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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무상의경 상권
3. 보리품(菩提品)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어떤 것이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가?
모든 부처님 바가바는 샘이 없는[無漏:煩惱가 없음] 경계에 있고 모든 장애를 길이 다하였고 전(轉)과 의(依)가 적정하고 밝고 맑다.
이 위없는 보리는 열 가지 갈래와 상응한다.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엇들을 열 가지라고 하는가?
하나는 자성이며,
둘은 인연이며,
셋은 의혹의 장애이며,
넷은 지과(至果)이며,
다섯은 불사(佛事)를 지음이며,
여섯은 서로 거두는 것이며,
일곱은 행하는 것이며,
여덟은 항상 머무르는 것이며,
아홉은 함께하지 아니함이며,
열은 사유하지 않아야 함이다.
[보리의 자성]
아난아, 무엇을 이름하여 보리의 자성이라 하는가?
10지(地)와 10바라밀로 도리와 같고 사랑함과 같게 출리의 도를 닦아 얻는 바 전(轉)과 의(依)는 적정하고 밝고 깨끗하여 성문과 연각은 그 경계가 아니다.
이를 이름하여 곧 보리의 자성이라고 한다.
[여래장과 전의의 법]
아난아, 이 경계가 아직 번뇌의 껍질을 없애지 못한 것을 나는 설하여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하며,
지극히 청정한 것을 이를 전의의 법이라고 이름한다.
네 가지 상이 있다.
하나는 생하고 일어나는 반연인 까닭이며,
둘은 멸하고 다하는 반연인 까닭이며,
셋은 아는 바 법과(法果)를 바르게 익혀 사량하기 때문이며,
넷은 가장 청정한 법계의 체(體)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생하고 일어나는 반연이라고 이름하는가?
일체의 세상을 떠나서 여래를 상속하는 것, 이것이 보리의 도가 생하고 일어나는 반연의 곳이다.
무엇을 멸하고 다하는 반연이라고 이름하는가?
3품(品)의 번뇌의 근본 종류인 이 법에 의지하고 인하여 길이 멸하고 다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는 바 법과(法果)인가?
이미 바르게 아는 바인 진여에 통달하여 과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법계의 체라고 이름하는가?
모든 상(相)의 결박을 없애고, 가장 깨끗한 법계가 나타나는 바이기 때문이다.
아난아, 이것이 전의(轉依)의 상이다.
이 전의는 곧 부처님 바가바의 위없는 보리이기 때문에 보리의 성품이라고 이름한다.
[보리를 얻는 인을 짓는 법 네 가지]
아난아, 네 가지 법이 있어 위없는 보리를 얻는 인(因)의 지음이 된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하나는 마하연(摩訶衍)의 법을 원하여 즐겨 닦는 것이다.
둘은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다.
셋은 허공의 삼매문(三昧門)을 깨뜨리는 것이다.
넷은 여래의 대비를 닦는 것이다.
[보리의 과를 장애하는 미혹 네 가지]
아난아, 네 가지 미혹이 있어 보리의 과(果)를 장애한다.
무엇을 넷이라 하는가?
하나는 대승의 법을 버리고 어기는 것이다.
둘은 아견에 집착하는 삿됨이다.
셋은 생사의 괴로움을 두려워함이다.
넷은 다른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행하지 않음이다.
[보리의 위없는 승과 네 가지]
아난아, 네 가지 보리의 위없는 승과(勝果)가 있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하나는 가장 깨끗함이며,
둘은 진아(眞我)이며,
셋은 묘락(妙樂)이며,
넷은 항상 머무름이다.
이때 아난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기를 마치고 무리가 모인 가운데서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벗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몸을 굽혀 공경하고 부처님 발에 정례(頂禮)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서 게송을 설하며 말하였다.
깊고 깊은 도리를 능히 설하고 능히 설하며
길이 유류를 건너 물러서지 아니하고
이미 원결(怨結)의 모든 두려움을 지났습니다.
때문에 저는 머리 조아려 구담(瞿曇)을 향하여 묻습니다.
어떠한 법이 곧 보리의 인(因)이옵니까.
무엇을 이름해 장애라 하고, 과(果)라고 이름합니까.
오직 바라오니 자선(慈善)의 대비존(大悲尊)이시여
저희들 가엾게 여기시어 분별하여 설하여 주십시오.
이때 세존께서는 불러 말씀하셨다.
“착하도다. 아난아, 능히 여래에게 깊고 깊은 큰 뜻을 물었다.
너는 많은 중생의 이익을 행하고자 하는 까닭이며, 사람과 하늘로 하여금 도를 얻어 안락하게 하고자 하기 위함이니, 너는 지금 자세히 듣고 지극한 마음으로 우러러 공경하고 믿고 받아라.”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바라옵건대 즐겨 듣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3종의 중생]
“세간 중에는 3품(品)의 중생이 있다.
하나는 집착이 있는 것이며,
둘은 집착이 없음이며,
셋은 유무(有無)에 집착하지 않음이다.
[집착이 있음 두 가지]
집착이 있음에는 또 두 가지가 있다.
하나의 열반의 도를 배반하여 열반의 성품이 없고 열반을 구하지 않고 생사를 원하고 즐긴다.
둘은 나의 법 중에서 우러러 갈구함을 내지 아니하여 대승을 비방하는 것이다.
아난아, 이들 중생은 부처의 제자가 아니다.
부처님은 큰 스승이 아니며, 귀의(歸依)할 곳이 아닌 이와 같은 사람들은 이미 어리석고 눈이 어두운 곳에 머물러 있어 반드시 험하고 두려운 큰 어둠 속에 떨어진다.
광야(曠野)의 땅에서 다시 검고 더러운 가시나무가 빽빽한 숲에 들고, 생사의 결박으로써 뒤의 경계를 짓고 천제(闡提)의 그물에 떨어져 스스로는 나오지 못한다.
[집착이 없음 두 가지]
집착을 끊어 없앤 자에게도 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행에 방편이 없는 것이고,
둘은 행에 방편이 있는 것이다.
[행에 방편이 없는 두 사람, 외도와 아견에 집착하는 이]
행에 방편이 없는 것에는 또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불법 밖에 아흔여섯 가지의 배움이 다른 외도가 있고, 지라가파육파(支羅歌波育婆) 등과 같다.
둘은 불법 중에 있으면서 능히 믿는 마음이 생하여도 굳게 아견(我見)에 집착하여 바른 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이 사람까지를 저 외도와 같다고 설한다.
[증상만, 공의 견해와 유뮤의 견해]
또 증상만(增上慢)의 사람이 있다.
불법 중에 있으면서 공을 관하고, 유무(有無)의 견해를 낸다.
이 진실로 공한 자는 위없는 보리에게로 곧바로 향하는 하나의 도인 깨끗한 해탈문(解脫門)으로서 여래는 밝고 뚜렷하게 열어 보이고 바르게 설한다.
그 중에서 공의 견해를 내는 것을 나는 고칠 수 없다고 설한다.
아난아, 만약 사람이 있어 아견(我見)에 집착함이 수미산의 크기와 같아도 나는 놀라지 않으며, 또 꾸짖지 않는다.
증상만의 사람이 공의 견해에 집착함에 하나의 머리털을 열여섯으로 나눈 것과 같다 하여도 나는 허가하지 않는다.
[방편이 있는 두 사람, 성문승과 연각승]
행에 방편이 있는 것에도 또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성문승(聲聞乘)으로 오직 자기의 이익만을 닦으며, 남을 이익되게 하지 못한다.
둘은 연각승(緣覺乘)으로 조금은 능히 남을 이롭게 하지만 작은 일에 머물러 조금 얻으면 만족하다고 말한다.
[유무(有無)에 집착하지 않는 자]
유무(有無)에 집착하지 않는 자는 최상의 이근(利根)으로서 대승을 수행한다.
이 사람은 생사에 집착하지 않음이 천제(闡提)와 같지 아니하며, 행에 방편이 없음도 외도와 같지 않으며, 행에 방편이 있음이 2승과 같지 않다.
어떻게 행하는가?
생사와 열반계(涅槃界)가 평등하고 일상(一相)임을 관하여 바른 도를 얻어 그 마음을 안정함에 이르고,
머무름이 없는 곳인 청정한 열반에 머물러 생사에 유행(遊行)하여도 오염되지 않으며,
대비심(大悲心)을 닦아 이를 근본을 삼고 뜻과 힘은 높고 굳세어 굳게 움직이지 않음에 머문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천제와 사정취, 부정취, 정정취]
“아난아, 만약 세 가지 존재에 탐착하고 대승을 비방하면 일천제(一闡提)라고 이름하며, 사정취(邪定聚)에 떨어진다.
만약 사람이 무(無)에 집착하여 행에 방편이 없으면 부정취(不定聚)에 떨어진다.
또 무(無)에 집착하여 행에 방편이 있는 것도 있다.
유(有)와 무(無)에 집착하지 않고 평등한 도를 행하는 것을 정정취(正定聚)라고 이름한다.
[일천제와 외도, 성문, 연각의 장애]
아난아, 유(有)와 무(無)에 집착하지 않고 평등함을 수행하는, 오직 이 사람을 제외하고서, 다른 네 사람이 있다.
하나는 일천제이며, 둘은 외도이며, 셋은 성문이며, 넷은 연각이다.
네 가지 미혹의 장애가 있어 여래의 법신(法身)과 위없는 보리를 증득하지 못한다.
무엇을 넷이라고 하는가?
대승을 버리는 것은, 이는 천제(闡提)의 장애이다.
이 장애를 없애기 위하여 나는 보살의 수행을 믿고 즐기는 대승의 참다운 법을 설한다.
모든 곳에 있어서 아견(我見)에 집착함은 이 외도의 장애이다.
이 장애를 없애기 위하여 나는 보살의 수행인 반야바라밀의 법을 설한다.
생사(生死) 중에서 싫어하고 두려워하며 피곤한 것은 이는 성문(聲聞)의 장애이다.
이 장애를 없애기 위하여 나는 허공삼매문(虛空三昧門)을 깨뜨리는 것을 설한다.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등지고 작은 일로 만족한다 함은 이는 연각(緣覺)의 장애이다.
이 장애를 없애기 위하여 나는 보살의 수행인 대비(大悲)를 설한다.
이 네 가지 사람에게는 네 가지 미혹(迷惑)이 있다.
이 미혹함을 없애기 위해 네 가지 거룩한 도를 설한다.
이 뛰어난 도로 인하여 4전도(顚倒)를 고치고, 능히 여래의 위없는 가장 오묘한 법신의 네 가지 덕(德)의 바라밀의 과(果)를 증득하게 한다.
[전도된 견해]
아난아, 색(色) 등의 모든 법은 남김없이 모두가 무상함에도 항상하다는 생각을 낸다.
모든 법은 모두가 괴로운 것임에도 즐겁다는 생각을 낸다.
모든 법은 나[我]가 없음에도 나라는 생각을 낸다.
모든 법은 부정함에도 깨끗하다는 생각을 낸다.
이것을 전도라고 이름한다.
색(色) 등은 곧 무상(無常)이며, 괴로움이며, 무아(無我)이며, 부정(不淨)이라고 관하면 전도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이 전도가 아닌 것을 가져, 만약 여래의 묘덕법신(妙德法身)을 관하면 곧 전도를 이룬다.
이 전도를 다스리기 위하여 나는 여래의 법신의 네 가지 덕을 설한다.
무엇을 넷이라 하는가?
하나는 상주바라밀(常住波羅蜜)이며,
둘은 안락바라밀(安樂波羅蜜)이며,
셋은 진아바라밀(眞我波羅蜜)이며,
넷은 청정바라밀(淸淨波羅密)이다.
아난아, 일체의 법부는 안으로 5음(陰)을 집착하여 전도된 견해를 일으켜,
무상(無常)함 중에 있어서 항상하다는 견해를 낳고,
내가 없는 중에서 내가 있다는 견해를 낳고,
깨끗하지 않음 중에서 깨끗하다는 견해를 낳는다.
아난아, 여래의 법신은 곧 일체종지(一切種智)의 경계이기 때문에,
성문과 연각은 여래의 법신을 관찰하지 못하고, 전도된 수행을 뽑아 끊지를 못한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여래의 법신은 가장 뛰어나고 항상 머무는 것이라고 마땅히 닦아 익혀야 함에도 항상 머무는[常住] 닦음을 등지고 무상(無常)의 수행에 머문다.
여래의 법신은 가장 으뜸이며, 오묘한 즐거움의 수행을 등지고 괴로움의 수행에 머문다.
여래의 법신은 가장 뛰어난 참다운 나[眞我]의 수행에 머문다.
여래의 법신은 가장 뛰어난 청정이라고 마땅히 수습해야 함에도 청정한 수행을 등지고 청정하지 않는 수행에 머문다.
이로 인하여 전도된 수행은 성문과 연각이 머무는 도(道)로서, 이 여래 법신의 네 가지 덕의 길이 이르는 곳이 아니다.
이 까닭에 법신의 항상하고 즐겁고 참다운 나이며, 청정함은 그 경계가 아니다.
[바른 견해]
아난아, 만약 중생이 있어서 여래의 말을 믿고,
능히 법신의 항상함과 즐거움과 참다운 나임과 청정함을 보면,
이 중생은 전도의 마음이 없어서 참되고 바른 견해를 낳는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전도의 수행은 성문과 연각이 머무는 도로써 이 여래 법신의 네 가지 덕의 길이 이르는 곳이 아니며,
이 까닭에 법신의 항상하고 즐겁고 참다운 나이며 청정함은 그 경계가 아니다.
아난아, 만약 중생이 있어서 여래의 말을 믿고,
능히 법신의 항상함과 즐거움과 참된 나임과 청정함을 보면,
이 중생은 전도의 마음이 없어서 참되고 바른 견해를 낳는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아난아, 여래의 법신은 곧 참으로 항상하고 즐겁게 참된 나이며 청정한 바라밀(波羅蜜)이다.
만약 중생이 있어 뛰어나고 오묘한 도로 인하여 여래의 몸을 관하면,
이들 중생은 밝음[明]으로부터 밝음[明]으로 들어가고 안온한 곳으로부터 뛰어난 즐거움의 곳에 이른다.
이는 부처의 참된 아들로서 부처가 마음으로 사랑하고 생각하며,
부처의 입으로부터 나와서 부처를 성취함을 얻고 법으로부터 화생(化生)함을 얻어 법재(法財)의 분을 얻는다.
아난아, 일천제(一闡提)인 사람은 바른 법을 버리고 등지고서 생사의 더러운 냄새를 깊은 마음으로 탐하고 즐긴다.
이 미혹(迷惑)을 없애기 위하여 나는 대승을 수행하고, 바라고 즐김을 설하며, 이 법에 의지하고 인하여 가장 청정한 열매를 얻게 한다.
아난아, 일체의 외도는 아견(我見)을 삿되게 집착하여 취하고 탐착함을 낸다.
색(色)이 없고 다툼이 없는 까닭에, 3세(世)의 부처님은 일체의 곳에 미치고, 나는 설하여 곧 참된 나라고 이름한다.
이 모든 외도는 안으로 5음(陰)을 집착하여 아견(我見)을 일으켜 마음이 평안하고 쾌락한다.
이 미혹을 깨뜨리기 위하여 이 까닭에 나는 반야바라밀을 수습할 것을 설하며, 이 법에 의지하고 인하여 참된 나의 열매를 얻게 한다.
아난아, 성문의 사람은 생사를 두려워하고 괴로움이 없어지는 곳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낸다.
이 집착을 없애기 위하여 나는 허공삼매문(虛空三昧門)을 깨뜨리는 것을 수습함을 설하며,
이 법에 의지하고 인하여 세간과 출세간의 분을 구족한 즐거움의 바라밀의 열매를 얻게 한다.
아난아, 연각의 사람은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관찰하지 못하여 모든 중생과 화합하여 머물지 못한다.
홀로 있어 사유함으로써 마음이 편안하고 쾌락한다.
이 집착을 없애기 위하여 나는 보살의 대비를 수습함을 설하여 이 법에 의지하고 인하여, 항상 시방에 두루하여 모든 중생을 위하여 이익된 일을 짓고자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에 항상 머무르는 바라밀의 열매를 얻게 한다.
아난아, 이 네 가지 덕에 의하여 일체의 여래는 실로 법계(法界)를 헤아리며,
유(有)와 무(無)에 집착하지 않음이 큰 허공과 같으며,
공계(空界)의 가장 구경을 닦아서 3제(際)를 지나 길이 안주한다.
[아라한과 벽지불과 대지(大地)의 보살의 장애]
아난아, 일체의 은 네 가지 장애 때문에 여래의 법신의 네 가지 덕의 바라밀을 얻지 못한다.
무엇을 넷이라 하는가?
하나는 낳는 연(緣)의 미혹이며,
둘은 낳는 인(因)의 미혹이며,
셋은 유(有)가 있음이며,
넷은 무(無)가 있는 것이다.
무엇이 낳는 연(緣)의 미혹인가?
곧 이는 무명이 머무는 땅이다.
일체의 행을 낳는 것이 무명의 업을 낳음과 같다.
무엇을 낳는 인(因)의 미혹이라고 하는가?
이는 무명이 머무는 땅이 낳는 바인 모든 행이다.
비유컨대 무명이 낳는 바인 모든 업과 같다.
무엇이 유(有)의 있음인가?
무명이 머무는 땅을 연(緣)으로 하고 무명이 머문 땅에서 일어나는 바인 샘이 없는[無漏] 행을 인(因)으로 하는 세 가지 뜻을 낳는 몸[意生身]이다.
비유컨대 네 가지 취함[四取]을 연으로 하고, 세 가지 샘이 있는 업을 인으로 하여 세 가지 유(有)를 일으킴과 같다.
무엇이 무(無)의 있음인가?
세 가지 뜻을 낳는 몸을 연(緣)한, 깨달아 알 수 없는 미세한 멸에 떨어지는 것이다.
비유컨대 세 가지 유로 연하여 그 중에서 생각생각에 노사를 낳음과 같다.
무명이 머무는 땅, 이는 일체의 번뇌가 의지하는 곳으로 아직 끊어 없애지 못하는 까닭에 모든 아라한과 그리고 벽지불과 자재한 보살은 번뇌의 때, 습기의 더러운 냄새가 멸하고 다한 구경의 크게 깨끗한 바라밀을 지극하게 봄을 얻지 못한다.
무명이 머무는 땅을 인하여 경상의 미혹을 낳고 허망한 행이 있어 아직 없애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음이 없고, 행함이 없는 지극히 적멸한 대아(大我)의 바라밀을 지극히 봄을 얻지 못한다.
무명이 머무는 땅을 연으로 하고, 미세한 허망함이 일어나는 샘이 없는 업을 인으로 하여 뜻이 낳는 모든 쌓임[陰]이 아직 다하여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극히 적멸하여 멀리 떠난 큰 즐거움의 바라밀을 지극히 봄을 얻지 못한다.
만약 이 모든 여래의 감로계인, 일체 번뇌의 모든 업의 생난(生難)을 길이 다하고 남음이 없음을 얻지 못하면, 곧 변하기 쉬운 죽음과 흐름이 끊어져 멸함이 무량하여, 변하고 다름이 지극히 없는 크게 항상하는 바라밀을 지극히 봄을 얻지 못한다.
[삼계의 네 가지 난]
아난아, 삼계(三界) 중에 네 가지 난이 있다.
하나는 번뇌의 난이며,
둘은 업의 난이며,
셋은 생보의 난이며,
넷은 과실의 난이다.
무명이 머무는 땅이 일으키는 바인 방편의 생사는 삼계 안의 번뇌의 난과 같다.
무명이 머무는 땅이 일으키는 바인 인연의 생사는 삼계 안의 업의 난과 같다.
무명이 머무는 땅이 일으키는 바인 유가 있는 생사는 삼계 안의 생난(生難)과 같다.
무명이 머무는 땅이 일으키는 바인 무(無)가 있는 생사는 삼계 안의 과실의 난과 같다.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아난아, 네 가지 생사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세 가지 뜻을 낳는 몸에는 항상하고 즐거우며 나이며 깨끗한 바라밀이 없다.
오직 부처님의 법신만이 이 항상하고 즐거우며 나이며 깨끗한 바라밀임을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바라밀]
아난아, 여래의 법신의 크게 깨끗한 바라밀에는 마땅히 두 가지가 있음을 알라.
자성(自性)의 청정함은 곧 그의 통하는 상이며,
때가 없는 청정함은 곧 그의 다른 상이다.
큰 나[我]인 바라밀에는 마땅히 두 가지가 있음을 알라.
일체 외도의 삿된 집착을 멀리 떠난다.
항상하는 내가 있다고 하는 견해의 허망함을 지나 나왔기 때문이다.
2승(乘)의 이치를 헤아리는 잘못된 집착을 멀리 떠난다.
항상하는 내가 없다고 하는 허망함을 지나 나왔기 때문이다.
큰 즐거움의 바라밀에는 마땅히 두 가지가 있음을 알라.
괴로움이 모이는 근본을 끊고 습기의 얽매임을 푼다.
즉 능히 일체의 괴로움이 멸하는 것을 증득하여 뜻을 낳는 모든 쌓임[陰]을 뽑아 없애어 다하는 까닭이다.
크게 항상하는 바라밀에는 두 가지가 있음을 마땅히 알라.
이미 무상(無常)한 모든 행을 훼손하고 줄이지 않아 단견(斷見)을 지나 나왔기 때문이다.
또 항상 머무는 열반을 더하고 불리지 않는다. 상견(常見)을 지나 나왔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행의 무상함을 헤아리면 이를 단견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열반이 항상 머무는 것을 헤아리면 이를 상견이라고 이름한다.
네 가지 미혹의 장애를 다스리고 4전도(顚倒)를 되돌리면 항상함과 즐거움과 나임과 깨끗함을 그 참다운 열매라 한다.
[보리를 이익되게 하는 일]
아난아, 무엇이 이 보리(菩提)를 이익되게 하는 일인가?
두 가지 일이 있다.
하나는 분별이 없는 지혜이며,
둘은 분별함이 없는 다음의 지혜[後智]이다.
이 두 가지 지혜에는 두 가지 일이 있다.
하나는 스스로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이며,
둘은 남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이다.
무엇이 스스로의 이익인가?
해탈신(解脫身)을 원만하게 하여 깨끗한 법신을 지니고, 번뇌의 장애와 일체 지혜의 장애를 멸하는 것, 이를 스스로의 이익이라고 이름한다.
분별함이 없는 지혜는 능히 이 법을 이룬다.
무엇을 남의 이익이라고 하는가?
분별함이 없는 다음의 지혜로부터 나아가 생사의 경계를 다하기까지 사량(思量)을 짓지 않고 두 가지 몸을 나타내어 설법함이 그침이 없으며,
틈 사이가 없고 무량하여 3악도에 나고 죽는 괴로움을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일체 중생을 안정하게 하고자 하기 위하여 선도(善道)에 놓고 3승의 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
이를 남의 이익이라고 이름한다.
또 다음으로 스스로의 이익은 세 가지 공덕의 분과 서로 떠나지 않는다.
하나는 샘이 없음이며,
둘은 변만(遍滿)함이며,
셋은 무위(無爲)이다.
또 다음으로 남의 이익은 네 가지 공덕의 분(分)과 서로 떠나지 않고 중생을 뽑아 구제하여 네 곳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
하나는 망견(妄見)과 어리석음의 미(迷)한 의혹이며,
둘은 괴로움의 길과 악한 길에 떨어지는 길이며,
셋은 질투심과 원수를 맺는 마음으로써 바른 가르침을 깨뜨리는 것이며,
넷은 하열(下劣)한 마음으로써 소승을 탐하여 즐기는 것이다.
아난아, 이 두 가지 일인 자기의 이익과 남의 이익을 흥하게 하는 것이 이 보리의 일이다.
[보리가 상응하는 법]
아난아, 무엇을 보리가 상응(相應)하는 법이라고 이름하는가?
위없는 보리는 곧 진실의 상으로서 열아홉 가지 법은 그와 상응한다.
하나는 불가사량(不可思量)이며,
둘은 미세(微細)함이며,
셋은 진실이며,
넷은 매우 깊은 도리(道理)이며,
다섯은 불가견(不可見)이며,
여섯은 어려움을 통달함이며,
일곱은 항상함[常]이며,
여덟은 있음[在]이며,
아홉은 고요함[寂]이며,
열은 항상함[恒]이며,
열하나는 청량(淸凉)함이며,
열둘은 변만(遍滿)함이며,
열셋은 분별이 없음이며,
열넷은 집착[着]이 없음이며,
열다섯은 걸림[礙]이 없음이며,
열여섯은 수순(隨順)함이며,
열일곱은 집착[執]하지 아니함이며,
열여덟은 큰 깨끗함이며,
열아홉은 맑고 맑음이다.
이 열아홉의 법은 위없는 보리와 항상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 까닭에 보리가 상응하는 법이라고 이름한다.
[보리가 행하는 곳, 세 가지 몸]
아난아, 무엇이 이 보리가 행하는 곳인가?
세 가지 도리로써 세 가지 몸[三身]을 나타낸다.
하나는 매우 깊은 도리이며,
둘은 넓고 큰 도리이며,
셋은 만덕(萬德)의 도리이다.
[제1신]
아난아, 제1신(身)은 다섯 가지 상과 다섯 가지 공덕과 상응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 상인가?
하나는 무위(無爲)이며,
둘은 서로 떠나지 않음이며,
셋은 두 변(邊)을 떠남이며,
넷은 일체의 장애를 벗어남이며,
다섯은 자성이 청정함이다.
무엇이 다섯 가지 공덕인가?
하나는 헤아리지 못함이며,
둘은 셈하지 못함이며,
셋은 생각하기 어려움이며,
넷은 함께하지 않음이며,
다섯은 구경의 청정함이다.
[제2신]
제2신(身)은 법신이 맑게 흘러 나타나는 바,
일체의 무량한 여래의 공덕은 큰 반야(般若)와 대비를 체(體)로 하여 다섯 가지 공덕과 상응한다.
하나는 분별의 상이 없음이며,
둘은 공용의 마음이 없음이며,
셋은 중생의 뜻에 맞추어 이익을 지음이며,
넷은 법신과 서로 떠나지 않음이며,
다섯은 항상하고 반연하여 한 때라도 중생을 버리지 않음이다.
[제3신]
제3신(身)은 반야와 대비의 깨끗한 흐름이 나타내는 바인,
색종(色種)을 체로 하여 네 가지 공덕과 상응한다.
하나는 32상이며,
둘은 80종호이며,
셋은 위덕이며,
넷은 힘이다.
능히 모든 중생의 근기와 욕망과 성품과 행에 있어서 서로 거두고 서로 응하여 더러운 불토에서 여러 가지 본생사(本生事)를 나타낸다.
혹은 또 도솔천에 오르는 것을 나타내며,
혹은 또 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나타낸다.
혹은 또 신(神)을 어머니의 태에 내리는 것을 나타내며,
혹은 처음으로 태로부터 나는 것을 나타낸다.
혹은 구마라(俱摩羅)의 지위를 나타내고,
혹은 18명처(明處)를 배우는 것을 나타낸다.
혹은 여러 후원(後園)에서 희롱하며 노는 것을 나타내고,
혹은 출가(出家)함을 나타내고, 혹은 고행을 나타낸다.
혹은 도량을 찾고, 혹은 불도를 이루고, 혹은 파라나(波羅那)에서 오묘한 법륜을 굴리며,
혹은 견고림(堅固林)에서 열반에 드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일을 나타내어 나아가서는 생사의 다음 경계까지를 다한다.
아난아, 위없는 보리는 세 가지 몸을 거두어 다한다.
이 까닭에 이름하여 보리의 행하는 곳이라고 한다.
아난아, 무엇이 위없는 보리가 항상 머무는 법인가?
이 항상 머무는 것에는 두 가지 법이 있고, 때문에 인연을 짓는다.
하나는 나지 않고 멸하지 않음이며,
둘은 그침이 없고 다함이 없음이다.
이를 보리가 항상 머무는 법이라고 이름한다.
아난아, 무엇이 이 위없는 보리가 함께하지 않는 상(相)인가?
함께하지 않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알지를 못함이다.
모든 범부와 성문과 연각은 통달하지 못하며 그 경계가 아니다.
둘은 얻지 못함이다.
부처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으로 얻는 자가 없다.
이 함께하지 않는 법에 다섯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여여(如如)의 이치가 매우 깊은 까닭이며,
둘은 자재(自在)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때문이며,
셋은 청정하고 샘이 없는 경계가 거두는 바이기 때문이며,
넷은 모든 앎의 곳에 걸림이 없기 때문이며,
다섯은 중생의 이익된 일을 함이 원만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리의 함께하지 않는 상이라고 이름한다.
아난아, 무엇이 이 위없는 보리를 사유(思惟)하지 못함인가?
여섯 가지 인(因)이 있는 까닭에 사유하지 못한다.
하나는 언어(言語)를 지나친 경계이며,
둘은 제일의제(第一義諦)의 거두는 바이며,
셋은 이미 크고 작은 생각과 분별의 사유를 지났으며,
넷은 비유할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며,
다섯은 일체의 법에 있어서 가장 상품이기 때문이며,
여섯은 생사(生死)와 열반의 곳에서 안립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위없는 보리를 사유하지 못한다고 이름한다.
[보리의 불가사의]
아난아, 어찌하여 여래는 위없는 보리를 불가사의라 하는가?
아난아, 모든 여래가 위없는 보리의 곳에 머무름에는 다섯 가지 인연의 불가사의(不可思議)가 있다.
무엇을 다섯이라고 하는가?
하나는 자성(自性)이며,
둘은 곳[處]이며,
셋은 머무름[住]이며,
넷은 하나[同一]와 다름[異]이며,
다섯은 이익이다.
아난아, 어찌하여 여래는 보리의 자성이 불가사의하다 하는가?
색에 즉하여 이 여래는 얻지 못하며, 색을 떠나서도 이 여래는 얻지 못한다.
느낌(受)과 생각과 행과 알음알이도 또한 이와 같다.
땅의 경계에 즉하여 이 여래는 얻지 못하며, 땅의 경계를 떠나서도 이 여래는 얻지 못한다.
물과 불과 바람의 경계도 또한 이와 같다.
유의 법에 즉하여 이 여래는 얻지 못하며, 무의 법도 또한 이와 같다.
이를 보리의 성품이 불가사의하다고 이름한다.
아난아, 어찌하여 여래는 보리의 곳이 불가사의하다 하는가?
여래는 욕계(欲界)에 있으나 불가사의하며, 욕계를 떠나도 역시 불가사의하다.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도 또한 이와 같다.
여래는 사람 가운데 있으나 불가사의하며, 사람 가운데서 떠나도 또한 불가사의하다.
6도(道)도 또한 이와 같다.
여래는 동쪽에 있으나 불가사의하고 동쪽을 떠나도 역시 불가사의하다.
시방도 또한 이와 같다. 이를 이름하여 곳의 불가사의라고 한다.
아난아, 무엇으로 여래는 이 보리의 머무름은 불가사의하다 하는가?
아난아, 안락(安樂)한 머무름은 여래의 머무름의 불가사의이다.
적정한 머무름은 여래의 머무름의 불가사의이다.
마음이 있는 머무름은 여래의 머무름의 불가사의이다.
마음이 없는 머무름은 여래의 머무름의 불가사의이다.
이와 같이 범주(梵住)와 성주(聖住)는 여래의 머무름의 불가사의이다.
이를 머무름의 불가사의라고 이름한다.
아난아, 어찌하여 여래는 하나와 다름의 불가사의라 하는가?
3세(世)의 여래는 한 곳에 있으면서 머문다.
무엇이 한 곳인가?
자성이 청정한 샘이 없는 법계이다.
이것이 모든 여래의 혹은 하나이며, 혹은 다름의 불가사의이다.
이를 하나와 다름의 불가사의라고 이름한다.
아난아, 어찌하여 여래는 이익된 일의 불가사의라고 하는가?
이와 같은 여래는 한 법계에서 평등하고 지혜와 신통력과 바른 정근(精勤)과 위덕(威德)이 남김없이 모두 평등하여 샘이 없는 청정한 법계에 머문다.
모든 여래들은 이 구르고 의지함에 인하여 능히 중생에게 무량한 이익을 이룬다.
이를 이익의 불가사의라고 이름한다.
또 다음으로 불가사의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언설(言說)로 할 수 없음이다. 언어의 경계를 지나는 까닭이다.
둘은 일체의 세간을 나옴이다. 세간 중에서는 비할 것이 없는 까닭이다.
이를 불가사의라고 이름한다.
또 다음으로 진여(眞如)는 근본이 물들지 아니하며, 끝도 때 묻고 더럽혀짐이 없는 것이 불가사의이다.
아난아, 이를 보리의 불가사의라고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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