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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인탁陣仁鐸 생애와 작품
진인탁陣仁鐸 Chin In-Tak 시인
1. 약력
1923∼1993, 외교관,교육자,시인으로 삼척시 근덕면 상맹방리(본촌)출생이다.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을 수료하였다. 1954년부터 1974년까지 주일본駐日本,자유중국,케냐,필리핀 등지의 외교관을 지냈다. 그후 1974년부터 1993년까지 한국외교협회 사무국장 및 동국대 교수를 지냈다. 1948년 시인 김기림의 추천으로 『동국시집』제1집에 '토굴'과 '장터'로 문단에 데뷔하하였다. 『두타문학』동인및『실직문화悉直文化』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시집『자화상自畵像』과 <장터> <치성> <연금年金을 타고> 등 시를 남겼다. 三陟鄕土文化硏究會의 제2대 會長 재직 때에 鄕土史料集 1991년 11월『悉直文化』창간호를 간행하고, 1993년 2월 7일 영면하다.
2. 작품
動安居士
두타의
거북마을에 자리한
진주眞珠 사람, 아주 촌 사람.
청장년을 바쳐
춘추를 시詩로 지어
만세에 전한 샘터
어쩌면 두타로부터 송악으로
역류시킨 자주의 물결, 그 본원.
물결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다.
궂은 날에도
사나운 바다로 향하였던
아아, 다시 살아나
그분의 뱃전에
부서졌으면.
식모
얘, 식모로 온 아희야
때 묻는 무명저고리 입고
짚신 신었길래 서울 아이들
이상스레 너를 보누나.
얘, 네 머리는 헝클어지고
손도 파라니 종아리도 몹시
야위어 보이누나.
네 떠나기 전 날
밤 깊도록 애비는 담배만 피고,
이윽고 언니의 손잡고
모랭이 돌아 또 돌아
산마루 끝까지 바래다주면
말없이 너는 돌아다보며 또
돌아다보고
뉘따라 여기 이 집까지
온 것이냐.
낯선 곳이면 마음도 항상 외로우려니
황혼이 가벼이 스쳐갈 무렵
어찌 남몰래 눈물이
그리도 많은 것이냐.
열반에의 채비
병세로 보아
부음을 보낼 날이
멀지 않았다.
오늘 운신하여
서가의 족보와 전적의
먼지를 떨다
어느 요절한
시인의 사랑하는 문집은
관 속에 넣어서 갖고 가야지
어머님은
세상을 떠나는 전날
장롱을 말끔히 정리하셨다.
아들이 바친
룸비니동산의1) 염주는
아내에게 유산으로
주고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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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
체질
할머님의
장롱은 버릴 수 없다.
할아버지의
호미도 보구래도
버릴 수 없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필사한 명심보감은
더욱 버릴 수 없다.
고샅의
쇠똥과 개똥으로
이루운 땅, 한 치라도
빼앗길 수 없다.
콩 심으면 콩 나는
생명의 젖줄, 내 목숨을
앗아가도 버릴 수 없다.
낙향
이방인처럼
물위에 떠도는 기름.
돌아왔다고
가슴을 열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건강의 방패를 차고
나를 누르는 무게,
지성의 왕관을 쓰고
비양거리는 소리 없는 소리,
내 체질이
도시의 탕아로 변했나 보다.
두드려도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굳게 닫힌 문.
고독을
술로만 새기는
나는 외톨이.
장터
오백년이 넘는 느티나무는
돌담을 쌓아 지주로 가지를 받치고
둘레 아래로 돌림배 장사꾼들이
차일을 치고 포전을 연다.
토박이 전으로는
싸전 소금전 쇠전이 있고,
오십리나 되는 마곡에서
소를 몰고 징검다리를 건너
순이의 혼수돈을 마련하여 오는
중늙은이도 있다.
호박엿판에 쌀가루를 뿌리며
엿가위로 장단을 치며,
당분의 효용을 노래로 엮고
심벌을 곁드린 북을 발로 차면서
바이올린을 켜며 노래 부르면
구경꾼들이 진을 치며 웅성거린다.
더러는 안약도 사고, 고약도 사고,
더러는 물고기 눈알같은 영양제도 산다.
정오 푹 넘으면
쇠전 거간꾼들의 흥정소리,
삿대질도 하고, 주먹을 쥐기도 하고
술청에 앉은 손님은 두서너 뿐.
갓쓴이들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손가락으로 육갑을 집기도 하고
마을 사이 혼담도 무르익는다.
어쩌다 방갓을 쓴 상주를 보면
노모의 환후가 잦아
장례에 못 가본 송구스러움…
소금절인 생선을 받아
정선, 임계로 가야하는 바지게꾼들.
큰 트럭에 짐작과 사람을 싣고
내일 열리는 장터로 달리면
신작로에는 먼지 바람이 일고,
더러는 자전차 뒷켠에
봇짐짝을 싣고
곡예사처럼 힘겹게 고개를 올라가는데,
국밥집 주모 아주머니는
허리춤에 두툼한 전대를 푼다.
겨울의 고향
푸른 바다를 끼고
난류가 몇 백리를 오가는 건지.
머언 산
백복령은 눈이 덮혀도
다사로운 바람이 구릉의
피부를 스쳐 흐른다.
이맘 때
춘천 샘밭에서 오는
장작 달구지, 소도 입에 고드름
주인의 콧수염도 고드름.
아직 한자나 얼은
소양강이 녹을 낌새는 없다.
어느 동삼 실종된 연서
그래도 그녀를 맞아
겨울에도 봄같은 고향에 산다.
머언 산 백복령은
눈을 이고 있어도
구릉 피부가 다사롭다.
고향
태백의 지맥 구릉들이
바다를 향해 뻗어
들 마을 나루를 열었네.
실개천 흐르는 언덕 사이
효자 열녀각이 자리해 있어
친고의 향기가 넘쳐흐르네.
끊임없는 광음따라
오곡백과가 무르익을 젠
선조들의 땀방울이 눈에 어리네.
네 고향 동해 바닷가
나루, 산마루 망부석 위엔
서릿발 이야기가 지즐거리네.
하늘과 땅과 별들처럼
변함없이 후예를 안아주는 땅
그리움의 품에다 뺨을 비비세.
수로부인
아침
감로수에 목욕한 나
얇은 紗 잠옷을 가져오너라.
용머리같은
배에서 은모래 밭으로 가는
무지개다리를 놓도록 하라.
벼랑의 진달래
바닷가 물이랑, 산새들이
나를 반겨주노나.
왕관을 폐리처럼 버린
그 분 바로 여기 있구나
내 앞에 다가오누나.
사랑을 위하여
목숨을 걸었던 산과 하늘과
바다는 몇 만리더뇨.
나를 안으라
팔로는 허리를 잡고
얼굴은 내 가슴에 묻고.
사랑의 밤하늘
이몸 붉게 사루리렸다.
여기서 살으리렸다.
나룻배
이 기슭에서
저 기슭으로 오갔던 옛날.
신랑의 조랑말과 연지 찍은
새각시의 가마도 탔다.
어느 해인가
옥동자를 분만한 일도 있었고,
침 하나로
죽어가는 환자를 살린
명의도 탔다.
원님도 아전도 나졸도
갓쟁이도 관수도 무당도
거쳐서 갔다.
관곽도 없이
가마니에 송장을 싼
나이 어린 상주도 있다
상주를 따르는 삽살개도 탔다.
이제는 기슭의 잔해
박물관에 전시했으면
아주 좋겠다.
3. 해설
이성교(시인)
陳仁鐸 詩의 世界
1.
우리 고향이 낳은 뛰어난 시인 진인탁 詩人이 가신 지 금년도로 13년이 지났다. 실곡悉谷 진인탁 詩人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詩는 영원히 우리들 앞에 빛나고 있다. 정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라는 말을 다시 실감케 한다.
陳仁鐸 詩人의 인생생활과 시와의 관계는 묘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의 생활이 교직․외교관의 굴곡 많은 생활을 거쳐왔지만 그의 영혼 속에 항상 문학의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그 문학은 깊은 골짜기의 꽃과 같은 것이어서 항상 향기를 피워 정신을 새롭게 했던 것이다.
그의 詩作의 원류는 조국 광복후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문학을 공부하면서부터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동국대학에서 나오는 東國詩集 제1집에서 <식모> <토굴>을 발표하면서 그의 시재를 많은 사람들한테서 인정받았다. 그리하여 6.25 발발전 그의 두작품이 당시 시단의 별이었던 김기림 씨에 의하여 <學生과 文學>에 발표되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것이 실곡문학에 있어서는 첫 출발인 셈이었다.
초기시를 쓸 무렵 한참 시의 샘이 풍성할 때 그의 정신 세계는 메말랐다. 민족의 비극 6.25를 겪고 난 다음 그에게 주워진 생활로 말미암아 詩의 깃발과는 거리가 멀어져 갔다. 그 대신 외교관 생활에서 남이 격지 못한 체험을 많이 쌓아 생활의 폭을 넓혔던 것이다.
悉谷이 30여 년 관직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결과는 허무뿐이었다. 초창기 같이 출발한 시의 선수들과 거리가 멈을 뼈속 깊이 느꼈다. 늘 동경하던 大學강단에 다시 서면서 詩의 첫사랑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悉谷은 단단히 작심하여 생활의 터전을 서울에 두고 시간만 나면 강원도 훤한 동해 바다가 있는 三陟 맹방 고향마을에서 살았다. 물론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먼저 여생을 거기서 보내고 싶어했고 또 거기에서 못다한 詩를 열심히 썼던 것이다.
悉谷은 비교적 조용한 고향집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옛 일에 푹 잠겼다. 세상에서 살다온 눈으로서는 고향의 자연이 정겹기만 했다. 풀섶으로 기어가는 버러지도 이쁘기만 했다. 이 귀향이 계기가 되어 그의 詩는 회고적이고 낭만적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살아온 그것에서 또 다른 빛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悉谷의 시가 더욱 풍성하게 되어진 것은 고향 三陟의 문학 풍토와도 관계가 있다. 때마침 三陟에는 ≪頭陀文學≫ 동인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작품 발표회에도 참여하고 동인회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이러한 역사에서 이루어진 시를 한데 모아 그의 고희기념으로(1991) 시집 「자화상」을 상재했다. 이 시집 발간의 의미는 대단히 컸다. 말하자면 悉谷詩의 총결산이기도 했다.
이 시집이 나오자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에 감동을 받고 모두 놀랐다. 시집 발간 다음 해 1993년 2월 7일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본고에서는 그의 총시 64편을 중심으로 그의 시세계를 더듬고자 한다.
2.
누구에게나 고향은 아름다운 것이다. 고향은 그 사람에게 있어 원천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무조건 아름다운 것이다. 슬픈 일이든 좋은 일이든 거기에는 추억이 담겨 있어서 훗날에는 다 아름다운 것이다. 더구나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한 사람은 고향은 꿈에도 아름다운 것이다.
悉谷 陳仁鐸 시인의 고향은 강원도 三陟市 近德面 孟芳里, 바다에서 얼마 안 떨어진 농촌 마을이다.
특별히 <고향>을 주제로 한 두편의 詩, 즉 ‘고향’과 ‘겨울의 고향’을 분석해 보더라도 그것을 짙게 느낄 수 있다.
이 두 詩에서 그의 고향의 모습 곧 배경을 알 수 있다.
‘고향’에서 보는 <태백의 지맥 구릉들이/바다를 향해 뻗어/들 마을 나루를 열었네> <실개천 흐르는 언덕사이/효자 열녀각이 자리에 있어> <내 고향 바닷가/나루, 산마루 망부석> 등 대강의 지형을 볼 수 있다.
‘겨울의 고향’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그려 있다. <푸른 바다를 끼고/난류가 몇 백오리를 오가는 건지> <머언 산/백복령은 눈이 덮혀도/따사로운 바람이 구릉의/피부를 스쳐 흐른다>
두 詩에서 크게 돋보이는 것은 <태백산의 지맥 구릉들> <효자 열녀각> <동해 바닷가> <푸른 바다> <백복령> 등의 배경이다.
悉谷 진인탁 시인의 詩心은 여기에서 싹이 텄다. 고향을 배경으로 한 시에는 그 옛날 생활이 잘 담겨져 있다. 그 생활에는 가난과 눈물이 배여 있다.
悉谷 陳仁鐸 詩人의 첫 詩 ‘식모’는 그의 詩精神으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悉谷의 성장 환경이나 생활로 볼 때, 이 소재는 좀 특별한 것이었다. 이것은 넓은 의미로 보면 큰 의미가 있다. 말하자면 한국인의 가난한 생활을 부각한 것이다.
이 詩는 가난한 집 시골아이가 서울에 올라온 모습을 아주 실감있게 그렸다. 그중에도 1연<때 묻은 무명저고리를 입고 짚신 신은 모습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2연<네 머리는 헝크러지고/손도 파라니 종아리도 몹시/야위어 보이누나> 4연<이윽고 언니의 손을 잡고 모랭이 돌아 또 돌아/산마루 끝까지 바래다주면/말없이 너는 돌아다보며 또/돌아다보고>는 식모의 아픈 마음을 잘 드러낸 대목이다. 여기에서도 알수 있듯이 그의 시정신은 인정의 세계를 그린 인도주의 세계였다. 이 고향의 노래에서는 그 옛날 생활 모습이었다. 이러한 생활의 노래가 시집 전체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가령 ‘장터’에서 <오백년 넘는 느티나무> <돌담> <징검다리> <호박엿판> ‘치성’에서 보는 <소반 위 한 사발 정수> <촛불>, ‘사랑’에서 보는 <여인숙 툇마루> <외로운 짚신>, ‘사모’에서 보는 <북> <베틀> <병품> <뒤안의 빈 장독> <날짐승 소리에도 점치는 버릇> <기고> <역마살>, ‘나룻배’에서 보는 <신랑의 조랑말> <연지 찍은 새각시의 가마> <갓쟁이> <판수> <무당> <상주를 따르는 삽살개>, ‘사람과 소’에서 보는 <달구지> <소잔등> <고샅>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실곡 진인탁 시인은 다분히 전통정서를 중시한 서정시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토속적인 생활에 큰 배경이 된 자연은 더 없이 아름다웠다. 그러한 자연은 서경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다분히 생활과 관련이 있었던 자연이다.
이러한 자연시에서는 먼저 배경을 깔아 놓고 거기에다 마음을 담았다.
아주 산골 사람의 생활 ‘화전민’에서 보면<너의집/정지는 넓어/외양간도 넓어/토끼도 노루도 쉬어서 간다//영 넘어/상여가 떠나갈 무렵/목이 메인 두견새의/진한 목소리//사람이 서러우면/산이 서럽고, 짐승이 서러우면/산도 서럽다> 같은 것이 그 좋은 예다.
위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단순히 자연의 서경을 노래하지 않고 거기에 생활을 담았다는 것이 특색이다. 이러한 자연시의 특성을 일러 생전 같은 영문학을 전공했던 동료 李昌培교수도 시집 서문에서 청록파 시인들의 영향 운운한 것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3.
문학은 틀림없이 그 시대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문학도 역사의 한 산물인 것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20세기 초부터 일제 치하에서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왔다. 여기에 어두운 사회와 함께 민족의식이 싹텄던 것이다. 일제 쇠사슬을 벗어난 조국광복 후에도 6.25와 같은 동족상잔을 겪으면서부터 이러한 색깔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
실재로 陳仁鐸 시인은 한참 젊음을 꽃 피울 때 일제말 징병으로 뽑혀 중국대륙 전선에서 군인생활을 한 일이 있다. 그때 일을 눈에 떠올리고 쓴 詩가 일제 잔학성을 고발하는 ‘정신녀’다.
이 詩는 군 위안부로 끌려온 정신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詩에서 <강물에/몸을 던진 그 어느 언니//유곽/가시돋힌 철조망에/밤이 지샌다>는 이 시의 가장 비극적인 장면이다.
또한 詩 ‘’遺傳素에서도 저들의 잔인성을 고발했다. 즉, 사내는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았고 젊은 여성은 정신대로 내몰아 씨를 말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더욱 잔인한 것은 반항자는 생체실험용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시에서 볼 수 있는 큰 특질은 상실감과 더불어 비애의식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식민지 백성의 운명적인 노래였다.
詩 ‘여한’에서는 일제 때 사할린에 징용으로 끌려간 동포들이 해방이 되었어도 끝내 나오지 못하다가 반세기가 되어 죽어서 뼛가루가 되어 그리던 고국에 오게 된 비통함을 노래했다. 詩 ‘여한’에서 절정적 부분이 <뼛가루를/뿌려주는 그의 강/나의 강, 우리의 강//모처럼/사지를 뻗어 누워보는/온돌방, 맥이 풀린다>이다. 이와 같은 슬픔의 고개를 넘어서 다시 민족의 혼을 찾았다. 그래서 그의 詩에서는 자연 역사적인 소재, 전통적인 정서를 중요시했다. 그것이 민족의 얼을 그린 ‘動安居士’ ‘해랑의 초혼’ ‘오작교’ ‘공양왕의 최후’ 등의 작품이다.
특별히 ≪제왕운기≫를 쓴 고려말의 학자 이승휴의 모습을 노래한 <청장년을 바쳐/춘추를 시로 지어/만세에 전한 샘터(2연)>와 <외로운 사명의 숨결/아아, 다시 살아나/그분의 숨결의 뱃전에/부서졌으면(5연)>은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어두웠던 일제생활을 회상하면서 민족혼을 떠올렸다는 것은 값진 작업이다.
4.
시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무기는 표현기술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기술이 좋지 않으면 큰 효과를 나타내지 못한다.
실곡의 시집 《자화상》을 보면 우선 그의 뛰어난 시 기법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우선 뚜렷한 것이 시형태가 대체로 짧다.
요사이 시가 현대의식을 중요시하면서 대체로 알 수 없는 말, 산만한 표현, 이상한 넋두리를 많이 늘어 놓은 데 대하여 실곡은 그것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는 것 같다. 시의 길이가 대체로 짧다. 짧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절제된 언어로 함축적인 표현을 할 때 자연한 현상이다. 詩의 호흡 곧 길이로 따지자면 대체로 短詩型이다. 쓸데없이 짧을 때는 문제가 있지만 시인 나름의 독특한 호흡(기질)으로 짧을 때는 시의 질로 봐 장점도 된다. 그것을 그 詩人의 고도한 표현에서는 그런 결과를 빚는다.
시의 길이를 분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편의상 연(stanza)의 구분으로 대강 알 수 있다.
悉谷 陳仁鐸의 詩에서는 대개 5연과 6연이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의 7연과 8연으로 나타나 있다.
그 다음 표현면에서 그 특색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을 세분해서 언급하면 첫째 시의 기본인 언어선택과 구사력이 뛰어나다는 얘기다. 사물의 모습을 표현하는 그냥 언어(일상어)가 아니라 특별한 의미를 갖는 정서적인 언어를 잘 골라 표현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언어로 아주 매끄럽게 부드럽게 쉽게 표현한 면을 크게 들 수 있다.
가령 그의 시에서 잘 읽히는 시 ‘풀 뿌리의 생리’를 보더라도 그의 뛰어난 언어 선택을 잘 볼 수 있다. 이 詩에서 <국밥 한사발> <쇠주 몇 모금> <청렴> <봉사> <갯가> <마을> -등도 흔한 말 같으면서도 가려진 말이다. 특히 3연 <원자로가/선다는 어느 갯가/폐선처럼 마을은 바래져 간다>에서 원자로가 선다는 소문 때문에 마을의 시듦은 <폐선>에 비유한 것도 독특하다. 여기에서 보는 독특한 언어는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의 본질을 잘 드러낸 말이기 때문에 빛난다.
둘째 그 표현면에서 고도한 기술을 발휘하는 형상화가 뛰어났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변용의 방법이다. 있는 것보다 꾸밈으로 훨씬 쉽게 가깝게 보이는 것이다. 소위 이것이 詩의 중요한 표현법인 비유와 상징법인 것이다. 이러한 형상화 작업에서 시의 생명인 이미지가 잘 드러나는 것이다.
이 형상화 작업에서 두드러진 것은 컨시트(conceit) 알레고리(Allegory)아이러니(irony) 등도 재미있게 활용했다.
벼락아 나만 때려라
내 우산쇠 꼭지만 가려 때려라.
난리에 집을 비우고
난민이 먹으라는 김치단지에
오줌과 똥을 갈기고,
사촌이 밭을 사면
독사의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원색의 질투가
이글거리는 나
― 「내 피」에서
이 시에서의 컨시트 곧 진기한 착상을 볼 수 있다. 잘못된 피로 말미암아 저지른 죄과에 대하여 <벼락아 나만 때려라>고 하면서 유독히 <내 우산쇠 꼭지만 가려 때려라>는 것도 아주 아이러니칼하다. 또 2연에서 <난민이 먹으라는 김치단지에/오줌과 똥을 갈기고>는 기이한 행위임엔 틀림없다. 3연에서 <사촌이 밭을 사면/독사의 혓바닥을 날름거리고>는 알레고기를 이용한 표현이다.
윗 시 이외에도 좋은 표현의 본보기를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①「앙숙이면/뼛가루를 뿌려야 속이 후련한/시궁창보다 똥간보다 지저분한 개파리 쇠파리 같은/내가 바로 거기 있었다 ‘자화상’에서」
②「고샅의/쇠똥과 개똥으로/이루운 땅 ‘체질’에서」
③「그리움이 도지면/맺혀가는 응혈//여인숙 툇마루에/외로운 짚신 ‘사랑’에서」
④「내 배꼽에/탄가루가 끼인 것은/아내만 안다 ‘아내의 비밀’에서」
⑤「숯처럼/타버린 가슴/다시 불지르지 말게 ‘굴뚝새’에서」- 같은 표현은 참 재미있으면서 나타내고자 하는 생각을 기발한 비법으로 잘 나타내었다.
5.
위의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실곡 진인탁 시인은 확실히 큰 詩人이다. 그가 비록 詩를 한참 창작할 때 詩心을 잠시 접어두고 공직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가 퇴직 후(1974) 대학 강단에 서면서 18년간 열심히 시를 썼다 그리하여 생애 딱 한권 시집 《자화상》을 출간했다. 그의 詩의 질로 볼 때 일찍 시단에 등단하여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시를 써온 보통 시인보다 훨씬 격이 높다.
그는 확실히 그 나름의 확고한 시법을 갖고 있었다. 시어에 대한 특별한 관심 그것을 구사하는 솜씨, 표현의 묘미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시정신에 있어서도 남다른 면을 갖고 있었다. 그는 크게 보면 낭만주의 경향의 시를 썼다.
첫째로 그의 성장 환경으로 봐 향토적 정서와 자연미를 노래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활을 아름답게 하는 자연이었다.
둘째로, 역사적인 상황에서 민족의 비극을 떠올려 가난한 생활을 노래했다.
셋째로, 다시 현실 생활에서 잃어버린 정신(민족혼)을 찾으려고 했다.
이 몇 가지 특징으로도 悉谷 陳仁鐸 시인은 우리 고향이 낳은 큰 詩人이다.
1-2. 세부 약력
ㆍ1923.12.13. 江原道 三陟郡 近德面 上孟芳里 89번지에서 驪陽 陳氏 在業과 新安 朱氏 阿其의 四男二女中 長男으로 출생 ㆍ1930~1936. 강원도 삼척군 近德尋常小學校 입학. 34년 건강관계로 1년 휴학ㆍ1937~1941. 上春하여 春川公立中學校 5年制 졸업 ㆍ1941~1942. 父母님의 권고로 上級校의 진학을 포기하고 강원도 삼척군 湖山초등학교 교사로 근무. 父母님과 80里 內外에 거주하였으며, 42년 4월 徵兵 제1기로 中國大陸 戰線部隊에 입영 ㆍ1945. 8. 15.~1946. 5. 中國에서 해방을 맞이하였으며, 46년 5월 中國으로부터 生還. 1947. 6. 東國大學 文科(英文科)입학. 1948. <食母>, <土窟>을 東國詩集 第1集에 발표 ㆍ1948. 12. 沈相德과 結婚(1949년 6월 長男 泳孝 출생 79년 4월 李銀姬와 결혼) ㆍ1949. 5. 文學誌 ≪學生과 文學≫에 金起林 선생으로부터 <식모>와 <토굴>을 추천과 함께 시평받음 ㆍ1950. 5. 6.25 동난으로 서울로부터 남부여대하여 고향으로 피난 ㆍ1952. 11.~1953. 11. 江原道 北坪高等學校 영어교사로 부임. 근무 중 북평고등학교 校歌를 지음. 51년 12월 삼척군 북평읍 송정리(現 東海市 松亭洞)에서 次男 泳學 출생(80年 5月 金載姬와 결혼) ㆍ1953. 10. 外務部와 國務院 事務局 관할 外務部 入部 試驗 합격~1974년 1월까지 對內근무 또는 儀典局, 情報文化局 근무를 거치고, 對外근무로는 駐日, 駐華, 駐比, 駐越南, 駐라오스王國 大使館을 마지막으로 외무부를 물러나고 1974년 3월부터 大學 강단에 섬 ㆍ1956. 1. 31. 龍山區 厚岩洞에서 長女 美仙출생(81년 3월 閔丙出과 결혼) ㆍ1961~1963. 대만근무 타이페이에서 62년 5월 31일 次女 惠仙과 三南 泳奎 出生(惠仙은 88년 4월 鄭哲永과 결혼, 泳奎는 89년 5월 金秀姸과 결혼)ㆍ1985. 8. 東海市 文化院에 崔寅熙詩碑建立委員會를 설립, 1989. 5 江原道立公園 武陵溪谷內에 崔寅熙 詩人의 詩碑除幕. 1980년 初부터 頭陀文學會 同人으로 활동 (≪頭陀文學≫ 12집, <향토시인과 최인희 시비> 글 게재) ㆍ1989~1991. 1989년 12월 동국대학교 강단을 떠났으며, 故鄕에 돌아가 三陟産業大學 강단에 서게 되었으나 1991년 8월 신병 관계로 사임
ㆍ三陟鄕土文化硏究會의 제2대 會長을 맡았으며, 頭陀文學會 고문으로 재직. 鄕土史料集 1991년 11월『悉直集』 간행하고, 1993년 2월 7일 영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