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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왕반야바라밀경 제2권
3. 법계품(法界品)
그때 승천왕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벗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며 부처님을 향하여 머리와 얼굴로 예를 드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매우 깊은 법계를 통달한다고 합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승천왕을 칭찬하며 말씀하셨다.
“훌륭하도다, 대왕이여.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 잘 생각하라.”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듣기를 원하옵니다.”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가 있는 까닭에 선지식을 가까이하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모든 번뇌의 의혹을 여의고 마음에 청정함을 얻어 공경하고 존중하며,
공의 법을 닦는 것[空行]을 즐거워하고 모든 견해를 멀리 여의며 여실한 도를 닦아 법계를 능히 통달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가 있는 까닭으로 선지식을 가까이함에 기뻐하고 공경하여 마치 부처님같이 생각한다.
그러므로 게으르지 않고 모든 악과 모든 착하지 못한 법을 멸하고,
선근을 낳아 자라나게 하며 이미 번뇌를 멸하여 장애의 법을 멀리 여의어 몸ㆍ말ㆍ뜻의 업에 청정함을 얻으며,
이 청정함으로 말미암아 곧 공경하고 존중함이 생기고 다시 공경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공의 법을 닦고 익히며,
공의 법을 닦는 까닭에 모든 견해를 멀리 여의며,
모든 견해를 여의는 까닭에 정도(正道)를 닦고 정도를 닦는 까닭에 능히 법계를 보는 것이니라.”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법계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것은 곧 여실함이니라.”
“무엇이 여실함입니까?”
“변하여 달라지지[變異] 않는 것이니라.”
“무엇이 달라지지 아니함입니까?”
“말하자면 여여(如如)함이니라.”
“무엇이 여여함입니까?”
“이것은 지혜로 아는 것이지 말로 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문자를 넘어서고 말의 경계와 입의 경계를 여읜 까닭이다.
모든 희론으로 삼을 수 없고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모양을 여의고 모양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림을 멀리 여의고,
모든 생각[覺觀]의 경계를 넘어서 생각도 없고, 모양도 없고 둘의 경계를 지나고 모든 범부를 지나 범부의 경계를 여의고,
모든 마귀의 일을 지나며 능히 번뇌의 의혹을 여의는 것이다.
또한 식(識)으로 아는 것도 아니요 처소가 없으면서도 머물러 고요한 성인의 지혜요 뒤에도 분별할 수 없는 지혜의 경계다.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으며,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가질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물들 것도 없고 더러움도 없고,
청정하여 번뇌를 여의어서 가장 으뜸이요 제일이며,
성품이 항상 변하지 않는다.
만약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거나 세상에 나오시지 않거나 성품과 모양이 항상 머물러 있느니라.
대왕이여, 이것이 법계이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이 법계의 온갖 고행을 닦아야 모든 중생을 다 통달하게 되는 것이다.
대왕이여, 이것을 반야바라밀의 여여한 실제(實際)라고 하며,
모양을 분별할 수도 없고 불가사의한 세계의 진공(眞空)이며,
일체지(一切智:성문의 지혜)와 일체종지(一切種智:佛智)가 둘이 아닌 법계이니라.”
그때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깨달아 이 법계에 이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세상을 벗어난 반야바라밀로써 증득하면 뒤에 분별이 없는 지혜에 이르게 되느니라.”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증득하는 것[證]과 이르는 것[至]에는 어떤 차별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반야바라밀을 여실하게 보는 것을 증득이라 하고, 지혜로써 통달한 것을 이른다고 하느니라.”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문혜와 사혜와 수혜로 반야바라밀을 통달하는 것이 세상을 벗어난 후의 분별이 없는 지혜가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대왕이여. 무슨 까닭인가?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고 미묘하기에 거칠고 옅은 문혜로는 볼 수 없고,
제일의이기에 사혜로는 헤아릴 수 없으며,
출세간의 법이기에 수혜로는 수행할 수 없느니라.
대왕이여, 반야바라밀은 이와 같이 매우 깊어서 범부와 이승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비유하면 선천적으로 눈이 먼 자는 온갖 색을 보지 못하고,
갓 태어나 칠 일째 되는 어린아이는 태양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볼 수도 없는데 더구나 닦는 것이리오?
대왕이여, 비유하면 더운 여름에 어떤 사람이 서쪽으로 가다가 광야에 이르게 되었다.
다시 한 사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다가 앞의 사람에게 묻기를,
‘내가 지금 덥고 목마른데 어느 곳에 맑은 물과 서늘한 나무 그늘이 있습니까?’ 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선남자여,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왼쪽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두 길이 있는데, 마땅히 오른쪽으로 가면 맑은 샘물과 서늘한 나무 그늘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왕이여, 그대 뜻은 어떠한가?
비록 이런 설명을 듣고 생각하면서 나아가면 물을 얻은 것처럼 더위와 목마름을 없앨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그곳에 이르러 연못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고 물을 마시고 나무 그늘에 쉬어야 비로소 더위와 목마름이 없어지고 물맛을 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다, 대왕이여. 듣고 생각하고 닦는 세 가지 지혜로는 진실한 반야바라밀을 통달할 수 없느니라.
대왕이여, 이른 바 광야는 생사이고 사람은 중생이며,
더위는 번뇌이고 목마름은 탐애이며,
동쪽에서 오는 사람은 보살이고 오른쪽 길이란 살바야(薩婆若:一切智)의 길이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생사의 길과 세간을 벗어나는 길을 잘 아는 것이니,
맑고 차가운 물이란 반야바라밀이고 서늘한 나무 그늘이란 대비이다.
보살마하살은 두 가지 법을 행하는 까닭에 범부와 이승(二乘)의 도를 멀리 여의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이와 같은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은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어 가지가지 교묘한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그 속으로 들어오게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여실하게 역공(力空)ㆍ무외공(無畏空)ㆍ불공법공(不共法空)ㆍ계취공(戒聚空)ㆍ정취공(定聚空)ㆍ혜취공(慧聚空)ㆍ해탈취공(解脫聚空)ㆍ해탈지견취공(解脫知見聚空)ㆍ공공(空空)ㆍ제일의공(第一義空)을 알지만,
공한 모양은 얻을 수 없어서 공의 모양을 취하지 않고 공하다는 견해를 일으키지도 않으며,
공하다는 모양에 집착하지도 않고 공에 의지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집착하지 않는 까닭으로 공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모든 모양을 멀리 여의어 안과 밖의 모양을 보지 않으며,
희론의 모양을 여의고 분별하는 모양을 여의며,
구하고 찾는 모양을 여의고, 탐착하는 모양을 여의고 경계의 모양을 여의며,
반연하는 모양을 여의고 아는 자와 알 것이라는 모양을 여의느니라.”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은 이와 같이 모양이 없다는 것을 관하는데, 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는 다시 어떻게 관하십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모든 부처님의 경계는 불가사의하다.
무슨 까닭인가? 경계를 여읜 까닭이다.
모든 중생이 부처님의 경계를 헤아려 생각하면 마음이 곧 미치고 어지러워져 이것과 저것을 알지 못하게 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허공의 성질과 같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고 구하여도 얻지 못하며, 감각과 감관의 경계를 여의기 때문이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도 오히려 범부의 경계에서 생각하여 얻은 것도 없고 보지도 못하는데, 하물며 부처님의 경계이겠는가?
또한 모든 서원에 의지하지 않고 비록 보시를 행하여도 보시의 과보에 집착하지 않으며,
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도 이와 같아,
일체의 공덕에서부터 나아가 열반에 이르기까지 또한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나와 내 것을 여의어 둘도 없고 다름도 없으니 자성을 여읜 까닭이니라.”
이 반야바라밀의 법문을 설할 때 삼천대천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니, 수미산왕(須彌山王)ㆍ목진린타산(目眞隣陀山)ㆍ철위산(鐵圍山)ㆍ대철위산(大鐵圍山)ㆍ보산(寶山)ㆍ흑산(黑山)ㆍ대흑산(大黑山)이 모두 진동하고, 한량없는 백천억의 모든 보살마하살이 웃옷을 벗어서 부처님을 위하여 자리를 펴되 수미산처럼 높이 만들었다.
또한 한량없는 백천의 제석천ㆍ범천ㆍ호세(護世)천의 모든 천왕들이 합장하고 공경하며, 모든 아름다운 꽃ㆍ만다라(曼陀羅)꽃ㆍ마하만다라(摩訶曼陀羅)꽃ㆍ만수사(曼殊沙)꽃ㆍ마하만수사꽃ㆍ흰 연꽃ㆍ붉은 연꽃ㆍ분홍 연꽃[紅蓮]ㆍ푸른 연꽃을 뿌리니, 기사굴산의 가로와 세로 각 사십 유순(由旬)에 꽃이 두루 가득 쌓여서 부처님 무릎까지 이르고, 한량없는 천자(天子)들이 모든 하늘의 악기를 치지 않고도 저절로 울리며 공중에서 찬탄하여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거듭 세상에 나시는 것을 보고 거듭 법륜 굴리심을 보았다.
기쁘구나, 염부제의 모든 중생이여. 부지런히 공덕을 닦아 많은 선근을 심어서 이와 같은 깊고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게 되었으니, 하물며 다시 미래 세상에 믿는 이들이겠는가?”
이와 같은 중생은 다 모든 부처님 여래의 경계를 닦았기 때문이니라.
다시 한량없는 백천의 모든 큰 용왕들이 신통력으로 널리 큰 구름을 일으켜 향기로운 비를 쏟아 내리어 기사굴산과 삼천대천세계를 씻으니, 모든 법을 듣는 자는 오직 향기가 스며드는 것을 깨달을 뿐 젖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한량없는 용녀(龍女)들은 모두 부처님 앞에서 합장하고 찬탄하였으며, 한량없는 건달바들은 아름다운 음악으로 부처님께 공양하고, 야차(夜叉)의 무리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을 뿌렸다.
시방의 한량없고 끝없는 국토의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모두 미간의 백호(白毫)에서 광명을 놓아 사바세계의 기사굴산을 비추니, 그 삼천대천세계의 어두워 캄캄한 곳과 해와 달이 비추지 못하던 곳에 모두 광명이 비추고 세계를 비추고는 다시 부처님 처소에 돌아와서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 부처님의 이마로 들어갔다.
한량없는 백천의 바라문ㆍ찰리ㆍ거사ㆍ장자들은 바르는 향ㆍ가루향과 번기[幡]ㆍ꽃ㆍ당기[幢]ㆍ일산[蓋]을 부처님께 공양하였다.
그때 대중 가운데 칠십이억 보살마하살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고,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번뇌를 멀리하여 청정한 법의 눈[法眼]을 얻었으며,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다.
그때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문자를 여의어 언어가 없는데, 어째서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중생을 위하여 설법합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이와 같이 설법함은 부처님의 법을 닦아서 익히기 위한 까닭이나 말한 부처님의 법은 끝내 얻을 수 없고,
모든 바라밀을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바라밀도 끝내 얻을 수 없으며,
청정한 보리를 위한 것이지만 보리도 끝내 얻을 수 없고,
욕심을 여의어 소멸시킨 열반을 위한 것이지만 욕심을 여의어 소멸시킨 열반도 끝내 얻을 수 없다.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과(果)를 위한 것이지만 수다원에서부터 아라한에 이르기까지도 끝내 얻을 수 없고,
벽지불을 위한 것이나 벽지불도 끝내 얻을 수 없으며,
나[我]라는 집착을 끊어 없애기 위한 것이지만 나라는 집착도 끝내 얻을 수 없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마음에 모든 모양을 분별하지 않으니, 분별하는 자신과 분별하는 대상을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반야바라밀을 수순하여 생사를 어기지 아니하며, 비록 생사에 있으나 반야바라밀을 거스르지 아니고 법의 모양을 수순하느니라.”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법의 모양대로 수순하여 세상의 진리[世諦]를 어기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에 수순하여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멀리 여의지 않고,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를 멀리 여의지 않으며,
법을 멀리 여의지 않고, 반야바라밀에 집착하지 않으며, 도를 멀리 여의지도 않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교묘한 방편을 갖춘 까닭이니라.”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선교방편[善巧]입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말하자면 한량없는 보살마하살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를 구족하여 중생을 버리지 않고, 항상 능히 이익하게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끝없는 사랑[慈]ㆍ분별함이 없는 사랑ㆍ법의 사랑ㆍ쉬지 않는 사랑ㆍ고뇌하지 않는 사랑ㆍ이익 되게 하는 사랑ㆍ평등한 사랑ㆍ두루 이익하게 하는 사랑ㆍ세간을 벗어나는 사랑 등을 갖추니, 이와 같은 큰 사랑[大慈]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무엇을 대비(大悲)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귀의할 곳이 없는 고뇌하는 중생을 건져내고, 보리심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법을 구하며,
이미 스스로 얻었으면 중생을 위하여 설하여 간탐하는 자는 보시를 행하게 가르치고,
계(戒)가 없거나 파계하는 자는 가르쳐 계를 지키게 하며,
성품이 악한 자는 인욕을 가르치고,
게으르고 태만한 자는 가르쳐서 정진하게 하며,
산란한 자는 선정을 행하게 가르치고,
어리석은 자는 반야를 행하게 가르친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비록 고뇌를 만난다 할지라도 끝내 보리의 마음을 버리지 않으니, 이것을 대비(大悲)라고 하느니라.”
“세존이시여, 무엇을 크게 기뻐한다[大喜]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렇게 생각한다.
‘삼계(三界)는 맹렬한 불이 타는데 나는 이미 벗어나 여의었으므로 기쁨이 생기고,
오래도록 생사의 끈에 매여 있다가 나는 이미 베어 끊었으니 기쁨이 생기며,
가지가지 깨달음의 생각[覺觀]과 모양을 취하는 것을 생사의 바다에서 취하였는데 나는 이미 벗어났으니 기쁨이 생긴다.
시작 없는 옛날부터 아만의 깃대를 높이 세웠던 것을 나는 이미 꺾어버린 까닭에 기쁨이 생기고,
금강의 지혜로 번뇌의 산을 무너뜨려 영원히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한 까닭에 기쁨이 생기며,
내 스스로도 안온하고 또 남도 안온하게 하고, 어리석음의 캄캄한 어둠과 탐애에 얽매여서 오래도록 세간에서 잠자다가 지금 비로소 깨달음을 얻은 까닭으로 기쁨이 생겨난다.
그리하여 이제는 모든 악도[惡趣]를 여의고 또 중생을 악도에서 건져낸다.
중생은 오래도록 생사에 헷갈리어 벗어나는 길을 알지 못하기에, 내가 지금 건져내어 바른 길을 열어 보여 모두 살바야[一切智]의 성(城)에 이르게 하는 까닭에 기쁨이 생긴다.’
이것을 큰 기쁨이라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눈으로 보는 색에 집착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아 담담한 마음[捨心]을 일으키니,
귀로 듣는 소리ㆍ코로 느끼는 냄새ㆍ혀로 보는 맛ㆍ몸으로 느끼는 감촉ㆍ뜻으로 아는 법도 그러하다.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와 같은 4무량심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그러자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모습을 나타낸다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반야바라밀의 모습은 얻을 수 없고 보살마하살의 모습도 얻을 수 없지만 방편의 힘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태(胎)에 들고 나아가 열반에 이르는 것을 나타내 보일 뿐이니라.
왜냐 하면 모든 하늘들은 항상 그대로 있다고 헤아려 다른 세상으로 떨어짐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방편의 힘으로써 이 집착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에 있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 이로 인하여 그 하늘들이 항상함이 없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하니,
세간에서 가장 으뜸이요 가장 높고 같은 이가 없는 분이 5욕에 집착하지도 않아서 5욕이 더럽히지 못하는데도 오히려 떨어짐이 있는데 하물며 다시 다른 하늘[餘天]이겠느냐?
이런 까닭에 마땅히 방일함이 없이 부지런히 정진하여 일심으로 수도하여라.
비유하면 태양도 떴다가 지는 것이 있음을 보는데, 하물며 반딧불이야 오래 머물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으니라.
대왕이여, 다시 모든 하늘은 방일하여 즐거움에 탐착하는 까닭으로 정법을 닦지 않는다.
비록 보살과 같이 천궁에 있어도 가서 예도 드리지 않고 법을 물어서 받지도 않으며 이렇게 생각하느니라.
‘지금은 즐기고 내일 보살에게 나아가 각각 서로 말하자. 보살이 나와 함께 항상 여기에 같이 있는데 수행하는 것이 무엇이 늦겠는가?’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부지런히 닦아 정진하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처럼 하여 그의 방일함을 깨뜨리어 욕계에 떨어짐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나타내 보임에는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모든 하늘이 방일함을 여의게 하려는 까닭이요,
둘째는 중생들이 다 볼 수 있게 하려는 까닭이니라.
대왕이여, 세간에 어떤 근기가 낮은[下劣] 중생은 부처님께서 위없는 도를 이루고 법륜을 굴리심을 보고 감당하지 못하므로, 보살마하살이 이런 중생을 위한 까닭에 어린 동자로 후궁(後宮)에서 노는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보살이 만약 다른 형상으로 설법하면 후궁의 여인은 믿고 즐겨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어린아이나 동자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행동이 고상한 자는 항상 세속을 여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그들을 교화하려는 까닭으로 출가하는 모습을 나타내 보이느니라.
대왕이여, 다시 어떤 하늘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였다.
‘만약 단정히 앉아 사람과 하늘의 즐거움을 받으면 성인의 도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이들을 교화하기 위한 까닭으로 고행을 나타내 보이며,
또한 외도들을 항복시키기 위한 까닭으로 고행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다시 어떤 하늘 사람이 무명의 긴 밤에 발원하기를,
‘보살마하살이 도량에 나아가 수행을 하면 우리들 모든 하늘은 항상 공양을 올리리라’고 하였느니라.
보살은 이런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까닭으로 도량에 나아감을 보임에 모든 사람의 무리들이 다 보리의 인연을 얻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다시 어떤 하늘 사람이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악마와 외도는 정법을 막나니 원컨대 보살이 도량에 앉아서 악마와 모든 외도를 항복받아 바르게 믿는 사람이 다 법을 보게 하여지이다.’
보살마하살이 도를 이루고 나서 삼천대천세계가 허공 중에서 가지가지 음성으로 찬탄하여 말하였다.
‘부처님의 태양이 떠오르니 반딧불은 숨어 버리는구나.’
이들 하늘 사람이 다 이렇게 말하였다.
‘원컨대 우리들은 오늘 세상에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지금의 보살과 같게 하여지이다.’
이런 중생을 위하여 도량에 앉은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니라.
또 어떤 하늘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원컨대 큰 스승이 일체지(一切智)ㆍ무사지(無師智)ㆍ자연지(自然智)를 성취하는 것을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들은 벗어나기를 구하지 않아도 근성이 완전하게 익은[純熟] 깊은 법기(法器)이니, 이런 중생을 위하여 3전(轉) 12종법륜(種法輪))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라.
대왕이여, 다시 어떤 하늘 사람이 열반의 법을 듣기 원하는데 보살은 그와 같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까닭으로 열반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면 능히 이와 같이 가지가지의 모습을 나타내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난처함이 생기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복과 덕이 없는 사람은 반야바라밀의 이름을 듣지 못하는 까닭이니라.
또 항상 모든 악업을 여의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계를 다 범하여 허물지 않고 마음에 질투가 없으며,
이미 과거에 무수한 부처님의 처소에서 많은 선근을 심고 공덕을 구족하였으며,
지혜 방편으로 큰 서원을 성취하고 마음에 고요함을 즐기어 부지런히 정진을 행한 까닭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악업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 없으니, 성품이 10선(善)을 행하는 까닭이요,
보살마하살은 파계하여 축생에 떨어지는 일이 없으니, 성품이 계를 지키기 때문이니라.
보살마하살은 질투로 아귀에 떨어지는 일이 없고 삿된 견해가 있는 집안에 태어나지 않고 항상 선지식을 만난다.
무슨 까닭인가? 이미 과거 무수한 부처님 처소에서 깊이 선근을 심었기 때문이니라.
이런 까닭에 태어나는 곳마다 다 견해가 바르다.
보살은 모든 근(根)이 성불(成佛)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법의 그릇[法器]으로 태어나는 것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과거세에 여러 부처님께 공양하고 정법을 듣던 대중을 예로써 공경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몸[根]의 용모가 단정하고 원만해져 성불의 법기를 갖추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보살은 변방에서 태어나지 않고, 근기가 둔하여 어리석거나 선악을 알지 못하고 말과 뜻이 부처님 법의 그릇이 되지 못하며 사문과 바라문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은 반드시 나라의 중심에 태어나서 근기가 날카롭고 지혜로우며 말이 통달하고[辯了] 말뜻을 잘 아니 이것이 부처님 법의 그릇으로 사문과 바라문을 잘 안다.
무슨 까닭인가? 보살마하살이 지난 세상에 닦은 지혜의 힘 때문이니라.
대왕이여, 보살은 수명이 긴 하늘[長壽天]에는 태어나지 않으니 모든 부처님을 보지도 못하고 중생을 이익하게 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니라.
보살이 욕계에 태어나는 까닭은 세상에 출현하여 중생을 이익하게 함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것이 선교방편이기 때문이니라.
대왕이여, 보살은 허공의 세계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나니, 이곳은 부처님이 없고 정법을 듣지 못하고 승가에 공양하지 못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이 태어나는 곳은 반드시 삼보를 구족하며, 숙원(宿願)이 강하기에 보살이 만약 악한 세상이란 이름을 들으면 곧 싫어하여 여의고, 고요함을 닦아 게으르지 않으며 모든 선으로 온갖 악한 법을 멸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면 이 인연으로 험난한 곳에 태어나지 생기지 않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나아가 꿈 속에라도 보리의 마음을 잃지 않는데, 하물며 다시 깨어 있을 때이겠는가?
무슨 까닭인가? 모든 보살이 이러한 마음을 낸다는 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만약 이 마음이 없다면 부처님이 없고, 부처님이 없다면 법이 없으며, 법이 없다면 승가도 없는 것이다. 이 마음으로 말미암아 삼보와 하늘과 사람이 있는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은 항상 아첨과 왜곡됨을 여의고 수수하고 정직하고 유순하고 온화하며,
그 마음이 청정하여 부처님의 법을 의심하지 아니하며,
듣고자 하는 이에게 깊은 뜻을 숨기지 않으며,
법의 질투를 여의고 3도(塗:三惡塗)의 업을 멀리하며,
처음과 중간과 끝에도 다른 모습이 없으며,
행동이 말과 어긋나지 않고 대승을 보호하고 지키며,
같이 배우는 자를 보면 공경함이 생기고 남을 권하여 닦게 하고 대승을 찬탄하며,
설법하는 스승을 항상 부처님같이 생각하고 선지식을 가까이하며 악한 벗을 멀리 여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이와 같이 보리심을 성취하여 이 마음으로 말미암아 숙명(宿命)의 지혜를 얻는다.
무슨 까닭인가? 이미 일찍이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였고,
정법을 보호하고 지녀서 청정한 계를 닦았으며,
악업을 멀리 여의어 장애가 영원히 없어졌으며,
마음이 항상 환희하고 마음으로 부지런히 배우고 닦았으며,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마음의 지혜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대왕이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일찍이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였다면 정법을 존중하니,
법을 존중함으로 말미암아 널리 사람을 위하여 설법하고,
정법을 보호하기 위하여 신명을 아끼지 않으며,
몸ㆍ입ㆍ뜻의 세 가지 업이 청정하고 업이 청정하므로 장애를 여의며,
장애를 여읜 까닭에 마음이 항상 기쁘며,
마음이 기쁜 까닭에 부지런히 정진하여 심성이 정직하고 생각과 지혜를 구족하며,
생각과 지혜[念智]로 말미암아 과거의 일ㆍ십ㆍ백ㆍ천에서 나아가 무수한 생에 이르기까지를 아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와 같이 과거에 태어난 곳을 깨달아 알고 이미 과거의 생[宿命]을 알면 선지식을 가까이하고,
선지식으로 말미암아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세 가지 일을 잃지 않으니,
말하자면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다.
항상 정법을 듣고 승보(僧寶)를 공양하여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과 보살을 항상 공경하고 예배하고 존중하며,
가거나 멈추거나 앉거나 눕거나 간에 많이 듣는 것을 여의지 않느니라.
대왕이여, 청정한 계를 가진 자는 귀[耳根]로 항상 반야바라밀의 이름을 듣고 부지런히 도를 돕는 법[助道法]을 닦고 익혀서 일찍이 3해탈문(解脫門)을 멀리 여의지 않고, 4무량심을 닦으며 항상 살바야(薩婆若:一切智)의 이름을 듣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런 인연으로 선지식을 가까이하게 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마침내는 꿈 속에라도 악한 벗을 가까이 하지 않는데, 하물며 깨어 있을 때이겠는가?
왜냐 하면 보살마하살은 파계하는 사람과는 함께 머물지 않으며, 사견의 사람ㆍ위의가 없는 사람ㆍ삿된 행을 하는 사람[邪命人]ㆍ이익됨이 없는 말을 하는 사람ㆍ게으른 사람ㆍ생사에 머무름을 즐겨하는 사람ㆍ보리를 저버린 사람ㆍ세상일을 즐겨하는 사람 등과 같이 머물지 않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이 같은 법을 행하여 악지식(惡知識)을 여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여래의 청정한 몸을 얻나니,
말하자면 평등한 몸ㆍ청정한 몸ㆍ다함이 없는 몸ㆍ잘 닦아 얻는 몸ㆍ법의 몸ㆍ깨달아 알 수 없는 몸ㆍ불가사의한 몸ㆍ고요한 몸ㆍ허공과 같은 몸ㆍ지혜의 몸이니라.”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어떤 지위[位]에서 여래의 열 가지 몸을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초지(初地)에서 평등한 몸[平等身]을 얻으니,
왜냐하면 모든 삿되고 왜곡됨을 여의고 법성을 통달하여 평등함을 본 까닭이요,
제2지(第二地)에서 청정한 몸[淸淨身]을 얻으니, 왜냐하면 계행이 청정한 까닭이다.
제3지에 머물러서 다함이 없는 몸[無盡身]을 얻으니, 왜냐하면 성냄을 여읜 까닭이요,
제4지에서 잘 닦는 몸[善修身]을 얻으니, 왜냐하면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여 부처님 법을 닦는 까닭이다.
제5지에 머물러서 법의 몸[法身]을 얻으니, 왜냐하면 모든 진리[諦理]를 보는 까닭이요,
제6지에 머물러 각관을 여읜 몸[離覺觀身]을 얻으니, 왜냐하면 인연의 이치는 감각과 감관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제7지에 머물러 불가사의한 몸[不思議身]을 얻으니, 왜냐하면 방편을 구족한 까닭이요,
제8지에서는 고요한 몸[寂靜身]을 얻으니, 왜냐하면 일체의 희론을 여의어 번뇌가 없는 까닭이다.
제9지에 머물러 허공과 같은 몸[等虛空身]을 얻으니, 왜냐하면 몸의 모습을 일체처에 두루 하여 헤아릴 수 없는 까닭이요,
제10지에 머물러 곧 지혜의 몸[智身]을 얻으니, 왜냐하면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하는 까닭이니라.”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여래의 몸과 보살의 몸은 차별이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몸은 차별이 없고 다만 공덕이 다를 뿐이니라.”
승천왕이 아뢰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대왕이여, 부처님과 보살의 몸은 차별이 없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은 성품과 모양이 동일하나 공덕이 차별이 있기 때문이니라.”
“세존이시여, 무엇을 공덕의 차별이 있다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마땅히 왕을 위하여 비유로 밝히겠다.
비유하면 보배구슬과 같아서 혹 장식을 하거나 장식하지 않거나 그 구슬이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와 같이 부처님과 보살의 공덕에는 차별이 있어도 몸은 다름이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여래의 공덕은 모든 것에 원만하여 시방을 다하며 중생계를 두루 청정하게 하며, 번뇌를 여의고 장애도 영원히 없앤다.
그러나 보살의 몸은 공덕이 아직 원만하지 못하여 장애가 있는 까닭이니라.
비유하면 초승달과 보름달은 달이 차고 기울어짐이 다르나 달의 성품은 차이가 없는 것과 같으니라.
이들 모든 몸은 다 견고하여 마치 금강석과 같아 파괴하지 못한다.
왜냐 하면 3독(毒)도 깨뜨리지 못하고 세상법에도 물들지 않으며, 악취와 인간세상의 고통으로도 괴롭히지 못하고, 이미 생로병사를 멀리 여의었으며, 외도를 항복받고 마(魔)의 경계를 벗어났으며, 성문과 벽지불승을 향하지 아니한다.
이런 인연으로 능히 파괴하지 못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일체 세간의 하늘ㆍ사람ㆍ아수라를 잘 인도하나니,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길 안내를 잘한다면 국왕 등이나 장자와 거사가 필요할 때 모두 그를 쓰고자[用] 할 것이다.
보살도 그러하여 성문ㆍ연각ㆍ보살ㆍ모든 부처님이 다 같이 길 안내자로 삼을 것이니라.
또한 길 안내를 잘하는 자를 세간의 국왕ㆍ바라문ㆍ장자ㆍ거사가 다 같이 존중하는 것과 같이,
보살도 그러하여 하늘ㆍ용ㆍ야차ㆍ배우는[學] 이ㆍ다 배운[無學] 이가 공양하게 되는 것이니라.
또한 험난한 광야에서 두려움에 떨며 피로에 지친 나그네가 훌륭한 안내자를 만나면 편안하듯이,
보살도 그러하여 방편의 힘으로 생사번뇌의 어려운 도적에게서 중생을 잘 인도하여 편안하게 건져내줄 것이니라.
또한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장자에 의지하여 험난함을 벗어나듯이,
범지(梵志:바라문)와 니건(尼乾:고행외도) 및 다른 외도는 생사의 가운데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에 의지하여 곧 생사를 벗어나게 된다.
또한 큰 부자인 장자가 한량없는 재물로 모든 사람을 수용하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도 이와 같아, 생사 가운데에 있는 6도 중생을 다 수용하는 것이니라.
또한 큰 부자인 장자가 험난한 곳을 지나가고자 하면 반드시 많은 동반자가 필요하고 음식ㆍ노자ㆍ양식을 다 갖추어야 지나갈 수 있듯이,
보살도 그러하여 세간을 벗어나고자 하면 공덕의 지혜로써 모든 중생을 거두어서 생사의 어려움을 건너 살바야에 이르게 하는 것이니라.
또 사람이 멀리까지 가서 많은 보배로운 것을 가져오는 것은 이익을 얻기 위한 까닭이니라.
보살도 그러하여 생사의 바다에서 살바야에 이름[至]에 널리 공덕의 지혜를 닦으니, 이것은 일체지를 얻기 위한 까닭이니라.
또 세상 사람이 재물을 구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듯이,
보살이 법을 좋아하는 것도 싫어함이 없느니라.
또 지도자[將導]가 네 가지 일이 남보다 뛰어난 것처럼, 말하자면 재부(財富)가 가장 으뜸이고 지위가 높고 말솜씨가 있으며 능력이 있다.
보살도 그러하여 공덕이 넉넉하고 지위가 가장 높으며, 법이 자재롭고 말과 행동이 다름이 없다.
또 길을 잘 인도하는 사람이 이윽고 큰 성에 이르게 함과 같이,
보살도 잘 인도하여 살바야에 이르게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갈 수 있는 길ㆍ가지 못할 길ㆍ삿되거나 바르고 편안하고 고르며,
물이 있거나 없거나 굽거나 곧은 모양을 잘 알고 생사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두 통달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전도되지 않은 길을 아니 무릇 중생을 이끌어 주는 데 있어서 그 근기에 어긋나지 않는다.
즉 대승의 사람을 위하여 무상도(無上道)를 보이고 성문과 벽지불의 길을 말하지 않으며,
소승의 사람을 위하여 성문의 길을 보이고 대승은 말하지 않으며,
벽지불의 근기에는 연각(緣覺)의 길을 보이고 살바야의 길을 말하지 않으며,
‘나’란 견해에 집착한 사람에게는 무아의 길을 말하고,
법에 집착한 중생에게는 공의 길[空道]을 말하며,
두 가지 극단에 집착한 자에게는 중도를 말하고,
산란한 자에게는 사마타(奢摩他:止)와 비파사나(毘婆舍那:觀)를 말하면서 산란함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으며,
희론을 좋아하는 중생에게는 여여한 도[如如道]를 보이되 언어로써 말을 하지 않으며,
만약 생사에 집착한 자에게는 열반의 도를 보이고 세간의 말을 하지 않으며,
길을 잃은 자에게는 바른 길을 설하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이러한 것을 삿된 길과 바른 길을 안다고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