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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언(序言) - B. 유일한 복음의 사역자(1)
2017년 2월 26일 이현래 목사님 주일 말씀
오늘은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 중에서 <다른 복음은 없다>는 말씀을 하려고 한다. 6절부터 읽겠다.
[갈1:1~10]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5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다른 복음은 없다는 말이다. 왜 이런 말이 나왔는가 하면 유대교에 있던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예수는 믿었지만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아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또 “조상 때부터 지켜오던 예법이 있었는데 그것을 폐지할 수 없다.”는 이런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교회를 어지럽게 해서 혼란스럽게 했던 이런 사건 때문에 갈라디아서를 쓰게 되었다.
죽고 다시 사신 이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다고 선언하고,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에게 영원한 영광을 돌린다.
이것은 그때 당시로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다른 것을 자꾸 섞고 더 좋다고 섞었다. 이렇게 섞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생명은 섞으면 안 되기 때문에 혼란을 주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생겼는데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기독교가 원래 유대 땅에서부터 시작해서 희랍세계(지금의 유럽)로 들어와서 희랍의 문화가 워낙 큰 문화여서 그 문화에 휩싸인 것이 굉장히 많다. 지금 희랍 철학하고 기독교 신학이 양 축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희랍철학이 없이는 기독교 신학을 이해하기 어렵고 기독교 신학이 없이는 희랍철학도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렇게 서로가 관계가 깊어졌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학문적으로는 굉장히 발전하는 기회가 되었지만 생명은 학문의 발전과 전혀 관계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약화시켜버렸다. 그래서 문제가 되어서 지금 철학적인 면에서 기독교가 굉장히 발전했지만 초대교회와 같은 그런 생명력이 없다. 이것은 지식은 자연스럽게 온전한 생명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순수한 복음이 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우리가 순복음 교회라고 말하는데 원래는 순복음이 아니고 충만한 복음이라는 이름인데 한국에 와서 순복음이라고 번역이 되었다. 참복음, 순복음이 뭔가가 중요한데 바울은 단호하게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이렇게 까지 얘기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복음은 최종적인 복음이기 때문에 더 이상 바꾸거나 또 섞거나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사실은 알고 보면 모든 것이 복음이다. 천지를 창조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어떻게 살겠나. 창세기 1장1절부터 다~~~ 복음이다. 그런데 최종적인,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최종적인 결정판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우리는 생각할 때 굉장한 것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반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들이 죽은 사건을 통해서 됐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지만 이것도 있으면 좋겠고 그렇지만 이것도 더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단호하게 “다른 복음은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중요한 말씀이다.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이 뭘 말하는 것인가?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 그 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 이것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산 것밖에는 없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이 많다고 하더라도 죽어버리면 끝난다는 것이 있다. 그런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았다는 이것보다 더 좋은 뉴스도 없고 이 것보다 더 큰 뉴스는 없다. 그러니까 지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았다는 이 복음 말고는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새 언약의 내용으로서 인간성의 한계 위에 내려진 마지막 선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어떤가? 이것은 새 언약의 내용이다. 새 언약은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겠다는 것이다. 밖에 있던 언약을 사람의 생명 속에 넣겠다는 이것이 새 언약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 법을 사람의 생명 속에 넣어놓으면 사람은 저절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게 되고 하나님을 순종하게 되고 섬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없어서 아무리 따르려고 했어도 안 되고 아무리 순종하려고 해도 안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종교적인 고민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해결하는 길이 생명 안에 칩을 넣겠다는 것이다.
우리 머릿속에 항상 즐거운 칩을 넣어두면 항상 즐거울 것이다. 이 사람은 절대로 우울증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 즐거우니까. 아마 그것도 할 수 있지 싶은데 인권문제 때문에 안 하고 있는 것 같다. 수술하면 될 것 같은 데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새 언약의 내용으로서 인간성의 한계 위에 내려진 마지막 선물이다.
새 언약은 인간성의 한계 위에 내려진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것, 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불교에서 참선을 해서 뭐가 되었다든가 이런 것이 있다. 이렇게 무엇이든 어떤 방법으로든지 되는 것 같으면 새 언약이 아니다. 그런데 무엇을 해도 안 되는 것을 지금 이야기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해도 안 되는 것을 말이다. 이러면 불교에서는 말할 것이다. ‘우리는 된다.’ 이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게 되는 게 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개를 훈련시켜서 사람과 똑 같은 행동을 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개는 개지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가면 본성이 도로 나와 버린다.
옛날에 ‘야성의 엘자’인가 하는 영화가 있었다. 사자새끼를 어려서부터 데려다 키워서 사냥을 할 줄도 모르고 해서 사자의 본성이 다 없어진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것이 밖으로 나가서 얼마 동안 있다가 다시 돌아오니까 야성의 본성이 도리어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아마 그런 영화일 것이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런 영화로 기억하는 데 그러니까 사자는 사자지 아무리 교육을 하고 훈련을 해도 그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 생명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이 불가능한 인간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게 하는 새 창조에 속한 유일한 길인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생명선에서 끊어졌기 때문에 그를 따르고 표현하는 영원한 생명이 없고, 사탄과 연결되어 그를 따르고 표현하는 선악을 아는 생명만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고기의 생명으로는 공중을 나를 수 없는 것이다.
새 언약은 생명을 바꾸는 마지막 방법이다.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이 불가능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란 말이다. 물론 이 구원이라는 것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 다르다. 염화시중의 미소냐? 이런 평안이냐? 즐거움이냐? 사람이 생각하는 어떤 것이냐?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면 그것이 구원이냐? 하나님이 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연합을 해서 한 생명이 되는 것, 한 일을 하게 되는 것, 그것을 말한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했다. 이 뜻이 이루어지는 것, 이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평안하게 잘 사느냐, 못 사느냐 이런 문제가 아니다. ‘천당에 가면 이러이러하다.’ 이런 문제가 아니다. 불교에서는 천당에 가면 ‘젖과 꿀이 풍부하게 있고 기화요초가 만발한 그런 어떤 곳’이라고 상상하고 있는 데 이게 그런 곳이 아니란 말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이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저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이런 것을 해결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했을 때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이 구원은 다른 방법으로는 안 된다. 편안하게 하려면 아까 말씀 드린 대로 뇌수술을 해 버리면 된다. 옛날 초창기에는 정신병을 못해서 그런 것들을 해 봤다고 한다. 전두엽인가 어디를 수술해 버리면 정신병이 없어져 버린다고 한다. 그런데 인권 문제가 있어서 못한다. 억지로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다. 그런데 ‘목적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가? 내 편하면 됐지.’ 그런데 내가 아무리 편해도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인생은 허무해져버린다. 우리 편으로 본다면 허무해져 버리고 만다. 쓸모가 없다. 그래서 창세기 3장에서는 그렇게 말한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너는 필경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것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목적으로 했던 것과는 상관이 없게 되었으니까 너는 그냥 네 갈 길로 가라.’ 이런 말뜻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저주다. 저주가 다른 게 아니다. 불구덩이에 들어가기 때문에 저주가 아니고 ‘불구덩이에 들어가서 타고 싶어도 못 탄다.’는 말은 그 불행을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 못한 그것을 묘사하기 위해서 쓴 말이다. 얼마나 괴로우면 그렇게 하겠는가 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불구덩이에 들어가도 안 탄다.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이다.’ 이러면 육신적인 것 밖에는 생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나는 지옥에 없네.’ 이렇게 생각할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그 목적에 쓰이지 못한 것은 전부 다 그런 극단적인 불행이니까 그것을 묘사하는 방법이 지옥이라는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빛을 보기 전에는 초롱불 속에서도 잘 살았다. 그렇지 않은가? 옛날에는 초도 없고 기름도 없어서 ‘관솔’이라고 소나무에 송진이 차 있는 그런 가지가 있다. 그것으로 불을 밝히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기름을 짜면 시꺼먼 벙커 C유 같은 것이 나오는 데 그것을 연료로 썼다. 그러니까 집 안에 들어가면 벽이 시커멓다. 밤이면 그런 것을 피워서 불을 밝히니까 그랬다. 그런 속에서도 사람이 살았다. 그때도 캄캄할 때는 ‘빨리 불을 가져 오너라.’고 했다. 좋으니까 등잔불을 켜라고 했다. 그런데 전기 불 밑에 살다가 가보면 도저히 못 살겠단 말이다. 얼마나 어두운지 답답해서 차라리 캄캄한 게 낫다. 그때 도시에는 전기가 있는데 시골에는 없었다. 도시에 전기가 있을 때 시골에는 석유를 쓰는 램프라는 것이 있었다. 그게 옛날 것에 비하면 좋은 것이다. 그런데도 얼마나 캄캄한지. 답답해서 못 살겠다. 동굴에 있었던 사람들처럼 동굴 안에만 있었던 사람들은 캄캄한 줄도 모른다. 바깥에 나가 보니까 다른 세상이다. 딴 세상에 갔다가 와 보니까 못 살겠단 말이다.
이게 그와 같은 것이다. 지옥 불이 타고 있다는 말은 그런 말과 같은 말이다. 거기에 살던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다. 박쥐는 동굴에 살아도 아무렇지도 않다. 자기 생긴 대로 그렇게 사니까. 그런데 다른 새는 거기에 들어가면 못 살게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사람의 위치에서 가져야 할 그 축복을 알고 나면 다른 게 그와 같이 된다는 말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서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입 안이 깔깔하고 안 돌아가고 갑자기 입 안에 침이 안 나오고 이런다. 똑 같은 이치다. 돼지는 자기가 돼지이기 때문에 자기 생활로 족하다. 그런데 사람을 돼지처럼 해 놓으면 못 산다.
구원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게 하는 것인데, 죽은 자는 누군가 하면 ‘하나님의 목적에서 죽은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죽은 자를 하나님의 목적에서 유용하도록 다시 살린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구원은 유일한 구원이다. 다른 구원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구원이 아니란 말이다. 절에 가면서 생각하는 구원, 예배당에 가면서 생각하는 구원, 그것들은 구원이 아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생명선에서 끊어졌다. 그러니까 그를 따르고 표현하는 영원한 생명이 없다. 생명선에서 끊어졌으니까 알 수도 없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니까, 빛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생명선에서 끊어졌다는 말은 어둠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은 없다는 말이다. 빛 가운데 사는 생명은 없다는 것이다. 그 생명은 없고 어둠 가운데 사는 박쥐 생명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반대로 사탄과 연결되어서 그를 따르고 표현하는 선악을 아는 생명만 말똥말똥 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쪽에 대해서는 얼마나 잘 아는지 모른다. 아주 잘 안다. 얼핏 하면 선악과가 나온다.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는가? 육신적으로는 우리가 호흡하는 것으로 말하겠지만 정신적으로 말하면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말한다. 어떤 사람이 선악에 대해서 그만큼 똑똑하고 확실하면 저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하고, 거기에 대해서 흐리멍텅하면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여러분이 보라. 그런 사람을 보면 참 똑똑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게 없는 사람을 보면 ‘저게 죽었는가, 살았는가?’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그래서 모두 전부다 자기가 옳다고 나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옳다고 나서지 않으면 다 죽은 자로 여기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여덟 명이 나왔다. 나왔는데 다 자기가 최고라고 한다. 자기가 하면 제일 잘 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그 사람이 도로 그 사람이었다. 별로 다른 게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속는다. 보고도 또 속는다. 왜냐하면 사람 속에는 선악을 아는 생명만 있으니까.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이게 비극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를 수는 없다. 선악을 아는 생명은 충분히 있다. 당장 뛰어나가 데모할 생명은 있단 말이다. 당장 뛰어나가 의를 부르짖을 생명이 있다. 없는 게 아니다. 있는데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선악을 아는 생명을 보니까 젊었을 때가 훨씬 더 씩씩한 것 같다. 나도 30대에 그랬다. 30대에 나도 나갈만한 그런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확 힘이 솟아나고 그랬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책을 보면 너무너무 심취가 되고 그랬다. 그래서 내 팔자에 어울리지 않게 4년 동안이나 싸움을 했다는 게 아닌가? 내 사전에 남과 싸운다는 것은 생각도 못해 봤다. 그런데 선악을 아는 문제가 나오니까 사람이 돌변하고, 돌변이 아니라 본성이 드러나서 내게도 발로가 되었다. 그때는 그런 줄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그때가 내 속에 있던 선악의 본성이 발로되던 때였다.
그때는 그것을 내가 몰랐다. 모르고 옳은 것 때문에, 옳은 것 때문에 은사도 없고 은혜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분명히 나에게 굉장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옳지 못한 일이 생기니까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 서른 살이 뭘 알겠는가마는 그렇게 되더라. 내가 세상을 다 아는 것 같더라. 온 천하를 다 아는 것처럼 생각이 되는 것이다. 그분은 나이 칠십이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보라. 서른 한 살짜리하고 칠십 먹은 노인하고 싸우고 있다고 하면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가? 내가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었다니까.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고 야 정말 내가 지금 생각하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 무슨 도깨비에 홀린 것 같다.
아무리 내가 잘했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내 아버지 연배셨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대항을 하겠는가. 생각해보라. 그런데 이 문제에서만은 가능한 것이다. 선악을 아는 문제에서만 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다른 일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없다. 나도 내 아버지가 노인이었다. 그러니까 그럴 리가 없고 한 번도 그래본 일이 없다. 나는 아버지에게 한 번도 아니요 라고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렇게 되더라. 다행이 우리 아버지가 악한 분이 아니었으니까 정말 다행이었지 악한 일을 조금이라도 했으면, 내 눈에 보기에 틀렸다는 일을 했으면 역시 그랬을 것인데 우리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 아니었으니까 나는 내 속에서 선악을 아는 생명이 발동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선생을 만났는데 그때까지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분이었다. 그런데 싹 사라지고 옳고 그른 것만 남게 되었다. 무서운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달성하겠는가. 내가 서른한 살에 칠십 먹은 노인하고, 은사하고, 내가 가장 존경하던 분하고 싸우는데 내가 하나님 하고는 안 싸우겠는가. 생각해봐라.
하나님과는 우리가 안 싸울 것 같지만 안 그렇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안 싸우는 것 같이 보지이만 사람 속에 하나님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서른 한 살짜리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런데 칠십 먹은 노인이 칠십으로 생각이 안 되고 완전히 적으로만 생각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이 안 되겠는가.
이 생명을 가지고는, 선악을 아는 이 생명을 가지고는 부모도 따를 수가 없고, 하나님도 따를 수가 없고, 은사도 따를 수가 없고 은혜도 기억할 수가 없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은혜를 받았어도 그것이 보이면 지난번에 받았던 은혜는 다 어디로 가버리고 없다.
물고기 생명으로 어떻게 공중을 나르겠는가. 가능하겠는가? 불가능하다. 물고기 생명으로는 물속에서는 참 자유롭고 좋지만 공중에서는 나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선악을 아는 생명으로는 세상을 헤집고 다니기에는 좋다. 아주 좋다. 물속에서 고기가 다니는 것을 보면 정말 자연스럽다. 우리는 수영을 하려면 얼마나 요란한가. 요란한데 이것은 그냥 살랑살랑 유유히 놀고 있는 것인지 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싹 간다. 기가 막히게 올라갔다 내려갔다가 한다. 우리는 수영을 잘해도 바닥 밑에 엎드려 있으려고 하면 막 뜨기 때문에 안 된다. 쪼그리고 앉아 있으려 해도 못 앉아 있다. 그런데 이놈들은 앉고 싶으면 앉고 뜨고 싶으면 뜨고 맘대로 한다. 그렇게 유연하던 생명이 공기에 나오면 헐떡거리고 죽는다. 물고기의 생명으로는 공중을 나를 수 없다.
선악과를 가진 이 생명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룰 수가 없다. 형제와 연합할 수가 없다. 교회가 될 수가 없다. 이상한 것이다. 정말 세상에 필요한 것인데 이것이 있으면 세상에서는 활개치고 다닌다. 그런 사람은 어디가든지 환영하고 한다. 존경한다. 물론 사장님은 그런 사람을 싫어한다. 사장 해보면 그런 사람이 제일 골치 아프다. 그러니까 필요할 때는 필요한데 싫을 때는 아주 싫어진다.
그런데 성현들은 가르치려 했고, 정치가들은 다스리려 했으나 다 불가능했다. 생명은 고칠 수가 없다. 바꾸어야 한다. 바꾸는 일은 창조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지은 자만이 다시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성현들은 나와서 가르치려고 했다. 어떻게든 교육을 해서, 가르쳐서, 좋은 말씀을 해서 이 심성을 좋게 해서 선한 사람이 되고 이렇게 하려고 한 사람들이 성현들이다. 정치가들은 다스리려고 했다. 그런데 다 실패했다. 성현들도 실패하고 정치가들도 실패했다. 왜냐하면 생명은 고칠 수가 없다. 지금 문명이 이렇게 발전하고 과학이 발전해도 생명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분명하다. 인간은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생명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생명을 바꿔야 된다. 이 생명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 이것을 바꾸겠느냐는 것이다. 누가 생명을 바꾸겠느냐 이것이다. 누가 개를 소로 바꾸겠으며 누가 소를 개로 바꾸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을 만일 바꿀 수만 있다면 창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은 불가능한 일이다. 개미 하나도 바꿀 수 없다. 개미를 고쳐서 번데기로 만들 수 없고 개미를 고쳐서 바퀴벌레를 만들 수 없다. 바퀴는 바퀴고 개미는 개미다. 그것을 만일 바꾼다고 하면 창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지은 자만 바꿀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이것을 만일 바꾼다면 이것은 천지개벽이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창조자의 손에 붙잡혔다. 율법에 정해진 대로, 혹은 규례대로 살던 사람이 죽고 다시 사신 새로운 사람을 만난 것이다. 새로운 사람은 새 생명으로 살고, 하나님은 새 생명 안에서 행하신다.
바울은 왜 그런데 이 복음을 이것밖에는 복음이 없다고 말했는가?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창조자의 손에 붙잡힌 것이다. 누구한테 붙잡혔는가? 창조자에게 붙잡혔다. 우리가 붙잡혀도 누구한테 붙잡혔느냐가 참 중요하다. 누구한테 붙잡히는가? 내가 창조자에게 붙잡히면 나는 바꿔질 수가 있고, 내가 거짓말하는 사탄에게 붙잡히면 선악과만 잔뜩 들어갈 수밖에 없고 그렇다. 내가 누구한테 붙잡히는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를 만나느냐이다. 어떤 부모를 만났느냐, 어떤 친구를 만났느냐, 어떤 선생을 만났느냐, 어떤 배우자를 만났느냐? 이 만나는 것이 알고 보면 인생의 전부이다. 만난 것이 전부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바울은 창조자에게 붙잡혔다. 옳게 붙잡혔다. 꼼짝을 못하게 되었다. 자기로서는 어떠한 것도 할 수 없게 창조자에게 붙잡혔다.
우리는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데로 모든 것을 다 고쳐 쓰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만든 사람은 고치는 것보다 만드는 것이 더 쉽다고 한다. 집 짓는 사람에게 집이 좀 이런데 이렇게 저렇게 고쳐달라고 하면 고치는 것을 귀찮게 생각을 하고 차라리 헐고 짓자고 한다. 왜냐하면 짓는게 훨씬 쉽단다. 짓는게 쉽다. 그런데 집을 못 짓는 사람은 헐고 새로 지을 수가 없으니까 어찌하든지 고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차이이다.
바울은 율법의 정해진 대로, 혹은 규례대로 충실하게 살던 사람이다. 이 사람은 지어준 대로는 충실하게 살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죽고 다시 생겨난 사람을 만났다. 바꿔진 사람을 만났다. 다른 사람을 만났다. 새로운 사람, 자기가 전혀 모르던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사람은 자기와 다르게, 자기는 지금 율법으로 살고 규례대로 살고 이렇게 사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새 생명으로 살고, 새 생명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생명 안에서 행하신다는 말이다. 자기는 자기가 율법을 잘 행하고 규례대로 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늘 이렇게 믿어왔는데 이 사람을 만나고 보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이 그냥 저절로 생명 안에서 함께 하는 사람이다. 왜? 하나님은 새 생명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먹은 옛 생명 안에서는 행하실래야 행하실수가 없는 분이다. 행하실수가 없다. 물이 아니면 고기가 그렇게 유연하게 다니겠습니까! 물을 만나야 그렇게 다닌다. 물을 만난 고기같이 안 되겠습니까 선악과를 먹은 생명은 하나님을 만나면 꼼짝을 못하게 되고 새 생명은 세상에 오면 핍박을 받게 되고 이렇게 세계가 틀리다.
새 생명 안에는 선악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고 사람이 따르는 법이 있다. 그래서 그가 전한 복음은(딤후2:8참) 죽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뿐이었다. 그에게 다른 복음은 없었던 것이다.
새 생명 안에는 선악의 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행하시고 사람은 따르는 그 법이 있다. 하나님이 행하시면 따르는 법이 있다. 이것이 얼마나 순리인가. “하나님이 행하시면 사람이 따른다. 하나님이 지어 놓으시면 그대로 산다. 하나님이 지어 주시면 그대로 산다.”는 이것이 순리다. 그런데 하나님이 행하셔도 사람이 따를 수 없고 사람이 가도 하나님이 갈 수 없는 이것이 역리고 비극이다.
그래서 그가 전한 복음은 <나의 복음>이라고 했다. 죽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 뿐이었다. 이 사람을 만났으니까 새 사람을 만나고 보니까 이것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복음은 없다고 그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보니까 다른 길은 없구나 이렇게 알게 되었다.
생명이 바꿔지는 것 이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전에 수리한 집만 봤을 때는 리모델링한 집만 봤을 때는 “야 리모델링한 집 좋다.” 그렇게 봤다. 그런데 뭐 하러 새로 지어 했는데 새로 지은 집을 보니까 리모델링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구조가 잘 못된 집은 아무리 잘 고쳐놔도 역시 불편하다. 옛날에 천정을 낮게 지었다. 천정을 낮게 지은 집은 아무리 다듬고 좋게 해놔도 역시 천정이 낮기 때문에 답답한 것을 어떻게 바꿀 수가 없다. 사방에 거울을 붙이고 해도 지붕이 낮은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높은 집에 살다보면 그런 집에 살려고 하면 답답해서 못산다.
옛날에는 그 때는 그것도 좋아서 살았는데 지금은 아파트도 천정이 높다. 높은 천정에 살다보면 옛날에 지은 낮은 천정 밑에 가면 뭔가 눌린 것 같고 꿈자리 사납고 그렇다. 그런데 거기서 산 사람은 괜찮다. 바울이 전한 복음 <나의 복음> 이렇게 말한 복음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복음이었다. 그래서 다른 복음은 없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언약(구약) 안에서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이고 다른 길은 없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죽고 다시 사신 이의 부름을 받고 그의 사도가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언약, 구약은 최고의 언약이었다. 어떤 다른 민족에게 이런 언약은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만 이런 언약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거기서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고 다른 길은 없다. 이렇게 확신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죽고 다시 사신 이분을 만나고 나서 이분에게 부름을 받았다. 당연히 그러지 않겠나. 죽고 다시 사신 분을 만나니까 그 분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분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도가 되었다.
이 사람, 자신이 본성적으로 증오하는 한 사람, 바로 아담이 싫어했던 그 사람을 만났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만난 것인가? 새로 만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원래 자기는 본성적으로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이 새 사람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 아니고 자기가 전에는 아주 미워하던 사람이었다. 다메섹에 갈 때 왜 갔는가? 그 사람이 미워서 갔던 것이다. 바울이 싫어했던 그 사람은 누구냐 하면 아담이 싫어했던 그 사람이다.
왜 아담이 싫어했나? 자기 뜻대로 살고 싶으니까 싫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만들어 놨는데 그런 사람이 싫었던 것이다. 뭔가 다시 살수 없을까 해서 하나님 같이 되려고 했던 것이다. “왜 나는 날 수가 없는가? 왜 나는 천사처럼 못 사는가?”하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에 속은 것이다. 바로 이 사람을 만났다. 자기가 싫어했던 사람을 만났다. 자기 조상 아담이 싫어했던 그 사람을 만났던 것이다.
“주여 뉘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앞이 캄캄해졌다.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덮어버린 것이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큰 빛을 만나서 그만 꺼꾸러져서 “주여 뉘십니까?”이렇게 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유태인들의 어법이다. 우리 같으면 “엄마야!” 했을 텐데 그렇게 안하고“주여 뉘십니까?”했다. 이 사람들은 의식 속에 항상 큰 일이 닥쳐 올 때는 “엄마”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주여 뉘십니까?”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렇게 부르지 않고 “주여” 이렇게 부른다.
구약 성경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항상 “주여 주의 이름” 이렇게 사용한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이름은 사람이 부르기에 너무 황공하다고 여겨서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다. “주여, 주님” 이렇게 불렀다. 우리나라 사람하고 비슷하다. 어른들의 이름을 그냥 잘 안 부른다. 호를 부른다든지 했다. 옛날에 사람들의 이름이 셋이었다. 본 이름이 있고 호가 있고 자가 있다. 친구끼리도 본 이름을 안 부르고 호나 자를 부르곤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주여 뉘시옵니까?”그런데 뜻 밖에도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되겠는가? 앞이 캄캄해 져버렸다. 자기가 지금 가장 싫어하는, 가장 증오하는 그 사람이 예수인데 “주여 뉘시옵니까?”하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이렇게 말하니까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대구 말로 억장이 무너진 것이다. 앞이 캄캄해 지고, 보지 못하게 됐다고 했다. 앞이 캄캄해져서 눈이 있어도 아마 못 봤을 것 같다. 너무 캄캄해져서 눈에 비닐 같은 것이 덮어져 버렸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비닐이 덮여졌다고 그래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돼 있다. 아마 비닐이 안 덮여 있어도 너무 놀라서 아무것도 안 보였을 것 같다. “주여 뉘시옵니까?”하니까“나는 네가 쫓아가는 예수다, 핍박하는 예수다.”그랬을 때 무엇이 보이겠는가. 아무것도 안 보였다.
자기가 이제까지 알고 믿고 추종했던 모든 것이 먹통 속에 빠져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보이던 모든 것이 다 안보였다. 자기가 이제까지 알고 있고, 믿고 있고, 주장했던 모든 것이 먹통 속에 들어가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커먼 먹통 속에 들어가니까 아무것도 안 보였다. 오징어를 잡으면 먹통이 있다. 낙지, 문어 이런 것들도 다 먹통이 있다. 시커먼 먹통을 지니고 다니다가 위험할 때 쫙 뿌린다. 그러면 그 주변이 시컴해져 버린다. 그렇게 해서 다른 적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한다. 시커먼 먹통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안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바울은 아무것도 못 보게 된 것이다.
“어찌 하오리까? 성으로 들어가라. 네게 행할 것을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9:참).” 이래서 그는 오던 길에 대하여는 죽고, 주님이 지시하신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주여 어찌 하오리까?”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성으로 들어가라. 네게 행할 것을 이를 자가 있을 것이다(행9:참).”그래서 그는 오던 길에서 돌아서서 다른 길로 가게 된 것이다. 성으로 들어가긴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드리려고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만나라는 사람을 만나려고 들어가게 됐다. 앞을 보지 못하게 돼서 부축을 해가지고 들어갔다. 다른 길을 가고 있다. 길은 그 길인데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내가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됐다 해서 동쪽에 살던 사람이 서쪽에 간다, 이런 것이 아니고 어차피 똑같은 길을 걸어 다니고, 밥도 똑같은 밥을 먹고, 살기도 똑같은 집에 살고 있고, 직장도 똑같은 직장에 다니고 있고 그런데 다른 길을 가게 된다. 길을 다른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난 사람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이 길은 스스로 깨달은 것도 아니고, 제도, 즉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단(본부)으로부터 파송된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창조자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 즉 죽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길은 스스로 깨달을 것도 아니고 불교처럼 참선을 해서 깨달은 것도 아니고, 제도 즉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단, 지금 같으면 어떤 종교의 총회, 본부, 교단 이런 곳인데 이런 데로부터 파송된 사람도 아니고 임명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로지 창조자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 그런 것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다.
이 사람을 히브리서에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디에 근거가 없는 사람인데 그 사람을 아브라함이 만났다. 만나 놓고 보니까 그 사람이 너무너무 권위가 있어서 그 권위에 아브라함이 취해서 자기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렸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아론의 계통을 밟아서 온 제사장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온 사람이다. 이렇게 해거 예수를 가리켜 말할 때 멜기세덱의 계열을 좇아 온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로 자기가 스스로 깨달은 것도 아니고 어디서 임명을 받아 온 것도 아니고 창조자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왔다. 죽고 다시 사신 예수를 만났으니까 그 경험이 그런 경험이다. 죽고 다시 산 사람을 만났으니까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나 조직이나 명령이나 교육이나 이런 것 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한 세계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전혀 다른 세계데 들어왔다는 것이다.
나도 한국말을 하면 잘 하는데 미국가면 완전히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말로 한다면 이것이 내가 꿈속에 왔는지 먹통 속에 왔는지 모른다. 자기들끼리는 다 자기들 말하는데 나만 못한다. 검은 사람도 잘하지 흰 사람도 잘하지 아이들도 잘하지 어른들도 잘하지 다 잘하는데 나만 못한다. 그러니 갑자기 병신, 불구자, 언어장애자 이렇게 되고 만다.
바울은 엉뚱한 세계,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왔다. 죽고 다시 사신 예수를 만났으니까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사람이니까 남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저 사람이 어제까지만 해도 이러이러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정반대로 이야기하니까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모를 것 아닌가. 죽었다가 살아나면 그렇다.
나도 작지만 작은 것이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내 육신적인 일이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달랑달랑하는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냐?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 아직도 살아 있는가 하니까 전혀 모르는 것이다. 자기들 상식 밖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벌써 죽었을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그러니까 아직도 살아 있냐고 한다. 그런데 하물며 이렇게 사람이 완전히 뒤집어져가지고 오던 길에서 다른 길로 가고 있는 사람을 누가 이해하겠는가.
그러므로 바울의 복음은(딤전2:8 참)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죽은 자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복음은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 은혜하고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드린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였다. 그외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우리가 이런 저런 지식을 가지고 있다가 진짜 지식을 만나면 그전 것이 싸악 사라져 버린다. 똑 같다.
저도 그런 경험을 했다. 전에 알던 것이 싸악 사라졌다. 아무 소용이 없어졌다. 물론 뒤에 조금씩 써먹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대부분 교역자들이 그렇지만 돈 있으면 책을 산다. 그것이 필요하기도 하고 취미생활이다. 나는 그때 정말 생활비도 없어서 달랑달랑한 때인데도 돈 한 푼이라도 생기면 청계천 헌책방에 갔다. 새 책방은 비싸니까. 그래서 책을 사가지고 오고했다. 그런데 그것이 다 소용없어져 버렸다. 다른 것을 만나니까 다 소용없어졌다. 그래서 이사하면서 다 버리고 오고, 버리고 오고 그랬다. 옛날 책이 몇 권 없다. 다 없애 버렸다. 참 귀중하게 생각했는데 그때는 그것이 내 보물이었는데 왜 그렇게 가치가 없어져 버렸는지. 그렇게 귀하던 것이 그렇게 소중하던 것이 아무 가치가 없고 아무 소용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분이다.” 여기 악한 세대란 아담의 세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항하는 모든 세대들을 포함하며, 이 세대의 주관자는 아담을 인격으로부터 이탈하게 하여 신격에 도전하게 하는 사단이다(엡6:12 참).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이 악한세대에서 우리를 건지러 우리 죄들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분이다. 전혀 새로운 세계에 들어왔다. 바울은 전혀 엉뚱한 세계에 들어왔다. 자기가 가장 미워하고 가장 싫어하던 사람의 세계에 들어왔다. 예수 밖에 없는 자기가 내어 놓을 것은 그것 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하나님 그 하나님, 그 하나님, The GOD, 바로 그 하나님, 그 분, 그분 밖에 없는 세계가 왔다. 다른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세계에 들어와 버렸다.
옛날에는 문둥병을 고치는데 약이 없어서 별별 약이 다 있었다. 그런데 진짜 약이 나오니까 그 약들은 다 소용이 없어져 버렸다. 지금 예수병원 하는데 있다. 원래 나병환자 치료하던 곳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피부병은 거기가 제일 잘 고친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문둥병을 고치느라 오만 약을 다 썼을 것 아닌가! 그 약이 없을 때 오만 피부병 약을 다 썼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피부과에는 거기가 제일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다른 병원 다니다가 피부과 다니다가 안 되면 대구사람들은 거기로 간다. 그 병원이 그때는 참 소중한 병원이었다. 약이 없을 때니까. 그런데 진짜 약이 나오고 나니까 지금은 어느 피부과나 다 똑같다. 그 피부과나 다른 피부과나 똑같은데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그래도 예수병원, 그 병원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다. 비듬 때문에, 누가 거기에 가면 아주 좋은 약이 있다고 해서 한 번 가봤다. 매 한가지인데 거기에 온 사람들마다 다 해보고 안 돼서 왔다고 한다. 그렇게 유명했다.
옛 것은 새 것이 오면 다 물러가 버린다. 다 소용 없어져 버린다. 억지로 버리려고 애쓰지 마라. 억지로 버리려고 애쓰면 부작용이 생긴다. 상처가 나서 딱지가 생겼는데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떨어진다. 속에서 새살이 나오면서 떨어진다. 미리 떼려고 하면 또 피가 나고 미리 떼려고 하면 또 피가 나고 계속 딱지가 없어지지 않는다. 도움이 안 되니까 가만히 놔두면 된다. 속에서 새살이 나오면 저절로 없어져버린다. 벗기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벗기려고 애쓰면서 하니까 더 안 된다. 자꾸 이렇게 생각한다. 가만히 놔둬야 할 텐데 자꾸 손대니까 안 된다. 혹시 버릴 것이 있으면 가만히 놔둬보라.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다. 그런데 뭐가 안 되겠는가? 이렇게 했는데 우리가 뭐가 또 할 일이 있겠는가? 다 새살이 나도록 약을 발라놓았고 처치해놓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될 것인데, 내가 긁어서 떼려고 하다가 오히려 긁어 부스럼 만들어 일만 더 어렵게 만든다.
이 악한 세대란 말은 아담의 세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항하는 모든 세대들을 포함하는 말이다. 말세가 왔어, 라고 말하는 세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역하는 세대를 말한다.
이 세대의 주관자(주인)는 누구인가? 주관자가 사단이다. 아담을 인격으로부터 이탈하게 하여 신격에 도전하게 하는 바로 사단이다(엡6:12 참). 그 사단이 어떤 세대들을 주관하고 있다. 영적인 유행을 주관하고 있다.
또 우리 죄들이란 아담의 죄로부터 율법으로 증명된 모든 죄를 포함한 것들로서 선악과를 먹고 위치를 이탈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혹 율법을 통하여 안다 해도 따를 수 없는 사람 자신(본성-존재)과 그의 행위이다(롬7:17 참).
또 우리 죄들이란 말은 아담의 죄로부터 율법으로 증명된 죄까지 모든 죄를 포함한 것들을 말한다. 선악과를 먹고 위치를 이탈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혹 율법을 통하여 안다 해도 따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따를 수 없는 사람 자신의 본성, 그 자신을 말한다. 이런 죄, 저런 죄가 아니고 그렇게 된 본성, 존재와 그의 행위를 가리켜서 우리 죄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단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그것 하나 고치려고 자기 자신을 주었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 존재를 위해서 자기 존재를 준 것이다. 존재를 위해서 존재를 준 것은 바꾸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하는 동산이며 그 나라다. 그런데 아담은 이 죄로 인하여 그 동산을 잃었고 우리는 그의 나라가 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하는 동산이다. 이 동산은 공간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하는 영역이다. 여기도 동산일 수가 있고 여러분 집도 동산일 수가 있다.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하면 그것이 동산이다. 그리고 그 나라다. 커지면 나라다. 크게 말하면 나라고, 작게 말하면 동산이다.
그런데 아담은 이 죄로 인하여, 선악과를 먹고 다른 생명을 받은 이 죄로 인하여 동산을 잃어버렸다. 나라가 되지 못한다. 동산을 이루었는지 이루지 않았는지는 잘 모른다. 뒤로 가보면 우리가 평안이 없고 안식이 없다. 행복이 없다. 사랑이 없다. 이것이 동산을 잃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나라가 되지 못한다. 어디를 가도 분열이고 연합이 안 된다. 아담과 하와 둘도 분열되었다. 그러니 어디가 연합이 되겠는가. 연합이 안 되면 나라가 안 된다.
너는 정녕 죽으리라,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절망이 다른 것이 아니고 이것이 인간의 절망이다. 너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는데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고 했다. 이것은 육신의 죽음을 얘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린, 그 죽음이다.
그런데 축복은 무엇인가?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는 것이 성경 마지막에 있는 축복이다. 하나님 창조의 목적은 그는 우리의(나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고, 이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다. 문제들은 어디서 생기는가? 전부 이것이 없어서 생긴다. 이것이 없어서 인생 문제가 생긴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 즉 본성적으로 불가능한 인간을 건져내서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복원시키려고 세상에 오셨고 제물로서 자기 자신을 드리신 분이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 죽으리라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이 사람, 본성적으로 불가능한 인간을 건져내서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복원시키려고 세상에 오셨고, 이것을 위해서 제물로서 자기 자신을 드리신 분이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셨다. 하나님 문제가 해결되어야 인간 문제가 해결된다. 인간의 문제는 아무리 해결하려고 해도 해결이 안 된다. 왜냐하면 발원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해결이 안 되고, 사람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 찾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 비하면 필요한 것이 다 채워진 세계에 살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행복지수는 똑같다.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옛날에 비해서 오히려 불만이 더 많다. 오늘 아침에도 밥 먹다가 우리는 가난할 때 태어나서 산 것이 복이라는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에 정말 찢어지게 가난할 때가 있었다. 불과 몇 십년 전에 그랬다. 지금은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 비교가 안 된다. 너무 속도가 빠르게 성장했기 때문에 한창 성장할 때는 불만할 시간이 없었다. 언제 새마을운동 노래 부르더니 언제 길바닥이 좋아지더니 언제 지붕이 개량되더니 언제 큰 돼지가 오더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는 불평불만을 할 시간이 없었다. 요즘 시간이 느긋하니까 불평불만이 많이 생긴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발전했다. 20%씩 30%씩 성장을 하는데 정신을 차리겠는가. 우리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가난할 때부터 좋은 때까지 사니까 행복한 것 같다. 조금 어려운 것은 그때를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안 된다. 그런 사람들한테는 옛날 일을 생각해보라는 그 말 한마디면 끝난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맨날 얘기해도 소용이 없다. 참 다행이다.
인생이 자기 위치에 있다면 안정과 평안을 얻을 것이며, 합당하게 쓰인다면 만족과 감사가 있을 것이며 영광이 따를 것이다.
인생이 자기 위치에 있다면 안정과 평안을 얻을 것이다. 왜 사람이 안정되지 못하고 평안이 없는가? 그것은 자기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이다. 간단하다. 합당하게 쓰인다면 만족과 감사가 있을 것이다. 만족과 감사가 왜 없는가? 내 인생이 합당하게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 가만히 앉아서 왜 나는 만족이 없는가? 감사가 없는가? 백날 있어봤자 안 된다. 쓰이기 위해서 지어졌는데 안 쓰이니까 무슨 감사가 있겠는가. 쓰여야 감사가 있고 만족이 있을 것이다. 안 쓰이면 아무 만족도 없고 감사도 없다. 혹시 지금이라도 안정이 안 되고 평안이 안 되는 사람은 위치를 바르면 된다. 바른 위치로 들어오면 된다.
세상적인 입장에서도 그렇다. 세상적인 입장에서도 바른 위치에 있으면 좀 편하다. 내가 100만원 있는 사람은 100만원 위치로 돌아오면 편안하다. 돈은 100만원 밖에 없는데 1000만원 위치에 앉아있으면 불안할 것이다. 불만이고 불안하다. 내가 500만원을 가지고 있다면 500만원에 합당한 장사를 하면 된다. 그런데 이 사람이 500만원에 합당한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고, 2천만원에 합당한 장사를 하고 있다면 매일 불안하다. 자수하여 광명 찾자고 하는 것처럼 자기 위치로 돌아오면 다 편안하다. 누가 목을 조이는가, 참 문제꺼리이다.
지금 우리나라 문제가 회사에서는 사람이 없다고 난리라고 외국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고, 길바닥에는 직장이 없다고 난리다. 학교에 교육을 제대로 시켜서 적당한 자리에, 자기에게 맞는 자리에서 일하도록 가르치면 된다. 이것을 하지 않고 다른 것만 가르쳐놓았기 때문에 막상 나와서 일을 하려고 하면 할 것이 없다. 이것 하라고 하면 내 수준에 안 맞는다고 하고, 저것 하라고 하면 내 수준에 안 맞는다고 하니까 할이 있는가.
분수라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분수를 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분수를 모르는 사람은 부자라도 불안하고, 가난해도 불안하다. 항상 불안하다. 분수를 알아야 된다.
인생이 자기 위치에 있다면 안정과 평안하다. 적으면 적은대로 많으면 많은대로 평안하다. 합당하게 쓰인다면 만족하고 감사하게 된다. 쓰이지 않고 사람이 만족할 수는 없다. 쓰인 데서 만족이 있다. 내 인생이 합당한 자리에 쓰여지면 만족한다. 그런데 헛된 것에 쓰여지면 허망해지는 것이다. 다른 것이 없다. 허망한 이유는 헛된 것에 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합당하게 쓰여진다면 자연히 영광이 따르게 된다. 내 인생이 합당하게 쓰이게 된다면 인생에 영광이 올 것이고, 국가에 합당하게 쓰이면 국가에서 영광을 줄 것이고, 회사에 합당하게 쓰이면 회사에서 영광을 줄 것이다. 영광을 어떻게 억지로 만들겠는가.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하고 있으면 안 된다. 왜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나를 알아주지 않는가? 왜 알아주지 않겠는가? 알아줄 만큼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써봐야 알아줄 텐데 안 쓰이니까 어떻게 알아주겠는가. 합당하게 쓰이면 만족과 감사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광이 뒤따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위치가 없으니 불안정하여 평안이 없고, 쓰일 일에 쓰이지 못하니 허무하고 불만과 치욕만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문제다. 그런데 헛되이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위치가 없으니 불안정하고 평안이 없고, 쓰일 일에 쓰이지 못하니 허무하고 불만과 치욕만 남는 것이다. 수즉다욕(壽則多辱)이라고 오래 살수록 욕만 남는다고 한다. 쓰이지 못하니까. 이것이 인생의 문제다. 문제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헛되이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다른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내 말을 듣고 분수를 찾으면 편할 텐데, 그 사람들이 내 말은 안 듣고, 물론 여러분 말도 된다, 인생문제를 해결하려면 분수를 찾아야 된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 인도 철학으로 성경을 해석한 어떤 사람은 여기 ‘내가’ 곧 인간 각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얼마나 좋으랴! 나도 어렸을 때 헤매던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을 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너무나 좋은 말씀을 하셨다. “내가 곧 그 길이요, 내가 곧 그 진리요, 내가 곧 그 생명이라.” 하셨다. 좋은 말인데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수없는 사람들이 해석을 했다. 인도철학으로 유명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인도철학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한 사람이 있다. 라즈니쉬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여기서 <내가> 곧 할 때, <내가>가 <자기 자신>이라고 한다. 각자 인간 자신을 보고 <내가>라고 생각한다.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생명이요, 라는 것이다. 예수가 길이요 예수가 진리요 예수가 생명이요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곧 길이요, 라는 것이다. 불교식으로 해석하니까. 그 사람이 반야심경이라는 책을 그 사람이 썼다. 주로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인도철학을 가지고 요한복음을 아주 특이하게 해석했다. 아주 그럴듯하다. 중심이 <네가>가 아니고 <내가>다. <예수가> 아니고 <내가>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가 바로 그 길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왜 헤매겠는가? 내가 길인데. 내가 생명인데 왜 헤매겠는가? 내가 그것이 안 되니까 헤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업을 많이 뒤집어쓰고 있어서 그런 것이니까 업을 벗으면, 그 길이 원래 있는데 감춰져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벗으려고 참선을 하는 것이다. 벗기만 하는 원래 나는 길이라는 것이다. 벗는 것이 쉬운가? 자기 가죽을 벗기는 것이 쉽겠는가.
나도 어렸을 때 20대에 한참 헤매던 중에 하나님도 모르고 뭘 모르겠더라. 그래서 헤매던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곧 길이다. 언뜻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맞는 것 아닌가? 아니었다. 일장춘몽이었다. 내 속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내용이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께로 가는 그 길, 그 진리, 그 생명이었는데 내게는 없었던 것이다. 있다면 왜 방황했겠는가?
그 길은 아버지께로 가는 그 길이다. 불교철학에서 말하는 그 길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다. 아버지께로 가는 그 실재, 아버지께로 가는 그 생명이 내게는 없었던 것이다. 그때 나도 잘못했으면 불교로 갈 수도 있었다. 그때 잘해서 꼬셨으면 갈 수도 있었다. 그래도 어려서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안 가게 된 것이다. 갔더라면 삼천포로 빠지는 것이었는데, 너무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는 길이 없다. 다른 길이야 다 있다. 다른 생명이야 있다. 나 홀로 사는 길은 있다. 여러분도 홀로 사는 길은 다 있다.
나 홀로 사는 길...은 있었으나 아버지께로 가는 길, 아버지를 아는 그 진실, 아버지와 연합하는 그 생명은 없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보니 그는 그 길, 그 진실, 그 생명이고, 그 길은 내가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길이며, 그 진실은 내가 아버지를 알 수 있는 위치이며, 그 생명은 내가 아버지와 연합할 수 있는 인격이며 본성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께로 가는 길, 아버지를 아는 그 진실, 아버지와 연합하는 생명, 이것이 없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보니까 그는 그 길이고, 그 진실이고, 그 생명이더라. 그 길은 내가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길이다. 그분이 말한 그 길이, 그것은 그분 자신인데, 그 길이 예수만 홀로 가지고 있는 길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갈 수 있는 길이다. 이것이 아주 독특하다. 그 진실은 내가 아버지를 알 수 있는 위치, 진실하다는 것은 위치다, 그 위치에 있으면 아버지를 알 수 있다.
그 생명은 내가 아버지와 연합할 수 있는 생명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것은 만민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내게 있었던 그것은 무엇인가? 내가 홀로 살아가는 길이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자기대로 길이 있다. 그 길은 무엇인가? 자기대로 가는 길이다.
나는 유대교로부터 버림받고 로마 정권에 의해 처형된, 즉 이탈자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한 사람 예수를 만났다.
나는 유대교로부터 버림받고 로마 정권에 의해 처형된 아담, 즉 이탈자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한 사람 예수를 만났다. 별로 위대한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고 유대교에서 버림받고 로마정권에 의해서 죽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었다. 정말 팔자가 사납다. 이보다 더 팔자가 나쁜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런 사람을 만났다. 우리가 지금 만나려고 하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다. 화려한 관을 쓰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팔자가 나쁜 사람이다.
그런데 그 안에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으며, 마음으로 깨닫지 못했던 모든 것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인류 구원의 원본으로서 모든 것이 다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 내가 한 번도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으며, 마음으로 깨닫지 못했던 모든 것이 있는 사람이다. 내게는 전혀 없던 모든 것이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인류 구원의 원본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으로 나를 구원하려고 하는가? 이 사람 같이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본이다. 우리 구원의 원본이다. 모든 것이 다 있는 사람이다. 딱 바꿔놓고 보면 모든 것이 있는 사람이다. 딱 바꿔놓고 보면 정말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보면 정말 잘 만들어진 종류다. 육지에 나오면 정말 불쌍한 것이 물고기다. 예수는 세상에 와서 정말로 불쌍했다. 그런데 딱 하나님 나라에 가면 모든 것이 다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 이 사람을 따르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꿔지는 것이다. 다른 길로 바꿔지는 것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하는 동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생명이 있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진실한 나라가 있다.
그 안에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하는 동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세상에서는 갈 길이 없더니 동산으로 가는 길이 있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생명이 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진실이 있다. 다른 사람이다. 그 용도에 딱 맞는 사람이다. 하나님 창조의 목적에 딱 맞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세상에 오면 안 될 것이다. 세상은 지금 하나님 창조 목적에서 이탈하여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세상인데, 하나님 창조 목적에 딱 맞는 사람이 거기에 오면 맞겠는가? 안 맞는다.
군대에 있던 사람이 민간으로 내려와도 맞지 않는다. 한참 전쟁하던 사람이 민간에 내려오면 어울리지 않는다. 6.25전쟁 중에 휴가를 온 군인을 봤다. 전쟁 중에 휴가를 올 때는 총을 갖고 무장을 한 채로 온다. M1 소총 짊어지고 왔다. 무시무시하다. 같은 동네사람인데 군복입고 총 매고 오니까 무시무시하다. 그때 제일 무서운 것이 경찰관이었는데 경찰관들도 쩔쩔맸다. 총 들고 눈이 뻘게서 오는데 무서웠다. 전투하다가 온 사람이었다. 같은 사람이어도 그렇다. 군대에서 민간인과 군인을 가른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겠더라.
그러니 하나님 나라에 있던 사람이 세상에 나오면 당연하게 버림받을 것이다. 뭘 잘못해서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형무소 갈 사람들은 다 천국에 간다는 말이 아니다. 길 자체가 너무 다른 길이다. 그러니까 환영 받을 일은 별로 없다.
그런데 이 사람이 복음이다. 하나님의 동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진실이 있는 이 사람이 바로 구원 받은 사람이고, 이 사람이 우리 구원의 모델이다. 구원의 원본이다. 이 사람 자체가 복음이다. 예수 자체가 복음이다. 예수가 한 말씀이 복음이 아니라 이 사람 자체가 우리 복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사람으로 해서 우리를 다시 찍어내려고 한 것이다. 이 사람을 원본으로 해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 자체가 복음이다. 이 사람이 한 말이 복음이 아니고 이 사람 자체가 복음이다.
구원된 인생의 원본으로서 복음 자체다.
구원된 인생의 원본이다. 우리가 다 구원되면 이렇게 된다는 말이다. 요즘은 모르겠는데 돈을 찍을 때 찡이라는 것이 있다. 찡, 판이다. 판을 보고 찡이라고 한다. 동판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돈을 찍는다. 그 동판이 만들어진 대로 찍혀지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 동판이 완성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 동판이 완성되었다. 동판 하나가 완성되면 종이는 무진장 찍어진다. 우리는 이런 동판에 의해서 찍혀지는 새로운 세계에 왔다.
예수가 복음이다. 그래서 다른 종교는 다 그것을 만든 사람들을 존경하지만 그 사람을 전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공자님을 믿으세요, 라고 하지는 않는다. 석가모니를 믿으세요, 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만 유독이 예수를 믿으세요, 라고 한다. 이상하다. 이러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 진실입니다, 이런 말이 지혜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을 믿으세요, 라고 말한다.
복음은 예수를 전하는 것이다. 어떤 예수를 전하는가? 동산으로 가는 길이 있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이 통치가 임하는 진실이 있는 그 사람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선에 들어있지 않고서는 또 이 사람을 전할 수가 없다. 다른 것은 내가 그 사람이 아니라도 가르칠 수 있다. 공자님의 교훈은 내가 그렇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다.
그런데 이분을 전하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전하려면 아무나 할 수 있는데 이분 자신을 전하려면 나도 이 사람 속에 있어야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할 수 없다. 내보일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결정판이 그리스도다. 그 결정판을 누가 전했는가? 사도들이 전했다. 사도들 보고 뭐라고 하는가?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는 자기 증인이 필요한 사람이다. 자기의 교훈을 가르쳐 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증인이 필요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증인이라는 말은 다 똑같다는 말이다. 증거다.
콩은 콩을 전한다. 왜? 콩은 콩이니까. 콩은 언제든지 계속해서 콩의 증인이다. 증거품이다. 만년 전에 콩이 있었는지 5만년 전에 콩이 있었는지 우리가 모른다. 콩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나는 모르지만 내가 콩이요, 이렇게 될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우리 조상을 모르지만 내가 콩이요, 내가 팥이요, 내가 된장이요, 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쉬운 것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불가능한 것이다. 내가 콩이요, 라고 해야 되니까.
예수가 복음이다. 우리 구원의 원본으로 예수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다. 이 사람을 전하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이 사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가? 죽고 다시 산 데서 왔다.
그래서 바울의 복음은 <죽고 다시 산 복음>이다. 이것 외 다른 복음은 없다고 한다. 이 복음 외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한다. 교리를 배워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전혀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다. 예수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예수가 있으면 모든 것이다. 복음이다.
구원된 인생의 원본이 예수다. 이 사람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람, 예수의 증인으로서 부름 받았다. 어떻게 이 사람이 곧 내가 되고, 내가 이 사람이 되는가? 어떻게 이 원본대로 내가 찍혀지는가? 이 찡 대로 내가 돈으로 찍혀지는가? 어떻게 그분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가는 다음 시간에 얘기하겠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서 오신 것을 감사하고 당신이 죽음을 거쳐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이 생명을 주시려고 당신 자신을 들이신 것을 감사하고, 오늘 우리가 당신의 냄새를 맡고 당신의 길을 보고 당신을 찬양하도록 은총을 주심을 감사하고, 우리 안에 당신에 대한 갈망을 갖게 하신 걸 감사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추구할 우리 생명의 원본으로써 주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속에서 이것이 불 일듯 일어나서 우리가 잃어버린 동산을 다시 찾고 잃어버린 인격을 다시 찾고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