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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
장소 |
내용 |
비고 |
08:00 |
잠실역 주변 |
서울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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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
판관대 |
이원수와 신사임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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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0 |
봉산서재와 팔석정 |
이율곡과 이항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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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 |
이효석 생가터 |
이효석의 문학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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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 |
점심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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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
방아다리약수 |
용당과 산신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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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 |
월정사 |
자장율사와 문수신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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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 |
남대 지장암 |
오대산 신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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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
상원사 |
한국의 범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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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 |
중대 사자암과 적멸보궁 |
부처님의 진신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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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 |
상원사 출발 |
평창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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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0 |
잠실역 주변 |
서울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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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강사(오덕만 선생 011-417-7481)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旅路에서 즐기는 詩 感想 ]
꽃처럼 웃을 날 있겠지요
- [김용택]
작년에 피었던 꽃
올해도 그 자리 거기 저렇게
꽃 피어 새롭습니다
작년에 꽃 피었을 때 서럽더니
올해 그 자리 거기 저렇게
꽃이 피어나니
다시 또 서럽고 눈물 납니다
이렇게 거기 그 자리 피어나는 꽃
눈물로 서서
바라보는 것은
꽃 피는 그 자리 거기
당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 없이 꽃 핀들
지금 이 꽃은 꽃이 아니라
서러움과 눈물입니다
작년에 피던 꽃
올해도 거기 그 자리 그렇게
꽃 피었으니
내년에도 꽃 피어나겠지요
내년에도 꽃 피면
내후년, 내내후년에도
꽃 피어 만발할 테니
거기 그 자리 꽃 피면
언젠가 당신 거기 서서
꽃처럼 웃을 날 보겠지요
꽃같이 웃을 날 있겠지요.
-[김용택]꽃처럼 웃을 날 있겠지요 -
평창의 문화유적
봉평은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로 유명한 곳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흥정계곡이 숨어 있다. 봉평면에서 6번 국도를 따라 5km 정도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흥정계곡이다. 흥정천은 한 여름철에도 15℃를 넘지 않아 천연기념물인 열목어가 서식하고 있다.
봉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효석 소설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일. 특히 봉평을 찾는 이들이 가장 기대하는 것이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이지만 지금은 제철에도 메밀꽃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 이효석 생가 또한 이제는 남의 집이 된 평범한 농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생가에서 눈여겨볼 것은 방명록. 깨알같이 써넣은 감동적인 얘깃거리와 비평문들을 읽어보는 재미가 있다.
봉평중학교 맞은편 가산공원에 세워진 이효석 흉상도, 이효석 문학의 터전임을 알리는 남안교 건너 기념비와 물레방아도 불과 몇 년 전에 만든 조형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소설 속 풍경을 기대하고 봉평을 찾는다면 실망하기 십상이다.
이효석 소설의 흔적을 돌아본 뒤에는 팔석정을 찾아 휴식을 취해도 좋다. 양사언이 강릉부사로 부임해 가던 도중 이곳 경치에 빠져 8일이나 머물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기암괴석들과 소나무 숲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곳이다.
판 관 대(判官臺)
'판관대'는 조선조(朝鮮朝) 당시 율곡(栗谷) 선생의 부친인 이원수(李元秀) 공의 관직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었던 데서 말미암는 것으로 강릉 오죽헌에서 서기 1536년 음력 12월 26일 탄생하신 율곡 선생의 잉태지(孕胎地)로 전하는 곳이다
* 이율곡 선생 탄생의 전설
이율곡 선생의 부친 이원수 공이 지금의 인천지방 수운판관을 지낼 때 말미를 얻어 이곳의 본가에 오던 중 대화면 반정(상한내리)에 이르렀다. 그때 날이 저물고 피로하여 길가의 여인숙에서 유숙하려고 여장을 풀었다. 그날 밤에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되어 홀로 여인숙을 경영하던 주모가 꿈을 꾸었는데, 용 한 마리가 가슴에 가득히 안겨오는 것이었다. 꿈을 깬 주모는 놀랍고 이상하여 일어나 곰곰히 생각에 잠기었다. 이는 비범한 인물을 잉태할 꿈이며, 하늘이 자신에게 은총을 내리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자신을 돌이켜보니 과부의 몸이라 잉태할 수 없는 처지가 아닌가, 주모는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지붕 밑에 유숙하는 판관을 생각하고는 수치심을 무릅쓰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손님 저를 물리치지 마시고 가여히 여겨 받아 주십시오." 하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판관은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내 그대를 행실이 바른 여인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야 되겠는가." 하고 물리쳤다. 주모는 "손님께서는 아무 말씀 마시고 오늘 하룻밤만 정을 맺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재차 애걸하였다. 그러나 판관이 끝내 거절하는 바람에 주모의 소원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주모는 부끄럽고 서운한 마음으로 조반상을 지어 손님에게 드리면서 쳐다보니 얼굴에 상서로운 서기가 감돌았다. 주모는 자기의 운수가 아님을 한탄하였다.
한편 사임당 신씨는 친정인 강릉의 오죽헌에 머물고 있었는데, 간밤에 용이 가슴에 가득히 안겨오는 꿈을 꾸고 짐을 챙겨 급히 이곳의 본가로 향하였다. 집에 도착하여 보니 남편 원수 공이 와 있었다. 그날 밤 부부는 잠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그로부터 신씨는 율곡을 잉태하였다.
본가에서 며칠을 머물던 판관은 임지로 돌아가다가 또다시 전번의 주막집에 들게 되었다. 그때 판관은 사나이 대장부로서 아녀자의 애절한 하소연을 거절한 것이 마음에 걸리어 주모에게 전번의 일을 사과하고 정을 맺기를 청했다. 그랬더니 주모가 이르기를 "어르신네의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저번에 쇤네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룻밤을 모시고자 한 것은 비범한 자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나 지금 어르신네의 얼굴에는 전날의 서기가 스러졌으니 뜻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번 길에 댁에서는 비범한 아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다만 안 된 것은 몇 해 안가 아이에게 호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판관이 당황하다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호환을 면할 방법을 물었다. 주모는 판관에게 "집으로 돌아가 뒷동산에 밤나무 1천 그루를 심으면 면할 수 있다."고 하였다. 판관은 급히 돌아가 밤나무 1천 그루를 심어놓고 임지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몇년 후, 집에 돌아온 판관에게 한 스님이 찾아왔다. 그리고 아들을 시주하든지 밤나무 천 그루를 시주하라고 하였다. 판관은 집히는 것이 있어 밤나무를 심어놓은 동산으로 스님을 안내하였다. 스님과 판관은 밤나무를 세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세어도 한 그루가 모자랐다. 판관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그 옆에 있던 참나무과의 낙엽 활엽교목이 불쑥 "나도 밤나무요"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스님이 거대한 호랑이로 둔갑하더니 혼비백산하여 도망하였다. 그 후로 그 나무를 '나도밤나무' 곧 '너도밤나무'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나무 심는 공덕이 커서 생명도 구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다.
봉 산 서 재
율곡 이이 선생과 화서 이항로 선생의 영정이 있다.
봉평 시가지 진입로 국도변 평촌리 동편 산기슭에 위치한 '봉산서재'는 율곡 이이선생의 부친 이원수(李元秀)공이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벼슬을 하던 조선 중종(中宗;1530년경)때 이곳에서 18년간(1526-1543) 거주하는 동안 사임당 신씨에게서 율곡선생을 잉태하였는데(1536년 봄) 이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 기리기 위하여 창건(創建)한 사당(祠堂)이다.
1896년 이곳 창촌에 거주하던 유학자 홍재홍(洪在鴻) 선생이 주동(主動)이 되어 고종(高宗)에게 탄원을 올려 판관대(判官臺)를 중심으로 한 사방 오리를 서재위토(書齋位土)로 하사(下賜) 받고 건축허가도 받았으나 당시 국가정변이 있어 무효가 되었다.(그때 홍재홍 학자는 왕의 정치를 비판하는 글을 자주 상소함으로 왕이 시상열사형을 받음으로 무효가 됨)
다시 1904년에 태은 추성구 선생이 강릉도부에 허가서를 내서 허가를 받고 주민일동으로 1906년 건축하고 1907년에 단청까지 마무리하였다.
서재경내(書齋境內) 재실(齋室)엔 율곡 선생의 존영(尊影)과 화서 이항로(李恒老)를 모시고 지방 주민과 유림(儒林)이 춘추 (春秋)로 받들어 제사를 봉행(奉行)하고 있다.
팔 석 정
조선조의 명필가인 봉래 양사언이 8일간 머물렀다는 팔석정 일대는 깨끗한 물고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짙은 운치와 낭만에 젖어들게 한다. 커다란 암반들이 굽이치는 시냇물과 벗하며 곳곳에 솟구쳐 있어 신비스러운 경관을 선사한다.
팔석정(八石亭)은 봉평면 평촌리 앞들 물가에 위치하고 있는 명승지(名勝地)를 말한다.
이곳에는 8개의 큰 바위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 바위들은 주변의 풍치와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팔석정(八石亭)은 8 개의 바위를 가리켜 붙여진 이름이지만 여기에는 상당한 유래가 있다.
--- 강릉부사로 있던 양사언은 시서에 능하고 자연경관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영동․영서(嶺東․嶺西) 지방을 두루 돌며 풍치 좋은 곳에 머물러 시작(詩作)을 하며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곤 하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은 이곳에 이르렀는데 그 수려(秀麗)한 경관에 매료되어 8일 동안이나 머물게 되었다. 8일 동안 머물렀다 하여 8일정(八日亭)이란 정자를 건립하게 하고 1년에 세번씩 봄에는 춘화(春花)라 하여 즐기고 여름에는 하방(夏芳), 가을에는 추국(秋菊)으로 즐기며 시상과 시작에 도취하였다. 그는 강릉(江陵)에서 임기(任期)를 끝내고 고성 지방 (高城地方)으로 전근(轉勤)을 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다시 여기 팔석정(八石亭)에 와서 바위마다 이름을 부쳤으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석대투간(石臺投竿), 석지청련(石池淸蓮), 석실한수(石室閑睡), 석구도기(石臼搗器), 석평위기(石坪圍碁)라 하고 그 바위 중심부에 글씨를 쓰고 그것을 각색(刻索)케 하였다. 이 이름들은 그 바위의 생김새에 따라 지어놓은 이름으로 이후부터 이곳을 팔석정(八石亭)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또 이 바위에 각색(刻索)된 글씨는 그야말로 명필(名筆)에 속한 그의 일필휘호(一筆揮毫)이고 대자(大字)이며 심각(沈刻)되었다. 양사언(楊士彦)이 이곳을 떠나 고성(高城)으로 부임(赴任)하였지만 이곳 사람들 특히 사림 유생(士林儒生)들은 이 팔석정의 내용들을 전부 암송(暗誦)하는 실정이었고 이와 같은 소문은 사방에 퍼져 많은 시인 묵객(詩人墨客)들이 찾아들었고, 지방 유생들도 매일 같이 이곳에 모여 학문과 시서(詩書)를 논하고 취흥(醉興)에 젖었다고 한다.
이효석 생가
역사에
: 우리나라 단편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메밀꽃 필 무렵'의 작품무대이며, 가산 이효석선생이 태어나 자라난 곳이다. 지난 90년도에 문화관광부로부터 [전국 제1호 문화마을]로 지정되었으며
이효석 :
1907년 평창군 봉평면 창동에서 이시후의 장남으로 출생
1928년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
1929년 조선문예에 [기우] [행진곡]을 발표, 이듬해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근무하다가 경성농업학교 교편을 잡음. 이때를 기하여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전념하였으며 더불어 9인회에 참여하여 [돈] [수탉]등 일련의 향토적인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4년 이 시기를 기하여 작품경향이 변모하여 인간본능의 순수성을 지적하는 작품경향을 보였으며 [분녀] [개살구] [낙엽기] [화분]등의 작품이 좋은 예이다.
1942년 [봄의상] [풀잎] [일요일]등의 단편을 발표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해 5월 25일 뇌막염으로 별세했다.
[도시와 유령]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한 이유로 유진오와 더불어 카프(KAPF)진영으로부터 동반작가라는 호칭을 듣기도 하였음. 이후 구인회에 가담하여 순수문학의 방향을 더욱 분명히 하였으나 이효석의 작품세계는 향수의 문학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 [메밀꽃필무렵]과 마찬가지로 유랑을 제재로 한 작품을 소개하면, 배따라기(김동인), 청산별곡, 역마(김동리)등이 있다.
물레방앗간
<참고> 이효석의 작품세계는 <메밀꽃 필 무렵>에서와 같이 고향의 산천을 무대로 한 향토적 정서 표현으로 나타나는 경우와 <들> <분녀>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근원적으로 인간자체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에덴적인 것을 추구하는 원초적 에로티시즘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후자는 서구적인 것에 대한 동경으로서 현대문명과 자유를 갈망하는 지향에서 이루어진 이그조티시즘인바, 이러한 동경의 세계를 서정적 문제로 승화시켜 특유의 작품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오대산 국립공원
오대산은 해발 1,563미터의 비로봉을 정점으로 남쪽에 호령봉, 북동으로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의 다섯봉우리가 마치 연꽃 모양으로 둘러서 있다. 고봉이 연이은 거대한 산줄기는 고산답게 웅장하고 골이 깊어 산 전체가 울창한 산림으로 뒤덮여 있다.
월정사 들목에 있는 전나무 숲. 주변엔 250만 평에 전나무 1백 만 그루를 비롯하여 잣나무, 소나무, 가문비나무, 박달나무, 주목나무 등 70여 종의 나무들이 빽빽이 우거져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부터 자연을 경외하고,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산을 숭배하였다. 산을 신비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경건한 마음으로 숭배한 까닭은 산을 신인(神人)이 사는 곳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되면서부터 이러한 자연 신앙은 자연스럽게 불교 신앙에 녹아들었다. 그 중에서도 산을 숭배하는 신앙이 불교화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대산의 문수신앙과 오만보살신앙이다.
오대산이 진성(眞聖)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믿게 된 것은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화현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정골사리, 가사, 발우 등을 얻으면서부터이다. 이로써 "동북방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계시면서 일만의 권속을 거느리고 늘 설법한다."는 「화엄경」을 바탕으로 한 오대산 신앙이 우리나라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처럼 문수보살이 오대산에 머문다는 믿음은 뒤에 7, 8세기에 이르면 오류성중(五類聖衆)이라 하여 오만보살신앙으로 더욱 발전된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 효명 두 태자가 오대산에서 수행하며 오대의 각 대마다 거주하는 오만보살에게 일일이 참배하였다고 한다. 곧 동대 만월산(滿月山) 관음암에는 일만의 관음보살이, 남대 기린산(麒麟山) 지장암에는 일만의 지장보살이, 서대 장령산(長嶺山) 미타암에는 일만의 대세지보살이, 북대 상왕산(相王山) 나한당에는 오백 나한이, 중대 지로산(地爐山) 진여원에는 일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한다는 것이다.
보천태자는 임종 때에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오대산은 백두산의 큰 줄기로서 각 대는 진신이 상주한다.
동쪽은 북대의 남쪽 기슭 끝에 있다. 마땅히 관음방을 두어 관음과 일만 관음상을 봉안하고...
천수주를 독송하고... 그 곳을 원통사(圓通社)라 이름한다.
남쪽은 남대의 남면에 있다. 지장방을 두어 8대보살을 수반으로 일만 지장상을 봉안하고...
지장경과 금강반야경을 독송하고... 금강사(金剛社)라 이름한다.
서대의 남쪽에는 미타방을 설치하고 무량수여래을 수반으로 일만의 대세지를 그려 봉안하고...
법화를 독송하고... 수정사(水精社)라 이름한다.
북대의 남쪽에는 나한당을 설치하여 석가여래를 수반으로 오백 나한을 봉안하고...
열반경을 읽고... 백련사(白蓮社)라 이름한다.
화엄경과 육백반야를 독송하고... 화엄사(華嚴社)라 이름한다.
보천암을 개창하여 화장사(華藏社)로 하고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해마다 백 일 동안 화엄회를 열게 하되 법륜사(法輪社)라 이름한다.
이 화장사를 오대의 본사(本寺)로 삼아 굳게 호지하고 향화를 받들게 하면 국왕이 장수하고 백성이 평안하고 문무가 화평하고 백곡이 풍요할 것이다."
이러한 보천태자의 당부가 어느 만큼 실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동, 남, 서, 북 중의 오대에 저마다 다른 산 이름이 있고 지금 오대산의 암자들도 모두 이 기록과 일치하는 것을 보면 오대산은 보천태자 이후로도 많은 이들의 신앙의 귀의처가 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오만보살신앙은 경덕왕 대에 살았던 신효거사(信孝居士)에 의해 다시 확인되면서 더욱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그 뒤 조선시대에 내려와서는 상원사에서 세조가 문수동자를 친견한 일화를 통하여 다시 한 번 오대산이 문수신앙의 성지로서 널리 알려졌으며 이에 따른 유물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근대에 와서는 한암,, 탄허, 만화 같은 큰스님이 오대산에 머물면서 그 이름을 크게 떨쳤다.
오대산은 이렇듯 불교성지로서 정신과 신앙의 귀의처였던 만큼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뛰어난 유물들이 많다. 오늘도 오대산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로서 부처님 법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는 월정사를 비롯하여 눈 푸른 납자(納者)들이 정진하는 상원사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등이 우리나라 최대의 불교성지로서 그 몫을 다하고 있으며 마음의 안식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월정사
(오대산의 가장 대표적인 사찰 월정사 경내의 석조보살좌상)
그리고 월정사 앞으로 금강연이라는 개천이 흐르는데 수온이 낮고 깨끗한 곳에서만 산다는 열목어가 서식하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물고기를 이곳 토박이들은 '연메기'라 부르고 있다. 또한 매표소에서 이어지는 전나무와 잣나무의 수해는 가히 장관이라 할 만하다. 오대산은 전체가 아름드리의 수목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전나무 숲은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주변 250만평에 전나무 1백만 그루를 비롯하여 잣나무, 소나무, 가문비나무, 박달나무, 주목나무 등 70여종의 나무들이 빽빽이 우거져 있다. 또한 자연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어서 전나무 숲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으며 간단한 휴식과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동대 관음암 :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이며 구정선사가 정진한 토굴이 있다.)
(영감사 : 신령스런 거울이란 뜻을 가진 이 절은 사고지 가까이 있으며 사명대사가 주석하기도 했다 )
(사고지 : 수재, 화재, 풍재의 삼재 불입지처이며 5대사고의 하나로서 선원보각을 함께 설치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 4교구 본사, 월정사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동쪽 계곡의 울창한 수림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동대 만월산을 뒤로 하고, 그 만월산의 정기가 모인 곳에 고요하게 들어앉은 월정사는 사철 푸른 침엽수림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띤다. 그 앞으로는 맑고 시린 물에서 열목어가 헤엄치는 금강연이 또한 빼어난 경관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자연 조건이며 풍광이 빼어날뿐더러 예로부터 오만 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성지로서 신성시 되어 왔다. 그 오대산의 중심 사찰로서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일천사백여 년 동안, 개산조 자장율사에서부터 근대의 한암, 탄허스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름난 선지식들이 머물던 곳이려니와, 월정사는 오늘날에도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이 곳 전나무 숲의 그 곧음과 푸름으로 승가의 얼을 오롯이 지키고 있는 한국 불교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그 뒤로 유동보살 - 석가모니가 전생에 보살로서 수행할 때 연등불(燃燈佛)에게 공양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당시의 이름 - 의 화신이라고 전해지는 신효거사와 또 범일국사의 제자였던 두타승 신의스님이 자장율사가 초가를 지었던 터에 다시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스님 이후로 오랫동안 황폐한 채로 남아 있던 이 암자는 수다사(水多寺) - 진부면 수항리에 있던 절로 지금은 절터만 남아 았다. - 의 장로 유연스님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면서 비로소 절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고 그 뒤로 차츰 규모가 커졌다.
그 무렵의 월정사는 금당 뒤쪽이 바로 산인 특수한 산지가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금당 앞에 탑이 있고 그 옆에 강당 등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남북자오선(南北子午線) 위에 일직선으로 중문, 탑 ,금당, 강당 등을 세운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가람 배치와는 다르다.
그 뒤로 고려 충렬왕 33년(1377)에 화재로 모두 타버린 것을 이일스님이 중창하고 조선시대까지 계속 법등을 밝혀 왔는데 조선 순조 33년(1833)에 또다시 큰 화재를 입고 말았다. 그런 지 십일 년 뒤인 헌종 10년(1844)에 이르러 영담, 정암 스님 같은 분이 앞장서서 중건하여 큰 사찰로서의 모습을 다시 회복하였다. 1911년에는 전국 31분산의 하나가 되어 강원도 남부의 사찰을 총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랜 역사를 간직해 오던 월정사는 1950년 6. 25 전쟁의 참화로 칠불보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광응전, 진영각 등 17동 건물이 모두 불타고 소장 문화재와 사료들도 모두 재가 되어버린 비운을 맞이하였다.
지금의 월정사는 1964년 탄허스님이 적광전을 중건하고 그 뒤로 만화스님과 현해스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중건하여 이룩한 것이다. 그리하여 어엿한 대가람의 모습을 되찾게 된 월정사는 비록 몇 차례 화재와 전화로 많은 성물(聖物)과 문화재를 잃긴 하였으나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징을 지닌 당우들이며 국보로 지정된 팔각구층석탑을 비롯하여 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자장율사
오대산에 월정사를 창건한 개산조 자장스님은 신라 진평왕 12년(590)에 진골 출신으로 소판 벼슬을 지낸 김무림(金림茂)의 아들로 태어났다. 늙도록 자식이 없던 김무림은 부인과 함께 천수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자식 낳기를 지성으로 발원하여 자장을 얻었다.
마침내 선덕여왕 5년(636)에 당나라에 건너가 문수보살이 머무는 오대산에 가서 기도하던 중 꿈에 노스님이 나타나 게송(偈頌)을 주었다. 문득 깨어나니 꿈은 선명하나 게송이 모두 범어(梵語, 고대인도어)였으므로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뒤로 분황사에 머물면서 나라의 최고 고문인 대국통이라는 벼슬에 추대되어 황룡사에 아홉층짜리 탑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탑을 아홉 층으로 함은 주변의 아홉 나라가 신라를 중심으로 뭉쳐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상징하는 것이니 이 구층탑의 조성으로 삼국 통일을 기원하였다. 황룡사 구층탑은 선덕여왕 14년(645) 두 해에 걸친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자장은 또한 선덕왕 15년(646)에 양산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세워 중생제도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이렇게 자장율사가 불교 교단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 전력을 다하니 머리 깍고 스님이 되기를 원하는 자가 해마다 늘어났다. 만년에 서라벌을 떠나 명주 땅을 찾아나서 강릉 가까운 곳에 수다사를 세웠고 꿈속에서 이끌린 대로 태백산 갈반지를 찾아 석남원을 세우고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서 만년을 보냈다.
탄허스님
탄허스님은 1913년 1월 15일 전북 김제 만경에서 김홍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금택, 법명은 택성이며, 법호가 탄허이다.
어려서부터 한문학 전 과정을 마치고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충남 보령에서 기호학파의 거유 최면암의 후학인 이극종 선생에게서 유학 및 도교학을 수료하였으나, 학문의 한계를 느껴, 진리를 말해 줄 수 있는 훌륭한 스승을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방한암 스님의 명성을 듣고 열아홉 살에 처음으로 한암스님께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무려 삼 여 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문장이었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 탄허스님은 정든 속세, 부모 형제를 두고 방한암 스님을 찾아 오대산 상원사로 입산했다.
평소 승려 교육에 많은 힘을 쏟은 탄허스님은 불교학의 최고 학설인 화엄경 120권을 번역, 출간한 것을 비롯하여 화엄론 40권, 육조단경, 보조법어, 사교, 사집 등 많은 불전을 번역하였다. 승려 교육의 공로로 생전에 인촌 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스님의 사상은 한국불교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으며 1983년 6월 5일 오후 향년 71세로 입적하실 때까지 오대산 방산굴에 계셨다. 입적 뒤 종교인으로서는 최초로 국가가 추서하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한암스님
하루는 경허화상을 모시고 차를 마시다가 경허화상이 '선요'의 한 구절인 "어떤 것이 진실로 구하고 진실로 깨닫는 소식인가?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 라는 문답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무엇인가? 하자, 한암은 ' 창문을 열고 앉았으니 와장이 앞에 섰다 ' 고 대답하였다. 경허화상은 이튿날 법상에 올라가 대중을 돌아보면서 "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을 초과했다" 고 인가하였다. 이때가 스물 네 살 이었다.
이어 한암은 서른 살 되던 1905년 양산 통도사 내원 선실의 조실로 있다가 1910년 봄에 선승들을 해산시키고 평안도 맹산 우두암에 들어가 보임(保任) 중에 불을 지피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때가 서른다섯 되던 겨울이었다. 한암은 이때부터 중생이 서로 의탁하여 사는 이 세상에 들지도 않고 나지도 않으면서 수시수처(隨時隨處)에서 선풍을 크게 떨쳤다. 당시 송만공(宋滿空) 스님과 법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한암스님은 쉰이 되던 1925년 서울 봉은사 조실 스님으로 있다가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촌(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 하면서 오대산에 들어갔다. 한암은 오대산에 들어와 들고 다니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중대 사자암 앞뜰에 심었는데 지팡이가 꽂힌 자리에서 잎사귀와 가지가 돋아나와 나무가 되니 중대 앞의 단풍나무가 그것이다. 이즈음 조계종 초대 종정이 되었다.
하루는 일본 조동종 사토오가 오대산 상원사에 와 한암에게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大義)입니까?" 하고 묻자 한암스님은 놓여 있던 안경집을 들어 보일 뿐이었다. 계속해서 사토오가 "스님은 대장경과 조사어록을 보는 동안 어느 경전과 어느 어록에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까?" 하니 한암스님은 사토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적멸보궁에 참배나 갔다 오라" 고 대답하였다. 이어 사토오는 "스님께서는 만년의 경계와 초년이 경계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하고 묻자 한암은 "모르겠노라" 대답했다. 이에 사토오는 일어나 절을 하면서 활구 법문(活句法門)을 보여 주어 감사하다고 하자 한암은 "활구라고 하였으니 벌써 사구(死句)가 되었네" 하였다. 사토오는 삼 일 동안 머물다 떠나면서 "한암스님은 세계에서 둘도 없는 인물이다." 하며 떠났다.
육이오 전쟁이 나자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으나 한암은 그대로 상원사에 남았다. 이어 일사후퇴 때에 국군이 월정사와 상원사가 적의 소굴이 된다 하여 모두 불태우려고 했다. 월정사를 불태우고 상원사에 올라온 군인들이 상원사 법당을 불태우려고 했다. 한암 스님은 잠깐 기다리라 이르고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수(受) 하고 법당에 들어가 불상 앞에 정좌한 뒤 불을 지르라고 했다. 장교가 "스님이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하자 한암스님은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법당을 지키는 것이 나의 도리니 어서 불을 지르시오" 하며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이에 감복한 장교는 법당의 문짝만을 뜯어내 마당에서 불을 지르고 떠났다. 오늘날 상원사 법당이 남은 것은 오로지 한암스님의 덕이다.
일사후퇴로 모두 피난을 떠난 지 두 달쯤 지나 1951년 3월 21일 - 1951년 신묘년 음력 2월 14일 - 아침, 스님은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시고는 손가락을 꼽으며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지" 하고는 가사와 장삼을 찾아서 입고 단정히 앉아 입적했다. 이때 한암스님의 세수는 75세요, 법랍은 54년이었다.
당시 정훈장교인 김현기 거사가 사진을 찍기 위해 입적하신 방한암 스님을 햇볕이 드는 바깥채로 모셔 나오기 위하여 육신을 드니 몹시 가벼웠다고 한다. 그것은 방한암 스님이 입적하기 보름 전부터 사바세계의 연(緣) 이 다함을 알고 물 외에는 먹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사진 앞에 있는 경상(經床)은 김현기 거사가 가져다 놓았으며 벽에 쳐져 있는 담요는 군인들이 문짝을 태워서 문에 담요로 두른 것이다.
한암 스님은 이야기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일발록(一鉢錄)」 한 권을 남겼는데 그마저 1947년 봄, 상원사에 불이 났을 때 타고 말았다. 이 책은 뒤에 1995년 월정사 주지 현해스님이 문도들의 뜻을 모아 「한암일발록(漢岩一鉢錄)」 으로 재간행하였다. 제자로는 보문(普門), 난암(煖岩), 탄허(呑虛)등이 있으며, 한암스님은 1925년 오대산에 들어온 뒤 입적할 1951년까지 27년 동안 오대산문을 나서지 않아 수행자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일주문
절의 어귀에 서 있어 절의 위용을 한눈에 느끼게 해주는 일주문은 모든 중생이 자유롭게 드나들라는 의미에서 문을 달지 않는다.
기둥을 양쪽에 하나씩 세워 문을 지탱하는 구조에서 일주문이라는 이름이 유래했으나 두 기둥을 일직선상에서 세웠다는 의미도 있다.
대개 일주문은 아름드리 기둥을 깍아 당당하게 세우거나 자연스런 나무 둥치의 모습을 살려 위용을 더하기도 한다. 월정사 일주문은 다포계의 공포로 상부의 하중을 분산시키는 시각 효과를 이루었고 단청이 화려하다. 기둥 양편으로 판전을 붙여 안정감을 높였고 판전에는 네 분의 신장을 양각하였다. 기둥 양옆으로 샛기둥을 세워 시각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둥글게 다듬어 모양을 내었다. 기초는 화강석으로 복련을 조각하였다.
월정사 일주문은 전체적으로 웅장한 오대산과 잘 어울린다. 월정대가람(月情大伽藍)의 글은 탄허 스님이 쓴 것이다. 1976년 만화스님이 중건했다.
전나무숲
팔백 미터쯤 늘어선 수령 몇 백 년 넘은 전나무는 몸과 마음을 맑게 해 준다. 장쾌하게 쭉쭉 뻗은 전나무는 짙은 그늘을 드리우지만 볕이 잘 들어 음습하지 않다.
오대산은 기온이 낮아 모기가 없고 지질학적으로 바위 대신 흙이 많다. 또 여느 산에 많이 있는 소나무가 거의 없고 그 대신 전나무가 유난히 많다. 특히 큰 전나무 아홉 그루는 ' 아홉수 ' 라 하여 많은 전나무의 기원이 되었다.
성황당
맞배지붕에 크기도 자그마하여 두 평 남짓한 이 성황당은 모든 사상과 믿음을 수용하려는 불교의 넓은 가르침을 보여준다.
금강연
대개 일주문은 아름드리 기둥을 깍아 당당하게 세우거나 자연스런 나무 둥치의 모습을 살려 위용을 더하기도 한다. 월정사 일주문은 다포계의 공포로 상부의 하중을 분산시키는 시각 효과를 이루었고 단청이 화려하다. 기둥 양편으로 판전을 붙여 안정감을 높였고 판전에는 네 분의 신장을 양각하였다. 기둥 양옆으로 샛기둥을 세워 시각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둥글게 다듬어 모양을 내었다. 기초는 화강석으로 복련을 조각하였다.
사천왕문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外護), 신장(神將)을 모신 전각이다. 이 천왕들은 수미산 중턱의 동, 서, 남, 북에서 그들 무리와 살면서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며 불법을 수호한다.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오른손에 검을 들었고, 남방 증장천왕(僧長天王)은 왼손에 여의주를 들었고,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오른손에 삼지창, 왼손에 보탑을 들었고,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비파를 연주하고 있다. 1974년 만화스님이 중건했다.
적광전
적광전 외부 기둥 18개 중 16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소나무이고 2개는 괴목이며, 내부기둥 10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전나무로 만들었다. 적광전이 소실되기 전에는 칠불보전(七佛寶殿)이라 했다.
대체로 적광전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 통례인데 이곳 적광전은 그 통례를 깨고 석굴암의 불상 형태를 그대로 따른 석가모니불을 모신 것이 이채롭다. 적광전 현판과 주련(柱聯)글씨는 탄허스님의 친필이다. 주련의 넉 줄은 자장율사의 불탑게이다.
만대윤왕삼계주 萬代輪王三界主
쌍림시멸기천추 雙林示滅幾千秋
진신사리금유재 眞身舍利今猶在
보사군생예불휴 普使群生禮不休
만대의 왕이며 삼계의 주인이여
사라쌍수 열반 이래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지금 여기에 모셨으니
뭇 중생으로 하여금 예배를 쉬게 하지 않으리.
무량수전
삼성각
범종루
운판은 청동이나 철로 만든 구름 모양의 넓은 판인데, 날아다니는 중생들이 이 소리를 듣고 해탈하라고 친다.
목어는 물고기 모양으로 나무의 속을 파서 만들었으며 물속에서 사는 중생들을 위하여 두드린다. 범종루 아래 있는 석경원에서는 불교 서적과 불구용품(佛具用品)을 판다. 1994년 현해스님이 보수했다.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 맞배지붕 형태의 진영당은 근세 월정사에 주석한 한암, 탄허, 지암, 만화스님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1975년 만화스님이 중건하고 94년에 현해스님이 증축했다.
적광전 뒤에 자리 잡은 조사당은 규모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이며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월정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의 진영(眞影)을 모신 곳이다. 1958년 영해당 경덕스님이 중건했으니 현존하는 월정사 당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적광전 왼쪽에 동당으로 불리는 설선당이 있다. ㅁ 자 형으로 지어진 이 큰 당우는 월정사 스님들 처소와 원주실, 객실, 세면장 등으로 사용하는 요사체이다.
사찰을 찾는 신도가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원주실인 만큼 어느 당우보다도 친근한 곳이다. 규모가 커 보이나 건물의 배치가 ㅁ 자 구조이며 내부에는 중정(中庭)을 두고 있다. 1979년 만화스님이 중건했다.
해행당은 천왕문을 지나 오른편에 자리하여 양지바른 곳에 있는 팔작지붕 건물로 월정사의 일반 사무, 행정을 맡아 보는 종무소이다. 1978년 만화스님이 중건했다.
종무소인 해행당 뒤편에 있는 심검당은 월정사 노스님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ㄱ 자 건물로서 본디 양지 바른 곳이기도 하지만 기단을 높게 하여 습한 기운을 막았다. 심검은 검을 찾는다는 뜻으로서, 검은 무명(無明)을 자르는 지혜의 검을 의미한다. 1986년 도명스님이 중건했다
용금루는 본디 팔각구층석탑 가까이 있던 것을 199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누각의 기초를 화강석 기둥으로 하였고 밑으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주로 여름에 수련법회장으로 쓰인다. 정면 일곱 칸, 측면 두 칸으로 팔작지붕이다. 1997년 만화스님이 중건했다.
월정사 경내를 벗어나 육수암 쪽으로 오르다 보면 왼쪽에 있는 자그마한 건물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방산굴이다. 맞배지붕 건물로, 월정사 경내에서 가장 조용한 이곳은 월정사 조실 스님이 거하는 곳이다. 탄허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머물기도 한 곳이다. 1973년 만화스님이 창건했다.
금강루
성보박물관
연건평 206평의 한식 팔작지붕 형태의 건물로지상 1층, 지하 1층의 전시실에서는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를 전시 주제로 삼아 불교 문화유산들을 전시하고 있다.
불교 전문 박물관인 월정사 성보박물관은 고려시대 월정사 팔각국층석탑 사리구와 조선전기 상원사 문수동자상 복장 유물을 비롯하여 근대 한암, 탄허 스님의 유품에 이르기까지 월정사와 오대산의 산내암자 그리고 강원도 남부 60여개의 전통사찰의 불상, 불화, 불교장엄구, 불교의식구 및 경전류 등 500여점의 성보(聖寶)들을 전시, 연구, 보존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상원사
이 절에 있는 상원사 동종(국보 37호)은 신라 성덕왕 24년(726년)에 주조된 종으로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종(鐘) 가운데 음향이 맑고 깨끗한 범종으로 종 몸체에 하늘을 비상하며 공후와 생황을 주악하는 비천상이 양각되어 있는데, 흐르는 듯한 구름, 펄럭이는 천 자락의 표현이 생동감이 넘친다.
이 밖에도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221호),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보물 793호)등이 있다.
상원사 서쪽 비로봉에서 동으로 뻗어 내린 곳에 있는 적멸보궁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정골사리가 묻혀 있어 우리나라 사찰 중 제일의 성지로 꼽히는 곳이다. 상원사에서 적멸보궁에 이르는 중간에는 중대암이 위치하며 상원사 남서쪽 2킬로미터 지점에는 수도처로 이용되는 서대 수정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북대미륵암은 상왕봉 동쪽 산능에 있으며 고려 공민왕 때 왕사를 지낸 나옹화상이 수도하던 곳으로 오대(五臺)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전망이 좋다.
이때의 창건 설화를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형 보천태자는 오대산 중대 남쪽 밑 진여원 터 아래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두 사람은 함께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였으며 오대에 나아가 공경하며 참배하던 중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이 때, 신문왕의 후계를 두고 나라에서 분쟁이 일자 사람들이 오대산에 찾아와 왕위를 이을 것을 권하였는데 보천태자가 한사코 돌아가려 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효명이 사람들의 뜻을 좇아 왕위에 올랐다. 그가 성덕왕(聖德王)이다. 왕이 된 효명태자는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이 여러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 보이던 곳에 진여원을 개창하니 이 곳이 지금의 상원사이다.
고려시대에는 상원사가 어떠한 중창의 발자취를 걸어왔는지 밝히는 자료는 없으나 이색(李穡)의 ' 오대 상원사 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 ' 에는 고려말 '나옹스님의 제자라고 알려진 영로암(英露庵) 이라는 스님이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중창하였다' 고 적혀있다.
고려말부터 일기 시작한 척불(斥佛) 정책은 조선시대에 들어 더욱 거세어져 불교는 극박한 박해를 받기에 이르렀다. 태종은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고 11종(宗)이던 불교 종파를 7종으로 통합하는 등 척불에 앞장섰으나 만년에는 상원사 사자암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 또 나아가서는 권근(權近) 에게 명하여 '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 에 젖게 하라 ' 고 하였다.
이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며 나라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서의 간행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세조는 오대산에서 두 번의 이적을 체험하였다. 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나서 병이 나았고, 상원사 참배 중에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일화가 그것이다. 이렇듯 세조와 상원사는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1984년에 발견된 문수동자 복장에서는 세조의 딸 의숙공주가 문수동자상을 봉안한다는 발원문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근세에는 방한암 스님이 오대산으로 들어온 뒤로 상원사에서 이십칠 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수도 정진하였으며 수련소를 개설하여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다. 오늘날에도 전국에서 선남선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불교 성지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적멸보궁
적멸보궁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이다. 적멸보궁은 모든 바깥 경계에 마음의 흔들림이 없고 번뇌가 없는 보배스런 궁전이라는 뜻이다.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이 없으니 괴로울 것이 없는 부처님의 경지를 나타낸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어 법당 안에는 따로 부처님상을 조성하지 않고 불단만 설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는 다섯 군데의 적멸보궁이 있다. 오대산 적멸보궁은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기도하던 가운데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얻은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교의 성지이다. 중대에 위치한 적멸보궁은 오대산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산맥들이 주위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중앙에 우뚝 솟아 있다. 적멸보궁이 자리한 곳은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 하여 용의 머리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 곳을 방문하고 천하의 명당이라고 감탄했던 곳이기도 하다.
::::오대 적멸보궁 ::::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태백산 정암사 적멸보궁
영취산 통도사 적멸보궁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
마애불탑
적멸보궁 바로 뒤에 84센티미터 높이의 개석(蓋石)을 갖춘 비석 모양의 마애불탑磨崖佛塔이 세워져 있다. 앞면에는 단층기단 위에 세워진 5층의 목탑이 상륜부까지 양각되어 있다.
중대사자암
상원사에서 적멸보궁 오르는 길로 이십 분쯤 걸으면 돌계단과 흙길이 사람을 반긴다. 단풍나무가 곱게 핀 길가에 중대 사자암이 있다.
중대 사자암은 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하여 일만의 문수보살이 계시는 곳이다. 자그마한 앞마당에는 방한암 선사가 심었다는 단풍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다. 중대향각이라고 쓴 현판 옆에는 기문(記文)과 현판들이 있어 옛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용안수
중대 사자암 향각(香閣)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을 가노라면 길 왼편에 천연수가 솟아오르는 곳이 나온다. 이곳을 용안수라 한다.
적멸보궁이 자라한 곳이 용의 머리 부분이고 우물이 있는 곳이 용의 눈에 해당된다 하여 이름을 용안수(龍眼水)라 하였다. 산기슭 너머 또 다른 유물이 있어 용의 두 눈을 형성하고 있다
남대지장암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올라가는 큰길로 200미터쯤 가다 보면 오대천을 가로지르는 지장교(地藏橋)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 200미터 가량 들어가면 조용하게 자리 잡은 암자가 있는데 바로 남대 지장암이다.
지장보살은 ' 하나의 중생이라도 성불하지 않으면 나 또한 성불하지 않겠다 ' 는 서원을 세우고 지옥중생의 해탈을 위하여 노력하는 분이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인법당(因法堂)을 비롯하여 삼성각, 육화료, 요사체 등이 있으며 1995년에는 기린 선원을 새롭게 중창했다. 현재 비구니 스님의 참선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고 있다.
오대산사고
영감사 아래 있는 오대산 사고(史庫)는 조선 후기 오대 사고의 하나인 외사고로 오대산 사고가 설치된 것은 1606년(선조 39년) 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1605년 10월 재인쇄된 실록의 초고본을 봉안할 장소로 오대산 상원사를 선정하였다가, 다시 월정사 부근에 사각(史閣)을 건립하여 초고본 실록을 보관하였다. 오대산 사고의 수호사찰인 월정사는 사고에서 너무 떨어져 있으므로 실제로 암자격인 영감사에서 수호하기 때문에 영감사를 일명 사고사라 하였다.
오대산 사고의 실록 봉안은 태조대부터 명종대까지의 실록 초고본을 1606년 봉안한 뒤 1805년(순조5년) 에 '정조실록'을 봉안하기 까지 59회 가량 행해졌다. 오대산 사고 실록을 수호하는 총섭은 월정사의 주지였다. 설치시 수호군(守護軍) 60명, 승군(僧軍) 20명이 수직(守直) 하였다. 1910년 국권을 잃은 뒤 오대산 사고의 서책은 이왕직(李王職) 도서관에서 관리하였다.
그 뒤 이 도서는 조선 총독부 취조국에서 강제로 접수하여 1913년 10월 동경제국대학 부속 도서관으로 옮겨 놓았다. 당시 도서를 운반했던 촌노에 따르면 실록을 마차에 싣고 진부로 옮겼다가 다시 강릉으로 옮긴 후 배로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실록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어 버리고 마침 대출되었던 마흔 다섯 책만이 화를 면했다. 그리고 소잔본(燒殘本) 이십칠 책은 경성 제국대학에서 옮겨와 현재 서울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사적 제37호.]
영감사
조선 초기에는 함허 득통 스님이, 중기에는 사명대사가 주석하였다. 임진왜란 뒤 실록 보관을 위하여 1606년(선조 39년) 건립할 때에 실록각(實錄閣), 궁중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각(璿源閣), 별관(別館), 그리고 사고를 지키기 위해 영감사가 세워졌다.
옛날 영감사가 처음 세워졌을 때는 지금의 영감사 건물 앞 100미터 지점에 있었는데 육이오 전쟁 때 아군에 의해 사고, 선원각과 함께 불타 지금은 그 터에 주춧돌만 남아있고, 1960년 후반 비구니 뇌묵스님이 실록각이 있던 자리에 다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판에는 영감난야(靈鑑蘭若)라 씌여 있는데 영감(靈鑑) 은 신령스런 거울을 나타내며 난야(蘭若) 는 범어(梵語) ' 아란야Aranya' 의 준말로 적정처(寂靜處) 라는 뜻이다.
[다 같이 공부해 봐요] 불상의 기원
우리는 불교 관계 모든 일반상에 대하여 막연히 불상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상이란 부처님의 존상에 한정되는 명칭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아닌 보살이나 제천, 명왕, 불제자상 등을 불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불교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교상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은 제천상이며 범천, 제석천, 길상천 등은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고대인도 조각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불교상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인도 전통종교인 브라만교의 다양한 신들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기 때문에 불교적으로 본다면 이들을 불교상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불상은 언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불상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500년 정도가 지나고 나서부터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기독교의 서기를 사용할 경우 기원전후로 해서 조성되기 시작했다고 보여 집니다. 이렇게 열반 후 500년이나 지나서부터 불상이 조성된 이유는 부처님의 존상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불경시 되고 있었던 당시의 문화적 배경과 형상보다 말씀을 중요시한 근본불교의 가르침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상 가운데서는 물론 석가모니상이 가장 먼저 만들어 졌습니다. 최초의 불상은 나무로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가장 일찍 편찬되었다고 하는 '아함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의 전설적인 서술에 의하면 코삼비국의 우다야나왕이 향나무로 석가의 모습을 조각하도록 했다는 것이 불상조각의 시초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유적지로서 가장 오래된 부다가야의 조각에도 또, 그 다음 시기의 바르하트탑과 산치대탑 등의 조각에서도 불상은 볼 수 없습니다. 경전속의 서술이 역사적인 사실인지는 좀 더 연구가 진행되어야 알겠지만 어쨌든 지금까지의 불상의 기원은 그 후 라고 보여 집니다.
부처님에 대한 표현은 불좌와 보리수, 족적으로부터 시작
중인도의 바르하트, 산치 또는 남인도의 아마라바티 같은 인도 초기의 불교 미술인 BC 1세기 무렵의 바르하트 대탑이나 산치대탑<사진>에는 부처님의 모습이 표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 탑의 양식은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복발형으로 마치 사발그릇을 뒤집어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상부에는 평두를 놓고 다시 그 중앙에는 상륜을 꽂았으며 그리고 탑을 돌아서 난간이 있고 사방에 탑문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주로 이 난간과 탑문에 석가모니 부처님 생애의 중요한 장면이라든가 본생담을 주제로 한 조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탑들에는 조각의 주인공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은 없습니다. 다만 상징적인 표현으로서 보리수와 족적, 대좌 등이 부처님의 모습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원칙은 바르하트로 부터 산치, 아마라바티 조각에 이르기까지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실제로 불상이 출현하게 되는 것은 부처님의 열반 후 500년(기원 전후) 무렵부터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인도 불교도들이 500여 년의 오랜 세월 동안 왜 불상을 만들지 않았는가? 이며 또 500년이 지나고 나서는 어떤 이유로 불상을 만들게 되었는가? 입니다.
대개 불상을 만들지 않았던 것은 부처님의 신성에 대한 모독이 된다는 이유에서였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부처님은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도 보통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감히 불상을 만들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최초의 불상 제작을 제천의 공장인 비수갈마천 (제석천을 수종하는 천신으로 여러 가지 공교물을 만드는 건축을 주관하는 천신) 의 공으로 돌리고 있는 사실을 미루어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근본불교 불상 조성에 부정적 입장
불교도가 신성한 곳으로 생각하며 경건하게 참배하는 '법화경' 설법 장소인 인도 영취산은 당시에 시체를 가져다버리는 장소였습니다. 영취산은 고대인도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에서 십 리 남짓한 거리에 있는 거친 바위산입니다. 이곳에서 부처님은 시신에게 입혔던 옷으로 기운 가사를 걸치고 제자들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생전의 모습을 본다면 부처님께서 입멸에 든 후 불상을 만들어 예배 공양한다는 행위는 불교의 근본정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며 도리어 그의 정신과는 먼 것이라는 판단을 당시의 사람들은 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직접 만났던 당시의 불제자나 불교도들은 다만 석가의 정신을 사모하고 따랐던 것입니다.
불교 미술사상 불상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때를 일컬어 무불상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무불상 시대에 인도 불교도들이 부처님을 기억하고 예배했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예배대상은 부처님의 육신을 다비(茶毗)해서 얻은 사리(舍利, arra)였으며 이 사리를 모시기 위한 탑은 일찍부터 만들어졌습니다. 바로 이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예배했던 인도에서의 탑이 우리나라에서 불교 전래 이후 전시기를 통해 많이 조성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석탑(石塔)의 연원이 됩니다.
다음으로 예배대상이었던 것은 금강보좌(金剛寶座)와 보리수(菩提樹) 그리고 보륜(寶輪)과 불족적(佛足跡)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징적인 표현은 불교 이전부터 있어왔습니다. 불교 이전의 고전적이고 성스러운 표상들로서 이 표상들이 불교 도상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금강보좌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 앉았던 자리(台座)입니다.
보리수는 원래 비파라수(卑波羅樹)인데 그 나무 아래서 부처님께서 깨달음 즉 보리(菩提)를 성취했다 하여 보리수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비파라수는 인도에서 이미 5천여 년 전부터 신성시되던 나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이 나무 아래서는 거짓말하기를 두려워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대(古代)에 신단수(神壇樹)를 천신(天神) 강하의 신성한 장소로 여겼던 성수(聖樹) 숭배의 기원이 있습니다.
보륜(寶輪) 또는 법륜(法輪)은 부처님의 설법의 표지입니다. 불법(佛法)의 바퀴를 돌린다는 의미인 것이죠. 보륜은 본래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칠보(七寶)가운데 하나였던 것인데 불교 설법(說法)의 상징 표시가 된 것입니다. 보륜상(寶輪相)은 부처의 32상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흔히 불상의 손바닥과 발바닥에 표현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고려불화(高麗佛畵)불상의 손바닥과 발바닥에는 어김없이 보륜이 금니 (金泥)로 그려 넣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족적(佛足跡)은 바라문교의 주신(主神) 비슈누(Visnu, 毗紐)의 족적(足跡)예배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현장의『대당서역기』에는 인도 불족적 유적에 대한 내용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아쇼카왕 탑으로부터 멀지 않은 정사(精舍)에 큰 돌이 있다. 여래가 밟은 곳으로 두 발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 길이는 1자 8치 남짓, 너비는 6치 남짓 된다. 양쪽 발자국에는 모두 윤상(輪相)이 있고 10개의 발가락에는 모두 꽃무늬가 있다 " (현장스님 대당서역기중에서)
이처럼 불상을 대신하여 사리를 모신 탑, 금강보좌, 보리수, 불족적 등이 부처님의 모습 대신 표현되어 오다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500여 년이 지난 기원 전후 무렵에 들어서 비로소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는 물론 예배상으로서 불상을 만들고자 하는 요구가 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불교교세의 확장과 신앙의 대상 조성
불교의 교세가 커지면서 많은 불교도들은 신앙의 실체로서 가시적인 대상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인도 불교도들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얼마 동안은 부처님의 모습과 가르침을 기억하고 부처님의 인격적인 교화를 사모했습니다. 또 직접 부처님을 만나지 못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소식을 생생하게 전해 들었고 사리를 모신 탑, 금강보좌, 보리수, 불족적, 보륜 등을 예배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입멸한 지 5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이르러서는 이 세상에 오셨던 위대한 인류의 스승으로서의 부처님의 모습은 희미해져가고 초인간적, 초자연적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불상을 만들려는 욕구가 따르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인도에서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하는데 최초의 불상은 인도의 서북부 간다라(Gandlh ra) 지방과 북부 마투라(Mathrur )지방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마투라는 오래 전부터 종교 도시로 알려져 있었으며 델리의 남쪽 갠지즈강의 지류인 자무나강 중간 서안(西岸)에 위치하여 인도 서북부 및 서해안을 연결하는 대륙간 교통의 요지로서 중개무역의 거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간다라의 불상<사진>은 그리스 신상(神上)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간다라 미술의 중요한 중심지 탁실라(Taxilla)를 중심으로 많은 사원이 건립되었습니다. 간다라 지방과 마투라 지방 어느 곳에서 먼저 불상이 만들어졌는가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어 왔으나 대개 거의 같은 무렵에 만들어졌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당시의 역사 사정은 인도사에서 가장 불명한 시기로 편년(編年)이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간다라 미술은 그리스 헬레니즘, 고전 로마 미술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사실적인 표현이 두드러지는 한편 추상적이고 동양적인 표현방식으로 변화했습니다. 간다라 미술은 불탑(佛塔)과 조각이 주로 있고 회화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조각은 전기에는 청회색의 간다라 석불상이 만들어지고 후기에는 쇠퇴해져가던 석조불상 대신 소조불상(塑造佛像)이 만들어지는데 여기에 채색이 가해져서 한층 우아해진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마투라 불상은 인도 전통미술의 계승이어서 간다라 불상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룹니다. 쿠샨 왕조 이전의 인도적인 육체성이 강조되는 전통을 이어받습니다. 마투라 미술 역시 불상 조각이 주이며 힘 있는 표현의 마투라 불상은 굽타왕조시대의 조각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인도의 불교 미술은 아쇼카왕 시대를 출발점으로 하여 상당히 융성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미술은 원시 소승 불교시대의 것이어서 수법이나 양식의 전개는 있으나 내용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때는 아직 불상이 출현하지 않았던 시대로 서기 1세기에 쿠샨 왕조가 성립된 이후 비로소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고 간다라 및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마투라, 사르나드, 아마라바티 등 인도 전 지역과 중앙아시아, 서역, 중국, 우리나라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쿠샨 제국이 몰락 한 후 굽타왕조가 일어나 그 초기에 불교는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전시대의 불교 미술의 집약으로서 굽타의 불상은 아시아 전역에서 전형적인 모델이 됩니다. 굽타 불상은 마투라 불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간다라적인 요소도 갖고 있습니다. 이후 8세기에 들어서 밀교가 일어나 11세기 또는 12세기까지 지속됩니다. 이와 같이 인도 불교 미술은 중앙아시아, 서역,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도연명과 이태백
*도연명
도연명(陶淵明. 365~427)은 약 1600여 년 전의 중국 사람이다. 도연명 혹은 도잠(陶潛)의 자는 원량(元亮이)이고, 동진(東晋)과 송(宋) 때의 심양(尋陽) 시상(柴桑) 사람이다. 그는 전원과 술을 벗 삼아 살아간 중국의 유명한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우리나라 삼국시대 문화예술의 독보적 역할을 한 것은 불교였다. 동진의 중 마라나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한 것이 384년인데, 이때 도연명은 20세였다.
도연명은 29세 때 벼슬길에 나갔다. 관리생활을 하다가 곧 그만 두었다. 그러나 집안이 어려워 친지의 천거로 나이 40세경이던 405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팽택현령(彭澤縣令)을 맡게 되었다. 이때가 동진(東晋) 시대였다. 도연명은 현령이 된지 80여일 만에 스스로 물러났다. 그가 관직을 그만 둔 이유는 틀에 박힌 공직생활과 아부 굴종해야 하는 벼슬아치의 생활이 성미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록에 전하는 바와 같이 도연명은 “다섯 말의 쌀(五斗米)을 얻기 위해 향리의 소인(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하여 현령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고향인 여산 서남쪽의 시상에 은거했다. 이와 다른 얘기도 있다.
그가 관직을 떠난 이유는 누이동생이 죽어서 상사(喪事)에 가기 위함이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렇게 물러난 현령 자리에 그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도연명은 손수 농사를 지으며, 가난과 병의 고통 속에서도 친구들과 술을 나누면서 우리가 보기로는 전원에서 낙천적 생활을 했다. 그는 62세경에 죽었다. 그가 고향에 돌아와 죽을 때까지의 시기(405~427)는 한반도에서 고구려 광개토왕 · 장수왕, 신라 실성왕 · 눌지왕이 왕위에 있던 때이다.
도연명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할 때의 심정과 그 뒤 어지러운 세상을 잊어버리고, 전원생활에 만족하는 내용을 쓴 것이 우리가 잘 아는 귀거래사(歸去來辭)다.
< 귀 거 래 사 >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귀거래혜 전원장무호불귀)
나 이제 돌아가리니 전원이 황폐해지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생략)...........
引壺觴以自酌 眄庭柯以怡顔(인호상이자작 면정가이이안)
술 항아리와 잔을 들어 마시고, 정원의 나무를 지그시 보며 미소 짓는다.
...........(생략)...........
世與我而相違 復駕言兮焉求(세여아이상유 복가언혜언구)
세상은 나와 맞지 않으니, 다시 벼슬에 오른들 무엇을 더 구할 것인가.
...........(생략)...........
富貴非吾願 帝鄕不可期(부귀비오원 제향불가기)
부귀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고, 신선이 사는 곳은 내가 바랄 수 없는 일이네.
...........(생략)...........
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요승화이귀진 낙부천명복해의)
얼마동안 자연의 섭리를 따르다가 죽어 가면 그만, 천명을 누렸거늘 다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 挽 歌 詩(만가시) >
有生必有死(유생필유사) 태어나면 반드시 죽게 마련이니
早終非命促(조종비명촉) 일찍 죽는 것도 운명이 아니겠는가.
昨暮同爲人(작모동위인) 어제 저녁에는 다같이 사람이었다가
今旦在鬼錄(금단재귀록) 오늘 아침에는 저승에 있네.
魂氣散何之(혼기산하지) 혼은 흩어져 어디로 가버리고
枯形寄空木(고형기공목) 마른 몸만 관속에 들어가 있는가.
嬌兒索父啼(교아색부제) 아이들은 아비를 찾으며 울부짖고
良友撫我哭(양우무아곡) 친구들은 나를 잡고 곡하는구나.
得失不復知(득실불복지) 이제는 이해득실 알지 못하니
是非安能覺(시비안능각) 시비인들 어찌 알 수 있겠는가.
千秋萬歲後(천추만세후) 천년만년이 지난 먼 훗날에는
誰知榮與辱(수지영여욕) 영화나 치욕을 그 누가 알기나 하겠는가.
但恨在世時(단한재세시) 단지 한스러운 일은 살아 있을 때
飮酒不得足(음주부득족) 마음껏 술 마시지 못했음이라.
우리의 삶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짧은 순간을 지나가면서 그 짧은 시간을 초, 분, 그리고 시로 나누고. 또 일(日)이다, 월(月)이다, 연(年)이다 하며, 시간에 매듭을 지어 구분하는 습관에 익숙하다. 이것은 무한한 시공 속에서 보면, 한낱 부질없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유한한 삶을 사는 우리가 이를 깨닫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도연명이 자기의 죽은 뒤를 상상하고, 글까지 남겼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차분한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에서 느끼는 자유, 즉 “마음의 평화”를 가져온 상태였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백
술과 시를 얘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시와 술에 있어서 인간이면서도 신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얘기하는 시선 · 주선 이태백(詩仙·酒仙 李太白. 701~762)이 바로 그 사람이다.
태백은 자이며, 백(白)은 이름이고,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다. 중국 당 나라 때의 시인이다. 이백은 자신을 스스로 적선(謫仙), 즉 “신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상으로 쫓겨 온 신선”이라고 했다.
같은 시대의 시성(詩聖) 두보(杜甫)는 이백을 주중선(酒中仙)이라 불렀다. 이태백의 시는 약 1천여 개가 넘게 전해지고 있다.
이백이 살던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시기였다. 불국사가 세워진 때이고,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가 만주 지역에 있던 시기였다. 이백은 신라의 명승 혜초(704~787)와 비슷한 시대의 사람이다. 이백이 태어난 때는 황룡사9층탑이 세워진지 57년째 되는 해였고, 경주에는 이 탑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었다. 이태백이 그때 경주에 왔었다면 틀림없이 황룡사9층탑에 올라가 역사에 길이 남을 시를 한 수 남겼을 것이다. 조금 아쉬운 일이다.
이태백은 앞에서 본 도연명보다 약 300년 뒤의 사람이지만 두 사람은 비슷한 점이 많다. 모두 술을 좋아했고, 청소년 때는 자유분방하고, 보다 풍족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 모두 60세가 조금 넘어 이 세상을 떠났고, 세상이나 사람들을 크게 원망하지 않았다.
평범한 눈으로 보면, 두 사람은 모두 말년이 행복하지는 못했고, 생활도 풍족하지 못했으며, 좀 소외된 삶 속에서 외로웠을 것 같다.
남성적인 것을 사랑했던 이백. 그는 25세 때 그가 태어난 곳으로 짐작되는 촉 땅을 떠나 양자강을 따라서 강남 · 산동 · 산서 등지를 돌아다녔다. 젊어서 도교에 심취했던 것으로 보이고, 산속에서 오래 보냈다.
이백의 시에서 약간 환상적인 요소들이 있는 것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 아닐까. 산은 이백의 시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다. 그 의미가 마음에 전달되는 듯 마는 듯, 알듯 모를 듯한 다음의 시는 그 무대가 산이다.
< 山中問答(산중문답) > : 산속에서 묻고 답하다
問余何意棲碧山(문여하의서벽산) 왜 산에 사느냐고 묻는 말에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대답 대신 웃는 심정 이리도 넉넉하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요연거) 복사꽃 물에 흘러 아득히 가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인간 세상 아닌 다른 세상이어라.
이백의 죽음도 시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말년에 병약하여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의지하다 병사했다는 주장은 평범하다. 반면, 장강에서 뱃놀이를 하다 크게 취하여 강물 위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익사했다는 것은 멋을 더해 준다. 아무래도 달을 잡으려다 익사한 죽음이 더 매력을 주는 죽음이 아닐까...
이백은 술을 퍽 좋아했던 것 같다. 그는 하루에 300잔, 100세까지 살면서 3만6천 날을 매일 그만큼 마실 계획이었으니 술과 벗하는 그 자체가 바로 삶이었다. 그는 이런 생각을 양양가(襄陽歌)에서 시로 빚어냈다.
술 한 말을 마시고, 시 100편을 썼다는 그의 주량은 어느 정도였을까? 아마 “300잔이다”, “말(斗)이다”하는 것은 중국풍(中國風)으로서 과장된 표현일 것이다. 이태백이 술을 많이 마신 애주가임에는 틀림없겠지만, 그가 마신 술이 알코올의 도수가 매우 높은 술이 아니었을 것임은 명백하다. 인간의 위장이 원래 독한 술에 익숙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태백은 월하독작(月下獨酌)이란 시에서 “술 석 잔이면 큰 도(大道)에 통하고,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가 된다”고 읊었다. 술과 자연과 자신이 하나가 되고, 그에 몰입되어 가는 이백의 모습에서 방랑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는 우수에 젖은 한 인간의 외로운 참모습을 보는 듯하다.
달밤에 홀로 술잔을 들면서도 자신과 달과 그림자 셋이서 술상을 벌였다고 생각한 이태백... 우리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하던 착상에 감탄하면서도 적막강산 같은 기분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다.
하나라 우 임금은 , 술은 자신을 망치고 , 나라를 망친다고 하면서 한번 마셔 본 후 다시는 입에 대지 않고 멀리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태백은 술로 말미암아 자신을 망친 경우일까, 아니면 신선 같은 경지에 도달하여 인간으로서 도저히 누릴 수 없는 승화된 삶을 보낸 경우일까...?
이태백은 이에 답한다.
“술에서 얻는 즐거움을 깨어 있는 이에게 전하려 말라.”
< 月下獨酌(월하독작) 2 > : 달밤에 혼자 술을 들다
天若不愛酒(천약불애주) 하늘이 술을 즐기지 않았다면
酒星不在天(주성부재천) 하늘에 주성이 있을 수 없고
地若不愛酒(지약불애주) 땅이 술을 즐기지 않았다면
地應無酒泉(지응무주천) 땅에 어찌 주천이 있겠는가.
天地旣愛酒(천지기애주) 천지가 이미 술을 즐겼으니
愛酒不愧天(애주불괴천) 술 즐김이 어찌 부끄러우랴.
已聞淸比聖(이문청비성) 듣기에 청주는 성인과 같고
復道濁如賢(복도탁여현) 탁주를 일러 현인과 같다하니
賢聖旣已飮(현성기이음) 성현을 이미 다 마신 후에
何必求神仙(하필구신선) 신선은 더 구하여 무엇 하랴.
三盃通大道(삼배통대도) 석 잔 술에 큰 도에 통하고
一斗合自然(일두합자연) 한 말에 자연과 하나 되거니
但得酒中趣(단득주중취) 취하여 얻는 즐거움을
勿爲醒者傳(물위성자전) 깨어 있는 이에게 전하려 말라.
< 月下獨酌(월하독작) 1 > : 달밤에 혼자 술을 들다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꽃 사이에 한 병의 술을 놓고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친한 이 없이 혼자 마신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잔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그림자를 대하니 셋이 되었구나.
月旣不解飮(월기불해음) 달은 본래 술 마실 줄 모르고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그림자는 부질없이 흉내만 내는구나.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한동안 달과 그림자 벗해
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 봄이 가기 전에 즐겨야겠지.
我歌月排徊(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니 달은 거닐고
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 내가 춤을 추니 그림자도 춤춘다.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깨어서는 모두 같이 마시고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 취한 뒤에는 각자 헤어지는 법.
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 무정한 놀음을 길이 맺었으니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다음에는 저 은하에서 우리 만나세.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 여행프로그램 [別有風景]
한비야 씨는 여행이란 무엇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나를 만나는 일이라고 합니다.
한동안 진행되었던 위례역사문화연구회의 정기답사를 2009년 9월, 102차로 끝내고 송파문화원의 '테마가 있는 문화탐방'이라는 강좌로 변경되다보니 우리 회원님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금년 4월부터 새롭게 여행 프로그램을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의 정규 프로그램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프로그램 이름을 고민하다가 이백의 시 <산중문답>에
問爾何事棲碧山(문이하사서벽산)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불답심자한)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류수묘연거)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이란 詩가 떠올랐습니다. 별유천지(別有天地)라는 말을 별유풍경(別有風景)으로 바꿔보니 보통 볼 수 없는 특별히 좋은 풍경을 표현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제 좋은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별유풍경(別有風景)을 구경하러 가보시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자유와 평화로움이 가득한 곳으로 말이죠.
여행일정은 종전과 같이 매월 4째 주 화요일에 진행되며 접수 및 신청은 위례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02-3401-0660)으로 하셔야 합니다. 1회 참가 시에 회비는 4만원이며, 3개원 단위로 신청을 하실 경우에는 10만원입니다. 강사는 오덕만 선생님이 진행하실 계획입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회차 |
일자 |
탐방주제 |
탐방지 |
4 |
7월27일(화) |
신비함과 순수함을 간직 화천 |
평화의 댐 → 꺼먹다리 → 파로호 → 위라리칠층석탑 → 화천향교 → 계성사지석등 → 화음동정사지 → 인민군사령부막사 → 화천수력발전소 |
5 |
8월24일(화) |
자연에 심취해 정작 깊은 의미를 지닌 문화유산을 소홀히 했던 고성 |
건봉사 사리탑 → 간성향교 → 화진포 (금구도, 화포리 고인돌) → 문암리 선사유적지 → 화암사 수바위 |
6 |
9월28일(화) |
산삼과 산약초가 유명한 고장 함양 |
학사루 → 함양상림 → 함양석조여래좌상 → 남계서원 → 청계서원 → 안의광풍루 → 용추사 → 심원정 → 농월정 → 동호정 → 군자정 → 거연정 |
7 |
10월26일(화) |
청정한 자연과 향토문화가 어우러진 괴산 |
각연사 → 미륵산성 → 우암송시열 관련 유적 → 산맥이옛길 |
8 |
11월23일(화) |
풍요롭고 아름다움이 넘치는 충절과 예학의 고장 논산 |
관촉사 → 계백장군묘소 → 돈암서원 → 개태사 → 상계사 → 성삼문묘 → 견훤왕릉 → 강경젓갈시장 → 명재고택 |
9 |
12월28일(화) |
서해안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한 당진 |
당진면천읍성 → 면천향교 → 영탑사 → 영랑사 → 안국사지 → 필경사 → 김대건신부생가지 |
10 |
1월25일(화) |
하늘의 뜻과 땅의 기운, 사람의 정성이 하나로 어우러진 금산 |
개삼터 → 태고사 → 보석사 → 남이자연휴양림 → 육백고지전승탑 → 백령성지 → 서대산 → 칠백의총 |
11 |
2월22일(화) |
북부에는 궁예, 남부에는 이 성계와 관련된 땅이름이 많은 포천 |
포천향교 → 구읍리석불입상 → 구읍리미륵불상 → 반월산성 → 청성사 → 용연서원 → 채산사 → 인평대군묘 → 성석린 선생 묘 |
12 |
3월29일(화) |
치악산과 섬강이 휘감아 흐르며 유구한 전통과 문화유적이 남아있는 원주 |
강원감영 → 박경리문학공원 → 원주시립박물관 → 충렬사 → 국형사 → 보문사 → 입석사법천사지거돈사지흥법사지 |
회 비 : 3개월(100,000원), 1개월(40,000원)
회비입금: 국민은행 836301-04-002170(예금주: 오덕만)
접수처 : 위례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담당: 오유정 02)3401-0660)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193-17 광진빌딩 2층 ☏ 3401-0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