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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과 조선인_비극은 왜 일어났는가?
(関東大震災と朝鮮人 悲劇はなぜ起きたのか)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비극은 왜 일어난 것인가?
2016. 9. 3. NHK 방영
번역 : UDUMJEE
도쿄도 스미타구 요코아미쵸 공원(2016년 9월 1일)
93년 전에 일어났던 관동대지진의 희생자를 위로하는 위령제가 열렸습니다.
유족들 600여명이 참배했습니다.
1923년 9월 1일 일어난 관동 대지진.
화재가 도쿄, 요코하마 등으로 번져서 약 10만 명이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공원의 일각에서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지진 재해 때에 피살당한 조선인을 추도하는 비석
당시, 유언비어, 잘못된 정보가 번져서 많은 조선인이 살해당했던 것입니다.
[참배한 재일동포 2세]
“9월 1일이 될 때마다…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빼앗겼다... 그런 사람들의 기분은... 자신이 만일 어떤 나쁜 짓도 안했는데도 네가 조선인이라 해서 살해당하는 순간 어떤 기분이었겠습니까? 인간이라면….. 왜 내가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
[참배한 일본인]
“93년 지났어도 돌아가신 분들의 정말로 억울한 마음…. 이유 없이 피살당한 원통한 마음.. 거기에 대하여 명확히 대답하고 있지 않다. 일본인이라면 알려주지 않았어도 스스로 노력을 보태서 알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재해가 일어나기 1년 전!
도쿄에는 적어도 5천 명 정도의 조선인이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조선반도에서 돈을 벌려고 온 노동자.
그 조선인들에게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2009년, 국가(일본)의 중앙방재회의에서 관동대지진에 관한 보고서를 냈습니다.
재해의 교훈을 여러 관점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 국가의 조직으로서 처음으로 조선인 살생사건에 대해서 상세하게 분석했습니다.
[보고서를 정리한 역사학자 / 도쿄대학 스즈키 준 교수(일본근대사)]
“군, 경찰, 시민이 함께 예외라고 말하기 어려운 규모로 무력과 폭력을 행사했다. 조선인에 대한 박해라는 문제를 정확히 끌어들였다고 할까, 정부 보고서에 그것을
확실하게 적어 넣어 교훈의 하나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고 하는 점은 크다고 생각합니다.”
보고서가 조선인 살생을 근거로 한 것은 당시의 사법성(일본정부)의 자료입니다.
입건 된 51건의 조선인 살생 사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왜 살해가 일어난 것인가?
중앙방재회의 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습니다.
『군대와 경찰, 신문도, 한 때는 유언비어 전달에 기여하고 혼란을 증폭시켰다. 국가와 현이 잘못된 정보를 발표하여 그 유언비어를 믿은 사람들이 살해를 한 사례도 있습니다.』
부친으로부터 조선인을 살해한 기억을 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조선인이) 여기까지 도망쳐 왔지만 여기 벼랑을 내려와서 여기 밑의 밭... 정확히… 현관… 이 근방이네요.. 고구마 줄기에 발이 걸려서 있을 때 마을사람들이 습격했다고… 우연입니다만 우리 밭이었습니다...”
관동대지진으로부터 93년!
왜 많은 조선인이 살해되었는가?
새로운 자료와 사람들의 증언으로부터 접근해 보겠습니다.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비극은 왜 일어난 것인가?
방위성 방위연구소
여기에 조선인 살해사건을 사법성이 은밀하게 정리한 자료가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TV 촬영이 허락되었습니다.
[재해 후의 형사 사범 및 그에 관한 사항 조사서]
재해 후에 입건된 형사사건을 사법성 형사국이 정리한 조사서, 조선인의 살생 사건에 대하여 하나하나 기록, 보고되어 있습니다.
[일 시] 9월 2일 오후 10시
[장 소] 아즈마쵸 카메이도
[피해자] 1명 [성명 불명]
[죄 명] 살인
[범죄사실] 몽둥이 또는 장작으로 난타하여 살해
조사서가 정리한 살생사건으로 조선인의 사망자는 모두 231명, 당시 (일본)정부가 확인한 살해입니다. 중앙방재회의의 보고서를 정리한 도쿄대학의 스즈키 준 교수(일본근대사)는 사법성의 조사서를 근거로 조선인의 살생사건을 분석했습니다.
[도쿄대학 스즈키 준 교수]
“많은 조선인을 표적으로 한 살생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는 그 자체를 잘 나타내고 있는 상당히 귀중한 자료입니다. 살인, 또는 살인미수 등이 있습니다만, 쇠갈고리, 쇠망치를 들고 난타하여 살해했다는 상당히 난폭한 행위가 일어났다는 것을……, 확실히 상대방을 보고 저항할 힘이 없다고 생각되어지는 사람을 집단으로 습격하여 학살이라고 하는 단어로 밖에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법성의 조사는 범인이 검거되어 형사사건으로서 입건된 것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확인된 범죄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예를 들어 피해를 당한 조선인이 몇 명이었는지 집계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방송에서는 조사서의 51건의 살생에 대해서 장소와 희생자의 수를 지도상에 나타내 보았습니다. 재해 다음날 9월 2일. 도쿄부(府) 구역 내에서 시작된 살생 사건. 9월 3일에 절정을 이루고, 더욱이 사이타마 현, 치바 현 등의 근처 현으로 번졌습니다.
9월 6일까지 231명이 살해당했습니다.
왜 이런 살생 사건이 일어난 것인가?
1923년(다이쇼 12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매그니튜드(magnitude) 7.9도의 지진이 관동지방을 덮쳤습니다. 심한 요동과 함께 도쿄,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발생한 큰 화재가 피해를 키웠습니다. 10만 명 정도가 생명을 잃고, 도쿄에서만 100만 명 이상이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찰청도 화재에 뒤덮였습니다. 전신, 전화 등 통신 수단이 전멸하여 경찰은 사태를 파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중에 사람들 사이에서 난무하는 유언비어가 경찰서에 보고되었습니다.
[경찰청 다이쇼 대진화재지]
최초의 유언비어는 9월 1일 오후 1시경.
『후지산이 대분화하고 있다.』 『큰 쓰나미가 닥쳐온다.』
오후 3시에는 처음으로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가 보고됩니다.
『사회주의자 및 조선인의 방화 많음.』
9월 1일 오후 유언비어를 듣고 아라카와 철교로 피난 온 남자의 증언이 남겨져 있습니다.
[시마가와 쇼 (1982년 촬영)]
“쓰나미다! 라고 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높은 곳이 좋다고 생각해서 둑에 올라 휩쓸려 가면 곤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허리띠를 풀어서 선로 밑으로 감고 바위에 묶어서 파도가 밀려와도 떠내려가지 않도록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쓰나미는 오지 않았어요. 뭐야 이거… 하면서 자려고 하니까, 조금 지나서 이번에는 조선인이 공격해 온다고 누군가 하는 말이 들려왔고, 격분했지요. 우리들은 무기 따위 없었습니다. 막대기를 들던지 죽봉 등, 농가이기 때문에 그런 정도는 있었습니다. 고구마 잎이 무성하게 있었는데, 그런 잎이 인간의 얼굴로 보였어요. 그래서 이렇게...”
사회학자 사토오 켄지 씨는 중앙방재회의 보고서 안에서 도쿄의 경찰서가 기록한 유언비어를 분석했습니다. 유언비어의 8할이 조선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중앙방재회의 보고서]
[14시경] 조선인은 독약을 우물에 넣거나, (조선인) 수백 명이 관내로 침입해서 강도, 강간, 살육 등 폭행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9월 1일의 저녁 무렵, 보고가 시작된 조선인과 관련된 유언비어, 재해의 다음 날, 급속히 늘어나 도쿄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아직 라디오가 없었던 당시 사람들의 정보원은 신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문사가 화재를 당해 거의 모든 신문을 발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도쿄대학 사토 겐지 교수(사회학)]
“유일하게 있었던 신문이 끊어졌다. 그러므로 정보의 공백 상태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불안을 느꼈다는 것은 크다. 정보를 확인한다든지 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가두에 나와서 사람들에게 물어보거나 하지만, 가두에 나온 사람들은 피난민이라든지 모르는 사람이 많고,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서 흘리고…하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시기와 의심이 시기와 의심을 낳고, 불안이 더한 불안을 낳는다고 하는 것이 유언비어를 역시 넓게 퍼뜨리는 큰 힘이 되어 버렸다.”
9월 2일이 되어도 도쿄에서는 화재가 계속 넓게 퍼지고 있었습니다. 먹을 음식과 물을 얻는 것도 곤란한 피난 생활, 안전한 살 곳을 찾아서 치바, 사이타마 등 근처 현으로 피하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유언비어는 2일 오후 도쿄의 동쪽, 현재의 치바현 후나바시 시까지 퍼졌습니다.
치바현 내에서 일어난 조선인 살생사건에 대해서 40년 전부터 조사해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직 고교 교사인 히라카타 치에코(75세) 씨는 유언비어를 들었다고 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후나바시 경찰서 순사였던 와타나베 요시오] (1978년 수록)
“다이쇼 12년(1923년) 그때 저는 후나바시 경찰서의 순사로서 근무했습니다. 재해 후 정보수집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2일 저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때, 저는 전화를 받았는데 상대방이 전화로… 군대 어조로 ‘현재 도쿄 방면에서 온 조선인 단체와 관청의 포병대가 에도가와를 사이에 두고 지금 교전 중입니다.’ 이것이 가장 처음 온 것이었습니다. 놀랐습니다. 그때에는. 교전 중이라고 해서…, 그때 인원이 3천명이라고 했나… ‘도쿄 방면에서 온 조선인 3천명과 지금 에도가와를 둘러싸고 교전 중입니다. 경계가 필요합니다.’ 이것만 전화로 와서 큰 일이 벌어졌구나! 그런 일이 일어나겠나?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그 때 저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었습니다. 정말로........ 머리가 복잡할 때이므로…”
9월 2일 오후, 정부는 사람들의 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어떤 결단을 내렸습니다.
계엄령을 적용했던 것입니다. 경찰이 제기능을 잃고 있는 중에 군대가 도쿄의 치안유지를 위하여 나섰습니다.
[당시 내무대신이었던 미즈노 렌타로오]
계엄령 적용을 단행한 재해 다음날 각료회의를 모집했습니다.
“오오키 철도대신과 같이, 조선인이 공격해 온다는 보고를, 빈번히 타마가와 주변에서 소문으로 소란을 피우고 있다고 하는 보고를 받았다. 여러 가지 생각해 봤지만 결국 계엄령을 시행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결정했다.” (제도부흥비록에서)
관동지방에서는 9월 중순까지 약 5만의 병력이 집결, 군대는 경비와 부상자의 구호, 복원 활동도 했습니다.
[요코하마 개항자료관 조사연구원 요시다 리츠토(군사사회학)]
“군 자체는 치안유지라든지 구호활동을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군이 총검을 들고 마을로 나온다는 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것이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하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법성의 조사서에 의하면 조선인의 살생사건이 9월 2일 저녁부터 발생하고 있습니다.
[일시] 9월 2일 오후 9시
[장소] 세타가야마치 오오아자 타이시토오
[피해자성명] 조선인 1명, 성명 불명
[죄명] 살인
[범죄사항] 엽총으로 사살
조사서에 의하면 9월 2일의 조선인 살생사건은 8건, 모두 현재의 도쿄 도내이며, 한 곳에서 16명이 살생된 사건도 보고되어 있습니다.
왜 조선인 살해가 일어난 것일까?
사법성의 자료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살생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9월 2일 오후까지 유언비어를 믿은 사람들은 자경단을 만들어 마을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자경단은 총을 비롯해서 쇠갈고리, 괭이, 쇠망치, 갈퀴, 낫, 톱 등으로 무장했습니다. 조선인을 발견하기 위하여 낯선 사람을 잡아서, 주고엔 고줏센(15엔 50전), 파피푸페포 등을 말해보도록 시켰습니다. 조선인이 발음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연출가 겸 배우로서 활약한 센다 코레야씨는 재해 당시 자경단에 둘러싸여 심문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연출가 겸 배우 센다 코레야]
“9월 2일 밤, 대학생이었던 센다씨는 조선인이 대거로 일본인을 습격한다고 하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조선인이 습격해 온다고 했기 때문에 결국 우리들도 단지 놀고 있지 않고 야간 경계하러 끌려 나갔다던 것입니다. 센타가야 역에서 시나노마치로 향하는 동안, 그곳을 어슬렁어슬렁 올라가 선로에 들어가 (조선인이) 오는지 돌아보고 있었는데, 그런데 들판에서 (자경단의) 등불이 ‘와~’ 하고 이쪽을 향해서 왔습니다. ‘역대 천황의 이름을 말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학교를 막 졸업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만… 어느 정도까지는… 점점 더 대답을 할 수 없고.. 대답하지 않으면 당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창으로 찌르고... 큰 도끼를 머리위로 들어올리고 있었어요. 다가야에서 코리안이 아닌지 의심받을 받아서『센다 코레야』라고 하는 예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조선인으로 오해를 받은 일본인도 살해당했습니다. 사법성의 조사서에서는 그 수 59명. 그 중에는 지방출신자와 청각장애인도 있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유언비어를 믿고 조선인을 살해한 것인가?
그 배경에는 조선반도에 진출한 일본의 발자취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1910년 한국병합에 의해 조선반도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군의 힘을 배경으로 조선총독부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1919년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3.1 독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서울 시내에서 시작되어 조선반도 전체로 퍼진 운동. 일본은 군대와 경찰을 동원, 탄압했습니다.
당시 일본인이 조선인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입교대학 명예교수 일본근대사)씨는 오랫동안 연구해 왔습니다.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입교대학 명예교수 / 일본근대사)]
“3.1운동은 원래 비폭력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폭력운동이라고 해서 조선인을 폭력으로 체포했습니다. 조선인은 함부로 암살, 파괴 등의 음모를 한다고 많은 일본인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1920년 도쿄에서도 독립운동가 조선인이 체포되었습니다. 요인 암살을 위해 폭탄을 제조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런 중에 신문은 조선인을 위험시 하는 기사를 게재하게 되었습니다. 신문이기 때문에 영향이 있었습니다. 신문은, 조선인은 함부로 시내 각지에 지부를 만들어 음모를 꽤하는 부정한 조선인이고, 무서운 패거리라고 보도를 종종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이고, 그리고, 경찰의 단속이 조선인에 대해서는 엄격했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인에게 방을 빌려 주면 그 일본인을 부정한 조선인을 돌본다고 하는 협박을 한다든지, 그리고 조선인 학생이 몇 명만 모여도 바로 체포했고, 그렇게 경찰이 엄격한 단속을 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선인은 무섭다고 하는 인상을 일본인이 갖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가 퍼져가는 중에 치안유지를 담당한 내무성은 어떻게 대처했는가?
내무성 경보국장인 고토 후미오는 잘못된 유언비어를 사실이라고 믿고 움직였습니다.
9월 3일 아침, 고토는 각 현에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습니다.
『도쿄 부근의 재해를 이용해서 조선인은 각지에 방화를 하고, 부정의 목적을 수행하려고 실제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리고 방화하는 자가 있다.』
[전수대학 준교수 미야치 타다히코(정치학)]
“조선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엄격한 단속을 했으며, 경찰 중에서도, 혹시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 중에서 나쁜 짓을 하는 인간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는 경계심이 재해 전부터 이미 있었기 때문에, 아~ 정말로 일어나 버렸구나..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유언비어를 믿어 버렸거나, 유언비어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내무성 경보국의 지시는 현, 군, 촌을 통해서 각 지구까지 전달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지시를 받은 지역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사이타마시(市) 소메야 입니다.
현을 통해서 촌장에게 지시가 전해졌습니다.
『부정한 무리의 습격에 대비할 자경의 방책을 공시된 요지로 통첩한다!』
이 지시는 9월 3일 소메야의 지역 장의 집까지 도달했습니다.
농가의 다카하시 다카스케(72세) 씨입니다.
“설명을 드리자면, 이 분이 관동대지진 때에 소메야의 구장을 했던 조부 다카하시 키치사부로입니다. 당시 자경단을 조직해서 그들을 지도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조부인 다카하시 키치사부로 씨는 지시에 따라서 자경단을 만들었습니다. 그 활동을 나타내는 기록이 작년에 발견됐습니다.
“다이쇼 12년 제3구장님, 이것은 자경단에 대해서 센진노켄(조선인에 관한 건)이라고 쓰여 있으므로 조선인에 관한 사건이라고 생각됩니다. 자경단의 활동은 마을의 비용으로 처리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이쇼 12년 9월 3일부터 ‘야경’이라고 쓰여 있으니까... 야경을 한 사람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 비용이 들었다면 이것은 마을에서 나왔겠네요. 초, 백미, 비용, 석유, 돗자리 3매 및 덧문이라고 쓰여 있네요.”
다카하시 씨는 부친과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이 지구에 퍼진 유언비어를 들었습니다.
“이 우물의 위에 뚜껑을 덮으라고... 우물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게 하도록..... 독을 넣는다고 해서....... 이 우물은 옛날 그대로......... 이게 우물... 뚜껑을 하라고 했습니다.. 짚으로 덮고 알 수 없게..........”
당시 소메야에 조선인 주민은 없었습니다.
9월 3일 밤, 자경단이 경계를 하고 있을 때에 1명의 조선인이 이 마을로 헤매어 찾아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와서...여기까지 도망쳐 왔었지만... 여기 벼랑을 내려와서... 이 밑의 밭... 정확히.....현관...이 근방이네요. 이 근처의 밭이 고구마 재배지로... 당시 고구마를 재배하고 있었고, 그 고구마 줄기에 발이 걸려서 있을 때 마을사람들이 습격했다고…
‘가장 먼저 일격을 가한 것은 나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만 그것이 누군가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엔 모두 분별없었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연입니다만 우리 밭이었습니다. 논이 있고, 밭이 있고, 만들고 있는 것은... 입니다만... 답례를 했다고... 성실하니까.....”
이 소메야에서 일어난 사건은 사법성의 조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 시] 9월 4일 오전 2시 경
[장 소] 키타아다치군 가타야나기마을 소메야 지구내
[피해자] 강대흥
[죄 명] 살인
[범죄사항] 창, 일본도(刀)로 살해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였지 않았나 합니다. 말하자면 유언비어로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이야기는 원래는 없었던 것이었죠. 소메야 마을에는 없었는데.....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피해자이죠. 그리고 지시로 비밀문서가 와서 결속을 하고 자경단을 조직하고 스스로 지키라고 했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실행한 당시의 사람들은 항상 말이 나오지만, 처음에는 부정한 조선인을 많이 처리했다고 하는 공적을 경찰에서 포상을 받는다... 훈장을 받지 않을까 해서‘틀림없습니다. 제가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내무성의 지시가 전달된 사이타마 현에서는 9월 4일부터 6일 사이에 94명의 조선인이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4명, 30명, 38명 등 한 곳에서 많은 조선인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 눈에 띕니다.
확실히 정부가 내무성 경보국이라고 하는 지금의 경찰청 같은 관청이 조선인이 나쁜 짓을 하기 때문에 경계하라는 정보를 흘려서 그것이 살생 사건의 배경이 된 면이 확실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정부(일본)가 잘못한 면이 있지만 실은 그들 경보국도 소문에 휩싸인 것이 아닌가, 아니면 군대가 살생 사범이 많지만 군대 자체도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부대는 소문에 휩싸여 많은 시민과 같이 믿고 있었다는 것이 내무성뿐만이 아니라 군 내에서도 유언비어를 믿고 증폭시킨 사례도 있습니다.
치바현 후나바시 시에 있던 해군의 무선전신소 후나바시전신소입니다.
재해 후 사용할 수 없게 된 도쿄의 무선시설에 대신해서 후나바시의 송신소는 전국으로 정보를 발신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송신소의 소장이었던 해군의 오오모리 료조 대위가 재해 후의 조치를 기록한 보고서입니다.
9월 4일 오전 7시, 오오모리 소장에게 지역의 자경단이 찾아왔습니다. 거기서 어떤 소문을 듣게 됩니다.
『지금 조선인의 한 부대가 전신소를 습격한다.』
오오모리 소장은 전신소가 습격당한다고 듣고 무선을 통해서 전국으로 도움을 청합니다.
“SOS. 원병을 부탁한다! 후나바시, 조선인 300, 후나바시에 상륙, 긴급 다가옴”
잘못된 정보를 전국으로 타전했던 것입니다.
오오모리 소장은 송신소를 지키기 위하여 자경단에게도 협력을 부탁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증언 테이프가 남겨져 있습니다. 후나바시에 있던 해군의 무선탑 근처에 있던 마을의 경보단장으로 근무한 분의 청취(녹음)로 1981년에 얘기를 들었습니다.
“무선 해군단장이‘우라야스 교토쿠에 600명의 부정한 조선인이 오기 때문에 오늘밤 경계를 부탁한다.’라고 해서 총을 넘겨받고‘두 번 물어서 대답을 하지 않으면 쏴도 좋다.’라고 듣고 경비를 하고 있었는데 조선인이 보이자 경종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였기 때문에...‘조선인을 발견하면 죽여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굉장했어요.. 그리고 지금의 경마장 주차장 있는 곳에서 2명을 죽였습니다. 역시 젊은 조선인으로 철사로 묶어서 저격했습니다. 누가 쏘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쏜 후에 일본도(刀)로 목을 쳤습니다. 쓰러져 있는 것을..... 잘린 곳이 피부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능숙한 솜씨라고.....”
사법성의 조사서에 따르면 이 사건의 피해자는 성명 미상 16명.
녹취록의 증언을 기록해 온 히라카타 치에코 씨는 살해당한 조선인에 대한 내용을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호쿠소오철도, 지금의 토부노다선을 만들고 있던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습니다만, 그 토부노다선의 노동자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이 살해 사건은 그 후 재판이 이루어집니다.
피고는 오모리 소장의 명령에 의해 살해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모리 소장은 다음과 같이 반론했습니다.
“절대 죽여도 좋다고 말했을 리가 없으며, 습격해 오는 조선인은 죽여도 좋다고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오모리 소장은 살인교사라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해서 책임을 묻는 일은 없었습니다.
내무성이 조선인에 대한 경계를 전국으로 발신한 9월 3일, 경시청은 유언비어의 잘못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날 밤의 일을, 당시 경시청의 간부였던 쇼리키 마츠타로우 씨는 회상하고 있습니다.
“조선인이 그 후, 좀처럼 도쿄로 내습해오지 않아서 이상하게 생각하던 중에, 차츰 밤 10시쯤에 이르러서 그 내습은 허보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9월 3일 오후 6시, 경찰청은 시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공고를 냈습니다.
『일부 부정한 조선인 망동은 있어도 대부분은 유순해서 아무런 흉한 행동을 하는 사람 없다.』
대부분의 조선인은 유순해서 선량하므로 박해를 하지 않도록 알렸던 것입니다. 정부는 조선인을 보호할 방침을 내놓았습니다. 치바현 나라시노의 육군 수용소 등에 조선인을 모아 보호했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유언비어를 부정한 후에도 조선인의 살해는 계속 되었습니다.
사법성의 조사서에 따르면, 9월 2일 도쿄 부근에서 발생한 살생 사건은 부근 현으로 퍼져서 9월 6일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현재의 군마현 후지오카시와 도치기현 나스시오바라시에서도 일어나 살해당한 조선인은 231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조사서에는 유학이나 돈벌이로 온 중국인의 살생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의 사회주의자가 군대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도 보고되어 있습니다.
조선인의 살해가 진정된 후, 정부(일본)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려고 했을까? 살해당한 조선인의 유해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당시 정부(일본)의 방침이 조선총독부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골은 조선인을 판단할 수 없도록 처치할 것. 유골이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알 수 없도록 한다. 조선인으로 피해 입은 사람은 신속하게 그 유골을 확인 못할 정도로 처리 할 것. 피해를 입은 조선인의 유골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게 할 것.』
당시 후나바시 경찰서의 순사였던 와타나베 요시오 씨. 유해 처리에 관여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당시 후나바시 경찰서의 순사 와타나베 요시오(1978년 수록)]
“그대로 두면 증거를 남기고, 나중에 국가와 여러 가지 문제, 외국과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화장 해 버려’라고 했어요.. 전부...
그래서 파내서... 10일인지 20일 정도 지났는데 9월이기 때문에... 아직 더울 때 그것을 파내서... 남에게 부탁할 수도 없이 순사 2, 3명, 소방서 2, 3명과 함께 주위를 파고 거기에 장작과 기름을 갖고 가서 불을 붙였습니다. 어째든지 상상도 할 수 없이 냄새가 났어요.. 그게 경찰서까지 냄새가 나서 있을 수가 없었어요. 후나바시의 마을 전체에 냄새가 났었습니다. 그 다음날,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서 여기저기 뿌릴 수밖에 방법이 없었죠. 밭이 있었는데 뼈를 가져가서 전부 뿌렸지요. 논 안에 넓게.... 한 곳에 둘 수는 없었으니까... 모두가 뿌렸어요...비료와 같이...”
[중앙공론] 1923년 11월호
피해의 전후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도쿄제국대학 요시노 사쿠죠오 교수는 조선인 유학생과 함께 그 해 가을에 실태 조사를 실시하여 잡지에 호소했습니다.
[도쿄제국대학 요시노 사쿠죠오 교수]
“살해당한 자의 다수는 노동자 등이기 때문에 이름도 모르고 유족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조선인 학살에 대한 내국인의 이를테면 국민적 회한을 나타내기 위하여 무엇인가 구체적인 방책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재해가 있었던 1923년의 12월, 제국의회에서 조선인 살생사건이 거론되었습니다. 중의원의원 나가이 류타로오는 정부의 책임을 물었습니다.
“내각에서 발표한 유언비어 때문에 다수의 조선인이 불행하게 희생이 되었다면 거기에 애도의 뜻을 표하고, 그 희생자의 유족에 대해서 그것을 당연히 위안해야만 할 최선의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것은 즉, 정부의 도덕적 책임은 아닌가?”
당시의 야마모토 콘베이 수상은 대답합니다.
“정부는 일어난 사항에 대해서 현재 조사 진행 중입니다.”
그 후 정부의 조사 결과가 발표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조선인의 살해를 사법성(현 법무성)은 어떻게 심판한 것인가?
사건 후 362명이 기소되었습니다. 현재의 아다치구에서 일어난 사건의 기록이 근래에 발견되었습니다. 왜 살인을 범했는지 11명의 상세한 진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료를 발견하고 분석한 것은 타이쇼(大正) 시대의 민중사를 연구해 온 후지노 유코 씨입니다.
[후지노 유코(민중사 연구)]
“타이쇼(大正) 기록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해자 자신의 진술을 읽을 수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살해의 동기라든지 경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살해에 가담한 23살 남자의 진술입니다.
『살의를 품은 계기는 둑에서 살해된 조선인의 시체를 본 것입니다. 그 때, 조선인이 나쁜 짓을 해서 살해당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과연, 조선인이 방화를 한다는 소문이 사실과 같이 생각되어 본인도 해치워 보고 싶었습니다.』
남자는 수십 명의 사람들과 함께 조선인 노동자의 연립주택을 습격하여 7명을 살해했습니다. 살해가 끝나면 주위에 나와 있던 사람들로부터 만세라는 소리가 나왔다고 말합니다.
후지노 씨가 주목한 것은 피고의 직업입니다.
하천 공사를 하는 토목인부, 우물 파기, 그리고 날품팔이(일용직) 등 수입이 불안정한 일을 하고 있던 사람이 눈에 띈다고 합니다. 불안정한 직업... 저임금의 직업에는 당시 조선에서 유입된 노동자가 많았습니다. 물론 일본인 노동자보다도 싼 임금으로 조선인 노동자는 고용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일본인 노동자로서는 새롭게 유입된 조선인 노동자는 자신들의 생활에 방해가 되는 존재가 되어 평소 존재하던 차별 의식과 경제적인 대항 의식이 합해져서 사람들 사이에서 학살의 동기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일상적인 재해가 일어났을 때 멸시와 보복에 대한 공포의 양면이 분출되어, 그래서 사람들이 학살을 하지 않았을까......
이 아다치구(區)에서 일어난 사건은 당시의 신문에 의하면 징역 2년부터 3년의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 대부분이 집행유예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내무성의 지시를 받아서 자경단을 조직하고, 조선인 1명을 살해한 사이타마시(市) 소메야. 이 지역의 사람들은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소메야에서는 5명이 기소되었습니다.
판결은 징역 1년 6월부터 2년, 집행유예였기 때문에 수감되지 않았습니다.
[타카하시 타카스케 씨]
“마을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 상담을 했는데, 우발적인 행동을 한 사람을 선별해서...수고스럽지만 하나하나.. 구장인 우리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합니다만..그 후이지만 탄원... 탄원 운동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소문 때문에 착각하여 했으니까... 나쁜 사람 아니니까 죄를 가볍게 해서 내보내 달라고... 탄원 운동을 마을사람 모두의 서명을 모아서 경찰에 진정 했습니다. 전면적으로 본인들이 나빠서 살인을 한 것은 나쁜 짓이지만, 그것보다도 정부라든지 공무원의 말을 들었다고 하는 것은 마을의 탄원 운동은 나쁜 일 한 것이 아니고 좋은 일이죠. 그가 했습니다만... 잘못된 소문에 의해서 움직였다고 하는 것이기에...”
소메야에서는 재해가 일어난 후, 드디어 마을사람들이 사망한 조선인의 묘지를 절 한 쪽에 만들었습니다. 살해를 한 지역의 주민이 묘지를 만든 사례는 손꼽을 수 있을 만큼 있습니다.
[타카하시 타카스케 씨]
“이 묘지 자체는『조선인 강대흥 묘』라고 씌어져 있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왔습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부터 조선인의 묘라고 얘기를 듣고, 역시 하나의 사건으로서 그러한 일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있었죠.”
묘지에는『시주 : 소메야 일반』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지역 일동으로 묘지를 만들었습니다. 관동지역 대지진 당시 사망. 조선 사람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카하시 씨는 사망이라고 기술한 것에 위화감을 갖고 있습니다.
[타카하시 타카스케 씨]
“그게.... 사망이라고 한 것이라서... 진실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고 있네요. 역시 죽였다고 하는 것 자체는 반대였기 때문에... 핵심이 있지 않을까요.. 정확히 말하면... 그러니까 학살이라고는 쓸 수 없겠지만 무언가 표현의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지만요... 사망이라고 되어 있네요. 사망이라면 병으로 죽어도 사망이고... 애매하게 중언이 되었네요.”
관동대지진!
그것은 장래의 대규모 재해에 대비하는 우리들에게 어떤 교훈을 남겨놓은 것일까?
중앙방재회의에서는 2년에 걸쳐서 이 문제를 다루어 왔습니다. 소방과 의료 등 여러 관점에서 대재해를 분석하고 조선인 살생 사건에 대해서도 국가 조직으로서 처음으로 검증을 했습니다.
『과거의 반성과 민족 차별의 해소 노력이 필요한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 위에 유언비어의 발생, 그리고 자연 재해와 테러의 혼동이 현재에도 생길 수 있는 사태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도쿄대학 스즈키 준 교수]
“역시, 역사는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절대로 똑같은 일을 반복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절대로 반복해서는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반성하지 않았던 것이 되고, 보통은 상식적인 틀에서 상식적인 판단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뭔가의 계기로 무너져버린다고나 할까... 그렇게 되었을 때, 그렇게 익숙하지 않은 일본 국내의 소수자에 대해서 우리들이 무력하게 만드는 일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경계를 계속하는 것이야말로 재해 때의 살생사건으로 희생된 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이타마시(市) 소메야
부친으로부터 조선인 살해 사실을 전해들은 타카하시 타카스케 씨입니다.
오봉(추석)의 날, 이전에 부친과 함께 참배했던 묘지에 타카하시 씨는 손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자~! 참배하면서.....”
“여기는 조선인 강대흥 씨, 당시 24살이었던 분의 묘지인데, 지금부터 93년 전에 관동대지진이 있어서.....그 때 조선 사람이 우물에 독을 넣는다든지 불을 지른다든지 하는 유언비어가 떠돌아서 자경단을 조직해서 경계를 섰고... 거기에 고구마 밭이 있었는데 거기에 넘어져서 마을사람들이 칼, 괭이 등으로 모두 달려들어 죽게 된 불행한 사건이 있었어.”
“누가 죽었습니까?”
“조선의 청년!”
근처에 사는 타카하시 씨의 8명의 손자들. 이날, 처음으로 사건에 대해서 상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타카하시 타카스케 씨]
“역시 아이들에게 전달하지 않으면 세대가 바뀌면 모르게 되기 때문에 확실히 소메야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운 수치라고 생각됩니다만, 우리들은 이러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관동대지진으로부터 93년!
조선인을 습격한 비극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는 사이, 사실을 전달하고자 하는 시도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016년 9월 3일 日本 NHK 방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