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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노마드와 전쟁기계
2019년 11월 29일, <한 리더쉽아카데미>에서.
감사의 말: 이우백 박사의 긴 노력(conatus)의 과정에서 창안한 <한 리더십아카데미>에서 “달리 사유하기”, 즉 “같잖은 이야기”를 발표하게 되어 기쁘고 즐거우며, 원장님과 회원님들, 나의 죽마고우들과 또한 여기 모이신 분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로서는, 철학을 공부한지 47년, 철납 47년에 이루어 놓은 것은 없지만, “마실에서 천하루밤”을 20년째 쓰고 있는데, 나의 벗 권용원을 만난 후 47년 동안에 생명계로서는 짧지만 한 인생에서 제법 긴 시간을 함께 문제거리를 공유하였다는 점은 제 인생의 행복이었습니다. 이 기회에 그에게 존경과 사랑의 뜻을 표하고자 합니다.
권 동지는 “우여곡절(la sinuosité)”을 겪으면서 전쟁(la guerre)이 아니라 전투(lutte 사투)의 장과 투쟁(combat 가투)의 장을 넘나들면서 전쟁기계(노마드)로 살아왔으며, 이 나라와 8천만이 함께 가야할 길을, 새로운 공동체를, 또는 사회주의 건설을, ‘평화통일과 영세중립 코리아’를 모색하였다고 봅니다. 그는 제국의 주구인 전쟁기구(체제)의 부속물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한반도와 만주라는 경계를 넘는 광활한 토지의 진솔한 얼굴(풍경)을 지니고자 전쟁기계-되기(devenir 생성)로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들어가며
산다는 것이 먼저이고 철학한다는 다음이다.
철학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철학자도 한 인간으로서 시대와 역사에 별개인 현존재자가 아닙니다. 시대의 아들이자 다음세대와 연속된 아제인간입니다. 공간적 사고에서는 어제와 이제와 아제가 없지만, 시간적 사유에서 어제는 과거의 총체를 덩어리로 만들어서 현실에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어제는 이제에 연속되어 있으며, 그리고 이제는 항상 미래를 조금씩 갉아 먹듯이 앞으로 나가면서 다음 측정의 과정을 지니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이제는 아제에 예상참여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세대는 어제 세대의 선배이고 선두이며, 아제 세대는 이제 세대를 넘어서 예상 참여하는 세대로서 아제인간(니체의 초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 미래 또는 먼 공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좀 안다고 하였던 사람들 중에 칼 세이건이 젊은 시절에는 은하계 안에 태양계의 지구와 같은 행성이 많이 있을 것이고, 또 은하계를 넘어서 여러 성단에는 있을 수 있어서 수많은 지구 같은 행성이 있을 수 있다고, 계산상으로 상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도 말년의 연구에서는 2억 광년의 넒은 거리의 은하계에서 지구와 같은 행성이 또한 인간과 닮은 생명체가 있을 확률이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왜 일까요? 시간 지속에서 사유하였기 때문입니다. 최소 35억년의 역사의 과정을 거친 현 생명체가 서로 연관과 지지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메바와 균류 없이 척추동물이 만들어 졌다고 상상하는 것은 환상 또는 망상이라는 것입니다. 20세기 후반에서 동물 세포의 세포질 속에 있는 미토콘드리아가 DNA 검사에서 식물세포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미토콘드리아가 동물세포와 공생관계를 갖게 된 것은 지금까지 추정으로 20억년 전이라고 합니다. 생물학적으로 한 구조(절편)가 다른 구조(절편)와 톱니바퀴처럼 연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과 활동을 주는 총체적 연관을 맺고, 과정에는 무척 긴 시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이데아가 먼저 있고, 구조와 형태가 형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운동이 먼저이고, 운동의 과정에서 생성체가 생성하고, 과정에서는 구조를 선택하고, 그리고 외부적으로 형식을 갖추어 가게 되는 것이라 합니다. 생명체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la nature) 자체가 그러한 과정을 걷는다는 것입니다.
유학(儒學)에서 강조하는 성(性) 또는 본성(本性)은 흄(Hume)의 용어를 빌리지 않더라도, 서양에서는 인간 본성(human nature)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간 본성은 자연(la Nature)에서 나온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흄이 자연에 대해 인성론(Traité de la nature humaine, A Treatise of Human Nature, 1739-1740)을 썼는데, 러셀은 자신의 저서 서양철학사에서 칸트가 흄의 이 작품을 전혀 읽지 않았다고 하고, 프랑스 철학자 말에릅(Malherbe, 1941-)은 “아마도 거의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성 또는 본성이 자연 또는 내재성이라는 관점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에이도스 이론과는 전혀 다른 관점입니다. 이를 벩송 식으로 표현하면, 전자 인식은 ‘안에서’, 후자의 인식은 ‘바깥에서’라고 하고, 들뢰즈 식으로 표현하면 전자는 심층에서 사유이며, 후자는 상층에서 사고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총괄적 구분의 역사에서 달리 사유하는 철학자들이 있어왔습니다. 플로티노스의 전환에서,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에서, 루소의 자연주의 신앙에서도, 벩송의 지속에서도 간헐적으로 있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나가는 이야기로 브루노는 신의 무한이 아니라 자연(우주)의 무한을 주장하였다가, 로마 교황청에 불려가서 10여년 간 사상을 바꿀 것을 회유 당했지만, 끝까지 우주의 무한을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바티칸 광장에서 산채로 장작불에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나로서는 인류사에서 최고의 순교자가 브루노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던져진 이야기에서 여러분들은 서양 철학사에서 중요한 이중성(이원론이 아니다)이 있다는 점을 눈치 챌 것이다. 인도와 동양에서도 이런 이중성이 있다. 나가르주나(Nâgârjuna 150?-250? 용수, 龍樹)의 중론(中論)에서도 힌두교와 불교 사이에는 상좌부와 대중부라는 이중성이 있었으며, 달마대사 중국에 와서 전파에서도 중국지식인과 선불교 사이도 상부와 민중사이의 이중성이 있었고,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조계종의 총무원장과 종정 사이에 이중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들뢰즈에서 상층 대 심층, 정태적 대 역동적, 정주적 대 유목적, 폴리스 대 노마드, 그리고 전쟁기구(국가) 대 전쟁기계(공산)의 관점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들뢰즈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생애부터 잠시 훑어볼까 합니다.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생애와 작품
전쟁기계는 움직일 뿐만 아니라,
머물면서 결처럼 퍼져나가기도 한다.
들뢰즈는 프랑스 철학자이며 파리 8대학 교수였다. 1925년에 1월 18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리에서 고등교육과 소르본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여기에 한 사건이 있었다. 1942-43년 학기에 앙리4세 고등학교에서 파리 고등사범학교(ENS) 준비반에 들어갔는데, 다섯 살 위의 형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1944년에 체포되어 이송 중에 죽었다. 그리고 1945년 재수반에 들어가서 시험을 쳤으나 낙방했다. 그래도 1948년에 교수자격 시험을 통과하였다. 그러고 나서 아미앙(Amiens), 오를레앙(Orléans), 파리(Paris, Louis le Grand) 등에서 가르쳤다. 1955년에 소르본에서 조교(Assistant)를 맡았고, 4년 동안 리용(Lyon)에서 대학 강의를 맡았다. 그러고 나서 푸꼬의 후임으로 1969년에 생드니(Saint-Denis)에 있는 벵센느 대학(현재 파리 8대학)에서 가르쳤다. 그는 1987년에 9월 30일까지 이 대학에서 가르쳤고, 그러고 나서 은퇴하여 명예교수로 있었다.
이폴리트(Jean Hypolite)와 알끼에(F. Alquié)가 그의 스승이었다. 깡길렘(Georges Canguilhem)은 1949년 그에게 본능과 제도(Instinct et Institution)라는 작은 책의 방향을 제시했었다. 메를로-퐁티(Merleau-Ponty)는 마즈노(Mazenot)의 철학사전의 출판 기획에, 그에게 ‘베르그송’의 항목을 집필할 것을 권했다. 이 작업으로 나중에 그는 베르그송주의(Le Bergsonisme, 1966)이란 작품이 나오게 되었으며, 이 작품은 베르그송 해석에서 결정적이기도 할뿐만 아니라 들뢰즈 자신까지도 결정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다양체(le multiplicité) 개념을 처음으로 정교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경험주의와 주관성(Empirisme et Subjectivité, 1953)은 그의 첫 작품으로 스트라스부르에서 대학연구학위(diplôme d'études supérieures)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온 작품이다. 흄(D. Hume)에서 일종의 외디푸스적 구조의 발견이며, 이는 1948년 대학교수 자격시험통과 후 7년의 잠재적 시기 후에 나온 것이다. 그 당시 프랑스 철학의 연결 맥락에서 이 저자가 흄을 선택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들뢰즈는 몇몇 잊혀져가는 중요한 철학자들에 대한 매력을 표시한 것이기도 하지만 유물론과 경험론의 선호였을 것이다. 그에 앞서서는 중요했을지라도 세월의 변화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철학자들 즉 베르그송, 타르드, 니체들 뿐만 아니라 문학, 예술, 영화에서 소수자의 역할에 대해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는 헤겔주의자도 아니고, 프랑스 공산당(PCF) 당원도, 정신분석학 출신도 아니었다. 젊은 시절의 들뢰즈는 자기 동료들과 일찍부터 구별되었다. 그 자신의 선택에 의해 철학적 지평을 결코 떠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선택이 일관된 리듬으로 일련의 철학적 저술들, 니체와 철학(1962), 프루스트와 기호들(1964), 베르그송주의(1966), 학위 논문으로 차이와 반복(1968), 부논문으로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1968)을 출판하였으며, 이어서 특이성과 사건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구조 없는 구조”, 즉 후기구조주의를 알리는 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 1969)를 발표한다. 그러고 나서 1969년에 라깡과 결별한 가타리(F. Guattari)를 만난 것은 행운일 것이다. 가타리와 더불어 자본주의와 정신분석학에 반대하여 분열분석을 제기하는 앙티 외디푸스(1972)를, 철학사의 새 지평을 열어 유물론적 역사를 위상학적으로 전개한 천개의 고원(1980)을 출판하였다. 계속하여, 회화에서 프란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1981), 이미지론에서 영화1: 운동이미지(1983), 영화2: 시간 이미지(1985)』, 푸꼬(1926-1984) 사후 2년이 지나 푸꼬와 화해로서 푸꼬(1986),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1988), 담판(1990)등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논자가 “방법후설”이라 부를 수 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hilosophie? 1992)[이뭣꼬]도 있다.
만일 이 책들의 실질적 내용이 - 예를 들어 회화나 영화처럼 - 대학의 철학자들에게 고전적이 될 수 없다할지라도, 사람들은 - 정치학, 예술, 시학, 여러 과학들, 종교, 정신분석학 등등에서 - 철학자와 달리 생성의 향수(nostalgie)가 그의 작품 속에서 결코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도 들추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런 정식을 다른 저술들의 장점과 비교하여 판단하기를 원치 않았던 연구실의 철학자인 들뢰즈는 자기 세대 사람들에게 그 철학자(le "philosophe")로 불리어질 것이다. 그 철학자에게 매우 일찍부터 그런 명칭이 부여되었다.
들뢰즈 이해를 위한 본질적 작품은 그의 학위 논문인 차이와 반복(1968)이다. 이 작품의 구성방식은 다른 계열들을 암시하고 있다. 의심할 바 없이 그 책의 중심은 분할(division)의 플라톤 방식을 뒤엎는 것(renversement, 전복)이다. 사람들이 의미의 논리(1969)에서 다시 보게 되는 시뮬라크르(simulacre, 모방)는 분할의 시금석과 비존재의 환원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영원회귀가 (비형상적) 존재(Etre)의 권능일 때… 시뮬라크르는 존재자(l'étant) 즉 현재 존재하는 것의 진실한 특성 또는 형식이다. 시뮬라크르는 모델의 서열로부터 박탈당한 사물에서 구성하는 부조화(disparité constituante)를 파악했다.”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에 의해 니체에 대한 해석을 다시 드러내면서, 그는 어떻게 시뮬라크르가 기초되었고, 차이와 반복이 기초되었는지를 제시하였다. 들뢰즈는 이 분석으로 결코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그 다음에는 (천개의 고원에서) 음악의 “리토르넬로(ritounelle)”의 문제제기와 더불어 이 분석을 강조할 것이다. 차이와 반복이 죽음 본능의 이유 때문에 정신분석학으로 들뢰즈의 일시적 접근의 표시일 뿐이며, 이 접근은 의미의 논리속에서 그리고 안티외디푸스(1972)의 모호한 고발에까지 강조될 것이고, 결국에는 영화에 관한 반성과 함께 정신분석학에 대하여 순수하고 단순한 거부에서 끝나게 될 것이다.
들뢰즈의 방대한 저술을 따라가며 정리하여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저술에 보태어서, 그의 논문들 몇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푸꼬도 주목했던 니체 사상을 단행본으로 다룬 들뢰즈는 허무주의의 극복으로 니체와 철학(1962)을 쓰고서 「권능의 의지와 영원회귀에 대한 결론(Conclusion sur la volonté de puissance et l’éternel retour, 1964)」(화요몽 수도원에서)과 「드라마화의 방법(La méthode de dramatisation, 1967)」에서 내재성의 의미를 확신하며, 철학의 전복을 시도하여 「플라톤주의을 전복하다(Rverser le platonisme, 1967)」를, 그리고 학위논문을 마치고 스피노자에 관한 논문으로 정리하였다. 일련의 논문의 중요성은 「유목적 사유(Pensée Nomade, 1972)」(프랑스철학회에서 발표)과 「심판과 결별하기 위하여(Pour en finir avec le jugemen, 1993)」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여 생을 마감하기 전에, “집합과 다양체(Ensembles et multiplicités)”라는 기획물로서 마지막 원고로 「내재성: 생명…(L’Immanence: une vie…, 1995)」와 유고로서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L’actuel et le virtuel, 1995)」가 있는데, 이런 과정을 일변해 보면, 노마드 사유와 다양체의 특이성이 그의 지속적 관심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특이성(내용)의 특이자(형식)는 전쟁기계를 의미한다.
평가로서는, 푸꼬는 “언젠가 그 세기가 들뢰즈의 세기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프랑스 지식인 사전(위스망 편집)에서는 들뢰즈가 사회적 활동도 언론과 TV에도 활동이 없어서 항목 설정할 수 없다고 했으나, 편집진 회의에서 들뢰즈의 대중과 접촉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영화에 대해 두 개의 중요한 연구서를 냈다는 점을 감안하여 지식인 사전에 항목을 차지했다. 들뢰즈 사망 후 철학지 특집호에 조사(弔詞) 겸 존경으로 「수이다스(Suidas)」를 쓴 베르노(André Bernold, 1958-)는 그를 “혈거인”(troglodyte, 은둔지사)이라 표현하였다.
전복의 철학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별 학문의 퇴각.
사람이 먼저이며, 국가는 다음이다.
노동이 먼저이고, 자본(제국)은 다음이다.
들뢰즈의 사유는 플라톤주의에 대한 전복이지. 플라톤 사상 자체에 대한 전복이 아니다. 이와 더불어 프랑스 실증주의는 앙글로 색슨 철학에서 말하는 논리실증주의와 아무 연관이 없는데, 이는 마치 스피노자의 철학이 데카르트 철학과 아무 연관이 없고, 스피노자의 두 가지 속성의 계열은 라이프니츠의 평행론과도 연관이 없는 것과 같다. 게다가 스피노자의 신은, 종교에서 말하는 무에서 창조하는 신과 무관하며,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로서 신과도 무관하다.
왜 ‘플라톤주의’에 대해 문제를 삼는가? 박홍규 선생에 따르면 이 세상에 허무주의(회의주의) 극복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플라톤이다. 전자는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하면 되기 때문에, 그 극복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희망(사기, 기만)이 있다. 다른 하나는 데미우르고스가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를 어르고 구슬러서 이데아를 닮게 하는 극복이 있다. 전자의 방식을 스피노자와 베르그송은 착각(l’illusion)이라 하며, 후자의 방식은 데카르트 이래로 과학주의 또는 신칸트학파가 세계를 통일성 안에 있다고 여길 때 또는 헤겔이 변증법이라는 종합을 통해 절대성을 추상할 때 가능하다고들 한다.
플라톤 자신은 상층만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다. 플라톤은 신학자가 아니기에 심층에 대한, 즉 아페이론과 정념에 대한 고민을 죽 하였다고 한다(박홍규설). 창조(제작) 또는 생산에 관하여, 들뢰즈가 뽑아낸 시뮬라크르의 문제는 플라톤의 소피스트편에서 이다. 이데아를 닮은 시뮬라크르(모방체)와 아페이론에서 생겨나는 시뮬라크르(모방체)가 있는데, 전자에는 아테네의 이상을 따르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진실한 시물라크르이고, 그렇지 못한 닮음으로 이방인들(소피스트)의 시뮬라크르는 추방해야 한다고 한다. 들뢰즈 방식에서는 이데아가 없으며, 닮아야 원본이 없다. 그래서 각자가 자기의 특이성을 발현하는 것이 시뮬라크르라 한다. 그래서 시뮬라크르의 전복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기에,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특이성을 완성하는 길을 매진하였고, 그 길을 끊임없이 가는 것이 욕망의 화신이었다. 그도 이데아가 먼저 있어서 그 원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본다.
플라톤주의에 대한 올바른 문제는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다. 정지에서 운동으로 가는 사고가 아니라, 운동자체로부터 사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뭣꼬”를 문제 삼은 소크라테스는 대중부였는데 비해, 플라톤은 상좌부였다. 상좌부의 사고의 틀은 선분의 비유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물 대 그림자’의 대비로 ‘노에마 대 노에시스’라고들 한다. 이를 동심원으로 상상하면, 중심의 선의 이데아, 노에마, 노에시스, 사물, 그림자 이며, 동심원에서 멀어져 가는 것이 진리 또는 정의(la définition)이 안 되는 경우이다. 이를 뒤집어서 보면 플로티노스의 동심원이 보이는데, 중심에 일자, 누스, 로고스, 사물, 부스러기로서 동심원을 그릴 수 있다. 이 일자가 정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재성이라는 점에서 플라톤과 다르다.
플라톤주의에서는 이데아가 실재성이며, 스피노자와 벩송에 의한 플로티노스에서는 일자가 실재성이다. 이 역전은 실재성의 이중성, 이데아의 이중성, 자연의 이중성과 더불어 사유해야 한다는 점을 알린다. 플라톤의 영원불변은 천체에서 스스로 동일하게 움직이지만 불멸성인데, 플라톤주의는 동일 운동성, 영원성, 불변성, 불멸성(아타나토스)으로 간다. 플로티노스의 일자의 합일이 불멸성이라고 보면 역전됨을 알 수 있다.
서양학문사는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우위로서, 플라톤이래 2000년 동안 이어져 오다가 천문학이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뒤바뀌면서 우주의 무한이 열리고(1600년, 브루노 죽음), 갈릴레이의 재판(1632)이래로 절대성이 아닌 상대성의 인정으로 자연학이 하늘에서 빗금을 타고 내려와 물리학으로 성립한다. 그럼에도 데카르트만 보아도 수학은 분석기하학(해석기하학)이 여전히 상층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달리 사유했다.
계몽주의에 이르러서도 크리스트교가 말하는 자연은 피조물이었다. 그럼에도 루소는 숲 속에는 악마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인간의 품성은 자연에서부터 왔으며, 종교도 자연종교이어야 한다고 했지만, 이를 주목을 한 철학자는 칸트였다. 그럼에도 칸트는 권력과 권위에 안주하여 자신이 쓴 자연종교에 관해서는 살아서 발표하지 않았다.
벩송은 학문의 탐구가 갈릴레이에 의해서 지상으로 내려오고 그리고 200여년이 지난 19세기에는 지상의 내부로 또는 사물의 내부로 들어갔다고 한다. 실증과학의 ‘달리 말하기’는 프랑스 혁명 덕분이다. 프랑스 혁명은 두 상층, 권력과 권위를 제거했었다.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보내어 왕권을 인민권(의회)으로 바꾸어 놓았고, 성직자들을 단두대로 보내면서 하늘(상층)의 권위를 지상(자연)으로 바꾸어 놓았다. 자연은 이제 피조물이 아니라는 스스로 생성하는 관점이 대두될 것이다.
생물 변형론에서, 화석에 대한 또는 사라진 동물들에 대한 논쟁에서 출발한 조프르와 생틸레르와 퀴비에 사이에서, 생명체의 형성에 대한 논쟁은 플라톤주의자인 퀴비에의 승리였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둘째 혁명이 일어날 시기인 1830년 전후에는 사물의 외부에 대한 논의에서 사물의 내부에 대한 논의로 바뀌었다. 생물학은 현미경의 발달로 콜레라 질병이 세균임을 안 것은 1831년이었다. 물리학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이 개념은 이데아와 유사하며, 부동이고 영원하다)의 내부에는 전자와 핵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이 시기이다. 화학의 발전은 물론 대혁명과정에서 단두대에서 사라진 라브와지에의 공기 속에 산소를 규명하면서 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실재성이 아니라 추상공간(또는 절대공간)의 선가정이라고 제기한 볼리야이와 로바체프스키 등이 있었다. 산술학에서 단위 1의 개념을 문제 삼았던 젊은 두 수학자, 아벨과 갈르와도 있었다. 이들의 단위에 대한 물음은 1859년 리만이 교수취임에서 비유클리트 기하학의 성립을 선언할 때쯤에서 다시 조명된다. 1820년에 외르스테드(Ørsted 1777-1851)가 전기와 자기 연관을 제시하고, 1831년에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가 ‘전자기 유도법칙’을 발표한다. 이 시기에 이데아와 에이도스의 실재성은 추상의 극한으로 수 또는 절대 공간에 대한 사고이며, 실제로는 사물의 내부에 실재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프랑스 바칼로레아 철학은 이런 시기를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이 무너지는 시기라고 한다.
카르노-마이어-클라우지우스로 이어지는 열역학은 새로운 장(위상)을 연다. 운동량 보존의 법칙을 인정하는 것과 달리 생성하는 힘이 실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의학이 발달에서는 끌로드 베르나르의 실험의학 연구 입문(1865)은 생명현상에서도 플라톤의 이데아와 다른 이데아(이념)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벩송이 읽어 낸다. 이데아 개념의 이중성은 이제 양적 추상의 이데아와 달리 질적 추상의 이데아도 있다고 할 것이다. 이즈음에 1859년에 파리에서 인류학 학회가 성립한다. 인간에 관한 실증으로 생물학에서 의학으로, 혁명을 거치면서 사회학과 인류학의 성립에 이어 인종학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생명체와 사회체(socius)라는 두 가지 형식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하나는 내재성의 형이상학이고, 다른 하나는 표면에서 제도와 관련된 문제라는 것이다.
원리와 법칙에서 상층을 먼저 상정하고, 그에 따른 표면과 내면의 파악이라는 사고를 뒤엎는 또 다른 중대한 계기는 무한의 종류가 여럿이라는 점에서 이다. 미분의 이원성을 넘어서는 허수와 복소수에 이어서, 1882년 파이(π)라는 수를 규정할 수 없어서 초월수(초한수)라고 하고, 또한 초월수의 종류가 여럿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칸토르의 집합론에 이어서 무한의 파라독스가 제기되었으며, 그 다음 러셀의 논리주의와 힐버트의 형식주의와 달리 사유하는 21세기의 직관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벩송의 사유는 직관주의에 속하며, 들뢰즈는 이런 수학적 공간을 사회체에 적용하여 유형학과 위상학을 구분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위상학은 리만의 다양체와 벩송의 ‘안에서’와 공연적이고, 들뢰즈의 용어로 “고른평면”(상수평면, 플라노메네 아이티아, 비유클리드 공간, 왕관 쓴 아나키스트)과 같은 의미가 될 것이다. 이쯤에서 고른 평면의 위상에서 사회체의 변형과 기호들은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 또 다시 탈영토화라는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알릴 것입니다.
노마드와 탈영토화
민들레 꽃씨는 바람에 흩날리고
영토의 이중성, 성내(폴리스)와 성밖(노마드): 대구는 성(한양) 밖에 있으면서 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착각도 아니고, 차라리 공상을 넘어서 환상에 빠진 것 같다.
우리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는 이미 상층의 이데아란 착각 또는 허구의 관념이며, 내부 또는 내재성도 또한 관념(이데아)이라고 보았다. 추상화의 길에서 상층(높이)으로 가는 추상화는 내용을 뺀 형식만 남은 이데아이고, 심층(깊이)로 가는 추상화는 형상과 형태를 뺀 순수 질의 이데아임을 보았다. 상층의 공간적 무한과 길이(etendue), 시간적 무한과 지위는 우리의 지각과 사고의 범위를 넘어서 버렸다. 우주역사 135억살(±8억년)이든 우주길이 125억광년이든, 사실이라기보다 사고의 계산이다. 은하계의 직경 2억광년도 인간의 것이 아니다. 지구와 태양 사이 8광분이라는 것에서 45억년 정도의 지구가 과정을 겪었다.
인류가 원숭이와 갈라진 것이 8백만년 전이고 그리고 6백만년 전에 유인원(오랑우탄, 침펜지, 고릴라)과 갈라지면서 먼저 팔이 탈영토화 하였고, 200만년 전에 대퇴부의 발달로 초원을 가로지르는 능력으로 경추(목뼈)가 바로 서면서, 소리(고함)의 탈영토로서 목소리(음절)을 갖는다. ... 구석기에서 신석기를 거치는 중에 지구의 짧은 빙하기가 풀리면서, 인간은 돌에 의한 도구의 제작으로 엄지손가락의 탈영토화를 완성하였다. 신석기의 돌 문화는 이집트, 마야, 잉카 등에서부터 중첩적으로 이어져 왔다.
통상 만년 전의 해빙기 이래로 수렵이 방목으로, 식물 채집이 재배로 바뀌었다고 하는 데, 이는 문화의 발달과정의 결과를 원인에 덧 씌어서 설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간단히 기원전 1200년 경에도 수렵과 방목은 공존하였으며 남자들만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도 사냥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정주적 집단 형성과 이동 집단의 구별에서 보면, 인류는 구석기에서 신석기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장소에 머물기보다 떠돌이 생활이었다. 들뢰즈 표현으로 산림과 토지와의 상호 연관 속에 있었다. 곡식 재배의 토지는 항상 산중의 야금술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기원전 7천년 경에 구리의 사용은 영토화의 확장으로 아나톨리아 지역을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들뢰즈 이 시기에 공동체의 영토 양식이 분화, 정주적과 노마드가 있다고 본다.
기원전 3천5백년 경에 청동(구리와 주석)의 발명과 수레는 삶의 영토를 두 극으로 공동체를 성립시킨다고 한다. 정주적 농업도구(곡갱이)와 노마드의 전쟁도구(창 칼)는 금속도구의 양면성이며. 짐을 나르는 말과 무사가 타는 말은 말의 양면성이다. 토지의 생산성이 높지 않은 시기에는 유목적 양식이 우세했다고 여긴다. 토지에서 공동체의 집중화는 생산성의 향상에서 오는 것인데 철기문화의 도래였다. 기원전 1200경에 철기 문화의 시작에서 정주적 폴리스에 삼위격이 유형을 만든다. 이 시기의 인도 유럽 문화에서 국가의 성립이 있다. 중국에서도 주나라의 문화는 청동기 정(鼎)을 대표로 하지만, 제사에서 양의 노마드에서 삶은 돼지라는 정주적 문화로 이전 시기라 할 수 있다. 제도상으로 선양에서 세습으로 이전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의 형식이 갖추어진다.
그리스에서 1200년경에 트로이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호머의 서사시를 거치면서 아테네에서도 이중적 두 극을 볼 수 있다. 제우스가 산중이고, 데메테르가 밀밭이며, 폴리스의 성립에는 앞선 크레타 문화를 무찌른 테세우스가 국가를 성립시킨다. 노마드라는 용어는 노메에서 나왔다고 하며, 동일 명사에 이중성이 있다. 노모스는 협약, 규범이고, 노모스는 초원, 또는 분배의 뜻이다. 이 이중성은 들뢰즈에서 폴리스와 노마드로 설명된다. 폴리스(성내 城內) 기술적 분업으로 잉여가 나온다. 토지의 생산보다 기술 생산에서 잉여뿐만 아니라 축적도 더 높다. 들뢰즈는 이런 공동체(도시)가 어느 시점에 국가적 형태로 갑자기 성립한다고 했다. 개별자들의 결합(연접)과 조합(연결) 양식이 양의 확대뿐만 아니라 질적 향상을 가져다주는 것과 같다. 폴리스(국가)에서는 생산에서 잉여를 교환에서 이익을 만드는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행정기구 군사기구 등을 만든다. 시민을 제도화시키고, 식민지를 개척하며 착취와 교환 이익을 극대화하려한다. 이에 저항하고 항거하는, 전투(la lutte)[헤라클레스], 투쟁(le combat)[퀴니코스]에 이어져 온 노마드가 다양체인 셈이다. 이들은 폴리스의 전제군주에 포획되거나 복속되지 않으려 한다. 이런 노마드도 수직적 체제가 아니라 수평적 정치체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이동적 제국을 형성한 역사적 기록은 몽골제국이 마지막이다. 노마드의 공간개념은 매끈한 공간이다. 자본주의 발달로 형성한 영국제국은 홈패인 공간의 활용으로 매끈한 공간과 다른 측면이다. 다음으로 매끈한 공간의 활용으로 등장한 제국으로는 금융제국이라 할 수 있다.
자본(금융)은 재영토화된 군주적 체제를 탈영토화하여 이자(이윤이 아니다)에 복속하게 하는 명령어를 만들어 내면서, 실재성 없는 화폐를 발행할 수 있었다(제4장). 금융제국도 국가처럼 자기(금융)의 지위(유형)를 형성 위해 인식의 삼위격처럼, 즉 이데아론, 합리론, 경험론 삼격처럼, 한편 부속기구로서 전제정체(제국)을 부속물로, 다른 한편 전쟁기구로서 군대와 공포의 무기를 구축(구성)하고 있다. 이에 노마드의 대항은 소수화되었고, 짧은 시기로 우연적 등장처럼 보이지만, 고른 평면의 흐름처럼 대항자들은 매끈한 공간을 흐르는 전쟁기계로서 죽 있어왔다.
한가지 보태어, 철기시대가 5백년 경에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제련과 야금의 발달로 철기시대를 벗어나는 것은 마담 뀌리의 라듐과 플로토늄의 야금술이 있었으며, 곧이어 우라늄의 야금도 있다. 야금의 기술이 국가에 포획되었던 것이 미국의 만하탄 계획과 히로시마 투하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전쟁기계도 여전히 성립한다. 파키스탄의 핵무기 생산의 칸 박사를 예로 들 수 있다. 미제국은 지금도 전쟁의 공포에 의한 지배와 복속의 재영토화의 과정을 가고 있지만, 멕시코 인민들의 미국 장벽을 넘는 것도 소수자의 전쟁기계로서 볼 수 있다.
명령과 공포의 제국에 대항하여 저항과 항거로서 노마드의 과정은, 국가의 영토화에 끊임없이 탈영토화하고, 제국이 재영토화하는 것을 또 다시 탈영토화한다. 이 탈영토화의 내재성의 평면을 토대로 한 특이자들이 주체이라는 점이다. 이 다양체는 스스로 자유, 자치, 자주를 퍼뜨리기 위해 노력(conatus)하며 작동하는 권능(puissance d’agir)을 끌어낸다.
전쟁기계와 자유, 그리고 자주
규소의 시대, 반도체 시대.
트랜지스터 안에는 작은 인간(두뇌)이 들어있는 게 아니다.
노마드의 활동과 분배는 들뢰즈에서 제기 된 것인데 비해, 전쟁기계는 거의 가타리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들뢰즈가 벩송을 통해 다양체와 실재성, 니체를 통해 권능의 발현과 아제인간을 거쳐서, 「드라마화의 방법(1967)」에서 사건과 특이성의 위상적 확장의 과정을 설명하는 시기에 역동론과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의 공연성을 보았다. 차이와 반복(1968)에서 심층, 표면, 상층의 위상(지층)을 구성(composition)하였다. 여기서 주체라는 것을 표면에서 제도 속에 활동인 것이 아니라 내재성임을 알린다. 공산당원이자 정신과의사인 가타리를 만나면서 표면에서부터 인격의 활동(특이성)에 대해 그의 이론을 확장할 기회를 갖는다.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외디푸스(1972)는 가타리가 관심거리를 이야기하고 들뢰즈가 형식을 갖추어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심층의 토지(영토), 표면의 국가, 상층의 권력(또는 자본)이라는 구도를 완성한는데, 이런 것을 주관과 객관의 철학에서는 삼각구도 속에 넣고 있으며(크리스트교의 삼위격), 특히 정신분석학의 아버지-어머니-아들이라는 삼각 구축(construction) 또는 구성(constitution)에 빠져있음을 공격하면서, 분열분석을 제안한다. 그리고 욕망이란 부족과 결핍이 아니라 충만으로 넘쳐나는 것이라는 점 지적하고, 벩송의 의식(기억 생명)의 실재성을 토대로, 스피노자의 작동하는 권능과 연결하여, 니체의 권능의 의지와 함께 결합시키고, ‘기관없는 신체’라는 준안정상태의 덩어리로서 무의식의 생성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천개의 고원(1980), (6장)) 이러한 관점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면 소크라테스의 “이뭣꼬(ti esti)”에서 무엇을 추구하는 것은 플라톤처럼 ‘무엇’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위에서는 것도 선과 악을 정의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잘하려고 실행하는 것이라는 활용론(le pragmatique)을 제시한다.
토지를 바탕으로 국가의 성립이 이중성이라 했다. 그 체제론에서는 이제 토지와 생명의 활동성이라는 존재론과 속성론(인식론)에서, 위상적 차원을 높여서 표면 위로 논의를 전개 한다. 고대에서 아페이론 대 원자(와 허공), 근대에서 사회체에서는 신체도 기계라는 데카르트 기계론이 있고, 계몽기에서는 초기 유물론자들(엘베시우스)에게 동물기계론으로 전수 되었고, 그리고 맑스가 말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라 하는 생시몽주의자들에게도 아나키스트라는 푸르동에도 이어졌다. 철학적으로는 사회와 종교를 설명하면서 우주가 신들[인민, 특이자, 전쟁기계]을 만드는 기계라고 벩송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말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사회체 내에서 기계의 여러 종류를 말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이 되기(생성)하는 추상기계를 제시한다. 이런 기계들의 활동성을 리좀이라고 하기도 한다. 두 저자는 리좀(1장)을 먼저 쓰고, 인류의 긴 역사에서 사유과 기계[영혼과 신체, 정신과 물체] 또는 내재성과 시뮬라크르의 이중성(이원론이 아님)이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를 서술한 것이 또한 천개의 고원(1980)이다.
앞에서 말한 학문사적 발전과정을 제외하고, 전쟁기계에 관한 부분만을 두 철학자의 견해를 재구성해 볼 필요가 있다. 탈영토화는 영토를 떠나 다른 영토로 올라가는 추상화와 변증법이 아니다. 내부에는 구 영토가 자리하고 있어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는 중첩적 또는 압축적이기도 하고 확장적이다(제3장). 이 확장은 여전히 다중적인데 우리는 설명의 간소화를 위해 이중적(dédoublement)으로 나갈 것이다. 유목적과 정주적, 노모스와 폴리스의 이중성에서 역사가들은 정주적이고 폴리스가 주류인 것 같이 보았지만, 두 철학자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기원전 7천경에 아타톨리아 지방도(13장), 1227년 징기스칸의 몽고 제국도 그러하다(12장). 그럼에도 소수자인 백인의 사회제도에서는 알렉산드리아(기하학)와 로마(물리학, 실용학) 체제가 홈패인 길을 만들면서 제국이 성립했던 것을 우월한 것으로 여긴다. 사실 우물 안(지중해 바구니)의 개구리 사고인 셈인데, 들뢰즈는 홈패인 공간에서 위계적이고 전제적인 제도를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서구중심의 시각이 그들의 철학사와 학문사였는데, 이 관점에 균열을 낸 것은, 1440년 포르투칼의 헨리케 선장이 위도 적도 아래로 배를 몰고 갔을 때, 길(홈패인 공간)의 기준을(즉 북극성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14장). 이런 사고에서도, 몽고의 유목처럼, 홈패인 공간이 아니라 매끈한 공간이라는 개념이 들어온다. 전쟁기계는 매끈한 공간에서 생겨난다. 말하자면 흐름의 강도와 방향의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영국이 제국을 형성한 것은 지구를 위도와 경도로 나누고 매끈한 공간을 홈패인 공간으로 재구성(재영토화)하였고, 제국은 무기와 지식(인식체계)를 바탕으로 재코드화를 이루었으며, 이런 방식의 연속이 금융에서 미국의 브레튼 우주의 코드화의 과정일 것이다.
매끈한 공간과 홈패인 공간은 이중성으로만 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 한다. 새로운 공간으로, 이중화를 넘어서, 구멍파인 공간의 개념도 등장했었다. 일차대선에서는 이전의 마력(馬力)을 바꾼 자동차(전차)와 더불어 총을 화장하여 바꾼 대포가 전쟁의 코드를 바꾸어 놓았다. 대포가 떨어진 자리에는 두 번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멍파인 공간이란 개념이 등장하는데, 역사적으로 산림의 야금술은 끊임없이 구멍을 파고 있었고, 또한 폴리스가 아닌 진지를 구축하는 진지전에서도 구멍파기는 있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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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스 안에는 언제나 위계질서가 있으며, 법률 또는 계율이 문서(등록된 장치)에 의해 등록되어 질서 있고, 일관성 있고, 안정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청소년들이 교복을 좋아하는 것, 그리고 제도 속에 안주하는 것, 그리고 검사가 원칙과 법에 의해서 실행한다고 하는 것 등은 질서를 신뢰하는 정도를 넘어서 복속하는데 익숙한 것으로 보이는데, 왜 이 인간들은 스스로를 예속하기를 바라는가? 이러한 질문은 사실상 스피노자의 질문이었다.
전쟁기계는 국가에 복속하는 정보부, 군대, 검찰기구 같은 권력기구 속에서 제도적으로 활동하는 인간(개체)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기계는 제국의 하수인(주구走狗, 용병)이기를 거부하는 심층의 다양체, 다양체로서 특이성 자체는 비인격적이고 비규정적이지만, 그 자체는 인민의 물결이며 그 속으로부터 특이자로서 활동하는 인격을 지칭한다. 반도 남측에서 예속을 바라지 않은 인간이 있기는 있느냐고 거꾸로 질문하는 이들이 있었다. 한마디만 하자, 쿠바처럼 봉쇄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 한반도인데, 한 5년 허리띠 졸라매고, 5조원의 방위비 주지 말고, 미군 나가라! 라고 외치면서 노력해서 살아보자. 스피노자가 이미 말했다. 인간이 감화의 권능을 발휘하여 자유와 환희를 맛보기 위해 노력하는 자는 드물고, 그 노력은 어렵다고 했지만, 그래 한번 해보자. 자유를! 자주, 자치를, - 평화통일 영세중립 코리아. 각설하고,
전쟁기계를 설명하는 데, 왜 주구(走狗, 개들)가 나오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사실 전쟁기계란 노마드 이론상 간단하다. 정주적 위계 또는 계급사회에 저항하고, 역동적인 평등사회를 구현하고 노력하는 인민이 전쟁기계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세계사에서 마치 이중구속처럼 이중성으로 50대 50 정도의 비례를 왔다 갔다 하면서 계속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게 보이는 것은 남북의 상황이 갈라져서 파란 안경을 쓰고 보면 그렇다. 지구가 자기장을 형성하고 있는데, 막대자석을 반을 잘라 보라, 반으로 남은 것이 하나의 극으로 남지 않는다. 그래도 남은 것은 반은 N극이며, 다른 반은 S극이며, 자연이 그러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관념의 통일이나 절대라는 변증법은 자연에 속하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로 구성(constituer)에 있다.
정주적 체제가 더 안정적으로 여기는 것은 도시(폴리스)라는 분업적 구조 속에서 잉여가 넘쳐나고, 그 잉여의 노마드적 분배보다 욕심과 탐욕을 채울 수 있는 기회로 여기는 정념이 더 많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야만의 사회라고 하고, 니체는 이런 사회가 비참(le tragique)하다라고 한다. 니체는 전 저작을 통하여 보불전쟁에서 이긴 프러시아의 국가주의, 크리스트주의, 예술국가주의를 망치로 부수고 극복하는 것이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잉여와 분배의 문제 해결은 정주적 체제에서 위계적인 한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낙수효과는 거짓이기도 하지만, 힘센 자 또는 강한 자에 대한 우월을 인정하는 도덕론 또는 철학적 체계가 문제거리일 수 없다. 왜냐하면, 문제거리는 절대적 완전이나 통일된 하나의 방식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활용론을 주장하는 이유이다. 오일러는 하나의 수학문제를 푸는데 50여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한다.
체제의 완전성, 통일성, 불변성, 그리고 영원성이 억압과 착취의 위계적 체계임을 알린 자들은 철학자에서보다, 스피노자의 제자들로서 문학자들, 니체(1844-1900), 로렌스(1885-1930), 카프카(1883-1924), 아르토(Artaud, 1896-1948)이다. 이들의 특징은 크리스트교의 삼위격이 제도와 체제 속에 작동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인간은 알과 같은 존재자로서 그 위도와 경도를 긋기에 따라 삶의 위상과 유형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인간들 사이에 우월과 선이라고 하는 가식을 벗어나야 한다. 즉 편리(공리주의)와 이익(확대분업)을 통한 생산에서 잉여를 착취하지 말고, 능력이 있어서 많은 생산과 여유가 있으면 그냥 주자(donner)(증여 le don)라는 것이 노마드의 삶이며 삶의 즐거움 영위하는 양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자본주의자들이 걸핏하면 성금을 거두거나 또는 무슨 재단을 만드는 것인데, 성금(le don)은 노마드의 표현인데 비해, 재단 기금은 폴리스에 포획된 것이다.
두 저자에 의하면 서구(백인)는 소수자로서 자기 욕망을 확장하면서 세계를 자기중심으로 코드화 하려고 했지만, 노마드의 활동은 여전히 제국에 대해 저항과 항쟁, 전투와 투쟁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노마드로서 탈제국과 탈코드화를 이어가는 소수자들과 특이자들이 전쟁기계이다.
덧붙여서
인류사는 전투와 투쟁의 과정이다. 전쟁이 아니라.
자연이 생성이고 세분화이기 때문이다.
폴리스에서 벗어나는 유목적 사유를 하거나 활동을 하거나, 저항 또는 항쟁을 하는 개별자 또는 집단 등을 일단 성격상 특이성이라 부른다. 이 특이성은 “비인칭적이고 또한 전개체적이고 자유로운 특성이다.” 이 특이성은 깊이에서 경계도 계열도, 전형도 성립하지 않은 위상적 덩어리(아페이론)이며, 이 덩어리는 항상 운동하고 있고 거의 무한하며, 변형과 변질이 가능하며(이 가능성은 실재성이다), 진동하고 있는 상수(항상성, 영속성)이다. 이로서 이것을 들뢰즈는 내재성의 평면, 즉 생명(삶)이라 부른다.
이 깊이(심층) 내재성의 평면은 언제나 현재에 맞붙어있는 실재성이며 현실에서 분화한다(차히). 물론 스피노자 식으로 현실태의 양태로서 지속하는 두 가지 선들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생명체의 배 발생과정을 감안하면, 스피노자의 무한 속성처럼, 무한한 선들이 있다. 이들이 현실태에서 계열들을 형성한다. 계열의 터미널에선 인격 즉 주체를 학문적으로 다룰 때, 사건에 대해 “이 뭣꼬”를 물어야 할 것이다. 벩송의 “방법후설”에서 말하듯이 정확성과 문제제기를 올바르게 해야 한다. 들뢰즈는 「드라마화의 방법」에서 “뭣꼬”를 본질에 대한 물음이라 한다. 이 본질에 대해 누가?(qui?), 얼마나?(combien?), 어떻게?(comment?), 어디서?(où?) 언제?(quand?)라는 유형의 질문들이 더욱 훌륭할(meilleures)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속에서 전쟁기계로서 특이자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하일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이나 김성종의 여명의 눈동자는 문학의 영역이지만, 살아왔던 그 시대의 아제 인간들을 이병주의 지리산에서 볼 수 있다. 구체적 실례로서는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것이지만, 소수민족 회의에 레닌과 함께 했던 이관용, 러시아 볼세비키 적군 소속으로 시베리아의 별인 이위종, 멕시코에서 쿠바에 걸쳐서 활동했던 헤로니모 임 등도 전쟁기계이다. 전투만이 아니다. 투쟁에서 불교에서도 서산대사의 맥을 잇고 있는 경허 스님과 용성 스님, 그 제자로서 만해 스님도 들 수 있다. 뿐만이 아니다. 게다가 덩어리(고른평면)만주의 독립운동, 의열단, 남부군, 지금도 우리 주변에 회자되고 있는 통혁당, 인혁당, 남민전 등에서 전쟁기계의 활용론(le pragmatique, 실행론)에 대해 정확성과 올바른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전쟁기계는 매끈한 공간만이 아니라 구멍파인 공간의 활용도 있고, 표면 아래에서 흐르는 활용도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들뢰즈/가타리 일 것이다.
이로서 21세기에 고른 평면에서부터 열린 이성, 열린 사유, 열린 학문, 노마드 과학, 열린 도덕, 열린 종교 등으로 가로지고 다리를 건너는 활용과 사유의 과정을 탐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14:17, 52VMG) (15:03, 52VMH)
첨: 현실태로서는 촛불 시위 이후에 청와대 들어가는 경복궁 담길 건편에는 이석기 의원 무죄석방과 초통진당 해산 무효의 작은 천막이 지난 겨울도 이겨냈다. 그 옆에는 동병상린하는 두 천막, 전국교원노조 천막과 전국공무원노조 천막이 나란히 있다. 올 여름 슬며시 전관훈의 가설무대 비슷한 것이 들어오더니 어느 틈엔가 자리를 잡으면서 밤마다 전기 환하게 켜놓고 유투브를 생산하여 날리는 데, 그 불빛에 꼬여드는 한국당 정치인들이 수두룩하다. 즈저께 병원으로 실려간 황교안은 청와대 분수대에서 몽골 천막을 치고 누워 있었다. 두 종류 천막 중에 어느 천막이 소크라테스 시뮬라크르 인지 소피스트 천막인지 들뢰즈의 이론으로 보면 잘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전복의 철학, 플라톤주의의 전복이 아닌가! 진정한 전쟁기계가 어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경원이처럼 미국가서 북미회담 연기해 달라고 하는 시뮬라크르가 부일 숭일 시뮬라크르 이리라. (15:14, 52VMJ)
강연대구1911들뢰즈발표완.hwp
# 참조 1
역자 서문 - 연애에 관하여
이탈리아어 판 서문
머리말
1. 서론 - 리좀
2. 1914년 -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5.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6. 1947년 11월 28일 - 기관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7. 0년 - 얼굴성
8. 1874년 -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9. 1933년 - 미시정치와 절편성
10.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11. 1837년 - 리토르넬로에 대해
12.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3. 기원전 7000년 - 포획 장치
14. 1440년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5. 결론 : 구체적인 규칙들과 추상적인 기계들
***
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3. 기원전 7000년 - 포획 장치
5.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 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7. 0년 – 얼굴성 319-363
12.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4. 1440년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0.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11. 1837년 - 리토르넬로에 대해
8. 1874년 –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2. 1914년 -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9. 1933년 - 미시정치와 절편성
6. 1947년 11월 28일 - 기관 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227년 서하(宁夏, 저하) 정벌과 징키스칸 사망]
[왜 서양사의 사건에서 제로(0)년 다음으로 1440년일까? 한글 창제 1443년인데.. (50SKH)
첫댓글 본문의 이관용(李灌鎔, 1894-1933)은 박진순으로 바꾸어야 한다.
- 박진순(朴鎭淳, 1897-1938?) 일제강점기 고려공산당 대표, 극동인민대표대회 한국대표단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1920년 7월 레닌그라드(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코민테른 제2차 대회가 열리자 박진순(朴鎭淳)과 함께 한인사회당 대표로 참석했다. 스탈린 숙청 1937년 12월 테러단체에 참여하였다는 혐의로 체포, 1938년 3월 19일 사형이 집행. 1956년 7월 소련 최고회의 결정으로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