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회식이 취소되어 퇴근길에 집 근처 분식집에 들렀다. 국수를 주문하고 앉아 있는데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었을까, 남자아이 하나가 밖으로 연결된 좌판 쪽으로 오더니 "아줌마, 300월짜리 뭐 없어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업다. 다른 데 가봐라." 라는 주인아줌마의 말에도 미련이 남는지 아니는 좌판에 진열된 떡볶이와 닭튀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안된 마음에 자세히 보니 언젠가 집에서 본, 조카 건우의 반 친구였다. 나는 아이를 불러 같은 테이블에 앉히고 떡볶이를 시켜주었다.
활달한 성격의 경민이는 부모님이 구둣가게를 해서 늘 늦기 때문에 엄마가 저녁식사를 준비해놓고 가시지만 오늘은 그냥 가셨고, 간식비 1,000원이 있었지만 700원어치 컴퓨터게임을 했다는 등 떢볶이를 먹으며 즐겁게 얘기를 했다.
"근데 아줌마랑 밥 먹으니까 좋아요. 만날 혼자 밥 먹으면 되게 심심하거든요."
떡볶이를 사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말하는 경민이의 얼굴에 잠깐 그림자가 스쳤다.
경민이처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혼자만의 밥상을 맞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아예 혼자 살기 때문에 너무 바빠서 대충 식사를 때우느라 또는 가족이 저마다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등 이유는 많다. 일본에서는 고독한 식사를 하는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는 사실이 발견됐고, 그 병을 '고식병'이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사실 음식을 나누는 것은 친교의 기본 조건이다. '친구'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 companion에서 com은 '함께', pan은 '빵'을 의미한다. 그래서 '빵을 함께 먹는 사람'이 바로 '친구'인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최호의 만찬'을 필두로, 문학에서 음식을 함께 먹는 행위는 친교나 연대의식을 상징할 때가 많다.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 [등대로](1927)도 그런 예 중 하나다.
울프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의식의 흐름' 기법을 쓰고 있는 [등대로]는 스코틀랜드의 섬에 있는 별장에서 여름을 보내는 대학교수 램지의 가족(부인과 여덟 명의 아이들)과 그들이 초대한 손님들의 이야기다. 1부 '창'에서는 여섯 살 난 아들에게 등대에 데리고 갔다고 약속하는 램지 부인과 손님들을 그리고 있고, 2부 '세월은 흐르고'에서는 10동안 전쟁이 일어나고 램지 부인이 죽었음을 아주 짤막하게 알리며, 3부 '등대'에서는 마침내 별장에 다시 모인 이들이 등대로 가는 것을 묘사한다.
아무런 극적 요소 없는 단순한 이야기지만, 이 소설의 구성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세 개의 모티프는 멀리 보이는 등대와 저녁식사 파티, 손님 중 릴리라는 화가 그리고 있는 램지 부인의 초상화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램지 교수와는 대조적으로 따뜻하고 포용적인 램지 부인의 통합력이 두드러지는 곳은 바로 가족과 손님들이 모두 함께 하는 식탁이다.
수저를 내려놓으면서 부인은 사물의 핵심을 차지하는 고요한 공간이 바로 여기 있다고 느꼈다.....부인의 눈이 어찌나 맑은지 식탁 둘레에 앉은 사람들 하나하나의 속마음과 느낌의 베일을 꿰뚫고 투시하는 듯 했다......모두가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이루는 것 같았다.
마치 산문시처럼 서정적인 문체로 쓰인 이 작품은 비록 죽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불멸로 남아 있는 램지 부인의 초상화를 화가 릴리가 완성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경민이가 떡볶이 2인분을 거뜬히 먹어치운 후 "아줌마, 고맙습니다!" 하고 활짝 웃으며 혼자만의 밥상으로 돌아갔다. 아직 고식병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지만, 목걸이처럼 목에 달랑 매단 열쇠 하나가 무척 외로워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