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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내를 이룸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 ~ 4)
야고보서의 주제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하기 위함’이다. 성숙해 갈수록, 시간이 갈수록 점점 온전하고 구비하고 부족함이 없이 되어야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어서, 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있어서 만반의 것이 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1. 인내란?
첫 번째 말씀이 ‘인내를 이루라’는 말씀이었다. ‘인내’라고 하면 우린 칼 도(刀) 자 밑에 마음 심(心)자인 참을 인(忍) 자를 쓴다. 한자로 읽으면 그 뜻이 아주 섬짓한 말이다. 이는 칼 같은 마음으로, 칼을 가는 마음으로 참으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 있는 말씀은 그런 참음에 관한 말씀과는 조금 뜻이 다른 말이다. 인내라는 말을 찾아보니까 ‘머물러있다. 거기 유한다. 기다리다’라는 뜻이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다.’ 물론, 참아야 머물러 있을 수 있다. 우리 신화에 보면 호랑이와 곰에게 마늘과 쑥을 먹으라고 했더니 호랑이는 성질이 급해서 나가고 곰은 느긋해서 참고 있다가 한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참는다는 말 뒤에는 머물러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 인내라는 말은 ‘머물러 있다’는 말이 담겨져 있다.
‘무엇 무엇을 따라서 달린다. 머물게 한다’는 두 말이 합해져서 히랍어에서 합성어가 되었다. ‘머무르게 한다, 남는다, 거하다’라는 뜻에서 발전해서 ‘영존케하다.’는 뜻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말이다.
누가복음 1장 56절에 이 말이 쓰였는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기를 배었을 때 엘리사벳이 와서 함께 있다가 갔다고 했을 때 이 말이 쓰였다. ‘함께 있다. 머물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히브리서 12장 27절에는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해서 진동하고 변하는 것들을 두었다’는 말이 있다. ‘거하고 영존케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단순히 칼을 갈고 이를 가는 마음으로 참는다는 뜻이 아니다.
‘인내를 이룬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따라서 달리고 그리스도 안에 머무른다’는 뜻이다. ‘따르고 머무른다’는 뜻이고, ‘따르고 거한다’는 뜻이다. 즉,‘인내를 이루라’는 말은 ‘따르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이루라’는 말씀이다.
2. 시험은 따르고 머무르게 함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다. ’온전히‘라는 말은 ’여러면으로, 모든 면으로‘라는 뜻이다. 어떻게 시험을 당하든지 간에 그 시험 당하는 것을 각 방면으로도 다 기쁘게 여기라는 말이다. 이렇게도 기쁘게 여기고 저렇게도 기쁘게 여기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내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험을 당하면 그것을 여러 면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면 그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인내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시험을 당했을 때 내가 피해버리면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머무르는 인내를 이룰 수가 없다는 뜻이다. 시험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머무르는 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학생과 시험을 생각해 보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학교에서는 늘 시험을 본다. 선생님을 따르게 하는 것은 시험 때문이다. 만약 시험을 보지 않는다면 학생들은 선생님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시험을 늘 보기 때문에 선생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어야 된다. 시험을 잘 보는 학생들은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학생들이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잘 안 듣고 딴 짓을 하는 학생은 도저히 시험을 잘 볼 수가 없다. 시험을 잘 치르려면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따라야 한다. 그러면 학교에 머무르게 된다. 학교에 남게 된다. 학교에 거하게 된다.
선생님 말씀을 안 듣고, 시험을 회피하고 시험을 잘 못 보면 어떻게 되는가? 학교에서 잘려 나간다. 떨어져 나간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뜻은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결국은 공부를 하게 된다. 시험이 있기 때문에 공부를 하게 된다. 시험이 없다면 아마 학생들은 공부를 하지 않을 것이다. 시험이 있기 때문에 공부를 한다.
우리 나라 고등학생들 처럼 공부를 많이 하는 학생들은 아마 전 세계에 없을 것이다. 일본 학생들이 좀 그렇다고는 하지만... 동쪽에 사는 이 두 나라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시험이 많고 계속 더 어려운 시험을 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부를 많이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나라 문교 정책이 계속 바뀌고 문교부 장관이 계속 바뀌는 이유는 결국 대학입시 때문이다. 대학 입시가 점점 어려워지니까 학생들은 공부를 더 많이 해야하고, 시험을 더 많이 봐야하는 현상이 계속 되는 가운데 장관의 수명이 짧아졌다. 이번에도 한 사람 잘려 나갔는데 파리 목숨이나 마찬가지이다. 몇 달 하다가 또 나가야 하고 개혁을 한다고 난리를 치다가 조금 있다가 또 나가야 하는 것이 문교부 장관의 신세이다. 이 모든 것이 시험 때문이다. 시험은 학생으로 하여금 학생되게 하기 위한 과정인데 너무 지나치다 보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학생들은 시험이 있기 때문에 선생님 말씀을 듣게 되고 학생이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떤 시험을 만나서 그것을 기쁘게 여기면 그 분을 따르게 되고 그 분 안에 머물게 된다. 시험을 좋아하는 학생이야 없겠지만 너무 싫어하면 공부를 할 수 없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은 시험을 좋아한다. 시험을 봐야 자기 성적이 드러나게 되고 자기의 노력한 대가가 나기 때문에 공부를 하는 학생일수록 시험기간을 기다리게 된다. 농땡이 치는 학생일수록 시험기간을 피할 수밖에 없다.
3. 성경안의 사람들
우리가 성경 안에서 이런 시험 안에서 굳세게 된 몇 몇 사람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가.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예가 맨 처음에 나오는 중요한 예이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려오라’고 말할 때 그 말이 나온다. ‘그 일’이라는 것은 ‘브엘세바에서 에셀 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그 일을 말한다. 영생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후, 영생하신 하나님을 안 이후에라는 말이다.
이것은 교회에 막 들어온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영생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이다. 영생을 맛본 사람에게 그 사람을 시험하시려고 이삭을 불렀다는 말씀이다. 이 시험에서 아브라함이 합격을 함으로써 참 아버지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참 사람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것은 아버지의 이름 안에, 사람의 이름 안에 그가 거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확고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이라고 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다. 아버지 하나님 상으로 존재하게 된 사람이다. 그는 이 시험을 잘 통과했기 때문에 그런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시험 때문에 하나님을 따르고 그 안에 거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왜 서울 대학교에 들어갔는가? 어렵지만 사실은 그 시험 때문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험에 합격한 것은 시험 때문에 합격한 것이다. 시험이 없다면 합격도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도 이 시험 때문에 결국 이 영광스러운 위치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나. 요셉
요셉의 경우가 또 중요한 예이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이것은 요셉에게 있어서 시험이었다. 이 시험을 그가 잘 받음으로 말미암아서 아주 영광스러운 축복을 받게 되었다. 유다는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왕권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왕권의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 레위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축복을 받았다.
그런데 요셉은 두 몫의 땅을 받았다고 한다. 이 두 몫의 땅은 그리스도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왕권이나 제사장권은 일에 속한 것이지만 요셉이 받은 축복은 일에 속한 것이 아니고 본성에 관한 축복이다. 하나님의 본성, 그리스도의 본성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자신에 관한 축복이다.
두 몫의 땅을 받았다. 왕도 지나가고 제사장도 지나가지만 땅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집이나 권세는 바꿔질 수 있지만 성품 자체는 바꿔지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일도 할 수 있고, 저런 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성품, 그 본질은 우리에게 영원히 있다. 그것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 없이 내가 왕권을 행사할 수도 있고 제사장권을 행사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것은 내게 무익한 것이다. 나에게 그런 본성적인 축복이 없기 때문에 무익하다. 요셉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인격, 본성적인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우리가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그 아들들을 축복할 때 보면 풍성한 축복이 요셉에게 떨어지고 있다. ‘하늘의 복과 땅의 복과 이슬의 복과 샘의 복’이 나온다. 여러분들이 아침에 제주 창세기 말씀을 들으시면 자세히 알 수 있다.
다. 사울(실패의 예)
반대로 사울 같은 사람은 실패자이다. 사무엘이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을 했다. 전쟁에서는 승리했고, 나쁜 것은 다 진멸했지만 좋은 것은 진멸하지 않았다. 값나가는 것들은 다 가져왔다.
사무엘이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사울을 ‘이 좋은 것은 여호와께 번제-제사를 드리려고 남겨두었다’라고 변명을 하였다. (거역함)
그랬더니 사무엘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이 좋아하겠느냐?’라고 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와서 번제를 드린다고 해서 그 분의 목소리를 순종하는 것 보다 더 좋아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는 유명한 말이 나왔다.
수양의 기름은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이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사울을 거역하고 완고한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이런 준엄한 말이 떨어지게 되었다. 이래서 사울은 점점 여호와의 손에서 벗어나게 되는 사람이 되었고 왕권의 축복에서 떠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블레셋과 대전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사무엘이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 그러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 후에 전쟁을 하라‘고 했다. 그런데 정한 기한대로 7일을 기다리되 오지 아니하므로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더라 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독전(?)을 하고 있고 이 쪽 사람들은 사무엘이 기다리라고 했기 때문에 전쟁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까 백성들이 두려워서 흩어졌다. 이 때 사울의 마음이 약해져서 자기가 번제를 드리게 되었다. 빨리 번제를 드리고 전쟁을 하기 위해서였다.(기다리지 않고 자의로 행함)
번제-화목제를 드리고 나니까 바로 사무엘이 도착을 하더라는 것이다. 사무엘이 ‘왕이 행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우리말로 하면 무슨 짓을 했냐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기다리다가 정한 기간에 오지 않아서 내가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고 사울이 말했다. 그랬더니 사무엘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하신 것을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다.’라고 책망을 하였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더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위에 영영히 왕의 나라를 세우셨을 것인데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사울의 왕권은 다윗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가 시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험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했기 때문에 결국 왕권에서 탈락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린 예수 그리스도에게 오게 된다.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시험을 이기심으로써 존귀한 위치와 우리의 구세주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그 때 예수께서 마귀에게 이끌려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것은 인류와 사탄과의 전쟁이었다. 지금까지 구약시대의 여러 선지자들과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이 받은 시험은 모두 사탄과의 전쟁의 일환이었다. 모양은 여러 가지였지만 그 모양 속에 들어있는 내용은 사탄과의 전쟁이었다.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이나 요셉이 받은 시험이나 사울이 받은 시험은 모두 그 궁극적인 내용이 사탄과의 전쟁과 관계가 있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 때 하나님의 시험인 이삭을 드리라고 했을 때 그가 드리지 않았으면 아버지의 권세만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 아들의 권세를 뺏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탄과의 전쟁이었다.
요셉이 만일,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견디지 못했다면 요셉 자신이 부정한 사람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요셉을 넘어지게 하려는, 인간을 넘어지게 하려는 사탄과의 전쟁에서 진 것이다.
사울 역시 마찬가지이다. 왕권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왕권에 대한 시험이 바로 사탄의 시험이다. 그러니까 시험은 사탄과 인간과의 전쟁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주자로 전쟁에 임하신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우린 여전히 사탄의 노예로 있게 되고 거기서 헤어나올 방법이 없다. 또 다른 그리스도를, 다른 예수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시험에서 완전히 승리하심으로 우리가 그 승리의 대열 속에, 그 트랙에 오르게 되었다. 그 분이 승리를 해놓으심으로써 승리의 노선이 생겼다. 그 전까지는 완전한 승리의 노선이 없었다. 부분적인 승리는 있었지만... 아브라함도 승리하고, 요셉도 승리했고 다윗도 승리했다. 그러나 그 승리들은 이 트랙을 위한 준비 단계였지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트랙이 완전하게 준비가 되었다. 누구든지 이 길로만 달리면 결승점에 이르도록 만들어진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전쟁이고 승리이다.
왜 그를 우리가 구세주라고 하는가? 왜 우리의 주님이라고 하는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주님이고 세상을 구원한 자이며 새로운 인류의 대표자이다.
‘시험‘이라는 말 속에는 ’증명‘이라는 말이 포함되어있다. 증명하기 위해서 시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험은 증명을 낳게 된다. 이 말은 시험이라는 말도 되고 증명이라는 말도 된다.
‘인내는 따르고 머무르는 것이다.’이것은 시험을 통해서 따르고 머무름에 이른다는 뜻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이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고 그리스 안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시험이 있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인자의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인간 승리를 확보하는 것이고, 인권의 승리를 확보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말은 간단한 말 같지만 아담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사탄이 도전하고 있는 말이다. 오늘도 역시 똑같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지 못하는 한 넌 내 종이다. 그렇지 못하는 한 넌 나를 따라야 된다.’하는 뜻이다.
천사가 그러하다. 악한 천사라면 지금도 우리에게 와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나보다 나아야 되지 않겠느냐? 돌로 떡을 만들 수 있어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지 돌로 떡을 만들 수 없는 주제에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냐?’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십자가에 매달아놓고 ‘뛰어내려봐라. 너와 우리를 구원해봐라. 그러면 우리가 너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만하다.’하는 말과 같다. 맨 처음에 아담에게 와서 사탄이 뭐라고 했길래 아담이 선악과를 먹게 되었겠는가? 창세기에는 생략되어 있는 말이지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그러면 여기 와서 이 돌들로 떡이 되게 해봐라.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격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담은 돌로 떡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봐라. 너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없지 않느냐? 그러나 만일, 네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맺게 된다면 넌 돌로 떡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해서 먹었지, 그렇지 않고서야 먹지 말라고 명한 것을 어찌 먹었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먹지 말라고, 먹으면 정녕 죽을것이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이 두 말 없이 이것을 먹은 것은 바로 이 시험 때문이다.
온 인류는 바로 지금 이런 시험 안에 들어있다. ‘네가 정말로 사람다운 사람이라면...하나님의 아들이라면...넌 돌로 떡을 만들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지. 네가 숨이 코에 붙은 주제에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그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자의 위치, 사람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거기서 사람의 위치가 천사의 위치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너는 돌로 떡을 만들지만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너는 온 천하의 영광을 다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너는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다. 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깨지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넌 항상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아니냐?’하는 것이다. 이렇게 완벽하게 승리했다.
1)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이 없게 됨(위치의 완벽함)
오늘 날 우리가 사탄을 승리하여 온전하여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도덕성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종교성이 그만큼 고상해졌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행실이 온전해졌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위치가 완벽해졌다는 말이다.
예수님 안에서 우린 사람의 위치가 완벽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지 못해서 항상 열등감에 싸여 있는 인류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한 인간의 위치를 확고하게 내세움으로써 온전한,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냈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갖지 못해서 항상 쭐려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한 사람으로 섬으로서 인간의 위치를 완전하게 확보하신 분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늘 깨진다고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그는 하나님을 시험치 않는 사람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내세움으로서 인간의 위치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시험이었지만 온 인류에 대한 사탄의 시험이다. 이 시험이 근원이 되어서 모든 시험이 나오게 되었다. 여러분이 어떤 시험을 받았다면 전부 이 시험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법이 여러 가지 있다. 많은 법이 있지만 그 모든 법은 다 모법인 헌법에서 나왔다. 그래서 다른 법들이 있을지라도 만일의 경우, 그 법이 헌법에 위배되었을 경우에는 진다. 이번에 헌법 소원이 많이 생기지 않는가? 분명히 밑에 있는 법에 의해서는 졌지만 이것이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고 해서 헌법재판소에 소원을 내서 그것이 만일 위헌으로 판결이 되면 내가 전에 받았던 판결이 무효가 된다.
모든 시험이 바로 이 세 가지 근원에서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이 근원에서 전쟁을 하셔서 완전히 승리하셨다. 흙으로 지어진 인생,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가지고 승리롭고 영광스러운 위치를 확보하신 분이시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예수님께서 천사같은 체질을 가지고 와서 무엇을 하셨다면 우리에게 소망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우리와 같이 흙으로 지어지고 숨이 코에 붙은 인생을 가지고 영화롭게 자기 인생을 표현한 사람이니까 오늘 우리도 우리 인생을 가지고 주님처럼 영화롭게 표현한다면 우리 인생이 승리하지 않겠는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아무 것도 아닌 그 존재를 지극히 영화로운 데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인생의 승리이다. 사람들은 ‘나는 이런 저런 점이 부족하다. 이것이 안되고 저것이 안된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이런 관념에서 벗어나야된다.
‘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숨이 코에 붙은 인생이 필요하다.’는 개념으로 바꿔져야 한다. 아무 것도 아닌 내 인생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바꿔져야 한다.
전부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고 생각하니까 이런 저런 점이 모자라서 안된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하면 내게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된다.
예수님이 그렇지 않는가? 다른 재료를 가지고 승리했다면 할 말이 없지만 나와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승리를 했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마라톤에서 코스를 다 달려서 승리를 했다고 하자.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까 나와 심장이 다르다. 심장맥박수가 다르다. 난 심장이 1분에 70번 뛰어야 사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1분에 40번만 뛰어도 사는 사람이어서 십리를 달리나 백리를 달리나 문제가 없다면 난 희망이 없다.
그런데 내가 70번 뛰어야 사는 사람일 때 예수님도 70번 뛰어야 사는 사람인데 그걸 가지고 마라톤에서 승리하는 길을 발견했다면 그것이 소망이 아닌가?
우리 아무 것도 아닌 인생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주님이 된 것이다. 온전하여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겠다.- 예수님의 다른 면이 온전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 면이 온전하다는 말이다. 사람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사탄을 승리한 이 점이 그 분의 완전한 점이다.
우리도 사람이라는 이것을 가지고 사탄을 이기면 우리도 온전한 사람이 된다.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된다. 자기 의를 내세우고 자랑하려고 하니까 죽을 때까지 아무리 갈고 닦고 고치고 해봐도 안 된다. 나를 갈고 고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으로 내 관념을 바꿔야 한다.
2) 그리스도는 가능한 본(인격의 본 - 본질의 본)
온전하고 구비해서 부족함이 조금도 없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이 그 행위가 온전하여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수가 있는가?
그리스도가 본이다.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내가 어떻게 하면 온전할까, 구비할까, 완전한 사람이 될까?’ 하고 생각하면 우린 죽을 때까지 해도 안 된다.
교회에 오셨지만 교회 안에서도 ‘내가 그리스도를 내놓고 내가 어찌하면 온전할까?’이렇게 생각하면 끝이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본이다. 예수님이 유일한 본이다. 그 분이 우리의 본이니까 그 분 안에서 우리도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이나 우리나 모두 흙에다 생기를 불어넣어서 산혼이 된 사람들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표현하는데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형태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형태가 완전하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다 뭔가를 가미해서 집어넣었기 때문에 온전할 줄로 생각하지만 집어넣으면 집어넣을수록 온전하지 못하다. 더해 넣을수록 구비하지 못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어주신 그 자리 그대로가 우리에겐 온전한 자리이다. 이 온전한 자리에서 얼마든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하고 말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고 경배하라는 사탄에게 ‘나는 주 하나님께만 경배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사탄에게 대해서 ‘주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할 수 있다.
흙에다 생기를 불어넣어서 산혼이 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시험하겠느냐 말이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천하만국의 영광을 갖겠다고 하겠는가? 어떻게 돌로 떡을 만들겠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만 안다면 너무나 쉬운 길이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영어를 모른다, 수학을 모른다고 하는 말은 당연한 말이다. 흙에다 생기를 불어넣어서 산혼이 된 인간이 돌로 떡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천하만국의 영광을 갖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을 표현할 도구에 불과하고 하나님을 나타낼 몸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인격의 본이다. 예수님은 이런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무엇을 갈고 닦아서 성취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단순한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본이 되셨다. 그러니 이 얼마나 쉬운가? 이것도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흙과 생기를 가르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흙덩어리에서 생기를 빼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 그것은 지구 밖으로 나가라는 말이 아닌가? (모두 웃음) 혼비백산이라고 했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날아가고 백은 흩어진다는 말이다. 흙에서 생기를 뺀다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이 보다 쉬운 일도 없고, 이 보다 완전한 일도 없다. 우리가 우리 주제를 안다면, 사탄 앞에서 할 말이 당당하다. 내가 이렇게 지어진 자니까 난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난 하나님을 경배해야 된다, 난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 하는 것이 당연한 말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완전한 자리이다.
주 예수님은 가능한 본이다. 성철 스님은 불가능한 본이다. 우리 인류들에게 아주 위대한 본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불가능한 본이다. 나도 그 분 처럼 그렇게 놀라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불가능하다. 여기에 오신 여러분 가운데서 혹시 한 분이라도 그런 가능성이 있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런 분이라면 이 자리에 오지 않으셨을 것이다. 만일, 그런 가능성이 있는 분이시라면 가시는 것이 좋다. 여기 있어서는 별 볼일이 없다. 영광이 드러날 수 없다.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틀림없이 성철 스님을 따라갈 수 없는 분들만 오셨을 것이다. 그것이 복이라는 말이다. 불가능한 분을 따라온 것이 아니라, 가능한 분을 따라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 복이다.
내가 만일 불가능한 본을 따라갔었더라면 난 지금 저주 가운데 있을 것이다. 내가 만일 썬다씽을 따라갔다든지 빛을 남긴 위대한 사람들을 따라갔더라면 난 지금도 여전히 저주 가운데 있을 것이다. 등에다 큰 바윗덩어리를 짊어지고 끙끙거리고 있을 것이다. 살아 있을 지 그것도 의문이다. 내 체격과 체질에 그것을 꿈꾸고 따라갔더라면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내가 너무나 쉬운 분을 만났기 때문에 육신적으로도 지금까지 살아있다. 이렇게 쉬운 분을 얘기하는데도 자꾸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자기 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 의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다.
우리의 완전한 본이신 그리스도!! 이 분 처럼 완전한 본이 없다. 모든 인류가 따를 수 있는 본이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린대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그런데 만일 자기가 불가능한 본이 되어서 ‘나를 따르라’고 했다면 다른 사람들을 다 저주하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학교에서 1등 하는 학생이 전교 학생들을 다 모아놓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면 자기 한 사람밖에 갈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전교생을 다 저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그런 본이 아니다. 사람이라고 생기기만 했으면 모든 인류가 다 가능한 그런 본이시다. 이것만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진다면 오늘 우리 교회 생활이 얼마나 쉬워지겠으며, 또 얼마나 평안이 있겠으며, 얼마나 자유가 있겠으며, 그 자유가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가 있겠는가? 내가 편해야 남을 도울 수 있다. 내가 편지 못하면 남을 도울 수 없다. 내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어떻게 남의 짐을 질 수가 있겠는가? 내 짐도 무거운 사람이 남의 짐을 어떻게 지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 짐을 져달라고 한다면 그들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자기 짐도 무거운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친구에게 내 짐을 져달라고 한다면 져주겠는가? 자기 짐도 한 짐인데... 심지어는 부모님도 짐이 한 짐인데 어떻게 내 짐을 져주겠는가? 이 말은 나에게 평강을 줄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짐이 없어야 남의 짐을 져줄 수가 있다.
내가 짐이 없으려면 그리스도가 나의 유일한 본인 것을 알아야 한다. ‘아, 이 쉬운 본, 이 가능한 본이신 그리스도가 있구나!’ 그러면 나도 마찬가지로 짐이 없는 사람이 되게 된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로 하여금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 누구든지 내게 오면 쉼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왜 그런가? 그 짐이 없기 때문에 쉼을 얻는 것이다. 짐을 잔뜩 지어놓고 쉼을 얻으라 할 수 있겠는가?
성철 스님이 자기 제자들에게 쉬라고 하겠는가? 내게로 오면 쉬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자기가 앉아 있는데 제자들이 잠자고 있으면 되겠는가? 자기가 앉아 있으면 제자들도 앉아있어야 한다. 그래서 못 있고 가는 것이다.
지금은 아마 돌아가셨을텐데 전에 최춘선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이 분은 생활이 아주 독특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그 분의 생활을 본받아보려고 많이 갔는데 한 달도 못견딘다. 이 분은 무슨 은사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활을 하셨다. 기도를 하기 시작하면 하루는 말할 것도 없고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기도만 하고 앉았다는 것이다. 밥을 먹을지 잠을 잘 지를 모르고 기도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고 존경을 하지만 따라 해보려고 하면 할 사람이 없다. 견디다 못해 또 나오곤 했다.
그 한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모든 인류의 본이 될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인류의 본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복이다. 세상에 많은 본 중에 가능한 본을 만났다는 것이 우리의 복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격을 보게된다. 온전하게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된 사람을 보게 된다.
3) 그리스도는 교회의 형상의 본(本)
교회를 이루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종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 나라의 일원이 되는 것이 우리의 완성하는 자리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 본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의 본이다. 이 본 안에서 우리가 연합이 된다.
우리가 지금 연합을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연합의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본드끼리 만나면 서로 붙는 것처럼 이것이 연합이다. 어떤 것은 본드를 붙여도 잘 붙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연합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산혼이 된 그 사람 안에, 거기서 인간의 완전한 영광을 획득하신 그 분의 성질 안에, 연합의 성질이 들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해보면 그렇다. 내가 만일 그 분을 따르는 사람으로 섰을 때 난 누구와든지 연합할 수 있다. 연합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일부러 연합할 필요가 없고 저절로 연합이 된다. 성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본드의 성질이 그러니까 서로 붙듯이 그리스도의 성질이 그러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뭔가 하나가 안 된다는 것은 내가 딱딱하다는 말이다. 잘 안 붙는다는 뜻이다. 내가 만일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못 붙을 일이 전혀 없다. 붙지 못할 일이 전혀 없다.
4) 그리스도는 시험을 거치고 온전해 짐
그리스도는 시험을 거치고 온전하게 되신 분이다. 이 시험에서 우리의 본이 되신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마귀와 날마다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그리스도의 충만 안에서 그 승리를 누리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영이 충만했다고 해서 한 번 해보자하고 나가겠는가? 그렇지 않지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승리를 보면서 내가 그 승리 안에 있다. 그렇지 않은가?
여러분도 잘 생각해보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보고 들으면서 여러분도 그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랬으니까 나도 한 번 그렇게 해봐야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의 승리 안에 우리 자신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딴 데 사는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의 본과 교회생활의 형상의 본 안에서 온전하고 구비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내 안에서 우리는 시험을 통과하고 그를 따르며, 그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 분이 어떤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인내를 이룬 사람인가?’ 우리는 참으려고 애썼고 노력을 많이 했었지만 이 인내를 이루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린 어떤 시험을 통해서 인내에 이르게 되는데 시험도 없이 뭔가를 참으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교회 생활하면서 보기 싫은 사람이 있는데 내가 참아야지 하고 참았다는 것이다.
사실은 교회 생활 안에서 이런 말은 안 해도 될 말인데...‘아무개 때문에 괴로워 죽겠다’는 이런 말은 사실 안 해도 될 말이다. 그렇게 괴로운 사람이 없다. 그렇게 괴롭게 할 만큼 악질인 사람이 우리 교회엔 없다. 표현을 그렇게 해서 그렇지 다 좋은 사람들이다. 누가 인터넷 상에서나 들으면 ‘야, 대구교회에는 얼마나 고약한 사람들이 있어서 저런 소리를 하냐?’라고 생각이 될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 좋은 사람들인데 다 자기 일로, 자기 때문에 고통스러워서 그렇게 표현을 한다. 앞에 나와서 그렇게 표현하니까 밖에서 듣는 사람들은 ‘야, 저 교회는 정말 못된 사람들만 모였나보다’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린 합당한 시험을 거침으로서 온전한 인내에 이르게 된다. 사탄이 무엇을 시험하고 있는가? 시험하는 자는 사탄이다. 사탄이 무엇을 시험하고 있는가를 알아서 그 시험을 이기게 되면 우린 모든 시험을 이기게 된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지 않으려고만 생각한다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가지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생각만 없다면, 난 누구하고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어디와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시험은 인내를 이룬다. - 이 인내는 따르고 머무르는 것이다. 따르고 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이런 시험들을 통과해야된다는 말이다. 그 분 자신이 그런 분이니까 우리가 그 분 자신을 따르고 그 분 안에 거하려면, 그런 인내를 가지려면 예수님이 당하신 그 시험 안에서 나도 승리한 사람이 되어야 된다.
예수님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그 사탄 앞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이런 태도로 사셨는데 나는 거기서 ‘어떻게 하면 이것을 갈아서 소다를 섞어서 떡을 만들어 볼까?’하고 생각하고 있으면 그를 따를 수 도 없고 그 안에 머물 수도 없다.
천하 만국의 영광을 놓고 ‘내게 절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영광을 네게 주리라’라고 할 때 ‘나는 하나님을 경배 할 자다’라고 말하시는 분 앞에서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영광을 좀 얻어먹어 볼까?’하고 생각하고 있다면 어떻게 그 분을 따르고 그 분 안에 거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는 그 분 앞에 서서 나는 사사건건 하나님을 시험해보려고 생각을 하고, 형제를 시험해 보려고 생각을 한다면 그런 자리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을 따르고 그 분 안에 거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경우도 있다. ‘일부러 저 형제를 좀 찔러봐야겠다. 요즘에 사람되었다고 하던데 진짜로 됐는지 안 됐는지 좀 찔러봐야겠다’이런 심보가 사람 안에 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남편보고 사람됐다고 하는데 내게도 사람됐는지 잘 모르겠어.’하면서 시험을 해보려는 아내도 있다. 된장찌개에 쓴 물을 좀 넣는다든지, 삼층밥을 지어놓고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하는 경우도 있다.
또 남편이 아내에게 ‘요즘 인간됐다고 하는데 진짜 됐는지 안 됐는지 보자’하고 건드리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시험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똑같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그리하면 몸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너를 보호해 줄 것이다.’했을 때, ‘주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 내가 시험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남이 그러더라도 우린 시험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잘 됐으면 뭘 하고 못 됐으면 뭘 하겠는가? 우린 시험관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안다면 우린 그 분을 따르고 그 분 안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인내이다. ‘따르고 머무른다‘는 뜻이다.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히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한다.‘ 인내가 바로 그런 뜻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따르고 머무르기 위해서 시험들이 우리에게 온다. 그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난 점점 더 깊이 따르게 되고 더 확고하게 그 안에 거하게 된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이 시험을 우리가 일생에 한 번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늘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도 있을 것이고, 진흙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보라는 시험도 있을 것이고, 모래를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도 있을 것이고, 밀가루를 가지고 떡을 만들어 보라는 시험도 있을 수 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시험이 있을 것이다.
이 시험을 통과하면서 우린 점점 더 확고해진다. 확고하게 주님을 따르게 되고 확고하게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이 되게 된다. 학생이 시험을 시험대로 받으면 성적이 향상된다. 치뤄야 할 시험을 자꾸 치르면 성적이 향상된다. 학교에서 계속 시험을 보는데 똑같이 시험을 잘 이행한 사람은 수능시험을 봐도 마찬가지이다. 쉽게 된다.
자동차 운전 면허 시험장에 가니까 매일 시험이 있다. 요즘엔 전문 학원이 있어서 학원 내에서 시험을 본다. 첫날 하루만 방식을 가르쳐주고 다음 날 부터는 매일 시험이다. 가다가 ‘땡‘하고 가다가 또 ’땡‘한다. 처음에는 ’땡‘소리가 많이 나는데 가다보면 ’땡‘소리가 적어지고 합격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시험 보는 날은 아주 쉽다. 매일 정확한 코스를 다녔기 때문에 쉽다.
우리가 사탄과의 전쟁에서 매일같이 시험을 치른다면 우리에게 그 시험은 아주 쉬워질 것이다.
우린 그 분을 똑똑하게 따라가게 되고, 그 분 안에 확고하게 거하게 된다. 주 예수님이 그렇게 확고한 위치를 가졌듯이 우리도 역시 확고한 위치를 갖게 될 것이고, 그 확실한 위치 안에서 만유를 통치하는 사람이 되게 될 것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될 것이고,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은택을 입게 될 것이다. 이 우주 안에서 사람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권을 회복하는 길이다. 인권을 얻는 길이다. 데모를 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인권을 확보할 수 있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사탄의 시험이 우리에겐 늘 있지만 이 시험을 우리의 영원한 본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이기고 날마다 승리함으로써 온전한 인내를 만들어 내어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우리가 주 앞에 서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당신이 앞서서 사탄과 전쟁을 하시고 우리와 같은 체질을 가지고 우리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당신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완전한 본이 되시고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주님 당신의 그 본 안에서 우리 역시 승리하고, 당신의 그 나아가심 안에서 우리도 나아가고, 당신의 머무르심 안에서 우리도 머물러서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따르고 주님 안에 거하는 확고한 위치를 얻게 되기를 원합니다.
시험은 연단을 가져오고 연단은 인내를 가져온다는 이 말씀 안에서 우리가 온전해 지기를 원하고 모든 사람이 다 사탄의 시험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알고 이 시험에서 우리가 확고하게 이기는 사람들이 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