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육체의 구원
사람은 말끝마다 ‘육신이기 때문에...’라는 말이 나온다. 안 되는 데 가면 ‘육신이기 때문에...’라는 말이 나온다. 그래도 사람인데... 그래도 육신인데... 또 그래도 목구멍인데... 항상 마지막에 가면 ‘육신인데...’가 나온다. 하나님 뜻을 행하려고 하면 언제든지 육신이 방해가 된다는 말이다. 항상 무엇이 장애물이 하나 있는데, 이 장애물만 없으면 될 것 같은데, 아무라도 될 것 같은데, 이 장애물이 하나 있어 안 되는 것 같다. 그래서 항상 ‘그래도 육신인데...’가 나오게 된다. 중들도 육신을 벗어버리려고 참선을 한다. 해탈한다는 것은 결국 육신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육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것만 아니면, 사람이 마음뿐이라면 생각뿐이라면 영뿐이라면 아무런 장애가 없어 정말로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육신이 딱 가로놓여 장애물이 되어 있어서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는 것 같다는 뜻이다. 그래서 항상 맨 마지막에 가면 ‘육신이기 때문에...’라고 말한다. 죄를 짓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육신인데 어떻게 죄를 짓지 않겠는가? 욕심을 갖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육신인데 어떻게 욕심을 갖지 않겠는가? 명예를 갖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육신인데 어떻게 명예욕을 갖지 않겠는가? 모든 것이 마지막에 가면 ‘육신인데...’, ‘그래도 인간인데...’라는 그 말이 자꾸 나오게 된다. 그래서 그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육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떤 이상한 짐을 느끼고 있다. 더 거룩하게 되려고 하면 더 깨끗하게 되려고 하면 더 완전하게 되려고 하면 할수록 뭔가 항상 장애물이 있어서 이래서 안 되는구나, 그래도 이 정도는 봐주어야지... 하는 늘 그런 생각이 있다. 육신인데 하나님도 이 정도는 봐주어야 되지 않겠는가, 이 정도는 인정해 주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사람은 하고 있다.
육신을 이기는 방법을 사람들은 찾고 있었다. 모든 성인군자들은 전부다 육신을 어떻게 하면 이기나 하는 것이었다. 육신을 많이 이기는 사람을 보고는 좋은 사람이라고 하게 되고, 육신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는 저질이라고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육신을 이기지 못하면 본능적이다. 남을 생각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육신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행동은 육신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을 때 얼마만큼 억제하느냐, 얼마만큼 억제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은 성인도 될 수 있고 군자도 될 수 있고 선생도 될 수 있다. 육신을 전적으로 억제하지 못한 사람은 야만인이다. 그런 사람을 우리가 볼 때는 저질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자기 생각나는 대로 해버리니까 남이야 죽든지 살든지, 남이야 기분이 좋든지 나쁘든지 상관이 없이 자기 생각대로 해버리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도 생각할 때 내가 이래서는 안 되겠는데 하는 생각이 날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 하면 육신을 억제해 볼까? 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해볼까? 어떻게 하면 개선시켜 볼까?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급이 있는데 그 계급이 군자가 있고, 성인이 있고, 성인 위를 올라가면 신이라고 사람들은 생각을 해왔다.
어떻게 육신을 극복할 것인가? 결국 불교에서도 가장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육신을 극복한 사람을 보고 가장 높은 경지에 있다고 말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쭈그리고 앉아서 다른 사람은 5일 동안 앉아있는데 열흘을 앉아 있었다거나 다른 사람은 5일을 굶었는데 이 사람은 열흘을 굶었다거나 다른 사람은 물을 먹고 살았는데 이 사람은 물도 안 먹고 살았다거나 이런 것이 모두 도력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되었다. 사람이 자기의 육신을 극복하면 그만큼 위대하고, 육신을 극복하지 아니하면 그만큼 저질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이 항상 우리에게 나쁜 생각을 주어왔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 육신의 생각을 하지 않고 영의 생각만을 다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생각이 항상 가로막는다. 언제든지 와서 항상 차단을 시키기 때문에 육신의 생각대로 사람은 움직이게끔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으로 살면 사람은 평안이 없다는 것도 알고, 남에게 칭찬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더군다나 하나님을 섬기고자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못한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의 생각으로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좌우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좀 더 좋고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쁘냐고 생각하는 동안에 육신이 방해가 되었다.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육신이 방해가 된다. 자기가 좀 더 옳은 일을 하려고 하는데 육신이 방해가 되는 것이다. 좀 더 의로워지려고 하는데 육신이 방해가 된다. 좀 더 깨끗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데 육신이 방해가 된다. 이런 것에서 육신이 방해가 되어왔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이 사람들은 그런 일 때문에 육신이 방해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데 육신이 방해가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되겠는데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되겠는데 그를 온전히 순종해야 되겠는데 그를 온전히 따라야 되겠는데 그런데 항상 육신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육신이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만일 이 육신만 없다면 날아가는 새처럼 자유로워져서 하나님이 언제든지 오라고 하면 ‘예’하고 갈 수 있고, 서라고 하면 ‘예’하고 설 수 있는데 이 육신 때문에 오라할 때 갈 수도 없고 서라고 할 때 설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때 항상 말하기를 ‘육신이기 때문에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말한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이 있다.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고 싶었는데, 잠이 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피땀 흘려 기도하고 있는데 자고 있는 것이다. “일어나라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깨워놓으면 조금 있다가 또 졸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육신이 피곤해서 안 되겠다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육신이 뭔가 항상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 육신을 이기는 능력은 바로 십자가다. 이 육신의 능력을 이기는 것은 십자가이다. 또 사람들은 육신만 아니라면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내가 육신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육신이 바로 죄 덩어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육신이 바로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 육신을 학대하는 사람도 생기게 되었다. 고행주의자들은 대부분 육신을 학대하는 사람들이다. 불교에 가도 고행이 있고 기독교에도 고행이 있다. 중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 몸을 복종케 할까하여 참선을 하다가 방해가 되면 송곳으로 자기 몸을 찌르는 사람도 있고 또 머리맡에 목침을 달아놓고 졸리면 머리를 박아서 자기 몸을 괴롭게도 한다. 몸 자체가 귀찮은 것이니까 불편한 것이니까 어떻게든 때려 부셔서 말을 잘 듣게 만들려고 노력을 해왔다. 기독교에서도 초창기 수도원에서는 뭘 하는 것인가? 다른 것이 아니라 육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명상의 생활을 하고 기도의 생활을 하는데 이 육신이 방해가 되니까 육신을 학대하여 괴롭게 하여 육신이 자기의 머리를 들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것이다. 풀이 돋아나면 깎고 돋아나면 깎는 것처럼 하여간 육신을 뭐든지 깎아버려 자라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 수도원 생활이다. 이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은 고행 속에서 일생을 보내 왔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기둥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면 그 몸이 견디어 내겠는가? 오금이 다 썩고 구더기가 나온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성자라고 하여 순례자들이 와서 경배를 하고 갔다.
육신을 이긴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육신이 항상 죄고, 육신으로 죄를 생각하게 되고, 육신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게 되고, 육신 때문에 방해가 되니까 이 육신을 학대하자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에 비해서 반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육신의 생각대로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쾌락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자기가 생각난 대로 하자. 자기 마음이 좋은 대로 하자.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하다보니까 육신이 좋은 대로 하더라는 것이다. 육신이 하나님이 만들어준 것이니까 육신이 좋은 대로 해야지 하나님이 만들어준 것을 왜 억제하느냐고 하여 육신대로 사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초대교회에도 있었고, 물론 불교에 가도 있다. 어디를 가도 다 마찬가지로 다 있다. 불교에 가도 한편에서는 자기 육신을 어떻게 하면 최대한도 축소시켜서 학대하여 그것이 싹이 나지 못하도록 위축을 시킬까하는 파가 하나 있고, 한쪽에서는 육신은 육신대로 즐기자고 하는 파도 있다. 육신의 생각대로 하자는 파가 있다. 기독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한쪽에서는 완전히 수도원적인 사람이 있었던 반면, 한쪽에서는 완전히 쾌락주의적인 사람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육신을 주셨으니까 육신의 생각대로 하자고 한 사람도 있었다.
어떻든지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육신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육신이 하나님께 나아가게끔 하는 방법은 육신이 하나님께 쓰여지게 하는 방법은 십자가밖에 없다. 이 육신이 필요가 없으면 무엇하러 하나님이 만들어놓았겠는가? 만들어놓기는 만들어놓았는데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면 육신이 방해물이 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만들어놓았는데 왜 방해물이 되었을까? 사탄이 살 속에 들어와서 그렇게 되었는가? 사탄이 육신의 생명 속에 들어와서 그렇게 되었는가? 사람은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은 육신은 아예 죄를 타고 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육신은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육신으로 있을 동안에는 천국을 볼 수 없고, 육신이 떠나면 육신이 죽으면 천당에 가게 될 것이고,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한 세계에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좌우간 이 육신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쓸모없는 육신을 쓸데없는 육신을 만든 것이 아니다. 사람을 만들 때 영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산 혼으로 만들었는데, 그 산 혼이라는 것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영을 말한다. 육신을 가지고 있는 영이다. 하나님의 영은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는 영이라면 사람의 혼이라는 것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영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육신을 가지고 있는 혼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영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영이라면 하나님이 또 만드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에게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혼이 필요하여 사람을 만들었다.
분명히 육신은 필요해서 만들었는데 안 되는 것이다. 칼을 만들 때는 분명히 쓰려고 만들었는데 들고만 있으면 자꾸 손이 상한다. 왜 이렇게 예민하게 만들어놓았을까 하여 시멘트에 문질러서 손이 베이지 않도록 손이 상하지 않도록 만들어놓으니까 쓸모가 없고, 또 예민하게 갈아놓고 보고 자꾸 상처가 난다. 이래도 못쓰겠고 저래도 못쓰겠다는 것이다. 결국 그 칼은 용도가 딱 맞아서 쓸 수 있는 사람이 쓰게 되면 좋은 칼이 되었겠지만 쓸 수 없는 사람이 칼을 가지고 있으니까 손이 베이거나 무디게 만들면 쓸모가 없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신도 학대해놓으면 쓸모가 없어져버리고, 육신을 키워놓으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방해물이 되는 것이다. 죄를 짓는 도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래도 못쓰고 저래도 못쓰게 되어버렸다.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한 이유는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다. 사람이 만일 영만 있다면 하나님을 원망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하나도 거리낄 것이 없다.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갈 것이므로 무엇 때문에 원망하겠는가? 그런데 오라고 하는데 못가는 것이 있다. 거기에 있으라고 하는데 못 있는 것이 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다. 이 모두 육신 때문이다.
이 육신이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다. 십자가 앞에 가면 우리 육신이 쓸모가 있게 된다. 그때 우리 육신은 구원을 받게 된다. 십자가 앞에 가지 않으면 우리 육신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이것은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것이다. 학대시켜 놓아도 안 되는 것이고, 풀어놓아도 안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의 모든 생각도 마찬가지인데, 이 육신을 한껏 풀어놓는 시대가 있는가 하면 육신을 완전히 묶어놓은 시대도 있었다. 온전히 정신으로만 살자고 생각하는 시대가 있었고, 육신으로만 살자고 생각하는 시대가 있었다. 이것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가 하는데, 정신세계로 갔다가 육신세계로 갔다가 방황하는 것이다. 쓸모가 없어서 그렇다.
결국 육신은 아주 소중한 것이지만 십자가를 통하지 아니하면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다. 칼은 아주 좋은 것이지만 용도에 사용하지 아니하면 해로운 것처럼 이 육신도 십자가를 통하면 아주 유용한 것이지만 십자가를 통하지 아니하면 죄 짓는 도구가 되어버리고 만다. 가장 좋은 기계일수록 가장 예민한 기계일수록 꼭 그 용도에 사용하지 아니하면 나쁜 결과를 가져와 버리고 만다. 우리가 지금 밥을 해먹기 위해 석유를 갖고 불을 떼고 있다. 석유로 불을 떼니까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가? 옛날 같으면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와야 되고 잘라서 장작불을 피워야 되고 재를 긁어내야 되는데, 석유를 떼니까 호스만 하나 달아놓으니까 된다. 그렇지만 석유는 잘못하면 화재의 위험이 나무보다 훨씬 많다. 한번 잘못하여 불이 나면 집 한 채가 금방 날아가 버린다. 쓸 수 있는 자리에 쓰면 좋은 것이지만 쓸 수 없는 자리에 쓰면 불행한 것이 되어버린다. 휘발유는 더욱 그렇다. 석유에 비해서 휘발유는 발화점이 더욱 높기 때문에 위험성이 더 높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이 육신은 아주 위험한 것인 동시에 아주 또 유용한 것이기도 하다. 육신이 만일 잘 사용되어진다면 아주 좋은 것이지만 잘못 사용되어지면 또 아주 위험한 것이 육신이다. 육신이 십자가를 통하지 않으면 이것은 쓸모가 없어지게끔 된다.
십자가는 우리 인생을 구원하는데 있어서나 우리 육신을 구원하는데 있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건이 된다. 중의 육신은 필요한 육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학대받은 육신이기 때문이다. 수도사의 육신은 학대받은 육신이기 때문에 필요하지 않다. 생각만 있는 것뿐이지 육신은 필요하지 않다. 오금이 썩어버렸는데 어디에 필요하겠는가? 기둥뿌리에 쭈그리고 올라앉아서 수도를 했으면 어디에 써먹겠는가?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은 그렇게 무모하게 썩어버린 육신도 아니고, 하나님에게 값지게 쓰여진 육신이다. 십자가에 내놓으면 우리 육신은 값지게 쓰여지게 된다. 자기가 붙들고 있으면 무용지물이 될 뿐만 아니라 죄를 범하는 도구가 되고 만다. 십자가를 통하면 육신은 하나님에게 쓰여질 수 있는 제물이 될 수 있다. 양은 다 똑같은 양이지만 제단 앞에 드려지면 지성소에 가는 것이고, 제단 앞에 드려지지 않으면 지성소에 가지 않고 푸줏간에 가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도 제단에 드려지면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고, 제단에 드려지지 않으면 푸줏간에 가게 된다. 우리 육신은 그렇게 모든 면에서는 전적으로 가치가 없고, 또 전적으로 가치가 있다. 육신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육신 때문에 망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이 있었기 때문에 육신이 없으면 절대로 안 되는 분이었다. 그렇지만 아담은 육신 때문에 망한 사람이다. 이 육신으로 인해서 어떤 사람은 망하고, 어떤 사람은 육신으로 인해서 흥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이르러서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이르러서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었다. 왜 그런 결과가 왔겠는가? 육신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음이 어디 가서 가려질 일은 절대로 없는 것이다. 육신 때문에 가려진다. 다른 이유는 절대로 없다. 무슨 이유가 있고 무슨 이유가 있고 다 있지만 알고 보면 육신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 그것은 자기의 생각이다. 육신의 생각! 그것은 자기의 고집이다. 육신의 생각! 그것은 자기를 편하게 하려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방해가 되어 복음이 방해가 되지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 방해될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인간의 육신을 다 멸해버리면 하나님의 복음은 완전히 승리할 것 같다. 그런데 육신을 없애버리면 이 복음이 나갈 자리가 없게끔 된다.
이 육신을 멸한다는 뜻은 십자가를 통과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멸한다는 말은 우리 육신을 전부 묘지로 보낸다는 말이 아니고, 육신을 십자가를 통과하게 한다는 말이다. 죽음을 통하게 만들어서 산 것이 되게 한다는 뜻이다.
니고데모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예수님 앞에 왔을 때 “선한 선생님이여 어떻게 해야 내가 천국을 보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평화를 알겠습니까?”라는 이야기를 물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말하기를 “사람이 늙으면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또 나오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사람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다. 니고데모에게 있어서 영과 육이 분리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영과 육이 분리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그것을 갈라내겠는가? 그래서 그는 암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 되어서 그것도 모르느냐? 바람이 임의로 와서 임의로 가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아주 애매한 대답이 되었을 것이다. 니고데모가 그렇게 물었을 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인간 안에서 영혼과 육신을 분리할 수가 없다. 생각으로는 분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절대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영으로 난다는 것은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육신은 완전히 잊어버리는가? 아니면 죽어버리는가? 아니면 고행을 하여 난다는 말인가? 이렇게 그 사람은 듣게 될 것이다.
육신을 멸한다는 말은 십자가를 통한다는 뜻이다. 성령의 사람은 누구인가?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을 성령의 사람이라고 한다. 영적인 사람이라거나 신령한 사람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기도를 모두 많이 했다거나 신비한 것을 본다거나 예언을 한다거나 병 고치는 능력이 있다거나 남이 모르는 어떤 신비한 비밀을 안다는 사람을 보고 신령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에 있는 이 신령한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지나온 사람을 신령한 사람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지나오면 그 육신이 십자가를 통과해 온 사람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육신을 학대했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육신이 십자가를 통하여 왔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이 된 것이다. 만일 영이 우리 온 몸을 지배한다면 아무런 하자가 없을 것이다. 영이 온전히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인데 그것이 나를 완전히 다 사로잡아 지배를 해준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영의 생각이 있는데 육신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령한 사람이란 누구인가? 그 육신이 십자가를 지나왔기 때문에 영의 생각과 일치한다. 그 육신만이 쓸모가 있는 육신이 되는 것이다.
이 육신은 우리 영에게 복종하는 육신이라야 필요한 육신이 되는데, 복종을 어떻게 시키겠느냐는 것이다. 무슨 방법으로도 복종을 시킬 방법이 없다. 중들이 하는 것이 바로 자기들이 영으로 육신을 복종시키게 하는 것이다. 수도사들이 하는 것도 영으로 육신을 복종시키려고 하는 훈련이다. 이것은 훈련을 통해 되어지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통하지 않으면 되어지지 않는다. 십자가를 통하면 우리는 신령한 사람이 되게 된다.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아볼로 파다. 나는 게바 파라고 하여 여러 가지 파당이 생겼다. 또 어떤 사람은 방언하는 은사가 최고다. 어떤 사람은 예언하는 은사가 최고다. 어떤 사람은 병 고치는 것이 최고다. 이래서 제각기 춘추전국시대처럼 되었다. 그래서 바울이 이 편지를 썼는데, 편지를 쓰면서 영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신령한 사람은 이렇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신령한 사람은 파당도 없다. 신령한 사람은 육신에 속하지 않는다.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자기는 판단을 받지 아니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신령한 사람이 되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바울을 얼른 생각하면 표면적으로 생각하면 그 사람은 아라비아에서 3년 동안 기도했던 사람이니까 우리도 3년 동안 기도하면 신령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로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고, 여러 가지가 생각될 수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주장한 사람이다. 자기 자신이 신령한 사람이 된 것은 십자가를 지나서 신령한 사람이 된 것이다. 자기가 무슨 기도를 했기 때문에 신령한 사람이 된 것도 아니고, 어떤 신적으로 했기 때문에 신령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만났기 때문에 신령한 사람이 되었다.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판단하게 될 때 우리는 판단 받을 때가 있고 판단 받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가 판단 받을 사람이면 남이 나를 판단하면 내 자신이 판단이 된다. 그런데 내가 만일 판단 받지 않을 사람이 되면 남이 나를 판단해도 판단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철면피가 되어 판단이 안 온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판단 받을 일이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은 자기의 생각으로 나를 판단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이 없다. 그러면 판단 받을 일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고린도전서에 있는 말은 자기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나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남은 나를 판단하는데 나는 판단을 받지 않는 것인가?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수준으로 나를 판단해도 나는 그것이 없으면 판단이 되지 않는다. 개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짖는다. 모든 사람을 볼 때마다 본능적으로 짖는다. 그렇지만 소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본능적으로 짖는 것이 아니다. 소에게 가서 짖는 것은 나쁜 것이고 짖는 것은 사나운 것이고 짖는 것은 듣기 싫은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하루 종일 판단한다고 하자. 소는 전혀 판단 받지 않는다. 소는 전혀 짖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신령한 사람은 남에게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그 말이다. 영적인 사람은 판단을 받지 아니한다. 판단은 전부 육신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육신이 십자가를 지나고 나면 판단 받을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육신이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뜻이다. 이 육신은 학대하여 버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높이 매달아두고 존경할 것도 아니고, 육신은 하나님께 쓰여져야만 값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께 쓰여지기 위해서는 꼭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쓰여지게 된다. 우리는 채소도 먹고 고기도 먹고 쌀도 먹는다. 그것을 요리를 하여 후라이팬을 지나고 밥솥을 지나고 국솥을 지나고 오면 먹기가 좋다. 그렇지만 지나고 있지 않은 것을 먹으면 먹기 어렵다. 이빨이 아프고 뱃속이 아프고 아주 어렵게 된다. 그 뭔가를 한번 통과하고 나면 부들부들해지는데 이것을 통과하지 않으면 뻣뻣하여 먹기가 어렵다.
십자가를 통과한 육신은 아주 부드러운 육신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는 육신이 되기 때문에 그때 육신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육신이 참 귀한 것이구나. 하나님이 꼭 이 육신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구나. 이래서 하나님이 육신을 만들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그렇지 아니하면 육신을 무엇하러 만들어놓았을까? 사람을 영으로만 만들어놓았으면 얼마나 하나님을 잘 찬양하고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잘 듣겠는가? 그런데 왜 육신으로 만들어놓아서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못 듣게 하는가로 생각했는데, 십자가를 지나고 보니까 그 육신이 너무너무 귀중하더라는 것이다.
우리의 쓸모없는 육신이 어디에서 구원을 받겠는가? 그것은 십자가를 지나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다. 욥의 육신은 쓸모없는 육신이었다. 만신창이가 되어서 기왓장으로 자기 육신을 긁고 있는 육신이다. 그러니 그는 얼마나 자기 자신을 원망했는가? 낳은 날을 저주했다. 내가 생일이 없으면 좋았을 텐데... 돌잔치를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백일잔치를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어미의 태중에 있을 때 낙태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냐하면 자기 육신이 너무너무 괴롭고 원망스러운 것이다. 자기 아들들이 다 죽었다. 재산이 다 나갔다. 자기 몸이 병이 들었다. 자기 아내가 자기를 원망한다. 즉 육신에 속한 모든 것이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차라리 자기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을... 내 육신이라는 것이 없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것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차라리 낙태가 되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신 이도 여호와시오 가져가시는 이도 여호와시다. 십자가 앞에 섰을 때 그의 육신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그 육신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그 몸이 변신이 되어 부활의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었다. 새로운 몸으로 변화를 받게 되었다.
새로운 몸이라는 것이 다른 것인가? 하나님에게 못 쓰이던 몸이 하나님에게 쓰이는 몸이 되면 새로운 몸인 것이다. 버려졌던 폐품이 오늘 유용한 것이 되었으면 그것이 변화가 아니겠는가? 학대해야만 하던 육신이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하나님에게 귀히 바쳐지는 제물이 되었으니까 그것이 바로 변화가 아니고 그것이 바로 부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쓸모없는 육신은 십자가를 통해야만 쓸모있는 것이 될 수 있다. 토란대는 뻣뻣하여 절대로 생으로는 못 먹는다. 국을 푹 끓인다거나 보신탕 속에 넣어 푹 끓이면 아주 맛이 좋다. 한 번 끓이고 나면 좋은 것이 된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가 끓고 나면 한번 삶아지면 오랫동안 고아 놓아두면 유용한 것이 되게 된다.
십자가 없이는 육신이 구원받을 수가 없다. 우리 육신이 좋다고 하지도 말고, 우리 육신이 나쁘다고 하지도 말자는 것이다. 이것은 일단 십자가를 지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좋은 것이 되고 만다.
우리 인생이 좋다고도 못하고 나쁘다고도 못한다. 우리 육신이 좋다고도 못하고 나쁘다고도 못한다. 십자가 앞에 간 후에야만 우리 육신이 좋다고 하든지 나쁘다고 하든지 할 것이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을 내 스스로 판단하여 나쁘다고도 못하고, 내 스스로 판단하여 좋다고도 못한다. 이것은 십자가 앞에 가서 그 다음에 하나님께 감사를 하든지 불평불만을 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평이 있는 사람은 자기 인생에 대해 불평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 앞에 가서 그때 불평을 하든지 안 하든지 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음식을 만들 때 이것은 이렇게 먹으라고 정해졌으니까 그것을 써보고 말을 할 일이다. 주사약을 만들어놓을 때는 그 약을 쓴 다음에 효과를 보고 만들어놓았다. 조금 아프더라도 주사를 맞아보고 난 다음에 이 약은 나쁘다고 하거나 좋다고 해야지 맞아보지도 않고 이 약은 좋다고 하거나 나쁘다고 하지 말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만든 자를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을 만드신 이를 알려면 우리 자신이 십자가를 지나야만 우리를 만드신 이를 알게 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드려져서 하나님의 것이구나. 이것은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이 필요해서 만든 것이구나. 우리가 그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우리 육신은 아무 다른 할 말이 없다. 하나님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것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전에는 그렇게 이유가 많았다. 그 육신에는 왜 그렇게 이유가 많았는지? 가자고 하면 왜 그렇게 이유가 많았는지? 서울을 가자고 하면 이래서 못 간다고 하고, 부산을 가자고 하면 저래서 못 간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육신의 생각이었다. 서울도 부산도 가기 싫으면 광주로 가자고 하면 그것은 이래서 못 간다는 것이다. 무엇을 해도 안 된다는 것이 육신이었다. 항상 이것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부정적인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것이 육신이었다.
육신이 모두 십자가를 지나오면 육신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비로소 육신은 유용한 것이 되게끔 된다. 서울 못갈 일도 없고 부산 못갈 일도 없고 광주 못갈 일도 없는 것이다. 아무 다른 이유가 없었는데 그랬다. 소고기를 후라이팬에 볶아 먹든지 곰탕을 해먹든지 자장면을 해먹든지 아무 이유가 없다. 왜 나를 볶아 먹느냐고도 못하고 왜 나를 구워먹느냐고도 하지 않는다. 왜 나를 생회로 먹느냐고 하지도 못한다. 사람이 먹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니까 회를 쳐서 먹거나 볶아 먹거나 구워 먹거나 무엇을 해도 상관이 없다.
우리 육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쓰시기로 작정된 것이면 아무 다른 이유가 없다. 하나님이 쓰시기로 작정된 줄을 우리가 몰랐을 때는 어찌 그렇게 이유가 많은지 모르겠다. 사사건건 이유가 붙은 것이다. 이 이유가 전부다 없어지고 하나님께 쓰여지게 되려면 십자가를 지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남에게 내 자신이 사용되더라도 십자가를 지나지 아니하면 사용되지 못한다. 진실로 사용되지를 못한다. 요즘 나라를 위해서 내 일생을 바치겠다는 사람이 있다. 민족을 위해서 내 목숨을 바치겠다는 사람도 물론 있다. 어떤 사람은 어떤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내 일생을 바치겠다는 사람도 있다. 목숨 바치겠다는 사람이 참 많이 있다. 더군다나 전체주의 국가 같은 곳에서 전체주의 사상을 가진 세계에 가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아주 많다. 간첩이 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나는 김일성에게 바치려는 목숨을 대한민국을 위해서 바치겠다고 쉽게 이야기를 한다. 왜냐하면 거기는 항상 목숨을 바치던 세계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다 그렇다. 독일 히틀러 치하에서도 그랬다.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로 북한에서 나온 사람은 말투를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저것은 전체주의임을 금방 알 수가 있다. 자유주의에서는 내 목숨을 바치겠다는 말이 잘 나오지 않는데, 전체주의는 목숨 바치겠다는 것을 쉽게 생각한다. 자기 자신의 목숨이 거기서 바쳐져야 될 것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와서도 바쳐진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목숨 바친다는 사람이 요즘 많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으로 바쳐지는 것인가? 어떤 사람은 5층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죽은 사람도 있다. 자기 몸에 신나를 뿌리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할복하는 사람도 있다.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을 보면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쳤구나.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구나. 동포를 사랑하기 때문에 저렇게 죽었구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이것은 모두 표면적인 것이다. 진실로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바칠 수가 없다. 민족도 나고 국가도 나고 사회도 나고 이데올로기도 나다. 절대로 남이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다. 자기가 자기를 위해 한 것이다. 명예를 위해 죽는다고 할 때 목숨보다 명예가 중요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지 명예가 만일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다면 죽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국가가 자기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지 국가보다 자기 목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죽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전부다 나인 것이다. 그것이 남인 줄 생각하지만 내가 남을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라고 하면 남을 위한 것 같다. 절대로 남이 아니다. 국가도 나고 민족도 나다. 민족이 누구인가? 나다. 내가 남의 민족을 위해 죽었는가? 내가 남의 국가를 위해 죽었는가? 내가 남의 사회를 위해 죽었는가? 자기 사회를 위해 죽었고 자기 민족을 위해 죽었고 자기 국가를 위해 죽었다. 결국 자기를 위해 죽은 것이지 절대로 남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표면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할 때 저것은 남을 위해 희생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절대로 남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자기 민족이니까 죽었다. 자기 나라니까 죽었다. 자기 사회니까 죽었다. 그것은 결국 자기인 것이다. 자기 민족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국가는 바로 자기 자신이 국가이다. 자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 목숨을 버린 자도 있고, 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 자가 있거니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자는 예수 같은 사람이 없나니. 거기서 친구라는 것이 진정으로 남이다. 그 친구를 위해 내가 목숨을 버릴 때는 십자가를 지나지 아니하면 내 자신을 드릴 수가 없다. 내가 지극히 사소한 의견 하나라도 남에게 질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귀중한 목숨을 남을 위해 바친다는 것인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려면 그러지 말고 남에게 자기의 사소한 의견이라도 죽여야 할 것 아닌가? 자기 의견이 틀리면 죽도록 우기게 될 것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자기 목숨을 바치겠는가? 어떤 사람과 자기의 의견이 다르다면 원수가 질 수도 있고 비뚤어질 수도 있다. 그것을 왜 포기 못하느냐는 것이다. 자기의 주장은 왜 포기하지 못하는가? 자기의 이념은 왜 포기하지 못하는가? 자기의 생각은 왜 포기하지 못하는가? 그런데 어떻게 목숨을 버리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버린 것이다. 절대로 남을 위해 버린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표면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은 참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모두들 자기를 위해 한다고 생각한다.
아담의 후손은 모두 자기밖에 모른다. 남을 알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왜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사는가? 가난한 사람이 자기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가난한 사람으로 대립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 속에서 자기가 발견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내가 비록 부자라고 할지라도 내 자신이 발견되기를 가난한 사람 속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남을 위해서 자기가 일하고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아담의 생각은 자기밖에 모른다. 하나님을 떠났는데 어떻게 남이 있겠는가? 자기를 지으신 자가 없는데 어떻게 남이 있겠는가? 자기 아버지가 없는 사람이, 예를 들어 자기 아버지를 부정한 사람이 세상의 누구를 인정하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하다. 자기를 지으신 자를 부정해서 모든 것을 부정한 것이다. 자기밖에는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육신의 생각이다.
이 육신의 생각이 구원을 받으려면 십자가를 지나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다 남 같지만 남이 아니다. 자선 사업을 하는 사람이 남 같지만 남이 아니다. 선을 행한 사람이 남 같지만 남이 아니다. 선을 행하지 않으면 자기가 야만인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야만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다. 자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남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아담에게는 오직 자기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자기뿐이다. 원래 세상에는 하나님과 내가 있었다. 둘밖에 없었다. 그 중에 하나가 없어졌다. 그러면 뭐가 남았는가? 나만 남은 것이다. 아주 간단한 것이다. 남편과 아내 둘이 살았는데, 남편이 죽었다면 누가 남았는가? 나만 남았다. 아내가 죽었다면 뭐가 남았는가? 나만 남았다. 남이 없는 것이다. 원래는 하나님과 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밖에 없는 것이 아담이다.
그러니까 이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이것으로는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가 없다. 나밖에 없는데 나밖에 모르는데 어떻게 버리겠는가? 육신의 생각은 왜 사망이 되는가? 나밖에 없기 때문에 사망이 된다. 왜 육신의 생각은 평안을 이루지 못하는가? 나밖에 없기 때문에 평안을 이루지 못한다.
아담의 특징은 무엇인가? 자기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은 아담의 결과이다. 아담이라는 나무가 있었다면 거기서 열려진 열매가 가인과 아벨이다. 이 두 사람이 각기 자기 제사를 드렸다. 자기밖에는 없다. 둘이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가인은 가인대로 제사를 드리고, 아벨은 아벨대로 제사를 드렸다. 각기 자기 제사를 드렸다. 둘이 한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다. 둘이 한 제사를 드렸다면 싸울 수가 없다. 각기 다른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싸운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모르더라. 그런데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했다. 너는 왜 이것을 먹었느냐고 아담에게 물으니까 당신이 내게 주어서 함께 하게 하신 하와가 먹게 하였으므로 내가 먹었다고 했다. 둘이 아니고 자기밖에 없다는 뜻이다. 당신이 나에게 만들어주어서 같이 살게 한 하와가 나에게 먹게 하였다고 했으므로 자기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와에게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이것을 먹었느냐? 당신이 만든 뱀이 이것을 먹게 하였으므로 먹었다고 말하였다.
전부 결정적인 순간에 가니까 전부 자기 혼자뿐이었다. 제사를 드릴 때 보니까 역시 또 혼자 제사를 드렸다.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곳에 가보니까 이것을 높이 쌓아올려서 높이 오르자, 우리 이름을 세상에 빛내자하고 쌓았는데 왜 그것이 허물어졌겠는가? 높이 높이 쌓았는데 왜 허물어졌겠는가? 그 중의 누구 하나가 꼭 하나만 올라가야 되기 때문에 허물어진 것이다. 다 같이 올라가면 허물어질 수가 없다. 그런데 다 같이 올라가면 어떻게 이름이 빛나겠는가?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한다고 해도 우리가 인정할 수 없다. 성경에 보면 그런 사람이 많지만 절대로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다. 할복을 하겠다고 칼을 들고 있어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피를 바치겠다고 해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자원병을 받은 일이 없다. 당신의 나라를 위한 병사를 모집하는데 있어서 자원병이 없다. 전부 하나님이 차출을 해왔다. 하나님이 봐서 끌어갔지 내가 하겠다고 한 사람은 없다. 이상한 일이다. 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자기는 내가 하겠다고 하겠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 일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끄집어 오지를 않는 것이다. 반대로 나는 못한다고 했는데 끄집어 썼다. 모세에게 가니까 나는 이제 나이도 많아서 못하겠습니다. 말도 어둔해서 못하겠습니다. 내가 지금 애굽에 내려가면 누가 나를 알아주겠습니까? 전부 그랬는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다가 이스라엘의 목자를 삼았다.
이것이 모두 무엇 때문인가? 십자가를 지나왔느냐 안 지나왔느냐는 것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은 십자가를 지나왔다, 안 지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리사는 이것이 생것인지 익은 것인지를 알고 있다. 하나님도 생것인지 익은 것인지를 다 알고 있다. 생것은 쓸 수가 없다. 익은 것이라야 쓸 수가 있다.
육신은 십자가를 지나야만 하나님께 바쳐질 수가 있다. 제물이 제단 없이 지성소로 들어갈 수가 있는가? 절대로 들어가지 못한다. 제단을 지나야만 지성소로 들어갈 수가 있다. 지성소 안에 양을 갖다 놓아도 어찌 되겠는가? 음매~하고 울 것이다. 빛도 들어오지 않고 칠흙같이 어두운 곳에 양 한 마리를 갖다 놓으면 아무리 순한 양이라고 하더라도, 양 같이 순하다고 하는데, 소리를 지르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제단으로부터 시작을 해야 지성소로 들어갈 수가 있다. 죽은 양만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조용하지 산 양은 지성소 안에 들어가면 시끄러워서 안 된다. 똥 싸고 시끄럽다. 제단 없이는 제물이 될 수 없다.
십자가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쓰여질 수가 없다. 아무 말도 아니하고 잠잠하시더라. 입을 열지 아니하시더라. 왜냐하면 제단을 지나와서 그렇다. 십자가를 지나왔기 때문에 입을 열지 아니하더라는 것이다. 잠잠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보자기를 씌워놓고 매를 때리면서 네가 선지자냐, 내가 누구인지 알아맞히어 보라고 한다. 선지가 같으면 다 알아맞힐 수 있다는 것이다. 눈을 가려놓고 때리면서 누구인지 알아맞히어 보라고 조롱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입을 열지 아니하시더라. 그것뿐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와서 예수를 조롱했다. 그런데 입을 열지 아니하시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보고 털 깎는 자 앞의 잠잠한 양 같더라고 말하고 있다. 왜 그렇게 잠잠했을까? 십자가를 지나와서 잠잠한 것이다. 십자가를 지나오지 않은 사람은 시끄럽다. 그 사람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바람이 일어난다. 태풍이 분다. 국가도 보면 국가가 저절로 어지러워지는 법이 없다. 어떤 사람이 나와서 움직이면 나라가 시끄러워진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나오지 않은 사람이 나와서 움직이면 시끄러워진다. 십자가를 진 사람이 나오면 조용해진다. 시끄럽던 데도 조용해져버린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육신이 구원을 받은 데서 생긴다. 우리 육신이 구원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가 일어날 수가 없다. 우리 육신이 구원받을 길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다.
육신은 사용하라고 한 것이다. 육신을 의뢰하라고 한 것이 아니다. 육신을 의뢰하지 말라는 말이 나온다. 왜냐하면 육신은 의뢰하라고 나온 것이 아니라 사용하라고 준 것이다. 마이크는 의뢰하라고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라 마이크는 사용하라고 만들어놓았다. 마찬가지로 육신도 사용하라고 만들어놓았지 의뢰하라고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다. 육신을 의지하지 말자는 것이다. 육신을 의뢰하지 않는 것이 신뢰하지 않는 것이 곧 할례당이다. 아브라함은 육신을 신뢰했다. 조금 있으면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아기를 낳을 수 없게 될 것인데 하는 생각은 육신을 의지(의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할례를 받았다. 육신은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육신을 신뢰해서는 안 되는구나.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다고 신뢰해도 안 되고, 시간이 다 되어간다고 신뢰해도 안 되는구나. 육신 때문에 안 된다는 것도 신뢰이다. 나는 마음은 원하는데 육신 때문에 안 된다는 것도 신뢰 때문이다.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곧 할례당이다. 우리는 육신을 핑계하는 것같이 보인다. 핑계라는 말은 육신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육신을 내가 믿기 때문이다. 내가 육신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신은 의지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사용하라고 준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알지만 왜 안 되었던가? 십자가를 지나지 않아서다. 내가 누구의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의 소유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그랬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인줄 알았으면 육신을 신뢰하는 자가 아니고, 육신을 사용하는 자가 되게 될 것이다. 자기 인생을 신뢰하는 자가 아니고, 자기 인생을 사용하는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필요한 자리에 자기 인생을 사용하는 자가 되게 될 것이다.
[ 기 도 ]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었던 그 모든 것이 다 육신으로 말미암은 줄로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고 이 육신이 지나와야 할 길이 있고 통과해야 할 자리가 있어서 주님 우리가 지금까지 쓸모가 없는 육신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우리 앞에 나타내주신 십자가를 통하지 아니하면 역시 아무데도 쓸모가 없고 오히려 해독을 끼칠 뿐이고 문제를 일으킬 뿐이고 생각을 일으킬 뿐이고 싸움을 일으킬 뿐이고 분쟁을 일으킬 뿐입니다. 주님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여 주셔서 당신의 그 영원한 십자가 앞에서 우리 육신이 처리를 받게 하여 주시고 그것을 통과해 나옴으로써 주님 아버지를 위해서 쓸 수 있는 육신이 되게 하여 주시고 제단을 통과함으로써 성소에 들어간 것처럼 우리가 제단을 지나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는 모두 육신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고 육신의 생각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사망이 나오고 고통이 나오는 것은 육신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는 이 육신을 우리 스스로 멸할 수도 없고 우리 스스로 버릴 수도 없습니다. 육신을 떠나서 어디로 물론 갈 수도 없습니다. 주님 당신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어주지 아니하면 우리 육신은 영원히 소생할 수 없고 구원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어주셔서 이 육신을 처리받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통과하게 하여 주셔서 아버지가 요구하는 육신이 되게 하여 주시고 당신이 필요로 하는 육신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