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바사론 제1권
1) 삼결처(三結處)
3결(結)은 신견(身見)과 계도(戒盜)와 의(疑)다.
[문] 3결에는 어떤 성질이 있는가?
[답] 신견은 삼계에 한 가지씩 있으므로 세 가지다.
계도는 삼계에 두 가지씩 있으므로 여섯 가지다.
의는 삼계에 네 가지씩 있으므로 열두 가지다.
이 스물한 가지가 3결의 성질이며, 이 3결의 성질은 이미 여러 모양의 몸에 있는 자연스런 것이다.
성품을 말하였으니, 행을 말하겠다.
[문] 어째서 결이라고 말하였으며, 결의 뜻은 무엇인가?
[답] ‘묶는다.’는 뜻이 ‘결’의 뜻이며, ‘고통에 매어 있다.’는 뜻이 ‘결’의 뜻이며, ‘잡다한 독’의 뜻이 ‘결’의 뜻이다.
‘묶는다는 뜻이 결의 뜻’이라는 것은, ‘묶는다.’는 것이 ‘결’이며, ‘결’이 ‘묶는다.’는 것이다.
[문] 어떻게 아는가?
[답] 계경에 있다. 저 계경에서,
“존자 사리불이 존자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현자 구치라여, 눈이 색(色)에 매어 있습니까, 색이 눈에 매어 있습니까?’
‘존자 사리불이여, 눈이 색에 매인 것이 아니며, 색이 눈에 매인 것이 아닙니다.
뜻[意]과 법(法)에 이르기까지도 뜻이 법에 매인 것이 아니며, 법이 뜻에 매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가운데 음란함이나 욕애(欲愛) 같은 것이 저기에 매인 것입니다.
존자 사리불이여, 비유하자면 두 마리 소가 있는데 하나는 검고 하나는 흰 소로서, 하나는 멍에에 하나는 가슴걸이에 매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존자 사리불이여, 만일 이와 같이 말한다면, 검은 소가 흰 소를 매고 있고 흰 소가 검은 소를 매고 있는 것입니다.
존자 사리불이여, 저것은 똑같이 말한 것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현자 구치라여.’
‘어째서 그렇습니까?’
‘현자 구치라여, 검은 소가 흰 소를 매고 있는 것이 아니며, 흰 소가 검은 소를 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멍에와 가슴걸이에 매여 있는 것이 그가 매이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존자 사리불이여, 눈이 색에 매인 것이 아니며, 색이 눈에 매인 것이 아니며, 뜻이 법에 이르러서도 뜻이 법에 매인 것이 아니며, 법이 뜻에 매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가운데 음란함과 욕애 같은 것이 저것을 얽매고 있는 것입니다.’[『잡아함』에 나옴]”라고 하였다.
이것을 ‘묶는다.’는 것이 ‘결’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고통에 매여 있다는 뜻이 결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욕계의 겉은 욕계의 중생이 욕계 중의 고통에 매인 것이고,
색계의 결은 색계의 중생이 색계 중의 고통에 매인 것이고,
무색계의 결은 무색계의 중생이 무색계 중의 고통에 매인 것이다.
모든 욕계의 결은 저것이 매여 있는 모양이니, 고통 가운데 매여 즐거움이 아닌 것이다.
모든 색ㆍ무색계의 결은 저것이 매여 있는 모양이니, 고통 가운데 매여 즐거움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고통에 매여 있다는 뜻이 결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잡다한 독의 뜻이 결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매우 오묘한 생처(生處)와 세속의 정수(正受)는 해탈과 같아서,
모든 것에 들어가고 저 성스러운 곳에 들어가는 것을 제거하고 번뇌의 잡다한 독을 맺음을 제거하는 것이니,
이는 마치 매우 오묘한 음식에 들어 있는 잡다한 독과 같아서, 지혜로운 자는 잡다한 독을 제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매우 묘한 생처와 세속의 정수에서 저 성인이 번뇌의 잡다한 독을 제거할 수 있다.
이것이 ‘매여 있다.’의 뜻이 ‘묶여 있다.’의 뜻이며,
‘고통에 매인다.’의 뜻이 ‘견’의 뜻이며,
‘잡다한 독’의 뜻이 ‘켠’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계경에서,
“3결이 없어지면 수다원(須陀洹)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문] 아비담에서는 여든여덟 가지의 견도에서 끊는 번뇌[見所斷]가 없어지면 수다원이라고 하였으니 화지(華池)의 비유와 같고,
계경에서는 한량없는 괴로움이 없어지면 수다원이라고 하였는데[잡아함에 나옴],
어째서 3결이 없어지면 수다원이라고 하는가?
[답] 이것은 세존께서 달리 말씀이 계셨으니 말을 생략하여 그 말을 행하도록 하게 하려는 것이며, 세존께서 교화하려고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람 때문이며, 권속 때문이며, 근기 때문이며, 교화 때문이니,
저 교화받는 자를 위하여 이러한 일을 분별하여 말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불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 교화하기 위한 것이니, 의사의 치료가 병든 사람을 위하는 것과 같다.
의사는 병든 자를 위하여 병의 근원을 자세히 알아서 병에 따라 약을 투여하는데, 병의 차도 없음을 염려하여 줄이지도 않고 그 공의 덜음을 염려하여 불리지도 않으니, 중도에 처하여 병을 차도있게 한다.
불세존께서 말씀하신 것도 다 교화하려는 것이니,
저 세존께서 교화받는 자를 위하여 몸을 알고 번뇌를 알고 나서 도(道)의 약을 투여하신다.
번뇌의 병이 없어지지 않음을 염려하여 줄여서 설하지도 않고 그 공의 덜음을 염려하여 불려서 설하지도 않으니, 중도에 처하여 말씀하신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끌어 교화에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고, 일을 쉽게 행하게 하려는 것이고, 손수 도와주려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중에 마땅히 발기자(跋耆子)의 비유를 말하겠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발기자라고 하는 비구가 있는데, 세존의 사문이 되었다.
세존께서 점차로 250계(戒)를 시설하셨는데 그가 듣고서 싫어하여 세존께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250계를 시설하셔서 보름마다 점차로 족성자(族姓子)로 하여금 배우게 하시지만 저는 이러한 계를 행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세존께서 거칠지 않은 말로 권하는 것을 좋게 여기시어,
‘선하고 선하구나. 발기자여, 너 발기자는 삼계를 행할 수 있으니, 증상계(增上戒)와 증상의(增上意)와 증상혜(增上慧)를 행하겠느냐, 행하지 못하겠느냐?’라고 하셨다.
그가 듣고서 곧 기뻐 뛰며,
‘내가 이 삼계를 잘 행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제가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선서시여, 제가 마땅히 열심히 행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고서,
그가 삼계를 배울 때에 점차로 모든 계의 바다[戒海]를 배웠다.
만일 세존께서 이와 같이 교화하시려고,
‘여든여덟 가지 견도에서 끊어지는 번뇌가 수다원이 되며, 한량없는 괴로움이 없어지면 수다원이 된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가 듣고서 싫어하여,
‘누가 이 여든여덟 가지의 괴로움의 산을 깨뜨릴 수 있으며,
누가 이 여든여덟 가지의 괴로움의 나무뿌리를 뽐을 수 있으며,
누가 이 여든여덟 가지의 괴로움의 강물을 건널 수 있으며,
누가 이 여든여덟 가지의 괴로움의 바다를 마르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할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계경에서 3결이 없어지면 수다원이 된다는 말을 저 교화를 받는 자가 듣고서 곧,
‘내가 이 3결을 잘 끊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그가 3결을 굽을 때에 모든 견소단의 결이 점점 없어질 것이다.
이것이 ‘이끌어 교화에 나아가게 하며, 일을 쉽게 행하게 하며, 손수 도와주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 발기자의 비유를 말하였다[율에 나옴.]”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겁고 과다한 고통이다.”라고 하였다.
[문] 신견(身見)에 어떤 큰 근심이 있는가?
[답] 신견은 62견의 근원이고, 견은 결의 근원이고, 결은 행의 근원이고, 행은 과보의 근원이니, 모든 세간은 과보에 의지한다.
과보에 의지하고 나서 생사 가운데에서 선법에 나아가기도 하고, 불선법에 나아가기도 하고, 무기법에 나아가기도 한다.
[문] 계도(戒盜)에 어떤 큰 근심이 있는가?
[답] 계도 가운데에서 모든 고의 행위를 낸다.
[문] 의(疑)에 어떤 큰 근심이 있는가?
[답] 과거가 되기 때문에 의심하여 머뭇거리며, 미래가 되기 때문에 의심하여 머뭇거리며, 현재가 되기 때문에 의심하여 머뭇거리며, 안에서 의심하여 머뭇거린다.
이것은 어떤 것이며, 이것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이 중생이 어떤 곳으로부터 와서 어떤 곳에 이르며, 무엇을 원인으로 삼고 무엇을 소유하는가?
이것을 큰 근심과 무겁고 큰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공덕(功德)의 적[怨家]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문] 무엇이 공덕인가?
[답] 수다원과다.
[문] 그는 어째서 적을 가까이하여 친하지 않는가?
[답] 3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다원과를 증득할 때 장애를 만들어 문에 들어가게 하지 않고, 문을 지키는 사람처럼 머물러 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3해탈문(解脫門)과 서로 어긋나니, 저 신견은 공정(空定)과 서로 어긋나며, 계도(戒盜)는 무원과 서로 어긋나며, 의(疑)는 무상(無相)과 서로 어긋난다.
이것을 삼해탈과 서로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다하여 남김 없으나 아라한에 이르더라도 또한 비슷한 신견이 있어서 괴로움을 얻으니, 아직 알아서 영구히 다한 것은 아니다.
그가 이미 다하고 이미 알았으나, 아라한에 이르더라도 역시 비슷한 것이 있다.
이는 저 아라한이,
‘이것은 나의 의발(衣鉢)이며, 이것은 나의 제자인 사미며, 이것은 나의 집이며, 이것은 나의 나라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아(我)가 있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계도는 도를 얻었으나 아직 알아서 영구히 다한 것은 아니다.
그가 이미 다하고 이미 알았으나, 아라한에 이르더라도 역시 서로 비슷한 것이 있다.
이는 저 아라한이 걸식을 행하고 분소의(糞掃衣)를 입고 길거리에 앉아 사문의 열두 가지 청정한 행을 받는 것과 같다.
청정한 행과 마찬가지로 의심은 도를 얻었으나, 아직 알아서 영구히 다한 것은 아니다.
그가 이미 다하고 이미 알았으나, 아라한에 이르더라도 역시 비슷한 것이 있다.
저 아라한이 두 길을 보고서 의심하여,
‘이것은 옳은 길인가? 그른 길인가?’라고 하며,
두 옷을 보고 의심하여,
‘이것이 나의 옷인가? 나의 옷이 아닌가?’라고 하며,
멀리서 보고서 의심하여,
‘이것은 여자인가 남자인가’라고 한다.
아라한이 이정(理定)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지 말라.
수다원이 다하였는데, 하물며 아라한이겠는가?
이 때문에 3결이 없어진 것이 수다원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현문(現門)과 현략(現略)과 현도(現度)다.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 혹은 한 가지, 두 가지, 네 가지가 있다.
저 신견을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한 가지를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계도를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두 가지를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비록 나머지 다른 두 결로서 얻을 만한 두 가지가 없으나, 저 계도의 두 가지와 그와 상응하는 법임을 알아야 한다.
의는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네 가지를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는 혹은 기계일체변과 비기계일체변이 있다.
신견을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기계일체변을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계도와 의심을 이미 말하였으니, 비기계일체변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첫째로 기계일체변(己界一切遍)과 둘째로 비기계일체변(非己界一切遍)을 말하였는가?
[답] 저 비기계일체변의 결에 유루연(有漏緣)과 혹은 무루연(無漏緣)이 있다.
저 신견과 계도를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유루연을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의심을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무루연을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기계일체변과 비기계일체변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기지일체변(己地一切遍)과 비기지일체변, 기계연(己界緣)과 비기계연, 기지연(己地緣)과 비기지연도 다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 혹은 유루연과 무루연이 있다.
저 신견과 계도를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유루연을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의심을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무루연을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두 번째로 유루연과 첫 번째로 무루연을 말하였는가?
[문] 유루연의 결에는 혹은 기계일체변과 비기계일체변이 있다.
저 신견을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기계일체변을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계와 의심을 이미 말하였으니, 비기계일체변을 이미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유루연ㆍ무루연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다툼과 다툼이 없음, 세간과 출세간, 머무름과 머무르지 않음, 의욕과 불의욕도 모두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는 혹은 유위연(有爲緣)과 무위연(無爲緣)이 있다.
저 신견과 계도를 이미 말하였으니, 유위연을 이미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의심을 이미 말하였으니, 무위연을 이미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유위연ㆍ무위연처럼 이와 같이 유상연(有常緣)과 무상연(無常緣)이 있으며,
유항연(有恒緣)과 무항연(無恒緣), 유주연(有住緣)과 무주연(無住緣)도 다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는 묵은 견성(見性)과 비견성(非見性)이 있다.
저 신견과 계도를 이미 말하였으니, 견성을 이미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의심을 이미 말하였으니, 비견성을 이미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견성ㆍ비견성처럼 이와 같이 관찰함과 관찰하지 않음, 행함과 행하지 않음, 굳게 지님과 굳게 지니지 않음, 구함과 구하지 않음, 바뀜과 바뀌지 않음도 모두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이러므로 현문(現門)과 현략(現略)과 현도(現度)를 말한다고 한 것이며,
이 때문에 3결이 없어지면 수다원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인가?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인가?
만일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라면 마땅히 제8이 수다원일 것이다.
제8이라는 것은 믿음을 견고히 하고 법을 견고히 하여 저 도를 비로소 얻은 것이니,
믿음을 견고히 하는 도[堅信道]와 법을 견고히 하는 도[堅法道]다.
만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라면,
저것은 마땅히 곱절의 탐욕[倍欲]이 없어진 것과 애욕이 없어진 것이 수다원일 것이다.
그가 처음 얻은 과와 사다함과와 아나함과는 이러한 논의를 만들 뿐이니 설하기를,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다.”라고 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제8이 수다원일 것이니, 그가 처음 얻은 도는 견신도와 견법도다.
[답]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도를 처음 얻고 도에 들어가서 그가 믿음을 견고히 하고 법을 견고히 한 것이다.
비록 도를 처음 얻었지만 과(果)에 처음 들어가는 것이 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도를 처음 얻은 것이 수다원이다.
만일 견도에서 끊는 결이 영구히 없어져서 인(忍)과 서로 어긋남을 이미 안다면,
이미 없어지고 이미 알아서 삿된 견해가 영구히 끊어진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인상(人想)을 생각하기 때문이며, 인상을 말하기 때문이며, 인법(人法)을 시설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도를 사유(思惟)하기 때문이며, 과보가 도를 포함하기 때문이며, 도는 아직 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만일 세 가지 일을 얻는데 처하면 아직 도를 얻은 것이 아니고, 도를 버려야 결이 다하여 일미(一味)를 얻게 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만일 다섯 가지 일을 얻는데 처하면 아직 도를 얻은 것이 아니다.
도를 버려야 결이 다하여 일미를 얻게 되니, 여덟 가지 지혜를 얻어 일시에 16행(行)을 닦는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도를 얼은 것이 수다원이니, 생겨남이 있게 된다.”라고 하였다.
다시 어떤 사람은,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곱절로 탐욕이 없어진 것과 욕애가 없어진 것은 마땅히 수다원일 것이니, 저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은 사다함과와 아나함과일 것이다.
[답]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최초의 해탈이기 때문이며, 최초의 제도이기 때문이며, 최초의 머문 과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차제 때문이며, 함께 매여 있기 때문이며, 차제를 뛰어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4향(向)과 4주과(住果)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4쌍(雙)과 8배(輩)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나머지를 아직 얻지 못하여 더욱 수행하기 때문이다.
나머지를 아직 얻지 못하여 더욱 수행한다는 것은, 세간의 도는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이 있어도 과보를 얻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차등이 없기 때문이다.
차등이 없다는 것은, 역시 위의 세간의 도와 같이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이 있어도 과보를 얻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만일 과보와 도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지(地)도 무너지지 않는다.
도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은 한결같이 무루도로써 과보를 얻는 것이고,
지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은 미래에 의지하여 다르지 않은 것을 얻는 것이고,
아라한과라는 것은 비록 도가 무너지지 아니하여 한결같이 무루도로써 과보를 얻지만, 저 지가 무너져서 9무루지에 의지하여 얻는 것이다.
사다함과라는 것은 비록 의지가 무너지지 아니하여 미래에 의하여 다르지 않은 것을 얻더라도, 저 도가 무너져서 세간의 무루도로써 과보를 얻는 것이다.
아나함과라는 것은 도(道)도 무너지고, 지도 무너지는 것이다. 도가 무너진다는 것은 세간의 무루도로써 과보를 얻는 것이고, 지가 무너진다는 것은 6지에 의하여 얻는 것이다.
이 수다원의 과보는 무너지지 않고, 지도 무너지지 않으니, 이 때문에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도를 얻은 것도 수다원이 아니며, 처음 과보를 얻은 것도 수다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그러한가?
[답] 저것은 수다원과를 말미암기 때문이며, 이 수다원은 법 때문에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약탕(藥湯)이 약 때문에 약탕이라고 하며, 소(酥) 때문에 소병(酥甁)이라고 하며, 꿀 때문에 꿀병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저것은 수다원과를 말미암기 때문이며, 이 수다원은 법을 말미암기 때문에 사람이라고 한 것이니, 약탕과 같다.
수다원이라는 것은 팔성도(八聖道)라는 물에 그가 들어가니, 이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한 것이다.
[문]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 같은 이도 성도의 물에 들어가는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하지 않는가?
[답] 처음 일어나 이름을 받는 것은 처음의 방편도(方便道)이니, 이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한 것이다.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은 그렇지 않다.
악법(惡法)에 떨어지지 않는 자는 끝내 삼악취(三惡趣)에 떨어지지 않는다.
[문]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 같은 이도 악법에 떨어지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수다원만을 악법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나머지는 말하지 않았는가?
[답] 각각 차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수다원은 악법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차등이고,
사다함은 한 번 왕래하는 것이 차등이고,
아나함은 욕계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차등이고,
아라한은 다시 유(有)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차등이다.
이것이 “각각의 차등 때문에 수다원 하나만을 악법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고,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은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다.
[문] 범부(凡夫)도 악법에 떨어지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성인이 악법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였는가?
[답] 저 범부는 일정하지 않아 악법에 떨어지기도 하고 악법에 떨어지지 않기도 하지만,
이 성인은 한결같이 악법에 떨어지지 않으니, 어느 한 성인도 악법에 떨어지는 경우가 없다.
그것은 일정하지 않은 것이니, 이 때문에 성인은 악법에 떨어지지 않으나 범부는 그렇지 않다.
정(定)이라는 것은 바른 선정에 나아가 머물기 때문에 정이라고 한 것이니,
마땅히 수다원은 반열반(般涅槃)의 변역(變易)에 정(定)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정각(正覺)에 나아간다고 한 것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각이라고 한 것이며,
저 사람이 이것에 의하여 향함이 있고, 나아감이 있고, 좋아함이 있고, 촉구함이 있으니, 이 때문에 정각의 극칠환유(極七還有)에 나아간다고 말한 것이다.
[문] 이와 같은 극십사환유(極十四還有)와 극이십팔환유(極二十八還有)는,
만일 본유의 수를 취한다면 천상의 본유(本有) 일곱과 인간의 본유 일곱으로 십사이며,
만일 본유와 중음(中陰)의 수를 취한다면 천상의 본유 일곱과 중음 일곱, 인간의 본유 일곱과 중음 일곱으로 이십팔인데,
무엇 때문에 극칠환유가 수다원이라고 말하였는가?
[답] 법이 마땅히 일곱 가지이므로 일곱을 넘지 않으며, 하나하나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극칠환유는 수다원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만일 천상은 본유가 일곱이고 중음이 일곱이며, 인간은 본유가 일곱이고 중음이 일곱이라면 저 모두는 일곱을 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세존께서 “극칠환유는 수다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다른 계경에서, “사성제는 3전(轉) 12행(行)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는 3전ㆍ12행이 아니라 12전ㆍ48행이어야 하지만,
다만 3전ㆍ12법이기 때문에 3전ㆍ12행을 지나지 않으니,
하나하나의 진리를 관찰하기 때문에 세존께서 사성제는 3전ㆍ12행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다른 계경에서,
“비구는 일곱 군데의 장소에서 세 가지의 뜻을 잘 관찰하니, 속히 이 법 가운데 번뇌가 다하게 된다.”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런데 여기서 일곱 군데라고 해서는 안 되고, 마땅히 35처선(處善)이 있다고 해야 하며, 또한 무량처선(無量處善)이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다만 7법이기 때문에 7관(觀)을 넘지 않으니, 하나하나의 음(陰)이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비구는 일곱 군데의 장소에서 세 가지를 잘 관찰하니, 속히 이 법 가운데에서 번뇌가 다하게 된다.”라고 하셨다.
다른 계경에서,
“비구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법을 말하겠다.
두 가지의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매끄러움의 뜻과 법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12가 되어서는 안 되고 마땅히 62가 있어야 한다.
다만 이 법이기 때문에 이관(二觀)을 넘지 않으니, 하나하나의 입(入)이기 때문이며, 눈과 색이기 때문이며, 내지 뜻과 법이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비구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법을 말하겠으니, 두 가지가 있다.”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천상의 본유가 일곱이고 중음이 일곱이며, 인간의 본유가 일곱이고 중음이 일곱이지만 모두 일곱을 넘지 않으니, 하나하나의 취이기 때문이며, 천취(天趣)이기 때문이며, 인취(人趣)이기 때문이며, 중음이 일급이기 때문이며, 본유가 일곱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하나하나의 취이기 때문에 세존께서 ‘극칠환유(極七還有)가 수다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수다원은 극칠환유이며, 또한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는가?
[답] 바사가 말하기를,
“모든 의심은 법과 어긋나지 않으니, 혹은 증가하고 혹은 감소하는 것은 그 또한 이러한 의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의심은 법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그가 제보인(齊報因)이기 때문이다.
저 제보인과 마찬가지로 제보과(齊報果)도 마땅히 그러하다.
이러므로 그가 제보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의 힘 때문에 수다원이 7유(有)에 나고 성도의 힘 때문에 8에 이르지는 않는다.
이것은 사람이 칠보사(七步蛇)에게 물리면 그가 사대(四大)의 힘 때문에 일곱 걸음을 갈 수 있으나, 독의 힘 때문에 여덟 걸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다원도 수행 때문에 7유에 나지만 성도의 힘 때문에 8에 이르지는 못한다.
이것은 사람이 전에 먹은 음식 때문에 목숨이 7일에까지 이르나 음식의 힘이 다하기 때문에 8일에 이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다원도 수행 때문에 7유에 나지만 수행이 다하여 8에 이르지는 못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가 증상인(增上忍)에 머물 때에 욕계의 7생과 색ㆍ무색계의 하나하나의 처(處)와 하나하나의 생(生)을 없애고, 다른 모든 나고 얻는 비수연(非數緣)이 다한다.
만일 나고 얻는 비수연이 다하면, 이 생이 마침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칠생처(七生處)이기 때문이니, 생처에 난다는 것은 욕계의 여섯과 천상 및 인간이다.
마땅히 이 가운데 수다원이 나니, 이 때문에 칠생처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저 8생(生)은 공허하니 성도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수다원이 8유(有)에 이른다면,
저 진리를 보는 것은 이미 진리를 보는 것이 아니고,
과보를 얻는 것도 이미 과보를 얻는 것이 아니고,
등행도 이미 등행(等行)이 아니고,
성인을 얻음도 이미 범부가 되는 것이니,
말할 것도 없이 허물이 있게 된다.
이러므로 수다원은 8유에 이르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간 가운데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간 가운데 나타나는 일이라는 것은 7세까지를 가깝다고 하니 만일 8세에 이르면 가깝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만일 수다원이 8유에까지 이른다고 한다면, 항하사(恒河沙)의 불법 가운데 멀리 떨어져 그와 가깝지 아니하여 말할 것도 없이 허물이 있게 된다.
이 때문에 수다원은 8유에 이르지 않는다.
만일 수다원이 천상의 7생과 인간의 7생을 궁극적으로 채운다면,
저 가운데에서 수다원은 차등이 있어 일곱 번 천상에 나고 인간에 여섯, 천상에 여섯 인간에 다섯, 천상에 다섯 인간에 넷, 천강에 넷 인간에 셋, 천상에 셋 인간에 둘, 천상에 둘 인간에 한 번 태어난다고 말할 것이다.
다만 수다원은 천상의 일곱과 인간의 일곱을 궁극적으로 채우니, 저 가운데에서 극칠생유가 수다원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저 일곱은 어느 곳에서 가득 차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만일 몸이 수다원의 과보를 얻으면 저 몸은 일곱 가운데에서 찬다.”라고 하였는데,
혹은 수를 말하기도 하고, 혹은 수를 말하지 않기도 한다.
수를 말한다는 것은, 만일 천상에서 과보를 얻으면 인간에서 반열반(槃涅槃)하고, 인간에서 과보를 얻으면 천상에서 반열반하는 것을 말한다.
수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만일 천상에서 과보를 얻으면 천상에서 반열반하고, 인간에서 과보를 얻으면 인간에서 반열반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몸 가운데 수다원의 과보를 얻으면 저 몸은 일곱 가운데에서 헤아리지 않으니, 어째서인가?
[답] 만일 저 몸 가운데 수다원의 과보를 얻는다면 서 몸은 중음(中陰)의 범부일 때이고,
만일 이 몸이 일곱 가운데 수라면 27이 있어야 하지 28이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다면 시설하여 말한 것과 서로 어긋나니, 그가 말한 것은 28유다.
후유(後有)에 왕생하여 뒤에 후득신(後得身)에 의시하여 무루도를 얻어 나머지 번뇌를 다 없앤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잘못된 것이니, 저 몸은 일곱 가운데서는 헤아리지 않는다.
[문] 극칠생유가 수다원이라면 6생 중에서 성도가 바로 나타나는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가?
만일 바로 나타난다면 무엇 때문에 반열반하지 않는가?
만일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저 뜻에는 마땅히 성도가 없을 것이다.
이 논을 지은 뒤 어떤 이는 바로 나타난다고 말하였다.
무엇 때문에 반열반하지 않는가?
[답] 저의 수행이 세간의 수행을 즐기는 힘 때문에 반열반하지 않는다.
[문] 극칠생유(極七生有)의 수다원이 일곱을 마지막으로 채우니,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지 않았을 때 그가 흰 옷을 입고 반열반한 것은 어째서인가?
[답] 그렇지 않다. 그가 반드시 출가하여 반열반한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이 오백 명의 벽지불(辟支不)이 선인(仙人)의 굴에 머물러 본래 다 성문(聲聞)이 되었다. 이러므로 극칠생유라고 하였다.
천상과 인간에 일곱 번 태어난다는 것은 천상으로부터 인간에 이르고, 인간으로부터 천상에 이르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동산으로부터 인간에 이르고, 모임으로부터 모임에 이르는 것과 같다.
그 또한 이와 같이 천상으로부터 인간에 이르고, 인간으로부터 천상에 이르니, 이 때문에 일곱이라고 말한 것이다.
천상과 인간에 왕생(往生)한다는 것은. ‘왕’은 중음이고, ‘생’은 본유다.
이 때문에 왕생하여 고변(苦邊)을 믿는다고 말한 것이다.
[문] 고변이라는 것은 가운데라고 말해야 하는가, 밖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만일 고의 가운데라고 말한다면 마땅히 고변이 없을 것이고,
고의 밖이라고 말한다면 세간에 나타나는 일과 어떻게 통할 수 있겠는가?
마치 금으로 만든 산가지[籌]가 처음도 금이고, 가운데도 금이고, 뒤도 금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다원은 처음도 고이고, 가운데도 고이며, 뒤도 고이니, 어떻게 고변이 있겠는가?
이 논을 지은 뒤, 어떤 이는 아라한의 최후음(最後陰)이 고변이라고 말하였으며,
어떤 이는 멸진하여 열반하는 것이 고변이라고 말하였다.
만일 아라한의 최후음이 고변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고변이 있는가?
[답] 이와 같이 고변이 있으니, 다시 고를 받지 않고, 다시 고를 맺지 않으며, 다시 고의 인연을 깃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문] 만일 멸진하여 열반하는 것이 고변이라고 한다면, 비유가 어떻게 통하겠는가?
[답] 이것이 반드시 통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또한 계경(契經)이 아니며, 율(律)이 아니며, 아비담이 아니니, 세간의 비유로써 현성의 말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세간의 일이 다르고 현성의 일이 다르다.
고변을 지은 것은, 고는 오성음(五盛陰)을 말하고, 저 변은 최변(最邊)과 후변(後邊)이다. 이러므로 고변을 짓는다고 말한 것이다.
3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