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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충만인 교회
3. 교회의 여러 방면
(1)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에베소서 1장 23절>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세 번째로 교회의 여러 방면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는데, 앞으로는 전부 교회의 여러 방면에 대해 말씀 드릴 것이다.
오늘 첫 번째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다.
몸이라는 말은 머리의 충만이라는 뜻이다. 머리가 온전해지는 것이다.
충만이라는 말은 온전해지는 것, 성장하는 것, 발전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몸이라는 말은 머리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 몸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몸이니까 머리인 그리스도의 충만이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장이고 발전이다.
예수님을 씨라고 한다면 우리는 열매이다.
열매는 씨의 발전이니까 씨의 충만이다.
감 씨는 우리는 먹을 수가 없으나 감은 먹을 수가 있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은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오늘 교회는 받아들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그 사랑하는 제자들까지도 모두 도망쳤다. 쉽게 말하면 먹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교회는 열매가 되었으니까 먹을 수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를 보고 사람들이 많이 오는 이유는 교회는 그리스도보다 먹기가 쉬워서다.
물론 진짜배기야 씨가 더 진짜배기다.
씨가 온전해야 열매가 온전해지는 것이니까
근본적으로는 그렇지만 먹기 좋기는 열매가 더 먹기 좋다.
교회를 보고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교회를 통해서 그 씨는 발전하는 것이다.
씨가 이런 것이구나. 씨가 크면 열매가 큰가? 그렇지는 않다. 씨는 작아도 열매는 클 수도 있고, 씨는 커도 열매는 작을 수도 있다. 호박씨는 물론 씨도 좀 크지만 호박도 크다. 겨자씨는 씨는 작지만 나무는 크다. 씨만 보고는 클지 작을지를 알 수가 없다. 열매를 보고야 비로소 이것은 호박이고 이것은 겨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만일 열매가 없다면 그 씨는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확실하게 도저히 구별해 낼 수가 없다. 씨를 보고 열매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계시에 의해서밖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고 교회를 알 수 있다는 것은 계시이다. 우리가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사과 씨를 알고 사과도 아니까 그렇지 생전에 사과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사과 씨를 보고 사과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계시로만 보여질 수 있는 일이다. 바울은 바로 그 계시를 본 사람이다. 씨가 아닌 열매를 봤다는 것이다. 내가 이 계시를 받은 것을 너희가 알 것이라는 말을 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얼마나 탁월하신지,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씨인지, 절대적인 씨인지에 대해서 말씀 드렸다. 왜냐하면 세상의 유명한 사람이 많지만 죽고 다시 산 사람이 없고, 유명한 사람이 많지만 온 인류를 포함하고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 사람은 없다. 사실은 예수님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를 포함하지는 못한다. 그들이 가는 길은 어떤 사람은 따라 갈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못 따라 가는 길이다. 모든 사람이 부처님의 길을 따라 가겠는가? 다 공자님 길을 따라 가겠는가? 못 따라 간다. 대단히 훌륭하지만 못 따라 간다. 히말라야 정상에 올라간 사람은 대단히 위대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다 히말라야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대청봉도 올라가지 못했다. 모두 올라가는데 울산바위까지 겨우 올라갔었다. 지금은 울산바위도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 히말라야에 등반한다는 것은 초인적인 사람들이다. 위대하지만 나를 포함해 줄 수는 없다.
예수님은 위대하지 않을지라도 나를 포함할 수 있다.
이 점이 우리 주님이 되는 이유이다.
온 인류의 새 인류의 머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이런 분이다.
위대한 사람이 새 인류의 머리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온 인류를 포함한 사람만이 온 인류의 머리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바로 교회의 머리이다.
우리가 그 머리가 얼마나 탁월한 줄 알면 몸이 얼마나 귀한 줄도 알게 될 것이다.
A. 머리의 충만, 실재, 전달인 몸
머리의 충만이고 실재이고 전달이다.
1) 존재의 충만 - 그 인격의 충만
존재적으로 충만은 결국 그 인격의 충만이다. 씨에 있는 맛을 자세히 맛보면 열매의 향기나 맛이 씨에 들어있다. 감잎을 따서 씹어보면 감의 향기와 맛이 들어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적인 충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인격의 충만을 이야기한다.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셨는데 그 능력보다 교회가 더 많은 능력을 행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인격을 확산하다는 뜻이다. 그분 한분으로서는 안 되는 일을 새로운 인류인 이 몸이 그분의 인격을 확산하는 것이니까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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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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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 피조물이다. 사실 피조물인 우리는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 모른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 입장에서는 인간은 특수하다, 탁월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다른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특수하고 탁월할 것이 없다. 오히려 우주를 시끄럽게 하는 자들이고 자연을 훼손시키는 자들이다. 우주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알고 보면 인간이다. 공헌한 것이 없다. 아무리 자연보호운동을 해도 인간이 없는 것만 못하다. 어디를 가보아도 사람이 들어가지 않은 곳은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지만 사람이 들어갔다 하면 파괴되기 마련이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자랑할 것이 없다. 거기에 하나님의 목적이 개입되지 않았다면 인간은 자랑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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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의 머리가 되셨다. 만물의 머리가 되셨다. 으뜸이 되셨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존재적인 충만, 인격의 충만 때문에 만물의 머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분도 피조물이시지만 그분 안에 두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나서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한 인격이 됐기 때문에 인격이 되신 그분을 확산하고 전달하고 나타내는 것이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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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그분의 피조물이 되심을 온전케 하는 더 실재적이 되게 하는 더 전달케 되게 하는 그런 존재로서의 몸이다. 피조물도 이럴 수 있다. 여기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 사람이 저렇게까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피조물과 무엇이 다른가? 저렇게까지 될 수 있다. 그 존재적인 성품을 극대화했으니까 그것이 교회를 통해서 더욱 확산되고 충만되기 때문에 교회는 그의 몸이다. 예수님께서 피조물이심을 교회는 알려야 된다.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는 소리만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피조물로서 온전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머리 한분이 온전해짐으로서 모든 피조물이 다 온전해진다. 금이 반지 같은 것 밖에 될 수 없었는데 공업용 제품에 들어가서 놀라운 역할을 한다. TV에도 금이 들어간다고 한다. 금의 어떤 성분이 거기에 와서 비로소 충만해지는 것이다. 옛날에는 겨우 반지밖에 못했지만 공업 속에 들어오니까 TV를 켜는데 필요한 것이 되었다면 그것이 금의 충만이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었다. 피조물이다. 죽을 때 보니까 조금도 사람과 다를 것이 없더라. 그런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치에서 하나님 아들을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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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누가 증명하는가? 교회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분이 피조물이면 사람들은 잘못된 것으로 생각한다. 잘못된 것이 아니고,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목표를 완성하신 분이다. 교회는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해야 한다. 우리가 신이 되거나 귀신같이 되거나 영물이 되는 것이 교회의 목표가 아니고, 우리는 분명하게 피조물로서 호랑이나 돼지나 소와 다를 바가 없는 피조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이것이 교회이다. 절대로 교회는 어떤 영물들이 아니다. 교회가 귀신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영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영물 세계일지는 모르지만 인간 세계가 아닌데, 사람들은 그런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귀중하게 생각한다. 그런 것이 있는 교회를 영적인 교회라고 생각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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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피조물이다. 첫 번째로 우리의 기초는 피조물이다.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산 혼이 되었다. 그 생기는 다른 동물에게도 다 들어가는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 그 생기가 꼭 사람한테만 들어갔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생기가 들어갔다. 이 피조물들이 어디에 와서 완성되는가? 그분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에서 완성된다. 금이 어떤 사람에 의해서 TV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모든 금은 다 그만한 가치를 갖게 되었다. 한 곳의 금값 한 돈이 10만원이라면 전 세계 금값은 다 10만원이다. 한 곳에서 금값이 천원으로 내려갔다면 전 세계에 있는 금이 다 천원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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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피조물인 한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가치가 그만큼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는 가만히 있었지만 우리도 그렇게 될 가능성을 갖고 있었구나! 한반도에서는 반지밖에 할 수 없는 것으로 알았는데, 미국인지 영국인지에서 TV를 개발하여 금이 들어가서 틀면 화면이 나온다고 하니까 서랍에 있던 반지도 모두 그만한 가치로 상승되어 버렸다. 우리도 그런 것이다. 우리가 별 나게 뭘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어디서 한 군데서 인간의 가치가 극대화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동시에 상승했다. 이번에 미국에서 재채기를 하니까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왜냐하면 금융을 잡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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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머리가 되셨을 때, 모든 인류는 만물의 머리가 될 수 있도록 되었다. 왜냐하면 몸이니까. 피조물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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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다시 산 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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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죽고 다시 산 자로서는 새 피조물을 이야기한다. 분명히 일차적으로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이다. 그런데 죽고 다시 살 때는 새 피조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새 피조물이다. 죽고 다시 산 자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다. 그러면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이면, 몸인 교회도 역시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다. 우리는 한 번 죽으면 끝나는 줄로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가 또 있구나. 금이 TV에만 쓰여지는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않고 의료기기에도 사용이 되더라. 또 가치가 다른 데로 전이가 된다. 사람이 피조물로서도 그렇게 영광스러운데, 죽고 다시 사니까 더욱 영광스럽더라. 그것은 한 사람이 그렇게 되었는데, 온 인류가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분 한분을 보고 그분을 우리의 소망으로 알아야 된다. 장롱 속에 들어있는 반지를 보고 소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TV에 들어있는 금을 보고 소망을 가져야 된다. 금값은 장차 올라가겠구나로 알아야 된다. 반지 값은 아무리 올라가봐야 한계가 있지 무진장 올라갈 수는 없다. 그런데 공업용품으로 들어가면서는 값이 얼마가 될지 모른다. 얼마나 귀중한 데 쓰여지는 것에 따라 값은 더 올라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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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자신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머리되신 그분에게 소망이 있다. 지금의 세계 경제도 미국이 잘 안 되면 다 죽는다. 미국 월가에서 금융을 쥐고 앉아있다. 이것이 망해버리면 전 세계의 공황이 일어난다. 어찌하든지 좋으나 나쁘나 미국 경제가 잘되어야 우리가 같이 먹고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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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잘되어야 우리가 잘된다는 말이다. 어쩔 수 없다. 머리가 잘되어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머리가 잘되어야 몸이 잘되지 머리가 잘못되면 안 된다. 간질은 머리에서 병이 생긴 것으로 갑자기 불로 뛰어들고, 어떤 사람은 갑자기 물로 뛰어들고, 거품내면서 쓰러지기도 한다. 몸이 그런 것이 아니고 머리 때문이다. 좌우지간 머리가 잘되어야 된다. 몸은 말짱해도 머리가 아프면 만사가 다 귀찮다. 머리가 중요하다. 머리가 좋아야 한다. 머리가 좋아야 오래 사는 것 같다. 영리하다는 말이 아니고, 잘 모르겠지만 머리의 구조가 튼튼해야 몸도 오래 사는 것 같다. 개구리는 왜 개구리처럼 몸이 그렇게 생겼는가? 개구리 머리가 그렇게 생겨서다. 개구리도 사람 머리가 있었으면 사람처럼 될 텐데 머리가 개구리 머리이므로 몸도 개구리가 되었다. 올챙이 때 보니까 개구리 모양이 없었는데 앞다리가 쑥, 뒷다리가 쑥 개구리가 나왔다. 신기하다. 머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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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로서도 머리가 중요하고, 죽고 다시 산 자로서도 역시 머리가 중요하다. 우리는 그분에게 소망이 있다. 왜 우리는 평생 그리스도를 하려고 그러는가? 우리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그 머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내가 갈 것인데, 머리가 어디로 가는지 내가 모르고 있으면 내 몸이 어디로 갈지 모를 것이다. 머리가 어디로 가는 줄 알아야 내 몸도 따라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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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인류가 방황하는 이유는 머리가 없어서다. 머리가 방향을 잃어버린 머리가 되었다. 어디로 갈지를 몰라 무작정 가자가 되었다. 공산주의가 오면 무작정 공산주의를 하자. 자본주의가 오면 무작정 자본주의를 하자. 그렇게 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공산주의 시절에는 공산주의를 안 하면 병신인 줄 알았다. 젊은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모르면 바보라고 생각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대원수였다. 큰집이고 종갓집이었다. 초창기에는. 그래도 망했다. 지금은 자본주의다. 자본주의 종갓집은 미국이다. 무조건 따라 가야지 따라 가지 않으면 뒤쳐져서 못 산다. 왜냐하면 전 체제가 그렇게 돌아가기 때문에 그 체제 속에서 이탈하여 따로 살 수가 없다. 이것도 지금 어디로 갈지를 모른다. 미국 경제가 저렇게 흔들릴지 누가 알았겠는가? 집값 좀 내려갔다고 저렇게 난리가 나버린 것이다. 큰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다. 집값이 떨어졌다. 미국 집은 전부 융자로 지은 집이다. 우리처럼 은행에서 안전하게 60%만 융자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90%를 융자해주고 30년 동안 갚도록 하는 것이다. 참 좋은 제도인데 어떻게 된 것인지 이 집값이 떨어진 모양이다. 그래서 은행에서 돈 받을 길이 없어진 것이다. 1000만원 빌려주었는데 집값이 500만원이 되어 은행에서 문제가 된 것이다. 은행이 신용이 없어지니까 아무도 은행에 돈을 맡기지 않으려고 한다. 이래서 난리가 난 것이다. 머리에서 잘못되면 어찌 될지 모른다. 자본주의도 잘나가지만 어느 날 대공황이 일어나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30년대의 미국 대공황보다 지금이 더 심각하다는 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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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여기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이 그 안에서 통일되게 되는 만물을 발아래 복종케 하시는 그분의 머리되심 아래에 왔다. 그래서 우리는 가는 방향이 분명하게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도 해보다가 자본주의도 해보다가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가는 길은 딱 정해졌다. 새 예루살렘을 향해서 정해졌다. 가기만 가면 된다. 길은 딱 정해졌다. 우리가 내 인생이 갈 길이 정해져있다는 것만 알았다 해도 구원이다. 구원이 다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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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한 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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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한 자로서다. 골로새서 2장 9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한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피조물이 아니어서가 아니고.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한다.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신성이 충만하더라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니까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른다. 어떤 모양인지 어떤 색깔인지 모른다. 그것이 육체 안에서 충만되어야 육체 안에서 온전해져야 비로소 하나님이 이런 분이구나로 알 수 있는 분이다. 전기가 얼마나 밝은 것인지는 모른다. 전등이 있어야 얼마나 밝은 것인지 알게 된다. 등에 따라 불빛이 다 달라진다. 전기는 그대로인데 형광등 불빛에 따라 달라지고 백열등 불빛에 따라 달라지고 등에 따라서 달라진다. 아담 이후에 모든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아무리 드러나 보아도 혼란의 혼란을 거듭하는 하나님밖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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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은 바로 진짜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구나로 드러났다. 그래서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한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는 하나님의 신성의 교회이다. 신성의 충만이니까. 신성의 성장이고 신성의 발달이고 신성의 실재인 셈이다. 옛날에는 우리가 불이나 바람을 보고 하나님이 나타났구나하고 생각했던 것인데, 이제 그것은 원시시대가 되었고, 인격 안에 나타난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이 신약이다. 이제는 더 이상 불이니 바람이니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지나간 것일 뿐 아니라 불이나 바람을 보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코끼리 발톱 만지는 것도 안 되는 것이다. 너무나 유치하고 너무나 미미한 것이다. 그분의 인격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을 보고난 사람들은 더 이상 불이나 물에는 관심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것을 모르니까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 나도 불덩어리가 떨어져보았으면 뭔가 돼보았으면 했다. 기도하면서 뭔가 나를 뒤집어 쳐서 아이고 하나님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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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는 분을 보게 하려고 나에게 그런 불덩어리를 주지 않은 것 같다. 만일 내가 불덩어리를 봤더라면 매일 불덩어리 이야기만 할 것이다. 어느 교회 이름이 火光교회이다. 그 목사님은 아마 불을 본 모양이다. 설교를 하는 것을 보니까 눈에서 불이 번쩍번쩍한다. 눈도 그렇게 생겼다. 나 같은 사람은 그렇게 해봐야 표시가 나지 않는데 눈이 그렇게 생겨야 된다. 말하는 것을 보니까 불이 나오는 것을 느끼게 한다. 하나님이 쓰셔도 생긴 대로 쓴다. 그 사람은 틀림없이 불을 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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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것은 이제 구시대의 것이다. 왜냐하면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것을 우리는 보았다. 물론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것을 보았으니까 이제는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한 것으로 따라 가야지 아직도 구시대적인 것을 따라 가면 안 된다.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다. 그것을 갖고는 코끼리 발톱 만지는 것밖에는 안 된다. 신성의 충만이 육체에 거하는 시대가 왔다. 그 한분으로 인해서 세대가 바꾸어졌다. 다른 세대가 되었다. 불이 번쩍거리던 세대에서 신성의 충만이 번쩍거리는 세대로 왔다. 세계가 달라졌다. 인간은 옛날이나 똑같다. 그런데 세상이 바꾸어졌다. 1500년대 세계와 1800년대 세계는 세계가 급격히 바꾸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세시대에서 르네상스시대로 바꾸어지고 세대가 바꾸어지니까 사람들이 세대 안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바꾸어지는 것이다. 컴퓨터 세대가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컴퓨터가 만들어지니까 인터넷 세상이 왔다. 전 세계가 정보를 공유하는 세대로 와버렸다. 어린아이도 컴퓨터만 하면 전 세계를 보도록 만들어놓았다. 그런 세상이 어디에 있겠는가? 세종대왕이 그런 것을 알았겠는가? 어쩌다가 한글을 창조하여 유명해졌지만 상상도 못할 일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렇게 상상도 못할 세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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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세계는 인간의 발전이 없다. 문명의 발전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데, 사람 자체의 발전은 전혀 없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피조물로부터 시작하여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는 데까지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엄청난 것이다. 소나 돼지와 같은 것에서 출발하여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는 데까지 왔다. 이것이 보통 일인가! 올챙이가 개구리된 것과 비교가 되겠는가? 진화했다면 엄청난 진화이고,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진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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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새 언약의 시대에 왔다는 것은 놀라운 시대에 온 것이다.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한다. 사람으로 하나님이 나타났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났다. 이제는 불이나 물은 옛날 것인 시대로 왔다. 옛날에 아주 귀중했지만 지금은 버려진 것이 많다. 고물도 안 되는 것이 많다. 옛날에 우리가 귀중하다고 생각했던 것, 세상에서 귀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만일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는 이 세계 안에 들어온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아무 가치가 없다. 옛날에 우리도 그것을 얻어 보려고 얼마나 애걸복걸했는가? 지금 우리가 초연해진 것은 도를 닦아 초연해진 것이 아니다. 다른 세계가 와버렸다. 미국사람들이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을 때 우리는 재래식 변소를 사용했는데, 재래식 변소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다. 부잣집 변소 다르고 가난한 집 변소 다르고 다 다르다. 제주에 가니까 지붕이 없다.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다. 왕 침실에 가니까 요강 같은 것이 있다. 거기에 받아서 버린 모양이다. 언제나 나는 베르사이유 궁전의 왕이 앉은 것에서 일을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지금 생각하면 너무 치사하고 우스운 일이다. 옛날 신화 이야기 같다. 초창기에 서양식 변소에서는 밥을 먹어도 괜찮다고 하는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사실은 서양식 변소는 깨끗이 닦아놓으면 밥을 먹어도 상관없다. 지금은 전기밥솥을 다 사용하고 있는데, 5.16 후에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저녁에 밥을 앉혀놓으면 아침에 밥을 먹는다는 것이다. 그런 기계가 어디에 있나하고 생각했다. 지금은 전기밥솥이 없는 집이 없다. 시대가 얼마나 흘러갔는지를 모른다. 아침에 밥시간 늦으면 안 되니까 잠 못 자고 초조하던 것이 스위치만 눌러놓고 나면 아침에 밥이 되어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는데 인간만 변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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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와보니까 인간은 더 엄청나게 변했다. 미물에 속하였던 피조물이 신성의 충만이 육체에 거하는 데까지 왔다. 이것이 벌써 2천 년 전에 왔는데 우리가 적용하지 못한 것이다. 사탄의 장난 때문에 사람을 다 종교로 빗나가게 만들어버렸다. 이 길을 가로막아서 적용을 하지 못한다. 발명은 진작 되었는데 적용을 하지 못한다. 특허는 진작 내놓았는데 적용을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충만! 그것은 바로 인격의 충만이지 결코 고무풍선에 바람 들어가듯이 일시적으로 확 들어갔다가 꺼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는 충만이다. 결국 온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만물의 머리가 되셨으니까 누구든지 적용하기만 하면 그분과 같이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게 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누구든지 TV를 살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처럼 말이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TV를 다 생산할 수 있는 나라가 된 것처럼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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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삶의 실재 -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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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삶의 실재다. 몸은 머리의 충만이다. 또 머리의 실재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활이다. 그리스도가 사시는 곳이 바로 교회다. 그리스도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하고 계실까? 하늘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그것은 교회를 봐야 안다. 교회의 생활이 지금 그리스도가 사는 생활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라고 한다. 이것은 부활의 증인이라는 말인데, 물론 그때 당시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증인이라는 말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교회는 그 역사적 사실의 증인이라는 말만이 아니고, 오늘 지금 살아있는 증인이라는 말이다. 오늘 우리는 그 일의 증인이다. 죽고 다시 산 사람의 삶의 증인이다. 다시 삶을 우리가 살아내는 것이니까. 죽음 가운데서 살아내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지금 교회다. 그러니까 교회는 실재다. 그리스도의 실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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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중 능력의 전달 - 부활의 능력, 승천의 능력, 정복의 능력, 머리되심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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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사중의 능력을 전달 받았다. 머리에서는 몸에게 모든 것을 전달한다. 머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두 몸으로 전달한다. 그리스도도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교회로 전달한다. 몸으로 전달하듯이. 부활의 능력이 교회 안으로 전달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능력이 전달되어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무덤을 헤치고 나온 적이 없다. 그분이 무덤을 헤치고 나온 일이 단순히 물질적인 무덤을 헤치고 나온 일로 끝난 것이 아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난 새로운 삶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한테 전달되어 왔다. 역사적인 사건은 무덤을 헤치고 나왔었다고 하더라도 오늘 우리에게 전달 된 것은 무엇이 전달되었는가? 부활의 능력이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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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은 이 부활의 권능을 알려고 날마다 죽노라고 했다. 그것은 무덤에서 터져 나오겠다는 말이 아니다. 무덤에서 터져 나온 사건이 교회로 전달 될 때는 부활의 능력으로 전달되었다. 오늘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부활의 능력을 지금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전달되었으니까. 언제 무덤이 열릴까?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 하늘에서 내려오고 무덤이 터진다고 되어있다. 사람들이 그런 것을 기다리고 있다. 교회에 전달 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 발 문제가 한국에 전달되면 미국과 전혀 다른 문제로 전달된다. 우리나라는 주택 값이 떨어져서 문제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지금 다른 문제가 전달되어 왔다. 달러 환율이 높아져 버렸다. 증권이 미국의 집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데 증권이 확 떨어져 버렸다. 이런 식으로 전달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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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오늘 우리에게 능력으로 전달되었다. 역사적 사실이 전달된 것이 아니고, 능력으로 전달되었다. 마찬가지로 승천의 능력도 그것과 같다. 그분이 승천하신 것은 그가 완전하게 영광스러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높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분이 높아지신 것이 구름을 타고 올라가는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역사적이고 물질적으로 사실이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오늘 교회에 전달된 것은 승천의 능력이다. 존귀해지고 높아진 그 능력이 우리에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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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일을 통해서 우리의 머리이신 그분이 존귀해지는 것을 봤다. 영광스러워지는 것을 봤다. 만물 가운데 가장 높이 되신 것을 봤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그 능력이 우리에게 전달되어 왔다. 오늘 또 어떻게 하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있는 예수를 볼까?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이미 벌써 그 능력이 전달된 시대이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발명하면 발명할 때는 물질적인 문제다. 전기를 발명했다면 물질적인 것이 발명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능력으로 전달될 때는 엄청나게 다른 것이 되어 버린다. 전기의 능력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전기가 만일 없다면 집을 이렇게 못 짓는다. 전기가 만일 없다면 지하실을 못 짓는다. 전기가 있기 때문에 지하실을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지하실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왔는가? 전기가 있다는 데서 전달되어 왔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 파장이라는 것이 엄청나게 다른 데로 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집값 때문에 부도가 났는데 한국에 올 때는 엉뚱하게 다른 것이 되어 온다. 증권을 사놨더니 폭삭 망했다. 달러를 사놨더니 돈 좀 벌었다가 되어버린다. 전혀 그것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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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의 능력이 오늘 교회 안에 전달되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존귀한 삶을 소망하게 되고, 존귀한 삶을 우리가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구나. 우리 인생이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더니 우리의 머리 되신 그분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는 것을 보니까 우리 인생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구나. 우리는 그렇게 전달되어 왔으니까 엄청난 비약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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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승천했는데, 모든 사람이 승천의 능력을 받았다. 한 사람이 부활했는데 모든 사람이 부활의 권능을 받았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소망했던 것이다. 다시 무덤에 들어가서 한번 다시 나오고 싶다. 예수님처럼 언제 그렇게 무덤이 터져 나올까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고, 내가 부활의 권능을 맛보기 위해서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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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의 능력이 전달되었다. 만물을 정복하는 것! 하나님 앞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했다. 피조물에게 하나님이 요구한 것은 복종이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했는가? 바로 우리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하더라는 말이다. 그가 완전하게 복종하니까 누가 복종 하였는가? 천사들이 복종하더라. 만물들이야 우리가 총칼로 지배하면 된다고 할 수 있지만 천사들은 총칼로 지배할 수가 없다. 하늘의 정사와 권세를 맡은 자들이라는 말은 전부 천사들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하늘의 정사와 권세라는 말은 영적인 세계의 어떤 것들을 주관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머리 되신 그분이 영적인 세계를 주관하고 있는 어떤 존재들을 정복했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도 영적인 어떤 것들을 주관하고 있는 어떤 것들을 정복하는 것이 교회다. 또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 교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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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인간 세계에서 인격이 아닌 어떤 다른 것들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면, 우리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인격 아닌 다른 어떤 영물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던 어떤 세계를 정복했다는 말이다. 지금은 우리가 그런 생각을 잘 안하지만 성경을 쓸 때의 당시의 우주관은 이 세계를, 사람들의 모든 것을 천계에서 하늘의 영역들 속에서 천사들이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전쟁도 일으키고 무엇도 하고 이런 것이 전부 천사들이 그렇게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악령들과 선한 영들이 서로 싸우고 그래서 공중에서 일어난 전쟁, 공중 재림이라고 하는데, 공중에서 일어난 일들이 땅 위에서도 일어나고, 희랍 신화들이 전부 그런 것이다. 그때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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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 복종하심으로 온전하게 그 인격되심으로 정복하시는 것을 봤으니까 이제 우리는 그런 것들에 의해서 지배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께 굴복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것들을 정복하는 것이다. 오늘 세계를 천사들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고, 오직 한 아들을 위해서 만들어 놓았다. 한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 놓았다. 히브리서 1장에 보면 그렇다. 천사들을 위하심이 아니고, 사람을 위하신 것이다. 원래 우주를 창조하신 것은 사람을 위해 창조하신 것인데, 사람이 빗나갔기 때문에 천사들이 주장했다. 그것을 이제 되찾았다. 무엇으로 되찾았는가? 완전한 굴복으로 인해서 되찾았다. 인생은 하나님께 굴복하면 모든 영계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지금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그때는 천사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천사들이 아니고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사상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것들일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을 지배하는 능력을 우리가 가졌다는 것이다. 별별 사상이 다 위험하고 별별 것이 다 와도 나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에게 굴복하면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유행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상이 유행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인간의 위치를 가지면 사람으로서의 위치를 가지면 그것들을 내가 다 정복하는 사람이 된다. 왜 젊은이들이 공산주의에 휘말려 들어갔는가? 하나님에게 굴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젊은이들이 또 자본주의에 휘말려 들어가는가?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굴복하는 인생은 그런데 휘말려 들어갈 필요가 없다. 인간의 위치가 얼마나 존엄한데 그런데 휘말려 들어가겠는가? 만물을 정복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그때 당시로서는 천사들 악령들 이런 것들이지만, 지금의 천사들 악령들은 그런 것들이 아니고, 어떤 사상일 수도 있고 어떤 교육일 수도 있고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 많다. 세상을 지금 아침저녁 다르게 움직이고 있는 힘과 세력이 있다. 젊을 아이들을 보면 옛날 사람과 완전히 다르다. 생각도 다르고 사상도 다르고 다 다르다. 그것을 자기가 스스로 한 줄 안다. 스스로 한 것이 아니고 옛날 같으면 그것을 천사들이 했다고 할 것인데 지금은 그 천사들이 한 것이 아니고 어떤 사상이 그렇게 만들어 낸다. TV에서 매일 저녁에 난리 치는 것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아는가? 무엇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그런다. 그러니까 그렇지 않을 방법이 전혀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어 버린다. 어떤 시대에 한 사상이 유행하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이 거기에 휘말려 진다. 정복할 능력이 없고 오히려 정복을 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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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리스도는 죽으심으로 이것을 정복했다. 우리가 죽을 자로 안다면 하나님께 굴복할 자로 안다면, 우리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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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되심의 능력이 전달되었다. 이제는 우리의 머리 되신 그분이 만물의 머리가 되셨다. 그러면 교회는 그분의 몸이다. 그분의 몸이지만 만물 위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 된다. 우리가 만물의 머리가 다시 된다는 그 말이다. 내 머리가 공장을 지배하고 있으면 내 몸이 공장을 지배하는 것이 된다. 머리가 지배하고 있지만 실재는 내 몸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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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되심의 전달이다. 머리되심이 오늘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우리가 인생을 경영할 수 있는 머리되심이 전달되었고, 하늘에 있는 것과 땅 위에 있는 것을 통일하게 할 수 있는 머리되심이 우리에게 전달되어 왔다. 인격 이외의 어떤 것도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머리되심이 우리에게 전달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것도 인격 이상의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다 필요하긴 하지만 인격 이상의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머리되심이 우리에게 전달되어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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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휘하신 능력은 모두 다 교회 안으로 다시 전달된 것이다. 머리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은 다 몸으로 전달된다. 왜? 몸이니까. 이유는 몸이니까. 머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 다 몸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왜 손을 이렇게 흔들고 있는가? 화면을 보다 보면 그렇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한다. 이야기하는데 쓸데없는 손을 많이 흔든다. 손을 움직이는 것도 여러 가지다. 나도 해놓고 보면 하지 않아도 될 것을 괜히 했다. 그냥 말만 해도 되는데 왜 손까지 흔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것이 머리에서 지시하니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요즘 학생들은 학교에서 교수들이 그래서 그런지 잘 모르겠는데, 말할 때 손짓을 하면서 말을 한다. 어른들 앞에서 말을 하면서 손짓을 하면서 말을 하는 것이다. 옛날 같으면 그것은 정말 귀싸대기 맞는다. 어른들 앞에서 이야기하면서 손가락질 하면서 이야기하면 큰일난다. 보기에도 민망하다. 내가 율법학자도 아닌데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저것은 우리 동양사람 예의는 아닌데 한다. 혹시 우리 교회에 나오는 젊은이들은 어른 앞에 가서 이야기할 때는 손을 흔들면 안 된다. 다소곳이 손을 감고 말해야 된다. 옛날에는 어른 앞에 말을 할 때는 바로 보고도 말을 안 했다. 약간 비켜 앉아서 말을 해야 된다. 딱 쳐다보고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며느리가 시아버지 딱 쳐다보고 이야기하면 그것은 당장 나가야 된다. 우리 젊은 사람들이 그런 줄은 알아야 된다. 그것을 전혀 모르고 한다. 전혀 모르고 하니까 자기는 전혀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그런 전통이 남아있다. 어떤 분들에게 그랬다가는 속으로 딱 가위표 해버린다. 면접시험 볼 때 그러면 불합격이다. 그런 줄은 알고 있어야 된다. 꼭 법으로 이렇게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관습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머리가 어찌 되어 놓으니까 자꾸 손을 흔드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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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휘하신 능력은 모두다 교회 안에 전달된다. 우리가 교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알려면 그리스도에 의해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알면 된다. 그러면 교회에서 앞으로 무엇일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장이 될 것이라는 그 말이다. 신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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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다시 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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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거듭난 몸이다. 다시 난 몸, 구속된 몸이라고 할 수도 있고 다시 나게 된 몸이라고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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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In the Trespasses and in the S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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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은 원래 어떤 몸이었는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의 몸이다. 허물이란 것은 실수라는 뜻이다. 그리고 죄라는 말은 잘못, 악한 것을 말한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 실수도 있고 죄도 있다. 아담은 실수도 했고 죄도 있다. 그래서 어찌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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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이 세대의 풍조를 따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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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의 풍속을 따랐다. 이 세대의 풍속이라는 것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를 말한다. 세상은 그냥 세상끼리 돌아가는 줄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사탄이 만들어 놓은 어떤 것을 지금 충만케 하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면 세상은 사탄의 충만이다. 세상은 자기도 모른다. 내가 손을 왜 이렇게 흔드는지 모르는 것처럼 자기는 모른다. 사탄이 선악과를 먹일 때 이미 그것을 입력시켜 놓았다. 그러니까 그것이 때로는 라멕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네피림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또 바벨탑이 될 수도 있다. 속에 무엇을 입력시켜 놓았다. 그것이 어떤 환경에 가면 이렇게 드러나고, 어떤 환경에 가면 저렇게 드러난다. 지금 세계가 오면서 여러 가지 풍조가 늘 바꿔져 간다. 이것들이 어디서 온 것인가? 바로 그렇게 입력해 놓은 것이 있어서 그 시대 그 시대를 따라서 이런 모양으로 저런 모양으로 나온다. 그것을 사람들이 따라간다는 것이다. 이 세대의 풍속을 따라갔다. 이것을 악이라고 한다. 이 세대의 풍속을 따라갔다. 사탄이 지배하는 어떤 것을 따라갔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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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음(불순종의 영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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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다. 공중권세 잡은 자가 곧 사탄을 의미한다.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다. 이 영은 어디서 역사하는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한다. 병이 아무데나 가서 난리를 치는 것이 아니다. 약한 사람이나 취약점이 있는데 가서 병이 나는 것이지 아무데나 가서 병이 나는 것은 아니다. 독감이 유행해도 갈만한 사람에게 가는 것이지 아무에게나 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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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공중권세 잡은 자가 어디 가서 활동하는가? 불순종하는 아들한테 가서 역사한다. 우리가 불순종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병균이 들어온다. 공중권세 잡은 자의 병균이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병균이 들어온다. 불순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담은 단지 그냥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지식을 먹었다. 그랬는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하나가 근거가 있으니까 그것 때문에 늘 들어오는 것이다. 다른 것이 다 들어오는 것이다. 공중권세 잡은 자의 주파수가 거기에 들어서 거기서 방송하는 것이 잘 들린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께서 방송하는 것은 안 들리게 만들어놓았다. 북한의 방송이 라디오와 TV가 있기는 있는데 딱 볼 것만 보도록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참 편하게 만들어 놓았다. 너희는 이것만 보라고 딱 정해 놓았다. 다른 것은 보고 싶어도 못 본다. 예를 들면 남한 방송을 보려고 해도 못 본다. 물론 남한에서도 옛날에는 못 보게 했다. 지금은 봐도 된다고 볼 수도 있다. 북한 방송을 들을 수도 있고 북한 TV를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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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종하는 마음 가운데는 공중권세 잡은 자의 방송이 계속 들려온다. 그러면 계속 방송 듣다보면 자기가 그렇게 되어버린다. 광고를 왜 하는가? TV에서 광고할 때 보면 한 가지 말을 계속 한다. 듣기 싫지만 계속 한다. 그런데 듣기 싫게 계속 한 것이 어느 날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이다. 약국 가서 드링크제 사는 사람은 다 박카스 달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드링크제의 원조가 박카스다. 뭔지도 모르고 박카스 달라고 한다. 약사가 머리가 있는 사람 같으면 박카스 달라고 해도 영진 구론산 같은 것을 주어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고지식한 사람은 꼭 박카스를 주어야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은 박카스를 달라는 말이 아니고, 드링크제를 달라는 말이었다. 박카스는 드링크제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자꾸 듣다보니까 그렇다. 왜 그런지 자기도 모른다. 왜 박카스 달라고 했는지 모른다. 저절로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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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권세 잡은 자의 방송이 들려오지 않아야지 그것이 들려오면 아주 곤란하다. 그런 라디오는 빨리 없애야 된다. 그 라디오가 무엇인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에 역사하는 영이니까 불순종이라는 라디오를 가지고 있으면 공중권세 잡은 자가 역사하는 그 역사가 그 영이 들어온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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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육체의 욕심을 따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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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무엇을 하고 하지않고가 문제가 아니고, 아예 이것은 제쳐 놓을 수밖에 없는 어둠의 자식들이었다는 이야기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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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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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이다. 우리가 원래 좋은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 세대의 풍속을 따랐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며, 육체의 욕심을 따랐던 사람들이다. 육체의 욕심이라는 말은 자기 욕심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우리는 엄청나게 신분의 변화를 가져왔다. 온 인류를 이렇게 다시 살게 하려고 다시 나게 하려고 예수께서 죽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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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긍휼에 풍성하신 그 큰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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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난 사람, 이 사람은 긍휼의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신 그 자비를 입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냥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해보면 어째서 그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 긍휼의 풍성을 입지 못하는가? 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 자비하심을 입지 못하는가?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왜 모르는가?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고 하는 자기의 은혜로우심을 나타내려고 하는 그분을 왜 모르는가? 만일 그런 은행이나 그런 것을 안다면 우리는 얼른 그것을 이용해야 된다. 정부에서 예산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돈을 어디다가 쓸지 몰라서 못 가져다가 쓴다. 시에서도 예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쓸 데가 없는 사람은 못 가져간다. 가서 달라고 하면 주지 않고, 어디에 쓸려고 하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준다는 것이다. 시에는 돈이 있으므로 그 돈을 알면 딱 맞춰서 내가 어디어디에 이런 사업을 하려고 한다고 하면 그 돈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가져가는 것이 임자다. 조건을 맞춰서 가져가는 것이 임자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니까 못 가져다 쓰는 것이다. 돈이 남는 데는 엄청나게 남는다. 모자라는 데는 모자라서 우리 동네같이 물이 안 나오는 곳도 있다. 대구광역시에서 수도가 없는 곳이 우리 가창면 상원리라는 동네다. 대구광역시 시민으로서 이렇게 항의를 하는 것이다.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돈을 가져올 사람이 없다. 시에서는 쓸려고 돈을 가지고 있다. 가져오는 놈이 임자다. 그래서 많이 가져간 곳은 돈이 남아서 주체를 못하고, 이 돈을 어떻게 소비할까 해서 연말이 돌아오면 소비하려고 난리다. 없는 데는 왜 돈 한 푼도 안 주는가가 되는 것이다. 교장 선생님들도 돈을 갖다가 건설도 하는 교장선생님도 있고, 땡전 한 푼 못 가져오는 교장도 있다. 교육청에는 다 돈이 있는데, 울타리 하라고 놓아둔 돈도 있고 나무 심으라고 놓아둔 돈도 있고 다 있다. 그런데 이 교장선생님이 울타리 하라고 놓아둔 돈이 있는지 모른다. 그러면 못 가져오는 것이다. 나무 심으라고 놓아둔 돈이 있는데 모르면 못 가져온다. 어떤 교장은 그것을 딱 알고 우리 학교의 담장을 헐고 울타리를 하려고 한다고 하면 돈을 가져온다. 그 학교는 날마다 공사다. 공사를 하다보면 부스러기가 떨어진다. 공사 안 하면 누가 점심이라도 사주겠는가? 큰 뇌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국가 돈 가지고 자기 실적도 생기고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어떤 교장은 매일 불평만 하고 있다. 돈도 주지 않고, 교육비는 이렇게 인색하게 쓰고 있고, 정부가 무엇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자기가 바보라서 그렇다. 돈이 엄청나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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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의 풍성하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오면 그 자비하심, 그것이 있는데 못 가져다 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기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늘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고 안달하시는 분이다. 자기의 무엇을 주어서 자기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시는 분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 가져간다. 가져가지 못한다. 그래서 빈곤 상태에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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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그분은 무한히 자비하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무한히 긍휼에 풍성하신 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는 그분의 은혜의 원천에서 흐르는 것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주는데 우리가 다른 자리에 있어서 못 받아들인다. 대구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비가 공중에 올라가다가서 대구 지형을 보니까 비가 떨어지면 안 되겠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데로 달아나 버린다. 그래서 대구는 지금 비가 안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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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자비하신 분이지만 다른 데서는 자비하시지 않은 분이다. 하늘에 비는 많은데 대구에는 비가 안 온다. 제주에는 지난여름에도 비가 너무너무 많이 와서 마당에 잔디를 깔았는데 너무너무 길어서 또 깎았다. 처음에 잔디밭을 만들 때 나는 육지 생각만 하고 스프링클러를 설치해야 된다고 해서 일일이 선을 깔았다. 일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 제주에서는 이것 안 해도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네가 몰라서 그렇지, 잔디 키우려면 스프링클러가 있어야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한 번도 써먹지 못 했다. 비가 계속 오는데 왜 스프링클러를 돌리겠는가? 죄가 다른 것이 아니고, 모르는 것이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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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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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은혜가 풍성하다. 거기서는 하나님이 자비하시다. 무조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자비하시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가 아니면 자비하시지 않는다. 제주에서는 비가 무진장 온다. 하지만 대구에서는 비가 안 온다. 비가 많이 필요하면 제주도로 가야 된다. 대구에서 비 안 온다고 아무리 원망해도 소용이 없다. 비는 안 온다. 지난주에 제주엘 갔더니 물이 없어서 세수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형편에 있다가 제주를 가니까 물이 콸콸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집사람과 둘 다 그랬다. 제주에는 그렇게 풍성한 물이 대구에는 왜 그렇게 메마른지.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늘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고 하는데 왜 내 인생은 이렇게 메마른가. 제주에 있지 않고 대구에 있어서 그렇다. 그런 이유와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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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우리에게 자비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오죽이 잘해주었는가? 흙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산 혼이 되게 해서 하나님의 동산에 두고 그 동산을 관리하게 하고 지키게 하고 또 저녁에 서늘할 때면 나와서 데이트도 하시려고 지어놓은 것이다. 성경에 보니까 날이 서늘할 때에 여호와께서 동산을 거니셨다고 되어 있다. 그분이 낮에는 더우니까 날이 서늘할 때면 나와서 아담과 데이트도 하려고 만들어놓았다. 그런데 그만 그것이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복이 되게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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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늘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비하심이 없다. 하나님이 뭐가 자비하셔, 하나님이 무엇을 잘해 줘, 하나님이 뭐가 좋아? 이렇게 되고 만다. 우리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찬양하면 세상 사람들이 와서 보고 무엇이 좋아서 저렇게 난리인가 한다. 구호물자가 온 것도 아니고, 복권에 담청된 것도 아니고, 무엇 때문에 저렇게 난리인가 할 것이다.
어디에서는 자비로우신 분이다. 어디에서는 긍휼에 풍성하신 분이다. 우리가 그것을 꼭 알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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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몸! 다시 난 몸! 이 사람은 허물로 죽었던 사람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앉히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가 아니면 살아날 수가 없고, 다시 날 수가 없고, 그리스도와 함께가 아니면 우리는 다시 하늘에 앉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죄와 허물로 죽어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니까. 잘해보아야 동물이다. 하나님이 벌을 안 주어도 동물이다. 그 정도밖에 안 된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다시 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없는 자비하심을 맛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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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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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다. 2장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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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나타낼 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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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나타낼 자! 이것이 선한 일이다. 선한 일이 다른 일이 아니다. 은혜를 베푸는 자, 은혜를 나타내는 자는 선한 사람이다. 선한 사람을 따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아니고, 누구에겐가 은혜를 늘 베푸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다. 남을 늘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 남에게 뭔가 잘해주려고 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다. 선한 사람이 따로 있는가. 선이 무엇인가? 이렇게 이론적으로 따져보아야 무엇이 나오겠는가? 아무리 공부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 간단한 것은 나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나에게 선한 사람이다. 누구에게든지 내가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 은혜를 받고도 받은 줄 모른다면 참 불행한 사람이다. 조금 받았어도 크게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많이 받았어도 적게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받았어도 받은 줄 모르는 사람은 더 불행한 사람이다. 세상이라는 것이 아주 간단하다. 은혜를 받고 은혜를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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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세상에 나와서 우리는 육신적으로 말하더라도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부모님의 은혜를 받았다. 주변의 은혜를 받았다. 사람이 그것이 기억이 안 된다. 은혜 받은 것이 기억이 안 된다. 5살 먹을 때까지 한 일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그러니까 은혜 받은 일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안 좋은 것만 기억이 난다. 이상한 일이다. 안 좋은 일은 3살 때 것도 기억이 난다. 좋은 일은 20살 때 것도 기억이 안 난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은혜를 받은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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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 긍휼(자비)의 풍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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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는 긍휼이 풍성하다. 긍휼이 풍성하다는 것은 사랑보다 더 깊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사랑이라는 말은 그냥 일반적인 말이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뜻이 되지만 긍휼의 풍성함이라는 말은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랑의 깊이를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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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비(친절)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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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비하심! 이것은 친절하다는 뜻이다. 긍휼은 여기서 자비라는 뜻이고, 자비하다는 말은 친절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긍휼의 풍성하심을 나타낼 자로 우리를 지었다. 우리를 불렀다. 우리에게 은혜를 배달할 자로 불렀다. 이 얼마나 우리가 축복인가! 같은 편지를 전달해도 기쁜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과 슬픈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다르다. 연산군 어머니에게 사약을 내리러 간 사람은 정말 죄가 없다. 연산군 어머니에게 사약을 갖고 간 사람은 자기가 가고 싶어서 갔는가? 임금이 가라고 하니까 약 사발 들고 갔는데 그것 때문에 당하는 화가 얼마인가. 그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그 약 사발 대신에 전복죽이라도 한 그릇 쑤어갔으면, 연산군이 왕이 되었을 때에 얼마나 대우를 받았겠는가. 그런데 불행한 것을 가져다주고 나니까 얼마나 엄청난 피해를 받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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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은혜를 전달하는 직분! 이것보다 귀한 것이 없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은혜를 전달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낼 자로 내가 부름을 받았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나타낼 자로 부름을 받았다. 선한 일을 위해서 지음 받은 자다. 지었다는 말은 새로 났다는 뜻이다. 새 피조물이 되었다. 전에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으니까 우리는 사약이나 들고 다녔던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때가 오면 3족을 멸할 그럴 사람인데, 이제 우리가 다시 나서 다시 난 사람은 선한 일을 위해서 지으심을 받았다. 우리는 전복죽 가지고 갈 자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니까 얼마나 이것이 축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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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나타낼 자로 부름을 받았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세상 사람을 대할 때도 우리가 은혜를 전달할 자로 생각하자. 나는 은혜를 전달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이구나. 새로 지음 받은 사람이구나. 전에 나는 은혜를 전달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다시 난 사람은 은혜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난 것이다. 짧은 세상 잠깐 지나가는 동안에 은혜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저주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 세상사는 법도 남에게 은혜를 전달하는 사람이 장래가 좋지 남에게 늘 저주만 전달하는 사람은 장래가 좋지 않다. 법에 의해서 한다고 해도 사형집행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 때문에 죽은 사람을 보았다. 공무원으로 법무부에 들어가서 형무소에 가게 되었는데 교수형 하는 것에 참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것이 고민되어서 이 사람이 평생을 고민을 하다가 결국 자기 인생을 자포자기해서 당뇨병이 걸렸다. 그것도 치료를 하지 않아서 내가 처음 만났을 때 한쪽 발이 없었고 얼굴은 시커멨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제주의 어떤 형제와 같이 공무원 시험을 보았는데 그 형제는 제주도청에 떨어지고 이 사람은 법무부에 떨어진 것이다. 그 사람은 그것을 보고 나서 충격을 받아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결국은 마지막에 죽었다. 마지막에 병원에 가보니까 당뇨가 심해져서 온몸이 시커메져 있었다. 죽음을 전달하는 사자다. 저승사자가 되는 것이다. 마음이 약한 사람이 그것을 보고 나니까 자기 인생이 절망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일을 하려면 강심장이 해야 된다. 스탈린처럼 2천만 명을 죽여도 까딱없는 사람을 데려다가 해야 되는데 마음 약한 사람을 시켜놓으니까 못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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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전달하는 사람!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말 한마디라도 남에게 좋게 말해준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른다. 누구에게라도 절대로 막말해서는 안 된다. 다시 안 볼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 언제 그 사람을 또 만날지 모른다. 내가 이 우물에 다시 오겠는가 하고 우물에 침을 뱉고 갔는데 십리도 못 가서 목마르니까 또 왔다. 세상은 그렇다. 돌고 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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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전달하는 사람! 우리는 은혜 중에서 은혜, 영원한 은혜를 전달하는 사람이다. 세상에서도 은혜가 많지만, 그것도 중요하고 좋은데 우리가 전하는 은혜는 그 은혜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잘하면 영원히 살게 하는 은혜다.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나타낼 자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 선한 일을 위해서 지으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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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함을 선전할 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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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오직 그 은혜를 인해서 받았다. 그런데 그 은혜가 있지만 믿음이 없어서 못 받는다. 은혜는 분명히 있는데 내가 그것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내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기독교에서 믿음, 믿음을 자꾸 강조하는 이유는 은혜는 제쳐놓고 하는 말이다. 은혜는 아예 기정사실로 아니까 믿음으로, 믿음으로라는 이 말을 하는 것인데, 그것이 오해 되어서 은혜는 모르고 믿음만 가지려고 하니까 신념이 되어 잘못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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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것을 내가 나타낼 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말이다. 내 인생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는데, 그분의 그 풍성한 은혜를 인해서 내가 지금 새 사람이 되었다. 이것을 선전할 자로 내가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이 선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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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은혜는 무엇인가?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인격으로 누리면 그것이 은혜지만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으심 안에 우리를 포함시켜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그 묘한 대책, 그분 안에 나를 포함해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한, 나는 이보다 절묘한 대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으로서는 이런 대책을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대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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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으심 안에 우리를 포함시켜 주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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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 가지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으심에 나를 넣었다. 포함시켰다. 나는 도저히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내가 어떻게 예수가 되겠는가? 내가 어떻게 예수와 함께 하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나에게 포함되도록 만들어놓았다. 내가 그렇게 해서가 아니고 나를 달성구민이 되게 만들어 버렸다. 지금 달성구가 조각이 나있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수성구로 편입하자는 말이 나오고 있다. 수성구로 편입되면 나는 자동적으로 수성구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수성구에 포함되면 나는 참 좋겠는데, 문제는 영감님들이 반대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안 가겠다. 왜? 농어촌 혜택을 못 받기 때문에 안 가겠다는 것이다. 참 이것은 답답하다. 나는 수성구에 편입이 되면 좋겠는데, 수성구에 포함이 된다면 수돗물도 해결이 될 것이고, 수성구에 포함이 된다면 학군도 좋아질 것이고, 물론 학군은 지금 같이 쓰지만, 여러 가지 좋은 일들이 생기는데, 영감님들이 농어촌 혜택 못 받는다고 안 한단다고 한다. 우리가 좋은데 포함되면 이건 아주 땡 잡는 것이다. 하와이가 미국의 한 주로 편입이 되었다. 하와이는 미국이 되었다. 포함되기 때문에 미국이 되어 버렸다. 하와이에 살고 있는 사람은 미국 시민이다. 하와이에 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왜? 포함을 시켜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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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살으심에 포함되어 버렸다. 포함될 수밖에 없는 죽으심과 살으심을 내놓았다. 내가 포함 안 되고 싶어도 안 될 수가 없다. 모든 인류는 다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위대하거나 위대하지 않거나 전혀 상관이 없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전혀 상관이 없다. 인간은 누구나 그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지혜고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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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믿음은 이 사실을 신뢰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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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것은 무엇인가? 이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인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나는 하나님의 지혜에 따라서 예수 안에 포함되었구나. 그분의 지혜안에서 내가 죽음에 포함되고 그분의 지혜안에서 나는 살으심에 포함되었구나. 이것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주여 믿습니다’라는 이 믿음이 아니고, ‘나을 줄로 믿습니다’, ‘일이 잘 될 줄로 믿습니다’는 이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포함된 것을 믿는 믿음이다. 이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지만 안 되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말을 썼다. 잘 살펴보면 십자가에 내가 있다. 십자가에 가서 너는 너고 나는 나라고 할 수 있는가? 너 잘 죽어라고 할 수 있는가? 고생하네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본 것이고,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 저 사람도 피조물이고, 나도 피조물이네. 저것이 내 운명이네. 이렇게 봐야 된다. 초상집에 가서 괜히 돼지고기가 있는가 소고기가 있는가를 보고 오는 것은 소용없다. 그 집에 가서 돼지고기 편육이 참 맛있게 되어 있다거나 절편이 참 좋더라고 하면 소용없고, 그 사람 운명이 내 운명이네. 내 운명의 집에 왔네. 이렇게 보고 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믿음은 이 사실을 신뢰하는 것이다.
③ 구원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던 자가 살아나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을 찬송하는 것(다시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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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던 자가 살아나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찬송하는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천당에 가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던 자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던 자가 은혜를 모르던 자가 은혜를 알고 그 은혜의 풍성함을 찬송하는 것이 구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이 참 행복이다. 이것이 참 구원이다. 우리 인생은 간단하다. 하나님을 우리가 알고 그 은혜를 알고 그것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도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면 행복하다. 그런데 어떻게 잘못되면 부모는 분명히 사랑하지만 자기는 사랑하는 줄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 가출하는 것이다. 물론 부모의 잘못도 있다. 표현을 잘 못해서 알아듣지 못하게 했다. 속으로는 사랑하면서 겉으로는 욕을 했다. 이런 문제들이 있다. 속으로는 정말 사랑하면서 겉으로는 이 집나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아이들은 새겨듣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들어버린다. 바로바로 들어버리기 때문에 엄마가 나를 어디서 주워온 모양이구나. 자기 딸이 아니니까 그렇지. 자기 아들이 아니니까 저렇지. 이렇게 생각한다. 옛날에는 귀여운 아이를 보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소리를 많이 했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그것을 그대로 들어버린다. 큰 다음에 부모가 좀 섭섭하게 하면 다리 밑에서 주워온 것이 맞는 모양이라고 돌아가기 시작하면 이제 감당하지 못하게 되어 집을 나간다. 그러니까 부모의 잘못도 있다. 어른들의 잘못도 있다. 괜히 옆에 사람이 너 어디서 왔는 줄 아느냐, 다리 밑에 있었는데 너희 엄마가 데려왔다고 농담처럼 했는데 애는 그대로 들어버린다. 아이들한테는 정말로 농담도 하면 안 된다. 아이들은 새겨들을 줄을 모른다. 그냥 들어버리기 때문에 나는 웃으려고 한 말이지만 아이는 웃으려고 한 말로 안 들리고 사실로 들려버린다. 그러니까 비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남의 아이들에게 말도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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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무엇인가? 은혜를 알고 그것을 감사하고 그것을 찬송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고, 나 혼자만이 아니라 단체적으로 새 예루살렘으로 찬양하는 것이 우리 구원의 완성이다. 그러니까 몸인 교회는 얼마나 큰 축복인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다. 선한 일을 위해서 은혜를 전달할 자로, 은혜를 인해서 구원 얻은 자로 전달할 자로 우리가 지으심을 받았다. 새로 지음을 받았다. 우리는 그런 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들이다. 가장 존귀한 일을 맡았으니까. 가장 존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으니까.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다. 세상에 누가 무엇을 잘하니 못하니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렇다고 많이 가진 사람보고 왜 많이 가졌냐고 할 일도 아니고, 멍청한 사람보고 왜 멍청하냐고 할 일도 아니고, 차원이 전혀 다른 세계다. 전혀 다른 세계에 지금 와 있다. 내가 서 있는 위치는 전혀 다른 데에 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말한 대로 우리의 위치는 하늘에 있다. 하늘에서부터 정해진 것이다. 땅에 와서는 무엇인가? 선한 일을 위해서 지으심을 받은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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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허물과 죄로 인해서 우리가 본질상 진노 아래 놓여있던 자들인데 그 크신 은혜로 인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한한 자비로 인해서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서 지으심을 받고 당신의 덕을 선전할 자로 당신의 은혜를 선전할 자로 당신의 축복을 선전할 자로 우리를 새로 지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이 쟁취하신 모든 이 우주적인 사건을 오늘 우리에게 전달하여 주시고 당신으로 인해서 얻어진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