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쓰러진 나무
저 아카시아 나무는
쓰러진 채로 십 년을 견뎠다
몇 번은 쓰러지면서
잡목 숲에 돌아온 나는 이제
쓰러진 나무의 향기와
살아 있는 나무의 향기를 함께 맡는다
쓰러진 아카시아를
제 몸으로 받아낸 떡갈나무,
사람이 사람을
그처럼 오래 껴안을 수 있으랴
잡목 숲이 아름다운 건
두 나무가 기대어 선 각도 때문이다
아카시아에게로 굽어져 간 곡선 때문이다
아카시아의 죽음과
떡갈나무의 삶이 함께 피워낸
저 연초록빛 소름,
십 년 전처럼 내 팔에도 소름이 돋는다
이 시는 10년간 쓰러져서 떡갈나무에 기대어 살았던 아카시아와 떡갈나무의 모습을 보면서 화자가 힘을 얻는다 힘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 아카시아 나무는
쓰러진 채로 십 년을 견뎠다
나는 몇 번은 쓰러지면서 잡목 숲에 돌아왔다. 저기 쓰러진 채로 십 년을 견딘 아카시아 나무가 보인다. 쓰러진 아카시아를 제 몸으로 받아낸 떡갈나무가 보인다. 잡목 숲이 아름답게 보인다. 떡갈나무가 쓰러진 아까시아 나무를 제 몸으로 받아내면서 아카시아에게로 굽어져 간 곡선이 아름답게 보인다. 사람이 사람을 그처럼 오래 껴안을 수 있을까? 나는 이제 쓰러진 나무의 향기와 살아 있는 나무의 향기를 함께 맡는다. 아카시아의 죽음과 떡갈나무의 삶이 함께 피워낸 저 연초록빛 잎들을 보면서 나는 십 년 전처럼 인간의 삶에 대한 희망이 살아난다. 사람은 서로 기대면서 껴안으면서 사는 것이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피면 다음과 같다.
‘연초록빛 잎들’로 볼 때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은 늦봄이다. ‘봄’은 희망의 계절로 긍정적인 이 시의 내용과 어울리는 시간이다.
이 시에서 나오는 나무는 두 종류이다. 쓰러진 아카시아와 이를 ‘제 몸으로 받아낸 떡갈나무이다. 화자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이 두 나무의 각도인데 제목이 ‘쓰러진 나무’라는 것은 쓰러진 나무에 초점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쓰러진 나무’인 ‘아카시아’가 죽은 채로 10년간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10년간 살아 있다가 죽은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점으로 인하여 이 시가 말하는 주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저 아카시아 나무는 / 쓰러진 채로 십 년을 견뎠다’에서 화자가 자신도 ‘몇 번은 쓰러’졌다고 한 2연의 구절을 보면 ‘저 아카시아 나무’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대상으로 보인다. ‘저 아카시아 나무’에서 ‘저’는 화자가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대상을 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쓰러진 채로 십 년을 견뎠다’에서 ‘견뎠다’고 하여 ‘아카시아 나무’가 지금까지 힘들게 생명을 유지했는지 알 수 없다. 5연에서 ‘아카시아의 죽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번은 쓰러지면서 / 잡목 숲에 돌아온 나는 이제 / 쓰러진 나무의 향기와 / 살아 있는 나무의 향기를 함께 맡는다’에서 ‘몇 번은 쓰러지면서’의 주체는 화자이다. 화자가 삶속에서 여러 번 힘든 상황을 겪으며 쓰러졌다 일어난 적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쓰러진 나무의 향기와 / 살아 있는 나무의 향기를 함께 맡는다’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여 쓰러진 사람들과 이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이루어나가는 것임을 알았다는 의미이다.
‘쓰러진 아카시아를 / 제 몸으로 받아낸 떡갈나무, / 사람이 사람을 / 그처럼 오래 껴안을 수 있으랴’는 ‘쓰러진 아카시아를’ 10년 간이나 ‘제 몸으로 받아낸 떡갈나무’를 보면서, ‘떡갈나무’가 ‘아카시아’를 ‘받아낸’ 것을 ‘사람이 사람을’ ‘껴안’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그처럼 오래 껴안을 수 있으랴’는 의문 섞인 감탄을 하는 것이다.
‘잡목 숲이 아름다운 건 / 두 나무가 기대어 선 각도 때문이다 / 아카시아에게로 굽어져 간 곡선 때문이다’는 화자가 ‘잡목 숲’을 아름답게 보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나무가 기대어 선 각도 때문이다 / 아카시아에게로 굽어져 간 곡선 때문이다’고 한다. ‘떡갈나무’가 위로 곧게 뻗은 것이 아니라 ‘에게로 굽어져’ 갔기 때문이다. 그것도 ‘곡선’으로 굽어져 갔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 모습은 사람 인(人)자다. 사람이 사는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는 죽어가는 존재나 살아가는 존재나 일방적이지 않은 것이다. 서로 기대며 안아주며 껴안으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쓰러지는 존재가 서 있는 존재에게 일방적으로 신세를 지거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쓰러지는 존재를 몸으로 받으면서 껴안으며 사는 존재도 도움을 받는 것이다. 진실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어느 하나만 있어도 될 수 없는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아카시아의 죽음과 / 떡갈나무의 삶이 함께 피워낸 / 저 연초록빛 소름, / 십 년 전처럼 내 팔에도 소름이 돋는다’에서 화자는 죽어가는 존재와 살아가는 존재가 서로 껴안은 상태에서 이루어낸 참된 인간의 모습을 본다. ‘함께 피워낸 / 저 연초록빛 소름,’인 연초록빛 잎들을 본다. 그 깨달음과 감동에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화자가 십년 전에는 가졌었으나 어느덧 몇 번은 쓰러지며 잊어버린 삶에 대한 자세를 되찾는 것이다. 쓰러진 자와 쓰러지지 않은 자가 서로 껴안고 사는, 쓰러진 자는 쓰러지지 않은 자의 도움을 받으며 살고, 쓰러지지 않은 자는 쓰러진 자를 껴안고 사는 과정에서 아름다운 인간의 삶을 이루는 삶에 대한 열망과 희망의 연초록빛 잎(소름)이 돋아나는 것이다.
화자는 두 나무가 함께 연초록빛 잎을 피우는 것을 보고 쓰러진 존재도 죽지 않은 이상 인간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여러 번 쓰러지며 살아온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의를 발견하면서 소름이 돋는 감동에 휩싸이는 것이다.
‘아카시아’를 죽은 존재로 보면 삶이라는 것이 죽음을 껴안고 그것을 향하여 가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를 인식하며 살 때 아름다운 삶이 된다고 이 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함께 피워낸’에 중점을 두어 ‘아카시아’가 살아있는 상태이나 일어날 수 없는 상태이므로 죽음이라고 표현했다고 보면 죽어가는 ‘아카시아’도 ‘저 연초록빛 소름’을 피워내는 것이고 ‘떡갈나무’도 ‘저 연초록빛 소름’인 잎들을 피워내는 것이다. 이 잎들이 모여 잡목 숲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있는 그대로 죽은 상태로 보는 것보다는 쓰러져 죽어가는 상태로 보고 아직 죽지 않고 떡갈나무의 도움에 힘입어 연초록의 잎들을 피워내 아름다운 숲을 만드는 존재로 보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20120607목후0211전한성흐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