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즉 위만조선과 창해군의 위치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Position of Wiman-Josaeon and Changhaijun
출처 : 『국학연구』제22권, 2018. 139p ~ 200p. ISSN 1598-8082
초록
우리가 역사연구 중에 사용하는 지역 혹은 종족의 명칭 등은 시기에 따라 그 내용이 크게 변화된다. 필자는 2008년부터 2년 동안 교육부의 재정지원을 받아 동이(東夷)에 관한 전문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 연구를 통하여, 필자는 『사기』에 기록된 동이는 『삼국지』 및 『후한서』에 기록된 동이와 완전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본고에서 살펴보겠지만, 『사기』에 기록된 조선과 『삼국지』 및 『후한서』에 기록된 조선도 역시 완전히 다른 것이다. 『사기』에 기록 된 조선은 서기전194년에 건국되어 서기전108년에 멸망한 위만조선이 다. 그 위치도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의 학자들은 『삼국 지』 및 『후한서』 등의 기록을 근거로 위만조선이 마치 한반도에 있었 던 국가인 것처럼 왜곡했다. 또한 『사기』에 기록된 예(濊)와 『삼국지』 및 『후한서』에 기록된 예(濊)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사기』에 기록된 예(濊)는 발해의 서쪽 연안에 있었고, 그 예(濊)의 지역에 서기전128년 창해군이 설치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후대의 학자들은 『삼국지』 및 『후한서』에 기록된 예 (濊)를 근거로 창해군이 한반도 등에 있었던 것처럼 조작했다. 본고에서 필자는 그 동안 우리에게 잘못 알려져온 위만조선과 창해군 의 위치를 고증해보려 한다. 본고의 결론은 “위만조선과 창해군은 한반 도와 관련이 없는, 발해 연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목차
- [국문요약]
- 1. 서론
- 2. 예(濊)와 조선의 위치
- 1) 『여씨춘추』에 기록된 예(濊)의 위치
- 2) 『회남자』에 기록된 조선의 위치
- 3. 창해군의 설치와 그 위치
- 1) 『사기』에 기록된 조선 국가의 형성 과정과 그 위치
- 2) 『사기』에 기록된 창해군의 위치
- 4. 결론
- [참고문헌]
- [Abstract]
1, 서론
이 논문은 서기전194년에 건국된 조선(朝鮮) 즉 위만조선(衛滿朝鮮)과 서기전128년에 설치되었던 창해군(滄海郡)의 위치를 검토할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필자는 2018년 8월 요동반도의 끝 지점인 요녕성(遼寧省) 대련시(大連市) 여순구(旅順口)의 노철산(老鐵山)에서 출발해 발해를 끼고 ‘C’ 자(字) 모양으로 이동하여 산동반도의 봉래(蓬萊)까지 가며, 그 발해 연안의 고대사 유적을 답사하였는데, 이 논문은 그 답사의 결과로서 작성되었다. 필자는 그 답사를 앞두고 조선 즉 위만조선과 창해군의 위치와 관련된 문헌자료를 정리해보았는데, 결론은 조선과 창해군이 모두 발해 연안에 있었다는 것이었고, 현지답사를 통해 그 지점들을 대충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잘 알려졌듯,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는 조선시대(朝鮮時代, 1392∼1910년)의 학자들은 주(周)의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하여 성립된 기자조선(箕子朝鮮)이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인 평양에 도읍했었고, 서기전194년 연(燕)으로부터 망명해온 위만(衛滿)이 역시 평양 지역을 차지하여 위만조선을 세웠으며, 한(漢)의 무제(武帝)가 서기전108년에 그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평양 일대에 낙랑군을 포함한 한사군(漢四郡)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대주의(事大主義), 사대사관(事大史觀)에 의한 역사 서술로서 사실이 아닌 허구(虛構)이다.
19세기 말부터 한반도를 침략하여 영구적인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제(日帝) 역시 똑같은 서술을 되풀이 했다. 예를 들면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는 1892년에 출간한 『조선사』에서 “옛날 은(殷)이 망함에 기자가 도망하여 와서 조선의 왕이 되었다. 9백년이 지난 준왕(準王) 때 연(燕)의 위만에게 쫒겨나고, 위씨(衛氏)가 대신 통치한 지 대략 80년 만에 한(漢)의 무제에게 멸망되었다. 무제가 그 땅을 나누어 사군(四郡)으로 삼고, 소제(昭帝) 때 이를 합하여 이부(二府)로 하였다. 결국 기자로부터 이에 이르기까지 1천여 년 동안 모두 중국인이 통치한 셈이 된다.”라고 조선고대사를 요약하는데, 그 조선의 중심지가 바로 현재의 평양이라고 주장한다. 식민사관으로 무장한 일제의 역사학자들은 “조선반도의 나라는 지나(支那, 즉 중국)의 동쪽에 있어, 그 존망(存亡)과 흥폐(興廢)가 항상 동아시아 강국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때문에 나라를 세운지 3천여 년 항상 동아시아 열강의 속박을 받아 하루도 독립한 적이 없다. 기자(箕子)가 봉(封)해진 때로부터 지나(支那)의 영역이 되었고, 그 뒤 한(漢)이 사군(四郡)을 설치했으며”라는 식으로 서술하여, 출발부터 외세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 서술로서 역시 사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허구(虛構)이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의 역사왜곡을 깨고, 조선 즉 위만조선의 위치를 올바로 밝히기 위한 학술적 탐색은 그 동안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 적지 않은 성과가 있지만, 아직은 더 검토할 문제가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서기전194년에 건국된 위만조선은 절대로 한반도의 어느 지점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그 위치 문제를 검토하려 한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의 학자들은 창해군의 위치도 한반도 주위에서 찾았다. 창해군이 함경북도에 있었다든가, 혹은 현재 요녕성 환인(桓仁) 일대를 흐르는 혼강(渾江) 혹은 압록강 중류 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도 물론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허구(虛構)이다. 창해군을 설치하자, 연(燕)과 제(齊)의 사이 지역이 일시에 소란스러웠다는 문헌기록을 보면, 창해군은 한반도 일대에 있지 않았음이 분명한 것이다. 이에 역시 창해군과 관련된 허구를 극복하기 위한 학술적 노력도 계속되었고 그 성과 또한 적지 않은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권오중의 관련 연구를 들 수 있다. 권오중은 2000년에 작성된 그의 논문에서 창해군이 요동반도의 대련시 보란점구(普蘭店區)의 장점촌(張店村) 일대에 있었다고 해석하였다. 중국학계의 왕우랑(王禹浪)도 2016년 및 2017년에 보란점구의 장점(張店) 일대가 창해군이 설치되었던 지역이라고 발표하였다. 이에 뒤이어 위국충(魏國忠)도 2017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에서 창해군의 위치가 보란점구의 장점(張店) 일대라고 논증하고 있다. 권오중의 설(說)은 창해군의 위치를 새로 해석하는 중요한 시도이며, 창해군과 관련된 그 동안의 허구(虛構)를 깨는 계기를 열어주었다.
최근의 연구동향이나 관련 성과들을 검토하면, 이제 조선 즉 위만조선과 창해군의 위치에 대한 그 동안의 여러 오류들이 완전히 극복될 시점이 다가온 것 같다. 이에 이 논문에서는 고대의 문헌에 기록한 사실(史實) 그대로를 해석하여, 조선 즉 위만조선과 창해군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출처 : http://www.riss.kr/link?id=A106093704
조선 즉 위만조선과 창해군의 위치에 관한 연구
임찬경, (국학연구, Vol.22 No.-,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