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심범천소문경 제1권
3. 분별법언품(分別法言品)
그때 명망보살이 지심 범천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미묘하고 존귀한 사의(思議)에 순응하며 환히 요달한 보살 방편의 지취(旨趣)를 질문하였는데 부처님께서 이를 분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것이 보살이 질문한 일입니까?”
사의한 바에 순응하여 지심이 답하였다.
“나에게 동등하게 그 일에 대해 질문한다면 이것이 사의에 순응하는 질문입니다.
타인이 행하는 것을 부릴 만하여도 그것을 동등하게 질문하면 그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법의 형상에 대해 동등하게 질문한다면 그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또한 명망이여, 나라고 헤아리지 않고 동등하게 하며, 남이라고 헤아리지 않고 동등하게 하며, 법이라고 헤아리지 않고 동등하게 하면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또한 생기하는 것으로 질문하고, 소멸하여 없어지는 것으로 질문하고, 거처하는 곳에 대해 질문한다면 그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질문이 있어도 법에는 일어나는 것이 없고 멸진하는 것도 없고 거처하는 장소의 행상도 없으니,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면 이것은 더럽고 수고스러운 욕심에 불과합니다.
만일 싸움과 다툼과 뒤바뀐 것에 대해 질문하면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생사에 대해서 질문하고 생사를 건너는 것에 대해서 질문하고 무위에 대해서 질문한다면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럽고 수고스러운 것을 질문한 것이 아니고,
전도된 것을 질문하는 것도 아니고,
나고 죽는 것을 질문하는 것도 아니고,
생사로부터 건너는 것을 질문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열반에 관한 질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법(諸法)을 관찰해 보면 그것은 고요한 것도 아니고 애욕과 더러움과 뒤바뀜과 생사와 무위를 제거하는 것도 아니니,
그것이 순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질문에 획득하는 바가 있다면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설령 다시 질문이 있고 증득하는 바가 있고, 약속된 바가 있고 제거하고 단절하는 바가 있고 행하는 바가 있다면,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또한 획득하고 수용하고 증득하는 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으며,
온갖 상념으로 약속하는 일이 없을 때 집착하는 바도 없고,
단절하고 제거하는 생각도 없고, 행하고 보는 것도 없다면,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일체를 위하는 까닭에 이 질문을 일으켰을 뿐 마음으로 집착하는 바가 없고 자신의 의도도 질문에 있지 않으면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어떤 질문이 온갖 덕과 선에 대한 것이라면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하거나 덕스럽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순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속의 일이고 저것은 세간을 제도하는 것이며,
이것은 죄 되는 일이고 저것은 죄의 업이 아니며,
이것은 여러 가지 번뇌이고 이것은 있는 것이고 저것은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두 가지 일을 만들어서 질문하는 자는 이 일체를 헤아렸지만 순응하는 것이 못 됩니다.
두 가지 일이 없으니, 두 가지 질문을 보지 않는 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 부처님을 약간 본다면 이것이 그렇게 순응하는 것이며,
법을 약간 헤아린다면 이것이 그렇게 순응하는 것이며,
성스러운 대중을 약간 헤아린다면 이것이 그렇게 순응하는 것입니다.
중생을 약간 헤아리고 국토를 약간 헤아린다면 이것이 그렇게 순응하는 것입니다.
도(道)와 승(乘)을 약간 헤아리고 생각하지 않음을 약간 헤아린다면 이것이 그렇게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에는 소속된 것이 없으니, 그 약간조차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로 사의하여 질문해야 하니, 이것이 그렇게 순응하는 것입니다.
일체 법은 그렇게 순응하는 것이면서도 또한 일체 법은 그렇게 순응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범천에게 질문하였다.
“어찌하여 일체의 제법이 그렇게 순응하는 것이면서 또한 일체의 제법은 순응함이 없는 것입니까?”
답하였다.
“일체의 제법을 능히 분별하는 자는 제법이란 그렇게 순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령 마음이라는 법이 있고 그 마음이 정진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순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의 법을 헤아리되 제법의 모습은 고요하고 공성(空性)이고 무소유라고 헤아린다면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요한 법을 흔쾌히 즐기지 않는 자가 또한 순응하는 자입니다.
오로지 한결같이 마땅히 지어야만 할 업을 짓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는 교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지은 바가 있고 그와 같이 행하는 자라면 이것이 또한 순응하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어떤 것을 일컬어 제법에 관찰되는 바가 있다고 합니까?”
“이미 성품이 고요하고 애욕의 끝을 떠났으면 이것을 제법을 관찰한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범천이여, 그와 같이 순응하지 않는 것을 요해할 부류는 적겠습니다.
애욕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도에 대한 사의에 순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답하였다.
“명망이여, 많은 족성자(族姓子)와 족성녀(族姓女)가 애욕의 끝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도를 사의하는 법에 대해 그렇게 순응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이미 들어간 자도 있고 앞으로 마땅히 들어갈 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지혜의 법에 들어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얻은 바도 없고, 또한 이미 들어간 사람도 없고, 앞으로 들어갈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크게 불쌍히 여기시는 세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만일 부처님께서 그렇게 설하신 법을 듣고 수행하고 정진한다면, 그것이 곧 마땅히 설한 대로 받들어 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는 마침내 어떤 곳의 땅으로도 돌아가지 않으며, 존재하거나 얻을 수 있는 어떤 취(趣)로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또한 다시는 생사도 없으며, 열반에도 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생사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열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환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범천이여, 부처님께서는 생사의 업을 제도하시기 위하여 법을 설하신 것이 아닙니까?”
답하였다.
“세존께서 정녕 어찌 다시 ‘나는 생사를 제도한다.’고 스스로 설하셨겠습니까?”
명망이 답하였다.
“아닙니다, 족성자여. 그 때문에 부처님 세존께서는 생사를 버리지도 않으시며 열반을 구하지도 않으십니다.
만일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생각을 가진 자라면 그는 제도될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생사가 없으니, 무엇이 제도되겠습니까?
그리하여 열반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찌하여 생사와 열반이 평등하지 않겠습니까?”
범천이 답하였다.
“나고 죽지도 않으며 또한 열반도 없는 것입니다.”
그때 세존께서 지심 범천을 칭찬하시며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범천아. 설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마땅히 그렇게 설해야 하고, 나아가 이와 같은 이야기를 성취해야 한다.”
이렇게 순응하는 것에 관하여 설할 때에 2천 명의 비구가 번뇌가 다하였으며 마음으로 그 뜻을 이해하였다.
“범천아, 또한 생사를 얻을 수 없고 열반도 없다.
여래께서 나고 죽는 일을 보이며 말한다고 하여도, 윤회하는 자도 없고 멸도(滅度)하는 자도 없고 슬퍼하는 것도 없으며, 또한 사람도 볼 수 없는 것이다.
범천아, ‘멸도한 자가 있다’고 누군가 사의한다고 하여도 실제로 그 사람에게는 생사의 법도 없고 열반의 법도 없는 것이다.”
그때 대중의 모임 가운데 있던 5백의 비구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개인적인 견해에 사로잡혀 떠나가며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들이 보는 바로는 청정하게 범행을 닦는 것이 있다.
그리하여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말하기를,
‘마땅히 멸도를 얻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멸도를 얻은 자가 없다’고 하시니,
이 도를 구하고 배우려고 의도했던 것이 다 공허한 것인가?
그렇다면 안정되게 지혜를 성취하겠는가!”
그때 명망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법이 생기하는 것을 욕구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부처님께서 출현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에게는 생사의 어려움을 초월하고 건넌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그 사람은 열반을 보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열반이란 일체의 상념을 제거하는 것이며,
또한 상속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 신통과 지혜에 있어서 수승하고 특이한 것입니다.
만일 이들을 해석한 비구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를 속인 것이 됩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이 바른 법과 율에서 출가하여 외도의 사견에 떨어진 자가 있으니, 그가 열반의 장소를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유하면 삼 풀[麻]에서 기름이 나오는 것과 같으며, 낙(酪)에서 소(酥) 및 제호(醍醐)가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제법을 멸진하고,
‘세존께서는 빠짐없이 영원히 멸도시키시니, 그는 영원히 멸도한다’고 한다면,
저는 곧 그를 매우 교만한 자라고 일컫겠습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수행자에게는 닦은 바가 없으며, 평등함에 이른 자에게는 마침내 일으킬 만한 법을 만들어 세우는 일이 없습니다.
또한 멸진에 대해서도 역시 구하는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법을 얻고자 하는 자에게는 평등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에 명망보살이 지심 범천에게 말하였다.
“범천이여, 이것이 설해질 때 5백의 비구가 설해지는 법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개인적인 견해에 사로잡혀 허망하게 떠나갔습니다.
이들 부류의 의지의 움직임에 대해서 알아서 어찌 그들로 하여금 법에 들어가도록 하지 않습니까?
즐거이 믿는 자가 있다면 그것으로써 여러 견해의 그물에서 제도하여 해탈시키시오.”
지심이 답하였다.
“족성자여, 그대가 항하의 모래알같이 많은 여러 부처님의 국토를 노닐며 지내 왔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만한 수의 겁 동안을 구하고 찾는다 하여도 떠남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와 같아서 형상적인 법에는 또한 해탈이 없습니다.
비유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허공을 두려워하여 버리고 도망가는데 머무는 곳, 이르는 장소마다 허공을 떠나지는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비구들 역시 그러합니다.
도달하고 행하는 그 한계를 측정할 수가 없다 해도 공성(空性)의 모습이 자연스러우며,
무상(無想)의 모습 역시 자연스러우며, 무원(無願)의 모습 역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또한 비유하면 허공을 구하려는 두 번째 사람과 같습니다.
여덟 방향으로 그리고 위와 아래로 허공을 얻으려고 하여,
‘나는 허공을 얻고자 한다. 나는 허공을 얻고자 하여 욕구하는 대로 노닐고 나아가고자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지만,
그 사람은 입으로 스스로 허공을 말할 뿐이지 허공을 알지 못합니다.
말하는 것처럼 그 몸이 허공에서 나아가면서도 허공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족성자여, 이 여러 비구도 멸도를 구하고 열반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멸도를 구하지만 이해하여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른바 멸도(滅度)를 얻었다고 말하는 자는 단지 거짓된 명칭을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유하면 허공과 같으니, 만일 허공에서 다니고 허공에서 노닌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역시 공허한 것입니다.
그 열반이란 임시로 짐짓 만든 말일 뿐입니다.”
그때 5백 비구는 이렇게 설하는 말을 듣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으로 해탈하고 신통력(神通力)을 얻었다.
그리고는 각자 찬송하여 말하였다.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온갖 법이 모두 빠짐없이 멸도합니다.
그렇지만 만일 어떤 사람이 멸도를 구하고자 하면 그 사람에게는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위대한 성인이시여, 저희들은 지금 범부가 아닙니다. 유학(有學)도 아니고 무학(無學)도 아닙니다.
나고 죽는 것에도 있지 않고, 열반에도 있지 않으니, 멸도가 없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또한 여러 신통과 지혜에 있어서 저희들은 이미 존재하던 도와 지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여러 부처님의 법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때 존자 사리불이 여러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이미 만들고 확립하여 이 지혜에 들어갔는데,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한 것입니까?”
“저희들은 이미 더럽고 피로한 것을 만들고 그것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도 짓는 것은 없습니다.”
다시 물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설합니까?”
여러 비구들이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설령 더럽고 피로한 것을 단절했다 하더라도 문득 애욕의 티끌에 들어가게 되니, 멸도를 욕구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저희들은 이미 들어가는 것을 얻었다고 말할 뿐입니다. 더럽고 피로한 것을 만들었지만 짓는 것은 없습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족성자여, 마땅히 이러한 것을 질문하니, 그대들이 서 있는 곳은 중우(衆祐)의 땅입니다.”
여러 비구들이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세존께서도 오히려 중우의 땅을 정화하지 못하시는데 어찌 하물며 저희들이 청정한 경지에 이르겠습니까?”
다시 물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합니까?”
여러 비구들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법계가 본래 빠짐없이 청정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때 지심 범천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누구를 일컬어 세간의 중우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세간의 법으로 미혹해지지 않는 자이고, 세간의 법으로 수치스러워지지 않는 자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중우의 일을 마침내 정화합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여러 법에 있어 취착하지 않는 자이니라.”
다시 질문을 드렸다.
“누가 세간의 복전입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도를 잃지 않는 자이니라.”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중생의 좋은 벗이라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니라.”
다시 질문을 드렸다.
“누가 여래에게 다시 보답합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요청을 거스르거나 의심하지 않는 자이니라.”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여래를 받들고 섬긴다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일어남이 없는 궁극적 존재에 대해 환히 요해(了解)하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여래의 행에 친근히 하는 것이라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비록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금기와 계율을 훼손하지 않는 까닭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여래를 공경하는 것이라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설령 나아가는 자라고 하더라도 장차 여러 감관을 잘 보살피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세간에서 큰 재산을 지닌 부유한 자라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7보를 가득 채우고 구족했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세간에서 만족함을 아는 자라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세간을 건너는 지혜를 이미 획득했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환히 요달한다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삼계 중에서 원하는 바가 결코 없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세간에 간언하는 비유라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일체의 결박을 휴식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세간에 처하여도 안온하다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탐착이 없고 재물에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탐착하지 않는다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수행에 장애[陰蓋]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수행에 장애를 여의었다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여섯 가지 입처(入處)를 버리고 그것을 해석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이미 지나갔다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도와 지혜를 통달하고 요해했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보살이 보시의 주인이 된다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일체 중생의 무리들을 권하고 교화하여 여러 신통과 지혜의 마음에 들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금기와 계율이라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도의 마음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인욕을 행한다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마음이 멸진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정진이라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마음을 구하여도 얻을 만한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한마음이라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마음이 휴식하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지혜라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일체의 법에서 음성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보살이 자비를 행하는 자라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일체의 여러 가지 생각과 행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보살이 슬퍼함을 행한다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여러 법에 관한 상념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보살이 기쁨을 행한다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나의 자아를 헤아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보살이 능히 평정[護]을 행한다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남과 자기에 관해 생각하거나 헤아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보살이 믿음에 넓고도 확고하며 독실하다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청정하고 순백한 모든 법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보살이 널리 듣고서 공(空)에 안주한다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일체의 음성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스스로에게 부끄러움[慚]이라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안의 법을 환히 알고 요달하여 제거하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남에게 부끄러움[愧]이라고 일컫습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밖의 일을 익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드렸다.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합니까?”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답하셨다.
그 몸이 청정하여
온갖 악한 짓을 범하지 않고
입으로 말하는 것이 청정하여
항상 지극한 정성으로 말하고
아울러 의지가 청정하여
항상 자비의 마음을 실천하면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자비로운 행을 준수하고 수행하고
오염된 티끌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애련하게 여기는 행이 있어서
분노하거나 해치려는 바가 없네.
어짊과 평정함을 더하고
어리석음도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취락(聚落)에서 노닐어도 그러하고
한가하게 거주해도 그러하며
도시나 마을 등 복잡한 곳이나
대중의 모임에서도 차이 없다네.
일찍이 위의와 예절을
위배하거나 잃어버리지 않으면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여러 부처님의 바른 법을
빠짐없이 두루 모두 믿고
자아가 없음을 설하는 경전을
또한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네.
기쁨에 찬 성스러운 대중에게는
논의하는 바가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색에 대한 애욕을 벗어 던졌으나
그 행하는 바를 알 수 없으며
진에(瞋恚)와 분노를 건넜으나
역시 건넌 바가 없네.
온갖 행상이 돌아갈 곳을
환히 아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애욕의 세계에 대해서도
만들어 집착하는 것이 없고
형태 있는 세계에 대해서도
역시 안주하여 확립하는 일이 없네.
형태 없는 세계에 집착하지 않는 것도
모두 역시 그러하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제법이 모두 빠짐없이 공(空)이니
그것을 믿고 즐거워하네.
그런데 중생들은 이리저리 내달리고
사유하고 생각한다네.
그런 까닭에
모든 번뇌를 멸진하지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방편을 환히 알아
연각승(緣覺乘)에 대해서도
음성으로 보여 주어
그것으로 그들을 교화하네.
그러면서 부처님과 대승에 대하여
요달하지 않은 바가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마땅히 이르는 곳마다
일체 것을 알고
인도하는 스승의 가르침을
일찍이 위배하거나 잃어버리지 않았네.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서
항상 평등한 마음으로 행하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일찍이 과거의 법을
상념하지 않고
미래와 현재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네.
일체의 노닐고 거주한 것에
의지하거나 집착하는 바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그때 지심 범천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무엇을 두고 보살이 세간법을 건넌다고 하며, 세간법에 처하지 않는다고 하며, 현재 세간법에 들어간다고 합니까?
그리고 세간법에 있어서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시킨다고 하며, 세간을 평등하게 보이고 드러낸다고 합니까?
또한 세간법에 인연하여 세간에서 노닐고 비록 세간에 처하더라도 세간의 법을 파괴하지 않고 도의 법을 잃지 않는다고 일컫습니까?”
그러자 그때 세존께서 찬탄하시며 게송으로 지심에게 대답하셨다.
5음(陰)이 곧 세간이라고 나는 설하지만
세간에서 집착할 것이란 없네.
세간에 탐착하지 않으면서도
세간법을 버리지 않아야 하네.
보살은 능히 그것을 요달하여
세간의 자연스러움을 이해하고 아네.
여러 음(陰)에는 근본이 없기에
세간법에 집착하지 않는다네.
이익이 있든 이익이 없든
찬탄을 받든 비방을 받든
명성이 있든 명성이 없든
세간의 즐겁고 괴로운 법을 수치스러워하네.
그는 큰 지혜를 사용하여
비록 세간법에서 노닐지만
세간에서 탐착할 만한 것을 보지 않으니
도에 대한 뜻은 흔들리지 않네.
이익을 얻어도 즐거워하지 않으며
포기하고 손해를 봐도 슬퍼하지 않으며
태산과 같이 굳건하게 머무니
능히 그를 동요시킬 자 없네.
찬탄을 받거나 비방을 받아도
그 뜻은 항상 평등하며
명성이 있든 없든 괴롭든 즐겁든
평등한 마음에 굳건히 머문다네.
세간은 본래 전도(顚倒)됨으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을 환히 알아서
세간에 집착하지 않으며
밝게 통달하고 홀로 노닐고 거니네.
만일 세간에 들어간다면
이르는 곳마다 모두 요달하니
그런 까닭에 속된 것을 따라 익히며
중생의 괴로움을 제도하고 해탈시키네.
용맹하니 비록 세간에서 노닐며
세간에 있다 해도 마치 연꽃과 같아
세속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법의 성품을 분별하고 요지하네.
가령 세간에서 다니고 머문다 해도
세간의 법을 분별하지 않으니
그런 까닭에 그 세간에서 노닐어
세간의 모습을 궁극적으로 알아낸다네.
세간의 모습은 허공과 같으니
거처할 곳도 없는 공허한 모습이라.
이미 이것을 이해하고 요달하니
곧 세속에 집착하지 않는다네.
지방의 풍속에 따라 아는 바가 있으니
그것에 수순하여 중생을 교화하며
세간의 자연적 본성을 관통하고 통달하니
세속을 훼손시키거나 허물지 않네.
5음(陰)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세간이 지니는 자연의 본성이니
그것을 환하게 알지 못하면
항상 세속에 의지한다네.
만일 여러 가지 음(陰)을 능히 버리어
일어나는 것도 존재하는 것도 없으면
비록 세간에 있다고 해도
속된 것에 집착하는 바가 없다네.
세간의 법을 그렇게 요해하지 않으면
불타오르듯이 다투고 싸우며
속이고 허망하고 성실함이 없으며
항상 상대적 관점을 세워 머무네.
나는 일찍이 세간 일에 간여치 않았노라 하고
다투고 싸우는 바도 없다고 하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도에 입각하시어
자연의 본성에 해당하는 법을 분별하시네.
법이란 다투는 바가 없는 것이라
여러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는
세간의 평등함을 환히 아는 것이니
허무하지 않고 지극히 정성스럽네.
이간질을 하든 참된 진리이든
그 모두를 가르치고 명령하는 것이니
가령 독(毒)의 해악으로 비유하자면
외도와 비교하여 다를 것이 없네.
제법을 성실하게 판단해 보면
알맹이도 없고 허망함도 없어라.
그런 까닭에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둘이 없는 법으로 세간을 제도한다 하시네.
내가 통달한 세간의 지혜는
곧 세속의 법이 되니
허망한 것도 없고 성실함도 없어라.
있다는 것은 세간의 죄악이라 보기에
세간의 광명이 되어
이에 큰 명성을 성취하여
부처님은 세간을 열고 요지하였으니
청정하여 허물과 티끌이 없네.
만일 세속을 관찰하되
몸으로써 자연의 본성을 본다면
그것은 곧 등정각(等正覺)이
시방에 드러나 있는 것을 보는 것이라.
제법은 인연에 의한 것이므로
제법에는 자연의 본성이 없다고 알아서
만일 인연을 세밀히 분석한다면
법의 이치에 통달하는 것이라.
그가 법을 이해하고 통달한다면
공성(空性)에 대해 환히 알게 되며
공성을 이해하고 식별한다면
인도하는 스승을 분별하리라.
설령 세간을 분별하고 강설할 때
그 음성을 구한다고 하면
비록 세간의 일을 행한다 하여도
세간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네.
만일 여러 견해에 떨어지거나
모든 것이 이것에 미치지 않으면
짐짓 이름으로 세간에 노닐어도
세속의 일에 집착하지 않네.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
이러한 인(忍)을 즐거워하는 자가 있다면
부처님은 곧 그 사람을 위하여
인도하는 스승이 되어 법신을 드러내시네.
만일 이러한 법을 간직한다면
곧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 되고
세간에 처해 있을 때에는
인도하는 스승이신 세존께서 아시네.
폐악무도(弊惡無道)한 악마 파순(波旬)이라도
만일 사람 사이에 머물면서
이 경을 자세히 설하는 이에겐
능히 그 기회를 얻지 못하네.
이러한 이는 큰 지혜를 가진 것이며
일체를 보시하는 시주이며
계율과 금기를 구족한 것이며
인도하는 스승이신 부처님을 밝게 아는 이라.
그는 인욕의 힘으로 용맹스럽게 건너고
정진하면서 노닐고 거닐며
선정에 대하여 총명하게 통달하고 즐기고
세간을 분별하네.
부처님의 공하고 없는 법을 설하니
이러한 것들을 듣는다면
그 대장부는 다시 오래지 않아
도량에서 악마를 항복받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