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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당집 제1권[3]
[제1. 비바시불] 毘婆尸佛
성은 구루拘樓요, 종족은 찰리 왕족[刹利王種]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반표槃裱요, 어머니의 이름은 반두말타槃頭末陀요, 다스린 나라의 이름은 찰말제刹末提이다. 게송은 다음과 같다.
형상 없는 가운데서 몸이 태어남이
비유하자면 마치 요술에서 갖가지 형상이 나는 듯하다.
허깨비의 마음과 식, 본래 없으니
죄와 복도 모두 공空하여 머물 곳 없다.
[제2. 시기불] 尸棄佛
성은 구루요, 종족은 찰리 왕족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아륜나阿輪拏요, 어머니의 이름은 바라하월제婆羅訶越提요, 다스린 나라의 이름은 아루나화제阿樓那和提이다. 게송은 다음과 같다.
일으킨 모든 착한 법은 본래가 허깨비요
짓는 모든 악한 업도 모두가 허깨비이다.
몸은 거품 같고 마음은 바람 같아서
허깨비가 내는 것, 근거도 실체도 없다.
[제3. 비사부불] 毘舍浮佛
성은 구루요, 종족은 찰리 왕족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수바라제화須波羅提和요, 어머니의 이름은 야사월제耶舍越提요, 다스린 나라의 이름은 아뇩우마阿耨憂摩이다. 게송은 다음과 같다.
4대大를 빌려서 몸이라 하니
마음은 본래 없는데 경계 따라 생긴다.
눈앞의 경계가 없으면 마음도 없어지나니
죄와 복이 허깨비 같아 일어나자 멸한다.
[제4. 구류손불] 拘留孫佛
성은 가섭迦葉이요, 종족은 바라문婆羅門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아지달두阿枝達兜요, 어머니의 이름은 수사가隨舍迦요, 다스린 나라의 이름은 윤하리제輪訶利提이다. 게송은 다음과 같다.
몸이 진실치 않음을 보면 그것이 부처를 봄이요,
마음이 허깨비 같음을 알면 그것이 부처를 아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본래 성품이 공한 줄 알면
그 사람은 부처님과 무엇이 다르랴?
[제5. 구나함모니불] 拘那含牟尼佛
성은 가섭이요, 종족은 바라문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야섬발다耶睒鉢多요, 어머니의 이름은 울다라鬱多羅요, 다스린 나라의 이름은 차마월제差摩越提이다. 게송은 다음과 같다.
부처란, 몸을 보지 않고 아는 것이니, 이것이 부처일새.
참으로 이것을 안다면 따로 부처가 없다.
지혜로운 이는 죄의 본성이 공한 줄 알아
마음이 평온하여 생사를 두려워 않네.
[제6. 가섭불] 迦葉佛
성은 가섭이요, 종족은 바라문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아지달야바阿枝達耶婆요, 어머니의 이름은 단명월제야檀明越提耶요, 다스린 나라의 이름은 바라사波羅私이다. 게송은 다음과 같다.
모든 중생의 본성은 청정하여서
본래부터 남[生]이 없어 멸滅할 것도 없다.
그러한 몸과 마음, 허깨비에서 났으니
허깨비 가운데에는 죄와 복이 없도다.
[제7. 석가모니불] 釋迦牟尼佛
성은 석가釋迦요, 종족은 찰리 왕족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열두단閱頭檀이요, 어머니의 이름은 마하마야摩訶摩耶요, 다스린 나라의 이름은 가유라위迦維羅衛이다. 게송은 다음과 같다.
허깨비는 원인도 없고 생겨남도 없으니
모두가 자연스럽게 그러한 것으로 본다.
모든 법이 허깨비 아닌 것 없으니
허깨비는 생겨남 없으니 두려워할 것도 없어라.
이 석가모니불은 현겁賢劫의 넷째 부처님이시다. 세 겁 가운데서 처음의 천 부처님은 화광불花光佛을 시작으로 해서 비사부불毘舍浮佛이 마지막이니, 과거 장엄겁莊嚴劫에 성불하셨고, 중간의 천 부처님은 구루손불拘樓孫佛에서 시작하여 누지여래樓至如來가 마지막이니, 현재의 현겁에서 차례로 성불하신다. 끝의 천 부처님은 일광여래日光如來를 시작으로 수미상불須彌相佛이 마지막이니, 미래의 성수겁星宿劫에 성불하신다. 현겁의 시초에 향기로운 물이 가득하였는데, 천 송이의 큰 연꽃이 떠 있었다. 범천梵天의 왕들은 제4 선천禪天에서 이런 상서祥瑞를 내려다보고 서로 말했다.
“지금 이 세계가 이루어지면 천 명의 현인이 세상에 나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를 현겁이라 한다.
『인과경因果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석가여래께서 성불하시기 전 큰 보살이셨을 때의 이름은 선혜善慧라고도 하고, 인욕忍辱이라고도 하였다. 공부가 다 되어 보처補處의 자리에 오르시어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시니, 이름을 성선聖善이라고도 하고, 호명護明이라고도 하였다. 범천의 왕들에게 보처의 수행법을 말씀하시고, 또한 시방에서 몸을 나투어 설법하시다가 때가 이르니, 곧 성불하셨다. 아래 세상의 나라 중 어디가 중앙인지를 살피시어 가비라국迦毘羅國이 가장 중심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본기경本起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의 위신력은 가장 높으시고 가장 존귀하시니, 변두리의 험한 나라에는 태어나시지 않는다. 이 가비라국은 3천 일월의 하늘과 땅에서 가장 중심이 된다. 예로부터 여러 부처님들이 모두 여기에 나타나셨다.”
『구사론俱舍論』에서는 “섬부주剡浮洲의 중심”이라 했고,
『산해경山海經』에서는 “신독(身毒:인도)에는 헌원씨軒轅氏가 살았다”고 하였다.
곽박郭璞의 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것은 곧 중천축中天竺이다. 그 나라는 저절로 다섯 천축으로 나뉘었는데, 중천축은 천지의 중심으로 이름부터가 변두리가 아님을 나타내니, 중심의 뜻이 분명하다.”
『인과경因果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천축 대하大夏의 나라에는 네 종족이 있으니, 찰리刹利 종족과 바라문婆羅門 종족과비사라毘舍羅 종족과 수다라首陁羅 종족이다.”
이중에서 찰리 왕족이 가장 존귀하여 겁초부터 대를 이어 끊이지 않았다. 나머지 세 종족은 여기에서 논의할 바가 아니요, 다만 부처님 종족만을 밝히려 함이니, 자연 다섯으로 나뉜다.
또 『장아함경長阿含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계가 처음 이루어졌을 때는 해와 달이 아직 없었다.
광명천光明天의 신들 가운데 복을 다 써버린 이들이 하계로 내려와 모두가 인간이 되었다.
환희식歡喜食을 먹고 살며, 몸에는 광채가 나서 멀리까지 비추며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남녀ㆍ존비ㆍ친속의 차별이 없었다.
그러다 자연의 지미地味가 생겨났는데 그 맛이 꿀 같아서 간혹 맛을 보는 이가 있게 되고, 급기야 다투어 먹는 일이 생겨나면서 광채도 신통도 위엄도 모두 사라져서 속절없이 땅에 있게 되었다.
많이 먹은 이는 얼굴이 초췌해지고, 적게 먹은 이는 얼굴이 윤택해져 구별되게 되었다.
지미가 사라지고 지피地皮가 생겨나니, 지피를 먹음으로써 모든 죄악이 생겼고,
또 임등林藤과 멥쌀 등 여러 가지 맛있는 것이 생겼는데, 그것들을 먹음으로써 남녀의 성기가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점점 변하여 드디어 혼인 중매의 법과 애 낳는 일이 생겼다.”
『누탄경樓炭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연히 돋아난 멥쌀은 아침에 베면 저녁에 다시 돋는다.”
『중아함경中阿含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쌀의 길이는 네 치인데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미리 가지려 하였다. 이와 같이 서로 죽이면서 미리 가지려 한 곳에서는 쌀이 다시 나지 않았다.”
『장아함경長阿含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때 중생들은 다시 나지 않는 것을 보자 제각기 근심하였고, 서로 논밭과 집을 장만하여 경계가 생겼다.
저마다 갈무리하기 시작한 뒤로부터는 남의 밭의 곡식을 훔치는 이가 생겼는데, 이로 인해 싸움이 일어나도 판가름 낼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으므로 한 사람을 추대하여 평등주平等主라 부르고, 착한 이에겐 상을, 악한 이에게는 벌을 주는 일을 주관케 하고서 모두가 공동으로 그의 생활을 보장해 주기로 의견을 모았다.
마침 강직한 성품에다 풍모도 점잖은 이가 있어 뭇 사람들이 믿고 복종한다기에 가서 부탁하였는데, 그가 승낙함으로써 민주民主라는 칭호가 생겨났다.”
『누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우두머리로 추대하고 왕이라 호칭하였는데, 법에 따라 조세租稅를 취하였으므로 찰리刹利라 이름하였다. 이는 전지주田地主를 풀이한 것이다. 이때 염부제閻浮提는 천하가 부유하고 안락하여 땅에는 푸른 풀이 돋아 공작의 털과 같았고, 8만의 고을이 서로 부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즐비하였으며, 추위ㆍ더위ㆍ병고ㆍ번뇌 등이 전혀 없었다. 왕이 바른 법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열 가지 선을 받들어 행하여 서로가 공경함이 마치 부자지간父子之間 같았다. 사람들의 수명은 지극히 길어서 헤아릴 수 없더니, 나중에 다른 왕들이 바른 법을 행하지 않자 그들의 수명은 차츰 줄어 1만 세에 이르렀다가 다시 지금의 1백 세에 이르렀다. 처음에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왕이 되어 차츰차츰 전하여 보살과 라후라羅睺羅에 이르러서 장손의 대는 영원히 끊기고, 나머지 종족의 지류만이 아직까지 지위를 이어가고 있는 상태이다. 이하부터는 광범위하게 전륜왕轉輪王과 속산왕粟散王의 계보를 서술하려 한다. 처음의 민주民主는 대인왕大人王이요, 둘째는 진보왕珍寶王이니, 이렇게 하여 제33대가 선사왕善思王이다. 이들 33왕이 대대로 이어갔으나 모두가 속산왕이었고, 이 다음은 모두가 전륜왕으로서 대대로 적자嫡子가 이어가다가보살에게 이르렀다.”
『누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사왕眞闍王에게 파책가波迮迦라는 태자가 있었다. 풀이하면 대어왕大魚王이다.”
『불본행경佛本行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천축에 포다나褒多那라는 성이 있는데 백성이 많았고, 거기에 대어왕大魚王이란 임금이 계셨다. 이 왕으로부터 대명칭왕大名稱王에 이르기까지 자손이 대를 이었으니, 그 후예들은 수효가 모두 84,272왕으로 모두가 금륜왕金輪王이었다. 마지막 두 왕이 염부제의 주인이 되었는데, 한 왕의 이름은 묘초왕茆草王이다. 묘초왕에게 태자가 있었으니 이름은 대묘초왕이었다. 대묘초왕에게는 왕위에 오를 태자가 없어서 항상 생각하였다.
‘우리 조상은 대대로 이어오는 금륜왕의 후손인데 나는 지금 후사가 없으니, 우리 종족이 끊기지 않을까 걱정이다. 내가 출가를 한다면 왕의 종족이 끊길까 걱정되고, 내가 출가하지 않으면 성현의 종성種姓이 끊길까 걱정이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나라 일을 대신들에게 맡기고 산에 들어가 수도하여 다섯 가지 신통을 얻었으니, 그 이름은 왕선王仙이었다.
왕선에게는 출가하기 전에 부인이 있었으니, 이름은 선습善襲이었다. 왕선이 아직 왕궁에 있을 때 태기가 있다가 나중에 아들을 낳았으니 대묘초왕의 후손이다.
후에 여러 대신들이 왕선의 태자인 줄 알고서 곧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이름이 차왕遮王, 또는 울마왕鬱摩王, 또는 의마왕懿摩王이었다. 왕에게 두 왕비가 있었으니, 하나는 선현善賢이요, 또 하나는 묘단정妙端正이었다.
묘단정 부인에게 네 태자가 있었으니, 첫째는 거면炬面이요, 둘째는 금색金色이요, 셋째는 상중象衆이요, 넷째는 별성別成이었다. 선현 부인에게는 외아들이 있었으니, 이름은 장수長壽요, 얼굴은 매우 단엄하여 세상에 짝할 이가 없었으나 다만 씩씩한 기상이 없어서 왕위를 이을 수가 없었다. 이에 선현 부인이 생각하였다.
‘거면을 비롯한 묘단정의 네 아들은 번성한데 나는 지금 오직 이 한 아들뿐이다.
비록 그가 단정하기는 하나 왕위를 이을 수 없으니, 어떤 방편을 써야 내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할까?’
그때 차왕이 대궐 뒤뜰에 행차하여 여러 후궁들을 위로하고 있었는데, 선현 부인이 나와서 왕께 아뢰었다.
‘저는 모든 것이 만족합니다만 오직 한 가지 소원만을 대왕께 더 청하겠으니 대왕께서 이루어 주소서.’
왕이 대답했다.
‘그대가 원하는 바를 다 짐이 이루어 드리리다.’
선현 부인이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변하시어 후회하시면 안 되옵니다. 바라건대 맹세를 해주십시오.’
왕이 말했다.
‘내가 만일 후회한다면 짐의 몸이 일곱 조각으로 부서질 것이오.’
선현 부인이 말했다.
‘거면 등 네 아들을 내쳐 주십시오.’
왕이 말했다.
‘이 네 명의 아이들은 아무런 허물도 없는데 어떻게 내치겠소?’
그리고는 한참 생각 끝에 자기가 이미 맹세한 후이고 그것을 어길 수 없어서 네 아들을 먼 곳으로 내쫓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네 왕자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저희들 네 형제는 아무런 죄도 없는데 갑자기 다른 나라로 내쫓으시니, 무슨 까닭입니까?’
왕이 말했다.
‘너희 네 형제가 아무 죄 없이 불행하게 환난을 만난 줄을 안다. 그와 같이 말하게 된 것은 나의 마음이 아니라 선현 부인의 뜻이니라.’
이때 네 왕자를 낳은 서모庶母와 그 권속들은 이 말을 전해 듣고 급히 왕에게 가서 말했다.
‘저희들의 네 왕자가 왕의 명을 받들어 쫓겨나니 저희들도 따라가겠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그렇게 하라.’
그리고는 네 아들에게 이어서 분부를 내렸다.
‘만일 혼인을 하려거든 다른 종족과 하지 말고 같은 종족끼리 하여 혈통을 끊이지 않게 하라.’
이때 네 왕자는 왕의 분부를 공경히 받들고 권속들과 함께 북쪽을 향해 떠나서 사이림舍夷林에 닿으니, 거기에는 물과 땅이 풍족하였고, 언덕이나 구덩이가 전혀 없었다. 권속들과 함께 그 숲 속에서 살기 시작하니, 복덕이 많기 때문에 마침내 큰 나라가 되었다.
나중에 차왕이 생각나서 신하에게 물었다.
‘내가 전에 내쫓은 네 명의 아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대신이 대답했다.
‘지금 향산香山의 북쪽, 설산雪山의 남쪽, 두 산 사이에 사이舍夷라는 숲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고 사람들이 많아서 백성들이 장꾼처럼 모여들어 마침내 큰 나라가 되었고, 백성들이 추대하여 왕으로 모셨습니다. 성의 이름은 니구라尼拘羅이니, 옛 선인 가비라迦毘羅가 도를 이룬 곳이므로 성의 이름을 그렇게 부른답니다.’
이때 차왕이 이 말을 듣고 두세 번 감탄하면서 말했다.
‘내 아들은 석가釋迦로다, 내 아들은 석가로다.’
이런 공덕을 따라 성姓을 석가라 하였으니, 석가는 능인(能仁:어질다, 인자하다)이라 번역된다. 대차왕의 네 아들 중 세 사람은 이미 죽고, 오직 넷째인 별성別成만이 남아 니구라왕尼拘羅王이라 불렸는데, 이 왕이 부처님의 조조祖祖이시다. 이 왕에게 태자가 있어 구로라왕拘盧羅王이라 불렸으니 이 왕이 부처님의 고조高祖이시며, 이 왕에게 태자가 있어 구구로왕瞿拘盧王이라 불렸으니 이 왕이 부처님의 증조이시고, 이 왕에게 태자가 있어 사자협왕師子頰王이라 불렸으니 이 왕이 곧 부처님의 할아버지이시다. 이 왕에게 네 태자가 있었으니, 첫째가 수두단나輸頭檀那이시니 정반왕淨飯王이시고, 둘째는 수구로단나輸拘盧檀那이시니 백반왕白飯王이시고, 셋째는 도로나途盧那이시니 곡반왕斛飯王이시고, 넷째는 아미도단나阿彌都檀那이시니 감로반왕甘露飯王이시다. 정반왕에게 두 태자가 있었는데, 첫째는 실달다悉達多이시니, 그가 곧 부처님으로서 4월 8일에 태어나셨고, 키가 1장 6척이었다. 둘째는 난타難陀이니, 바람을 거슬러 마당을 쓸던 사람으로서 4월 9일에 태어났고, 키는 1장 5척 4촌이었다. 백반왕에게 두 태자가 있었는데, 첫째는 조달調達이니 부처님의 사촌형제로서 4월 7일에 태어났고, 키는 1장 5척 4촌이었다. 둘째는 아난阿難이니, 부처님의 시자로서 4월 10일에 태어났고, 키는 1장 5척 3촌이었다. 곡반왕에게 두 태자가 있었는데,
첫째는 석마남釋摩男이니 흙을 움켜서 금을 만드는 이로서 4월 12일에 태어났고, 키는 1장 4촌이었고,
둘째는 아니루타阿尼樓陀이다. 감로반왕에게는 두 태자가 있었으니,
첫째는 파투波投이니, 출가한 분으로서4월 13일에 태어났고, 키는 1장 4촌이었다. 둘
째는 발제자跋提子이니, 도에 든 이로서 4월 14일에 태어났고, 키는 1장 4촌이었다.”
『불본행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때에 호명護明보살이 도솔천에서 일체 중생을 교화하려는 생각을 내고는 곧 금단金團 천자天子에게 분부했다.
‘그대는 인간 세상의 여러 왕족을 잘 살펴서 내가 태어날 만한 곳을 고르라.’
금단 천자는 보살의 분부를 받들고 관찰하였다. 관찰을 마치고서 보살에게 말했다.
‘찰리 종족으로서 구담瞿曇씨가 있습니다. 찰리의 후손으로 큰 선인인 구담을 따라 도를 배웠는데 스승의 성을 따라 구담이라 하였습니다. 구담씨는 본래 대대로 금륜왕의 종족으로서 차왕의 뒤부터는 대를 이어 가비라성에서 살았으니 가비라성은 석씨 종족의 수도입니다. 그 중에 사자협이라는 왕이 계셨고, 그 왕의 태자 중에 수두단나왕이 계시는데, 이 왕은 모든 세간과 하늘 무리들 사이에 이름이 크게 나 있으니, 보살께서 의탁하실 만합니다.’
보살은 찬탄하였다.
‘장하도다, 장하도다. 그대는 여러 왕들의 집안을 잘도 살폈구나. 그대의 말과 같이 나는 거기에 태어나기로 결정하겠노라.’”
또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호명보살이 하강하시려 할 때에 마야摩耶 부인이 정반왕에게 아뢰었다.
‘대왕이시여, 제가 지금 여덟 가지 청정한 재계齋戒를 받고자 합니다.’
그리고는 재계가 끝나자 바로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어금니가 여섯 개이고, 붉은 머리에 일곱 개의 발로 땅을 버티고 황금으로 어금니를 장식한 흰 코끼리를 탄 하늘 사람이 정반왕궁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아함경阿含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의 영신靈神이 어머니 태중에 의탁한 것을 미루어 보니, 중국의 주周나라 다섯째 임금인 소왕昭王이 즉위한 지 23년 계축 7월 15일쯤이 된다. 24년 갑인甲寅에 이르러 마야 부인이 비라毘羅 동산에서 즐거이 거닐다가 바라波羅나무 꽃이 예쁘게 핀 것을 보자 오른손을 들어서 가지를 휘어잡으려는데, 보살이 오른 옆구리로부터 탄생하시니, 온몸이 금빛이셨고, 상호相好를 모두 갖추고 계셨다.”
또 『보요경普曜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처음 탄생하실 때에 큰 광명을 발하셔서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셨고, 땅에서는 금빛 연꽃이 솟아 부처님의 발을 받들었다. 동ㆍ서ㆍ남ㆍ북으로 각각 일곱 걸음을 걷고, 사방을 살피고는 한 손으로 하늘을,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사자후師子吼로 외치셨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내가 가장 높다.’
또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씀하셨다.
내가 태胎로 생겨날 일은 끝났으니
이것이 마지막 몸이다.
나는 이미 해탈을 얻었지만
다시 중생을 제도하리라.
이 게송을 읊고 나니, 아홉 마리 용이 물을 뿜어 태자의 몸을 씻었고, 태자의 몸을 씻은 뒤에는 잠자코 말없이 세간의 아기와 같아졌다.”
또 『주서이기周書異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왕이 즉위한 24년 갑인 4월 8일에 강과 연못물이 갑자기 불어 넘치고, 궁전과 민가와 땅이 모두 흔들리더니 오색 광채가 대미(大微:별자리 이름)로 뻗었다가 다시 사방으로 퍼졌다.
왕이 태사太史인 소유蘇由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상서祥瑞인가?’
태사가 여쭈었다.
‘큰 성인이 서쪽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물었다.
‘천하에 무슨 변동이 있겠는가?’
태사가 대답했다.
‘당장에는 없사옵고, 1천 년 뒤에는 그의 교법敎法이 이 땅에 퍼질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서쪽 천축 나라 가비라성의 정반왕궁에 처음 탄생하신 징조가 이 땅에 미친 것이다.”
『십이인연경十二因緣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태자의 나이 19세가 되자 왕위도 왕비도 모두 싫어하니, 부왕은 출가할까 걱정되어 악사들에게 분부하여 태자를 즐겁게 하도록 하였으나 태자는 즐거워하지 않고 앉은 채로 3경更까지 이르니, 5백의 궁인들이 모두 깊은 잠에 빠졌다. 이때 정거천왕淨居天王이 허공에서 태자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세상에 더럽고 중생을 미혹함에
여자의 몸뚱이가 가장 으뜸이더라.
세상의 의복을 걸치면 장엄해 보이기에
바보들이 이런 쪽으로 탐욕을 낸다네.
누구든지 이렇게 관찰한다면
꿈이나 허깨비요 거짓인 줄 알려니
어서 바삐 무명 버려 방종하지 않으면
마음은 해탈하고 공덕의 몸 이루리.
또 하늘 사람이 창틈으로 합장하고 태자에게 아뢰었다.
‘떠나실 시각이 되었습니다.’
태자는 이 게송을 듣고 나서 마음에 기쁨이 일어 가만히 차닉車匿에게 분부하였다.
‘백마 건척揵陟에게 안장을 갖추어 오라.’
네 신장神將이 발을 받들어 성을 넘어 서북쪽으로 가려는데, 태자가 다시 생각했다.
‘출가하는 이는 큰 자비가 있어야 하니 말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면 왕께서 반드시 문지기를 벌하시리라.’
그리고는 성 서북쪽 귀퉁이에 말 발자국 하나를 남겨두어 공중으로 날아서 서북으로 갔음을 알렸다. 이는 중국의 주周나라 소왕 42년 임신壬申의 2월 8일 밤중에 해당한다.”
율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태자가 집을 떠나 마갈타국摩竭陀國의 반다산斑茶山에 이르러 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생각했다.
‘무엇으로 머리를 깎을까?’
이러한 생각을 일으키자마자 정거천자가 얼른 체도剃刀를 받들어 올렸다. 태자가 스스로 머리채를 잡고 깎으니 정거천의 천자가 얼른 실로 짠 승가리僧伽梨를 받들어 올렸다. 그러자 전에 입었던 옷과 관冠과 백마 건척을 모두 차닉에게 주어 왕궁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게송을 말하여 하직의 뜻을 부왕께 전하게 하였다.
애정을 따라 오래 같이 산다 하여도
때가 되면 죽어 이별을 못 면하네.
이렇듯 무상하고 잠깐 사이임을 알았기에
나 이제 해탈의 길을 찾으렵니다.
그때에 태자는 산에서 용맹정진으로 위없는 도를 닦고 다시 아람가람阿藍迦藍에게가서 3년 동안 불용처정不用處定을 배웠으나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서 곧 버렸다. 다시 울두람불鬱頭藍弗에게 가서 3년 동안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배웠으나 그것 역시 옳지 않은 줄 알자 또 버렸다.다시 상두산象頭山에 가서 다른 외도들과 같이 날마다 마맥麻麥을 먹으면서 6년을 지냈다. 고행이 끝나자 니련하尼連河에 가서 목욕을 하려는데, 지난날 고행을 너무 많이 해서 기슭으로 올라가기가 어려우니, 추성追成 선인仙人이 나뭇가지를 휘어서 태자의 손에 잡히게 해주었다.”
또 『인과경因果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목욕을 마치고 태자는 생각하였다.
‘내가 만일 바짝 마른 몸으로 도를 얻는다면 외도들은 굶는 것이 열반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음식을 받아야 되겠구나.’
태자가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난타難陀와 바라내波羅奈라는 두 자매가 우유죽을 받들어 올렸다. 이에 태자가 또 생각했다.
‘어떤 그릇에다 받아먹어야 되겠는가?’
태자가 이렇게 생각하자 사천왕이 제각기 돌 발우 하나씩을 바쳤다. 보살은 공평하게 처신해야 하므로 두 자매 모두에게서 죽을 받았고, 탐욕이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 발우를 포개 눌러 하나로 만들어 우유죽을 담으니, 얼굴도 힘도 충실해져서 정각산正覺山으로 갈 생각을 하였다.”
『본행경本行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태자는 생각했다.
‘무엇을 깔고 앉을까? 깨끗한 풀이 있어야 되겠구나.’
태자가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길에서 풀 베는 길안吉安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태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풀을 제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조금만 주실 수 있겠습니까?’
길안이 풀을 주고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떠나갔다. 정각산正覺山에 이르자 태자의 덕이 무거워서 산이 진동하니, 산신이 나타나서 태자에게 말했다.
‘여기는 도를 이룰 곳이 아닙니다.’
태자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어디가 도를 이룰 만한 곳인가?’
산신이 대답했다.
‘여기서 마갈제摩竭提나라의 남쪽으로 16리를 가면 금강좌가 있는데, 현겁賢劫의 천 부처님께서 모두가 그 자리에 올라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셨으니, 그리로 가소서.’
그때 태자가 산을 내려오다가 눈먼 용 하나를 만났는데, 용이 태자에게 말했다.
‘보살은 도 이룰 곳을 구하시는군요?’
태자가 물었다.
‘너는 어떻게 내가 보살임을 아느냐?’
용이 대답했다.
‘제가 옛날 비바시불毘婆尸佛 때에 악한 비구여서 삼보三寶를 헐뜯고 비방했던 죄로 용의 무리에 떨어졌고 겸하여 눈까지 멀었습니다만, 과거의 세 부처님께서 나타나실 때마다 제 눈이 보였다가 열반에 드시면 다시 눈이 멀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대를 만나자 저의 눈이 보이니, 그대가 보살임을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태자를 금강좌로 인도하니, 태자가 그 위에 풀을 깔고서 올라앉아 서원하였다.
‘내가 위없는 보리를 이루기 전에는 맹세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라.’ 하셨으니, 정각을 이루어야 부처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보요경』에서 말하였다.
“보살이 2월 8일 샛별이 뜰 때에 크게 깨달으시고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별로 인하여 깨달았으나
깨달은 뒤에는 별이 아니로다.
사물을 따르지 않지만
무정함도 아니로다.
이는 중국의 주나라 제6대 왕인 목왕穆王 3년 계미癸未 2월 8일인데, 이때에 성도하셨으니, 이것으로써 30세에 성도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때에 석가여래께서 도를 이루시고는다음과 같이 설법하셨다.
‘출가한 사문은 욕심을 끊고 애욕을 버려 자기 마음의 근원을 알며, 부처의 근본 이치에 통달하여 무위의 법[無爲法]을 깨달아야 하며, 안으로는 얻을 것이 없고 밖으로는 구할 것이 없어야 하며, 마음이 도에 얽매이지 않고 업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하며, 생각도 없고 지음도 없으며, 닦음도 아니요 증득함도 아니어야 하며, 모든 지위를 거치지 않고도 스스로를 높이고 공경하는 경지여야 도라고 한다.’
어떤 비구가 물었다.
‘어떤 것이 청정한 본래의 성품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끝내 청정한 것이니라.’
‘어떤 것이 본성에 대한 무지無知입니까?’
‘모든 법은 어리석은 것이니라.’
어떤 외도外道가 물었다.
‘유有라는 말을 묻지도 않고 무無라는 말을 묻지도 않겠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양구良久하시니 외도가 절을 하면서 찬탄했다.
‘거룩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그토록 대자대비하셔서 저를 미혹하게 한 구름을 걷어 주시어 저로 하여금 깨달음에 들게 하셨습니다.’
외도가 물러간 뒤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외도가 무엇을 깨달았기에 깨달음에 들었다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상의 좋은 말[馬]이 채찍 그림자만 봐도 달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설법하시면서 세상에 머무시더니 49년 후에 구시나성拘尸那城의 희련하熙連河 곁의 두 그루의 사라娑羅나무 사이에서 열반에 드시니, 나이는 79세였다. 이때는 주周의 목왕穆王 52년 임신壬申 2월 15일이었는데, 폭풍이 갑자기 일어 사람들의 집을 뒤엎고 나무를 부러뜨리고 산하대지가 모두 뒤흔들리고, 서쪽에서 흰 무지개 열두 가닥이 이 땅에 뻗어 밤새도록 걷히지 않았으니, 이것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상서였다.”
또 『열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때 세존께서 열반에 드시려는데 가섭이 대중 속에 없는 것을 아시고, 여러 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섭이 오거든 바른 법을 펴 드날리게 하라.’
또 말씀하셨다.
‘나에게 있는 청정한 법안法眼과 열반의 묘한 마음과 형상 없는 실상과 미묘한 바른 법을 그대에게 맡기노니, 그대는 잘 지녀라.’
이어 아난에게 분부하셨다.
‘2대의 법을 이어받아 끊이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게송을 말씀하셨다.
법이라 하나 본래 법은 무법이요
무법이라 하나 그 법도 역시 법이다.
지금 무법을 주노니
법이라고 하는 그 법은 어느 법이런가?
그때 가섭이 5백 명의 제자들과 함께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고 삼매에 들었는데, 삼매 중에 갑자기 마음이 시끄럽고 온몸이 떨려 선정에서 깨어나니, 모든 산천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를 보고 여래께서 이미 열반에 드셨음을 알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우리 부처님, 큰 스승께서 이미 열반에 드신 지 7일이 지나 입관이 끝났구나. 슬프구나, 슬프구나. 어서 부처님께로 가자. 이미 다비茶毘가 끝나 부처님을 뵐 수 없을까 걱정이다.’
그는 부처님을 공경하기 때문에 공중으로 날아서 가지 못하고 제자들과 함께 길을 따라 바삐 걸었다. 슬퍼하며 서둘러 갔으나 7일이 지나서야 구시나성의 다비소에 이르렀다.
이에 대중에게 물었다.
‘어찌하여야 큰 성인의 금관을 열 수 있을까?’
대중이 대답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벌써 두 이레가 지나 이미 부패했을 터이니 어떻게 열겠습니까?’
가섭이 말했다.
‘여래의 몸은 금강같이 견고하여 무너지지 않으며 공덕의 향기는 전단산栴檀山 같으니라.’
이 말을 하고는 눈물과 콧물을 흘리면서 부처님의 관으로 가까이 가니, 그때에 부처님께서 대비와 평등으로 가섭을 위하시므로 관이 저절로 열리어 모두 흩어지고 32상相 80種好를 띠신 순금의 자마紫磨 빛이 나는 견고한 몸이 활짝 드러났다. 이때 가섭이 더욱 슬피 울면서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 주위를 일곱 번 돌고 길게 꿇어앉아 합장하고 게송을 읊으며 슬피 탄식하였다.
애달프다, 큰 성인 부처님이시여,
나 이제 심한 고통 마음에 사무칩니다.
세존의 열반이 어찌 그리 빠른가?
큰 자비는 이 몸을 기다리지 않으시네.
내가 굴산에서 선정에 들었을 때
여래를 두루 찾았으나 어디에도 안 보였네.
그리고 부처님께서 이미 열반하심 알고는
갑자기 마음이 떨리고 놀랐네.
갑자기 어둔 구름 세계를 뒤덮고
산천이 한꺼번에 진동함을 보고서
여래께서 이미 열반에 드신 줄 알고
재빨리 달려 왔으나 벌써 뵐 수 없었네.
세존의 대자비가 나에게는 안 미쳐
부처님의 임종을 나는 못 봤네.
한마디 가르침도 받잡지 못했으니
이제 나 외로워 어디에 의지할꼬.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몹시 괴로워
마음이 어지럽고 혼란하며 캄캄합니다.
제가 지금 세존의 정수리에 예배할까요,
아니면 여래의 가슴에 슬프게 예배할까요?
아니면 성스러운 큰 손에 예배할까요,
아니면 여래의 허리에 슬프게 예배할까요?
아니면 여래의 배꼽에 절을 할까요?
아니면 깊은 신심으로 부처님의 발에 예배할까요?
어째서 부처님의 열반을 못 뵈었던고?
다만 저에게 예배할 곳을 보여 주소서.
여래께서 계실 때에는 모두가 편안했는데
열반에 드신 지금, 모두가 슬퍼합니다.
애달프고도 괴로워라.
대자비로 저에게 예배할 곳 보여 주소서.
그때에 가섭이 이 게송을 마치자 세존께서는 대자대비로써 두 발의 천폭륜상千輻輪相을 관 밖으로 드러내어 가섭에게 보이시니, 천폭륜千輻輪에서 천 줄기의 광명이 나와 시방의 온 세계를 비추었다.
그때에 가섭이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의 발을 보고서 모두 함께 부처님 천폭륜에 절을 하니, 대각세존의 금강 같은 두 발이 다시 관으로 들어가고 관은 전과 같이 봉해졌다.
그때에 여래의 대자비의 힘으로 가슴에서 불이 솟아 관 밖으로 나와 차츰차츰 다비하여 7일이 지나 묘하고 향기로운 땔감이 다하고야 끝났다. 그러나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안팎의 흰 상복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으니,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겉의 한 겹의 흰 상복이 타지 않은 것은 세속제世俗諦가 남아 있음을 뜻함이요,
둘째, 속의 한 겹의 흰 상복이 타지 않은 것은 진제眞諦가 없어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임신년壬申年으로부터 지금 당唐의 보대保大 10년 임자(壬子, 592)에 이르기까지는1,912년이요,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뒤로부터 지금 임자년까지 무릇 886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