”
고씨 심방은 눈물을 흘리며 신들을 돌려보냈다. 이때였다. 동쪽 사라봉 위로 주먹만큼한 검은 구름이 보이더니 이 구름이 삽시간에 하늘을 덮고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고씨 심방 이하 굿을 하던 심방들은 환성을 울렸다. 쉰대자 용을 어깨에 메고 비를 맞아 가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안의 백성들이 모두 나와 용을 같이 메고 풍악 소리에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일행이 동헌 마당에 들어가니 목사 이하 이방, 형방 등 모든 관속들이 나와 용에게 사배(四拜)를 하고 백성들과 더불어 큰 놀이를 베풀었다. 그로부터 용연은 기우제에 효험이 있다 하여 가물 적마다 여기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버전 2]
『향토지(제주서초등학교, 1986)』에는 조선 선조 때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었다. 조선 선조 어느 해였다. 음력 5월 초순부터 7월 하순까지 석달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고 불덩어리 같은 태양이 내리 쪼여 농작물은 물론 잡초까지 말라죽게 되었다. 그러므로 샘물이 없는 촌가에서는 음료수가 없어서 큰 야단법석이고 앞으로 큰 흉년이 되어 굶어 죽을 형편이니 농민들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이때 농민들이 걱정하는 것 이상으로 수심에 잠겨 무엇인가를 고심하고 있던 제주목사는 눈을 번쩍 뜨고 부하 관속들을 대청으로 불러들이라고 호령하였다. 부하 관속은 모여 와서 꿇어 앉아 대령하니 사또가 위엄있는 목소리로 “너희들 오늘부터 3일간을 목욕재계하고 3일 후에는 제물을 깨끗이 준비한 후 용연근처에 일반민 통행을 금하고 정한 곳을 가려 설단(設壇)하라” 하였다.
목사가 생각한 것은 이러했다. 옛날 중국 은나라 탕왕(湯王)은 7년 대한(大旱)에 임금 자신이 손발톱과 머리를 깎고 목욕재계하여 정성을 다한 후 기우제문을 지어 읽으니 큰 비가 왔다는 고사가 생각나서 은나라 탕왕처럼 한번 실천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사 자신도 3일 동안을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한 후 용연동쪽 석벽 곁에 마련된 제단 앞에 나아가서 분향 재배하고 다음과 같이 제문을 낭독하였다.
오랫동안 가물게 되는 것은 본관이 정치를 잘못한 까닭입니까?(政不節與)
백성을 혹독하게 부린 까닭입니까?(使民疾與)
집을 너무 화려하게 한 까닭입니까?(廣室榮與)
여자들을 가까이 한 까닭입니까?(婦謁盛與)
뇌물을 많이 먹은 까닭입니까?(苞苴行與)
참소하는 자를 가까이 한 까닭입니까?(讒夫與與)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과 같이 목사가 기우제를 지낸 날 밤부터 제주 전도에 걸쳐 큰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후부터 가뭄이 심할 때는 용연에서 기우제를 지냈고, 기우제를 지내고 나면 용이 비를 내려주었다는 것이다. 이후 사람들은 용연과 기우제는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삼도2동
정치ㆍ문화 일번지, 삼도2동은 제주시의 중심지로서 제주목관아지가 있는 곳이며 제주특별자치도의 정치ㆍ문화 일번지라 할 수 있다. 삼도2동에는 우체국, 시청청사, 법원, 중앙의원 등 문화시설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제주도의 주요한 관공서가 있었던 곳이며, 상권이 번창했었다. 그러나 제주시의 시가지 개발에 맞물려서 1980년대 중반부터 인구이동이 나타나면서 상권이 쇠락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중앙로, 칠성통, 동문시장, 산지천 등 주민들의 생활권과 밀접한 지역이며, 탑동이 매립되고 호텔과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또 하나의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삼도2동에는 제주교육의 산실인 제주북초등학교가 상징적으로 남아있다.
제주시삼도2동은 이렇게 역사적인 의미가 강한 마을이다. 보통 한 마을을 행정동으로 구분할 때 역사가 오래된 곳을 1동이라 하는데 삼도동은 예외적으로 묵은성(古城) 일대가 2동이 되고 제주시중앙여자중학교 서쪽 대도로를 기준으로 해서 서쪽 방면을 1동으로 구분해 놓았다.
▶ 묵은성은 관공서 지역
제주도지사 관사는 지금 노인회관(노인대학원) 바로 앞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부터 제주목관아지를 중심으로 해서 관공서가 모여 있었다. 우선 목관아지에 있던 관공서에는 제주도청, 제주경찰서, 제주세무서(목관아지 확장 공사 터), 그 아래에 법원이 있었다. 제일은행 자리는 금융기관이 모여 있었고 현재 로베로 호텔 자리는 제주차부(제주시외버스터미널)였다. 이렇게 제주시 핵심 생활권이었던 묵은성이 1980년대 중반 이후 옛 영화를 간직한 채 부활을 꿈꾸고 있다.
즉 묵은성에 있던 관공서(관덕정 북쪽에 검찰청과 법원이 있었고, 동쪽에는 경찰서와 우체국, 서쪽에는 도청, 도지사 관사는 북초등학교 정문 앞 노인회관터에 있었음)가 주로 1980년대 중반부터 다른 곳(광양로터리에서 한라산 방면)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은 옛 영광만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묵은성에는 제주 토호들이 살았는데 안정된 선비나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묵은성이 제주시 중심지였는데 1980년대 중반부터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많이 주거지를 이동하게 된 것은 도시화 개발정책에 따라서 신시가지를 확장시키고 아파트를 많이 지으면서 젊은층들이 빠져나갔다. 원주민들도 형편에 따라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가면서 옛 사람들이 거의 없어지고 있다.
▶ 성안(城內)
제주시라고 하는 것이 옛날에는 성안이라고 했다. 성안이라고 하는 것은 남문, 서문, 동문을 중심으로 해서 그 안을 가리킨다. 적은 면적이지만 성안을 중심으로 해서 도시가 번창했으며, 예로부터 부호들도 많이 살았다고 한다.
성안(城內)은 소위 사대문 안을 가리킨다. 지금도 오현단(제주시남문로터리 동쪽에 성곽이 복원됨)에 성의 일부가 남아있으며 성담은 오현단에서 출발해서 남초등학교와 제주대학병원 사이로 해서 현대극장이 있던 곳을 지난다. 관덕정 뒷길로 돌면 성 울타리가 된다.
목관아지 일대를 묵은성이라 부르는 것이다.
성이 있으니까 성문이 네 개 있어야 하는데 남문로터리쪽은 ‘남문’이고, 동문로터리쪽은 동문’이라 짐작하지만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병문천이 있는 서문다리와 관덕정 사이에 ‘서문’이 있었고, 북문은 바다 쪽이어서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 한다.
▶ 칠성통의 역사(본정통)와 상권
일제강점기에 제주도는 전라남도의 행정구역에 속했기 때문에 제주도(濟州島)였다가 1946년에 제주도(濟州道)로 승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제주도 책임자를 ‘도사’(島司)라 했으며, 경찰서장을 겸직했다. 또한 제주읍 산하 주재소(현재의 파출소) 주임도 모두 일본인(소학교 교장도 일본인임)이 맡았으며, 면장만 한국인이었다.
지금의 제주시는 ‘제주면 → 제주읍 → 제주시’로 행정구역 단위가 바뀌었는데 제주읍에는 공립 초등교육기관으로 제주북초등학교 하나가 있었고, 일본인들은 칠성통 일대를 생활근거지로 삼았다. 여기서 칠성통이란 제주시 중앙우체국과 동문로터리 사이며, 큰 길을 중심으로 해서 북쪽에 있는 상가 지역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칠성통을 ‘본정통’이라 불렀는데, 이는 일본말로 일본사람이 사는 동네란 뜻이라 한다. 본정은 제주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어느 지역을 가도 본정이 하나씩은 있었다고 한다. 즉 원래는 ‘일본정’인데 ‘일’자를 빼버리고 그냥 본정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일본사람들이 칠성통의 상권을 잡았는데, 제일 큰 상점들은 지금의 백화점과 비슷하고, 일종의 종합상사여서 잡화, 문방구 등 많은 것을 취급했다. 그 당시 칠성통 상가에서는 주로 생필품을 팔았는데 일본 사람들이 경영하는 상점은 조금 고급스러운 물건이 있었지만 보통사람들은 이용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칠성통 상점 주 고객은 성안 사람들이고 그때는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시골 사람들은 이용하지 않았다. 제주 사람들은 일용잡화(양말, 신발 등)를 주로 구입했다. 시장은 오일장밖에 없어서 집안에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기다렸다가 오일장에 가서 구입할 정도였다고 한다.
관덕정 가장자리는 매일시장이 섰던 곳이다. 매일시장에는 야채가게, 정육점, 과일가게가 있었고, 관덕정 맞은편 남쪽 국민금고가 있던 곳은 식산은행터다. 그 동쪽으로 가면 비단가게(이화평 씨가 주인임)가 있었다.
이 비단가게는 주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묵은성 주민들이 고객이었고, 중국제품을 팔았다. 일제강점기에 비단가게(삼도2동과 일도동의 경계임)가 둘 있었는데 광복 후에는 없어졌다.
▶ 제주시 오일장의 변천
산지포구(제주시건입동 바닷가)로 가는 쪽에 제주시 최초의 오일장이 있었으며, 광복 후에는 이 오일장이 남문통(제주시남문로터리 일대)의 제주시민회관이 있던 자리로 옮겼다. 시가지가 개발되면서 인구가 이동하니까 오일장도 이전했는데 당시만 해도 그 일대는 밭이었고 4ㆍ3사건(1948년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민중봉기) 후에야 개발되기 시작했다. 남문통에서 한 5년 정도 오일장이 섰는데 이곳에 인구가 밀집되니까 다시 1960년대에 서사라로 이동했다. 지금의 적십자회관 서쪽에 오일장을 만들었다. 그 후 한라병원 쪽으로 갔다가 사라봉 근처로 옮긴 것은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이다. 그 다음에 서중학교 근처로 옮겨서 지금 제주민속오일장이 형성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교통이 발달되지 않은 때니까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해서 지금처럼 먼 마을에서 제주시 오일장에 올 수 없었다. 그래서 오일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주로 성안 사람들이었다. 성안이란 묵은성과 남문로터리 일대를 말한다.
▶ 탑동매립과 삼도2동의 도시화
1980년대 중반에 탑동이 매립되었으니까 그 전에는 바닷가였는데 지금은 사람들의 생활공간으로 변해버렸다. 그 전에는 밀물과 썰물의 변화도 알 수 있고 바닷가에서 걷기도 했는데 지금은 너무 인공적이어서 삭막하게 느껴진다고 아쉬워했다.
북초등학교가 1907년에 설립되었으니까 2007년이면 100주년이 된다.
1980년대 중반부터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서 삼도2동은 주택가에서 상가로 변모하고 있다. 탑동이 매립되고 주변에 서비스업종이 들어오면서 덩달아서 묵은성도 변하고 있으며, 지금은 노후된 주택들이 있거나 폐허로 남아있는 집들이 있어서 죽어있는 동네 같다고 한다.
6ㆍ25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주도로 피난민이 많이 들어왔으며, 묵은성에도 피난민촌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넓은 빈터에 천막을 치고 집단으로 거주해서 천막촌(피난민 천막촌이 있던 자리는 현재 창성이용원과 해수식당 일대임)이라 부르기도 했다. 피난민들이 제주시에 들어와서 빈터가 있으면 천막을 쳐서 생활했으며, 천막교회는 묵은성 통물(용천수로 식수였음)이 있는 곳에 세워서 찬송가 소리가 주변에 퍼지기도 했다. 주인이 없는 터는 말할 것도 없고 주인이 있는 빈터에도 천막을 설치해 버리면 나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또한 피난민들은 일반 민가에도 세 들어 살았다.
▶ 6ㆍ25전쟁과 피난민촌
제주사람들도 가난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피난민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줄 형편이 아니었다. 거의 자급자족하던 시절이라 농사를 잘 지으면 보리밥을 먹을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끼니를 때우기도 어려웠다. 피난민이 제주에 와서 낯설어 한 풍경은 겨울에도 푸른색 채소를 보거나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요즘은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그때만 해도 하우스 재배가 없던 시절이라 제철에만 볼 수 있는 색이었다. 그래서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겨울에도 눈이 오는데 배추를 먹을 수 있으니까 살만 하다고 여기기도 했다. 제주도는 6ㆍ25의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으며, 피난민들이 내려오니까 실감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 칠성통에 양장점 등장과 칠성통 양복점의 생명력
1950년대 중반에 칠성통에 양장점이 생겼고 그 당시 민들레양장점이 있었고, 그 후에 노라노양장점이 생겼고, 1970년대에는 하니양장점이 생겼다. 주로 성안 사람들은 이 세 양장점에서 투피스 등을 맞춰 입었다.
▶ 제주시에 극장 등장
해방 직전에 제주시에 영화관(현대극장과 제주극장)이 생겼다. 중앙극장은 광복 후에 생겼으며, 중앙로터리에서 탑동 방향으로 내려오면 서쪽(대동약국 맞은편) 도로변에 있었는데 지금은 도로로 변했다.
그 후에 제일극장이 생겼으며 동양극장은 아주 뒤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영화극장이라고 해도 옛날에는 쇼를 많이 공연하였다. 중앙극장에서 가수들이 공연한 것은 한 1960년대 중반이라 한다.
▶ 상수도 이용하기
삼도2동 사람들은 해안가 용천수를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집안에 우물이 있으면 펌프를 사용하기도 했다. 어른은 물허벅(물동이)을 이용하고, 어린이는 대바지(어린이용 물동이)를 사용했는데 일제강점기에 흙으로 빚은 허벅도 있었지만 해방 후에 양철로 만든 허벅도 나오기 시작했다.
동네에 공동 우물이 있어서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다. 1963년에 상수도 시설이 들어왔고, 그 당시는 공동수도가 아니고 집집마다 수도 파이프를 묻는 개인수도를 설치했다. 제주시에서 상수도 시설을 맨 처음 한 곳은 잘 모르고 삼도동 근처에는 산짓물, 금산물이 있었다. 금산물은 한전발전소 있던 자리이다.
용담동 사람들은 선반물을 이용하고 묵은성에 통물이 있어서 삼도동 사람들은 두레박으로 허벅에 길어다가 먹었다. 선반물(용천수)은 탑동 소방서 맞은편에 있었으며, 주변 사람들은 이 물을 식수로 이용하고 빨래도 했는데 병문천을 복개하면서 이 물통이 매립되었다. 삼도2동 주민들은 관덕정을 기준으로 해서 동쪽은 산짓물을 이용하고 서쪽은 선반물을 이용했다.
▶ 묵은성의 공장들
한일소주 공장은 처음에 삼도2동 북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도로가 되었다. 유창산업은 유채공장인데 지금 오리엔탈호텔 서북쪽 소방서가 있는 자리에 있었다. 제주도에서 재배한 유채를 전부 수매해서 기름을 만들었고 주로 일본으로 수출했다고 한다. 삼도2동에는 유채공장과 한일소주 공장 말고도 양조간장공장이 있었다.
6ㆍ25전쟁 때 공장도 피난 온 셈인데 세계고무공장이 있었다. 제주대학교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 근처 바닷가에 가건물을 지어서 고무를 생산했다.
해방 후에 삼도동 출신이 청주(정종)공장을 경영했다. 술 찌꺼기는 단무지를 만드는데 활용했다.
▶ 칠성통 미용실과 사교춤의 등장
1954~5년쯤에 제주시에 처음으로 미장원이 생겼는데 지금 제주은행본점 자리에 있었다. 당시 파마 비용은 이백~삼백원 정도라 한다. 1955년 이후 1960년을 넘으면서부터 여러 군데에 미용실이 생겼으며, 그 당시 미용사들은 서울에 있는 미용실에 가서 몇 달씩 배워왔다. 칠성통에 오고파 미용실도 있었는데 오래 운영되었다고 한다.
제주시에서는 주로 1960년대 초반에 양춤이 유행했는데 가정집에 모여서 축음기를 켜 놓고 춤을 배웠다고 한다. 대부분 서로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춤선생(남자)을 청했다. 또한 먼저 배운 사람이 가르쳐 주기도 했는데 약 10년 간 유행했다고 한다. 양춤이 유행하면서 가정불화가 생기기도 했다. 제주시동문로터리 ○○ 약국 2층에 무도회장이 있어서 동문시장에 간다면서 오후 2시쯤에 장바구니를 들고 이곳을 드나든 가정주부들로 있었다고 한다.
▶ 대중목욕탕
대중목욕탕이라고 하는 것이 일제강점기 제주시칠성통과 건입동에 두 곳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목욕탕을 1년에 한번 정도 갔는데, 주로 정월 명절을 위해서 섣달 그믐날에 가는 정도였다고 한다.
▶ 탐라 입춘굿놀이
탐라국 입춘굿놀이는 탐라시대부터 제주선인들이 새해 시작인 입춘날 행했던 의례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입춘을 진정한 새해로 보았다. 이 놀이는 입춘에 맞춰서 제주목사가 제주도내에 있는 심방(무당)을 불러 모아서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고 온 도민들의 평안을 기원했던 지방의 제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놀이는 대한제국말기까지 행해지다가 일제강점기 문화말살정책이 시행되면서 중단되었다. 전통문화를 복원하고 개발하려는 의지가 높아지자 1999년 제주시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가 공동으로 이 놀이를 부활하고 2007년까지 전승해 오고 있다. 지금은 제주도의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매김 되었다.
▶ 관덕정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정자.
[개설]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1448년(세종 30) 신숙정 목사가 창건하였다. 좌우에 관아 시설이 위치해 있어서 관덕정은 제주도를 상징하는 건물이었으며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현재의 글씨는 1882년(고종 19) 박선양 목사의 글씨)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관덕’이란 이름은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이다”라는 『예기(禮記)』의 내용에서 유래되었다. 창건 당시의 현판 관덕정’은 제주 지역 출신 고득종의 간청으로 안평대군이 써준 것이었으나 불에 타고 없어졌다. 그 뒤에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아계이산해가 쓴 액자가 걸려 있었다.
[변천]
본래 3칸 건물이었던 관덕정은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와 개축 과정을 거쳤다. 1480년(성종 11) 양찬 목사, 1559년(명종 14) 이영 목사, 1690년(숙종 16) 이우항 목사, 1753년(영조 29) 김몽규 목사, 1778년(정조 2) 황최언 목사, 1833년(순조 33) 한응활 목사, 1851년(철종 2) 이현공 목사 때에 중수되었다.
그리고 1882년(고종 19) 박선양 목사가 관덕정을 너비 13칸, 가로 10칸, 높이 5칸으로 중건하였다. 당시 지붕 4각에는 풍경을 달았고, 실내 서쪽 위에 ‘탐라형승(耽羅形勝)’, 중앙 위에는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입구 위에는 ‘관덕정’이라는 액자를 달았다.
실내 벽에는 그림을 그려놓았는데, 대표적인 것은 「상산사호(商山四皓)」, 「취과양주귤만교(醉過楊州橘滿轎)」,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대첩도(大捷圖)」, 제갈량의 「진중서성탄고도(陣中西城彈琴圖)」, 한의 유방과 초의 항우를 주제로 한 「홍문연(鴻門宴)」, 그리고 「대수렵도(大狩獵圖)」, 「십장생도(十長生圖)」 등이다.
그러나 관덕정은 1924년 도사(島司) 마에다 요시지[前田善次] 때에 중수되면서 긴 처마가 절단되는 등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말았다. 현 건물은 1969년에 중수된 것이다. 관덕정과 관련해서는 창건기와 중수기, 그리고 수편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내용]
옛날에 관덕정을 지을 때의 일이다. 천하에 제일가는 정자를 짓기 위해 전국에서 유명한 목수들을 불러들였는데, 다 지어서 상량식을 할라치면 쓰러지고 또 쓰러진다. 목수들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무슨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정성을 다해서 짓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웬 중이 지나가다가 혀를 끌끌 차면서 “또 무너질 것을…….” 한다. 목수들은 중이 괜한 소리를 한다면서 야단을 쳐서 중을 보내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다 지어서 상량식을 치르는데, 또다시 와르르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목수들은 아무래도 일전에 중이 한 말이 걸리는지라 물어물어 중을 찾아갔다. 그런데 중이 하는 말이, 닭이나 돼지 상량식으로는 안 되고 사람으로 상량식을 해야 한단다. 목수들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을 희생하여 상량식을 합니까?” 하자 중이, “상량을 준비하면서 ‘상량!’ 하고 큰소리를 지르면 지나가던 솥장수가 죽을 테니 그 사람을 희생하면 됩니다.” 하고 가르쳐 주었다.
목수들이 중이 가르쳐 준 대로 상량을 하면서 “상량!” 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랬더니 중이 말한 대로 지나가던 솥장수가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 무거운 솥을 머리에 인 채 지나가던 솥장수가 갑자기 들리는 큰 소리에 무슨 일인가 하고 돌아보다 넘어지면서 솥에 목이 깔려 죽은 것이다. 그리하여 목수들은 죽은 솥장수를 희생으로 상량식을 지냈는데,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쓰러지지 않고 완공이 되었다고 한다.
▶ 관덕정 앞 광장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신숙청(辛淑晴) 제주목사가 창건한 관덕정 앞 광장.
[개설]
관덕정 광장은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1448년(세종 30) 신숙청 제주목사가 창건한 관덕정 앞 광장이다. 관덕정은 제주도를 상징하는 건물로서 제주목관아가 자리한 이 일대는 제주 정치의 중심지였다.
[변천]
1901년(광무 5)에 외국인 신부의 위세를 믿고 범법(犯法)을 자행하던 천주교도와 제주도민 간의 충돌로 이재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 광장에서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피살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프랑스 공사가 우리 정부에게 프랑스 신부의 피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여 1904년(광무 8)에 제주도민이 6,315원을 배상하였다. 또한 근대에 들어서는 제주 4·3사건 당시 무장대의 유격대장이었던 이덕구의 시체가 이 광장에서 일반에게 공개되기도 하는 등 제주 정치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관덕정 광장은 제주 문화의 중심지로서 1910년대까지도 입춘 무렵에 제주도 내 무당들의 우두머리, 즉 도황수를 뽑는 입춘굿 놀이가 해마다 열리기도 하였고, 시장이 열려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 제주목 관아
제주목관아는 조선시대 제주 지방 통치의 중심지로서, 지금의 관덕정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들어서 있던 관아 시설을 말한다. 1991년부터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탐라국으로부터 조선과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기의 유구와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관아 시설인 동헌과 내아의 건물지 등이 확인되어 제주목 관아지로 밝혀진 중요한 유적이다.
관아 시설은 일제강점기 때 집중적으로 훼철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2002년 12월 1단계 복원을 완료하고 현재 2단계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변천]
제주목 관아지는 탐라국 시대부터 성주청 등 주요 관아 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아 시설은 1434년(세종 16) 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진 뒤 안무사 최해산이 바로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그 다음 해인 1435년에 골격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중축과 개축이 이루어졌다.
고득종이 쓴 『홍화각기(弘化閣記)』는 바로 그간의 경위를 밝히기 위해 쓴 것으로, 여기에 따르면 당시 제주목의 관아 시설은 총 58동 206칸 규모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관덕정을 빼고는 집중적으로 훼철되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1991년부터 시작된 발굴 조사 과정에서 초석과 기단석 등이 확인되었다.
이런 사실을 토대로 하고,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와 『탐라방영총람(耽羅防營總覽)』 등 당대의 문헌 및 중앙문화재위원과 향토 사학가, 전문가 등의 고증과 자문을 거쳐 관아지 복원 기본 설계를 완료, 2002년 12월에 1단계 복원 완료에 이어 2단계 복원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1991년 10~12월과, 1992년 5~12월의 2차에 걸친 제주대학교 조사단의 발굴조사 결과 제주목 관아지에서는 탐라 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여러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이와 함께 관아의 주요 시설인 동헌과 내아의 건물터와 규모가 확인됨으로써 이 곳이 고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도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 중요한 유적지였음이 밝혀져, 제주목 관아지 남서쪽에 있는 관덕정을 포함하여 사적 제380호로 지정되었다.
[현황]
1단계 복원 사업으로 제주목사의 집무실이었던 ‘홍화각’을 비롯해 집정실인 ‘연희각’, 연회장으로 쓰였던 ‘우연당’과 ‘귤림당’ 등의 관청 건물과 부대시설이 복원되었으며, 2단계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2006년 2월 2층 누각인 ‘망경루’의 복원이 완료되었다.
[의의와 평가]
제주 역사의 정체성과 중심을 설정하는 뜻깊은 복원 사업에 제주 시민의 자발적인 동참이 이어지는 등, 제주목 관아는 제주도민의 혼이 담긴 귀중한 역사 유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 오현단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조선 시대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 발전에 공헌한 다섯 사람을 배향한 옛 터.
[개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귤림서원이 헐린 후, 1892년(고종 29) 제주 유림들의 건의에 의해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던 오현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제단이다. 이곳에는 지금도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높이 43~45㎝, 너비 21~23㎝, 두께 14~16㎝인 조두석이 각자(刻字) 없이 33~35㎝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다.
[건립경위]
단은 1578년(선조 11)에 조인후 제주판관이 1521년(중종 16) 10월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된 충암김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그의 적거지에 충암묘를 지은 것이 시초였다.
그 후 1665년(현종 6)에 최진남 제주판관이 충암묘를 현대의 오현단 위치로 옮겨 짓고, 이를 사(祠)로 하였다. 1659년(효종 10) 이회 제주목사가 원래 이곳에 세운 장수당을 재(齋)로 하여 귤림서원이라 현액하였다.
1682년(숙종 8)에는 신경윤이 절제사로 있을 때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으로 사액을 하고,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의 사현을 봉향하였다. 그러다가 1695년 송시열이 추향됨으로써 오현을 배향하게 되었다.
[문화재 국문안내문]
조선시대에 이곳 제주도에 유배되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의 교학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5현)을 기리고 있는 제단으로, 이들의 위패를 모시던 귤림서원의 옛 터에 마련되어 있다.
5현은 중종 15년(1520)에 유배된 충암김정 선생, 중종 29년(1534)에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규암송인수선생, 선조 34년(1601)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김상헌 선생, 광해군 6년(1614)에 유배된 동계정온 선생, 숙종 15년(1689)에 유배된 우암송시열 선생 등 다섯 분이다.
고종 29년(1892) 제주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비를 세우고 제단을 쌓아놓았는데, 원래는 선조 11년(1578) 임진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조인준이 가락천 동쪽에 충암김정을 모시기 위한 충암묘를 지은 것이 그 시초이다. 현종 6년(1665) 판관 최진남이 이 묘를 장수당 남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은 뒤, 숙종 8년(1682)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여 김정 선생·송인수 선생·김상헌 선생·정온 선생 등 네 분의 위패를 모시도록 하였다. 숙종 21년(1695) 송시열 선생도 함께 모시면서 5현을 배향하게 되었으나, 고종 8년(1871) 서원 철폐령이 내렸을 때 서원이 헐리게 되어, 그 터에 이 제단을 설치하게 되었다.
단내에 있는 5현의 자취로는 철종 7년(1856) 송시열 선생의 글씨로 하여 판관 홍경섭이 바위에 새긴 ‘증주벽립’이라는 글씨와, 김정 선생과 송시열 선생의 ‘적려유허비’가 남아 있다.
▶ 건입동
건입동은 제주시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제주항 주변과 동문로터리 동북쪽, 사라봉 서쪽 일대를 가리킨다. 2000년 복원된 산지천을 서쪽 경계로, 사라봉을 동쪽 경계로 하고 북쪽에는 제주항이 자리 잡고 있고 남쪽으로는 일도동이 있다. 건입동은 영주 십경 중 사봉 낙조(紗峯落照)와 산포조어(山浦釣魚)의 아름다움을 지닌 마을이다. 사봉 낙조는 곧 사라봉에 올라 저녁놀이 물든 서쪽 하늘과 바다, 그리고 제주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경치이다. 초가집 대신 고층건물 들어서고 사라봉의 나무들이 자라 시야가 가려져서 옛 정취를 느끼기는 어렵지만 아직도 사라봉에서 낙조를 보기위해 저녁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산포조어는 날이 저물어 어둠이 짙어갈 때 산지포구에서 한가로이 낚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만들어진 말인데 이제는 바다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없었지만 여름날 바다에 한치잡이 배들이 불을 밝히고 작업을 하는 모습은 바다가 하늘인지 불빛인지 별빛인지 온통 반짝이는 장관을 이룬다.
건입동은 산짓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마을이기 때문에 ‘산지’라 속칭된다. 산짓내 동쪽 일대인 ‘동착의’, 서쪽 일대인 ‘서착의’, 제주동초등학교 동북쪽의 큰 머들이 있는 ‘동대머들’, ‘지장깍동산’, 위쪽 지경인 ‘인무정가름’, 일인들의 적산가옥이 많이 있던 ‘사택의’, 화북과 경계 지점인 ‘으니 루’, ‘공덕동산’, 복신미륵이 있는 ‘미럭밧동네’, ‘지장깍물’과 ‘내깍’을 중심으로 한 ‘지장깍물’, 동네 산짓내 서쪽 서부두 인근 ‘해짓굴’, ‘셋골’, 그리고 ‘앞돈지’, ‘졸락코지’ 동네, 개목, 금산물이 있는 ‘금산물’ 동네, 사라봉 동네 등 작은 마을이 여럿 보여 건입동을 이루고 있었다.
옛날부터 건입동을 ‘건들개’라고 하였다. 포구 주변지역인 ‘개맛동네’를 ‘건들개’라 칭하기도 했다. 『탐라순력도』에는 ‘산지촌(山之村)’으로 그 밖의 옛 문헌이나 지도에는 ‘건입포(健入浦 · 巾入浦)’로 표기되어 있다. 이것은 한자의 음과 뜻을 차용한 이두식 표기이다. ‘건들개’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 고을나의 15대손 고후, 고청 등 3형제가 신라에 가서 많은 비단과 보물을 받고 돌아올 때 건강한 모습으로 들어온 개의 어귀라 해서 ‘건들개’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둘째, 건입동의 위치와 지형적 조건들을 볼 때 북쪽이 바다이므로 건들바람이 건들건들 불어온다고 해서 ‘건들개’라는 것이다. ‘건들건들’은 시원한 기운을 띤 바람이 연달아 가볍게 부는 모양을 뜻하는 제주어이다. 또 건입동의 옛 이름을 ‘산저포(山底浦)’, ‘산지’라고도 하였다. 진원일(前 제주대 교수)의 글 (『제주도』통권 42호, 1969)에 의하면, 처음에서 발원한 ‘산지천’ 상류의 ‘가락쿳물’(오현단동쪽)이 ‘건입포’를 지나 바다로 흘러들었기 때문에 ‘산저(山底)’였던 것이 나중에 ‘산지(山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용후는 그의 『제주 옛땅이름 연구』에서, 사라봉 서쪽 발이 뻗어 이루어진 언덕이 해안가에 높이 솟아 산지를 형성하고 있어서 ‘산지’라 하고 있다.
고봉만은 건입동의 마을 명칭에 대해 첫 번째의 의견과 같이 건강하게 잘 들어왔다고 ‘굳셀 건(健)’자에 ‘들입(入)’자를 써서 ‘건들개’라는 이름을 쓴다고 설명한다. 고을라 15대손 고후, 고청, 고개 삼형제가 배를 만들어 타서 신라국에 갔었다고 한다. 신라국에 가서 신라에서 성주라는 칭호를 받아가지고 다시 건입동 포구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건입동 포구로 나가서 다시 들어왔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설명했다.
사라봉은 건입동 387-1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다. 봉우리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망망한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고, 남쪽으로는 한라산이 웅장하게 멀리 보이는가 하면, 눈 아래로는 제주시가 한 눈에 들어와 그림같이 아름답다. 특히 저녁 때 붉은 해가 온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지는 광경이 장관이다. 사라봉 정상에는 망양정이 있고, 그 바로 북쪽에는 조선시대 때의 봉수대(제주도기념물 23호)가 복원되어 있다. 현재 사라봉 일대는 공원화되어 있다. 사라봉 동녘 기슭에는 의병항쟁 기념탑, 의녀반수 김만덕의인묘비, 순국지사 조봉호의 기념비와 ‘모충사’가 있다. ‘모충사’ 서쪽은 ‘금산물’을 끌어올려 건입동·일도동, 이도동·용담동·삼도동 일부 지역으로 급수되는 사라봉정수장이 있다. 정수장 바로 서쪽은 ‘충혼각’이다. 이 충혼각은 현재 건입동 포제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 별도봉과 같이 연결되어 공원으로 개발되어 시민의 좋은 놀이터 겸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건입동에 사는 사람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사라봉 입구까지 차를 몰고 와서 세워놓고 사라봉을 오르내리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아침, 저녁으로 볼 수 있다. 새벽 4, 5시 쯤 운동 나온 사람들의 ‘야호’하는 소리가 건입동의 아침을 연다.
고봉만은 영주 십경인 산포조어, 사봉낙조 그 모두다 사라봉에서 보는 것이 제일이라고 했다. 사라봉 정상에 표지판을 만들어 설명해주는 것이 있으면 어렴풋이나마 옛 사람들이 여기서 봐서 이런 걸 느꼈구나 하고 알 수 있으므로 사라봉 정상에 사봉낙조와 산포조어 알림 표지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전순자는 동초등학교 재학 시절 사라봉에 소풍을 갔었다고 하고, 추석 때는 마을 주민들이 사라봉에 가서 놀곤 했었다고 했다. 시내에서 마땅히 놀러 갈 곳이 없으므로 사라봉은 건입동 사람들에게 놀이터, 휴식 공간, 야유회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던 듯하다. 지금도 운동하는 사람들로 붐비기는 마찬가지이다.
▶ 산지천
‘산지천’은 ‘산저천(山底川)’, ‘산짓내’라고도 한다. 이원진의 『탐라지』는, ‘산저천은 성(城) 동쪽 1리에 있다. 즉 가락천의 하류가 2리쯤 바다로 흘러 들어가 건입포가 되었다. 지금은 성 안에 있다’하고 있다. 옛 문헌에는, ‘가물면 마르고, 큰 비가 내릴 때는 ‘산저천’이 범람하여 인가가 잠겼다‘라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산짓내’의 하류를 ‘내깍’이라 하는데, ‘-깍’은 ‘끝’이라는 제주어이다. 그러니까, ‘내깍’은 물 흐름이 끝나는 지점이란 뜻이다. 옛날에는 ‘산짓내’에 은어, 장어 등이 많았으며 진상도 했다 한다.
건입동민이라면 누구나 산지천에서 빨래를 하고 물놀이를 하던 어린 시절을 말하고 있으며 건입동 사람들뿐만 아니라 제주성안의 사람들은 누구나 그럴 것 이라고 했다. 90년대까지 산지천은 복개되어 땅 아래에서는 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산지천 위에 붕괴위험이 있는 허름한 상가 건물들이 있었는데 이를 모두 철거하고 2000년 복원을 결정하였다. 지금은 ‘산짓내’가 복원 공사를 마쳐서 도심 속의 공원으로 제주시의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동문로터리 옆에 음악분수가 있어 여름철이면 음악소리에 맞춰 내뿜는 분수 속으로 뛰어드는 아이들을 볼 수가 있으며, 물고기가 노닐고 비둘기도 한가로이 날아든다. 서울에 청계천이 있다면 제주시에는 산지천이 있다.
▶ 금산
금산 수원지에서부터 제주 기상대, 중앙교회, 제은상호신용금고 등이 있는 서남쪽 지대에는, 동문로터리에서 볼 때 병풍을 친 듯이 둔덕을 이루고 있다. 부두로 난 도로를 포함한 이 일대 특히, 제은금고 건물 등이 있는 남동쪽 지대가 ‘금산’의 중심지였다. 옛날에는 암벽으로 벼랑을 이룬 이곳에 나무들이 많아서 풍치가 수려한데다가 물이 좋았다. 지금도 금산물은 제주시 일부 지역의 식수원이 되고 있다. 『증보탐라지』등에는, ‘錦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禁山’이 옳은 표기라고들 한다. 잡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나라에서 금하는 것을 ‘禁山’이라고 한다. 자연 경관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금산 안에 있는 물 때문에 ‘禁山’이란 이름이 붙은 듯하다. ‘포제터’가 있었던 성역이기도 하다. 고봉만은 ‘금산’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은 산을 거쳐야 물이 나오는데 산을 금하는 것은 잡 사람의 출입을 금하여 깨끗하게 쓰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한 산에서 나온 깨끗한 물이라는 것이다. 예전에 금산에는 큰 소나무가 아주 많았었다고 회상했다.
▶ 지장샘
‘지장샘’과 ‘산짓물’은 ‘금산 수원지’ 경내에 있다. ‘금산 수원지’ 정문 쪽 ‘금산유허비(禁山遺墟碑)’ 바로 밑이 ‘지장샘’이며, 수원지 건물 서쪽에 있는 물탱크 위치가 ‘산짓물’이다. ‘지장샘’에서 흐르는 물을 ‘지장깍물’이라고 한다. 산짓물 하류 즉, 현 금산수원지 채수원에서 10미터 이내 지점에서 흐르는 물이 ‘지장깍물’인데 옛날에는 바닷가 포구였다. 그리고 바로 옆에 주정공장이 있었을 때는 취수탑을 세워 ‘지장깍물’을 송수하여 썼다고 한다. 옛날 이 근처에 지장보살을 모셨던 당집이 있었다 하여 ‘지장샘’이라 했다 한다. 원천이 깊고 물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지장샘’은 곧장 바다 쪽으로 흘러들었는데, 하류에 고인 물웅덩이를 ‘지장물깍’ 또는 ‘지장깍못’이라 하였다. 빨래를 하거나 우마들에게 물을 먹였던 곳이다. ‘-깍’은 ‘끝’이란 뜻의 제주어이다.
고봉만은 제주시를 옛날 ‘성안’이라고 불렀는데 제주성을 쌓은 안을 가리켜 성안이라 했다. 현재 제주 성지는 두 번째 쌓은 성으로 처음에는 ‘묵은성’까지만 쌓은 성이었는데 먹을 물이 모자라니까 다시 성을 늘려서 금산물을 성안에 담아놓았단다. 그래서 성안에 사람들이 물을 먹고 살게 되었다고 들었다고 했다. 금산 수원지 내에 있는 금산유허비는 1994년 5월 건입동 향토보존회에서 고봉만이 회장을 지내던 당시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현재 건입동사무소가 신축되는 근처는 전순자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이 있던 곳으로 전순자는 금산 아래에 있는 지장깍에 가서 물을 길어오고 목욕도 하곤 했었다고 했다. 지금도 여름에는 산지복지회관에서 금산수원지의 물을 이용한 냉수 목욕탕을 개설하였는데 신경통 등에 많은 효능이 있다고 많은 주민들이 찾기도 한다.
▶ 각종 공장 지대
지금 제주시가 많이 발전했지만 그 전에는 모든 것이 제주 건입동이 발상지가 되었다고 고봉만은 말한다. 해저골 동쪽 어귀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오면 다시 서쪽으로 골목이 있다. 그 골목 안에 가정집에서 등피의 부품인 ‘밤부리’를 제조하였다. 등피불에 쓰는 밤부리 공장이 있었는가 하면 탑동 도로변에 서부두 방파제 진입로와 모퉁이 금일횟집 부근에 대패공장도 있었다. 스위스 호텔 근처에 구젱기(소라) 통조림 공장도 있었다. ‘가스오브시’라고 하는 다랑어를 말린 것을 수출하는 공장도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공장이 건입동에 위치했었다. 서부두 방파제 진입로 부근에 옛날 발전기 수리 공업사와 조선 철공소도 있어 배가 드나들면서 고장 나면 고쳐야 했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부둣가에 공장들이 들어섰던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건입동이 발상지가 되었다며 건입동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지금 현대아파트 건물이 있는 곳은 1940년대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 제주주정공장이 있었다. 1만여 평의 제주주정주식회사 상단은 고구마 창고 건물들이 있었고 그 하단은 주정공장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공장 전용수로 시설을 만들어 ‘지장깍물’을 끌어다 썼다고 한다. 이곳에서 제조된 주정은 전국 술 공장에 보급되었다. 상ㆍ하단을 잇는 수로와 계단으로 된 통로도 있었다. 상단의 창고 건물은 4ㆍ3사건 당시 갱생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제주 주정공장은 1951년 개인에게 불하되었다. 고봉만은 이 공장이 남한에서 제일가는 주정공장이며 굴뚝이 50m나 되어 한라산에 올라가서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주정공장 굴뚝이었다고 설명한다. 건입동 작은 마을 속 여기저기 공장들이 많아 그런대로 밥 벌어 먹는데는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일손들 모자라서 거기가 일 하면 일당들 주었기 때문이다. 또 그 시절에 비행기는 보통사람이 못 타는 거고 전부 배로 왔다 갔다 하니까 부두가 있는 건입동이 제주시와 제주도의 관문인 셈이라는 것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일제시대에 고구마ㆍ 감자 심으라고 한 걸 수확하면 주정공장의 주원료인 고구마를 공출 받치랴 자기 먹을 것 벌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공출에 대한 기억도 잠시 떠올렸다.
▶ 천당밧 가는 구한길
제주여상 앞에서 동쪽으로 나가는 일주도로변 즉, 옛날 ‘니루’에서 크라운호텔 남서쪽 골목으로 30여 미터 들어간 주택가가 ‘천당밧’ 또는 ‘사귀왓’ 지역이다. 옛날에는 건입동이었으나 지금은 일도2동에 속한다. ‘숨굴’이 많은 지경이어서 생긴 이름인 듯하다.
어떤 농부가 소로 밭을 가는데, 쟁기 보습이 땅 속에 박힌 돌에 걸리자 소가 멈칫 섰다. 농부는 습관처럼 쟁기 손잡이와 함께 양손에 쥐고 있던 ‘가린석(가리석)’으로 소잔등을 후려치며 걸음을 재촉했다. 소가 엉겁결에 앞으로 자국을 내딛는 순간, 소의 앞발이 동굴 같은 땅 밑으로 빠졌다. 밭 갈던 주인도 소와 함께 땅 밑으로 빠져 죽었다. 제주에서는 ‘죽었다’는 말을 ‘천당 갔다’고도 한다. 동굴 같은 땅 구멍이 있는 지경이어서 ‘천당밧’이며, 요사스러운 귀신이 붙은 땅이라 하여 ‘사귀(邪鬼)왓’이다.
‘천당밧’ 지경에서 동부산업도로 입구 대로에 이르는 좁은 길이 구 5일장 남쪽으로 이어진다. 이게 옛날의 큰길이란 뜻의 ‘구한질’인데, 건입동과 일도2동과의 경계선이다. ‘천당밧’근처에 고봉만의 밭이 있었는데 밭으로 가는 길가는 길은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신작로가 생기기전에 ‘구한질’길은 폭이 좁아서 구르마(마차)에 곡식을 수확한 것을 싣고 집으로 오다보면 길옆의 돌담이나 가시덤불에 부딪혀 곡식 이삭이 많이 떨어지곤 했다고 한다. 그 길가에 고봉만이 퇴비 작업을 했던 분뇨탱크도 있었다고 위치를 설명했다.
▶ 향약
마을 회관 앞에 ‘향약’이라고 커다란 돌에 새겨져 있는데 건입동에 향약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나 돌에 새겨놓아 세운 것은 2000년 건입동 마을회에서 세운 것인데 뒤에 보면 고문으로 고봉만 이름도 있다. 고봉만은 지키는 쪽이 더 중요한 것이지 어느 때 어떤 사람이 어떤 직위를 가졌는가 나타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아래는 지금 건입동 어린이집과 마을회관 입구에 있는 향약의 내용이다.
[향약]
우리 마을 건입동은 설촌의 역사가 오래며 탐라개설 이래 북녘 대륙과의 유일한 문호였으므로 마을 이르는 곳마다 역사가 서려있다. 이와 같이 유서 깊은 우리 건입동 마을에서는 아래와 같이 삶의 지표가 되는 향약을 마련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함으로써 우리의 건전한 삶과 마을의 발전에 이바지한다.
(삶의 지표)
1. 어르신을 존경하고 젊은이를 믿을 수 있는 도덕적인 마을을 구현하자.
2. 이웃의 슬픔을 같이 슬퍼하고, 이웃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자.
3. 우리 마을을 아름답고 깨끗하고 범죄 없는 마을로 가꾸자.
4. 마을의 전통문화를 찾아 다듬고 문화유적을 잘 보살피자.
5. 새로운 지식, 새로운 정보를 알기위해 쉬임 없이 노력하자.
2000.1.1.
건입동마을회
사라진 방화수 물탱크
고봉만의 집 앞 길은 원래 길이 아니었다. 뒤쪽으로 인성 이용원과 어린이 집 까지만 길이 있었고 앞으로도 신작로로 이어지는 길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고봉만의 집 앞 길은 고봉만 소유로 되어 있는데 시청에서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9년여 동안 시청에 드나들면서 길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의 집 왼편으로 있는 팽나무 두 개도 그가 심었다고 했다. 팽나무 아래는 정자처럼 만들어 졌는데 그 밑에는 방화수 탱크 350 드럼짜리가 들어가 있다고 했다. 이 동네에 제일 먼저 정착한 사람으로 고봉만은 동네사람들과 반상회를 하였다. 길이 좁고, 허가가 나지 않아 고봉만의 집 앞으로는 길이 없으므로 불이 나도 불자동차가 들어오지 못하므로 방화수 통을 만들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아 방화수 탱크를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팽나무 아래에 묻혀있다고
꼼버치긴해도 걸엄시난 와점지예? 또시벗이랑 ㄱ.치 걸으멍 고르멍 옵서예!
번역
<조금 힘들기는 해도 걷다보니 올 수 있었죠? 다음에도 친구와 함께 걸으며 말하며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