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박해의 상황을 북경 주교(主敎)에게 고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건의했던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黃嗣永)의 묘(墓)는 지난 1980년에 들어서야 겨우 그 위치가 확인됐다.
황사영(黃嗣永)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長興面) 부곡리(釜谷里)에 있다.
황사영(黃嗣永)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信者)로, 1791년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보고
정약종(丁若鍾), 홍낙민(洪樂敏)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알아갔다.
이를 계기로 "알렉시오"란 세례명(洗禮名)으로 천주교(天主敎)에 입교한다.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주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후
"주 신부"를 봉행(奉行)하며 명도회(明道會)의 주요 회원으로 활발한 전교와 신앙 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때 정약종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자
황사영(黃嗣永)은 박해의 손길을 피해 서울을 빠져 나와 충청도 제천 배론으로 갔다.
황사영(黃嗣永)은 배론의 옹기 가마골에서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金漢彬), 황심(黃沁) 등이 전하는 박해 상황을 듣던 중 그 해 8월 "주문모" 신부가 치명(致命)한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는 모필(毛筆)로 명주천에 적는다.
이것을 가져 가던 황심(黃沁)이 붙잡힘으로써 백서는 사전에 발각되고 황사영(黃嗣永)은 9월 29일 체포된다.
이것이 황사영(黃嗣永) 백서 사건(帛書 事件)이다.
이 백서는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흰 명주천에 작은 붓글씨로 쓰여졌고,
모두 1백 22행, 1만 3천 3백 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백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신유박해 중에 순교한 주 신부 외 30여 명의 사적을 열거하고,
둘째는 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벽파와 시파간의 골육 상잔의 치열한 당쟁이었음을 피력한 다음
세번째로는 조선 교회의 회생과 교우들의 학살에 대한 대비책으로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내용이다.
이 세번째의 내용이 가장 큰 문제였다.
청(淸)의 황제인 가경제(嘉慶帝)가 종주권(宗主權)을 행사해
조선이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청(淸)의 감독과 보호를 요청하며, 조선을 청(淸)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줄 것도 요청했다.
조선 조정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황사영이 외국의 군대를 요청했다는 점이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서구 천주교 국가의 군함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명을 조선에 보내서
조선의 천주교 신자가 자유롭게 천주교를 믿을 수 있도록 압력을 넣어야 한다고 했다.
이 백서의 내용은 조선의 조야(朝野)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조선 조정은 이것을 역모(逆謀)로 간주했다.
황사영은 체포된 뒤 11월 서소문 밖에서 역모를 모의한 죄인에게 가해지는 형벌인 거열형(車裂刑)을 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또한, 숙부 황석필과 황사영의 부인은 제주도로 귀양을 갔고, 황사영의 모친은 관노비(官奴婢)가 됐다.
역모를 모의한 사람은 그 집안 자체를 멸족시킨다는 당대의 형벌 원칙에 적용된 것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16명의 또 다른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과 정하상(丁夏祥, 1795-1839)"바오로"는 백서를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심지어,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샤를르 달레"(Claude Charles Dallet, 1829-1878) 신부도
“지나친 상상에서 나온 유치한 계획이며, 저 시대의 몽상(夢想)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훗날 학자들 역시 이것은 “명백한 반란”이라고 평가한다.
이것으로 인해 황사영(黃嗣永)은 순교자(殉敎者)는 될지언정 성인(聖人)의 품계(品階)에는 결코 오르지 못할것이다.
황사영(黃嗣永) 백서의 원본은 원래 근 1백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 오래된 문서를 정리하면서 우연히 발견되어 마침내 "뮈텔" 주교에게 보내졌고,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기념품으로 봉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