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노국대장공주와 기황후
“고려는 만리나 되는 큰 나라이다. 옛날 당 태종이 친정했어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지금 그 태자가 내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강화를 위해 1259년 고려의 태자(후일 원종)가 몽고에 같을 때,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반기며 한 말이다. 몽고는 고려를 1231년부터 1258년까지 무려 여섯 차례나 침략하였다. 몽고군은 이르는 곳마다 닥치는 대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으므로 각지의 피해는 실로 막대하였다. 전쟁이 한창이던 1254년에는 한 해 동안 “몽고군에 사로잡힌 사람이 무려 20여만 명이고 죽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몽고군이 지나간 고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고려는 대제국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고 30년에 걸치는 끈질긴 대몽항쟁을 벌였다. 고려를 끝내 무력으로 항복시키지 못하였음을 시인한 세조 쿠빌라이는 고려 태자를 접견하는 자리에서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존중하겠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의 방침을 밝혔다. 이후 불개토풍은 원 세조 때 성립된 체제라는 뜻에서 ‘세조구제(世祖舊制)’라 불리며, 양국관계를 규정하는 원칙이 되었다.
1. 황제국에서 부마국으로
1260년 강화를 맺었을 때에 설정되었던 고려-원 관계는 고려의 왕권을 인정하며 독립적인 왕국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후 약 100년 간 고려국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였다. 실추된 고려왕실의 권위를 원의 군사적 지원에 힘입어 회복하려는데 따른 조치였다. 이 시기를 원 간섭기라고 한다. 원 황실과 처음으로 통혼한 고려국왕은 충렬왕(재위: 1274-1308)이다. 그는 연경에 들어가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함으로써 원 세조 쿠빌라이의 사위가 되었다. 이후로 고려왕은 종(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사용하지 못하고, 원에 충성한다는 뜻에서 충(忠)이라는 돌림자를 사용해야 했다. 황제를 자처하던 고려가 원 제국의 부마국(駙馬國)으로 전락한 것이다.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면서 직간접으로 내정간섭을 받았다. 원나라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충렬왕대 이후 고려 국왕은 폐위와 복위가 반복되었다.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 등이 폐위되었다가 복위하는 이른바 중조(重祚) 현상이 반복되었고, 충목왕과 충정왕은 각각 5년도 채 안 되어 폐위되었다. 왕실의 지위가 격하됨에 따라 관제의 격식도 강등되었고, 외세의 침략에 대해 승전한 기록은 금지되었다. 원의 간섭으로 고려의 문화기반은 축소되었고, 정치적 주도권 상실로 자주적 발전도 저해되었다. 이 시기 전통문화의 명맥을 잇는 곳은 사원이었다. 충렬왕 때 보각국사 일연(1206-1289)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단군신화를 기록한 것은 자기 문화에 대한 자신감과 전통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 것이었다.
2. 기황후와 부원세력의 발호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는 수많은 공녀(貢女)와 물자 그리고 군대 징발로 고통을 겪었다. 공녀란 말 그대로 여자를 공물로 바치는 것이다. 공녀는 고려 사회에 각종 부작용을 낳았다. 어린 딸을 공녀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결혼을 시키는 일이 많아져 조혼(早婚)의 풍습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기황후(奇皇后:?-?)도 이런 공녀 중의 한 명이었다. 기황후의 본관은 행주이고 아버지는 기자오다. 그는 원 나라에 공녀로 온 뒤에 고려인 환관 고용보의 주선으로 궁중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황제의 차와 음료를 접대하는 낮은 신분의 궁녀로 시작하였으나, 이후 순제(혜종: 재위 1333-1370)의 총애를 얻어 제2왕후의 자리에 올랐으며, 황태자를 낳으면서 일약 핵심 권력자로 부상했다.
기황후를 중심으로 하는 부원세력은 고려를 원나라의 지방 행정단위인 행성(行省)가운데 하나로 편입시키려는 입성책동(立省策動) 움직임을 벌였다. 고려의 주권을 말살하려는 움직임에 맞서 공민왕(1330-1374)이 반원정책을 취하자, 부원배들은 기황후를 부추겨 그를 폐위시키려 하였다. 마침내 1364년(공민왕 13년) 1월 1일 최유가 충선왕의 서자이면서 공민왕의 삼촌인 덕흥군을 받들고 원나라 군사 1만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했다. 공민왕은 최영을 도순위사에 임명하여 안주의 관군을 모두 지휘하게 하고, 또 이성계에게는 정예 기마병 1천을 주어 최영을 돕게 했다. 이에 최유는 기세가 꺾여 다시 원나라로 달아났는데, 이후에도 최유는 계속해서 본국을 헐뜯으며 다시 침공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국력이 쇠퇴한 원나라는 고려와 불화를 빚는 것을 원치 않았고 마침내 원 순제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서 공민왕의 복위를 승인하는 조서를 보냈다. 그리고 최유를 포박하여 고려로 압송시키고 덕흥군은 영평부로 귀양보내 버렸다. 최유는 이해 11월에 고려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기황후의 고려에 대한 영향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3. 노국공주와 공민왕의 반원 개혁정치
14세기 중엽이 되면서 중국에서 한족의 흥기로 몽고족의 퇴조가 두드러지자, 공민왕이 원명교체라는 국제정세의 변동을 이용하여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반원개혁을 주도하였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며, 충혜왕의 동복 아우이다. 공민왕이 전례에 따라 볼모로 원의 연경에 간 것은 12살 때였다. 이후 조카인 충정왕이 폐위되어 1351년 12월에 귀국할 때까지, 약 10년을 연경에서 살았다. 공민왕의 어머니 덕비 홍씨는 원나라 공주가 아닌 고려 여성이었다. 이 때문에 두 차례의 왕위계승에서 실패하는 아픔을 겪은 공민왕은 20살 되는 해인 1349년에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면서 왕위계승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1351년 원나라에서 충정왕을 폐위하고 공민왕을 즉위시켰다. 공민왕은 즉위 직후 노국공주의 협조와 양해 하에 변발을 풀고 반원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제일 먼저 내정간섭의 상징인 정동행성 이문소(理門所)를 철폐하고 고려의 관제를 복구함으로써 주권을 되찾았다(1356). 이어 영토회복 운동을 벌여, 쌍성총관부(1356), 동녕부(1370), 탐라총관부를 차례로 철폐하였다(1374).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수복하는데 공을 세웠던 이자춘은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이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시켰고, 이것이 그의 아들인 이성계가 뒷날 조선왕조를 개창할 수 있는 세력기반이 되었다. 또한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번번이 좌절시킨 부원세력인 기철(기황후의 오빠), 권겸(딸이 기황후의 며느리), 노책(딸이 기황후의 남편인 순제의 후궁) 등을 제거하고, 이제현, 이색 등 신진사대부를 발탁함으로써 개혁정치의 기반을 다졌다. 이에 따라 이제까지 원의 지원에 의해 존립해 왔던 왕권의 위상이 재정립되었다. 공민왕의 일련의 반원 개혁정치는 새로운 왕조 조선을 건국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정리/한상권(덕성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