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올해도
산소에 둥굴레 꽃이 피었습니다
외할머니의 열일곱 살 아이는
아비가 바람의 말馬을 잃고 돌아온 보름밤
처음, 어머니의 女子를 보았습니다
산판山坂을 할퀴던 겨울, 칼바람에 찢어진
어머니의 흰 달빛 가슴
화전火田재로 물들어 빛바랜 우물을
몰래 훔쳐 가슴에 품었습니다
봄을 흔드는 잔치처럼
고운 꽃가마가 둔내屯內로 들 때
산골 꽃들은 어린 색시가
궁금하여 화관花冠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그렇게, 봄날은 가고 감자 꽃
옥수수 꽃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횡성 장날 박가분朴哥紛, 아직
희고 곱기만 한데
시아버지는 금쪽같은 외며느리를 두고
어허이 어허 어허이 어허
찢어진 만장輓章 나래에 잠시 머물다
전재 마루, 둥굴레 꽃술로 눈뜨고
열여덟 마지기의 논을 태우는
투전판의 엽연초 연기
아비 잃은 아비는
심심산골 봉평, 깊은 골짜기에
山도라지로 숨었습니다
육이오의 포성砲聲이 잦아들 때
봉놋방 거적을 흔들던 生울음소리
달빛 옥양목에 긴긴밤을 두드려 펴는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다듬질 소리
고샅 속 번데기 조몰락대다
오련히 가물대는 호롱불 그림자 속
도깨비를 무서워하며
까무룩 잠들곤 했습니다.
대화大和 팔뚝 같은 옥수수밭 잃고
털털거리던 야속한 도라꾸
포도鋪道자갈 돌망치 소리에 깨지던 소양강
퀴퀴한 술지게미, 서러운 가난도 잊고
영세민零細民 밀가루 한 포 뿌듯함도 잊고
그렇게, 그렇게
고단한 날들이 저물고
따스하던 어머니의 젖가슴은
화롯불이 사위듯
평토장한 무덤같이 사그라졌습니다
명치끝에 죽음을 단 어머니의
뼛골 마디마디를 삭이던
아비의 마른 바람
칠십 평생, 까맣게 타버린 애간장도
그예, 바람을 타고 가는 바람 같이
슬며시, 끊어져 버렸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 도라꾸: 트럭의 강원도 대화 옛 사투리
산판山坂: 산에서 벌목하는 곳
카페 게시글
안정희
어머니 초상肖像
안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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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1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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