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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3권
2. 분별근품(分別根品) ①
이와 같이 계(界)에 근거하여 이미 온갖 근(根)에 대해서도 열거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근’이란 무슨 뜻인가?1)
가장 수승[最勝]한 자재(自在)이며, 빛나고 현저[光顯]하기 때문에 ‘근’이라 이름한 것이니,2)
이에 따라 근은 증상력(增上力:탁월하고 뛰어난 힘)의 뜻이라는 것이 모두 성취되는 것이다.
1) 근의 증상력의 뜻
이러한 증상력의 뜻은 무엇을 무엇과 비교할 때 그러하다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전설에 따르면 5근은 네 가지 일에 대해
네 가지의 근은 두 가지에 대해
다섯 가지와 여덟 가지의 근은 염오와 청정 중에
각기 별도의 증상력이 있다.
[눈 등의 5근]
논하여 말하겠다.
안(眼) 등의 5근은 각기 네 가지 일에 대해 능히 증상의 작용이 있으니,
첫째는 소의신을 장엄하는 일[莊嚴身]이며,
둘째는 소의신을 이끌고 기르는 일[導養身]이며,
셋째는 의식 등을 낳는 일[生識等]이며,
그리고 넷째는 공통되지 않은 일[不共事]이다.
바야흐로 안근과 이근이 소의신을 장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눈이 멀거나 귀가 먹게 되면 몸이 누추해지기 때문이다.
소의신을 이끌고 기른다고 함은, 이를테면 보고 들음으로 인해 험난한 곳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 등을 낳는다고 함은, 이를테면 이러한 두 가지 식과 아울러 그것과 상응하는 법(곧 심소)을 낳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통되지 않은 일이란, 말하자면 능히 색을 보고, 소리를 듣는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비ㆍ설ㆍ신의 세 가지 근이 소의신을 장엄한다고 함은 안ㆍ이 두 근의 경우에서 설한 바와 같다.
소의신을 이끌고 기른다고 함은, 이를테면 단식(段食:4식의 하나로, 분할되어 섭취되는 에너지, 곧 음식물)을 능히 수용하기 때문이다.
]의식 등을 낳는다고 함은, 이를테면 이러한 세 가지 식과 아울러 그것과 상응하는 법을 낳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통되지 않은 일이란, 말하자면 향ㆍ미ㆍ촉을 냄새맡고, 맛보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근ㆍ남근ㆍ명근ㆍ의근]
여근ㆍ남근ㆍ명근ㆍ의근은 각기 두 가지 일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있다.
바야흐로 여근과 남근의 두 가지 증상이란,
첫째는 유정의 다름[有情異:구역어는 衆生差別]이고,
둘째는 분별의 다름[分別異:구역어는 相貌差別]이다.
유정의 다름이란, [태초의 유정은 그 유형이 모두 같았지만] 이 두 근이 생겨남에 따라 제 유정으로 하여금 여자와 남자의 유형에 차별이 있게 되었던 것을 말한다.
분별의 다름이란, 이러한 두 근이 생겨남에 따라 형상과 말소리 유방 등의 차별이 있게 되었던 것을 말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것(여근ㆍ남근)은 염오함과 청정함 두 가지에 대해 증상력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일이라고 말한 것이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태어나면서부터 그러하든지[本性] 후천적으로 손괴(損壞)되었든지 간에 선체(扇搋)와 반택(半擇)과 이형인(二形人)에게는 불율의(不律儀:즉 惡戒를 말함)나 무간업(無間業)이나 선근을 끊는 온갖 잡염법(雜染法)이 없으며,
역시 또한 율의(律儀)도 득과(得果)도 이염(離染)의 온갖 청정법(淸淨法)도 없기 때문이다.3)
명근이 두 가지 일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고 함은,
이를테면 중동분(衆同分)을 능히 상속하게 하고, 아울러 능히 유지하게 하기 때문이다.4)
의근이 두 가지 일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고 함은,
이를테면 능히 후유(後有)를 상속하고, 또한 자유 자재로 따라 행하기[自在隨行] 때문이다.
여기서 ‘능히 후유를 상속한다’고 함은, 계경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그 때 건달박(健達縛)에게 2심(心) 중의 하나가 현전하였으니,
이를테면 혹 어떤 경우 애(愛)와 함께하기도 하고, 혹은 어떤 경우 에(恚)와 함께하기도 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5)
그리고 ‘자유 자재로 따라 행한다’고 함은 계경에서 말한 바와 같다.
마음이 능히 세간을 이끌며
마음이 능히 세간을 두루 섭수하니
이와 같은 마음의 일법(一法)에
모든 것은 자유 자재로 따라 행하는 것이로다.
[낙 등의 5수근, 신(信) 등의 8근]
낙 등의 5수근이란 의 다섯 가지 감각적 기능[낙(樂)ㆍ고(苦)ㆍ사(捨)ㆍ우(憂)ㆍ희(喜)]을 말하며,
신(信) 등의 8근이란 일체의 청정법을 낳는 신(信)ㆍ근(勤)ㆍ염(念)ㆍ정(定)ㆍ혜(慧)ㆍ미지(未知)ㆍ당지(當知)ㆍ이지(已知)ㆍ구지(俱知)의 여덟 가지 근을 말한다.
낙(樂) 등의 5수근(受根)과 신(信) 등의 여덟 가지 근은 염오함과 청정함에 대해 다음과 같은 증상력이 있다.6)
이를테면 낙 등의 다섯 가지가 염오함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에 의해 탐 등의 수면(隨眠)이 수증(隨增)하기 때문이다.7)
신(信) 등의 여덟 가지 근이 청정함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고 함은, 온갖 청정법이 그것에 따라 증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기도 하였다.
“낙 등은 청정함에 대해서도 역시 증상력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니, 계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즉
낙(樂)으로 인해 마음은 정(定)에 들게 되고8)
고(苦)는 신(信)의 소의(所依)가 되며9)
여섯 가지 출리(出離)의 소의가 희(喜)와 우(憂)와 사(捨)이다.”10)
비바사사(毘婆沙師)가 전(傳)하여 설(說)하는 바는 이상과 같다.”11)
그런데 다시 어떤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능히 소의신을 이끌고 기르는 것[導養身]은 안근 등의 작용이 아니라 바로 식(識)의 증상력이다.
즉 식이 요별하여 비로소 험난한 곳을 피하고 단식을 수용하기 때문에, 색을 보는 등의 작용 역시 식의 그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통되지 않은 일[不共事, 보는 등의 각기 개별적인 작용]을 안근 등에 적용시켜 별도의 증상의 작용이 있다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러한 안근 등은 [개별적 작용을 갖는] 근으로서 성립될 수 없다.”12)
2) 제근의 증상력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제근의 증상력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자신의 대상과 모든 대상을 요별하는데
증상력이 있어 6근을 설정한 것이며
신근에 따라 두 가지의 근을 설정함은
여성ㆍ남성에 대해 증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동분(同分)을 지속시키고, 잡염과
청정에 증상력이 있기 때문에
명근과 5수근과 신(信) 등을 세워
‘근’이라고 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리라.
미지당지근과 이지근과
구지근도 역시 그러하니
각기 그 다음다음의 도와
열반을 획득하는 등의 증상력이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6근]
‘자신의 대상을 요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6식신을 말하니,
안 등의 5근은 각기 개별적인 [자신의] 경계를 능히 요별하는 [5]식에 대해 증상의 작용을 갖고 있으며,
제6 의근은 일체의 경계를 능히 요별하는 의식에 대해 증상의 작용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안 등의 6근을 각각 설정하여 ‘근’으로 삼은 것이다.
색(色) 등도 역시 능히 요별하는 식에 대해 증상의 작용을 갖고 있음에도 어찌 마땅히 ‘근’으로 삼지 않는 것인가?13)
경(境)은 식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없다.
대저 증상의 작용이란 이를테면 가장 수승[最勝]한 자재(自在)를 말하니, 안근은 색을 요별하는 식이 발생하는데 가장 수승하고 자재하기 때문에 ‘증상력’이라 이름한 것이다.
즉 여러 색을 요별하는 데 공통의 원인[通因]이 되기 때문에, 또한 식은 안근에 따라 밝고 어둠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그러나 색은 그렇지 않으니, 이러한 두 가지 이유에 상위하기 때문이다.14)
내지는 의근과 법경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남근과 여근]
‘신근에 따라 다시 여근과 남근을 설정한다’고 함은, 여자와 남자의 성(性)에 대해 증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즉 여근과 남근 자체는 신근을 떠나지 않으며, 신체의 일부분에 대해 이러한 명칭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으로],
그 순서대로 여자와 남자의 신체 중에서 이러한 여근과 남근이 증상의 작용을 갖게 되는데,
이 곳은 다른 곳의 신근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에 신근과는 별도로 두 근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여자로서의 몸의 형태, 음성, 행위나 태도[作業], 뜻이나 즐기는 것[志樂]의 차별을 일컬어 여성이라 하며,
남자로서의 몸의 형태, 음성, 행위나 태도, 뜻이나 즐기는 것의 차별을 일컬어 남성이라 하는데,
이러한 두 성의 차별은 여근과 남근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여근과 남근은 두 성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고 설한 것이다.
[명근]
명근은 중동분(衆同分)이 지속하는 것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있다.
[낙(樂) 등의 5수근]
낙(樂) 등의 5수근은 잡염법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계경에서 “낙수(樂受)에서는 탐이 수증(隨增)하고, 고수(苦受)에서는 진(瞋)이 수증하며,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에서는 무명이 수증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信) 등의 5근]
신(信) 등의 5근은 청정법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러한 5근의 세력에 의해 제 번뇌를 조복(調伏)하고, 성도(聖道)를 인기(引起)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본송에서] ‘마땅히 알아야 하리라’고 말한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 낙 등의 5수근과 신 등의 5근] 하나하나는 각기 능히 근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을 권하는 말이다.
[3무루근]
3무루근(未知當知根ㆍ已知根ㆍ具知根)은 그 다음 다음의 도와 열반 등을 획득하는 것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있다.
여기서 ‘역시 그러하다’고 말한 것은 유형별로 그 하나하나는 각기 능히 근이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니,
이를테면 미지당지근은 이지근의 도를 획득하는 데 증상의 작용이 있고,
이지근은 구지근의 도를 획득하는 데 증상의 작용이 있으며,
구지근은 열반을 획득하는데 증상의 작용이 있다.
즉 이 때까지 마음은 아직 해탈하지 않았고, 반열반(般涅槃)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15)
그리고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또 다른 갈래[異門]의 해석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무엇을 일컬어 다른 갈래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미지당지근은 견소단(見所斷)의 번뇌를 멸하는 데 증상의 작용이 있고,
이지근은 수소단(修所斷)의 번뇌를 멸하는 데 증상의 작용이 있으며,
구지근은 현법락주(現法樂住)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있으니,
이것에 의해 능히 해탈의 희락(喜樂)을 영수(領受)할 수 있기 때문이다.16)
[근의 특성]
만약 증상력의 뜻이 있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한 것이라고 한다면, 무명(無明) 등의 존재도 마땅히 근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니, 무명 등의 원인은 행(行) 등의 결과에 대해 각각 개별적인 증상의 작용을 갖기 때문이다.17)
또한 말하는 입[語具] 등도 마땅히 근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니, 입과 손과 발과 대(大)ㆍ소변처(小便處)는 그 순서대로 말하고 잡고 가고 배설하고 즐기는 일에 대해 증상의 작용 있기 때문이다.18)
이와 같은 따위의 사실에 대해서는 마땅히 근으로 설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근으로 인정하려면 다음과 같은 특상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음의 소의가 되고, 이것의 차별이 되며
이것의 지속[住]이 되며, 이것의 잡염(雜染)이 되며
이것의 자량이 되며, 이것의 청정이 되니
이러한 근거[量]에 따라 ‘근’을 설정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마음의 소의’란 안(眼) 등의 6근으로서, 이러한 내(內) 6처는 바로 유정신(有情身)의 근본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내 6처, 즉 유정신의 상의 차별은 여ㆍ남 두 가지 근에 의한 것이다.
나아가 명근에 의해 이러한 내 6처의 유정신은 일기(一期) 동안 지속한다.
또한 이러한 내 6처의 유정신이 잡염을 성취하게 되는 것은 5수근에 의해서이고,
이러한 유정신이 청정한 자량이 되는 것은 신(信) 등의 5근에 의해서이며,
이러한 유정신이 청정함을 성취하게 되는 것은 뒤의 세 가지 [무루]근에 의해이니,
이로서 근을 설정하는 일은 모두 끝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여기에다 다시 무명 따위나 말하는 입 따위를 설정하여 근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19) 그것들은 이러한 사실 중에 증상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어떤 유여사는 근의 특상에 대해 이와는 다르게 설하고 있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혹은 유전(流轉)의 소의가 되고
아울러 그것을 낳고 지속하고 수용하므로
앞의 열네 가지를 건립하였으며
환멸(還滅)의 뒤의 것도 역시 그러하다.20)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혹은’이라는 말은, 이는 바로 다른 논사의 의견으로,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에 근거하여 22근을 설정하였음을 나타낸다.
즉 유전의 소의란 이를테면 안 등의 6근이며,21) 이러한 6근은 여근ㆍ여근에 의한 것이니, 그것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6근이 지속하는 것은 명근에 의한 것이니, 그것에 의지하여 지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6근이 [대상을] 수용(受用)하는 것은 5수근에 의한 것이니, 그것에 의해 대상을 영납(領納)하기 때문이다.
곧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앞의 열네 가지 근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환멸위(位) 중에서도 바로 이러한 네 가지 뜻(소의ㆍ생ㆍ지속ㆍ수용)의 유별(類別)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뒤의 여덟 가지 근을 설정하게 되었다.
즉 환멸의 소의란 이를테면 신(信) 등의 5근이며,
이러한 5근은 3무루근 중 첫 번째 즉 미지당지근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다음의 이지근에 의해 지속하는 것이며,
뒤의 구지근에 의해 수용하는 것이다.22)
[따라서 신 등의 5근과 3무루근은 환멸의 근거로서 설정된 것이다.]
곧 근의 수량은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감소하는 일도 없고, 증가하는 일도 없으며,
바로 이러한 이유(유전ㆍ환멸의 각기 네 가지 뜻)에 의해 경에서 그 같은 순서로 설정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마땅히 말하는 입[語具]을 말하는데 있어 근이 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말은 학(學)의 차별에 근거하여 비로소 성취되기 때문이다.23)
손과 발은 마땅히 잡거나 가는 일에 있어 각기 근으로 설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잡거나 가는 것 이외] 다른 성질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손과 발은 처소를 달리하고 그 상을 달리하여 차별이 생겨날 때를 일컬어 잡고 가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손과 발을 떠나서도 역시 잡고 가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배로 가는 종류가 바로 그러하다.24)
그렇기 때문에 손과 발을 그 같은 작용에 대한 ‘근’으로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대변을 내보는 처소도 능히 배설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응당 근으로 설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무거운 물건이 공중에서 두루 떨어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은 풍력(風力)에 이끌려 나오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변을 내보는 처소도 즐거움을 낳는 일을 한다고 해서 응당 마땅히 근으로 설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만약 여근ㆍ남근이 이러한 즐거움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해야 한다면],
온갖 목구멍과 이빨과 눈꺼풀과 사지마디도 응당 마땅히 근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니,
그것은 능히 삼키고, 씹고, 깜박이고, 굴신(屈伸)하는 데 힘과 작용을 지니기 때문이다.
혹은 일체의 원인은 자신이 짓는 결과에 대해 힘과 작용을 갖기 때문에 마땅히 그 모두를 근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비록 작용을 갖는다 할지라도 증상의 작용은 아니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되지 않으며,
이러한 말하는 입 등도 역시 증상의 작용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응당 마땅히 근으로 설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22근 중 안근 내지 남근에 대해서는 앞에서와 같이 이미 논설하였다.25)
또한 명근의 본질은 바로 불상응행법이기 때문에 불상응행을 설하는 중(본론 권제5)에 저절로 널리 분별하게 되리라.
그리고 신(信) 등의 본질은 바로 심소법이기 때문에 심소법을 설하는 중(본론 권제5)에 역시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
[5수근과 3무루근]
그렇지만 낙(樂) 등의 5수근과 3무루근은 달리 분별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지금 마땅히 여기서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몸이 즐겁지 않은 것을 고근(苦根)이라 이름하고
이것의 즐거움을 낙근(樂根)이라 이름하며
아울러 제3정려의 마음의 즐거움도 낙근이라 하는데
다른 처(處)에서는 이것을 희근(喜根)이라 이름한다.
마음이 즐겁지 않은 것을 우근(憂根)이라 이름하고
그 중간을 사근(捨根)이라 하니, 두 가지는 무분별이다.
견도와 수도와 무학도에서는
아홉 가지의 근으로써 세 가지 근을 설정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몸’이란 신수(身受)를 말한다.
즉 신수는 소의신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같이 말한 것]으로, 바로 5식상응의 수(受)인 것이다.
그리고 ‘즐겁지 않은 것[不悅]’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손상되거나 고뇌스러운 것[損惱]의 뜻이다.
즉 신수 안에서 능히 손상되거나 고뇌스러운 것을 일컬어 고근(苦根)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본송에서 말한 ‘즐거움’이란 바로 섭수 장익[攝益]의 뜻이다.
즉 신수 안에서 능히 섭수 장익하는 것을 일컬어 낙근(樂根)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울러 제3정려의 마음과 상응하는 수(受)로서, 능히 섭수 장익하는 것도 역시 낙근이라고 이름한다.
즉 제3정려 중에는 신수가 존재하지 않으며 5식신이 없기 때문에 ‘마음의 즐거움[心悅]’을 바로 낙근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3정려를 제외한 그 아래 세 가지 지(地)에서는 이 같은 마음의 즐거움을 일컬어 희근(喜根)이라 한다.
왜냐 하면 제3정려에서의 마음의 즐거움이야말로 안정(安靜)된 것으로 희탐(喜貪)을 떠났기 때문에 오로지 낙근이라고 이름하지만,
그 아래 세 가지 지 중에서의 마음의 즐거움은 추동(麤動)으로 희탐을 갖기 때문에 오로지 희근이라고만 이름하는 것이다.26)
그리고 의식과 상응하여 능히 손상 고뇌하는 수로서, 바로 마음이 즐겁지 않는 것을 일컬어 우근(憂根)이라고 한다.
나아가 [본송에서 말한] ‘중간’이란 바로 즐거운 것도 아니고 즐겁지 않은 것도 아닌 것[非悅非不悅]으로, 바로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를 말하는데, 이러한 수를 일컬어 사근(捨根)이라고 이름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근은 바로 신수(身受)라고 해야 할 것인가, 심수(心受)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마땅히 두 가지 모두와 통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이러한 두 가지 수를 하나의 근으로 합하여 설정한 것인가?
이러한 수는 몸에 있든지 마음에 있든지 다 같이 무분별(無分別)이기 때문이다.27)
즉 마음에 존재하는 괴로움이나 즐거움은 대개 분별로부터 생겨나지만,28)
몸에 존재하는 괴로움과 즐거움은 그렇지가 않으니, 오로지 대상의 힘[境力]에 따라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라한 등에도 역시 이와 같은 수가 생겨나는 것이다.29)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수를 근으로 설정할 때에는 몸과 마음을 각기 달리하였던 것이다.30)
그러나 사(捨)는 [몸에 있든 마음에 있든 다 같이] 무분별로서, [분별이나 경계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저절로[任運]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근으로 설정할 때에는 몸과 마음을 합하여 하나의 수로 삼은 것이다.
또한 고수나 낙수는 몸에 있든, 마음에 있든 그것들을 손상시키기도 하고 이익되게 하기도 하는 등 그 상(相)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각기 별도의 근으로 설정하는 것이지만,
사근의 경우 몸에 있든 마음에 있든 다 같이 무분별로서, 그것들을 손상시키는 것도 아니고 이익되게 하는 것도 아니어서 그 상에 다름이 없기 때문에 [두 가지 수를] 하나의 근으로 합하여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의근ㆍ낙근ㆍ희근ㆍ사근과, 신(信) 등의 5근, 이와 같은 아홉 가지의 근이 세 가지의 도(道)에서 순서대로 3무루근을 건립하게 된다.
이를테면 견도(見道)에서는 의근 등의 아홉 가지 근에 의해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이 설정되고,
수도(修道)에서는 바로 이러한 아홉 가지 근에 의해 이지근(已知根)이 설정되며,
무학도(無學道)에서도 역시 이러한 아홉 가지 근에 의해 구지근(具知根)이 설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의 명칭은 어떠한 근거에서 설정된 것인가?
이를테면 견도에서는 일찍이 알지 못하였던 것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행상(行相)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미지당지(未知當知)’라고 설한 것이다.
또한 수도에서는 일찍이 알지 못하였던 것이 없으며, 다만 그 밖의 나머지 수면을 끊고 제거하게 되기 때문에 그러한 경계에서는 [이미 안 대상[已知境]을] 다시금 자꾸 자꾸 요지(了知)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이지(已知)’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학도에서는 스스로 이미 알았음을 알았기 때문에 ‘지(知)’라고 일컬은 것으로, 이러한 ‘지’를 가진 것을 일컬어 ‘구지(具知)’라고 하였다.
혹은 이러한 지를 자꾸 익힘으로써 이미 그 성품을 성취한 것을 일컬어 ‘구지’하였다.
이를테면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나는 고(苦)를 두루 알았고, 더 이상 두루 알 것이 없다.
……(이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고 참답게 아는 것이다.31)
따라서 바로 그러한 자들이 소유하는 근을 일컬어 미지당지근 등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근의 본질이 동일하지 않음에 대해 이미 해석하였다.32)
3) 22근과 여러 문들의 관계
이제 마땅히 22근에 대한 제문(諸門)의 의미와 종류의 차별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33)
[근과 유루/무루]
이러한 22근 중의 몇 가지가 유루이고, 몇 가지가 무루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오로지 무루인 것은 뒤의 세 가지이며
유색근(有色根)과 명근과 우근과 고근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오로지 유루임을.
그 밖의 아홉 가지 근은 두 가지 모두와 통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바로 앞에서 설한 최후 세 가지 근의 본질은 오로지 무루이다.
무루란 바로 무구(無垢)의 뜻으로,34) 구(垢)와 누(漏)는 그 명칭만 다를 뿐 본질은 동일하다.
일곱 가지의 유색근(有色根)과 명근과, 그리고 우근과 고근은 한결같이 유루이다.
여기서 유색근이란 안(眼) 등의 5근과 여근ㆍ남근을 말하니, 이는 색온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의근과 낙근과 희근과 사근과 신(信) 등의 5근, 이러한 아홉 가지 근은 모두 유루와 무루에 통한다.35)
그런데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신(信) 등의 5근도 역시 오로지 무루이니, 그래서 세존께서 설하시기를,
‘만약 이러한 신 등의 5근을 전혀 갖지 않았다고 한다면, 나는 그를 외(外) 이생품(異生品)에 머무는 이라고 설할 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다.”36)
그러나 이러한 경설(經說)은 진실된 논증이 아니니, 무루근에 의거하여 이러한 말씀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먼저 무루인 신 등 5근에 의거하여 온갖 성위(聖位)의 차별을 건립하고서 이러한 말씀을 설하였기 때문이다.37)
혹은 여러 이생(異生) 중에는 간략히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내(內) 이생이며,
두 번째는 외(外) 이생이다.
내 이생이란 이를테면 선근(善根)을 끊지 않은 자를 말하고,
외 이생이란 이를테면 선근이 이미 끊어진 자를 말하는데,
바로 외 이생에 의거하여 이와 같이 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만약 이러한 신 등의 5근을 전혀 갖지 않았다고 한다면, 나는 그를 외 이생품에 머무는 이라고 설할 것이다’라고.38)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온갖 유정은 세간에 머무는 동안 혹 어떤 이는 [신 등의 5근을] 낳기도 하고, 혹은 어떤 이는 기르기도 하는 등 상ㆍ중ㆍ하 제근의 차별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 때는 바로 부처님께서 아직 법륜(法輪)을 굴리지 않으신 때였다.39)
그러므로 신 등의 5근은 역시 또한 유루와 통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던 것이다.
“내가 만약 이러한 신 등의 5근에 대하여,
이것은 바로 집(集)이고, 이것은 바로 몰(沒)이고, 이것은 바로 미(味)이고,
이것은 바로 과환(過患)이고, 이것은 바로 출리(出離)임을 아직 참답게 알지 못하였다면,
이러한 천(天)과 인간의 세간과 마군과 범천(梵天) 따위를 아직 능히 뛰어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40)
즉 무루법에서는 이와 같은 품류(집ㆍ몰 따위)로 관찰되지 않기 때문에 신 등의 5근은 유루와 무루 모두와 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루와 무루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근과 이숙/비이숙]
그렇다면 22근 중의 몇 가지가 이숙(異熟)이며, 몇 가지가 이숙이 아닌 것[非異熟]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명근은 오로지 이숙일 뿐이며
우근과 뒤의 여덟 가지는 이숙이 아니다.
유색근과 의근과 나머지 네 가지 수근은
하나하나가 모두 두 가지와 통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명근 하나만이 결정코 이숙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제(諸) 아라한(阿羅漢)의 유다수행(留多壽行)의 본질도 바로 명근인가?
그렇다면 그와 같은 명근은 누구의 이숙인가?41)
본론(本論;『발지론』 권제12)에서 설한 바와 같다. 즉
“무엇을 일러 필추(苾芻)의 유다수행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아라한으로서, 신통을 성취하고, 자재(自在)를 획득하고서,
혹은 승중(僧衆)에 대해, 혹은 개인에게 수명과 관계있는 의발(衣鉢) 등의 물건을 분수에 맞게 보시를 하고, 보시하고 나서 발원(發願)하고,
바로 제4 변제정려(邊際靜慮)에 들고, 선정으로부터 일어나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기를,
‘능히 부(富)의 이숙을 초래하는 나의 모든 업, 그것들이 모두 전이하여 목숨[壽]의 이숙과를 초래하기를 원한다’고 하면,
그 때 능히 부의 이숙과를 초래하는 그의 업은 모두 전이하여 목숨의 이숙과를 초래하게 된다.”42)
혹은 다시 어떤 이는 숙업(宿業)의 나머지 이숙과를 인기(引起)하여 취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즉 그는 설하기를,
“전생(前生)에 일찍이 받은 업 중에 남겨진 이숙이 있으니, 지금 닦고 있는 변제정의 힘에 의해 그것을 인기하여 수용하게 된다”고 하였다.43)
그렇다면 무엇을 일컬어 필추의 사다수행(捨多壽行)이라고 하는가?44)
이를테면 아라한으로서, 신통을 성취하고, 자재를 획득하고서,
승중 등에 대해 앞에서와 같이 보시를 하고, 보시하고 나서 발원하고,
바로 제4 변제정려에 들고, 선정으로부터 일어나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기를,
‘능히 목숨의 이숙을 초래하는 나의 모든 업, 그것들이 모두 전이하여 부의 이숙과를 초래하기를 원한다’고 하면,
그 때 능히 목숨의 이숙과를 초래하는 그의 업은 모두 전이하여 부의 이숙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존자 묘음(妙音)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그는 제4 변제정의 힘을 일으켜 색계 대종(大種)을 인취(引取)하여 [욕계] 소의신 중에 현전하게 될 때,
그러한 대종이 혹 어떤 경우 수행(壽行)에 따르기도 하고, 혹 어떤 경우 수행에 어긋나기도 하니,45)
이러한 인연에 의해 혹 어떤 경우 수행을 연장[留]하기도 하고, 혹은 어떤 경우 수행을 단축[捨]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땅히 이와 같이 설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아라한[의 유다수행]은 이러한 자재의 삼마지(三摩地), 다시 말해 언제라도 입정할 수 있는 선정의 힘에 의한 것이다.
즉 일찍이 획득한 숙업에 의해 생겨난 [현행하는] 제근(諸根) 대종의 지속력[住時勢分]을 전환시켜 아직 획득하지 못한 [미래의] 선정의 힘에 의해 낳아질 제근대종의 지속력을 인기하여 취하기 때문에 이러한 명근은 이숙이 아니며, 그 밖의 나머지 일체[의 명근]은 모두 바로 이숙이다.”46)
논의에 의해 또 다른 논의가 생겨나는 법이니,
그렇다면 그러한 아라한은 어떠한 인연이 있어 유다수행하게 되는 것인가?
이를테면 타인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혹은 성교(聖敎)가 세상에 오랫동안 머물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자신의 수행(壽行)이 장차 다할 것을 관찰하여 알 때,
혹은 다른 이들에게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목적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관찰하였을 때,
[바야흐로 유다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어떠한 인연이 있어 사다수행(捨多壽行)하게 되는 것인가?
그러한 아라한이 타인에 대해 이익되게 하거나 안락하게 함이 적으면서 세상에 머문다고 스스로 관찰하였을 때,
혹은 질병 등의 괴로움이 자신을 핍박하게 될 때,
[바야흐로 사다수행하게 되는 것이니],
어떤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범행이 잘 성취되어 이루어졌고
성도(聖道)도 이미 잘 닦았으니
목숨이 다할 때 환희스러워 함은
마치 뭇 병들을 떨쳐 버리는 것과 같네.47)
여기서 마땅히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처소에 의지하여 누가 능히 이와 같이 수행을 연장하기도 하고 단축하기도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세 대주(大洲)의 인간이면서 여ㆍ남의 상속(相續)을 지닌 자로서 불시해탈(不時解脫)을 획득한 모든 아라한이 그렇게 할 수 있으니,48) 그의 소의신 중에는 자재정(自在定)이 존재하고 번뇌가 없기 때문이다.49)
경에서 설하기를,
“세존께서는 다수의 명행[多命行]을 연장[留]하기도 하였고, 다수의 수행[多壽行]을 단축[捨]하기도 하였다고 하였는데,50) 명(命, jīvita)과 수(壽, āyuḥ)는 무엇이 다른가?”51)
어떤 이는 말하기를,
“차별이 없다”고 하였으니,
본론(本論)에서,
“무엇을 일컬어 명근이라 하는가? 이를테면 3계의 목숨[壽]이다”고 말한 바와 같다.52)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지난 세(世)의 업의 과보를 일컬어 수행이라 하고, 현재 업의 과보를 일컬어 명행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명근)에 따라 중동분이 머무는 것을 일컬어 수행이라 하고, 이(보시의 업)에 따라 중동분이 잠시 동안 머무는 것을 일컬어 명행이라 한다”고 하였다.53)
그리고 [유ㆍ사다수행의] ‘다(多)’라고 하는 말은 다찰나[多念]에 걸쳐 명행과 수행을 연장하고 단축한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니, 일찰나의 명행과 수행은 연장되거나 단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54)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 말은 ‘하나의 실체로서의 명과 수가 존재하며, 그것이 다수의 시간을 거치면서 지속한다’는 주장을 막기 위한 것이다”고 하였다.55)
혹은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 말은 하나의 실체[一實]로서의 명과 수는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다수의 [유위]행 상에서 이와 같은 명과 수라고 하는 두 가지 명칭을 일시 설정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마땅히 ‘행’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56)
그렇다면 세존은 어떠한 이유에서 다수의 수행(壽行)을 단축하고, 다수의 명행(命行)을 연장하였던 것인가?
죽음에 대해 자재를 획득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해 다수의 수행을 단축하였으며, 삶에 대해 자재를 획득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해 다수의 명행을 연장하였던 것이다.
즉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오로지 3개월간만을 연장하였던 것은 그 이상으로 증가할 경우 교화할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 이하로 감소할 경우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 충분[究竟]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일찍이 스스로를 칭하여 말하기를,
“나는 4신족(神足)을 잘 닦았기 때문에 1겁 혹은 1겁 이상이라도 머물고자 하기만 하면 마음이 바라는 대로 바로 능히 머물 수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 말을 성립시키기 위해서였다.57)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는 온(蘊)과 사(死)의 두 가지 마(魔)를 능히 조복할 수 있음을 나타내니, 세존께서는 일찍이 보리수 밑에서 이미 천마(天魔)와 번뇌마(煩惱魔)를 조복하였기 때문이다.”58)
옆 갈래의 논의[傍論]를 이미 마쳤으니, 이제 마땅히 정론(正論)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근과, 뒤의 신(信) 등의 여덟 가지 근은 모두 이숙이 아니니, 바로 유기성(有記性)이기 때문이다.59)
그리고 그 밖의 열한 가지 근은 두 가지 모두와 통하니, 그 뜻에 준하여 볼 때 이미 다 설명한 셈이다.
즉 일곱 가지의 색근(안 등 5근과 여근ㆍ남근)과 의근과, 우근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수근 등 열두 가지는 하나하나가 모두 두 가지와 통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곱 가지 유색근으로서, 만약 장양된 것[所長養] 즉 후천적인 식사 등에 의해 길러진 것이라면 이숙이 아니지만, 그 밖의 경우는 모두 이숙이다.
의근과 네 가지 수근으로서, 만약 선한 것이거나 염오한 것, 혹은 위의로(威儀路:行ㆍ住ㆍ坐ㆍ臥 등의 행동거지)나 공교처(工巧處:공교로운 身ㆍ語業), 그리고 능히 변화[能變化]할 때의 그것이라면, 그것은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이숙이 아니지만, 그 밖의 경우는 모두 이숙이다.
만약 우근이 이숙이 아니라고 설한다면, 다음의 경에서 설하는 바를 마땅히 어떻게 회통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3종의 업이 있으니, 순희수업(順喜受業)과 순우수업(順憂受業)과 순사수업(順捨受業)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수와 상응한다는 사실을 ‘순(順:따른다)’이라는 말로 표현하여도 여기에 아무런 과실이 없다.
말하자면 업이 우수와 상응하기 때문에 ‘순우수업’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이는 낙수와 상응하는 촉을 순락수촉(順樂受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60)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순희수업이나 순사수업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니,61) 동일한 경설(經說)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따른다 할지라도 나의 설에는 이치에 어긋남이 없으니, 이숙과 상응의 이치상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62)
그럴 경우 힐난을 피할 도리가 없으니, 그대가 이같이 경설을 회통하였을지라도 이치상 실로 어떠한 근거에서 우근은 이숙이 아닌 것인가?
우근은 차별을 분별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으로, 그것의 지식(止息)도 역시 그러하지만, 다시 말해 차별을 지식함으로서 그것도 지식되지만 이숙은 그렇지가 않다.63)
만약 그렇다면 희근도 마땅히 이숙이 아니어야 할 것이니, 이것도 역시 분별에 의해 생겨나고, [분별이 지식되면] 아울러 지식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약 우근이 바로 이숙이라고 인정할 경우, 무간업(無間業)을 짓고 나서 그것으로 인해 바로 근심[憂]이 생겨나는데, 마땅히 그러한 업이 그 때 결과로서 이미 성숙하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64)
그렇다면 역시 마땅히 희근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따지고 힐난해야 할 것이니, 만약 희근이 바로 이숙이라고 인정할 경우 뛰어난 복업(福業)을 짓고 나서 그것으로 인하여 바로 기쁨[喜]이 생겨나는데, 마땅히 그러한 업이 그 때 결과로서 이미 성숙하였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모두 이와 같이 주장한다.
“이미 욕탐을 떠난 자에게는 우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숙은 그렇지 않으니, 그렇기 때문에 [우근은] 이숙이 아닌 것이다.”65)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욕탐을 떠난 유정의 이숙의 희근도 마땅히 [그러하다고] 설해야 할 것인데, 어떠한 상(相)에 의해 그것(이숙의 희근)이 있음을 아는 것인가?66)
그것이 갖는 상에 따라 이것의 상도 역시 그러하다.
(이욕자에게도 선의 희근이 있다고 하는 특징에 미루어 무기의 희근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선의 희근이 이러한 상태(욕탐을 떠난 상태)에서 있을 수 있듯이 무기의 이숙도 마땅히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태 중에서 우근은 그 어떠한 종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결정코 이숙이 아닌 것이다.(만약 그것이 이숙이라면 이러한 상태에서도 있어야 한다.)
나아가 안 등의 여덟 가지 근으로서67) 만약 선취(善趣)에 있는 것이라면 이는 바로 선업의 이숙이지만, 악취(惡趣)에 있는 것이라면 이는 바로 악업의 이숙이다.
의근의 경우, 선취에 있든 악취에 있든 그것은 바로 두 가지 모두의 이숙이며,68) 희ㆍ낙ㆍ사 근은 어떠한 취에 있을지라도 바로 선업의 이숙이다.
그러나 고근의 경우 선취에 있든 악취에 있든 그것은 바로 악업의 이숙이다.
그리고 선취 중에서 [여ㆍ남의] 2형(形)을 갖은 자는 오로지 [양]근이 위치한 장소만이 불선업에 의해 초래된 것이니, [일반적으로] 선취의 색근은 선업이 인기(引起)한 것이기 때문이다.69)
이와 같이 이러한 이숙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근, 이숙과를 갖는 것/갖지 않는 것]
그렇다면 22근 중의 몇 가지가 이숙과를 갖는 것[有異熟]이며, 몇 가지가 이숙과를 갖지 않는 것[無異熟]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우근은 결정적으로 이숙과를 갖으며
앞의 여덟 가지와 뒤의 세 가지는 갖지 않는다.
의근과, 그 밖의 수근과 신(信) 등은
하나하나가 모두 두 가지와 통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근은 결정적으로 이숙과를 갖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오로지[唯]’와 ‘뛰어넘어[越]’라는 뜻에 근거하여 본송에서 ‘결정적으로’라는 말을 설하였으니,
이를테면 그것은 우근이 ‘오로지’ 이숙을 갖는 것이며, 아울러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뜻을 갖추었기 때문에 순서를 ‘뛰어넘어’ 설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뜻을 갖추었다고 함은, 우근은 강한 의지[强思]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무기가 아니며,70)
[선정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욕계] 산지(散地)의 것이기 때문에 역시 또한 무루가 아니다는 사실을 말한다.
곧 이러한 사실(두 가지 뜻)에 의해 순서를 뛰어넘어 먼저 ‘우근은 결정적으로 이숙과를 갖는다’고 설하게 된 것이다.71)
안근 등의 앞의 여덟 가지와 최후의 세 가지 근은 결정코 이숙과를 갖지 않으니,72)
앞의 여덟 가지는 무기이기 때문이며,
뒤의 세 가지는 무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밖의 근은 모두 두 가지와 통하는 것이니, 그 뜻에 준거해 볼 때 이미 설명한 셈이다.
이를테면 의근과, [우근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수근(受根)과, ‘신(信) 등’이라고 하는 말로 등취(等取)되는 정진(즉 勤) 등의 네 가지 근 등, 이러한 열 가지는 하나하나가 모두 두 가지와 통하는 것이다.
즉 의근과 낙근과 희근과 사근으로서,
만약 불선이나 선한 유루이면 이숙과를 갖지만,
만약 무기이거나 무루라면 이숙과를 갖지 않는다.
또한 고근으로서,
만약 선하거나 불선이면 이숙과를 갖지만,
만약 무기이면 이숙과를 갖지 않는다.
그리고 신(信) 등의 5근으로서,
만약 유루이면 이숙과를 갖지만,
만약 무루라면 이숙과를 갖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이숙과를 갖는 것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근과 선/불선]
그렇다면 22근 중의 몇 가지가 선이고, 몇 가지가 불선이며, 몇 가지가 무기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오로지 선인 것은 뒤의 여덟 가지 근뿐이며
우근은 선과 불선에 통하며
의근과 나머지 수근은 세 종류와 통하며
앞의 여덟 가지는 오로지 무기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신(信) 등의 여덟 가지 근은 한결같이 선이다.73)
이것들의 수차(數次)는 비록 뒤에 있을지라도 앞의 내용을 이어받기 때문에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74)
우근은 오로지 선과 불선의 성질에만 통하며,
의근과 [우근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수근은 각각 세 종류(선ㆍ불선ㆍ무기)와 통한다.
그리고 안 등의 여덟 가지 근은 오로지 무기성이다.75)
이와 같이 선ㆍ불선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근과 3계]
그렇다면 22근 중의 몇 가지가 욕계의 계(繫)이고, 몇 가지가 색계의 계이며, 몇 가지가 무색계의 계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ㆍ색계ㆍ무색계에 계속(繫屬)되는 것은
차례대로 뒤의 세 가지를,
그것과 함께 여근과 남근과 우근과 고근을,
아울러 색근과 희근과 낙근을 제외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는 뒤의 3무루근을 제외하는 것이니, 그러한 세 가지 근은 오로지 불계(不繫)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욕계의 계(繫)에는 오로지 열아홉 가지의 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색계는 앞의 욕계와 마찬가지로 3무루근을 제외하며,
남근과 여근과 우근과 고근의 네 가지도 역시 제외하니,
이에 따라 열다섯 가지의 근은 역시 색계의 계에도 통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즉 여근과 남근을 제외하는 것은, 색계는 이미 음욕(婬欲)의 법을 떠났기 때문이며,
여근과 남근이 있는 신체는 누추하기 때문이다.76)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그들(색계의 유정)을 설하여 남자라고 하는 것인가?
어디서 그렇게 설하고 있는 것인가?
계경 중에서 그렇게 설하고 있다.77) 이를테면 계경에서 설하기를,
“여신(女身)이 범천(梵天)이 되는 것은 도리[處]에도 맞지 않고, 가능성[容]도 없다.
그러나 남신(男身)이 범천이 되는 것은 도리에도 맞고 가능성도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남근과는] 별도의 남자의 상이 있으니, 이를테면 그곳에는 욕계 중에서 남자의 몸이 갖는 상이 있기 때문으로, [남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78)
그리고 그곳(색계)에 고근이 없는 것은 신체가 정묘(淨妙)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곳에는 불선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79)
또한 우근이 없는 것은 사마타(奢摩他, śamatha:止의 선정을 말함)의 상속이 윤택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곳에는 결정코 뇌해(惱害:분발심)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무색계에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3무루근과 여근ㆍ남근ㆍ우근ㆍ고근을 제외하며, 아울러 다섯 가지 색근(色根)과 희근과 낙근을 제외한다.
이에 따라 그 밖의 나머지 여덟 가지 근이 무색계의 계(繫)와 통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의근과 명근과 사근과 신(信) 등의 5근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이 욕계의 계(繫)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근과 견소단/수소단/비소단]
그렇다면 22근 중의 몇 가지가 견소단(見所斷)이고, 몇 가지가 수소단(修所斷)이며, 몇 가지가 비소단(非所斷)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의근과 세 가지 수근은 세 가지와 통하며
우근은 견소단이자 수소단이며
아홉 가지는 오로지 수소단이며
다섯 가지는 수소단ㆍ비소단이며, 세 가지는 비소단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의근과 희근ㆍ낙근ㆍ사근은 각기 세 가지와 통하니, 그것들은 모두 견ㆍ수ㆍ비소단과 통하기 때문이다.80)
우근은 오로지 견소단과 수소단과 통할 뿐이니, 무루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곱 가지의 색근과 명근ㆍ고근은 오로지 수소단일 뿐이니,
그것들은 염오하지 않은 법이기 때문이며,
제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이기 때문이며,81)
또한 그것들은 모두 유루법이기 때문이다.
신(信) 등의 5근은 혹은 수소단인 경우도 있고, 혹은 비소단인 경우도 있으니,
염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들은 모두 유루와 아울러 무루와 통하기 때문이다.82)
최후의 세 가지 근은 비소단이니,
그것들은 모두 무루이기 때문이다.
즉 어떠한 허물도 없는 법[無過法]은 끊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2근에 대한 제문(諸門)의 유형과 뜻의 차별에 대해서는 이미 논설하였다.
[3계 이숙근의 획득]
어떠한 계(界)에서 몇 가지의 이숙근(異熟根)을 최초로 획득하게 되는 것인가?83)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의 태생(胎生)ㆍ난생(卵生)ㆍ습생(濕生)은
최초에 두 가지의 이숙근을 획득하고
화생(化生)은 여섯ㆍ일곱ㆍ여덟 가지를
색[계]는 여섯 가지를, 그 위에서는 오로지 명근만을 획득한다.84)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의 태생과 난생과 습생은, 최초로 생을 받을 단계에서는 오로지 신근과 명근 두 가지 이숙근만을 획득하니, 이러한 세 가지 생에서 [그 밖의 다른] 근은 점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85)
그 같은 단계에서 어찌 의근과 사근의 두 근을 획득하지 않을 것인가?86)
이것들이 속생(續生)할 때에는 결정코 염오한 것이기 때문이다.87)
화생의 최초의 단계에는 여섯 가지와 일곱 가지와 여덟 가지를 획득한다.
즉 무형자(無形者:남녀의 성이 없는 자)는 처음에 6근을 획득하니, 이를테면 태초[劫初]의 시절의 유정과도 같다.88)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이른바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명 근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만약 일형자(一形者)라면 처음에 일곱 가지를 획득하니, 이를테면 온갖 천(天) 등의 유정과도 같다.
만약 이형자(二形者)라면 처음에 여덟 가지를 획득한다.89)
어찌 이형(二形)으로서 화생을 받는 자가 있을 것인가?90)
악취(惡趣) 중에는 이러한 이형의 화생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91)
욕계 중에서 최초로 획득하는 근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색계와 무색계의 경우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욕계에서는 욕탐이 수승하기 때문에 [본송에서] 다만 ‘욕’이라고 말한 것이고,
색계는 형색이 수승하기 때문에 다만 ‘색’이라고 말하였으니,
계경에서도 역시 말하기를,
“적정(寂靜)의 해탈은 형색을 뛰어넘은 것으로 무색이다”고 하였던 것이다.92)
색계에서는 처음에 여섯 가지의 이숙근을 획득하니, 이를테면 욕계 화생의 무형자의 경우에서 설한 바와 같다.
그리고 [본송에서] ‘그 위에서는 오로지 명근 만을 획득한다’고 함에 있어,
무색계에서는 정(定)도 수승하고 생(生)도 수승하기 때문에 ‘위[上]’라는 말을 설한 것이다.93)
즉 무색계에서 최초로 획득하는 이숙근은 오로지 명근뿐으로, 그 밖의 다른 근은 획득하지 않는다.
[생을 받을 때] 최초로 획득하는 이숙근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3계와 근의 멸]
그렇다면 어떠한 계(界)에서 죽을 때, 몇 가지의 근이 최후로 멸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바로 죽을 때에 멸하는 온갖 근의 수는
무색계에서는 세 가지이고, 색계에서는 여덟 가지이며
욕계에서 갑작스레 죽는 자는 열 가지ㆍ아홉 가지ㆍ여덟 가지이고
서서히 죽는 자는 네 가지인데, 선한 이에게는 다섯 가지가 더해진다.
논하여 말하겠다.
무색계에 있다가 장차 목숨을 마치고자 할 때에는 명근과 의근과 사근의 세 가지가 최후로 멸한다.94)
그러나 만약 색계에 있다가 장차 목숨을 마치고자 할 때라면, 앞의 세 가지 근과 안(眼) 등의 5근, 이와 같은 여덟 가지의 근이 최후로 멸하니, 일체의 화생(즉 색계 유정)은 제근을 갖추고서 태어나고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욕계에 있다가 갑작스레[頓] 목숨을 마칠 때에는 열 가지와 아홉 가지와 여덟 가지가 최후로 멸한다.
이를테면 이형자는 최후에 열 가지 근이 멸하니, 여근과 남근, 그리고 앞에서 설한 여덟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일형자일 경우 최후로 아홉 가지가 멸하니, 말하자면 여근과 남근 중 어느 한 가지를 제외한 그것이다.
만약 무형자의 경우라면 최후로 여덟 가지가 멸하니, 말하자면 여근과 남근은 없고 오로지 앞에서 설한 여덟 가지만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설은 [욕계에서] 갑작스레 목숨을 마치는 자에 대한 것이었다.
만약 천천히[漸] 목숨을 마칠 때에는 최후에 오로지 네 가지 근을 버리게 된다.
즉 욕계에 있다가 천천히 목숨을 마칠 때에는 신근과 명근과 의근과 사근이 최후에 멸하니, 이러한 네 가지 근은 반드시 시간적으로 전후하여 멸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동시에 멸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설한 바는 다만 염오와 무기의 마음으로 목숨을 마치는 자의 경우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3계에 있으면서 선한 마음으로 죽을 때라면, 모든 경우에 있어 반드시 신(信) 등의 5근이 갖추어지게 된다.
따라서 앞에서 설한 일체의 상태 중에 신 등의 다섯 가지가 증가하게 되어,
이를테면 무색계에서는 증가하여 여덟 가지 근에 이를 것이며,
내지 욕계에서 천천히 목숨을 마칠 때에는 아홉 가지에 이르게 될 것이니,
그 중간의 많고 적음에 대해서는 마땅히 참답게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다.
[근과 사문과]
근을 분별하면서, 일체의 근법(根法) 그 모두에 대해 응당 마땅히 사택(思擇)해 보아야 할 것이니,
22근 중의 몇 가지 근이, 어떠한 사문과(沙門果)를 능히 증득(證得)하는 것인가?95)
게송으로 말하겠다.
아홉 가지는 양 끝[邊]의 두 가지 과(果)를 획득하고
일곱ㆍ여덟ㆍ아홉 가지로는 중간의 두 가지를 획득한다.
열한 가지가 아라한과를 획득한다 함은
한 몸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설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양 끝’이란 이를테면 예류과(預流果)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말하니, 이것은 사문과에 처음과 끝이기 때문이다.
‘중간’이란 이를테면 일래과(一來果)와 불환과(不還果)를 말하니, 이것은 처음과 끝에 비교하여 볼 때 그 중간에 있기 때문이다.
처음의 예류과는 아홉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되니,
이를테면 의근과 사근과 신(信) 등의 5근과 미지당지근과 이지근을 아홉 가지라고 하였다.
즉 미지근은 무간도(無間道)에 존재하고, 이지근은 해탈도(解脫道)에 존재하니,
이 두 가지가 서로 도와 최초의 사문과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두 가지 근은 그 순서대로 이계(離繫)의 득(得)에 대해 능히 인인(引因)과 의인(依因)이 되기 때문이다.96)
아라한과도 역시 아홉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되니,
이를테면 의근과 신(信) 등의 5근과 뒤의 두 가지 무루근과, 낙근ㆍ희근ㆍ사근 중의 어느 한 가지를 아홉 가지라고 하였다.97)
즉 이지근은 무간도에 존재하고, 구지근은 해탈도에 존재하니,
이 두 가지가 서로 도와 최후의 사문과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두 가지 근은] 그 순서대로 이계의 득에 대해 능히 인인(引因)과 의인(依因)이 되기 때문이다.
중간의 두 가지 사문과는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각기 일곱 가지ㆍ여덟 가지ㆍ아홉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바야흐로 일래과의 차제증(次第證)으로서 세간도(世間道)에 의한 것이면, 일곱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되니, 이를테면 의근과 사근과 신(信) 등의 5근이 바로 그것이다.
출세간도에 의한 것이면 여덟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되니, 이를테면 앞의 일곱 가지 근에 이지근이 여덟 번째이다.
또한 배리욕탐(倍離欲貪), 다시 말해 욕탐을 보다 많이 떠난 초월증(超越證)은 예류과와 마찬가지로 아홉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된다.98)
만약 불환과의 차제증으로서 세간도에 의한 것이면, 일곱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되고, 출세간도에 의한 것이면 여덟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되니, 앞의 차제증의 일래과를 획득하는 경우에서와 같다.
그리고 전리욕탐(全離欲貪), 다시 말해 욕계 9품의 수혹을 완전히 떠난 초월증은 아홉 가지의 근에 의해 획득되니, 앞의 초월증의 일래과를 획득하는 경우와 같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설하면 비록 그러할지라도 양자 사이에는 차별이 있으니,
이를테면 여기(전리욕탐의 초월증)에는 그것의 소의지(所依地)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낙ㆍ희ㆍ사근 중 어느 한 가지를 취할 수 있지만,
앞서 언급한 일래과의 초월증은 오로지 사근 한 가지 뿐이다.99)
또한 차제증의 불환과로서, 만약 제9 해탈도 중에서 근본지에 들 때 세간도에 의한 것이면 여덟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된다.
즉 그것의 무간도는 사수(捨受)와 상응하지만, 해탈도 중에는 다시 희수가 있어 이러한 두 가지 수가 서로 도와 제3의 사문과를 획득하게 되니, 이계의 득에 대해 두 가지 원인[引因과 依因]이 되는 것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그리고 출세간도에 의한 것이면 아홉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되니, 그 중의 여덟 가지 근은 앞에서와 같고, 이지근이 아홉 번째의 근이 된다. 즉 무간도와 해탈도에는 이것(이지근)이 다 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근본(根本) 아비달마에서 ‘몇 가지 근에 의해 아라한을 획득하게 되는가?’라고 묻고,
‘열한 가지 근이다’고 답하고 있지 않은가?100)
그럼에도 어찌하여 아홉 가지 근에 의해 획득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실로 네 번째 사문과(아라한과)를 획득하게 되는 것은 다만 아홉 가지 근에 의해서이다.
그럼에도 본론(本論, 즉 『발지론』)에서 ‘열한 가지 근이다’고 말한 것은 한 소의신 중에서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서 그렇게 설한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한 보특가라(補特伽羅)는 무학의 지위에서 빈번히 물러난 다음 희근과 낙근과 사근 중 어느 한 가지가 현전함에 따라 몇 번이고 다시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일이 있을 수 있으니,101)이에 따라 본론에서는 열한 가지의 근을 설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세 가지의 수(受)가 일시에 구기(俱起)하는 일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결정코 아홉 가지 근에 의해 [아라한과를 획득하게 된다]고 설한 것이다.
그렇다면 불환과에 대해서는 어째서 이와 같이 [열한 가지 근에 의해서라고] 설하지 않는 것인가?
만약 낙근으로 불환과를 증득하면 그 이후 물러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역시 또한 거기서 물러나고서 낙근에 의해 다시 획득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즉 먼저 이욕하고서 초월하여 세 번째 사문과를 증득한 이(초월증의 불환과)는 다시는 물러나는 일이 없으니, 이러한 이욕의 사문과는 두 가지 도(유루도ㆍ무루도)에 의해 획득되어 지극히 견고하기 때문이다.102)
[근들 사이의 성취 관계]
여기서 마땅히 사택(思擇)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떤 근을 성취하게 될 경우, 그러한 제근 가운데 결정적으로 몇 가지를 성취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명근이나 의근이나 사근을 성취하게 되면
각기 결정적으로 세 가지를 성취한다.
만약 낙근이나 신근(身根)을 성취하게 되면
각기 결정적으로 네 가지를 성취한다.
안 등의 근이나 희근을 성취하게 되면
각기 결정적으로 다섯 가지를 성취하며
만약 고근을 성취하게 되면
그것은 결정적으로 일곱 가지를 성취한다.
만약 여근이나 남근이나 우근이나 신(信) 등의 근을
성취하게 되면 각기 여덟 가지를 성취하며
그리고 두 가지 무루근은 열 한 가지를,
최초의 무루근은 열세 가지를 성취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명근과 의근과 사근 중의 하나를 성취하게 되면, 그것은 결정적으로 그와 같은 세 가지 근(즉 명근ㆍ의근ㆍ사근)을 성취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되면 그 밖의 나머지 근도 성취하지 못한다.103)
이러한 세 가지 근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일정하지 않으니, 이를테면 혹은 성취하기도 하고, 혹은 성취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이 중 안ㆍ이ㆍ비ㆍ설의 네 가지 근의 경우, 무색계에 태어난 자는 결정코 성취하지 않으며,
만약 욕계에 태어난 자로서 아직 획득하지 않았거나[未得] 이미 상실한[已失] 자 또한 역시 성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근(身根)은 오로지 무색계에 태어난 자의 경우만 결정코 성취하지 않는다.
여근과 남근 두 가지는 위의 두 세계(색계ㆍ무색계)에 태어난 자는 결정코 성취하지 않으며,
만약 욕계에 태어난 자로서 아직 획득하지 않았거나 이미 상실한 자 또한 역시 성취하지 않는다.
낙근의 경우 이생(異生)으로서 제4정(定)이나 무색계에 태어난 자는 결정코 성취하지 않으며,104)
희근의 경우 이생으로서 제3ㆍ제4정이나 무색계에 태어난 자는 결정코 성취하지 않는다.
고근의 경우 만약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난 자라면 결정코 성취하지 않으며,
우근의 경우 일체의 욕탐을 떠난 자는 결정코 성취하지 않는다.
신(信) 등의 5근은 선근(善根)이 끊어진 자에게 결정코 성취되지 않는다.
그리고 첫 번째 무루근(미지당지근)은 일체의 이생과 이주과(已住果)에 이른 자에게는 결정코 성취되지 않으며,105)
다음의 무루근(이지근)은 [수도위에 든 자만이 성취하기 때문에] 일체의 이생과 견도와 무학위에서는 결정코 성취되지 않으며,
구지근은 [무학위에 든 자만이 성취하기 때문에] 일체의 이생과 유학위에서는 결정코 성취되지 않는다.
나아가 이상의 경우 이외의 상태[非遮位], 다시 말해 성취가 부정된 경우 이외의 상태에서는 앞에서 설한 제근(명근ㆍ의근ㆍ사근을 제외한 19근)을 모두 결정코 성취하게 된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낙근을 성취하게 되면 결정코 네 가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명근ㆍ의근ㆍ사근과 이러한 낙근이 바로 그것이다.106)
그러나 만약 신근(身根)을 성취하게 되면 역시 또한 네 가지를 결정코 성취하니, 이를테면 명근ㆍ의근ㆍ사근과 이러한 신근이 바로 그것이다.107)
만약 안근을 성취하게 되면 결정코 다섯 가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명근ㆍ의근ㆍ사근ㆍ신근과 안근이 바로 그것이다.
이ㆍ비ㆍ설근도 역시 다섯 가지를 성취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앞의 네 가지는 안근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며, 다섯 번째는 바로 자신의 근이다.
만약 희근을 성취하게 되면 역시 또한 결정코 다섯 가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명근ㆍ의근ㆍ사근ㆍ낙근과 희근이 바로 그것이다.108)
제2정려지(靜慮地)에 태어나 아직 제3정려를 획득하지 않았으면 하지(下地)를 버리고 아직 상지(上地)를 획득하지 않은 것인데, 이러한 자는 어떠한 낙근을 성취하는 것인가?109)
‘제3정려의 염오한 낙근을 성취한다’고 응당 말해야 할 것이니,110) 그 밖의 것은 아직 획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고근을 성취하게 되면 결정코 일곱 가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신근ㆍ명근ㆍ의근과 우근을 제외한 네 가지 수근(受根)이 바로 그것이다.111)
만약 여근을 성취하게 되면 결정코 여덟 가지를 성취하니, 일곱 가지는 고근에서 설한 바와 같고, 여덟 번째의 것은 여근이다.
만약 남근을 성취하게 되면 역시 또한 여덟 가지를 성취하니, 일곱 가지는 고근에서 설한 바와 같고, 여덟 번째의 것은 남근이다.
만약 우근을 성취하게 되면 역시 또한 여덟 가지를 성취하니, 일곱 가지는 고근에서 설한 바와 같고, 여덟 번째의 것은 우근이다.
신(信) 등의 근을 성취하게 되면 역시 각기 여덟 가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명근ㆍ의근ㆍ사근과, 신 등의 5근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구지근을 성취하게 되면 결정코 열한 가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명근과 의근ㆍ낙근ㆍ희근ㆍ사근과 신(信) 등의 5근과 그리고 구지근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이지근을 성취하게 되더라도 역시 결정코 열한 가지를 성취하니, 열 가지의 근은 앞에서와 같고, 그리고 이지근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미지근을 성취하게 되면 결정코 열세 가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신근ㆍ명근ㆍ의근ㆍ고근ㆍ낙근ㆍ희근ㆍ사근과 신(信) 등의 5근과 그리고 미지근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제근(諸根) 중 최소한으로 몇 가지의 근을 성취하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최소한 여덟 가지이니, 무선(無善)인 자는
수근과, 신근(身根)ㆍ명근ㆍ의근을 성취하고
어리석은 자로서 무색계에 태어날 때에는
선근과, 명근ㆍ의근ㆍ사근을 성취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미 선근을 끊은 자를 일컬어 ‘무선(無善)’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자는 최소한 여덟 가지 근을 성취하니,112) 이를테면 5수근과 신근과 명근과 의근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본송에서의] ‘수(受,vid)’ 즉 수근의 ‘수’란 이를테면 능히 받아들인다[受, vedanā]는 뜻이니, 능히 영납(領納, vedayate)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이는 바로 받아들이는 존재 그 자체(受性, vedanā)이기 때문에 ‘수(vid)’라고 이름한 것이니, 이를테면 원만한 존재[圓滿性]를 일컬어 ‘원만’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113)
선근을 끊은 자가 최소한으로 여덟 가지의 근을 성취하듯이, 어리석은 자로서 무색계에 태어난 자도 역시 여덟 가지의 근을 성취한다.
그리고 여기서 ‘어리석은 자’란 이를테면 이생(異生)을 말하니, 아직 진리[諦]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이를테면 신(信) 등의 5근과, 명근ㆍ의근ㆍ사근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 등의 5근은 한결같이 선한 것이기 때문에 그 모두를 일컬어 [게송에서] ‘선근’이라고 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선근)에는 마땅히 3무루근도 포섭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가 않다. 여기에서는 여덟 가지 근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이며,114) 또한 ‘어리석은 자로서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에 한정하여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근 중 최대한으로 몇 가지의 근을 성취하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최대한으로 열아홉 가지를 성취하니
이형(二形)은 세 가지 청정한 근이 제외되며
성자로서 아직 이욕(離欲)하지 않았으면
두 가지 청정한 근과 일형(一形)이 제외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모든 이형자(二形者)로서 안 등의 근을 갖춘 자는 세 가지 무루근을 제외한 나머지 열아홉 가지의 근을 성취한다. [본송에서] ‘청정함’이란 곧 무루를 말하는 것으로, 두 가지의 계박를 떠났기 때문이다.115)
즉 이형자는 반드시 욕계의 이생으로서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열 아홉 가지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오로지 이러한 자만이 열아홉 가지 근을 갖추게 되는 것인가?
[열아홉 가지 근을 성취하는 자가] 더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를테면 유학(有學)의 성자로서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자이면 최대한으로 역시 열아홉 가지를 성취하니, 두 가지 무루근을 제외하며, 아울러 일형(一形)을 제외한다.
즉 만약 견도에 머무는 자라면 이지근과 구지근이 제외되고,
만약 수도에 머무는 자라면 미지근과 구지근이 제외되며, 또한 여ㆍ남의 두 근 중 어느 한 종류도 제외되니, 모든 성자는 이형(二形)으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8계(界)의 근(根)과 비근(非根)의 차별을 분별하면서, 이에 편승하여 22근에 대해서도 널리 분별하여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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