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봐도 촌티가 가득한지라 처음 본 사람들은 잘 믿으려 하지 않지만 나는 서울에서 나고 서울을 지키며 자란 서울내기이다.(이십여 년 전 해직됐다 복직했을 때 나를 처음 본 여선생들이--그전까지는 남고에서 남자끼리만 있었으니 그럴 일도 없었는데--내가 서울 출신인 것도 모자라 무려 서울에 있는 대학까지 나왔다는 걸 알고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지금도 얘기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웬만한 시골 사람 못지않게 시골스러운 일에 익숙하다. 이제 내 생김보다도 더 촌스러웠던 서울 얘기를 한번 해보려 한다.
1966년, 국민학교 4학년 때 어느 봄날, 6.25 이후 줄곧 아현동을 지키던 우리집은 처음으로 이사를 했다. 그래서 간 곳이 모래내 은좌극장 뒤였다.
그때는 아현동에서 모래내를 가려면 신촌에서 연세대 앞 쌍굴다리를 지나고, 눈이 조금만 내리면 버스가 꼼짝 못하는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9.28 서울 수복 때 격전지였다는 ‘연희 104고지’를 지나서 모래내 다리(사천교)를 건너야 했다. 다리를 건너기 전 산 밑에는, 기다란 관 끝에 뻘겋게 달아오른 유리덩어리를 말아올린 다음 입으로 불어서 병을 만드는 유리 공장이 있었고, 다리를 건너서야 비로소 동네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 동네를 남가좌동이라는 번듯한 이름을 버려두고 모래내라고 했다. 모래가 너무 많은 땅이어선지 동네를 벗어나면 가끔 배추밭이나 드문드문 있을 뿐, 거의 황무지에 가까웠다. 이때는 나중에 우리 동네 북쪽, 즉 명지대 쪽으로도 계속 동네가 벋어나가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모래내 건너편, 그러니까 유리공장 뒤쪽으로 산중턱까지 판잣집이 몇 채 다닥다닥 붙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새로 이사 간 집에서 몇 발짝만 나가면 냇가가 있다는 것이 내겐 더없이 즐거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름이 좋아 냇물이지 물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모래뿐인 ‘모래내’였다. 나는 ‘물 대신 모래가 흐르는 내’란 뜻인가 의아해하면서도 틈만 나면 집 앞 모래내로 달려갔다.
동네아이들이 편을 갈라 모래먼지 날리며 깡통을 차거나(제대로 된 공이 무척 귀하던 시절이었다) 자치기를 하며 노는 것을 지켜보곤 하던 나 역시 오래지 않아 그들 사이에 끼게 되었다. 그 모랫바닥에서 씨름도 하고, 둑을 타고 달리기도 했다. 풀섶을 뒤져 깜부기도 따먹고……. 멀리 백련산까지 가서 칡뿌리를 캐 먹기도 했다.
그런데 그 봄이 다 가기 전 어느 날,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모래내 상류에서 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겨우내 말라붙었던 냇바닥의 온갖 먼지를 다 쓸어내린 듯 누우런 흙탕물이, 누가 위에서 마구 쏟아 부은 듯이 흘러내려오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정고무신을 벗어 던지고 물에 뛰어들어 물장난을 시작했다.
그날 이후로 냇물은 한결같이 흘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흙탕물은 거짓말처럼 맑아졌다. 모래가 정수작용을 한 것이겠지.
모래내에는 그러나 물고기가 살지 않았다. 그래서 모래를 파내서 작은 둑을 쌓아 제법 깊고 맑은 웅덩이를 만들어서 물장난을 하기는 좋았지만, 어쩐지 심심했다. 게다가 화강암이 부서져 내린 굵은 모래는 아무리 파내도 밤새 흔적 없이 도로 메워져 우리들의 하루치 노동을 비웃었다.
파도 파도 끝이 없는 모래장난이 싫증날 즈음, 우리들은 모기장을 뜯어 만든 보잘것없는 그물을 들고, 고기 담을 분유 깡통을 흔들며 멀리(??) 수색 쪽으로 의기양양하게 원정을 떠났다. 철길을 따라 가다 보면 수색역 못 미처 증산교 철교가 있고, 그 밑을 흐르는 냇물(즉 불광천. 참, 모래내에도 홍제천 또는 사천이라는 한자 이름이 있다)에는 피라미며 송사리가 지천이었다. 특히 초여름 며칠 동안은 실뱀장어가 엄청난 떼를 이루며 상류로 거슬러 올랐다.
이 실뱀장어는 참 희한했다. 맑은 물속을 들여다보면 몇 마리씩 떼를 지어 풀뿌리에 머리를 박고 흐느적거리며 가만히 있었다. 해서 그 아래쪽에 그물을 대고 물장구를 치면 한꺼번에 여러 마리씩을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잡아넣어도 얼마 지나면 깡통 속에는 몇 마리 남아 있지 않았다. 이놈들은 깡통 벽을 타오르는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꼬리부터 거꾸로 쓰윽 기어오르면 막무가내로 탈출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잡아서 주워담았다. 어차피 잡아먹자는 것이 아니라 잡는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었으므로……. 아주 나중에 그 실뱀장어가 꽤 비싼 값으로 일본으로 수출된다는 얘기를 듣고는 무척 아쉬워했던 기억도 있다.
여름날, 비가 온 뒤면 온 동네가 맹꽁이 울음소리로 시끄러웠는데, 이렇게 물이 넘칠 때 서둘러 증산교로 가면 제법 큰 붕어나 메기 같은 것들도 잡을 수 있었다. 가끔 냇둑 밑으로 난 구멍을 쑤셔 게를 끄집어내다가 억센 집게발에 손가락을 물리는 일도 있었지만 아픔보다는 잡아내는 기쁨이 더 컸다. 가는 댓가지를 엮어 만든 통발을 들고 물을 헤집는 어른들을 따라다니며, 팔뚝만한 메기를 움켜내는 것을 부러운 눈으로 구경한 적도 있었다.
물고기는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동교동과 연희동……
연희 입체교차로 자리에서 약간 북쪽으로는 커다란 늪이 있고(거기서 지금의 서대문구청 쪽으로 비포장이나마 신작로가 있긴 했으나 사시사철 진창이어서 차가 다니는 건 거의 볼 수 없었다) 그 아래쪽, 지금의 경성고등학교 자리에도 늪이 있었다.
그리고 모래내에서 동교동으로 이어지는 경의선 기찻길 양 옆으로는 홍익대 앞까지 논과 논 사이를 누비는 작은 도랑들이 있어 역시 미꾸라지며 송사리, 피라미, 버들붕어 같은 것들을 심심찮게 잡을 수 있었다. 고기잡이에 미쳐 논두렁을 맨발로 뛰어다니다가 뱀을 밟아 사람과 뱀이 서로 놀라 허둥거리거나, 유리조각에 발을 베어 피가 솟고 뼈가 다 보이는데도 쑥잎을 뜯어 대강 문지르고 다시 뛰어다니는 일쯤은 예사였다.
그때 함께 고기잡이하던 나의 동무 ‘송사리’와 ‘왕서방’…… 성이 송가라서 '송사리'가 된 송 아무개는 지금도 변함없이 나의 가장 가까운 동무이지만, 역시 이름에 ‘왕'자가 들어가는지라 피할 수 없는 별호를 얻었던 유왕식, ‘비단이장사 왕셔방’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얼굴이 빨개져서 주먹만 한 돌멩이를 움켜쥐고 우리를 쫓아다니던 그 순박한 ‘왕서방’은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이젠 50년도 더 넘은 저편 세월이 새삼 그립다. 그들과 나는 비만 내리면 그 알량한 그물과 깡통을 챙겨들고 새물 맞으러 거슬러 오르는 피라미를 한 마리라도 더 잡겠다고 고무신이 진창에 벗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냅다 달려가곤 했던 것이다.
참, 모래내 다리에서 한강 쪽으로 좀 내려가다 보면, 지금의 마포구청 앞쯤 되는 곳에 제법 높은 폭포가 있었다. 모래내에는 고기가 전혀 없었지만 거기까지는 물고기가 올라왔다. 아마 물고기들은 그 폭포를 거슬러 오를 수 없었던 모양이다. 특히 비가 내린 후에 가면 바위 위에 올라서서 잠자리채로 훑어도 폭포에 막혀 더 오르지 못하는 꽤 큰 물고기들도 쉽사리 떠낼 수 있었다.
폭포가 만든 깊은 소는 항상 검푸른 물이 가득해 우리들의 좋은 놀이터였다. 한쪽 높은 바위에서 한 사람씩 차례로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으로 뛰어드는 일도 재미있었다.
다만 한 해 여름이면 한두 명씩은 꼭 빠져 죽는 아이가 있었다. 비록 개헤엄일망정 헤엄 잘 치는 우리 동네 아이들은 그런 일이 없었지만 꼭 처음 보는 낯선 애들이 일을 당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폭포가 사라졌다. 아무리 살펴봐도 어딘지조차 찾을 수 없다. 거참, 희한한 일이다.
어느덧 겨울이 다가온다. 가을이 깊어가고 논마다 추수가 끝나면 아이들은 주유소마다 선전용으로 나눠주는 작은 곽성냥과 자연시간에 전자석을 만들다 남은 에나멜 칠한 구리선 한 꾸러미를 꿰어차고 논 사이를 누볐다.
살얼음 낀 작은 도랑에 피라미나 개구리가 꼬물거리면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잡아냈다. 그것을 구리선에 꿰어(개구리는 뒷다리만 잡아뜯어서) 마른 짚단에 불을 붙여 구웠다. 맛보다도 더 기막힌 건 고기가 익어가는 고소한 내음이다. 아, 그 냄새…… 지금도 군침이 돈다.
이때쯤 어른들은 삽을 들고 물이 빠져 꾸덕꾸덕해진 논두렁 밑을 파헤친다. 겨울잠을 자러 땅속으로 파고 든 미꾸라지를 잡기 위해서이다. 양동이가 넘치게 미꾸라지를 주워 담는 것을 보면서, 내가 어른만큼 힘이 없는 게 원망스러웠다. 물론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 같은 크고 튼실한 삽도 없었지만…….
정말 대단한 일이 이 무렵 벌어진다. 동네 어른들 몇이 모여 일을 벌인다. 냇가 한 귀퉁이에 큰 솥을 걸어 놓고 이른바 ‘막고 품기’를 시작한다. 늦가을 얼음이 얼기 전 물이 바짝 줄어든 냇물이나 웅덩이를 막아 놓고는 물을 몽땅 퍼내는 것이다. 아침부터 퍼내면 점심때는 예사이고 거의 해가 넘어갈 무렵이 되어야 끝나는 때도 있었다. 붕어, 미꾸라지는 물론 때로는 팔뚝만 한 잉어나 메기가 자박자박 얕아진 흙탕물 속에서 펄떡이는 그 놀라운 광경에, 우리는 점심 먹는 것도 잊은 채 넋 놓고 바라보곤 했다.
겨울이라고 악동들이 가만히 앉아 있을 리 만무하다. 그때는 겨울이 왜 그리도 추웠는지. 꽁꽁 얼어붙은 모래내에서 손수 만든 초라한 철사줄 썰매를 타다 지치면 우리는 기찻길 옆이나 냇둑에 불을 놓았다. 불은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타들어갔다. 너무 거세다 싶으면 부랴부랴 달려들어 끄곤 했는데, 옷 버려 놓았다고 엄마한테 만날 혼나면서도 불장난은 재미있었다.
우리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연기 사이를 누비면서, 때론 동네 어른들의 호통에 도망치기도 하고, 세찬 바람에 마구 번지는 불길을 잡으려다 옷을 다 태워먹기도 하면서 봄이 오길 기다렸다. 다시 냇가에서 모래 언덕 쌓고 피라미 꽁무니 쫓아다닐 그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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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대 학번들은 ‘아, 그래 나도 그랬어’ 할지 모르지만, 80학번 이하는 이런 얘기가 어리둥절할 수도 있으리라.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당시 서울과 우리나라의 상황을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떠올려 본다.
1. 1960년대 초 1번 버스(나중에 21번 거쳐 132, 133번 등이 되었는데 지금은 몇 번인지 모르겠다)는 신촌에서 홍릉 사이를 운행했다. 당시의 신촌 로터리는 포장도 제대로 안 된 진짜 ‘新村’이었다. 신촌 로터리 밖은 그냥 '시골'이었다.
2. 나는 모래내에서 아현국민학교로 64번 신촌교통 버스(처음에는 21번, 나중에 142, 143번이 되었다. 역시 지금은 몇 번인지~)를 타고 통학했다. 연세목장 옆 높은(?)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눈이 내리면 버스가 막혀 걸어가야 했으므로 1, 2시간씩 지각을 하는 게 예사였다. 이 고개는 연희 교차로와 연세대 정문 사이에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이 깎여나갔다.
당시 버스비는 4원이었다. 어른은 8원. 엄마가 차비로 10원을 주시면 얼마나 기뻤는지……. 거스름돈으로 남은 그 2원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요즘 애들은 알까?
3. 신촌 로타리 지나서는 비포장도로였다. 앞에서도 얘기했듯 연희교차로 근처에는 늪이 있었다. 아마 전두환, 노태우의 집 약간 아래쪽일 듯하다. 그 옆으로 동교동서 홍은동으로 빠지는 신작로는 있었으나, 포장은커녕 신발을 신고 다니는 것보다 맨발로 다니는 것이 나을 정도로 질퍽거렸다. 어차피 신발이 진흙에 빠지고 벗겨져서 맨발이 되기 일쑤였다.
신촌로타리에서 공덕동 로타리 거쳐 서부역으로 이어지는 길이 새로 난 것은 중2때였다.
4. 제2한강교(양화대교)는 내가 국민학교 4, 5학년 때 놓았는데 그게 해방 이후 우리 손으로 서울의 한강에 놓은 첫 다리란다. 이후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서울대교(마포대교), 제3한강교(한남대교) 등이 놓였다.
5. 맑은 안양천 냇가에서 멱 감고 고기 잡는 사람이 많았다. 지금의 광명시 밤일 마을 앞에 있었던 할머니 산소를 가려면 시흥에서 버스를 내려 안양천 다리 건너서 한 시간은 걸어가야 했는데(이 동네도 지금은 엄청나게 변했다. 이 이야기 하자면 또 한 편 써야 한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본 광경…… 수십 수백 마리 붕어 잉어떼가 맑은 물 사이로 유유히 거슬러 올라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6. 여의도는 고등학교(숭문) 다닐 무렵만 해도 풀뽑기 봉사활동을 가곤 했던, 군용 비행장과 땅콩밭밖에 없는 쓸모없는 모래땅이었다.
7. 가장 놀라운 일…… 난지도는 우리가 모래내 하류에서 샛강을 건너가 몰래 땅콩을 훔쳐먹곤 했던, 쓰레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모래섬이었다. 이처럼 우리 보기에 별다를 게 없던 여의도와 난지도는 나중에 너무나도 다른 운명을 맞이한다.
8. 서울에서 전차가 사라진 것은 1967년이었다. 마지막 차비는 2원 50전, 5원에 두 장씩 묶어 팔았다. 채 못 쓰고 남은 전차표 몇 장이 내 어린 시절의 우표책 사이에 아직도 고이 남아 있다. 그러고 보니 ‘시간 나면 우표책 정리해야지……’ 하면서 50년 흘렀다.
9. 당시 서울 인구는 350만, 전국의 차량 수는 승용차, 버스, 트럭 몽땅 합쳐야 군용 제외하고 4만5천 대였다.(국민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본 ‘4만5천’이라는 숫자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10. 나랑 10년 차이가 나는 형이 대학 시절에 연극을 좀 하는 바람에 집에 오래된 연극 팸플릿이 꽤 남아 있다. 당시(1966년) 어느 연극의 팸플릿을 보면 국산 '퍼블리카' 광고가 나와 있다. 배기량은 1000cc나 되려나? 지금 기준으로 보면 정말 형편없는 차인데 가격이 '48만 얼마'라고 되어 있다.
싸다고?
바로 그 해 봄 방 4개에 마당에 우물까지 달린 제법 큰 아현동 집을 81만원에 팔고 모래내에서는 그중 괜찮은 역시 방 4개짜리 슬라브 지붕집을 64만원에 샀다. (그 차액은 형 등록금과 빚 갚는 데 쓰였다) 그러니 차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
11. 그 무렵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2차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던 거 같은데…… 수출액은 아마 몇 억불쯤 되었던 거 같다. 매년 몇십 %씩 급성장을 하던 시기라 기억 자체가 어렵다. 드디어 10억불 넘었다고 감격하여 잔치를 벌인 게 어느 해였던가?? 6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중석(텅스텐) 몇천만 달러 수출한 것이 전체 수출의 절반이 넘을 정도였던 나라가 몇 년만에 수십배를 이뤘으니 난리법석을 떨 만도 했다.
12. 모래내에서 2년 살고 다시 아현동으로 이사 오기 직전(1968년 초)에 그 유명한 '1.21사태'가 일어났다. 일이 일어나고 며칠 지난 어느 날 밤, 총소리가 나기에 얼른 장독대로 올라갔더니, 붉은 불덩이 같은 예광탄 몇 발이 연달아 쉬익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지나쳐 멀리 망원동 쪽으로 사라져 갔다. 그때 우리 옆집에는 '산장의 여인'으로 유명한 가수 권혜경 아줌마(나중에 '위장간첩' 이수근에게 속아 결혼했다 해서 더 유명해진다)가 살고 있었는데 나를 꽤 귀여워해 주셨다.
13. 중학교 1학년이 된 어느 봄날 ‘송사리’ 군을 만나러 오랜만에 모래내를 갔다. 일부러 버스를 한 정거장 미리 내려 모래내 다리를 건너면서 내려다보니 냇물은 그러나 이미 회색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겨우 1년전만 해도 맑은 물이었는데..
이처럼 1970년을 전후해서 모래내, 안양천, 중랑천 등등 서울 변두리의 냇물들은 거의 동시에 죽어 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2, 3년 후에는 결국 간장처럼 까만 물이 되어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고 말았다.
14. 60년대 초만 해도 우리 국민소득은 100달러도 되지 않았다. 우리가 북한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아진 것이 1972년쯤부터였다는 건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참,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지.
첫댓글 정말 호랑이 담배피던 때네요. 모래내에 사촌누나가 살아서 여름에 수영했는디....
그렇지.. 50년도 더 전 일이니.. ㅎㅎ
자네가 이방에선 첫번째 정식 회원일세..
여기저기 써 둔 글들 찾아서 채울 생각이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