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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잔소리가 때론 약이다.
글/김영주
모처럼 새벽바람에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아내는 퉁명스럽게 "오늘은 웬일이야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나름 부지런히 움직였는데 아내의 조롱 섞인 투박한 말투에 입맛이 쓰다. 딴에는 어제 못 다심은 서리태콩 모종을 심기 위해서 일찍 일어났는데 돌아오는 것은 새벽 댓바람부터 아내의 잔소리다. 어제 심어야 할 콩 모종을 다 심지 못하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오늘을 넘기면 모종이 죽을까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은 면민체육대회가 있는 날이다. 면민체육대회는 일제 치하에서도 열리던 면민의 긍지와 자부심을 고양한 면민의 축제 한마당이었다. 그런 체육대회는 언제부턴가 열리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주로 축구 시합을 했는데, 지나친 승부욕으로 다툼이 일어나고 급기야는 폭력적인 행동으로 피로 얼룩져, 대회의 취지인 면민의 협동 단결과 축제로, 지난했던 지난날의 삶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체육대회가 그 본질을 잃어버리는, 폭력적인 불상사로 인해 한동안 중단되었다고 한다. 체육대회가 부활 복원된 것은 지난 구십팔 년도로 기억된다. 그 취지는 살리되 다투기 쉬운 축구 시합은 하지 않기로 하였다. 필자도 복원멤버로 참여했다. 그러기에 매번 초대장을 받고 그날은 열 일을 제쳐 놓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즐기는 면민체육대회였다.
그런 체육대회이기에 애정을 갖고 참석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이런저런 행적을 옆에서 지켜본 아내는 일거수일투족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리고 마을 일에, 무중 일에 발 벗고 나서고 가정은 뒷전이라는 사실 또한 너무나 잘 알기에, 오늘도 집 발을 붙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착한 아내이기는 하지만 때론 등쌀에 못 이겨 철석같이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가도 누가 부르면 손바닥 뒤집듯이, 무슨 핑계를 대던지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가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박절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손금 보듯 잘 알기에 아내는 더욱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요즘 잔소리가 부쩍 늘었다. 아내의 눈치를 보노라면 살맛이 덜하다. 누굴 탓하고 원망하랴 모두 내 탓인 것을,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살라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것이 가정의 평화와 늙어서 호랑이 같은 아내에게 책잡히지 않고, 집밥이라도 얻어먹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세인들의 말이고 보면 더욱 주눅이 드는 요즈음이다.
아내는 면민체육대회에 갈려면 일찍이 콩 모종을 하고 가란 눈치이다. 그러기에 새벽바람에 일어났건만 그 마음을 몰라준다. 이십 년을 넘도록 한 이불속에서 살을 맞대고 살아왔는데 그 눈치를 모를까마는 아내의 잔소리가 야속하다. 야속한들 어찌한단 말인가? 내 탓인 것을, 그도 그럴 것이 몇 해 전만 하여도 아니 지금도 마을 일이며 무중 일에 여러 감투를 쓰고 회의며 각종 행사에 여러 가지 일로 집안 살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살필 겨를이 없이 바람난 수캐처럼 쏘다니니 그럴 법도 하다. 어떤 이는 "마을 일을 하면서 빚진다는 얘기가 괜히 하는 소리 같다."라고 말을 하니 무슨 떼돈이라도 벌었는지 모르겠지만 들어보라는 말인지?, "출입이 빚"이라고 나는 그렇다. 감투 쓰고 다닌다고 무슨 떼돈이라도 버는 것처럼 오해하니 마음이 아프다. 한역 아내는 어떤 이는 "문전옥답, 자갈논까지 팔아먹었다."라는 말을 들었으니, 어찌 서방이 하는 놀음놀이가 딱 자갈논 팔아먹게 생겼으니 아내가 좌불안석 걱정이 태산이다.
그 심정은 알겠지만 어찌하랴 한번 책임을 맡으면 끝까지 끝나야 끝난 것이다. 내려놓을 수 있을 때 내려놓는 것이 마땅하나 믿음이 가는지 자꾸 책임을 맡기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지만 "마을 일이 내 일이요. 내 일이 마을 일이다."라는 나의 지론에 어르신들은 "그런 생각이면 되지"라며 오히려 일을 맡기곤 했다.
결국은 아내의 잔소리 끝에 일단 콩 모종을 심기로 하였다. 심는 데까지 심을 요량으로 말이다. 심던 중에 면민체육대회에 갈 시간이 되면 될수록 마음은 콩밭이다. 마음 졸이며 시간이 넘어서야 아내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그머니 서둘러 길을 나섰다. 잔소리를 피해 슬쩍 도망치듯이 길을 나섰다.
허둥지둥 부지런히 삼십 리길 차를 몰아 달려갔다. 행사장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풍물 소리가 요란하다. 행사장인 초등학교 운동장에 도착하였을 땐 이미 개회식은 끝이 나고 시합이 진행 중이었다. 한쪽 밖에선 족구가, 트랙 안쪽에서는 부녀자들의 피구 시합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편 외곽으로 둘러친 각 리별 진영의 천막에서는 응원의 함성과 사물을 동원한 응원이 요란스럽게, 각리를 대표한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별 천막 한쪽에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온갖 음식으로 구미를 돋우고 왁자지껄 둘러앉아 술판을 벌리고 오늘 하루만은 농사일과 모든 인생사 희로애락, 일상의 시름을 잊어버리고 즐겁게 면민들의 잔치 한마당을 펼쳐 보자는 것이리라.
한편 본부석에는 내외 빈들, 축하객들이 자리하고 한쪽에는 대회 진행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본부석에서도 흥미진진한 시합을 보며 박수와 환호성으로 사기를 진작시키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찬조금을 주고 난후 자리에 앉자 오늘 경품으로 나누어줄 물품들이 즐비하게 시야를 가릴 정도로 눈에 들어온다. 견물생심이라고 모두 군침을 흘리며 눈독을 들이고 있는 듯했다. 결국에는 다수의 면민은 헛물을 켰지만 보는 동안 즐거웠으리라 생각이 든다.
경기가 달아오를 때쯤, 정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각 리별 준비한 점심상이 펼쳐지고 평소 먹어 볼 수 없는 산해진미로 수라상이 부럽지 않다. 넉넉하고 푸짐하다. 주당들은 주거니 받거니 건배를 외치며, 지고 가지는 못해도 먹고 가리라는 대단한 각오로, 술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해가 시름시름 빛을 잃어 갈 때쯤 마지막 시합으로 각 리별 계주가 시작되고 장외에서도 함께 달리듯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동덕들이 떠나가라 하늘 높이 소리소리 함성을 지른다.
어느새 모든 시합이 끝이 나고 각 리별 점수가 발표되는 순간순간마다 각 진영에서는 운동장이 떠나갈 듯이 함성과 풍물 소리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우리 마을은 작년에 이은 준우승에 그쳤지만 모두 즐거운 하루였다. 마지막으로 경품추첨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면민들과 진행요원들의 노고가 돋보이는 하루였다.
체육대회가 마무리되고 급기야는 거나하게 취기가 오르자 게슴츠레 실눈을 뜨고 해가 꼬리를 감출 무렵 집엘 도착하니 아내는 못 다심은 콩 모종을 마저 심으란다. 모종이 얼마 남지는 않았지만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꼬리를 감출 때라 시간이 시간인 만큼 내일 심자고 통사정을 해보았지만, 아내는 요지부동 "잘 놀다 왔으면 빨리 심으세요. 모종이 못쓰게 될 텐데 아까운 모종을 버릴 작정인가요?" 단호한 어투이다. 난 빨리 심으라는 앙칼진 목소리에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다급한 마음에 아들 녀석을 부르기로 했다. 이 녀석 얘기하자면 대학을 다니는데 엊그제 방학을 하고 어제 오후에 대학 기숙사에 가서 녀석의 짐을 챙겨 왔으니 집에 온 지 단 하루 만에 일복이 있는지 딱 걸렸다. 아들의 도움 덕분에 모종에 물을 줘가며 아들 녀석과 함께 남김없이 몽땅 심었다. 수고했다는 말도 있을 법하지만, 말이 없다. 때로는 말이 없는 무뚝뚝한 아내는, 부창부수라고 부부는 닮아 가기에, 그게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큰 다툼이 없으니까.
"어쨌든 오늘 아내의 잔소리가 일을 마쳤다" "아내의 잔소리가 때론 약이다." "아내의 잔소리를 듣지 않다가 패가망신한 사람들도 한둘이 아닐 테니까?"
이 이야기는 이미 이십여 년이나 지난 해묵은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아내는 그때가 참 예뻤다. 본시 아내는 착하고 온순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언제나 문제는 항상 내게 있다. 고향을 떠난 지 십여 년이 지나도록 일터를 찾아 떠돌며 헤맬 때도 남편이 불쌍했던지 그때나 지금이나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며 헤어지자는 소리, 한 번도 없이 늘 그 자리에, 잘 따라주었다. 생각다 못해 그때그때 사안마다
"여보 어떻게 할까" 물으면 "당신이 알아서 하셔요." 고분고분 따라주었던 아내가 사랑스럽다.
생면부지인 따뜻한 남도, 고흥의 십경 중에 제일이라는 팔영산, 팔영산 자락 장남리 이곳까지 마다하지 않고 따라와 준 아내가 고맙다. 요즈음 아내는 가끔 "그때가 지옥이었다"라고 말을 하곤 한다. "지금은"이라고 되물으면 서슴없이 "양반이지 그때는 그랬지 지금은 양반이지"라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난 "그래 장가 한 번 잘 갔지" "감지덕지 눈물이 난다"라며 응수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심한 인생이었다. 한번은 술에 잔뜩 취해 갈지자걸음으로 이웃집에 들러서 "마을 돈은 늘어나는데 내 돈은 줄어들어요"라고 하소연을 하더라며 이웃 아주머니가 넌지시 말씀해 주셨다. "그래요 그런 말을 다 했어요?"라고 반색을 했었지만, 실제 그랬으니까. 감투란 감투는 다 쓰다시피 했고 농협 감사를 시작으로 조합장 선거에도 출마했으니까 아내는 오죽했으랴 세월이 지나고 보면 허무하고 마을 일에 무중 일에, 왜 그리 나셨던지 후회막급하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자리에서 내려오고 보니 벌써 가세는 이미 기울었고 박수는커녕 네가 언제 수고했더냐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이런저런 일로 집이며 알토란같은 전지들, 가산을 다 정리했을 때는 누구 하나 위로가 될 수 없었다. 마을을 떠날 때는 개미 새끼 하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으니, 물론 무슨 큰 자랑이라고 온다간다는, 이사 간다고 얘기하지도 않았지만, 오가며 보았을 테고 소문을 들었겠지만 누구 하나 나서질 않았다. 둘이서 그 많은 이삿짐을 몇 며칠을 옮겼으니 아내의 심정이 오죽했으랴. 마을 일이며 무중 일에 사람 버리고, 돈 버리고, 청춘 버리고, 몸 버리고 떠날 때 환송받지도 못했으니 몰려오는 회한으로 목이 타들어 갔다. 믿음으로 은혜로, 기도로, 버틴 세월이다. 마치 예수님이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이라도 아내가 잔소리 하면 달게 받고 핀잔을 들어도 일고 무언이다.
그 시간 그 세월을 지나고 보면 좀 더 일찍이 왜 못 떠났던가? 후회막급, 가시 같은 아픔으로 밀려온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만 깨닫기엔 너무 늦었다. 새가 자라면 둥지를 떠나야 하듯이 지나고 보면 일찌감치 고향을 떠났어야 했다. 옛 유대 땅 "아브라함" 같이 말이다. 누구나 고향을 떠나는 것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둥지를 떠나라!
말 새끼가 나면 제주도로
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고기가 많은 곳으로
돈을 벌려면 돈이 많은 곳으로
모들이 모판에서 다 자랐으면
모판을 떠나 넓은 논으로
모종들이 하우스에서 다 자랐으면
하우스를 떠나 넓은 밭으로
새가 둥지에서 다 자랐으면
둥지를 떠나 넓은 산야로
사람이 가정에서 다 자랐으면
새가 둥지를 떠나듯이
가정을 떠나
거기가 어디든 알 수는 없지만
새로운 곳으로
새가 둥지를 떠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듯이
사람 또한 둥지를 떠나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계를 알 수가 없지요.
보다 나은 꿈을 기대할 수가 없지요.
둥지를 떠나라!
게으름에서
시기, 질투에서
욕심에서, 악에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악습에서 떠나야지요.
그것이 현명한 사람이요.
취할 태도이지요.
둥지를 떠나라!
거침없는 바다로, 푸른 대지로
거대한 세계로, 광대한 우주로
꿈을 가지고 마음껏 나아가라!
그것이 꿈을 가진 젊은이가
취할 현명한 태도이지요.
떠나라!
작은 일에 얽매이지 말고
주저하지 말라 결단하라!
거침없이 나아가라!
새길 이 열릴 것이다.
"지금도 아내에게 큰소리치며 고집으로 일관하는, 마을 일에 무중 일에 골몰하는 남편들이여!" "자갈논 팔아먹는 일은, 가산을 탕진하는 일은 없기를" "수신제가 후 치국평천하라고 가정이 먼저이다."
"아내의 잔소리가 때론 약이다." 자신과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고분고분 어린아이처럼 듣는 것이 유익이다. 지금도 곁에서 조잘거리며 잔소리하는 아내가 곁에 있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행복한 일이다.
어찌 당신만 하리오.
저 해가 밝다 한들
맘씨 좋은 당신만 하리오.
자분자분 조용한 맘씨
천상천하, 당신 하나만은
천지 우주 만물 중에
해와 같이 우뚝하지요.
저 달이 밝다 한들
솜씨 좋은 당신만 하리오.
솜씨 중에 맛깔나는 음식솜씨
고을고을 입소문이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천하제일 당신만 하리오.
저 별이 밝다 하들
맵시 좋은 당신만 하리오.
반짝반짝 빛나는 맵시
천하일색, 당신 하나만은
무리 중에 군계일학
유난히도 빛이 나지요.
저 해와 달과 별이
변함없는 일편단심 당신만 하리오.
산천초목 스러져도
영원무궁 살아나 보자
지화 자자 내 사랑 내 사랑아
영원 영원히 당신만을
"이 세상, 지구의 반쪽 남편들이여!
가정을 위하여 우리 모두의 평화를 위하여 죽어 살자! 꼭 그렇지만도 않겠지만 들을만한 것은 듣자!"
"아내의 잔소리가 때론 약이다."
반농반상
글/김영주
할아버지는 평생 일만 하셨다. 일자무식이라지만 농사일을 하셨기에 농사는 “반농반상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러니저러니 뭐니 뭐니 해도 결국 하늘이 먹게 해야 먹는다는 것이다. 어릴 적에 들은 그 말씀들이 생각이 난다. 이유인즉슨 오랜만에 감자를 심었기 때문이다.
몇 해 전의 이야기다. 시장 난전에서 감자를 팔았던 이야기이다. 그해 하필이면 많이들 심어 똥 금이 되었다. 막상 도시민들이 사 먹으려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감자뿐만이 아니다. 이것저것 심다 보면 똥 금에 버리는 것도 있다. 4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지난 세월 속에 기억조차 뼈아픈 이야기이다. 그해 천여 평 이상이나 되는 배불래기 비탈진 밭에 딴에는 돈 벌어 보겠다고 당근을 심었는데 그해 농사를 망치고 말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당근이 풍작이라 지지리도 못난 농사꾼은 아픔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물색 좋은 당근이지만 그야말로 똥 금이 되어서 뻔질나게 드나들던 중간 수집상은 발걸음을 끊고 사지도 않으니 이래저래 팔지도 못하고 가슴을 애태우며 농사를 포기할까 망설이며 애꿎은 당근만 눈치를 주었던 기억이 난다. 이럴 때 하는 말이 농사는 잘되어도 걱정, 못되어도 걱정이다. 풍년이 되면 과잉으로 제값을 못 받게 되고 흉년이 지면 소비자의 아우성에 수입하게 되니 큰 이익을 기대할 수 없다. 야속하리만치 냉정한 것이 농사이다. 농사뿐만이 아니라 시장원리로 말하자면 수요와 공급이 맞아떨어져야만 제값을 받는 것이 기정사실이다. 시장원리 이전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잘 되면 똥 금이고 모자라면 수입하니 어쩌란 말이야? 그냥 버리기엔 아까워 이웃에 나누어 주기도 하였고 일부 구덩이를 파고 꼼꼼히 저장하였는데 이듬해 봄에 가서도 똥 금이라 그야말로 죽을 쑤어 한해 농사를 망쳐서 마음이 아프고 쓰라린 적이 있었다. 이젠 농산물도 무한경쟁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말들 한다. 그러니 오죽이나 할까.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바라보아야 함이 옳은 일이라지만 어디 농사일뿐일까. 예나 지금이나 농사일은 어렵고 돈이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들 하니 참으로 암담하기만 하다.
그러기에 농사는 먹고 남으면 무조건 소비자에게 잘 팔아야 한다. 때론 고민에 빠진다. 남아도 큰일 모자라고 큰일이다. 농사꾼은 반 장사꾼이 되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팔아먹을 재주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난 그렇지 못하다. 남에게 부탁하기란 더욱더 그렇다. 어쩌다 말을 꺼내 보지만 이내 주절거리다 만다. 형제들과 이웃에 나누어 먹고 멀리 생각나는 지인들과 일가 친인척들에게 나누어 주고도 열 몇 박스를 팔아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 몇 번을 망설인 끝에 지인 한두 분에게 주절거리며 몇 박스 팔아달라고 부탁을 하였더니 알아보겠다기에 태무심하고 기다렸더니 까마귀고기를 먹었는지 함흥차사다. 괜한 부탁을 해서 마음에 부담을 주었나 싶어 가까운 읍내에 사는 동생에게 말하였더니 지인들에게 팔아 주겠단다. 부탁했던 지인에게 부담을 주어 죄송하다는 문자를 남기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동생이 팔아 주겠다고는 했지만 두 손 놓고 가만히 있기에는 그렇다. 가사에 바쁜 아내에게 넌지시 “내친김에 이걸 시장에 나가 팔아볼까?” 대경실색이다. 화들짝 놀라는 기색에 한동안 기가 죽어 말을 잊지 못했다. 이번 일로 내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산 체험이 되리라 믿는다.
그렇다. 때론 우리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결단이 필요하다. 농사도 마찬가지이다. "농사는 어찌 보면 짖는 것보다 파는 것이 더 힘들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반농반상이라고한다. 반은 농사꾼 반은 장사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팔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뀌어야 보배"라고 "농사는 농사꾼이 먹을 양식 외에는 모두 팔아야 한다." 그래야 농촌 생활이 가능하다. 옛날에도 그랬다. 겨울 양식만 남겨놓고 잉여생산물은 죄다 시장에 내어다 팔아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고을마다 오일장이 아니던가. 오일장이 서는 날은 일찍이 하루 전날에 팔 농산물을 준비하고 새벽닭이 울 때쯤에 읍내 시장으로 바삐 길을 재촉한다. 팔 농산물들은 남자는 지게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시장으로 갔다. 사 십리 길을 걸어 읍내 장터로 나가시던 마을 어르신들이 생각이 났다. "그래 맞아 그때는 그랬었지"라며 장날 난전에서 한번 팔아보기로 했다. 마음을 다잡고 "이런 방법도 있었네"라며 쾌재를 울렸다.
순간 지난날의 추억이 떠올랐다. 군 제대 후 다음 해의 일이었다. 논에 수박을 심었다. 그때만 해도 가당찮은 일이었다. 쌀이 주식인 우리의 정서로서는 있을 수 없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심지어는 마을 어르신들이 군대 갔다 와서 실성했다고 조롱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그해 수박이 잘되었고, 이모작으로 가을배추를 심어 일 년 농사의 세배에 달하는 소득을 올렸다. 다행히도 따가운 시선은 피했다. 그때 수확한 수박을 마을 입구에 천막을 쳐놓고 쭈뼛쭈뼛 팔아본 기억이 났다.
그런데도 막상 난생처음 시장 구경만 하다가 시장 난전 좌판에서 팔아보려 하니 용기가 나지를 않는다. 망설임 끝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준비를 했다. 팔 감자며 양을 달아줄 저울, 가격을 쓸 매직펜과 여분의 박스, 감자를 덮을 신문 그리고 가까이에서 사는 동생에게서 야외용 접이식 탁자와 등받이 없는 둥근 의자, 야외용 파라솔과 타이어 휠로 만든 파라솔 꽂이, 감자를 담아서 팔 광주리들을 빌리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장터에 도착하니 이미 장이 섰다. 두리번두리번 살피다가 어찌하여야 할지 아주 난감하다. 한번 물어보기로 했다. 매번 자리가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빈자리가 있으면 빈자리에서 팔아도 되는 건지 난장에 계시는 어르신 한 분에게 여쭈어보았더니 빈자리가 있으면 빈자리에서 팔면 된다기에 때마침 빈자리가 있어 용기를 내어 좌판을 펼쳤다. 시장 입구 주차장 앞 우측 끝에 자리를 잡았다. 좌판을 펼치고 파라솔까지 펼치니 제법 그럴싸하다. 감자를 광주리에 소복이 담고 달아보니 3.5 kg가 넘는다. 얼마를 받을까 고민 끝에 3,000원을 받기로 하였다. 이만하면 직접 농사를 지었고 시세가 없으니 괜찮은 가격이다. 싶기에 가격을 써서 놓고, 팔 감자를 정리 정돈을 하였다.
그리고 좌우를 살펴보니 죄다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들로 농사를 직접 짓는 분들 같았다. 시장 입구 우측으로 마늘, 양파, 감자, 다슬기, 멸치, 복숭아, 참외 수박 등등 좌판을 펼친 채로 옹기종기 모여 앉은 어르신들이 오랫동안 이 일을 하셨는지 서로 서먹해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오늘 하루해가 지도록 가까운 이웃이 되었다.
칠순이 넘으신 내외분이 오늘 내게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며 서슴서슴 말을 걸었다. "양파와 마늘을 가지고 나오셨네요." 그렇다고 대답하시면서 아래위로 살펴보시며 어디서 굴러온 개뼈다귀인가 싶은지 한참을 보시더니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오신다. 오늘 이렇게 이웃이 되어주셔서 감사하다고 응수를 하자 웃으시며 반겨주신다.
어르신 한 분이 지나가시기에 용기를 내어 감자 좀 사시라고 하였더니 나도 농사짓는 사람이라며 감자 농사를 해서 다 팔았다고 하시면서 힐끔 쳐다보신다. 첫 번부터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그래도 초록은 동색이라고 감자 농사를 지었다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는 칠순을 바라보는 한 노부인이 좌판에 가장 큰 감자를 담은 광주리를 보시고 한 박스를 사시겠다며 가장 큰 거로 달라고 하신다. 몇 번을 밀고 당기기를, 가격흥정이 끝나자 큰 것을 담은 광주리를 보시고 더 달라고 하신다. 안된다고 망설이다. 직접 농사를 지었으니 드린다며 그래도 농사 인심이 최고라며 위안으로 삼고 맛있게 드시라며 인사를 했다.
난생처음으로 난장에 나와 마수걸이를 했으니 기분이 좋다며 돈을 들어 보였더니 오늘 이웃한 옆자리 어르신이 덩달아 기분이 좋으신지 껄껄 웃으신다. 이제 마수걸이를 했으니 안 팔리면 어쩌나 마음 졸이던 생각이 "하면 된다"는 마음에 자신감과 위안이 되자 참았던 목마름이 고개를 든다. 주차장 입구에 있는 매점에 가서 기쁜 나머지 마수걸이했다며 칡즙 한잔을 달랬더니 이분이 걸작이다. 장사하는 사람으로 안 보인다며 칡즙을 준다. 어쩌다 올해 감자를 심어 요즈음 시간이 있어서 난생처음 난장에 나와서 감자를 팔고 있다고 말하였더니, 어쩐지 하는 기색이다.
속절없이 시간이 흐른다. 비가 올 듯 찌푸렸던 하늘은 말갛게 분단장을 하고 고운 눈으로 시선이 따가 왔다. 따가운 시선을 피하여 파라솔 주위만 맴돌았다. 지루할 때쯤 점잖은 중년 부인이 다가온다. 감자를 매만지며 "감자가 둥글둥글하게 매무새가 참 좋네요." 그리고는 한 박스를 달라고 하신다. 점잖아서 더 달라는 말이 없어도 한 광주리를 덤으로 주었다. 지인에게 선물한다며 손수 골라서 행 길 옷가게까지 갔다 달라고 하기에 갖다 드리고 돌아올 땐 싱글벙글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팔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감자는 팔린다.
오늘 난장에 이웃인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이 흘렀다. 광주리에 담아 파는 감자는 잘 팔리지 않는다. 3.5kg이 넘도록 소복이 담아서 3,000원에 파는 데도 잘 팔리지 않는다. 반 박스 넘는 것이 9,000원, 한 박스 넘는 것이 18.000원인데도 말이다. 이것도 비싸단 말인가? 생각다 못해 2,000원에 팔기로 했다. 그러자 감자가 왜 이리, 값이 싸다고 하시며 관심을 보이더니 사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싸다면서도 값을 깎는다. 소비자는 무조건 싸면 좋은가보다. 이건 무슨 심리일까? 잘해주면 잘해 줄수록 양냥거린다는 말이 있듯이 헐하면 헐할수록 더 달라는 사람의 심리인가보다. 이번 분은 싸다고 하면서도 한 광주리 2,000원짜리 세 광주리를 5,000원에 달라고 한다. 기어코 달라고 조르기에 주기도 했다. 약육강식 생존경쟁이라고 하더니 봄부터 여름까지 수고했을 농민들 농심들은 타들어 간다. 이럴 수가 있나 야속하다.
“농사는 장래가 없다.” “농사는 배짱 하나는 편하다”라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난다. 평생을 농사일을 천직으로 여기시던 나의 할아버지, 공직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는 구한말, 일제 침략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나시고 일제 강점기와 태평양전쟁, 동족상쟁의 6, 26동란, 전쟁의 폐허로,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고 춘궁기, 보릿고개를 겪으셨으니 수탈과 전쟁, 가난의 굴레, 그 속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셨던 분들이라 한역 이해가 된다. 암울했던 그 시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선열들, 민주주의를 위해 피 땀 흘린 열사들의 숭고한 정신, 마음속에 깊이 새긴다.
아버지! 아시나요.
아버지! 논산훈련소 입대하던 날
이른 시각 차가운 한기에
옷깃을 여미며
깊을 대로 깊은 한겨울 대한 무렵
동장군이 칼춤을 추는
냉랭한 아침나절이었죠.
아버지! 당신은 손을 흔들며 환송하는
수많은 사람의 인파 속에서
단 한 분 입영 열차에 오르셨죠.
군 생활 잘하라시며 신신당부를
떠나려는 기적소리 듣고서야
몸 성히 갔다 오라시던
손을 흔들며 보고 또 보시던
전 잊을 수 없어요. 그날만큼은
아버지! 당신의 큰 사랑을
그날 제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뒤돌아서서 플랫폼 인파 속으로
걸어가시던 당신의 뒷모습이
두고두고 생각납니다.
아버지! 그날 저의 눈가에는
다시는 뵙지 못할 것만 같은
못내 눈시울이
기약 없는 부원고립 생사의 전쟁터로
출정하는 용맹한 용사처럼 길을
아버지! 당신은 늘 말씀하셨죠.
국방의 의무는 신성한 것이라고
대한 남아로 태어났으니 영광이라고
군대는 갔다 와야 철이 든다시며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서야
어찌 사내라고
모질게도 말씀하셨죠.
막상 떠나보내는 아들의 모습이
못내 안쓰러워
보고 또 보고 돌아보셨죠.
아버지! 당신은 군 생활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몸소 겪으셨고
잘 아셨기 때문이겠죠.
이 아들만큼은 어렵고 힘든 군 생활을
시키고 싶진 않으셨겠죠.
아버지! 당신은 아시잖아요.
백척간두, 풍전등화와도 같은 격동기
하늘이 내린 목숨을 걸고
태평양전쟁, 6, 25동란을 겪으셨고
직접 참전하신 장본인이셨잖아요.
해방 후 분단의 아픔을
벙어리로 숨죽였던 세월
나라의 비극을 몸소 겪으셨잖아요.
그런 생사의 뼈아픈 비극은
두 번 다시는
당신이 질고를 풀어 놓으셨던
제주 모슬포 훈련소 훈련병 이야기
구사일생 태평양전쟁 이야기
일제 강점기 징용 이야기
6·25동란 피의 이야기
생사를 오가던 무용담이
저에겐 힘이 되었죠.
아버지! 이젠
사랑합니다.
"농사는 장래가 없다."는 말에 옆에 어르신이 맞장구를 치시며 덩달아 한 말씀 하신다. "젊었을 때는 농사를 지어 땅마지기라도 장만했는데 언제부턴 가는 어림도 없고 턱도 없는 일"이라시며 "가족이 먹고살기에 빠듯하다" 시며 "농사짓다 빚 안 지면 다행"이란다. 농산물 가격은 들쑥날쑥 일정치 않아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예측 불가로 "물가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라시며 깊은 한숨을 쉬신다. 끌끌 끌 혀를 차신다. "농사 중에 자식 농사가 있다"며, "일반농사나 자식 농사나 별반 다르지 않다"며, "한해 농사 잘못되면 다시 지으면 되지만 자식 농사만큼은 그렇지 않다"하시며, "평생 지어서 잘못되면 돌이킬 수 없다"하신다. 자식 덕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면서도 농사지어 자식 가르친 것이 남는 것이란다. “자식 직업이 무엇인데요?”라고 물었더니 회계사라며 돈은 수월찮게 번단다. 퇴직하면 고향 와서 산다고 말했다며 은근히 자식 자랑을 하신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 "마누라 자랑은 반미치광이 자식 자랑은 온 미치광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런데도 한참을 마누라 자랑 자식 자랑에 침이 마르지 않으신다.
그럭저럭 점심때다. 아직은 제법 남아있다. 돈 생각에 점심을 걸을까 생각하다가 다 먹자고 하는 짓인데 라는 생각으로 옆에 어르신보고 식사하시러 가시자고 했더니 도시락을 싸 오셨단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이다. 잠시 후 시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에 들어 온 것은 국밥집이다. 망설임 없이 쇠고기 국밥을 먹기로 했다. 아직 여러 시간을 버티자면 또 얼마를 팔지는 모르지만, 든든히 먹자는 심산으로 말이다.
오후 시간 잠깐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뜸하던 행인들이 하나둘 오간다. 가끔 물어보는 행인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난전에서 좌판을 벌인다는 것은 예전 같으면 얼토당토않은, 어림도 없는 일일 테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어디서 나온 배짱인지 모를 일이다. 이일 저일 온갖 일을 겪다 보니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오늘 많은 사람이 난전에서 좌판을 벌였다는 것은 산전수전 다 겪은 결과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기 옆자리에 좌판을 벌이신 어르신도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해본다.
사서 고생이라는 말이 있다. 요즈음 딱 내게 하는 말 같다. 그러나 배짱 하나는 편하다. 적어도 왈캉글캉 치사한 소리는 듣지 아니하니까. 한마디로 편하다. 비록 육신은 고달프고 궁색해 보일지는 몰라도 마음은 편하다. 모든 것을 시류에 맡기고 있으면 편하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처한 대로 살아가자. 그리고 내려놓자. 내려놓는 삶이 편안하다.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말이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갔다. 뜨거웠던 태양 빛은 느릿느릿 옅어졌다. 못 팔 것만 같았던 감자는 하나둘 주인을 만나 길을 떠났고 이제 마지막 세 광주리만 남았다. 어르신 한 분이 다가오시더니 끝물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세 광주리에 5,000원에 다 달라고 하신다. 한 광주리에 2,000원씩 세 광주리 6,000원이라고 말하며 싼 가격이라고 말하자 싸기는 싸다고 말씀하시면서 달라고 하신다. 그래 떨이다. 반 박스에 5,000원이다. 못이기는 척 냉큼 팔았다. 가져간 감자는 남김없이 다 팔았다.
주변을 정리하고 이것저것 주섬주섬 짐을 챙긴 후 오늘 하루 나의 이웃이 되어 주셨던 분들에게 감사하다며 일일이 인사를 하고 귀가를 하였다. 다 팔았다는 안도감에 흥얼흥얼 콧노래가 절로 난다.
"반농반상" 반은 농사꾼, 반은 장사꾼, 농사꾼은 일단 장사꾼처럼 잘 팔아야 한다. 그리고 무조건 풍년이 들어야 한다. 버릴 때는 버리더라도 그래야 일할 맛이 난다. 올해도 풍년 농사가 되기를 소망한다.
김영주
* 강릉 출생
* 고흥작가회 회원
* (사)한국작가회의 여수작가회의 회원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반월지를 통하여 문학 활동 시작.
* 고흥 점암 장남리에서
자연과 함께 문학 활동을 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