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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 제 102호(2005), 28~36 쪽에 실린 글의 원문.
원활한 말글살이를 위해 바로잡혀야 할 문제들과 그 우선순위에 관하여
리 의재 한세연구회 대표 (한국 생산기술 연구원 수석 박사)
1. 드는 말
어느 특정 전문분야에 한하지 않고 모든 사회생활 부문에서 말과 글을 바르게 사용하여야 하는 까닭이 기본적으로 사회 구성원 간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말글살이[語文生活] 상황을 둘러보면 무수히 많은 문제들이 얽혀 있음을 알 수 있고, 이것은 결국 우리 사회 의사소통의 非效率性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초 문화적 요소가 과학기술 부문에서는 제조업 기술경쟁력, 나아가서는 종국적으로 국가 생산성 및 국제 경쟁력 향상과 직결되는 명제임에도 유념하여야겠다.(참고문헌 1)
매년 한글날 무렵 때면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혼잡한 어문현황에 관해 念慮하는 기획물들이 방영/발표되곤 하지만, 그렇게 1회성으로 바로잡혀질 일이 아니며 평상시 꾸준히 끈기 있게 노력해야 하기에 실질적인 어려움이 존재한다. 그나마 서울방송(SBS) 한국방송 등에서 주말마다 기획물(program) 국어관련 진행시간을 배정한 것, 국립 국어원이 동아일보와 공동으로 누리망(internet)에서 ‘우리말 다듬기’ 대(對) 국민사업을 시작한 것 등 언론매체가 나서고 있는 모습이 기특하다.
그러나 이정도로 충분한 것이 아니며, 효과적 내용을 담아야 할 것이고, 좀더 많은 매체들이 적극 동참하고, 광고문 제재도 강화해야 할 일이다. 최근에 나온 외국영화 제목이 ‘포가튼’이라고 해서 처음엔 어리둥절했으나 'The Forgotten'이 작게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잘못을 지적하면 광고주는 이런 저런 理由와 핑계를 대겠지만, 그런 것이 나가기 전 신문/잡지 등 광고사측에서 거르든지 제동을 걸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도대체 우리 말글살이에 문제가 너무 많아, 이것도 중요하고 동시에 저것도 해야 하니, 도대체 어떻게 어떤 것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갈피잡기 어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에 얽혀 있는 말글살이 문제들을 풀어내어 效率性을 높힐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단박에 얻어질 수 있는 성질이 아니므로, 이를 위해선 먼저 문제가 되는 잡다한 사항들을 몇 가지로 뭉뚱그리고 헤아려보며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각 항목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고, 또 전반적인 영향 정도를 가늠하여 중대성이 높은 것부터 순차적으로 조속히 바로잡도록 국가적 力量을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2. 거시기 문화와 불확실/부정확한 의사전달
우리 사회에서 어떤 대화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잠시 관찰해 보면 이내 답답하기 짝이 없는 ‘거시기’ 문화에 젖어 있음을 감지할 경우가 많다. 지켜보고 있는 제 3자는 도대체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인데도 대화 당사자들은 별 문제가 없는 듯 열심히 얘기하고 있다면, 일견 당사자들끼리는 긴밀하게 의사소통이 잘 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분명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화법들이 다양하게 포괄적으로 구사되고 있을 터인데, 듣는 사람은 실상 이때 ‘알아서 새겨듣고 짐작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추장스럽게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비근한 例로 적절한 표현이 잘 되지 않을 때, 한 쪽에서 ‘그거 말야’하면 상대방은 ‘뭐(말야)..?’하고 되묻고 그러면 ‘거시기...’라고 대꾸하며 별 내용 없이 非效率的으로 진행되거나, 상대방이 기껏 ‘그 때 그거 말야?’ 하며 기억을 더듬고 심중을 추측하며 서로 버거워지고 결국 불확실성에 머무는 것이 보편적 경우란 얘기다.
그러니, 얘기가 잘되고 의사가 전달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일이 나중에 종종 그것은 오해였음으로 밝혀지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바삐 돌아가는 현대생활에서 이러한 대화(?)는 적절한 보조수단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끝내 결실을 얻지 못하거나, 새롭게 시선을 끄는 긴박한 사건의 발생으로 결국 중단되고 마는 경우도 허다하다. 따지고 보면 약간의 감정교류는 있을지언정, 결국 서로 간에 가치 있는 정보를 정확하게 주고받은 것이 없어 비생산적인 것이며 非效率的으로 많은 시간만 浪費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거시기’는 결코 다정다감한 문화의 표본이 아닌 것이며, 개선의 대상인 사회 일면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화자 개인으로 보면 분발하여 소양을 기르고 계발할 항목인 것이며, 사회단위로서는 근본적으로 개선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사안으로 판단된다.
3. 외래어 및 외국어/숙어 濫用문제
가정, 학교, 직장, 상점, 식당, 광고물 등 일상 말글살이에서 사용되는 어휘를 분석해보면 외래어/외국어가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근한 例로 화장품 광고에 나오는 어휘는 외국어 일색으로 한글로는 적혀 있는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숱하며, 신세대 가수들의 신곡 노랫말을 보면 영어문장이 포함된 부분이 많이 눈에 띌 것이다.
뿐 아니라 대화나 연설, 강연 등에서 조차 외국어/외래어가 분별없이 마구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또 간판에 한글로 써 있거나 아예 원어로 버젓이 적히는 경우도 급증하고 있으며, 어린이 간식 포장지와 광고문에서도 우리말 분량이 줄어들고 있다. 한편 국어사전을 한번 훑어보면, 평소 별로 사용하지도 않거나 무슨 뜻인지 모를 외국말들조차 버젓이 외래어로서 등재된 경우가 부지기수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외래어 중에서 일본어 계통의 말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아직도 많이 사용되고 있음은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다. 근세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던 대한제국 시기에 들어온 말로부터 최근에 들어온 말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쓰이고 있는 이런 어휘를 두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말에 없는 서양 전문용어에 해당하는 단어를 일본식 발음으로 변형/단축시켜 된 말들이고, 또 하나는 우리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말 대신 일본말 또는 일본식 용어들이 쓰이고 있는 경우이다. 그러고 보면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그대로 계속 사용하기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이다. 이들은 널리 쓰이고 있다 하더라도 민족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당연히 우선 배제, 다듬어져야 할 대표적인 어휘인 것이다.
다음으로 다듬어 써야할 대상이 영어계 외래어와 기타 외래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들은 사실 외국어 범주로 분류하는 편이 오히려 타당할 정도이다. 이것들도 우리말을 제쳐놓고 쓰이는 경우와 우리말이 아직 없는 전문용어로 대별할 수 있겠다. 어린 학생들에서부터 老人에 이르기 까지 혈액형 조사를 하면 例外없이 ‘A, B, AB, O'라고 하니, 그 정도라도 영어를 모르면 큰일이다. 또 시험이나 오락시간에 끊임없이 보이고 들려오는 ’O, X'라는 말에 대응되는 적절한 우리말이 정말 없던가? 도대체 영어를 모르면 점점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외국어가 단어단위로 쓰이고 있는 분량도 많아 이미 사회적 부담이 큰데도, 숙어 내지 구 심지어는 문장(속담)까지 마구 사용되고 있는 현상은 참으로 걱정스럽다. 정말로 적절한 우리말이 없어서 그런 말들을 그대로 한글로 적어서 소개하고 보급하려 한단 말인가? 아니면 외국어 좀 안다고 잘난 체하고 싶은 미성숙성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 그 발음도 정확치 않아 결국 표기도 가지각색으로 혼란을 부추기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니, 수필이나 소설 또는 신문 기고란(column)의 일부 몰지각한 저자들은 크게 반성해야 할 일이다.
보기: 노블레스 오블리제? ~오블리주? ~오블리쥬? ~오블라이쥐? (noblesse oblige)
⇒ 우리말로 '가진 자의 책무'라 하면 될 일이다.
전문인 특히 과학기술 분야인 경우, 보다 심각한 용어상의 문제들(원소 이름, 화학물질 이름, 광물 이름, 부품 이름, 신기술 이름 등)과 일상 부딪힌다. 한 가지 특기해둘 일: 교과서, 전문서적, 論文, 전문잡지에 수식과 기호 또는 부호가 많이 나타나는데, 여기에 포함/사용되는 글자들은 대개 로마자모(alphabet) 또는 희랍문자이다. 또 그 부호의 이름도 대개 영어식으로 되어있는 실정으로 강의, 토론 등에서 결국 서양어를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서양 학술체계 속에 빠져 있으므로 이것이 마치 당연한 일인 양, 일반적으로 문제제기가 되지 않고 있는 것부터가 실제로 큰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것들의 발음이 우리 국어의 음운과 다르거나 한글자모로 정확히 적어낼 수 없는 경우가 4할 이상이며, 그러다 보니 현행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원음이 왜곡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엉터리 발음하는 잘못된 관행은 결국 우리말을 저급한 언어로 격하시키게 되거나, 정확한 원음을 구사할 경우에는 특별히 신경쓰지 않으면 우리말 음운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의사전달에 지장을 초래하는 진퇴 兩難에 빠지게 된다.
희랍자모가 문장 속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경우로 ‘알파요, 오메가이다’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해보자. 실은 이 경우는 순서를 의미하는 것임으로 우리말로 바로 번역하자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라 하면 부정확한 발음을 유도하는 표기/발음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순서가 아니고, 물성기호로 쓰이거나 수식에 쓰이는 각종 변수 또는 상수의 경우들을 한꺼번에 바꾸기 어렵다면 하나씩이라도 차츰 우리글로 바꾸어 나가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4. 부적절한 어휘 선택/사용 또는 발음 문제
표준어 오용의 경우들은 1차적으로 언론매체와 학교가 주도적으로 고쳐줘야 할 일이다. 보기: 자연 보호(x) ⇒ ~보전
한편 사투리 사용에 관한 문제는 민감한 사항이기는 하나 지방문화의 다양성을 보전하되, 바른 말글살이를 위한 노력이 부단히 뒤따라야 할 것이다.
보기: (호남 사투리) [기매켜뿌러] (불필요한 강조) ⇒ ‘기막혀’로 충분함
(嶺南 사투리) [살파라서] (경음/연음 문제 및 관습적 오용) ⇒ ‘쌀 사서’
또한, 외래어 濫用/오용의 경우들은 국가적인 망신일 뿐이다. 보기: ‘커피는 셀프(서비스)입니다’ ⇒ ‘무료제공(이오니 그냥 알아서 드세요)‘이면 충분할 것임
5. 어문규정과 달리 쓰이고 있는 경우들
가, 맞춤법 관련
많은 세부 문제들이 論難 가능하나 다음에 간단히 보기를 들어 몇 가지 항목만을 지적하겠다.
보기 1 (論難 가능): 그럼으로/그러므로, 있슴/있음, 메밀/모밀/뫼밀, 깨끗이/깨끋히,
털털이/털터리
보기 2 (두음규정?): ‘그런 류/유(類)의’, 남녀/남여, 생로병사/생노병사, 닢/잎, 양/냥/량(兩)
보기 3 (두음규정의 확장 오용): 등용문(x) ⇒ 등룡문
보기 4 (사이 ‘ㅅ/ㅎ‘ 등): 손만두국/손만둣국, 외과/욋과/외꽈;
수캐/숫개/숳개, 암평아리/암ㅎ병아리/암병아리; 안팎/안ㅎ밖/안밖
보기 5 (긴소리 표기): 눈/누; 정/즈, 영/으
보기 6 (띄어쓰기 등): ‘캡스경비구역’ ⇒ ‘특별(CAPS) 경비 구역’
이중 역시 두음규정에 관한 문제가 제일 큰데(참고문헌 2 및 3), 일례로 ‘청량리’가 [청냥니]로 발음되지만 표기는 원음대로 하기로 한 원칙과 달리, 발음에 치중된 표기로 기울어진 점에 그 모순성이 기인한다.
맞춤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면 옳고 그름에 지나치게 예민해지는 폐단이 발생하는데, 그 중 띄어쓰기 문제가 성가시게 따라붙는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모두 다닥다닥 붙여 쓰면 의미전달에 혼동을 일으킬 수가 있고, 그렇다고 단어마다 꼬박 띄어 쓰면 비근한 例로 ‘흰 떡 한 개 당 백 원’의 경우처럼 종이공간의 浪費로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딱딱한 규정으로 묶어놓을 것이 아니라, 혼동이 되지 않는 범위에서 글쓰는 이가 융통성을 발휘하여 붙여 쓸 수 있도록 풀어주면 사실 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정답일게다.
나. 외래어 표기법
외래어 표기법에서 제일 먼저 내세우는 원칙이 '원음에 충실히 적는다'는 것이다. 현대 국어에서 사용되고 있는 외래어로 분류되어 있는 용어의 대부분은 미국에서 들어온 말인데, 그 표기는 미국영어 발음과 달리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모순투성이다.(참고문헌 4)
이 모순은 바로 한편으로 '관행에 따른다‘는 별개의 원칙을 내세웠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論難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근본적 해결책으로 외래어를 안 쓰고 빨리 우리말을 새로 제정하였으면 제일 좋았겠지만, 급격한 외래문물의 도입과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반드시 그럴 수가 없는 경우라면 이제는 원음 가깝게 쓸 수 있는 표기만이라도 우선적으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 표기법은 1986년에 제정된 것이므로 그동안 현실과 괴리된 경우가 많아졌다. 이를 메꾸기 위해 정부측에서 국어원과 한국 신문방송 편집인 협회(줄여서 ‘편협’)가 ‘외래어 심의 공동 위원회’를 만들어 16명 위원이 두 달에 한번씩 정기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그 노력은 가상하나 내용을 들여다 보면 아직 미진한 부분이 많다.
근래에 들어오는 외국어/외래어는 대부분 전산, 정보통신, 생명공학 등으로 자연과학 용어들인데 위원 중에 전공인이 한사람도 없다는 점이고, 기술주기가 당겨진 최근에 두 달에 한번은 너무 굼뜬 감이 있다. 급한 것은 3인으로 구성된 소위원회에서 발 빠르게 처리한다지만, 여기에도 자연과학 전공자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모임이 더 자주 있어야 하고, 가장 중요하기로는 기본철학이 마련되어야 실효를 거둘 수 있다는 점이다. 현 위원회가 한글표기를 어찌할 것인지에만 신경을 쓴다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고, 그 이전에 우리말로 다듬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어 원어민에게서 원음을 배운 학생들이 이 사회의 다수를 이루는 때가 되면 당연히 모두 바르게 바뀌게 되겠지만, 그 이전에라도 수정/개정 작업이 빠르면 빠를수록 그만큼 더욱 빠른 속도로 국력도 신장될 것이다. 이때 외래어임을 알리기 위해 표기형식면에서 빗쓰기[italic 체 사용] 방식을 채용함이 효과적이겠다.
보기: Aspirin 아스피린/애스퍼런, dolomite 돌로마이트/돌러마잍
개화기에 ‘나지오, 남포’하고 말하고 쓰던 것을 아직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그후 점차 ‘라디오, 람프’로 표기가 바뀌었음도 기억할 것이니, 요새는 방송/보도인(announcer)들이 [레이디오우, ㄹ램프]라고 원음으로 발음하고 있는 현실을 헤아려 볼 필요도 있다. 그들의 원고/대본에는 이런 단어들이 영어로 써 있을가, 아니면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한글로 적어놓고는 그렇게 발음하는가... 요즘 초등학교 심지어는 유치원 학생들에게 미국식 영어를 가르치면서, 영어 이외의 모든 시간에는 ‘우리 음운에 맞게 발음을 바꿔야 한다’며 역으로 어거지 발음을 강제하는 모순적 현실은 과연 장래 우리 사회에 어떤 利得/해악을 가져올 것인가? 또 이 경우 두음규정에 위배되는 점은 어째서 묵인하는가? (‘라면, 라볶기’도 ‘나면, 나볶기’로 해야 최소한 규정의 일관성은 유지할 수 있는 것이지 않은가!)
휴대전화를 제조하여 수출분야 효자노릇을 한다면서 엉뚱하게도 ‘핸드폰’이라는 해괴한 이름의 물건으로 둔갑하더니, 급기야 이런 세태에 얄팍한 상술이 올라타서 ‘초이스치과’와 같은 국적 미상의 이름까지 탄생시켰다. 도대체 무슨 뜻으로 ‘초이스’라는 말을 붙였을가? 선택(choice)이라는 영어인지, 아니면 최씨네[Choi's]라는 뜻으로 서양인들 방식대로 부른 이름인지. 어쨌든 한심한 노릇이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우리는 미세 크기의 미생물을 말할 때 ‘비루스’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이제는 ‘바이러스’라는 말/표기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것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대중이 선호하고 있는 새로운 경향의 결과인 것이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말로 ‘미세균’이라 부르기로 하고 언론매체가 적극 협조한다면 그리 될 것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해 매우 안쓰럽다.
뿐 아니라 ‘코피, 판넬, 턴넬’ 등 오기하던 것이 옛 이야기가 되고, ‘비타민, 비닐’ 등도 표기관행이 잘못된 것임을 국민이 깨닫고 있는 수준이다. 그런가 하면 ‘골덴텍스’처럼 사용하던 게 이제는 ‘골든벨’처럼 쓰여, 같은 ‘golden'의 한글표기가 달라지고 있기도 하다. 또한 ‘Arnold’는 더 이상 ‘아놀드’가 아니고 ‘아널드’로, ‘스폰지’는 ‘스펀지’, 이런 식으로 단어별 표기법이 바뀌고 있으나, 아직 외국어 의존/선호 의식에 문제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바람직하기로는 ‘케스천, 치킨, 키친’ 등의 이상한 표기가 버젓이 길거리 간판, 상품 표지 등에 더 이상 나타나서는 안 되겠다.
이제 바야흐로 잘못된 관행은 과감히 버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외국어 음가가 비슷하나 약간 다른 경우는 우리음가로 바꾸어도 큰 문제가 없겠으나, 혼동이나 불편이 있다면 그 폐해는 심각하기 때문이다. ‘Asia'라는 간단한 단어만을 보더라도 한글로 ’아시아‘라 적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으나, 실상 그 발음은 [eiʃə]로서 ’에이쉬어‘가 원음에 가까운 표기가 된다. 즉 ’시‘와 [ʃ]는 다른 발음인 것이며, 나머지 모음들도 다르다. 그러니 차라리 전처럼 ’아세아‘라는 우리말로 적는 것이 오히려 편하고 낫다.
다. 로마자 표기법
우리사회에 외국어휘를 표기하는 규정이 필요하다면, 그 반대로 우리말을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로마자 표기법도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고유명사들이 주 고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관장하고 있는 국어원에서는 규정이 개정된 지 4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성씨의 로마자 표기에 관해서는 별도로 고려 중’이라니 더 이상 아무런 조처가 없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로마자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대답만으로 어물쩡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혼란한 현실 속에서 일반 대중은 계속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딱한 실정에 놓여 있다.
보기: 박 Bag, Bahg, Barg, Bak, Park, Pak; 노(盧) Roh, Ro, Roe, No, Noh, Noe;
이(李) Yi, Lee, Rhee, Ri, Rih, Ry, Li, Lih, Lie, Ly 등
한편 나라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서 일부 우리 문화용어가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인데, 그 표기법이 역시 혼란스러운 면이 있어 유감이다. 일찍이 럭키금성이 ‘LG’가 되고 선경이 ‘SK’로 되더니, 근래 국민은행이 ‘KB’라 하고 한국통신이 ‘KT, KTF’라 하여 論難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에는 서울시 행정도 국제화에 앞선다며 덩달아서 공공연히 아예 ‘Hi, Seoul'이란 영어 자막을 내걸고 홍보에 열중하고 있으며, 대중차(bus) 路線을 정리한다며 ’G 버스, R 버스, Y 버스, B 버스‘라고 한 단계 높은 무면허 외국어 강습(?)을 유도하다 결국 식자들의 지탄과 야유를 받고서야 영어글자를 지우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아직 그대로인 상황이다.
삼성과 현대 등 일부 기업들은 우리말 이름을 지키려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나, 로마자 표기는 역시 우스꽝스런 경우가 많다. ‘Samsung, Hyundai'는 외국인들에게는 [쌤쑹, 휸다이]로 발음되고, 그리 잘못 알려지고 있으니 자기이름도 제대로 못 지키고 있는 형편이다.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2000년에 개정되기 전 이미 국제화 된 말(보기: taekwondo, kimchi)과 근래 알려지기 시작한 말에 따라 다른 표기법(보기: bulgogi, pajeon)이 혼용되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제 새로 알리는 말은 모두 우리식 ‘쉬운 표기법’(보기: BiBimBab, Ddeog, GoTzuJang 등)으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그들에게 독창적 표기형식으로 먼저 로마자를 적어준다면, 외국인들이 그들의 귀에 들린 소리로 제멋대로 적고 기득권 행사를 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미연에 방지될 수 있다는 말이다.
라. 비 표준어 사용문제
수많은 비속어, 속어 및 은어; 최근 새로운 경향의 전산용 외계어 및 문자통신용 도형어; 그리고 비 표준발음 등은 論難 가능한 항목들이다. 그러나 표준어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이러한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교정될, 약간의 力動的 효과는 인정한다 해도 결국 한때 流行에 그칠,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에 속한다.
6. 한글 전용과 뜻글 배척 문제
한글의 우수성을 내세워 민족적 자긍심을 북돋우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 못지않지만, 한편 冷徹히 생각해 보면 자칫 국수주의라는 비난 또는 무식쟁이 불효에 빠질 念慮가 있어 매우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강대국들의 패권주의가 횡행하는 현실 속에서 그들이 우리를 'nationalist'라 지목하면서, 그 내용상으로는 실상 국수주의의 폐해를 들어가며 현상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음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그러면 국내 여론들도 덩달아 ‘민족주의’는 나쁘다느니 부화(附和) 雷動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 선조들의 뜻글이 하한족(夏漢族; 현 중국인의 부분적 조상에 불과하며 우리와도 무관하지는 않으나, 민족 철학적 견지에서 歷史的으로 일단 구분은 필요함)이 처음 만들어 사용하던 글인 양 호도하고, 사실(史實)을 왜곡하며 근거 없는 오류적 주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실질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아류문화의 범주에 예속시키는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지 않는가! 아, 현재는 한반도의 반쪽에 불과한 작은 나라에 불과하지만, 고대부터 (짧은 한 때가 아니라) 600년 전까지만 해도 대륙에서 대단한 크기(적어도 현재의 12배 정도)의 領土에서 세계문화의 중심으로 활동하시던 우리 조상님들, 그들을 조상이 아니라 부정하면서 어찌 다시 뵈올 낯이 있을가...
첫째로 중국대륙에서는 200년 전 비로소 발굴되어 청국 학자들이 갑골문이라며 해독하느라 기를 쓰는데, 실은 그보다 무려 400여 년이나 앞서 같은 형태의 글자들로 기록된 천부경 문장이 고려시대 문집에 버젓이 실려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둘째로 고대 뜻글자에는 고금의 하화계 중국인들이 도저히 해석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점, 셋째로 2500년 이상의 고대 문장은 우리말 순서로 되어 있다는 점, 넷째로 현대 중국정부는 간체자라 하여 더 이상 뜻글자로서가 아니라 단순한 발음부호화 하여 사용하기로 결정한 점, 등을 엮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큰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장래는 물론 소릿글 중심체제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성급히 한글전용을 주장하며 뜻글을 배척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한글전용만을 주장하기에 앞서 그 국어 사랑하는 정력을 오히려 ‘우리말 지어내 쓰기’에 쏟는다면 그나마 한글세계화의 역군이 될 수 있으리라.
7. 바로잡기 위한 우선순위 정하기
위의 2~6절에서 살펴본 문제들 중 2절의 내용은 주로 말하기에서 일어나는 경우이고, 3~4절의 내용은 말글의 兩 領域에 걸친 문제들이며, 5~6절의 내용은 주로 글쓰기에서 일어나는 경우이다. 말이나 글 한쪽 領域에 치중된 경우보다는 당연히 말글 兩 領域에 걸친 경우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이므로, 문제가 되는 사항을 바로잡기 위한 우선순위는 3~4절에 두어야 함은 자명하다 하겠다. 그중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으로 보아 3절에서 언급된 바대로 외래어로 둔갑된 외국어 濫用문제가 범 국가적 교정대상 1순위로 봄이 적절하다고 본다.
그 다음 중요도로 보면 2순위로는 4절에서 論及된 적절한 어휘 선택의 항목이겠으나 이는 실상 개인별 부단한 탐구적 노력만이 바른 해답이 되겠으니 제도적 차원에서는 차치하기로 하고, 오히려 6절의 내용이 우리 사회의 歷史的 정체성 관련하여 민족 철학적 理念재건에 중차대한 사항이므로 조속히 취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2절의 거시기 문화 문제는 4절과 함께 개인적 차원에서 처리되어져야 실효성이 있을 것이라, 남은 5절이 자연히 3순위 항목이 되겠다. 좀더 세분하자면 세계화의 길목에 서있는 우리 사회의 처지로 보아 외래어 표기법이 우선 개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문화 관광부가 주축으로 추진하고 있는 ‘국어 기본법’이나 ‘한글날 국경일 만들기’운동 등은 오히려 나중에 포괄적으로 立法처리하거나 여론을 환기하는 것이라야 순서가 맞을 것이다.
8. 맺는 말
과학기술 부문에서 제조업 기술경쟁력과 궁국적으로는 국가 생산성 및 국제 경쟁력 향상을 위해 사회 구성원 간 의사소통을 원활히 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한 한 가지 방편으로 전문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사회생활 領域에서 바른 말글살이가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얽혀 있는 무수한 많은 문제들을 헤아려보며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각 항목에 대한 해결책을 살펴보고, 또 전반적인 영향 정도를 가늠하여 중대성이 높은 것부터 차례로 순위를 메겼다.
최우선 순위는 단연 외국어 濫用하지 않는 지속적 정신자세 함양이고, 다음으로 뜻글을 장려는 하지 못 하더라도 더 이상 국력 浪費인 배척운동을 삼가하도록 풍토 조성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속히 ‘외래어 표기법‘을 개정하여야겠다. 담당부처인 문화관광부와 국어원은 앞으로 의사소통의 效率性을 높이기 위해 국가적 力量을 집중하고, 기타 어문정책의 순위를 긴급히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1. 리 의재, "과학기술용어 통일은 국가발전의 주춧돌; 외국용어의 우리말 정착 시급", 한국 과학기술 단체 총聯合會, 과학과 기술, 제 35권 (2002)
2. 리 의재, “어문 규정의 일부 모순점과 해결을 위한 긴급제안”, 말과 글 제 95호(여름), 쪽 (2003)
3. 리 의재, “발음 위주 표기 어문규정의 모순”, 말과 글 제 99호, 19~29쪽 (2004)
4. 리 의재, “과학기술용어로서의 금속/재료 용어에 관하여(12)”, 대한금속학회 재료마당, vol. 17, No. 3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