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 송골로 숨어들어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10-18 09:27:10
해월 최시형 평전
원주 송골 원진여의 집으로 은거
1898년 1월 3일 이천 관아의 병정들이 여주 전거론 해월의 은거지를 급습했으나 손병희가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넘겼다. 해월의 은거지가 탄로 난 것은 김연국의 경솔한 행동 때문이었다. 당시 김연국의 집을 김낙철・김낙봉・염창순 등이 들락거렸고 이들을 통해 해월의 은거지가 권성좌의 귀에 들어갔다. 관병의 급습을 받은 날 밤 해월 일행은 급히 전거론을 떠나 눈길을 헤치며 지평군 갈현(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 하갈) 이강수의 집을 거쳐 홍천 서면(홍천군 남면 제곡리 제일) 오창섭의 집으로 갔다. 그러나 오창섭의 집이 빈한해 오래 머물 수 없어 사촌인 오문화의 집을 거쳐 1월 22일 홍천 동면 방아재(홍천군 동면 방량리 방아재골) 용여수(龍汝洙)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손병희와 임순호는 해월의 은거지를 알아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홍천 용여수의 집에서 한 달간 머무르며 안전한 곳을 찾던 해월은 2월 그믐에 여주접주 임학선(林鶴善)의 주선으로 원주군 송골(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원진여(元鎭汝)의 집으로 이거했다. 72세로 와병 중이었던 해월은 손병희 등의 호위를 받아가며 2인 가마를 타거나 등에 업혀 험준한 태백준령을 넘나드는 고생을 했다. 해월이 있는 원진여의 집 동서남북으로 두목들이 접소를 두어 지키고 있었다. 손병희는 송골에서 약 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둔둔리(屯屯里)라는 마을에 있었으며, 김연국은 송골에서 문막으로 가는 도중인 옥직(횡성군 서원면 옥계리)에 있었는데 송골에서 약 8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이 밖에 손천민과 임학선 등이 해월의 은거지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접소의 정확한 위치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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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 방아재골. 해월이 여주 건거론에서 급히 피신해 은거했던 오창섭의 집이 있었던 홍천 동면 방량리 방아재골의 전경. 해월은 1898년 1월 22일부터 2월 말까지 약 1개월 간 머물렀다. 오창섭의 집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
라용환이 본 송골의 모습
송골로 들어온 해월은 동서남북의 접소를 두어 은거지를 보호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송골로 도인들이 들어오지 않게 했다. 해월을 찾아온 도인들도 직접 해월을 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해월이 송골에 은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3월에 평안도 성천(成川)의 도인 라용환(羅龍煥), 라인협(羅仁協), 이두황(李斗璜) 등이 송골을 찾아 왔다. 이후 라용환과 라인협은 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로 활동했다. 라용환은 <신인간(新人間)> 통권 제25호(1928년 7월)의 ‘신성(神聖) 양석(兩席)을 처음 모시던 그때’에서 당시 송골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의암(義菴) 선생을 처음 뵈옵던 장소는 송산(松山)서 약 5리가량 되는 섬배[階巖]란 곳에 있는 이화경(李化卿) 집이었습니다. 그때 성사(聖師, 손병희를 말함)로 말씀하면 30 갓 넘은 한창 장년이니 만치 위의(威儀)가 퍽 건장하였습니다. …… 그때는 지목도 많고 집(雜)사람도 많으니만치 장석(丈席, 해월의 거처) 출입을 누구나 함부로 하게 못되었습니다. 동서남북에 접소를 정하고 일반 도인은 각기 당 접수에 두류(逗遛)하면서 접주에게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해월신사께는 함부로 뵈옵지를 못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때 해월신사가 가장 신임하던 수제자로는 의암(義菴)・송암(松菴, 손천민)・구암(龜菴, 김연국) 등 3암이 계셨는데 모든 분부는 이 3암을 통하여 하시고 3암이 다시 각 포 각 접을 지휘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처음에는 의암 선생께 도담을 듣게 되었고 해월신사는 다만 배알뿐이고 하등 도담은 못 듣게 되었습니다.
라용환, 라인협, 이두형 세 사람은 제자로서 지목이 심하고 길도 멀고 험난하지만 “넘치고 넘치는 위도모사(爲道慕師, 도를 위하고 스승을 사모함)의 정(情)을 이기지 못하여” 평안도 성천을 출발해 황해도 곡산을 거쳐 경기도 이천, 강원도 평강, 김화, 화천, 춘천, 횡성을 거쳐 7, 8일 만에 원주 송골에 도착했다. 당시 평안도를 손병희가 관장하고 있어서 이들은 손병희의 접소가 있는 둔둔리 이화경의 집을 찾았다. 이들은 손병희를 통해 동학의 교의와 역사를 들었지만, 해월을 직접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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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용환. 일제 감시대상 카드의 사진으로 3.1 독립만세운동 이후 작성된 것이다. 라용환은 해월이 체포되기 한 달 전인 1893년 3월 원주의 송골을 방문해 해월에 만났는데 그 내용을 1928년 7월에 발간된 <신인간> 통권 제25호에 실었다. |
서북 지방의 포덕에 기뻐한 해월
당시 해월이 병중이어서 외부에서 온 도인들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손병희는 멀리서 찾아온 라용환과 라인협을 위해 어렵게 해월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주선했다. 라용환은 꿈에 그리던 스승과의 짧은 만남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해서 우리도 처음은 의암 선생께 위에 말씀한 방과 같이 도담(道談)을 듣게 되었습니다. 해월신사는 다만 배알(拜謁)뿐이고 하등 도담은 못 듣게 되었습니다. 도담은 못 들었으나 그때의 인상이라든지 말 없는 가운데 희열을 느낀 것은 한(限)이 없습니다. 72세가 되신 노(老)한 아버지가 억조창생(億兆蒼生)의 사생고락(死生苦樂)을 생각하시면서 초당(草堂)에 단좌(端坐)하고 계시다가 우리들 청년 제자를 인견(引見)하시고 “원로(遠路)에 편안히들 오신 것을 기뻐합니다. 서북(西北)에 포덕이 많이 난다는 것을 기뻐합니다.” 하실 때는 우리는 실로 감격에 넘쳐 울뻔하였습니다. 그 노당익장(老當益壯) 하신 기풍(氣風)이라든지 그 많고도 보기 좋은 수염이라든지 그 낙발(落髮)이 다 되신 머리에 삼층관(三層冠)을 쓰신 것이라든지 그때의 인상이 낱낱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모든 도담은 3암에게 전하였으니 다들 잘 듣고 가서 대도에 어긋남이 없게 하시오.” 하시는 말씀을 듣고 우리는 공손히 하직(下直)을 여쭈었습니다.
라용환은 해월을 찾아뵙고 단정히 앉아있는 모습만 보고도 감격해 눈물을 흘릴 뻔했다고 했다. 라용환 등은 손병희로부터 “앞으로 서북에 포덕이 크게 일어나고 또한 유능한 일꾼이 서북에서 많이 날 것이다”라는 해월이 전한 당부를 전해 듣고 성천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라용환의 이 기록이 해월이 체포당하기 이전 은거 시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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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월 최시형. 이당 김은호(金股鎬)가 1915년 시천교의 구암 김연국의 부탁으로 그렸다고 한다. 그림에 1898년 송골을 방문했던 라용환이 본 것과 같이 해월이 삼층관을 쓰고 있다. |
송골을 다시 찾은 이는 표영삼
해월의 마지막 은거지인 원주의 송골을 다시 찾은 이는 천도교사 연구자인 표영삼이었다. 표영삼은 원로들로부터 천도교 역사에 관한 내용을 자주 들었는데 구체적인 연도나 장소를 물으면 답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천도교 사적지 연구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표영삼은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약 7년간 집중적으로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의 주요 사적지 30곳을 탐방하고 그 내용을 <신인간>에 연재했다. 그가 해월의 마지막 은거지였던 송골을 다시 찾은 것은 1978년 5월이었다. 표영삼을 통해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많은 동학의 초기 사적지의 위치가 정확하게 알려지게 됐다.
표영삼은 먼저 송골에 대한 기록을 먼저 점검해 다음과 같은 조건에 충족하는 장소를 찾았다. 첫째, 해월이 체포돼 여주로 압송될 때 문막을 거쳐 갔다 했으므로 문막을 거쳐 가는 노상에 위치해야 하고, 둘째, 라용환의 기록에 원주에서 북쪽으로 30리 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했으므로 이에 해당한 장소여야 하고, 셋째, 조석헌과 이종훈의 기록에 송골이란 우리말 표현이 있어 송골이라고 불리는 마을이어야 하고, 넷째, 조석헌의 기록에 송골이 고산광격에 있다고 했으므로 고산이나 광격으로 불리는 동리에 있어야 한다, 표영삼은 이러한 조건을 원주 일대 5만분의 1 지도로 대조해 당시 원성군 호저면 고산리 송골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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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 송골 지도. 표영삼은 송골에 관한 기록을 지도에서 대조하여 찾아 현장 답사를 통해 해월이 송골에 있었던 원진여의 집터를 찾았다. 표영삼이 그린 이 지도는 <신인간>통권제359호(1978.7)에 실려있다. |
원진여의 집은 6.25 전쟁 때까지 폭격으로 소실
1978년 5월 27일 표영삼이 찾은 송골은 13가구의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송골 마을에는 동학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남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진 증골에서 정봉철(당시 67세)을 만나 송골과 동학에 관해 들을 수 있었다. 정봉철은 서당에 다닐 때 훈장으로부터 “최시형이란 동학 선생이 ‘실람’ 바위굴에서 송골 원덕여네 집으로 왔다가 체포되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6.25 전쟁 전에는 천도교인들이 몇 집 있었는데 전쟁통에 모두 어디로 떠나거나 별세해 지금은 아무도 없다고 하면서 천도교인들이 외우는 주문도 기억하고 있었다고 했다.
표영삼이 찾아간 원진여의 집은 공터가 되고 집은 없어졌다고 했다. 주민들은 원진여의 집에는 박승선이 살고 있었는데 고산 마을 이사를 했다고 해서 고산마을까지 방문해 부인으로부터 원진여의 집 구조에 대해 들었다. 부인의 말에 의하면 원진여의 집은 안채와 사랑채로 돼 있었는데 안채는 부엌・툇마루・아랫방・윗방으로 돼 있고 사랑채는 방앗간(발로 찧는 방아)・외양간・부엌・사랑방으로 꾸며져 있었고 마당도 보통 넓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집의 대문은 안에서 보면 오른쪽에 있었다고 한다. 해방 때까지 잘 있었던 원진여의 집은 6.25 전쟁 때 북한군이 이 마을로 들어와 숨어있는 것을 아군이 발견해 폭격하는 바람에 파괴됐다고 한다. 박 씨는 사랑채에서 약 5년간 살다가 이사를 했다고 했다. 집터의 오른쪽으로는 바위가 깔려 있고 물이 나와 집을 지을 수 없어 공터로 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원진여의 안채가 복원돼 있다.
표영삼이 송골을 찾은 이후 장일순 등 원주의 뜻있는 분들이 치악고미술원우회를 만들어 1990년 원진여의 집터에 표지석을 세우고 마을 입구에 추모비도 세웠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