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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세월 이어온 백제 가는 길
충청남도 지역을 여행하다보면 어느 지역보다도 유순하고 느릿한 산과 들이 마음을 포근하게 합니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색은 충청도 사람들의 느릿한 말투를 만들어내었습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충청도 문화야말로 소박한 정감이 넘치는 백제문화의 연장인지도 모릅니다.
충청도, 그 중에서도 서산과 당진, 태안방면을 여행할 때면 어머니의 포근함 속에 깃들인 강인함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해미읍성을 거쳐 개심사와 서산 마애불, 보원사터를 지나 태안의 마애삼존불을 둘러보고 나서 안면도로 이어지는 여정은 더없이 정답고 그윽한 미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러한 백제문화의 보고를 품고 있는 가야산을 찾아갑니다. 해미읍성을 지나 운산으로 가는 길을 달리다보니 갑자기 외국 땅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납니다. 붕긋붕긋 솟은 부드러운 야산과 드넓은 초원이 그렇습니다. 1980년 신군부에 빼앗겨 지금은 축협 소유가 되었지만, 김종필씨 소유의 638만평에 이르는 옛 삼화목장이 이국적인 풍경으로 다가옵니다.
신창저수지를 지난 버스는 산 속으로 깊숙이 빠져 들어갑니다. 조그마한 주차장에서 내리니 세심동(洗心洞) 개심사(開心寺) 입구라 쓰인 표지석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앙증스러운 돌에 새겨진 글씨지만 그 의미는 내 가슴을 울립니다. 마음을 닦고(洗心), 마음을 여는(開心) 것이야말로 내가 절을 찾고 산에 오르는 이유입니다.
산사 공간배치의 전형, 개심사
표지석을 지나면 세심(洗心)하고, 개심(開心) 하는 길이 이어집니다. 자연스럽고 고즈넉한 돌계단 길은 울창한 홍송의 호위를 받으며 가파르게 연결됩니다. 일주문 턱밑까지 도로가 나 있는 다른 절과 비교할 때, 개심사 가는 이 그윽한 오솔길은 그야말로 등록되지 않은 국보입니다.
이런 길을 잠시 걷고 나니 세속의 묵은 때가 씻겨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솔길 모퉁이를 돌아서자 긴 네모꼴의 연못이 나그네를 맞이합니다. 6∼7월이면 수련이 소담스럽게 피어 개심사로 드는 중생들을 반겨주는 곳입니다. 연못 가운데로 난 5m 길이의 꾸밈없는 나무다리를 건너는 것도 운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돌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섭니다. 자연스러운 돌계단은 만세루로 이어지고, 만세루 옆 해탈문을 통과하면 대웅전 앞마당이 나옵니다. 이렇게 개심사에 들기를 오늘이 세 번째입니다. 두 번은 수련이 예쁘게 핀 여름이었고, 오늘은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입니다.
올 때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도로가 아닌 소나무 그윽한 오솔길이며, 도무지 현대적인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때묻지 않은 절이 어디에 또 있을까 싶습니다. 가파른 비탈을 여러 단으로 깎아 연못, 범종루, 만세루, 대웅전으로 분할하여 건축을 한 점이나 요사채를 거쳐서 산신각으로 이어지는 길과 심검당 뒤 해후소 가는 길 모두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을 경영한 우리나라 원림의 미학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대웅보전, 심검당, 만세루 그리고 현재의 요사채인 무량수전까지 네 개의 건물이 ?자형을 이루고 있는 구조와 함께 우리나라 산사 공간배치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어디 하나 시멘트라고는 볼 수 없는 푹신한 흙길과 자연스러운 돌계단이 그렇게 정다울 수 없습니다. 조선초기 건물인 단정한 품위가 돋보이는 대웅보전과 개심사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초기 요사채인 심검당의 예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과거와 교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개심사는 너무 작아 왜소하지도 않고, 너무 커서 권위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아 청정한 선풍이 풍겨 나옵니다.
나는 개심사에 들를 때마다 만세루 창문을 통하여 범종각과 아래로 내려 보이는 풍경을 즐깁니다. S자형으로 굽은 듯하면서도 곧음을 유지하고 있는 네 기둥이 너무도 예술적인 범종각을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범종각 뒤로는 가깝고도 멀리 보이는 부드러운 산줄기가 '백제의 미소'처럼 포근하게 다가옵니다. 범종각 옆 감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빨간 감이 범종소리에 해탈을 하였습니다. 스님의 염불소리를 흉내내고 있는 새들도 이미 마음을 비워버렸습니다.
심검당의 굽은 서까래도 인상적입니다. 아직도 잎을 달고 있는 빨간 애기단풍길을 따라 해후소 쪽으로 걸어갑니다. 해후소 가는 길은 그 풍광도 풍광이지만, 비우러 가는 길이기에 더욱 아름답습니다.
해후소 옆길을 따라 산으로 오릅니다. 직곡(直曲)의 미를 띤 아름드리 홍송이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굽은 듯하면서도 결국은 직선을 이루는 소나무의 아름다움은 속이 꽉 찬 개심사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주능선에 올라서자 포근한 산보길입니다. 보원사터쪽에서 오는 길과 만납니다. 주능선에는 안개가 잔뜩 끼어 마치 아침 산보를 하는 기분입니다. 부드러운 솔숲길이 계속됩니다. 안개 때문에 주변을 바라볼 수 없는 산길을 걷다보니 나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내면을 향합니다. 산 속에서 돌아본 자신의 내면은 결국 일상 속에서 향기를 피워낼 것입니다.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명당, 남연군묘
일락산(521m)에 도착합니다.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입니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세상 같습니다. 시계 제로인 세상은 결국 현재에 충실함으로써 청명한 날씨로 바꿀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시야에 들어와야 할 해미면 소재지와 주변들판, 올망졸망한 산들을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가끔 나타나는 암릉과 분재 같은 노송의 운치가 그지없습니다. 특별히 화려하지도, 특별히 강인하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단순한 것이 오히려 우아함을 주는 백제문화를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그 백제 땅의 소박함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사방으로 전망이 트인 석문봉(653m)에 올랐지만 여전히 시계는 흐립니다. 두 개의 바위가 문기둥처럼 서 있다고 하여 석문봉(石門峰)입니다. 예산의 덕숭산과 서산의 팔봉산, 태안의 백화산을 비롯한 올망졸망한 산들과 내포평야의 너름이 유순하게 펼쳐져야 할 풍경은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석문봉에서 북동쪽능선인 옥양봉을 거쳐 수정봉으로 이어가면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 마애불에 닿습니다. 암벽 가득히 볼이 터질 듯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마애삼존불의 모습은 인간미 넘치는 아저씨 같습니다. 가히 백제시대 불교미술의 걸작품입니다. 이렇듯 마애불은 천년 이상을 한결같이 인간 세상에 미소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 미소야말로 인간이 간직해야할 얼굴입니다.
남쪽으로 가깝게 보여야할 정상인 가야봉도 구름에 가려 있고 해미산악회에서 쌓아놓은 3m 높이의 돌탑이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가야봉쪽으로 이어지는 암릉을 걷는데, 구름이 약간씩 걷히면서 주변 풍광을 보여줍니다. 정상인 가야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통신탑이 있는 정상도 잠에서 깨어나고 있습니다. 그 뒤로 원효봉이 우뚝합니다.
가야봉으로 통하는 안부에서 남연군묘 쪽으로 하산하는 길이 가파릅니다. 낙엽 진 활엽수들이 다소 쓸쓸해 보입니다. 나목 옆에서 나뒹구는 낙엽은 자유인이라 오히려 여유가 있습니다. 상가저수지를 지나 남연군묘를 찾아갑니다. 가야산이 유명해진 것은 남연군묘 때문이라고 할 정도로 남연군묘는 가야산의 상징물입니다.
남연군묘의 명성은 여기에 얽힌 풍수적인 사연 때문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지관에게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올 자리라는 이야기를 듣고, 원래 있었던 가야사라는 절을 불태우고 금탑이 있던 자리에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연군묘를 쓴 지 7년만인 1852년에 대원군은 둘째아들을 얻었고, 그로부터 11년 뒤인 1863년에 이 아이가 고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종의 아들인 순종까지 왕위에 오르고 조선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풍수에 전문적인 식견은 부족하지만 예사 터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풍수지리학에서 얘기하는 명당의 조건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석문봉을 주산으로 하고, 석문봉에서 옥양봉 쪽으로 뻗은 능선이 만경봉, 덕산을 거치면서 길게 좌청룡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석문봉에서 가야봉을 거쳐 원효봉, 금청산으로 길게 이어가면서 우백호를 이룹니다. 좌청룡과 우백호의 가운데로는 동남향으로 까마득하게 전망이 트이면서 60리 떨어진 곳에 있는 봉수산이 안산이 됩니다. 석문봉에서 이어져온 지맥이 남연군묘 앞에서 끝나면서 청룡맥의 물줄기와 백호맥의 물줄기가 합쳐집니다.
아무튼 남연군묘는 고종 5년인 1868년 독일 상인인 오페르트에 의해서 파헤쳐지기도 했지만 지관의 말대로 2대에 걸쳐서만 천자가 나오고 결국은 조선의 역사는 문을 내려야 했으니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잠깐 걷혔던 안개가 다시 덮이기 시작합니다.
*산행코스
-. 제1코스 : 개심사주차장(1시간 10분) → 일락산(50분) → 석문봉(20분) → 능선 삼거리(1시간) → 남연군묘(10분) → 상가리 주차장 (총소요시간 : 3시간 30분)
-. 제2코스 : 상가리 주차장(10분) → 남연군묘(20분) → 옥녀폭포(40분) → 석문봉(30분) → 옥양봉(40분) → 남연군묘(10분) → 상가리 주차장 (총 소요시간 : 2시간 30분)
*교통
-. 개심사는 서해안고속도로 해미나들목을 빠져 나와 해미읍성 옆 647번 지방도로를 따라 운산쪽으로 달리다가 개심사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하여 신창저수지를 지나 도로가 끝나는 지점까지 가면 주차장에 닿는다.
-. 남연군묘가 있는 상가리는 해미나들목에서 45번 국도를 달리다가 덕산면소재지에서 덕산초등학교 앞을 지나 15번 군도를 따라 계속 가면 상가리주차장에 닿는다.
-. 개심사까지 들어가는 버스는 없고, 하루 10회 다니는 해미에서 운산 가는 버스를 타고 개심사입구에서 내려야 한다. 덕산에서 상가리행 버스는 하루 5회 있다.
충청남도의 산과 들은 여느 지역과 달리 유순하고 부드럽다. 아산에서 예산·당진에 이르는 내포평야가 그렇고, 논산의 황산벌이 그러하다. 공주를 거쳐 부여로 흘러가는 백마강의 물 흐름이 유유하고,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능선으로 이어지는 낮은 산들이 어머니의 젖가슴 마냥 푸근하다.
이렇듯 부드럽고 느릿한 충청남도의 산하에는 백제의 향기가 서려 있다. 부여의 부소산성과 능산리 고분군·정림사지 오층석탑, 공주의 무령왕릉을 비롯한 송산리 고분군, 서산의 마애삼존불 등.
비산비야의 충청남도 땅에 그래도 산다운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금북정맥이다. 천안 흑성산(519m)과 아산의 광덕산(699m), 청양 국사봉(489m)을 거쳐 홍성 오서산(791m)으로 솟구친 후 북쪽으로 낮은 산줄기를 유지하다가 예산의 덕숭산과 가야산으로 솟아올라 태안에서 수명을 다하는 산줄기가 그것이다. 이러한 산들은 주위의 넓은 들판에서 곡식이 풍성하게 자랄 수 있도록 물을 제공해주는 젖줄이 된다.
금북정맥은 덕숭산에 도착하기 직전 잠깐 가지를 뻗어 아기자기한 용봉산을 이룬다. 덕숭산을 마주보고 있는 용봉산은 높이로야 400m도 안 되는 얕은 산이지만 홍성읍의 북쪽에 자리잡아 홍성 사람들에게는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한다.
홍성읍에 도착하자 조양문이 손님을 맞이한다. 읍내 중심부에 있는 조양문은 현대식 건물들 사이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의젓한 모습을 하고 있다. 조양문은 현재 일부만 남아있는 홍주성의 동문으로 이 고장의 역사적 상징물이다.
홍성 사람의 정신적 지주 역할 하는 산
홍성군청 앞에는 홍주아문(洪州衙門)이 솟을대문을 한 채 당당하게 서 있다. 옛 홍주와 결성이 합쳐지면서 앞뒤 한 자씩을 따와 지금의 홍성이 되었는데, 홍주아문은 옛 홍주동헌의 정문이었다. 그러니까 홍주의 동헌 자리를 그대로 지금의 홍성군청이 물려받은 셈이다. 현판 글씨 또한 흥선대원군이 쓴 글씨란다.
홍주아문 뒤편으로 돌아가면 석축 높이 4m에, 길이가 810m 정도만 남아 있는 홍주성이 파란만장했던 우리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시간이 없어 차분하게 홍주성을 한바퀴 둘러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쉽다.
험한 산도, 그렇다고 넓은 들도 없는 홍성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홍주는 호서의 큰 고을이다. 그 땅이 기름지고 넓으며, 그 백성이 번성하고 많아서 난치(難治)의 고장으로 일컬어왔다'고 하였다. 예로부터 홍성은 살기 좋은 고장이었던 모양이다. 이러한 고장에서 큰 인물이 났으니 3·1운동 당시 33인중의 한 분인 만해 한용운과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김좌진 장군이 그들이다.
역사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홍성읍내를 벗어나자 북쪽에서 아기자기한 모습의 용봉산이 기다리고 있다. 용봉산 남쪽자락인 용봉초등학교 입구에서 내리니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예년의 겨울 날씨로 본다면 그리 추운 날이라고 볼 수 없지만, 여태 포근한 날씨가 계속돼온 터라 춥게 느껴진 것이다.
용봉초등학교 옆길을 따라 용봉산의 품안으로 빠져든다. 미륵암으로 통하는 솔숲길이 아늑하다. 소나무의 푸르름은 차가운 날씨에 돋보인다. 호젓한 솔숲 길을 걷기를 10여분. 눈앞에 초라한 암자가 나타난다. 미륵암이다. 젊은 스님 한 분이 마침 밖에 있다가 우리와 인사를 나눈다.
'주전자에 물이 있으니 드시고 가세요.'
산 속에 있는 평범한 집 한 채와 같은 미륵암이지만 스님의 물 보시에는 자비가 넘쳐흐른다.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스님만이 아니다. 암자 바로 옆에서 벙글벙글 웃는 이웃집 아저씨 같이 포근한 느낌을 주는 미륵불 역시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기는 만찬가지다. 7m 높이의 우람하고 둔중한 몸체를 가진 석불입상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조성한 고려시대 작품으로 논산 관촉사 미륵과 닮았다.
미륵불의 미소를 겨울 소나무의 푸르름이 더욱 환하게 한다. 미륵암을 벗어나자 바위지대로 바뀐다. 암릉을 오르면서 뒤돌아본 홍성읍내가 평화롭다. 잔뜩 흐리던 날씨는 진눈깨비를 살짝 뿌리다가 점점 맑아진다. 서쪽 들판은 하늘에 떠있는 태양으로부터 여러 줄기의 햇살이 내려와 신비로워 보인다.
오밀조밀한 바위들과 키 작은 소나무가 어울린 풍경은 계속된다. 나무가 없는 암릉이 계속되면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진다. 차가운 바람 속에는 온갖 혼탁한 것을 정제시킨 맑은 기운이 내포되어 있다.
푸른 소나무 위에 솟은 수석전시장
동쪽 산비탈에도 매끌매끌한 바위들이 자리잡아 용봉산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팔각정 하나를 앉혀 놓았다. 용봉산의 절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저 팔각정은 풍류를 즐기기에 그지없이 좋을 듯하다.
정상에 서자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바위들의 모습에 입이 짝 벌어져버린다. 노적봉, 악귀봉으로 이어지는 암릉이 정상 남쪽보다도 빼어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거대한 수석이 수반 위에 앉아 있는 것 같다. 용봉산의 진수는 노적봉과 악귀봉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기암괴석에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북서쪽에서는 덕숭산(495m)이 편안한 모습으로 수덕사를 품고 있고, 그 뒤로 가야산(678m)이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중후하게 앉아 있다. 용봉산과 덕숭산 사이에는 용봉저수지가 자리잡고 있다. 산의 규모가 비교적 작은 덕숭산과 가야산이지만 산자락에는 수덕사와 개심사 같은 크고 작은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희미하게 보이는 수덕사를 바라보며 '참 자아'를 찾으려는 선승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산과 절은 물체가 아니라 '참된 나'를 찾으려는 마음임을 상기한다.
앞으로 펼쳐지는 기암괴석들을 바라보며 걷는 발걸음이 마냥 즐겁다. 푸른 소나무가 잎이라면 불쑥불쑥 솟아있는 바위들은 예쁘게 핀 수만 송이 꽃이다. 이렇게 수많은 바위들이 쌓여 있으니 그 이름도 노적봉이다.
앞으로 바라보이는 노적봉은 말할 것도 없고, 주능선에서 옆으로 뻗어나간 날등까지도 온통 바위 전시장이다.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안긴 여인의 모습이며, 하늘로 비상하는 거북이 형상 등 온갖 가지 모습을 한 바위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사람의 눈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 세상 최고의 조각가인 조물주의 작품 전시회가 이렇게 열리고 있는 것이다.
조각전시장을 꼼꼼히 둘러보느라고 나의 발걸음은 자꾸만 늦어진다. 북쪽의 마애불 뒤로 병풍처럼 펼쳐지는 병풍바위도 절경이다. 용봉산은 산이 낮고 규모가 작아서 그렇지 전국의 어느 명산에도 뒤지지 않을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설악산의 축소판 같은 바위들이며, 미륵불·마애불 등의 불교유적, 그리고 홍성읍내의 홍주성과 홍주아문·조양문 등이 아름다움과 함께 역사적 무게를 더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상을 달관한 모양으로 서 있는 덕숭산과 가야산을 내내 바라보며 걷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주능선을 따라 가다가 마애불이 있는 곳으로 내려선다. 넓은 터를 앞에 두고, 우뚝 솟은 바위에 새겨놓은 석불입상이 고조된 나그네의 마음을 진정시킨다. 남쪽의 홍성읍내를 바라보고 있는 마애불은 머리 부분을 깊게 새겨 얼굴은 풍만한 편이나, 아래쪽으로 갈수록 신체표현이나 옷 주름은 얕게 돋을 새김 하였다. 사뭇 엄숙하면서도 인자한 맛이 풍기는 마애불상은 고려 때 불상으로 여겨지며 보물 제355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애불상 앞 공터에는 원래 용봉사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터가 명당이라 하여 풍양 조씨 일가가 묘를 쓰겠다고 절을 폐허시켜 버린 바람에 지금의 용봉사는 200m 아래로 옮겨졌다.
마애불에서 바라보는 동쪽의 병풍바위는 압권이다.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우뚝 솟은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져 아름다움을 넘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마애불에서는 절경을 이룬 노적봉과 악귀봉까지 바라볼 수 있다. 아름다운 바위들로 둘러 쌓인 명당자리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아름다운 바위꽃의 중앙에 자리잡은 마애불
천하의 명당인 마애불 앞 공터에서 우리는 점심공양을 한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산행에서는 점심식사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마애불 뒤편 날등을 타고 주능선에 오르니 병풍바위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지점에서 팔각정이 기다리고 있다. 이곳 팔각정에서 바라보는 내포평야가 드넓고, 수암산(260m)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부드럽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가야산 앞뒤에 있는 열 현을 내포라 한다. 지세가 한 구석에 막히어 끊기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병자년 두 차례의 난리에도 여기에는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며, 생선과 소금이 넉넉해 부자가 많고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도 많다'고 했다. 내포평야는 부드러운 구릉과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남쪽으로 청양의 칠갑산(561m)과 홍성과 보령 사이에 자리잡은 오서산이 홍성읍내를 사이에 두고 멀리 바라보인다. 용봉산에는 길옆으로 많은 벤취와 평상, 정자를 설치해 두었다. 산 전체를 공원화 해놓은 것이다.
팔각정을 지나자 산세가 부드러워진다. 그 동안의 암릉길은 사라지고 소나무 숲을 이룬 동네 뒷산 같은 푸근한 산줄기가 이어진다. 길 양쪽으로 도라지꽃을 심어놓았다는 안내문을 본다. 도라지꽃이 피는 여름, 보라색과 흰색의 담백한 멋을 즐기며 걷는 발걸음도 즐거울 듯하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내포평야를 뒤덮는 소리가 들려온다. 바람소리에 일행들은 이내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고요하게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캐롤송으로 전달된다. 모레가 성탄절이라 아기 예수의 거룩한 탄생의 의미가 바람에 실려오는 모양이다.
솔숲이 계속되다가도 갖가지 모양의 바위가 등장하곤 하여 지루하지가 않다. 서쪽 비탈이 온통 불에 타버린 곳을 지난다. 나무 없는 산의 허망함을 억새가 달래준다. 나무 없는 산등성에서 맞이하는 바람이 매섭다.
수암산에 도착하니 무뚝뚝한 듯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모양의 바위들이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북쪽으로 광활하게 드러나는 내포평야가 가슴을 확 트이게 한다. 뒤로는 용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부드럽다. 내내 함께 한 덕숭산과 가야산의 믿음직함도 여전하다.
수암산에서 덕산온천 쪽으로 가면서 가끔 만나는 바위들이 아름답다. 삼형제가 사이좋게 서 있는 것 같은 바위가 있는가 하면 고래 모양의 바위도 있다. 불이 나 민둥산이 된 곳을 지나치자 다시 푸근한 솔숲길이다. 2m 정도 되는 돌탑 2기가 서 있는 봉우리에 서니 덕산면 소재지와 덕산온천이 발 아래에 와 있다.
덕산온천에 도착한 일행은 짜여진 일정 때문에 곧바로 수덕사로 향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 중의 하나인 수덕사 대웅전이 덕숭산의 포근한 산세와 아름다운 적송의 품에 안겨있다.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수덕사 대웅전에서 내려보는 저 아래 속세의 풍경이 그렇게 부드럽고 푸근할 수 없다.
매월 사리(보름과 그믐) 때마다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아름다운 해변, 무창포로 가는 길이 바쁘다. 오후 들어 화창해진 날씨 덕분에 서해낙조를 보아야 하는데, 낙조시간에 닿을 수 있을지 마음이 급해진 것이다. 시간은 없는데 보령시내에서 차가 막혀 지체가 된다.
차창 밖에서는 이미 붉은 채색을 한 태양이 해넘이 할 준비를 하고 있다. 거의 일몰시간이 다되어 무창포에 도착하여 바다로 뛰어갔건만 어느새 구름이 끼어 제대로 낙조를 볼 수가 없다. 육지에서 1.5km 떨어진 석대도와 무창포해수욕장 남쪽의 해송과 기암절경 사이의 바다를 붉게 적신 모습이 그런대로 아쉬움을 달래준다.
우리는 실루엣을 이룬 석대도며, 해송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무창포 해변을 걷는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가 내는 해조음이 음악처럼 들려오고, 사람 없는 겨울바다는 서서히 어둠이 내리면서 고요함을 넘어 적막한 분위기가 된다. 겨울바다의 적막함과 함께 가슴 깊이 숨어 있는 어떤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산행코스
-. 제1코스 : 용봉초등학교(50분) → 용봉산(30분) → 마애불(1시간) → 수암산(1시간) → 덕산온천 (총 산행시간 : 3시간 20분)
-. 제2코스 : 용봉초등학교(50분) → 용봉산(30분) → 마애불(20분) → 용봉사 입구 (총 산행시간 : 1시간 40분)
*교통
-. 서울방면에서는 경부고속도로 천안교차로를 빠져 나와 21번 국도를 따라 아산과 예산을 지나 홍성까지 간다. 경상도 쪽에서는 대전에서 공주와 청양을 거쳐 홍성으로, 전라도 쪽에서는 호남고속도로 논산교차로에서 부여와 청양을 거쳐 홍성으로 진입한다. 홍성읍에서 609번 지방도로를 따라 3km 정도 가면 용봉초등학교로 좌회전하는 이정표를 만난다.
-. 서울, 대전에서 홍성까지 시외버스가 자주 다닌다. 열차를 이용할 경우 장항선 홍성역에서 하차하면 된다. 홍성에서 용봉초등학교로 가는 버스가 2시간 간격으로 있다.
수덕사에서 들려오는 여승의 목탁소리
평소 같으면 아침 7시가 넘어서야 일어나던 아이들이 6시도 못되어 일어났다. 오늘은 1박 2일로 여행 겸 산행을 하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다.
'아빠, 오늘은 무슨 산에 가요?'
'응, 덕숭산인데 거기에는 유명한 수덕사라고 하는 절이 있어. 도현이, 절 가봤지?'
'아, 부처님 있고 탑 있는데…'
평소에도 말이 많은 일곱 살배기 도현이는 짐 챙기느라고 바쁜 나에게 계속 말을 걸어온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2월의 마지막 날 천안행 고속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천안을 거쳐 아산에 도착한다. 아산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외암리 민속마을과 온양민속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서 곧바로 예산 수덕사로 향한다.
나는 초행길이면 주로 운전석 맞은편 제일 앞좌석에 앉는다. 이 자리는 차창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을 가장 넓게 볼 수 있어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시키기 때문이다. 오늘도 맨 앞좌석에 앉아서 밖을 내다본다. 낮은 산과 넓게 펼쳐진 들판이 부드럽고 평화롭게 다가온다. 충청권의 최대 평야지대인 내포평야의 모습이다.
버스는 서쪽으로 내달려 삽교를 지난다. 그리고 한참 후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낮은 평야지대만 지나다가 갑자기 앞을 가로막고 선 산줄기를 만난다. 가야산과 덕숭산이다. 차는 어느덧 덕산온천을 지나고 있다. 아산에서 수덕사까지 오는데 무려 세 개의 온천을 만난다. 온양온천과 도고온천, 덕산온천이 바로 그것이다.
덕숭산 자락에 위치한 덕산온천을 지나서 금방 수덕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일단 오늘 저녁 묵어야 할 숙소부터 찾는다. 물론 숙소는 마음 속으로는 정해 두었다. 국제적 화가인 고암 이응로 화백의 본부인이 운영했었던 수덕여관이다. 수덕사 매표소 바로 앞에 초가로 된 수덕여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파트 문화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겐 다소 불편한 시설이지만 초가에다 한지로 바른 창살 문과 마루 등 옛 집같은 분위기가 정겹기도 하다.
'아주머니, 암각화 어디있어요?'
'예, 여관입구로 가보세요.'
이렇게 이응로 화백의 암각화부터 찾는다. 수덕여관 입구 한쪽에 자리잡은 너럭바위 옆면에 우리의 문자를 사용하여 음각한 추상화를 바라본다. 이 암각화는 고암이 1968년 소위 '동백림사건'으로 1년여 동안 옥살이를 하고 나와 잠시 이곳에 머무를 때 새긴 그림이란다. 그러나 정작 이응로의 본부인은 다른 여자와 함께 빠리로 가버린 남편으로부터 철저히 버림을 받고 쓸쓸한 생을 살아야 했다.
수덕사로 향한다. 수덕사는 백제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고찰. 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쌓인 연륜 만큼이나 고풍스럽고 고즈넉한 모습의 수덕사를 상상해 본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상상은 여지없이 빗나간다. 일주문에서 대웅전 앞으로 이어지는 길이 꽤 운치있었다고 하는데 몇 년 전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하면서 그 자연스러운 길은 완전히 없어져버리고 삭막한 모습만이 남아있다.
사실 우리나라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고찰들은 불교계의 소유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고찰들은 불교라는 종교행사를 갖는 사당이면서도 우리 민족의 거룩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필요에 따라 중창불사(重創佛事)를 하는 것이야 불교계가 해야할 일이겠지만 문화재적 요소들을 훼손시켜서는 안된다. 길 하나를 낼 때에도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충분히 살려내는 안목과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수덕사는 큰 절이다.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백양사와 함께 우리나라 5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을 갖고 있는 절이다. 또한 청도 운문사처럼 비구니(여승)들의 선방이 있어 청순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오죽했으면 '수덕사의 여승'이란 대중가요까지 나왔을까.
대웅전 앞에 선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남향으로 앉아있는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세워진 건물로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주위 산자락의 노송들과 경내의 느티나무 고목이 대웅전의 단아한 모습과 함께 훼손된 수덕사 분위기를 그나마 아늑하게 지키고 있다. 대웅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시원하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아스라이 이어지는 산줄기들을 내려다보는 맛이 일품이듯이 수덕사 대웅전의 배흘림 기둥에서 내려다보는 들판 또한 그지없이 아름답다. 수덕사는 이러한 전망으로 인하여 호방한 분위기를 형성해 준다. 분지형 지형은 아늑한 분위기를, 지대가 높은 지형은 시원스러운 전망을 끌어안도록 터를 잡은 우리 조상들의 지혜는 한 마디로 감동적이다.
대웅전 서쪽 요사채 뒤에는 관음바위라 불리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여기에는 수덕사라 불리게된 전설이 서려있다. 통일신라시대 수덕사에서는 불사를 하기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미모가 빼어난 여인이 찾아와서 공양주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 뒤로 '수덕각시'로 알려진 이 미모의 여인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던 중 돈 많은 재상의 아들인 '정혜'라는 청년이 나타나 수덕각시에게 청혼을 하였다. '이 불사가 원만하게 끝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한 수덕각시의 말에 총각은 많은 재산을 투자하여 불사를 도왔다. 이리하여 10년은 족히 걸릴 불사가 3년만에 끝나게 되었다. 낙성식이 끝나자 마음이 부풀어 있던 청년은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나자고 하였다.
그러나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던 수덕각시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마음이 급한 총각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덕각시는 도망을 갔고, 총각이 뛰어가 잡으려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져 수덕각시는 버선 한 짝만 남기고 바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 이 여인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고 불렀다.
관음바위를 돌아 산길로 접어든다. 수덕사에 얽힌 내력을 읽고 있는 사이 아이들과 아내는 먼저 올라가 버렸다. 노송 숲과 계곡의 물소리가 그윽한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넓은 길에 돌계단이 설치되어 한 계단 한 계단을 올라간다. 정혜사까지 연결되는 이 돌계단은 무려 1,200개에 이른다. 아름드리 굴참나무 등도 이 산의 무게를 더해 준다.
수덕사에서 15분 쯤 올라가니 매끈한 화강암이 수십 미터의 절벽을 이루고 있다. 이 바위에는 金仙洞(금선동)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절벽 위에는 정사각형의 초가 한 채가 서 있다. 초가 뒤편도 그 만한 높이의 화강암 벼랑이다. 이 초가에는 소림초당(小林艸堂)이라는 문패가 걸려있다. 위 아래가 모두 절벽이지만 아슬아슬한 느낌은 커녕 편안한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초당 입구에서 먼저 올라온 아이들을 만난다. 오늘따라 산에 오르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짜증을 내기도 했을 텐데 맨 앞에 서서 씩씩하게 올라간다. 초당에서 10분도 채 못가서 1924년 만공스님이 세웠다는 7m가 넘는 거대한 미륵불을 만난다. 마치 논산 관촉사 미륵불과 비슷한 모양을 한 이 석불은 그 예술적 가치보다 숱한 일화를 남긴 이 시대 최고의 선승, 만공스님이 남긴 자취라는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자유분방하고 어찌보면 기인적 성격을 가진 만공의 수행은 한마디로 무애행(無涯行)이었다. 정해진 법도를 뛰어넘음으로써 오히려 법도를 지키는 경지라고나 할까? 어떠튼 만공의 일화에서는 기상천외한 기질을 서슴없이 엿볼 수 있다.
어느날 험한 산 길을 가는데 같이 가던 스님이 힘들어 더 이상 걷지 못하겠다고 했다. 마침 근처에는 화전을 일구고 있던 부부가 있었는데, 만공은 달려가 여자를 덥석 안고 입을 맞춰 버렸다. 놀란 남편은 쇠스랑을 들고 저 중놈들 죽여버린다고 쫓아왔다. 엉겁결에 동행승도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났다. 숨을 헉헉대며 고갯마루까지 올라온 동행승은 부부가 보이지 않자 만공에게 그게 무슨 짓이냐고 꾸짖었다. 그러자 만공은 '이 사람아, 그게 자네 탓이라고. 그 바람에 고갯마루까지 한숨에 달려왔지 않나. 이젠 괜찮은가?'
만공이 있기까지는 그의 스승 경허 대선사가 있었다. 경허는 조선 말기 쇠락해 가는 우리나라 불교의 선풍(仙風)을 크게 일으킨 분이다. 서른 살 때에 길을 가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난 경허스님은 돌림병이 돈다는 이유로 마을사람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 비를 피하지 못하고 마을 밖 큰 나무 밑에서 밤새 시달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 경허는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그동안 문자 속에서만 터득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후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빤지를 설치해 놓고는 졸음을 쫓으면서 정진하여 크게 깨달았다 한다.
이후 경허는 수많은 스님들을 길러냈다. 문둥이병 걸린 여자와 몇 달 동안 동침하는가 하면 술에 만취해 법당에 들어오기도 하는 등 경허 역시 거침없는 행동으로 일반 승려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오늘날 수덕사가 전국 5대 총림의 하나로 불교계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일찌기 경허와 만공 같은 고승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미륵탑 옆의 향운각(香雲閣)으로 들어간다. '일반인 출입금지'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조심스럽게 향운각으로 들어간다. 조그마한 향운각 마당에서 수덕사를 내려다 본다. 그리고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들판을 바라본다. 주위의 산비탈에는 부드러운 느낌의 화강암과 소나무들이 어울려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윽한 솔향이 구름처럼 다가온다. 멀리 용봉산도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향운각을 나와 한 굽이 돌아 올라가니 만공탑이라고 쓰인 만공스님의 사리탑이 있고, 여기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정혜사다. 능인선원이라고 하는 선방이 있는 정혜사는 일반인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문이 굳게 잠겨있다.
아이들은 계속 앞장 서 간다. 둘째 도현이가 한 마디 던진다.
'아빠. 나 아빠보다 잘 간다?'
정혜사를 지나고 나니 흙길이다. 소나무들의 키도 어느새 작아졌다. 소나무 사이 사이에는 진달래가 봄을 준비하고 있다. 정혜사에서 30여분 걸려 정상에 도착한다.
무엇보다 전망이 장쾌하다. 동쪽으로는 덕산온천이 자리잡고 있고 계속하여 삽교·예산으로 이어지는 내포평야가 끝없이 이어진다. 남쪽으로는 홍성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북서쪽 건너편으로 가야산(678m)이 가깝게 다가선다.
대원군의 야심은 가야산에 있는 가야사라는 절을 허물고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이장하기까지 이른다. 2대에 걸쳐 왕이 나온다는 지관의 말처럼 그의 아들과 손자가 임금(고종과 순종)이 되었으니 지관의 예언은 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순종 임금을 끝으로 조선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으니 땅 속에 있던 대원군인들 마음이 편했겠는가?
가야산과 덕숭산 사이에는 예산에서 해미읍을 거쳐 서산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지나고 있다. 남동쪽으로는 비록 해발 381m에 불과하지만 기암괴석이 어울려 이 고장 사람들이 소금강이라고 부르는 용봉산의 암봉들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봄이 오는 것을 시샘하는 바람이 꽤 차다. 정상에서 북동쪽 산등성을 타고 계속 가면 둔리마을에 이른다. 이 코스가 덕숭산 산행의 일반적인 코스지만 수덕사에서 1박을 해야하는 우리는 다시 수덕사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내려갈 때는 오던 길을 택하지 않고 남동쪽 능선으로 방향을 잡는다. 올라 올 때의 넓은 길과는 대조적으로 비교적 좁은 길이 이어진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다가 스님 한 분을 만난다.
'대머리 아저씨, 대머리 아저씨.'
철없는 도현이의 장난기 어린 말소리가 스님의 귀에도 들렸음이다.
'그래, 내가 대머리 아저씨다.'
스님은 웃으면서 올라간다.
'여보, 스님 얼굴 정말 맑지?'
아내가 한 마디 던진다.
10여분 능선을 타고 내려오니 약수터가 하나 있고 여기에서 왼쪽으로 난 길로 돌아 들어가니 허술한 슬레이트지붕을 한 암자 하나가 서 있다.
'묵언정진 중 면회 사절합니다. 대단히 미안합니다. 전월사 주인 백'이라 쓴 글씨가 대문을 막아선다. 깨끗하고 아기자기한 바위들과 노송들을 등지고 자리잡은 전월사는 절 사(寺)가 아닌 집 사(舍) 자를 쓰고 있다. 사람들의 통행도 별로 없는 곳에 조용하게 자리잡은 이곳 전월사는 세속에 찌는 나 같은 속인(俗人)이 보기에도 묵언정진(默言精進)하기에 안성맞춤인 것 같다. 건물 옆에 45도 각도로 비스듬하게 누워있는 길쭉한 바위가 마치 부처님의 형상같기도 하고.
전월사를 나와 서쪽 산허리길로 비스듬하게 돌아가니 정혜사가 나온다. 정혜사에서 만공탑 미처 못가 견성암 쪽 갈림길 표시가 살짝 보인다. 거의 사람이 다니지 않은 듯 길조차 희미하다. 아내와 아이들은 오던 길로 내려가고 나는 혼자서 견성암 쪽으로 향한다. 정혜사에서 5분쯤 가니 전망 좋은 바위가 나타난다.
근처에는 고고하면서도 그지없이 아름다운 소나무가 깨끗한 바위들과 어울려 있고, 여기에 수명을 다한 소나무 고사목이 죽어서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양쪽 산줄기의 소나무와 바위가 만들어낸 멋진 풍경도 그대로 시야에 들어온다. 이러한 풍광 속에 절들이 어김없이 자리잡고 있다. 골짜기마다 자리잡고 있는 절들이 품어내는 부처의 향기는 높이로야 5백m도 안되는 낮은 산을 1천m 이상되는 산으로 그 품격을 놓혀 놓았다.
오른쪽 저 아래로 견성암이 앉아있고 견성암에서 정혜사 쪽으로 올라가는 구불구불한 도로도 보인다. 견성암 가는 저 도로와 만나려면 정혜사에서 뻗은 능선을 넘어 산비탈로 내려가야 했는데 능선을 타고 왔으니 길을 잘못 든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덕숭산이 품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여기에서 감상할 수 있었고 산을 파헤쳐 낸 도로를 걷느니 차라리 이 쪽 길이 낫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가파른 길을 내려가니 수덕사 뒤편 돌계단 길이 나온다. 수덕사에서 오른쪽(서쪽)으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견성암으로 간다. 엄청나게 큰 건물은 항시 100여명 이상의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선방으로 쓰이고 있다. 참선하는 비구니들만 있는 곳에 이방인이 불쑥 들어가는 것도 쑥스러워 얼른 나온다. 다시 일주문으로 내려와 오른쪽으로 향하니 환희대다.
이 환희대가 있던 자리에는 원래 견성암이 있었다. 그 견성암의 현판은 비구니 선방인 지금의 견성암으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는 환희대라는 새로운 당우가 생겼다. 옛 견성암에는 '일엽'이라고 하는 유명한 비구니 스님이 머물렀다.
1896년에 태어난 김원주는 이화여전과 일본유학까지 마친 신여성으로 당시 사회의 도덕율에 도전하는 과감한 글과 행동으로 숱한 풍문을 몰고 다녔던 여자였다. 그런 김원주가 38세 때 수덕사의 만공스님을 만나고는 머리를 깎고 일엽이라는 이름으로 견성암에 눌러앉아 버렸다. 젊은 시절 뜨거운 정열을 쏟았던 김원주는 이곳에서 나머지 인생 38년을 모범적인 승려로 살다가 1971년 열반하였다고 한다.
수덕여관으로 돌아오니 벌써 내려온 아이들과 아내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아빠, 내일은 어디 갈거여요?'
'민성이 바다 갈라지는 것 못봤지? 내일은 바다가 갈라지는 모습을 보러 보령에 있는 무창포로 갈거야.'
'야, 신난다.'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큰 아들 민성이는 바다구경을 간다는 아빠의 얘기에 신이 난 모양이다.
*산행코스
-제1코스 : 수덕사 주차장(10분) → 수덕사(20분) → 정혜사(30분) → 정상(10분) → 전월사(15분) → 정혜사(15분) → 수덕사(10분) → 수덕사주차장 (총소요시간 : 1시간 50분)
-제2코스 : 둔리(1시간) → 정상
콩밭 메는 아낙과 장곡사의 그윽한 목탁소리
우리 민족은 유난히 춤과 노래를 좋아한다. 이러한 여흥을 통해서 삶의 즐거움을 영위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쌓였던 욕구불만이나 한을 해소하곤 했다. 물론 그 형태는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과거에는 탈춤이나 농악 등 주로 마을 중심의 공동체 놀이문화가 주종을 이루었다면 현대로 오면서 생활형태가 개별화되고 개인화되면서 놀이문화도 소단위로 바뀌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소위 노래방 문화다.
가족 단위로 또는 친구들과 함께 가장 부담없이 찾는 곳이 다름아닌 노래방이다. 얼마전 어느 일간지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곡은 '칠갑산'이라 한다.
'콩밭메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홀로 젖는다'로 시작되는 칠갑산이라는 노래가 상당한 세월을 두고 대중적인 인기를 누려온 데에는 그 가사나 곡이 모두 우리의 가슴 속에 질펀하게 번져있는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칠갑산은 충청남도 청양군에 있는 칠갑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보통명사로서의 칠갑산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칠갑산은 높이라고 해봐야 561m 밖에 안 되지만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이름이 나 있다.
칠갑산은 그 놓임새 때문에 충청도에서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산은 충청남도 전체를 크게는 홍성 방면의 북서부와 공주 방면의 남동부로 양분하고, 작게는 청양군을 정산면 쪽의 산동(山東)과 청양읍 쪽의 산서(山西)로 갈라 놓았다. 이러한 놓임새 덕분에 칠갑산은 홍성의 오서산(791m)과 보령의 성주산(680m) 등에 비하여 높이는 낮지만 사람들 속에 자리잡고 있는 무게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청(靑)'자가 들어간 고장치고 두메산골이 아닌 곳이 없다. 경상북도의 청송이 그렇고, 대구 아래의 청도가 그러하며 이곳 청양이 또한 그러하다. 청양을 두고 '충청남도의 강원도'라 하고 칠갑산을 '충남의 알프스'라고 부른다 하니 그 정도를 알 만하다.
천년의 고도 부여를 거쳐 칠갑산 가는 길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첩첩산중을 이루고 있다. 충청도라는 느낌보다는 강원도 어느 골짜기에 들어선 것 같다. 이러한 두메산골 한 가운데에 칠갑산이 자리를 틀고 앉았다. '콩밭메는 아낙네야'로 시작되는 칠갑산 가요가 충분히 나오고도 남았을 법하다.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를 지나 칠갑산 품 안으로 깊숙이 파고드니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장곡사가 호젓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칠갑산과 같이 이름있는 산에 둥지를 튼 장곡사가 이처럼 호젓한 분위기를 간직해 왔던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통이 좋은 한치고개 쪽으로만 몰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장곡사 밑에는 장곡산장이라는 가게 하나만이 자리잡고 있을 뿐 다른 인조물은 없다. 어설픈 인간의 욕심이 가미되지 않은 이곳 분위기가 사뭇 정답다.
장곡사 조금 못미쳐 장곡산장이 있는 곳으로 흘러내리는 계류는 아흔아홉 굽이를 휘감고 돌아온다고 해서 아흔아홉계곡이란다. 이렇게 긴 골짜기가 있어 곧 지명이 되고 절 이름이 되었다. 이름하여 장곡리(長谷里)와 장곡사(長谷寺)다.
장곡사에 들어선다. 칠갑산 정상에서 뻗어나간 395봉과 316봉 사이의 송골에 자리잡은 장곡사는 둘레가 온통 비탈이다. 이러한 지형 때문인지 절터가 좁아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더욱 신기한 일은 대웅전이 두 개라는 점이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우(寺宇)들 사이에 남서향으로 앉아있는 것이 하(下)대웅전이요, 하대웅전 옆 50개의 계단을 따라 올라 90도 각도를 달리하여 조용히 자리잡은 것이 상(上)대웅전이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당연히 협소한 골짜기로 이루어진 지형 때문일 것이다. 물론 상대웅전, 하대웅전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이 편의상 불러온 이름이고, 두 건물 다 편액에는 '대웅전'이라 쓰여 있다.
게다가 불교 교리에 따르면 대웅전에는 석가여래를 모시게 되어 있으나 하대웅전에는 약사여래, 상대웅전에는 비로자나불과 약사불이 있어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러한 장곡사는 국보 제58호인 철조약사불좌상을 비롯하여 4점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
천년의 고찰이면서도 요란하지 않고 천년을 하루같이 조용하게 지켜온 장곡사는 '아름아름 찾아왔다가 의외로 속이 꽉 찼음을 발견하고 다음에 또 다녀가리라 다짐하게 만드는 그런 절'이다.
칠갑산 산행의 들머리는 장곡사 맞은 편 산등성을 오르는 길이다. 하산 지점인 한치고개까지는 중간에 물이 없기 때문에 절 앞에 있는 샘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식수를 준비한다. '정상 3km'라 쓰인 이정표 방향을 따라 능선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수백 년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칠갑산의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솔 바람과 그윽한 솔 향기가 신선하다. 솔 잎 사이로 드러난 청잣빛 하늘이 사뭇 청신하다. 산 새들의 지저귐은 음악적인 곡조로 가슴 저 밑바닥까지 울려준다.
수많은 세월을 거쳐오는 동안 나무들은 숲을 이루고, 숲은 단순한 나무들의 집합이라는 개념을 뛰어넘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숲은 자신이 지닌 풍치는 물론이고 이 땅의 역사와 문화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이곳 숲 길을 걸으며 백제의 숨결을 느낀다.
완만한 능선길이 계속된다. 소나무 사이 사이에는 연분홍빛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려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작은 키의 진달래는 특별히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봄 산의 격조를 한층 높혀준다. 속은 비어 있으면서도 겉만 번지르하게 치장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기를 낮춤으로써 오히려 돋보이는 진달래의 교훈은 산이 준 또 하나의 가르침이리라.
숲과 진달래의 의미를 되살리며 걷다가 30여분 만에 다다른 곳은 465봉 근처의 쉼터다. 능선 상에 만들어 놓은 나무의자에 앉아 일행들은 담소를 나눈다. 부지런한 사람은 그 사이에 사과를 꺼내 깎아서 한 조각씩 돌린다. 땀 흘린 후 잠시 쉬면서 먹는 사과 한 조각의 맛이 남다르다.
여기에서 정상은 1.3km. 쉼터를 출발하자마자 굴참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진달래는 꽃망울만 간직하고 있을 뿐 아직 연분홍빛 꽃잎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왼쪽(북쪽)으로는 널울마을이 다정한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산행 중 산골짜기로 모습을 드러내는 소담스러운 마을풍경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반갑고 정다움을 가져다 준다.
삼형제봉을 잇는 삼거리를 지나 약간 가파른 길을 바짝 올라서니 정상이다. 정상에는 헬기장이 닦여져 있고 대리석으로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헬기장과 제단이 명산인 칠갑산 정상의 분위기를 오히려 깨뜨리고 있다. 이왕 제단을 만들려면 돌탑이라도 하나 쌓아놓고 그 앞에 제단을 만들어 놓았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본다.
화사한 봄 날씨가 마치 가을 마냥 청명하다. 덕분에 사방으로 펼쳐지는 전망을 시원스럽게 볼 수 있다. 북쪽으로는 대덕봉(472m)이 코 앞으로 다가서고 서쪽으로 성주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서해바다가 보일 듯 말 듯 아스라히 펼쳐진다.
남쪽으로는 작천리의 까치내와 비단폭 같은 냇물이 층암절벽 밑으로 아홉굽이를 휘감아 돈다고 해서 지천구곡이라 부르는 지천천의 맑은 물과 넓은 자갈밭이 자리잡고, 동쪽으로 내려서면 천장계곡과 수해의 푸르름을 간직한 천장호가 칠갑산의 풍치를 더욱 아름답게 꾸며준다. 그 외에도 냉천계곡과 강감찬계곡 등 크고 작은 계곡들이 칠갑산의 젖줄 마냥 펼쳐져 있다. 칠갑산이 만들어낸 물줄기는 굽이쳐 흘러 백마강에 합류한다.
칠갑산은 산중에 일곱 군데의 명당자리가 있어 칠갑(七甲)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온다. 그런가 하면 칠성원군(七聖元君), 즉 일곱 성인의 칠(七)자와 십이간지의 첫 자인 갑(甲)자를 합쳐서 칠갑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불교적 연원도 전한다.
세 봉우리가 사이좋게 모여 있는 삼형제봉을 저 뒤로 두고 가파른 내리막 길을 잠시 내려가니 마치 산보길 같은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화사한 봄 날씨와 함께 새 풀옷을 갈아입으려는 새싹들의 움트는 소리를 듣는다.
'봄 처녀 제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 꽃다발 가슴에 안고 진주이슬 신으셨네…' 진달래 꽃 옆에서 남녀가 봄에 취해 부르는 봄 처녀의 노래가 나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역시 봄은 반쯤 맥이 빠진 사람에게도 생동감을 불어넣어 활력을 되찾게 해주는 모양이다. 다 조물주의 깊은 뜻이리라.
이러한 능선길도 잠시. 갑자기 임도가 나타나면서 분위기는 확 바뀌어 버린다. 산허리를 동강내어 길을 내고 길 가에는 벚꽃나무를 심어 놓았다. 참으로 한심스럽다. 이렇게 하여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자 한 얕은 발상의 결과물일 것이다. 눈 앞에 보이는 편리함 때문에 수만 년을 고이 간직해온 우리의 소중한 산천을 마구잡이로 훼손시키는 일이 중단되지 않는 한 금수(錦繡)강산은 자칫 금수(禽獸)강산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부디 장곡사 쪽만이라도 지금의 모습 그대로 간직해 줬으면 하는 바램을 갖는다. 쓰린 가슴으로 도로를 타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도로 옆의 등산로를 따라 하산한다. 헬기장을 지나고 곧바로 내려가니 한치고개다. 정상에서 3km의 거리.
한치고개의 조그마한 광장에는 칠갑산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콩밭메는 아낙네 상'이 있다. 베적삼에 호미를 든 아낙네의 모습이 소박하게 와 닿는다. 이 아낙네상은 두 군데에 있는데, 하나는 임도 바로 옆에 혼자 서 있는 아낙네 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칠갑산장 오른쪽의 리어카 위에 두루마기에 지팡이를 집고 있는 아저씨와 나란히 서 있는 상이다. 아낙네는 일하는 모습인데 남편은 두루마기를 걸친 한량의 모습이어서 어쩐지 어색하다. 칠갑산장에서는 '칠갑산'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곳 광장에서 다리 하나를 건너니 면암 최익현 선생 동상이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최익현 선생은 고향인 경기도 포천을 두고서도 이곳 청양 땅에 와서 의병활동을 벌였다. 훨씬 이전 임진왜란 무렵에는 이몽학이 칠갑산을 근거지로 하여 봉기하여 민란을 일으켰다. 3 1운동도 유독 이 고장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불의 앞에서 떨쳐 일어나 분연히 항거해 왔던 이곳 주민들의 기질은 칠갑산의 정기 때문이었으리라.
최익현 선생 동상 뒤로 1.7km만 오르면 칠갑산과 마주보고 있는 대덕봉이다. 다시 광장으로 나와 청산석천(靑山石泉)이라고 새겨진 샘물을 바가지로 떠서 꿀꺽꿀꺽 마신다. 역시 명산(名山)에 명수(名水)다.
이곳 광장에는 그리 넓지는 않지만 주차시설이 되어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 주차를 해 놓고 임도를 따라 정상에 오르거나 중간에서 놀다가 돌아가곤 한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임도를 따라 30분 거리의 대치리에 차를 대기시켜 놓았기 때문에 그곳까지 내려가서 오늘의 일정을 마감한다. 점심시간 포함하여 3시간 정도 소요된 셈이다. 대치리로 내려서니 청양에서 공주로 연결되는 한치터널이 코 앞에 서 있다.
한치고개 아래로 1983년에 터널이 뚫려 지금은 교통소통에 불편함이 없으나 그 이전까지만 해도 후미지기로 유명한 이곳은 눈이나 비가 조금만 내려도 교통이 두절되기 일쑤였으니 비록 낮은 산이지만 오지 중의 오지 신세를 면치 못했다.
칠갑산의 겨드랑이에 안겨있는 청양군 대치 정산 장평면 사람들은 마을 단위로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장승제를 올리거나 산신제, 동화제(洞火祭) 등 마을굿을 지낸다. '천상천하축귀대장군(天上天下逐鬼大將軍)'이라고 쓰인 장승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하늘과 땅 속의 모든 귀신들을 물리쳐 달라는 기원이 담겨 있다.
구기자 술을 한 잔씩 들이킨다. 붉은 빛의 구기자 술이 맛깔 있다. 청양은 전라남도 진도와 함께 구기자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1925년 진도에서 세 그루를 가져와 심은 후 널리 퍼졌다는 이곳 구기자는 장기를 튼튼하게 하고 시력을 좋게 하며 피로를 회복시키는 약리효과 덕에 한약제로 많이 쓰이고 있으며 요즈음에는 차나 술로 담아 먹는 사람들도 많다.
달리는 차창 너머로는 생동하는 봄의 물결이 넘치고, 나의 머리 속에서는 칠갑산의 잔상들이 떠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웅장함이나 화려함 대신 소박하고 그윽한 모습의 장곡사와 주변의 소담스러운 풍경이 이내 가슴 한 구석을 차지 하고 있다. 이는 깊은 산 속 옹달샘 마냥 우리의 가슴 깊은 곳을 지켜주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리라.
*산행코스
-. 장곡산장(10분) → 장곡사(1시간 10분) → 정상(1시간 20분) → 한치고개(30분) → 대치리 (총 산행시간 : 3시간 10분)
첫댓글 명절때 시골에가면 용봉산 사조마을 능선을 타고 등산을 시작해서 세심천온천아래로 내려와 온천을 하고 가는게 제 코스이자 즐거움 이었는데...이젠 부모님이 올라오셔서 자주 내려갈 이유가 사라진듯해서 안탑깝네요...그래도 올리신 사진을보니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