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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법온족론 제2권
3. 증정품(證淨品) ①
어느 때 박가범께서 실라벌(室羅筏) 서다림(逝多林)의 급고독원(給孤獨園)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필추들에게 말씀하셨다.
[4증정]
“만일 모든 유정으로서 너희 언교(言敎)에 대하여 믿는 마음으로 듣고 받아 받들어 행하는 이가 있으면, 너희는 마땅히 가엾이 여겨 방편을 권하고 격려하며 벌여 세워 4증정(證淨) 속에 머물게 해야 한다.
어떤 것이 4증정인가?
불증정(不證淨)과, 법증정(法證淨)과, 승증정(僧證淨)과, 성인이 사랑하는 계율[聖所愛戒]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냐?
모든 지계(地界)ㆍ수계(水界)ㆍ화계(火界)ㆍ풍계(風界)의 네 가지 요소[四大種]는 모습이 바뀌거나 변화할 수 있지만,
만일 이 4증정을 성취한 모든 성스러운 제자가 있다면 반드시 바뀌거나 변화할 수가 없나니,
이 견문이 많은[多聞] 모든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은 4증정을 성취한 까닭에 지옥이나 방생(傍生)이나 아귀 세계[鬼界]에 떨어진다는 일은 있을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언교에 대하여 믿는 마음으로 듣고 받들어 행하는 이가 있으면 너희는 마땅히 가엾이 여겨 방편으로 권유하고 격려하며 벌여 세워 4증정 가운데에 머물게 해야 하느니라.”
1) 불증정(佛證淨)
어떤 것이 불증정(佛證淨)인가?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이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은 모양[相]으로써 모든 부처님을 따라 염[隨念]하나니,
‘이 세존은 바로 여래(如來)ㆍ아라한(阿羅漢)ㆍ정등각(正等覺)ㆍ명행원만(明行圓滿)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장부(無上丈夫)ㆍ조어사(調御士)ㆍ천인사(天人師)ㆍ불(佛)ㆍ박가범(薄伽梵)이시다’라고 한다”고 하신 것과 같다.
말한 바 ‘이[此]’이라 함은,
바로 이 욕계(欲界)와 혹은 이 세계(世界)와 이 섬부주(贍部洲)를 말한다.
또 ‘이’라는 말은 곧 이 신지(身持)ㆍ등지(等持)ㆍ구(軀)ㆍ등구(等軀)ㆍ취(聚)ㆍ득자체(得自體)를 말한다.
또 ‘이’라는 말은 이곳에서 나신 부처님과, 그 제자와, 모든 신선[仙]과, 모니(牟尼)와, 총명하고 뛰어난 지성을 지닌 모든 이[聰督者]와, 잘 조복한 이[善調伏者]와, 잘 조순하는 이[善調順者]이다.
또 ‘이’라는 말은 곧 ‘이 가르쳐 주고[敎授], 가르쳐 경계하고[敎誡], 잘 말씀한 법[善說法] 가운데서’라는 뜻이니, 이 때문에 ‘이[此]’라고 한다.
‘성스러운 제자[聖弟子]’의 성스러운[聖]이란 바로 불(佛)ㆍ법(法)ㆍ승(僧)이다.
불ㆍ법ㆍ승에 귀의하는 이이기 때문에 ‘성스러운 제자’라 한다.
‘이와 같은 모양[相]으로써 부처님을 따라 염[隨念]한다’고 함은,
곧 이 모양[相]과 이 문(門)과 이 이치[理]로써 모든 부처님에 대하여 염(念)을 일으키고 따라 염하며 오로지 염하고 기억하며,
잊지 않고 잃지 않으며,
빠뜨리지 않고 새지 않으며,
잃지 않는 법의 성품[不失法性]이요 마음에 분명히 기억하는 성품[心明記性]이니,
이 때문에 ‘이와 같은 모양으로써 모든 부처님을 따라 염한다’고 한다.
말한바 ‘이를테면[謂]’이라 함은,
이와 같은 모양[相]이요 상태[狀]이며 이와 같은 종류[種]요 무리[類]이니, 이 때문에 ‘이를테면’이라고 한다.
‘이[此]’라고 말함은,
곧 이와 같은 계율[戒]과, 이와 같은 법(法)과 ,이와 같은 지혜[慧]와, 이와 같은 신통[通]과, 이와 같은 해탈(解脫)과, 이와 같은 많이 머무름[多住]을 지닌 이이므로 이 때문에 ‘이’라고 한다.
‘세존(世尊)’이란 말은 뒤에서 해석하는 것과 같다.
[여래]
‘여래(如來)’라는 말은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보살이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한 밤으로부터 부처님이 무여열반(無餘涅槃)의 경계에 든 밤까지의 중간에 있어서 말한 모든 것과 널리 펴고 부연(敷演)한 모든 것이 다 여(如)이어서,
허망함이 없고 변하거나 달라짐이 없으며, 진실하고 이치와 같으며 뒤바뀜이 없어서, 모두가 이와 같이 여실(如實)하고 바른 지혜로써 본 뒤에야 설하는 것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 때문에 ‘여래’라고 한다.
[아라한]
‘아라한(阿羅漢)’이라 함은, 대략 두 가지 아라한의 성품이 있나니,
첫째는 유위(有爲)요, 둘째는 무위(無爲)이다.
어떤 것이 유위 아라한의 성품인가?
그 과(果)의 득(得)과, 그 득의 득[得得]과, 무학(無學)의 근(根)ㆍ역(力)과 무학의 시라(尸羅)와, 무학의 선근(善根)과, 10무학법(無學法)과, 그 종류인 모든 무학의 법이니,
이것을 유위 아라한의 성품이라 말한다.
어떤 것이 무위 아라한의 성품인가?
탐냄[貪]ㆍ성냄[瞋]ㆍ어리석음[癡] 등의 온갖 번뇌를 모두 다 영원히 끊었으며,
온갖 세계[趣]를 초월하고 온갖 길[道]을 끊었으며,
세 가지 불[三火]이 영원히 고요하고 목마름이[焦渴] 영원히 쉬었으며,
교만과 방일[憍逸]을 영원히 여의고 굴택(窟宅)을 영원히 깨뜨렸으며,
4폭류(瀑流)를 건너서 더할 것이 없는 최후의 경지[無上究竟]요, 위없는 고요함[無上寂靜]이며, 위없는 애욕이 다하고 여의고 사라진 열반이니,
이것을 무위 아라한의 성품이라 한다.
여래는 이와 같이 말한 유위와 무위 아라한의 성품을 완전히 갖추고 원만하게 성취한 까닭에 ‘아라한’이라 한다.
또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과 그 밖의 번뇌를 모두 다 끊어야 할 것은 여래가 영원히 끊고 두루 아시는 것이,
마치 다라나무[多羅樹]의 뿌리와 꼭대기를 길이 다 끊어버려서 다시는 남긴 것이 없는 것처럼,
장차 오는 세상에 영원히 나지 않는 법[永不生法]을 얻으신 것이니,
이 때문에 ‘아라한’이라 한다.
또 몸과 말과 뜻의 세 가지 악행(惡行)으로서 영원히 끊을 것은 여래가 영원히 끊었고 두루 아시며 나아가 장차 오는 세상에 영원히 나지 않는 법을 얻으신 것이니,
이 때문에 ‘아라한’이라 한다.
또 과거의 부처님께서 이미 나쁜 법[惡不善法]을 멀리 여의고 모든 잡염(雜染)과 후유(後有)와 치연(熾然)과 괴로운 이숙과(異熟果)를 장차 오는 세상에서 영원히 나지 않는 법을 얻으신 것처럼, 지금의 부처님도 역시 그러하나니, 이 때문에 ‘아라한’이라 한다.
또 부처님ㆍ세존은 가장 뛰어나고 길상(吉祥)한 공덕을 성취하셔서 마땅히 가장 훌륭한 의복과 음식과 방석과 침구며 의약 등 살림에 필요한 갖가지 공양을 받아야 하시기 때문에 ‘아라한’이라 한다.
아래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세간에서 마땅히 수용해야 할
갖가지 으뜸가고 훌륭한 물건을
여래는 마땅히 모두 받아야 하니
이 때문에 아라한이라 하신다.
[정등각(正等覺)]
‘정등각(正等覺)’이라 함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존재하는 모든 법의 온갖 바른 성품[正性]을 모든 지견(知見)으로 환히 알아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았다”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 때문에 ‘정등각’이라 한다.
또 평등한 법[等法]이란, 바로 4념주(念住)ㆍ4정승(正勝)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등각지(等覺支)ㆍ8성도지(聖道支)이니, 여래는 온갖 지견으로 분명히 아시면서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으셨다.
이 때문에 ‘정등각’이라 한다.
또 온갖 괴로움[苦]ㆍ괴로움의 원인[集]ㆍ괴로움의 소멸[滅]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과 능히 현관(現觀)하는 도(道)와 예류과(豫流果)ㆍ일래과(一來果)ㆍ불환과(不還果)ㆍ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는 도와 신경지작증통(神境智作證通)ㆍ천이지작증통(天耳智作證通)ㆍ타심지작증통(他心智作證通)ㆍ숙주수념지작증통(宿住隨念智作證通)ㆍ사생지작증통(死生智作證通)ㆍ누진지작증통(漏盡智作證通)을 증득하는 도와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교(憍)의 때[垢]를 다하는 도를 여래는 모두 다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으셨고 지극한 정성으로 굳건하게 머물러 은근하고 정중하게 뜻을 지으시면서 원인[因]과 문(門)과 이치[理]와 모양[相]으로써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으셨으니,
이 때문에 ‘정등각’이라 한다.
[명행원만(明行圓滿)]
‘명행원만(明行圓滿)’이라 함에서 어떤 것이 ‘명(明)’인가?
부처님께서 지니고 계신 무학(無學)으로서의 3명(明)이니,
첫째는 무학의 숙주수념지작증명(宿住隨念智作證明)이요,
둘째는 무학의 사생지작증명(死生智作證明)이며,
셋째는 무학의 누진지작증명(漏盡智作證明)이다.
이것을 ‘명’이라 한다.
어떤 것이 ‘행(行)’인가?
부처님께서 지니고 계신 무학의 몸의 율의[身律儀]와 말의 율의[語律儀]와 생활의 청정함[命淸淨]이니, 이것을 ‘행’이라 한다.
또 부처님의 으뜸가고 훌륭하신 모든 위의(威儀)로서 가고 오시는[往來] 일과 돌아보시는[顧視] 것과 구부리고 펴시는[屈伸] 것과 굽어보고 쳐다보시는[俯仰] 것과 승가지(僧伽胝)를 입으시는 것과 옷과 발우를 가지시는 등이 모두 다 엄숙하고 바르시니, 이것을 ‘행’이라 한다.
이 ‘행’과 앞에서 말한 ‘명’을 한데 묶어 ‘명행’이라 하며,
여래는 이와 같은 명과 행을 두루 갖추고 원만하게 성취하셨으며 한결같이 선명하게 밝고 한결같이 미묘(微妙)하며 한결같이 허물이 없으시니,
이 때문에 ‘명행이 원만하다’고 한다.
[선서(善逝)]
‘선서(善逝)’라 함은,
부처님은 지극히 즐겁고 안온하고 힘듦이 없고 고생이 없이 가시는[往趣] 묘한 법을 성취하셨으니,
이 때문에 ‘선서’라 한다.
또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것과 그 밖의 다른 번뇌로 생기는 갖가지 가시기 어려운 법[難往趣法]을 여래는 그에 대하여 영원히 끊고 두루 아시는 것이,
마치 다라나무의 뿌리와 꼭대기를 온통 다 끊어서 다시는 남아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장차 오는 세상에 영원히 나지 않는 법을 얻으셨으니,
이 때문에 ‘선서’라 한다.
또 과거의 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 모두 여실(如實)하고 허망이 없는[無虛妄] 도(道)를 타고 세간을 초월하셨고 뛰어난 공덕으로 한번 이르시고 영원히 이르시어 다시는 물러나거나 되돌아옴이 없으신 것처럼 지금의 부처님도 그러하나니,
이 때문에 ‘선서’라 한다.
[세간해(世間解)]
‘세간해(世間解)’라 함은,
5취온(取蘊)을 세간(世間)이라 하는데,
여래는 그것을 지견(知見)으로 분명히 아시면서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으셨으니,
이 때문에 ‘세간해’라 한다.
또 5취(趣)를 말하여 세간이라 하는데 여래는 그것을 지견으로 분명히 아시어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으셨으니,
이 때문에 ‘세간해’라 한다.
또 6처(處)를 말하여 세간이라 하는데 여래는 그것을 지견으로 분명히 아시어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으셨으니,
이 때문에 ‘세간해’라 한다.
또 3계(界)에 속한 모든 처(處)를 말하여 세간이라 하는데 그로부터 생기고 그로부터 일어나고 그로부터 나오는 것과 그로 인하여 생기고 그로 인하여 일어나고 그로 인하여 나오는 것을 여래는 지견으로 분명히 아시어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으셨으니,
이 때문에 ‘세간해’라 한다.
[무상장부(無上丈夫)]
‘무상장부(無上丈夫)’라 함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모든 유정으로서 발 없는 것ㆍ두 발 달린 것ㆍ네 발 달린 것ㆍ여러 발 달린 것과 형상이 있는 것ㆍ형상이 없는 것ㆍ생각이 있는 것ㆍ생각이 없는 것과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非想非非想]에서 여래는 맨 첫째라고 일컫나니, 가장 뛰어나고 가장 높고 맨 위이고 보다 더 높은 이가 없는 이이다.
이 때문에 ‘무상장부’라고 한다.
[조어사(調御士)]
‘조어사(調御士)’라 함은,
부처님ㆍ세존은 간략하게 세 가지의 교묘히 다루는 일[巧調御事]로써 온갖 교화할 유정을 다루시는 것이니,
첫째는 어떤 무리에게는 한결같이 부드럽게[柔軟] 대하시고,
둘째는 어떤 무리에게는 한결같이 거칠게[麤獷] 대하시며,
셋째는 어떤 무리에게는 부드럽게 또는 거칠게 대하신다.
어떻게 여래는 그 어떤 무리에게는 한결같이 부드럽게 대하시는가?
그들을 위하여 이 몸의 묘행[身妙行]과 이 몸의 묘행으로 느끼게 되는 이숙(異熟)과,
이 말의 묘행[語妙行]과 이 말의 묘행으로 느끼게 되는 이숙과,
이 뜻의 묘행[意妙行]과 이 뜻의 묘행으로 느끼게 되는 이숙과,
이 하늘[天]과 이 사람[人]과 이 좋은 세계[善趣]와 이 즐거움이 있는 세계[樂世]와 이 열반(涅槃)에 대하여 설하시니,
이것을 바로 ‘여래는 그 어떤 무리에게는 한결같이 부드럽게 대하신다’고 한다.
어떻게 여래는 그 어떤 무리에게는 한결같이 거칠게 대하시는가?
그들을 위하여 이 몸의 악행[身惡行]과 이 몸의 악행으로 느끼게 되는 이숙(異熟)과,
이 말의 악행[語惡行]과 이 말의 악행으로 느끼게 되는 이숙과,
이 뜻의 악행[意惡行]과 이 뜻의 악행으로 느끼게 되는 이숙과,
이 지옥(地獄)과 방생(傍生)과 아귀 세계[鬼界]와 험난(險難)한 것과 나쁜 세계[惡趣]와 이 떨어지는[隨落] 것에 대하여 설하시니,
이것을 ‘여래는 그 어떤 무리에게는 한결같이 거칠게 대하신다’고 한다.
어떻게 그 어떤 무리에게는 부드럽게 또는 거칠게 대하시는가?
때로는 그들을 위하여 몸의 묘행과 말의 묘행과 뜻의 묘행을 설하기도 하고,
혹은 때로는 그들을 위하여 몸의 묘행ㆍ말의 묘행ㆍ뜻의 묘행으로 느끼게 되는 이숙을 설하기도 하며,
혹은 때로는 그들을 위하여 몸의 악행과 말의 악행과 뜻의 악행을 설하기도 하고,
혹은 때로는 그들을 위하여 몸의 악행ㆍ말의 악행ㆍ뜻의 악행으로 느끼게 되는 이숙을 설하기도 하며,
혹은 때로는 그들을 위하여 하늘ㆍ사람ㆍ좋은 세계ㆍ즐거움이 있는 세계 및 열반을 설하기도 하고,
혹은 때로는 그들을 위하여 지옥ㆍ방생ㆍ아귀 세계ㆍ험난한 것ㆍ악한 세계와 떨어지는 것에 대하여 설하기도 하시니,
이것을 ‘여래는 그 어떤 무리에게는 부드럽게 또는 거칠게 대하신다’고 한다.
여래는 그들에 대하여 세 가지 교묘히 다루는 일로써,
이와 같이 조복하고 이와 같이 그쳐 쉬게 하며 이와 같이 고요하게 하고,
이와 같이 그들로 하여금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 등 온갖 번뇌를 남김없이 영원히 버리게 하고,
이와 같이 그들로 하여금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 등 온갖 번뇌를 남김없이 영원히 다하게 하며, 영원히 조복하게 하고 영원히 그쳐 쉬게 하며, 영원히 고요하게 하여,
으뜸가는 조어(調御)를 얻고 뛰어난 조어를 얻고 뛰어난 청량(淸凉)을 얻으며,
굽고[曲] 더러운[穢] 일을 제거하고 만(慢)ㆍ부(覆)와 첨(諂)ㆍ때[垢]와 흐림[濁]을 없애셨으니,
이 때문에 여래를 ‘조어사’라 한다.
[천인사(天人師)]
‘천인사(天人師)’라 함은,
세존께서 아난타(阿難陀)에게 말씀하시되,
“나는 필추ㆍ필추니ㆍ오파색가(鄔波索迦)ㆍ오파사가(鄔波斯迦)의 사중(四衆)을 위한 스승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늘ㆍ악마ㆍ범ㆍ사문 및 바라문 등의 모든 하늘과 사람들을 위한 스승이요 뛰어난 스승이요 따르는[隨] 스승이며,
사범[範]이요 뛰어난 사범이요 따르는 사범이며, 거느리는 것[將]이요 길잡이[導]이다”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 때문에 여래를 ‘천인사’라 한다.
[부처님[佛], 세존]
‘부처님[佛]’이라고 말함은,
여래의 무학(無學)으로서의 지견(知見)ㆍ명감(明鑒)ㆍ각(覺)ㆍ혜(慧)ㆍ조(照)ㆍ현관(現觀) 등에 대하여 이미 잘 갖추고 일으키시고, 얻고 성취하셨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한다.
마치 어느 한 큰 바라문이 부처님께로 나아가서 묘한 게송으로써 부처님을 찬탄하며 여쭌 것과 같다.
가장 높은 깨달음을 얻은 이[覺者]라 하는
세간의 길잡이[道師]께 머리 조아립니다.
어찌하여 부모를 반연하면서
높은 이[尊]이라 일컫고 불타(佛陀)라 하십니까.
세존은 그 바라문을 가엾이 여기셔서 역시 게송으로써 그에게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나는 과거와 미래의 부처님과 같이
각자(覺者)의 모양을 성취하였나니
그러므로 나를 불타라 하느니라.
바라문이여, 알아야 한다.
나는 삼세(三世)의 행(行)이 모두
생멸(生滅) 있는 법이라고 관찰하나니
그러므로 나를 불타라 하느니라.
바라문이여, 알아야 한다.
나는 알아야[知] 할 것과 끊어야[斷] 할 것에 대하여
증득하고 닦을 일을 이미 갖추었나니
그러므로 나를 불타라 하느니라.
바라문이여, 알아야 한다.
나는 온갖 경계에 대하여
모든 지견(知見)을 갖추었나니
그러므로 나를 불타라 하느니라.
바라문이여, 알아야 한다.
나는 한량없는 겁(劫) 동안
모든 순수하고 청정한 행을 닦아서
한량없이 죽고 또 나는 일을 겪다가
이제야 맨 나중의 몸[最後身]이 되어서
티끌[塵]과 때[垢]와 독화살[毒箭]을 여의고
위없는 깨달음을 증득하였나니
그러므로 나를 불타라 하느니라.
[박가범(薄伽梵)]
‘박가범(薄伽梵)’이라 함은,
착한 법[善法]이 있는 이를 박가범이라 하며 최상의 착한 모든 법을 성취한 까닭이다.
혹은 착한 법을 닦은 이를 박가범이라 하나니, 이미 최상의 착한 모든 법을 닦았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ㆍ세존은 몸의 계율[戒]과 마음의 지혜[慧]를 원만하게 닦아 익혔고 대비(大悲)를 한량없이 성취하였으며 한량없는 법을 이루었으므로 ‘박가범’이라 한다.
또 부처님ㆍ세존은 큰 위덕을 갖추어 능히 가고 이르고 능히 무너뜨리고 이룩함을 자유로이 굴릴 수 있으므로 ‘박가범’이라 한다.
또 부처님ㆍ세존은 온갖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나쁜 법을 영원히 깨뜨렸고 잡염(雜染)ㆍ후유(後有)ㆍ치연(熾然)과 괴로움의 이숙과(異熟果)를 영원히 파괴하였으며,
장차 오는 세상의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을 영원히 헐어버렸으므로 ‘박가범’이라 한다.
아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의
나쁜 법 등을 영원히 깨뜨리고
뛰어난 무루(無漏)의 법을 갖추었으니
그 때문에 이름하여 박가범이라 한다.
또 부처님ㆍ세존은 아직 듣지 못한 법을 스스로 통달하여 최상의 깨달음[最上覺]을 얻으셨고 현법지(現法智)와 무장애지(無障礙智)를 이루셨으며, 장차 오는 세상을 잘 아시고 범행(梵行)의 과(果)를 닦으셨으며, 모든 제자들을 위하여 분별하고 해설하시며 큰 법회[大法會]를 여시어 널리 유정에게 베푸시므로 ‘박가범’이라고 한다.
아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여래는 법회를 여셔서
널리 의지할 곳 없는[無依] 이들을 가엾이 여기나니
이와 같으신 천인사(天人師)이시고
유(有)의 바다를 건넌 이께 머리 조아립니다.
또 부처님ㆍ세존은 모든 제자들을 위하여 때와 근기에 따라 알맞게 설법하여 모두가 기뻐하고 공경하며, 믿어 받게 하고 가르치신 대로 수행하게 하며, 명칭(名稱)이 널리 들리어 모든 방역(方域)에 두루 퍼져서 찬탄하고 예배하지 않는 이가 없으므로 ‘박가범’이라 한다.
만일 성스러운 제자들이 이와 같은 모양으로써 모든 부처님을 따라 염할[隨念] 적의 소견[見]을 근본으로 삼아 증득하는 지혜[證智]와, 상응하는 모든 믿음[信]과, 믿는 성품[信性]과, 현전에 믿는 성품[現前信性]과, 따르고 인가(印可)하여 애모(愛慕)하고 애모하는 성품[愛慕性]과, 마음이 맑고[心澄] 마음이 청정한[心淨] 것을 바로 ‘불증정’이라 한다.
만일 이것에 대하여 권하고 격려하며 벌여 세우면 이것을 바로 ‘방편으로 권하고 격려하며 벌여 세워 불증정에 머무르게 한다’고 하는 줄 알 것이다.
2) 법증정(法證淨)
어떤 것이 법증정(法證淨)인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이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은 모양으로써 바른 법[正法]을 따라 염하나니, 이를테면,
‘부처님의 바른 법은 선설(善說)이요 현견(現見)이며,
무열(無熱)이요 응시(應時)이며,
인도(引導)요 근관(近觀)이어서,
지혜로운 이가 안으로 증득한다[智者內證]’고 한다”고 하신 것과 같다.
‘이[此]’라고 말한 것은 곧 이 욕계(欲界)요 혹은 이 세계(世界)이며 이 섬부주(贍部洲)이다.
또 ‘이’라는 것은 곧 이 신지(身持)ㆍ등지(等持)ㆍ구(軀)ㆍ등구(等軀)ㆍ취(聚)ㆍ득자체(得自體)를 말한다.
또 ‘이’라는 것은 이곳에서 나신 부처님과 그 제자와 모든 신선[仙]과 모니(牟尼)와 모든 총명하고 뛰어난 지혜가 있는 이[聰叡者]와 잘 조복한 이[善調伏者]와 잘 조순한 이[善調順者] 등을 말한다.
또 ‘이’라 함은,
곧 ‘이 가르쳐 주고[敎授], 가르쳐 경계하고[敎誡], 잘 말씀한 법[善說法] 가운데서’라는 말이기 때문에 ‘이[此]’라고 한다.
‘성스러운 제자[聖弟子]’라 함의 성스러움이란 불ㆍ법ㆍ승이다. 불ㆍ법ㆍ승에 귀의하는 까닭에 ‘성스러운 제자’라 한다.
‘이와 같은 모양[相]으로써 법을 따라 염한다’고 함은,
이 모양[相]과 이 문(門)과 이 이치[理]로써 바른 법에 대하여 염(念)을 일으키고 따라 염하며, 오로지 염하고 기억하며,
잊지 않고 잃지 않으며, 빠뜨리지 않고 새지 않으며,
잃지 않는 법의 성품이요 마음으로 분명히 기억하는 성품이니,
이 때문에 ‘이와 같은 모양으로써 바른 법을 따라 염한다’고 한다.
‘선설(善說)’이라 함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괴로움[苦]은 진실로 그것이 괴로움이요,
괴로움의 원인[集]은 진실로 그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며,
괴로움의 소멸[滅]은 진실로 그것이 괴로움의 소멸이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은 진실로 그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니,
그러므로 ‘선설’이라 한다.
만일 부처님ㆍ세존께서 괴로움이 아닌 것을 괴로움이라 하고,
괴로움의 원인이 아닌 것을 괴로움의 원인이라 하며,
괴로움의 소멸이 아닌 것을 괴로움의 소멸이라 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아닌 것을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 하셨다면,
그것은 잘 말씀한[善說] 것이 아니지만,
부처님ㆍ세존께서는 괴로움을 말씀하여 괴로움이라 하고,
괴로움의 원인을 말씀하여 괴로움의 원인이라 하며,
괴로움의 소멸을 말씀하여 괴로움의 소멸이라 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말씀하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부처님의 바른 법을 ‘선설’이라 한다.
‘현견(現見)’이라 함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괴로움ㆍ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현관[現觀]의 도(道)를 바르게 닦아 익힐 때에,
현재의 법 가운데서 곧바로 괴로움ㆍ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현관에 들기 때문에 ‘현견’이라고 한다.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신 괴로움ㆍ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현관의 도를 바르게 닦아 익힐 때에,
현재의 법 가운데서 곧바로 괴로움ㆍ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현관에 드는 것이 아니라면 세존의 바른 법은 현견이 아니지만,
세존께서 말씀하신 괴로움ㆍ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현관의 도를 바르게 닦아 익힐 적에,
현재의 법 가운데서 곧바로 괴로움ㆍ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현관에 들기 때문에,
부처님의 바른 법을 ‘현견’이라 한다.
또 세존께서 말씀하신 견고(見苦)ㆍ견집(見集)ㆍ견멸(見滅)ㆍ견도(見道)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修道)에서 끊어야 할 수면(隨眠)을 끊는 도(道)를 바르게 닦아 익힐 때에,
현재의 법 가운데서 곧바로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온갖 수면을 끊는 까닭에 ‘현견’이라고 한다.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신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수면을 끊는 도를 바르게 닦아 익힐 적에,
현재의 법 가운데서 곧바로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온갖 수면을 끊는 것이 아니라면,
세존의 바른 법은 현견이 아니라 하겠지만,
세존께서 말씀하신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수면을 끊는 도를 바르게 닦아 익힐 때에,
현재의 법 가운데서 곧바로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온갖 수면을 끊는 까닭에,
부처님의 바른 법을 ‘현견’이라 한다.
또 세존께서 말씀하신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수면이 사라짐[滅]을 증득하는 도(道)를 바르게 닦아 익힐 적에,
현재의 법 가운데서 곧바로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모든 수면의 사라짐을 증득하는 까닭에, ‘현견’이라 한다.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신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수면의 사라짐을 증득하는 도를 바르게 닦아 익힐 적에,
현재의 법 가운데서 곧바로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모든 수면의 사라짐을 증득하는 것이 아니라면,
세존의 바른 법은 현견이 아니라 하겠지만,
세존께서 말씀하신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수면의 사라짐을 증득하는 도를 바르게 닦아 익힐 적에,
곧바로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모든 수면의 사라짐을 증득하는 까닭에,
부처님의 바른 법을 ‘현견’이라고 한다.
‘무열(無熱)’이라 함은, 8지성도(支聖道)를 ‘무열’이라고 말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열(熱)이란 곧 번뇌(煩惱)를 말함이니, 8지성도에는 온갖 번뇌를 얻을 수도 없고 가까이 얻을[近得] 수도 없으며, 있는 것도 없고 평등하게 있는[等有] 것도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바른 법을 ‘무열’이라 한다.
‘응시(應時)’라 함은, 8지성도를 말하여 ‘응시’라고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괴로움ㆍ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현관(現觀)의 도(道)를 바르게 닦고 익힐 때에,
곧바로 괴로움ㆍ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현관에 들기 때문에 ‘응시’라 한다.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신 괴로움ㆍ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현관의 도를 바르게 닦아 익히는데도,
그 뒤에야 괴로움ㆍ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현관에 들게 된다면,
세존의 바른 법은 응시(應時)가 아니지만,
세존께서 말씀하신 괴로움ㆍ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현관의 도를 바르게 닦아 익힐 때에,
곧바로 괴로움ㆍ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현관에 드는 까닭에,
부처님의 바른 법을 ‘응시’라 한다.
또 세존께서 말씀하신 견고(見苦)ㆍ견집(見集)ㆍ견멸(見滅)ㆍ견도(見道)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修道)에서 끊어야 할 수면(隨眠)을 끊는 도(道)를 바르게 닦고 익힐 적에 때에,
곧바로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모든 수면을 끊는 까닭에 ‘응시’라고 한다.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신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수면을 끊는 도를 바르게 닦아 익히는데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온갖 수면을 끊게 된다면,
세존의 바른 법은 응시가 아니겠지만,
세존께서 말씀하신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수면을 끊는 도를 바르게 닦고 익힐 적에,
곧바로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온갖 수면을 끊는 까닭에,
부처님의 바른 법을 ‘응시’라 한다.
또 세존께서 말씀하신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수면의 사라짐[滅]을 증득하는 도를 바르게 닦아 익힐 적에,
곧바로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모든 수면의 사라짐을 증득하는 까닭에, ‘응시’라고 한다.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신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수면의 사라짐을 증득하는 도를 바르게 닦아 익히는데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모든 수면의 사라짐을 증득하게 된다면,
세존의 바른 법은 응시가 아니겠지만,
세존께서 말씀하신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수면의 사라짐을 증득하는 도를 바르게 닦아 익힐 적에,
곧바로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모든 수면의 사라짐을 증득하는 까닭에,
부처님의 바른 법을 ‘응시’라고 한다.
‘인도(引導)’라 함은, 8지성도(支聖道)를 ‘인도’라고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8지성도를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면 괴로움ㆍ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현관(現觀)에 대하여 이끌[引] 수 있고 안내[導]할 수 있으며 따를 수 있고 좇을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바른 법을 ‘인도’라 한다.
‘근관(近觀)’이라 함은, 8지성도를 말하여 ‘근관’이라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8지성도를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면 괴로움ㆍ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사실대로 괴로움ㆍ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고 보기 때문에, 부처님의 바른 법을 ‘근관’이라 한다.
‘지혜로운 이가 안으로 증득한다[智者內證]’고 함은,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지혜로운 이라 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괴로움ㆍ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이 지혜로운 이들은 스스로가 안으로 알고 보고 분명히 이해하며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으면서,
괴로움ㆍ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로 삼는 까닭에,
부처님의 바른 법을 ‘지혜로운 이가 안으로 증득한다’고 한다.
만일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은 모양으로써 바른 법을 따라 염할 때의 소견[見]을 근본으로 삼아 증득하는 지혜[證智]와 상응하는 모든 믿음과 믿는 성품과 현전에서 믿는 성품과 따르고 인가하며 애모와 애모하는 성품과 마음이 맑고 마음이 청정함을 ‘법증정’이라 한다.
만일 이것에 대하여 권하고 격려하며 벌여 세우면,
이것을 ‘방편으로 권하고 격려하며 벌여 세워 법증정 가운데서 머무르게 한다’고 한다.
3) 승증정(僧證淨) (1)
어떤 것이 승증정(僧證淨)인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이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은 모양[相]으로써 승(僧)을 따라 염하나니,
‘부처님의 제자는 묘행(妙行)과 질직행(質直行)과 여리행(如理行)과 법수법행(法隨法行)과 화경행(和敬行)과 수법행(隨法行)을 두루 갖춘다.
이 승 가운데에는 예류향(豫流向)이 있고 예류과(豫流果)가 있으며,
일래향(一來向)이 있고 일래과(一來果)가 있으며,
불환향(不還向)이 있고 불환과(不還果)가 있으며,
아라한향(阿羅漢向)이 있고 아라한과(阿羅漢果)가 있나니,
이와 같이 통틀어 4쌍(雙) 8척(隻)이 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계율[戒]을 구족하고 선정[定]을 구족하며 지혜[慧]를 구족하고 해탈(解脫)을 구족하며 해탈지견(解脫智見)을 구족했다.
청(請)에 응하고 굴(屈)에 응하며 공경(恭敬)에 응하고 최상의 복전(福田)으로서 세간의 공양에 응하는 것이다’라고 한다”고 하신 것과 같다.
‘이[此]’라고 말함은,
이 욕계(欲界)요 혹은 이 세계(世界)이며 이 섬부주(贍部洲)이다.
또 ‘이’라 함은,
곧 이 신지(身持)ㆍ등지(等持)ㆍ구(軀)ㆍ등구(等軀)ㆍ취(聚)ㆍ득자체(得自體)이다.
또 ‘이’라 함은, 이곳에서 나신 부처님과 그 제자와 모든 신선[仙]과 모니(牟尼)와 모든 총명하고 뛰어난 지혜가 있는 이[聰叡者]와 잘 조복한 이[善調伏者]와 잘 조순한 이[善調順者]를 말한다.
또 ‘이’라 함은,
곧 ‘이 가르쳐 주고[敎授], 가르쳐 경계하고[敎誡], 잘 말씀한 법[善說法] 가운데서’라는 말이니, 이 때문에 ‘이[此]’라고 한다.
‘성스러운 제자[聖弟子]’에서 성스러움이라 함은, 불ㆍ법ㆍ승을 말한다. 불ㆍ법ㆍ승에 귀의한 까닭에 ‘성스러운 제자’라 한다.
‘이와 같은 모양으로써 승(僧)을 따라 염한다’고 함은,
이 모양[相]과 이 문(門)과 이 이치[理]로써 모든 승에 대하여 염을 일으키고 따라 염하며,
오로지 염하고 기억하며, 잊지 않고 잃지 않으며,
빠뜨리지 않고 새지 않으며, 잃지 않는 법의 성품이요 마음에 분명히 기억하는 성품이니,
이 때문에 ‘이와 같은 모양으로써 승을 따라 염한다’고 한다.
‘묘행(妙行)’이라는 말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네 가지 행(行)이 있나니,
첫째는 고지통행(苦遲通行)이요,
둘째는 고속통행(苦速通行)이며,
셋째는 낙지통행(樂遲通行)이요,
넷째 낙속통행(樂速通行)이다”라고 하셨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 가운데서 행하기 때문에 ‘묘행’이라고 한다.
또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네 가지 행이 있나니, 첫째는 안온하지 않은 행[不安穩行]이요, 둘째는 안온한 행[安穩行]이며, 셋째는 조복한 행[調伏行]이요, 넷째는 고요한 행[寂靜行]이다”라고 하셨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오직 뒤의 세 가지만을 행하기 때문에 ‘묘행’이라고 한다.
‘질직행(質直行)’이라 함은, 8지성도(支聖道)를 말하여 ‘질직’이라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8지성도는 휘어지지도 않고 구부러지지도 않고 뒤틀리지도 않으며, 올바르고[質] 곧고[直] 평탄하고 한 갈래로 나아가기[一趣] 때문이니,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 가운데서 행하게 되므로 ‘질직행’이라 한다.
‘여리행(如理行)’이라 함은,
8지성도를 말하여 ‘여리(如理)’라 하니,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 가운데에 행하게 되므로 ‘여리행’이라 한다.
또 세존은 4념주(念住)ㆍ4정승(正勝)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등각지(等覺支)ㆍ정정(正定)과 아울러 양식[資]과 도구[具]를 말씀하여 ‘여리’라 하셨다.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이 한 갈래로 나아가는 도[一趣道]는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모두 청정함을 얻고 모든 근심과 한탄을 초월하며 모든 걱정과 고생을 없애고 이치대로의 법[如理法]을 증득하게 하나니, 이른바 거룩하고 바른 선정[聖正定]이요 아울러 그 양식이며 아울러 그 도구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7성도지(聖道支)를 거룩하고 바른 선정의 양식[資]이요 도구[具]라 한다.
어떤 것이 일곱 가지인가?
처음의 바른 소견[正見]으로부터 바른 기억[正念]에 이르기까지이니, 거룩하고 바른 선정은 이 7성도지의 인도(引導)와 다스림[修治]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룩되고 원만해지기 때문에 거룩하고 바른 선정의 양식이요 도구라고 한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 가운데서 수행하게 되므로 ‘여리행(如理行)’이라 한다.
‘법수법행(法隨法行)’이라 함은,
열반을 ‘법’이라 하고 8지성도를 ‘수법’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 가운데서 수행하게 되므로 ‘법수법행’이라고 한다.
또 별해탈(別解脫)을 ‘법’이라 하고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를 ‘수법’이라 하나니,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 가운데서 수행하므로 ‘법수법행’이라 한다.
또 몸의 율의[身律儀]와 말의 율의[語律儀]와 생활이 청정함[命淸淨]을 ‘법’이라 하고 이 법을 받아 지니는 것을 ‘수법’이라 하나니,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 가운데서 수행하므로 ‘법수법행’이라 한다.
‘화경행(和敬行)’이라 함은,
부처님의 제자들은 계율[戒]을 하나로 하고, 배움[學]을 하나로 하고, 설(說)을 하나로 하고, 별해탈(別解脫)을 하나로 하여,
계율을 같이하고, 배움을 같이하고, 설을 같이하고, 별해탈을 같이하므로,
구족계를 받은[受具] 지 백 년이 된 이가 해야 할 학처(學處)를,
처음 구족계를 받은 이도 그 가운데서 배우고,
처음 구족계를 받은 이가 해야 할 학처를 구족계를 받은 지 백 년이 된 이도 그 가운데서 배운다.
마치 구족계를 받은 지 백 년이 된 이가 해야 할 학법(學法)에서와 같이 처음 구족계를 받은 이도 그와 같이 배우고,
마치 처음 구족계를 받은 이가 해야 할 학법에서와 같이 구족계를 받은 지 백 년이 된 이도 그와 같이 배우나니,
부처님의 제자들로서 이 가운데서 계율을 하나로 하는 성품[一戒性], 배움을 하나로 하는 성품[一學性], 설을 하나로 하는 성품[一說性], 별해탈을 하나로 하는 성품[一別解脫性]과 계율을 같이하는 성품[同戒性], 배움을 같이하는 성품[同學性], 설을 같이하는 성품[同說性], 별해탈을 같이하는 성품[同別解脫性]을 ‘화경행’이라 한다.
또 부처님의 제자들은 서로서로 공경하고 서로서로 겸양하며 장로(長老)와 기숙(耆宿)에 대해서는 일어나서 맞이하고 합장하며 위문하고 예배하여 상대에게 화경(和敬)하는 뜻을 표시하나니,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와 같이 수행하므로 ‘화경행’이라 한다.
‘수법행(隨法行)’이라 함은,
8지성도를 ‘수법’이라 하나니, 부처님의 제자들은 그 가운데서 따르고 돌아다니며[遊歷] 지내게[涉行] 되므로 ‘수법행’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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