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생활 속에서 낳은 시는 한 폭의 자연을 담는다
자연을 통해 삶을 노래하는 서지월 시인
글_전행은 기자 heang-eun@hanmail.net
예술가의 삶과 작품세계는 맞닿아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삶이 바탕이 된 작품들을 창조해내는 것을 보면 작가의 생과 작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다. 서지월 시인이야말로 자신의 삶과 작품세계가 꼭 닮아 있는 작가라 할 수 있는데,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곧 출생지인 가창을 떠나지 않고 50여 년간 전업시인으로 살아온 전원시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 78번지에서 전원적 삶을 살고 있는 서지월 시인은 지난 7월, 전원생활시 ‘신 귀거래사’로 시비 제막식을 가지는 등 전원생활문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의 작품은 바쁜 일상에 찌든 도시인들의 마음에 촉촉한 봄비 같은 역할을 해준다.
서지월 시인의 자택을 찾아가니 정겨움이 물씬 풍기는 대나무로 만든 대문이 보인다. 소박한 정겨움을 느끼기도 잠깐, ‘은거해서 사는 시인의 방’이라는 뜻의 두문시산방(杜門詩山房)이란 팻말이 걸린 입구 앞에서 서지월 시인이 취재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대나무 대문을 지나자 아담한 마당의 화단 한쪽으로 피어있는 흰색 봉숭아꽃이 눈에 띄었다. 한복차림의 서지월 시인은 입구에서 나오면서 디지털 캠코더로 취재진의 모습을 담으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취재진에게 시인은 말했다. “카메라 의식하지 말고 이쪽으로 얼른 들어 오이소. 제가 남기는 걸 상당히 좋아하는데 이게 다 기록이거든요. 나중에 이놈을 보면서 저를 찾아와준 취재진이었다고 기억할 것 아닙니까.”라며 구수한 대구 사투리로 취재진을 안내한다. 전원시인이라 해서 인적이 드문 산골 속에서 고독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단번에 깨졌다. 취재를 하러 가서 취재를 당한 느낌이랄까. 서지월 시인은 인터뷰와 촬영 내내 취재진의 모습을 자신의 캠코더에 그대로 담았다. 안내를 따라 작업실(혹은 자택)을 둘러보며 시인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각종 프로그램을 녹화해둔 비디오테이프와 캠코더로 직접 찍은 테이프, 관련 서적을 비롯해 다양한 자료들이 그의 작업실을 꽉 매워놓았으며 곳곳에 자리 잡은 골동품과도 같은 다양한 물건들이 호기심 많은 그의 성격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심지어 주인 없는 벌집까지 천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온갖 물건들이 바닥을 점령하고 있어 깨금발로 방안에 들어가는 취재진을 향해 시인은 천진하게 말했다. “밟아도 되니까 편하게 구경해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장난기 많은 그는 “제가 전원시인이기도 하지만 아동 문학가이기도 해요.”라고 한다.
<가난한 꽃>은 산골정서를 가장 잘 반영한 서지월 시인의 대표시다. “저는 서정적인 체질인 것 같아요. 이제껏 끈질기게 민족서정을 추구해 왔는데 ‘가난한 꽃’이라는 시에서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났지요. 어느 깊은 산골에서 피어난 꽃은 이름 없이 피었다 지지만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상관하지 않아요. 지금의 제 모습이기도 하네요.”라며 ‘가난한 꽃’을 자연 속에 몸담고 살아가는 자신의 생활에 비유하는 서지월 시인. 그는 누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죽을 때까지 출생지인 가창 땅을 떠나지 않을 거란다. “1955년 음력 단오날 가창면 대일리 371번지에서 태어났어요. 당시 가창초등학교 앞이었죠. 37세 때 결혼해서 전 재산 15만원으로 살림을 차린 곳이 대일리 387-1번지, 그곳에서 셋방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너무 가난하여 맷돌 2개와 절구방아를 혼수로 가져왔지요. 그 다음이 바로 이곳 대일리 78번지입니다.”라며 이런 저런 사연을 덧붙였다. 그는 너무 가난했던 시절이라 다른 곳으로 떠날 엄두를 내지 못했기도 했거니와 시인으로서 출생지인 동네에서 떠나기 싫었다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서지월 시인은 ‘민족의 혼과 얼을 지키기 위해선 역사의식을 끊임없이 발휘해 시로 녹여낼 것’이라 말하며 민족의 뿌리를 내려 오천년 한민족 역사의 강으로 바라보고 있는 ‘三兄弟 江’이라는 시를 썼다. 백두산에서 시작해 서해로 흘러드는 압록강, 동해로 흘러드는 두만강, 만주 땅 전역을 통과해 흑룡강과 만나 동해로 흘러드는 송화강을 두고 웅장했던 역사의 허무를 의인화해서 아픔을 노래했다. 질긴 민족서정시를 줄곧 써 오고 있는 중견서정시인 서지월의 또 다른 관심사는 바로 ‘만주’. 그는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에 큰 감동을 받아 만주 땅을 직접 밟으며 대구신문에 ‘서지월 시인의 1만 리 만주대장정’을 연재했다. 만주대장정, 흑룡강 7천리, 송화강을 가다, 연변땅을 가다, 돈황-실크로드를 가다 등 총 6편의 시리즈로 민족의 역사에 대한 시인의 감정을 정리해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한국인이라면 모름지기 만주에 꼭 가봐야 합니다. 만주는 민족의 역사와 맞물려 있는 곳이죠.”라며 취재진에게 실크로드에 가볼 것을 강하게 권유했다. 중국 땅을 여러 차례 밟고 돌아온 그는 앞으로도 민족의 혼을 찾아 나설 것이라 한다.
2005년, 한국전원생활운동본부가 창립 될 당시 '전원생활 선언문'도 쓴 바 있는 그는 전원생활시 ‘신 귀거래사(작곡-정해진)’를 통해 자연의 품이야말로 영원한 안식처라 노래한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곧 출생지를 떠나지 않고 50여 년간 전업시인으로 살아온 전원시인, 서지월. 이제껏 전원생활을 하면서 낳은 서정적인 시세계는 그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 늘 그의 머리맡에 펼쳐져 있는 원고지 뭉치와 볼펜이, 시인의 마음에서 숙성되어 나오는 문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두문시산방’에서 나올 아름다운 시들이 앞으로도 사람들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 주리라.
<신 귀거래사(新 歸去來辭)>
꽃은 피어서 무색하지 않고 바람은 불어서 가면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다가다 만난 사람 옷자락 끝에도 풋풋한 인정은 피어나고 새소리에 귀 열리나니
오, 하늘 아래 해와 달 별들이 늘 곁에서 무병장수 빌어주나니
숲이 우리들 식탁인 것을 흙이 우리들 양식인 것을
구름 떠 오면 늘 그대로인 청산이 반가운 손님 맞이하듯
훈훈한 돌의 향기와 흐르는 물소리의 여운이 피 맑게 해 주나니
벗이어, 한 바가지의 물 버들잎 띄워 천천히 들이키듯 우리 목 축이며 살아가세
◆보현산 천문대 가는 길목인 영천 보현산자연수련원 경내에 세워진 서지월시인 시비 「신귀거래사(歸去來辭)」전경.
대구MBC라이프 06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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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극락세계 지상락원이 따로 있겠습니까 하지만 많은 것들은 그런 위치에 없던가 아니면 그런 것들을 잃었을 때 다시 그런 감수가 생길수있지요 서형은 줄곳 한곳에서 살아오다보니 여느것은 몰라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 만은 없을 듯 하네요 한국과 우리의 시 주제가 이런 환경에 따라 좀은 다를 때가 있지안나도 싶네요 처경 위치 가진것과 없는것의 차이로 시란 문틀에 왜 저런것을 얼어놓나 싶을 때도 있을줄압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이 안다면 그것은 대단한겁니다 우리는 항상 없는것을 그리워 할줄 알지만 있는것을 그리워 할줄 모르거든요 시인은 있는것을 그리워 할줄 아는 사람일 겁니다 항상 치근거려도 변하지않는 푸른 빛. 몰붙는 사랑만큼 휘여드는 가지는 무언의 대화가 아니겟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