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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1권
2. 변본사품(辯本事品)①
2.1. 법의 분별①, 유루와 무루, 유위와 무위
1) 총설
그렇다면 무엇을 일컬어 사택(思擇)해 보아야 할 법 (즉 擇法)이라 한 것이며, 세존께서는 그것에 의지하여 대법을 설하셨다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법이 있으니
도제(道諦)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에는
누(漏)라는 번뇌가 따라 생겨나므로
그래서 유루라고 이르는 것이다.
무루는 말하자면 도제와
아울러 세 가지의 무위
이를테면 허공과 두 가지 멸(滅)이니
이 중의 허공은 장애를 갖지 않는 것이다.
택멸(擇滅)은 말하자면 이계(離繫)로서
계박(繫縛)하는 것에 따라 각기 다르며
마땅히 생겨나야 할 법이 끝내 장애 되면
[택멸과는] 다른 비택멸을 획득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일체의 법을 설함에 있어 간략하게 말하면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유루(有漏)이고, 둘째는 무루(無漏)이다. 이는 전체적으로 설한 것이다.
다음으로 마땅히 개별적으로 해석해 보면, 도성제(道聖諦)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有爲法), 이것을 유루라고 이름한다.17)
2) 유루
이(유루)는 다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5취온(取蘊)을 말하니, 색(色) 내지 식(識)이 바로 그것이다.18) 즉
“무엇을 일컬어 색취온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번뇌[取]에 따라 일어나는 유루의 색을 말하며, 나아가 식취온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고 (계경에서)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어떠한 이유에서 취온을 일컬어 유루라고 하는 것인가?
그것을 근거로 하여 ‘누(漏, 즉 번뇌)’가 따라 생겨나기[隨增] 때문이다.19)
즉 유신견(有身見) 등의 온갖 번뇌를 ‘누’라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으로, 그것으로부터 항상 염오(染汚)한 마음이 누설(漏泄) 즉 새어나오기 때문이다.20)
다시 말해 ‘누’와 상응하고, ‘누’의 경계가 되며, ‘누’에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본송에서] ‘누라는 번뇌가 따라 생겨난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따라 생겨나는 번뇌[隨眠]’의 뜻에 대해서는 마땅히 뒤(본론「변수면품(辯隨眠品)」 제25권 이하)에서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동일한 세계[界] 동일한 단계[地]에 속하지 않았거나 무루를 근거로 하는 번뇌의 경계(대상)와 수면이 유루라는 사실은 이미 부정된 셈으로, 피차간에는 서로 관계하면서 따라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두 가지의 명칭(번뇌의 경계와 수면)을 서로 대립시켜 [유루로]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21)
유루와 무루는 다시 어떠한 특징을 갖는가?
이를테면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유루법이란 존재하는 모든 색(色)으로서 집착이라는 온갖 번뇌[取]에 수반되는 것을 말하니, 이는 바로 온갖 존재에 대한 집착을 낳는다는 뜻이다. 나아가 식(識)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이 무루법이다.
유루와 무루의 간략한 특징은 이와 같다.
혹은 유루를 타세간(墮世間)이라고도 하니, 출세간을 일컬어 ‘무루’라고 하듯이 세간에 포섭되기 때문에 타세간이라고 일렀다. 이는 말하자면 세간에 처하여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세간’이라는 말은 고제(苦諦)에 근거하여 설정되었다.22)
그래서 계경에서도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세간과 세간의 집(集, 즉 인연)에 대해 널리 설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5취온을 일컬어 괴로움의 유루라고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루를 타세간이라 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타세간이 모두 유루법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세존께서 말씀한 바와 같다.
“나는 마땅히 너희들을 위해 유루법과 무루법에 대해 설하리라.
유루법이란 말하자면 존재하는 모든 안(眼), 존재하는 모든 색(色), 존재하는 모든 안식(眼識), 존재하는 모든 안촉(眼觸), 존재하는 모든 안촉을 조건[緣]으로 하여 내적으로 생겨난 낙수(樂受), 혹은 고수(苦受), 혹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다.
나아가 타세간의 의(意)와 타세간의 법(法)과 타세간의 의식(意識), 타세간의 의촉(意觸)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등을 유루법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무루법이란 말하자면 출세간의 ‘의’와 출세간의 ‘법’과 출세간의 의식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등을 무루법이라고 이름한다.”
곧 이러한 성교(聖敎)에 근거하여, 아울러 올바른 이치에 의해 타세간은 모두 유루법임을 알게 된 것이다.
3) 무루, 도성제와 세 가지 무위
유루와 유루의 근거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을 일컬어 무루(無漏)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도성제(道聖諦)와 세 가지 무위(無爲)를 일컬어 무루라고 한다.
여기서 도성제란 유루가 아닌 (즉 무루의) 색 등 5온을 말하며,
세 가지 무위란 허공(虛空)과 택멸(擇滅)과 비택멸(非擇滅)을 말한다. 곧 이러한 허공 등과 도성제를 무루라고 이름한 것이다.
도성제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잠시 설한바 있지만 뒤(제29권 이하「辯賢聖品」)에서 마땅히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
[허공]
앞에서 간략히 설한 세 가지 무위 중에서 허공(虛空)은 다만 무애(無礙, 공간적 점유성을 갖지 않은 것)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어떠한 장애함도 없어 온갖 존재[諸法]가 가장 잘 나타나기 때문에 ‘허공’이라 일렀다.23)
이를테면 모든 대종[大種, 地ㆍ水ㆍ火ㆍ風이라는 근원적 물질]과 대종으로 이루어진 색취(色聚) 등 일체의 물질적 존재를 능히 두루 가리거나 장애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다른 어떤 존재에 의해] 장애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역시 능히 장애하는 것도 아니니,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장애함도 없다’고 설한 것이다.
허공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택멸]
택멸(擇滅)은 이계(離繫)를 본질로 한다. 여기서 ‘택’이란 참다운 노력에 의해 성취되는 ‘혜’를 말하니, 4성제의 각기 다른 행상(行相)을 참답게 사택(思擇)하기 때문에 ‘택’이라고 일렀다.24)
즉 이러한 간택력(簡擇力, 이해 분별력)에 의해 모든 유루법의 영원한 이계가 획득되는 것으로, 이는 결정코 온갖 [번뇌의] 계박이 생겨나는 것을 장애하기 때문에 ‘택멸’이라고 일렀다.25)
혹은 이는 바로 [번뇌의] 소멸로서 이계는 아닐지라도 그것을 간별(簡別)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계’라는 말로 설하였다.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멸(斷滅)되는 모든 법은 다 같이 동일한 택멸이다”라고 하였다.26)
그러나 아비달마의 위대한 논사들은 모두
“[택멸은] 계박하는 것(즉 번뇌)에 따라 각기 다르다”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택멸이 만약 동일하다면, [그것을 획득하는 한 가지 대치도(對治道) 이외] 그 밖의 다른 대치도를 닦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마는 허물이 야기된다.
만약 단멸되는 모든 법이 동일한 택멸이라면, 고법지인(苦法智忍)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의 멸을 증득(證得)할 때 그 밖의 나머지 번뇌의 멸도 증득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27)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증득한다고 하면, 그 밖의 다른 대치도를 닦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만다.
만약 증득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는 즉 단일한 택멸을 놓고서 일부만을 증득하고 나머지는 증득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단일한 것에 다수의] 부분이 있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28)
이에 따라 이계(즉 택멸)은 계박하는 것(즉 번뇌)의 수량에 따른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정해야 하니, 그래야 올바른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택멸에] 동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 자체 동류인(同類因)이 되는 일이 없으며, 또한 역시 다른 것의 원인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29)
[비택멸]
미래에 생겨날 것을 영원히 장애하면 비택멸(非擇滅)을 획득한다. 즉 ‘택’이란 앞서 설하였듯이 참다운 노력에 의해 성취되는 ‘혜’인데, 이러한 ‘혜’에 의하지 않고 미래법의 생기를 영원히 막는 어떤 법을 비택멸이라고 한다.
예컨대 안근(眼根)과 의근(意根)이 어떤 하나의 색(色)에 대해 전념할 때, 그 밖의 다른 색과 모든 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등은 찰나찰나 걸쳐 [현현하지 않고] 그대로 소멸해 버려 그것에 대한 일부의 의처(意處)와 법처(法處)는 비택멸을 획득하게 된다.
즉 5식신(識身)과 일부의 의식신(意識身) 등은 이미 소멸해 버린 경계대상에 대해 끝내 생겨날 수 없으니, 그것들은 동시 존재하는 대상[俱境]을 조건으로 삼아서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동시에 존재하는 소의(所依, 감관)와 소연(所, 대상)과 관계[繫屬]할 때 비로소 그 작용을 낳기 때문이다.30)
그런데 만약 어떤 법이 있어 능히 그 같은 법이 작용을 낳는 것을 장애한다면, 이 법은 혜와는 관계없이 그 같은 법을 장애하여 미래세에 머물게 하고, 영원히 생겨나지 않게 하기 때문에 비택멸이라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생기의) 조건이 결여되었을지라도 영원히 생겨나지 않는 것은 아니니, 그 후 동류의 조건을 만나게 되면 그것은 다시 생겨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약 일찍이 (생기의) 조건이 결여되었다면 그 법은 생겨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후 동류의 조건을 만나게 되면 무엇이 장애하여 그것을 생겨나지 않게 할 것인가?
4) 유위법과 그 이명(異名)
앞에서 ‘도성제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 이것을 유루라고 한다’고 설하였는데, 무엇을 일컬어 유위라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또한 온갖 유위의 법은
말하자면 색 등의 5온(蘊)으로
역시 또한 세로(世路)ㆍ언의(言依)
유리(有離)ㆍ유사(有事) 등이라고도 한다.
[5온(蘊)]
논하여 말하겠다.
[유위의 법은]늙고 병들고 죽는 등의 온갖 재횡(災橫)을 감추어 쌓아두었거나[隱積] 손상시켜 제압하는 것[損伏]이기 때문에 ‘온’이라고 한 것이며, 계(戒) 따위와는 다르기 때문에 ‘색 등’이라고 말한 것이다.31)
즉 계 등의 5온은 일체의 유위법을 능히 다 포섭하지 못하지만, 색 등의 5온은 유위법을 모두 포섭한다. 그래서 유위법을 색 등의 5온으로만 설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유위’라고 말한 것은 여러 조건[緣]이 집합[聚集]하여 그것들 공동에 의해 행해진 것이기 때문이다.32)
그렇다면 미래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찌 유위라고 하겠는가?
마치 [언젠가는] 태워질 땔감처럼 이것도 바로 그러한 종류이기 때문이다.33) 즉 온갖 불생법(즉 미래법)도 그러한 종류(즉 현재법)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비록 영원히 생겨나지 않을지라도 ‘유위’라고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유위법을] 세존께서는 이러저러한 경 가운데에서 그것이 뜻하는 바에 따라 세로(世路) 등이라고도 일렀다.
[세로(世路)]
그는 다시 어떻게 말하였던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유위법을 역시 ‘세로(adhvan)’라고도 일렀으니, 색 등의 5온은 생성 소멸하는 법이기 때문이며, 미래ㆍ현재ㆍ과거 (즉 世)라는 길[路] 가운데 있으면서 유전하기 때문이며, 혹은 무상(無常)에 의해 집어 삼켜지는 것이기 때문에 ‘세로’라고 일렀다.
나아가 모든 불생법은 여러 조건[緣]을 결여한 것이기 때문에 비록 생겨나지 않은 것일지라도 바로 그러한 [현재법의] 종류이기 때문에 ‘세로’라고 불러도 아무런 과실이 없는 것이다.34)
[언의(言依)]
(세존께서는) 온갖 유위법을 또한 역시 ‘언의(言依, kathāvastu)’라고도 일렀다. 여기서 ‘언’이란 말소리[言音], 혹은 능히 설하는 것[能說]을 말하며, 이러한 말이 간접적[遠]으로나 직접적[近]으로 의탁하는 바를 ‘의’라고 하니, (계경에서) 의미[義]와 명사적 단어[名]를 모두 (말의) 근거[依]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명사적 단어는 의미에 근거하고, 말은 다시 명사적 단어에 근거하니,35) 그렇기 때문에 언의는 명사적 단어와 의미를 모두 포섭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명사적 단어와 의미는 5온(즉 일체의 유위제법)을 모두 포섭한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언의에는 세 가지만이 있을 뿐 네 가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섯 가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36)
이에 따라 『품류족론(品類足論)』의 문구를 잘 해석해야 할 것이니, 거기서는 ‘언의는 5온에 포섭된다’고 설하고 있다.37)
즉 ‘의(依)’란 바로 원인 근거의 뜻으로, 무위는 결과를 갖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 원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언의가 아니다.
또한 만약 어떤 취집(聚集) 중에 세 가지, 이를테면 말[語]과 의미[義]와 근거[依]만 획득될 수 있으면, 그것을 ‘언의’라고 설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무위의 취집 중에는 오로지 ‘의미’만이 존재할 뿐 ‘말’의 ‘근거가 되는 일’은 없기 때문에 ‘언의’라고 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무위는 근거[依]도 되고 의미도 갖지만 다만 말이 부재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말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언의’라고 이르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모든 유위는 말과 더불어 이와 함께 일어나는 의미를 갖지만, 무위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언의가 아니다].
[유리(有離)]
[세존께서는] 온갖 유위법을 또한 역시 ‘유리(有離, saniḥsāra)’라고도 일렀다. 여기서 ‘리’란 영원히 떠나는 것으로, 바로 열반을 말한다. 즉 열반을 획득하고 나면 다시는 생사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즉 (유위법은) 이러한 ‘떠남’을 갖기 때문에 ‘유리’라고 일렀으니, 마치 재산을 가진 이를 ‘유산자’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이는 비록 유위일지라도 일체의 유위가 그러한 것은 아니니, 무루도에는 택멸(즉 離)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열반할 때에도 역시 성도(聖道)를 버리기 때문에 ‘유리’라고도 이르니, 마치 뗏목이 그러하듯이 성도 역시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법조차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어찌 비법(非法)을 끊지 않을 것인가?”라고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유사(有事)]
[세존께서는] 온갖 유위법을 또한 역시 ‘유사(有事, savastuka)’라고도 일렀다. 여기서 ‘사’란 이를테면 근거가 되는 것[所依], 혹은 머물게 되는 것[所住]을 말하니, 이는 바로 원인의 뜻이다.
즉 결과는 원인에 근거하고 원인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으로, 마치 자식이 어머니를 근거로 하는 것과 같다.
혹은 결과는 원인에 머무르며 능히 원인을 가리기 때문으로, 마치 사람이 침상에 머무는 것과 같다.
이는 곧 원인이 결과에 의해 은폐된다는 뜻이니, 원인과 결과는 시간적인 전후의 관계이기 때문이며, 아울러 세밀하고 거친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곧 유위는 바로 이러한 ‘사(즉 원인)’를 갖기 때문에 ‘유사’라고 이름한 것으로, 비유하자면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이상과 같은 따위의 종류가 바로 유위법을 차별 짓는 여러 명칭들이다.
5) 유루의 이명(異名)
여기서 설하고 있는 유위법 중에서 (유루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루를 취온(取蘊)이라고도 이르며
역시 또한 유쟁(有諍)이라고도 설하며
아울러 고(苦)ㆍ집(集)ㆍ세간(世間)ㆍ
견처(見處)ㆍ3유(有) 등이라고도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도성제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을 유루라고 한다’고 하여 이미 그 본질에 대해 분별하였지만, 지금 여기서는 그것의 개념[名想]이 동일하지 않음과 차별적인 뜻을 나타내기 위해 다시 거듭하여 설하려는 것이다.
[취온(取蘊)]
앞에서 ‘일체의 유위를 온(蘊)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는데,38) 지금 여기서는 ‘유루를 일컬어 취온(取蘊)이라 한다’고 설하였다.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무루는 다만 ‘온’이라고 이를 따름이다.
즉 오로지 온갖 번뇌[漏]에 대해서만 ‘취(取, upādāna)’라는 개념을 설정한 것으로, 그것은 능히 [3유(有), 욕(欲)ㆍ색(色)ㆍ무색유(無色有)]의 생에 집착하여 취[執取]하기 때문에, 혹은 능히 후유(後有)를 초래하는 업에 집착하여 지니기[執持] 때문에 ‘취’라고 일렀다.
그리고 색 등의 5온은 이러한 ‘취’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혹은 능히 ‘취’를 낳기 때문에 ‘취온’이라고 일렀으니, 이는 마치 [풀이나 겨로부터 생겨난 불을] 초강화(草糠火)라고 하는 것과 같고, [꽃과 과실을 낳는 나무를] 화과수(花果樹)라고 하는 것과 같다.
[유쟁(有諍)]
유루법을 역시 유쟁(有諍, saraṇā)이라고도 부른다. 말하자면 번뇌에 대해 ‘쟁(諍)’이라고 하는 개념을 설정한 것으로, 번뇌는 선한 품성을 동요시키기 때문이며, 자신과 타인을 해치고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온은 ‘쟁’과 함께 하기 때문에, 혹은 ‘쟁’은 온과 더불어 생겨나기 때문에 (유루법을) ‘유쟁’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곧 온과 ‘쟁’ 중의 어느 하나라도 결여될 경우, 또 다른 생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고(苦)ㆍ집(集)]
(본송에서) ‘아울러’라고 하는 말은 그 밖의 다른 유루의 개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를테면 혹 어떤 경우 (유루를) ‘고(苦, duḥkha)’라고 이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5취온은 바로 온갖 핍박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며, 그 본성이 거칠고 무거워 안온(安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어떤 경우 [유루를] ‘집(集, samudaya)’이라고 이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류(즉 5취온)는 능히 괴로움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며, 능히 집합하여 이루어지기[集成] 때문으로, 이를테면 취온으로부터 취온이 집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간(世間)]
혹은 [유루를] ‘세간(loka)’이라고 이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허물어질 수 있기 때문으로, “존재[性]는 허물어질 수 있기 때문에 ‘세간’이라 이름한다”고 세존께서 설한 바와 같다.
그런데 온갖 성도는 그 본질상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역시 ‘세간’이라 이르니, 이를 따르게 되면 무대치(無對治)가 허물어지기 때문이다.39)
[견처(見處)]
혹은 [유루를] ‘견처(見處, dṛṣṭisthāna)’라고 이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살가야(薩迦耶) 등의 5견(見)이 여기에 머물면서 수면을 수증(隨增)하기 때문이다.40)
즉 그러한 온갖 ‘견’은 유루법에 대해 일체의 모든 종류, 모든 때, 모든 특성에 관계없이 무차별적으로 견고히 집착하여 동요 없이 수면을 수증하기 때문에 그 자체의 작용이 더욱 왕성하게 증가한다.
그래서 [5견 등을] 다시 별도로 설하게 된 것이지만, 탐(貪) 등과 치(癡)와 의(疑)는 이와 같지 않다.
즉 ‘탐’ 등은 일체의 모든 종류의 유루법에 대해 집착할지라도 모든 때에 집착하지는 않으며, ‘치’는 모든 때에 집착할지라도 무차별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의’는 무차별적으로 집착할지라도 견고하게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유루를 그러한 번뇌의 토대라고는 설하지 않은 것이다.
[3유(有)]
혹은 [유루를] ‘3유(有)’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유루는] 존재[有]의 원인, 존재의 근거로서, 세 가지의 존재(欲ㆍ色ㆍ無色有)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유염(有染)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는 등의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상과 같은 등등의 종류가 바로 뜻에 따른 유루법의 또 다른 명칭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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