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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대사 증도가 남명천선사 계송 하
법재法財를 없애버리고 공功을 제 스스로 버리나니,
삼도三途에 오락가락하거니 어느 곳을 믿으리오?
깨어 앎은 예로부터 옴에 찰나刹那에 있나니,
구태여 괴롭게 부지런히 아니하여 앉아서 이익을 얻으리라.
공덕功德 없게 함을 다시 어찌 의심疑心하리오?
다섯이 문호門戶가 되고 하나가 중매쟁이 되니라.
예로부터 보소寶所(보배 처소)에 자물쇠 잠금이 없거늘,
이 시절時節 사람이 제 스스로 즐겨 오지 아니한다.
이 심의식心意識을 말미암지 아니함이 없으니,
예로부터 한 데에 있으되 원수寃讎와 같으니라.
이제 이미 더불어 가업家業이 한가지라,
그지없는 보배재산을 다시 훔치지 아니하리라.
이런 까닭으로 선문禪門엔 마음을 알아,
올올등등兀兀騰騰하여 아침저녁을 지낼지니라.
불조佛祖를 서로 보는 곧은길이 한가지니,
큰 더위엔 서늘함을 맞고 추위엔 해를 향向하나니라.
무생지견無生知見에 몰록 들어간 힘이니,
무생지견無生知見을 어찌 논論하리오?
이따금 달을 바라보며 깊은 밤을 지나고,
얼마나 재齋를 구求하여 먼 마을에 이르렀던고?
대장부大丈夫는 위엄이 있고 또 사랑하나니,
풀 누움이 바람 움직임이라 막음이 없도다.
어질며 어리석음에 우의羽儀가 될 따름 아니라,
험險한 모진 길에 사람이 힘을 입는 바이니라.
혜검慧劒을 잡아 눈과 서리가 서늘하니,
환해寰海(하늘 아래)의 어느 사람이 구태여 정正히 보리오?
눈썹 털을 헤쳐서 곧 돌아가도,
촉루봉髑髏峯 뒤에 풀이 가득하리라.
* 촉루봉髑髏峯은 죽은 해골이 산처럼 쌓인 곳이라.
반야般若 칼날이요 금강金剛 불꽃이니,
굳고 매워(사나워) 난상亂相의 수풀을 능能히 불사르는구나.
한 번 쓺에 다시 머리터럭 만큼도 없어도,
곁에 사람은 오히려 늙은 할미 마음(노파심)을 웃는다.
능能히 외도外道의 마음 꺾을 따름 아니니,
분盆(동이)을 이며 배를 섭鍱함(구리로 두름)이 어찌 수數가 다하리오?
영산靈山에서 좌坐에 거據하시어 잠깐 채찍을 흔드신댄
좋은 말이 바람을 쫓아 스스로 돌아가니라.
* ‘분盆을 머리에 이다’ 함은 불을 담은 그릇을 이는 것이니 불을 섬기는 외도外道요, ‘구리로 배를 싼 것’도 외도外道의 일이라.
일찍이 천마天魔의 간담을 떨어버리시니,
사邪와 정正이 서로 섞이나 세勢를 가히 알지니라.
스스로 이 너희 무리가 미우며 사랑함이 무거움이언정,
불자佛子가 자비慈悲를 아니함에 붙지 아니하니라.
법뇌法雷(법의 우레)를 떨치시니,
한 번 침에 굉연轟然하여 구해九垓(九州, 大千)에 가득하도다.
예로부터 옴에 그림자와 상象이 없다 이르지 말라.
함령含靈이 일찍이 눈을 가지런히 여니라.
* ‘굉연轟然’은 여러 수레의 소리.
법고法鼓를 치시니,
서천西天과 차토此土에 친親한 규구規矩(法)이시니라.
어리석은 사람이 잠이 무거워 스스로 듣지 못함이언정,
관음觀音이 마음 넓지 못하심이 아니시니라.
자운慈雲을 펴시어 감로甘露를 뿌리시니,
인간人閒과 천상天上에 가는 티끌도 끊도다.
몽몽濛濛한(가늘게 내리는 비) 한 맛이 차별差別이 없으나,
움(萌芽, 싹)을 씻어내어 만萬 가지가 새롭도다.
* 몽몽濛濛은 가는 비라.
용상龍象(용과 코끼리)은 밟음에 적심(윤택하게 함)이 갓이 없으되,
종횡縱橫에 자재自在하여 얽매이지 아니 하도다.
중생衆生이 다 보리菩提를 증證하지 못할진댄,
마침내 가벼이 번뇌煩惱의 가(언덕)를 여의지 아니 하나니라.
삼승三乘과 오성五性이 다 깨어서 아나니,
펴면 곧 참차參差하고(가지런하지 아니하고) 거두면 곧 한가지로다.
제비와 새와 난鸞과 봉鳳이 나는 것이 각각 다르나,
다다른 끝엔 마침내 허공虛空을 여의지 아니 하나니라.
설산雪山에 비니肥膩[一乘法]는 다시 섞인 것 없으니,
시절時節의 비와 시절時節의 바람에 뿌리 드러나지 아니 하나니라.
면면緜緜하여 한 일도 없다 이르지 말라.
일찍이 소식消息을 전傳하여 왕손王孫[釋尊과 達磨]에게 이르니라.
* ‘비니肥膩’는 풀의 이름이니 설산雪山의 한 소가 비니초肥膩草를 먹으면 제호醍醐를 내나니라.
‘순수한 제호醍醐 낸 것을 내 항상 들이노라(納)’ 하시니,
만약 보배의 그릇이 아니면 담음이 어려우니라.
온 세상의 어느 사람이 이 맛을 아는고?
한산寒山이 손뼉치고 풍간豊干을 웃으시니라.
한 성性이 일체성一切性에 두렷이 사무치니,
이 성性은 유유悠悠하여(넓고 커 갓이 없어) 하나가 곧 여럿이니라.
만약 하나와 여럿임을 알면 하나[一]와 다름[異]이 아니니,
‘하나[一]와 다름[異] 없음’이 옴에, 아는가 모르는가?
한 법法이 일체법一切法을 다 머금으니,
한 법法이 주主가 되고 여럿이 손[賓]이 되나니라.
주主 없으며 손[賓] 없는 데에 곧 손과 주主이니,
개자芥子에 수미須彌가 들어감이 사람을 막지 아니하니라.
한 달이 일체一切 물에 널리 나투니,
가깝지 아니하며 멀지 아니한 것이라 체體가 스스로 항상 하도다.
남북동서南北東西에 그림자 나누어 가나,
정정亭亭한 하늘 밖에 남은 빛이 있나니라.
* ‘정정亭亭’은 조금 밝은 모양이라.
일체一切의 물엣 달을 한 달이 잡으니(攝),
달이 형상을 나누지 아니하며 물이 외롭지 아니하도다.
시절時節의 사람이 맑은 물결의 길을 사무치지 못하여,
오직 이르되 ‘서늘한 빛이 대허大虛에 가득하다’ 한다.
제불법신諸佛法身이 내 성性에 드니,
나 없으며 사람 없거늘 속절없이 聖과 凡이로다.
깊은 길에 떨어진 꽃은 붉음이 불같고,
문門을 휘돌아 흐르는 물은 푸르기가 쪽빛 같도다.
내 성性이 도리어 여래如來와 어우르니(합하니),
어우른(합한) 곳은 남 아니며 내 몸 아니니라.
수미산須彌山 정상 위에 쇠 배가 잠기거늘,
귀 뚫은 되중[胡僧]이 그윽이 탄지彈指하도다(손가락 퉁기도다).
* ‘귀 뚫은 되 중’은 달마達磨를 말함이라.
일지一地에 일체지一切地를 갖추니,
행위行位가 다르나 오직 이 몸이니라.
아승기阿僧祇 세 대겁大劫을 지내어 다하니,
올해가 지난해의 가난과 도리어 같도다.
색色 아니며 마음 아니며 행업行業 아니니,
희론戱論과 말씀이 다 같지 아니하니라.
오직 화산華山의 심처사潘處士가,
곧 길 가운데에(오는 도중에) 읊어 바라보고 나귀를 거꾸로 타니라.
* 반처사潘處士는 이름이 반량潘閬이니, 화산華山에 가서 노닐다가 돌아올 때 산을 사랑하여 길에서 나귀를 거꾸로 타고 산을 바라보며 오니라.
탄지彈指에 팔만八萬 문門이 두렷이 이루어지니,
팔만八萬 법문法門이 오직 한 곳이니라.
만약 한 곳을 모르면 속절없이 다니며 구求하리니,
한 곳을 만약 밝혀도 의거할 곳이 없느니라.
찰나刹那에 삼기겁三祇劫을 없게 하나니,
일념一念이 남이 없어 일一도 또한 아니니라.
대지大地가 다 한가지의 은색계銀色界이거니,
어느 갈림길이 한 데에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 있으리오?
일체一切 수구數句[差別, 相]와 수구數句 아님[無差別, 性]이,
성性과 상相이 어지러워 만萬 가지의 이름이니라.
문門 닫고서 오직 이르되 ‘하늘이 새지 아니한다’하고,
문門 밖에 해 돋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 영각靈覺으로 어찌 서로 간섭干涉하리오?
천성千聖의 진기眞機는 친親함이 쉽지 아니하니라.
명주포대明州布袋는 크게 미치고 괴이怪異하시어,
시끄러운 가운데 항상 (마른 고기와 마른 똥을)잡아서,
다니는 사람에게 보이시니라.
* 포대화상布袋和尙이 저잣거리며 마을에 들어가 아니 빌 것이 없이 빌더니, 이따금 마른 고기와 마른 똥을 들어보이며 이르되 “이것이 미륵내원彌勒內院이라” 하더라.
가히 헐지 못하리니,
천병天兵[魔軍]과 마후魔后[魔女]도 속절없이 두렵게 하며 아름다움 보이도다.
자광慈光(자애로운 광명) 비추신 곳에 각각 귀투歸投하야,
맑은 거울을 봄에 스스로 부끄러워하니라.
* 귀투歸投: 귀투신명歸投身命, 신명身命을 바쳐 돌아감(귀명歸命함).
가히 기리지(찬탄하지) 못하리니,
허공虛空은 잠깐도 여의어 흩어지며 그침[離閒]을 알지 못함이니라.
선길善吉[수보리]의 바위 가운데에 풀이 나지 아니하니,
교시憍尸[제석천왕]는 속절없이 하늘의 꽃을 잡아 흩뿌리도다.
체體가 허공虛空 같아서 갓 없으니,
비장秘藏의 미묘微妙한 말로 가히 이르지 못하리로다.
십성삼현十聖三賢의 알지 못한 곳이여.
이따금 절의 문門 앞에 한가로이 걸려 있다.
* 십성十聖은 십지성인十地聖人이요 삼현三賢은 십주十住와 십행十行과 십회향十回向이라.
당當한 곳을 여의지 아니하여 항상 맑으니,
이는 중생衆生 아니며 이는 부처 아니니라.
문득 수미산須彌山을 부딪혀서 거꾸러뜨려야사,
예로부터 옴에 한 물건도 없는 줄을 비로소 알리라.
찾으면 곧 그대의 보지 못하는 것을 아노니,
보지 못한 이는 모름지기 이 길을 좇아 돌아갈지어다.
병病든 새는 오직 갈댓잎 아래 깃들었거니와,
날랜 매는 갓 (날개를)듦에 하늘을 날개 치며 나나니라.
취取함을 득得치(얻지) 못하리니,
구름이 일어나며 번개가 옮아 환구寰區(하늘 아래)가 검어지도다.
임제臨濟가 길 가운데 빈손으로 돌아오시니,
사람에게 ‘낮에 도적을 잡는다’라고 굳이 부름을 입느니라.
버림을 득得치(얻지) 못하리니,
사방四方과 上下에 다 가득하도다.
추자鶖子(사리불)는 어찌 알리오? 버리고자 하니,
속절없이 하늘 꽃이 옷에 가득히 쌓이니라.
가히 얻지 못하는 중中에 오직 그리 얻나니,
잎 없으며 뿌리 없으되 가는 데마다 나나니라.
지난날엔 발(주렴)을 여니 비를 좇아 지나더니,
오늘 아침엔 길에 당當하여 사람의 걸어감을 가리도다.
‘잠잠한 때를 설說함’은 어두운 가운데 밝음이니,
밝음과 어두움을 잊어 옴엔 숫돌 평평함과 같으니라.
둘 아닌 법문法門을 마침내 펴신 곳이여.
비야성毗耶城 안에 우레 소리 같도다.
설說할 때가 잠잠함은 인연因緣에 얽힘이 끊어지니,
혀끝을 움츠려야사 비로소 능能히 펴리라.
‘사십구년四十九年을 (설함이)한 자字도 없다’ 하시니,
용궁해장龍宮海藏은 어찌 전傳하였는고?
크게 주는 문門 열어 옹색擁塞함이 없으니,
흐르는 물[化門]을 싫어하지 아니하며 산[證處]을 사랑하지 아니하는구나.
낯은 티끌과 재를 띄고 머리는 눈과 같으니,
걸어 다니며[발 디딤] 말을 타고[발 디디지 않음] 동관潼關을 지나도다.
사람이 나더러 묻되, ‘어느 종宗을 아느뇨?’ 하거든,
눈썹 털을 아끼지 아니하여 잠깐 위爲하여 통通하게 하리라.
동東녁 멧부리에 구름이 생겨나니 서西녁 멧부리가 햐얗고,
앞 산에 꽃이 피니 뒷 산이 벌겋도다.
아뢰어 이르되, ‘마하반야摩訶般若의 힘이라’ 하리라.
옛 부처와 지금 부처의 진실眞實한 비밀秘密이니라.
사삼謝三(玄沙師備, 현사사비)은 본래本來 이 고기 낚는 사람이니,
내(개천)를 지나옴에 발이 젖지 아니하도다.
* ‘사삼謝三’은 현사화상玄沙和尙이니 사가謝家의 셋째 아들이라.
혹或 옳으며 혹或 그름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알지 못하리로다, 이 집은(사람은) 또 이 누군고?
낯 바꾸며 머리 고침이 환화幻化와 같으니,
아이는 어찌 능能히 넌지시(공연히) 알리오?
거슬러 행行하며 순順하게 행行함을 하늘이 측량測量하지 못하나니,
또 의범儀範(모범)이 법法 됨(정해짐)이 없도다.
황여黃輿(대지)는 어찌 가히 갓을 다하리오?
속절없이 꺾은 송곳을 잡아 옅고 깊음을 재어 살피도다.
* ‘의범儀範’은 의표儀表이고 ‘황여黃輿’는 대지大地라.
내 일찍이 다겁多劫을 지내어 닦으니,
닦음을 인因하여야 무생력無生力(남이 없는 힘)을 증證하나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도道를 구求하되 행行을 닦지 아니하나니,
모래를 쪄서 밥 삼고자 바라는 것과 도리어 같도다.
넌지시(공연히) 서로 속여 미혹하게 한 것이 아니니,
예로부터 옴에 진眞(진실)과 위僞(거짓)가 어찌 서로 간섭干涉하리오?
범의 가죽과 양羊의 몸은 모르리로다, 얼마나 되는고?
진실眞實의 금金을 알고자할진댄 불 속에서 볼지니라.
법당法幢을 세우시니,
영산靈山의 방양榜樣(모범, 법식)이 다시 쌍雙이 없도다.
좌각髽角(좌계髽髻; 쪽머리)한 계집이 석모席帽를 이어,
손에 대막대 잡고 찬 강을 지나도다.
* ‘영산靈山의 방양榜樣’은 부처님께서 꽃을 드신 일이라. ‘좌각髽角’은 삼으로 머리 맨 것을 뿔 같이 한 것이니 부인婦人의 흉복凶服이요, ‘석모席帽’는 주옥珠玉으로 꾸민 것이니 부인婦人의 성盛한 길복吉服이라.
종지宗旨를 세우시니,
좌左는 오목하고 우右는 불룩함을 누가 서로 알리오?
해문海門의 선자船子(배)가 양주楊州를 지나니,
여덟 팔인 나타那吒가 간사姦邪함이 귀신같도다.
* ‘나타那吒’는 북방北方 비사문천왕毗沙門天王의 셋째 아들이니 머리 셋이요 팔이 여덟이라.
불칙佛勑을 명명明明히 하신 이는 조계曹溪(혜능)가 이 분이니,
이제 어느 곳이 이 조계曹溪오?
날마다 해 동東녁 갓을 좇아 나오고,
아침마다 닭이 오경五更을 향向하여 울도다.
제일가섭第一迦葉이 처음 등불을 전傳하시니,
똥을 쓴 것으로 옷을 만드시어 스스로 만족을 아시도다.
오직 일어나 춤춰 천기天氣를 누설漏洩함을 인因하시어,
바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입에 기록됨을 만나시니라.
이십팔대二十八代는 서천西天의 기記이니,
깊은 바위는 사랑하지 아니하시고 다 티끌에 들어가시다.
막대기 한 가지가 절목節目 없는 것을,
은근慇懃히 밤에 다니는 사람에게 나누어 맡기시니라(분부하시니라).
이 땅에 드시어 기연機緣을 아시니,
다섯 잎 꽃 핌이 어찌 우연偶然이라 하리오?
성聖 없어 훤함을 사람이 알지 못할새,
아홉 해를 외로이 앉아 코가 하늘을 찌르시니라.
* 옛 이르되, “‘훤하여 성聖 없다’ 함을 알고자 할진댄, 아홉 해 벽 돌아앉은 곳을 향向하여 잡들여 보라” 하니라.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초조初祖가 되시니,
서西에서 와 옷을 맡기고자 속절없이 이르도다.
도리어 양왕梁王의 진실眞實의 강개慷慨를 부러워하노라.
차가운 강을 지나며 뒤쫓아 돌아감을 용납容納치 아니하니라.
육대六代에 옷(가사) 전傳하심을 천하天下가 들었나니,
법法을 표表하여 가져서 종지宗旨를 기록하시니라.
그때 놓아버리심이 어기지(잘못되지) 아니하시거늘,
무슨 일로 사람이 와서 잡아 일으키지 못하느뇨?
후後엣 사람이 도道 얻음을 어찌 수數가 다하리오,
오직 고갯마루[嶺] 밖을 좇아서 옴이 아니니라.
봄의 양기陽氣가 만물萬物에 미치어,
높으며 낮은 꽃나무가 한때 피어남을 모름지기 알리라.
진眞을 세우지 아니하리니,
백구白駒도 흐르는 물결의 빠름과 같지 못하니라.
그 날 문왕文王이라야 도리어 보배를 알거늘,
변화卞和는 웃음직하다가 속절없이 울도다.
* ‘백구白駒’는 해의 그림자라. ‘변화卞和’가 형산衡山의 옥玉을 얻어 임금께 바치거늘 초문왕楚文王이 ‘옥玉이 아니라’ 하고 변화卞和의 발을 베니라.]
망妄이 본래本來 비니(공空하니),
유자遊子(떠도는 아들)가 본 고향을 사랑하야[思] 세월이 이미 다하도다.
발을 듦이 이 집이라 돌아가면 곧 얻으리어니,
어찌 수고로이 한恨을 흘려가며 서西녘 바람을 향向하리오?
유有와 무無를 다 (보내)버리면 불공不空도 비니,
만약 공空을 두고져 할진댄 도리어 이 가림(장애)이니라.
산인山人이 간 후後에 늙은 납(원숭이)이 울고,
띳집(초가집)이 비어 옴에 백운白雲이 있도다.
이십공문二十空門에 본디 착着(집착)하지 아니하니,
진眞과 망妄이 유유悠悠하여 병病을 이미 덜었도다.
한 길이 구름 뚫는데 사람이 이르지 못하나니,
천 바위와 만 골짜기 내 집을 횟돌도다.
일성一性은 여래체如來體와 스스로 한가지니,
한가지인 중中에 길이 없으니 서西와 동東을 무던히 여길지니라.
우물 밑의 머고리(개구리)는 고각鼓角(군대 나발)을 불거늘,
문門 앞에 나툰 기둥은 등롱燈籠을 웃는다.
마음이 이 뿌리니,
그윽이 솟아나며[竪] 비스듬히 서리어[橫] 이미 자취를 나투도다.
바로 가히 사랑할 것이어늘 사람이 보지 못하여,
속절없이 지엽枝葉을 가져서 아손兒孫에게 분부分付하도다(맡기도다).
법法이 이 티끌이니,
한 점點이나 갓(겨우) 나면 곧 진眞을 잃으리라.
명중名中(이름 가운데)에 실實한 뜻 없다 이르지 말라.
어지러이 본래本來의 몸이 온전히 나타나니라.
두 가지가 거울 위의 허물과 같으니,
영명靈明(거울의 밝음)을 가리워 덮는 것이 마음에 때와 같도다.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실 터럭도 없거니,
뉘라서 높은 대臺에 걸어놓고 이쁘며 추함을 가리리오?
허물과 때를 다 덜면 빛이 비로소 나타나나니,
외로운 밝음이 홀로 나투니 대천大千이 서늘하도다.
티끌 없다 한 이를 의발衣鉢 전傳함을 허락지 못할 것이어늘,
그림자놀이 일진댄 쉽게 보지 못함을 모름지기 알리라.
* ‘티끌 없다 한 이’라 함은 혜능惠能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라고 하신 일이요, ‘그림자놀이 일진댄’이라 함은 연야달다演若達多가 거울을 보고 자신의 머리가 없다고 도망간 일이라.
심心과 법法 둘을 잊으면 성性이 곧 진眞이니,
진성眞性은 무無 아니며 또한 유有 아니니라.
소림少林에 몇 번을 그윽이 사량思量하셨느뇨?
유마維摩도 가벼이 입 열지 아니하시니라.
슬프다! 말법末法에 진풍眞風(진실한 가풍)을 져버리나니,
물物에 닿음에 혼미昏迷하여 모르는 것이 어린아이 같도다.
삼거三車를 화택火宅 밖에 부질없이 세워두니,
어느 때 네 길 가운데에 한가지로 이르리오?
* 삼거화택三車火宅: ‘화택火宅의 삼거三車’는 곧 불타는 집에서 어린 아들을 구救하기 위爲하여 세 수레를 공교하게 만드시어 작은 지혜智慧로 제도 濟度하기 위하여 權敎로 삼승三乘을 이르심이요, 네 거리의 골고루 준 큰 ‘백우거白牛車’는 곧 이 실교實敎인 대승大乘이라.
모진 시세時世가 삼재三灾에 가까우니,
번뇌중생煩惱衆生이 불러도 돌아보지 아니하도다.
도병刀兵과 기근飢饉과 천 가지 고苦가,
다 이 사람의 마음이 지어서 나오니라.
* ‘큰 삼재三灾’는 물과 불과 바람이오, ‘적은 삼재三灾’는 도병刀兵과 기근飢饉과 병病이니, ‘기飢’는 곡식이 없는 것이요 ‘근饉’은 나물이 없는 것이라.
중생衆生이 복福이 엷어 길들임이 어려우니,
음험하여 바르지 못하며 돌아다님이 뛰노는 원숭이 같도다.
언덕의 큰 나무가 무너지려 함이며 적은 물의 물고기이거늘,
슬프다! 옛 사람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여.
성聖의 가신지가 멀어 사견邪見이 깊으니,
아만我慢이 얽혀 진불眞佛을(참 부처를) 혼미昏迷)하도다.
도사導師가 자비慈悲로 제도하심은 얼마나 괴로우며 부지런하셨느뇨 마는,
애하愛河(애착의 강)에서 잠깐 벗어났다가 도로 잠기도다.
마魔는 강强하고 법法은 약弱하야 원수怨讐로 해害함이 많으니,
선善과 악惡이 비록 다르나 불성佛性은 한가지니라.
이 때를 좋게 향向하야 내 몸을 밝힐지어다.
백년百年의 광영光影이 머리 돌이킴에 비어지나니라.
여래如來의 돈교문頓敎門을 이르심을 듣고,
반半만 웃고 반半만 성내어 뜻에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루아침에 돌아가 자친慈親을(어머니를) 보면,
예부터 가업家業이 한가지인 것을 비로소 알리라.
여래如來의 돈교문頓敎門을 이르심을 듣고, 반半만 웃고 반半만 성내어 뜻에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루아침에 돌아가 자친慈親(자신의 어머니)을 보면 옛부터 가업家業이 한가지인(같음인) 것을 비로소 알리라.
멸滅하여 덜되 기와 부서지듯이 못함을 한恨하나니,
진공眞空은 얼굴(형상) 없거늘 속절없이 삼진參辰이니라.
비부蚍蜉(왕개미)는 웃음직함이라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조그만 바람을 일으켜 대춘大椿을 뮈우고져(흔들고져, 움직이고져)하도다.
* ‘비부蚍蜉’는 큰 개미라.
* 삼진參辰: 삼성參星과 진성辰星의 합칭인데, 삼성參星[虎星]은 서쪽에 있고 진성辰星[龍星]은 동쪽에 있으며 이 별이 나오면 저 별이 져서 동시同時에 볼 수가 없다. 진성은 상성商星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도道를 추구하는 것과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것은 삼성參星과 진성辰星처럼 병립竝立할 수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 대춘大椿: 중국中國 고대古代의 큰 나무 이름이니, 8천 년을 봄으로 하고 8천 년을 가을로 하여 3만 2천 년이 인간人間의 1년에 해당한다. 뜻이 바뀌어 사람의 장수長壽를 축하祝賀하는 데에 이르는 말이 되었다.
지음[作]이 마음에 있는지라 자못 크게 착錯하니(그르치니),
금탄자金彈子를(탄환을) 가지고서 나는 새를 쫓음과 같도다.
무명랑주無明郞主가 탐진貪瞋(탐심 진심)을 마음대로하여,
가재家財를(집안 재산을) 다 쓰되 문득 알지 못한다.
앙화殃禍가 몸에 있을지라 벗어나 여읨이 어려우니,
이에 이르러서 헛되이 우愚(어리석음)와 지智(지혜)를 나누니라.
몹시 아프고 시고 서늘함(어렵고 가난함)이 백만百萬 가지이니,
부자父子가 비록 친親하나 바꾸어 대신하여 받지 아니 하나니라.
원망하여 헐뜯으며 또 사람(남) 탓함을 모름지기 말지어다.
제 지혜가 밝지 못하여 어두워 막히느니라.
보리菩提와 번뇌煩惱가 옛부터 뿌리가 없어,
오직 마음 돌이킴이 한 경각頃刻(눈 깜박할 사이)에 있나니라.
무간無閒의(사이없는) 업業을 부르지 않음을 얻고자 할진댄,
만약 무간無閒을 논論컨댄 혹독하여 당當하기가 어렵도다.
법法을 비방誹謗한 이가 혼자 이에 빠질 따름이 아니라,
여섯 도적이 사람을 위태롭게 하나니 다시 막을지니라.
여래如來의 정법륜正法輪을 비방誹謗치 말지어다.
법法을 허는(없애는) 인연因緣은 괴로워서 궁구窮究하기 어려우니라.
비록 공겁空劫을 지내어 타방他方에 의지하여도,
이 계界가 이뤄진 때에 다시 와서 받느니라.
전단旃檀 수풀은,
눈 닿는 끝까지 소소簫簫하여 한 길이 깊도다.
노니는 아들은 몇 번이나 향香이 코에 부는 것을 맡았느냐마는,
넌지시 본래本來의 마음을 잃어버리도다.
잡스런 나무가 없으니,
잎마다 가지마다 비와 이슬이 한가지니라(같느니라).
더위를 잡아서 가는 사람이 불러도 돌아가지 아니하나니,
사시四時에 속절없이 푸른 그늘을 잡아 펼침이로다.
울밀鬱密(무성)하고 삼침森沈한(깊은) 데에 사자師子가 주住하니(머무니),
눈 듦에 백장百丈 두려움(위엄)을 길이 일으킨다.
남긴 자최를 수풀 밖으로 서로 보이지 아니하거니,
또 어느 것이 이 가운데 돌아감을 용납容納하리오?
* ‘울밀鬱密’은 잡풀이 무성한 모양이요, ‘삼침森沈’은 깊은 모양이라. 이는 법성法性의 경계이니, 대승보살大乘菩薩의 주住한 곳이라.
경계가 고요한 수풀 사이에 홀로 제 노니나니,
주住치(머물지) 아니하며 행行치(가지) 아니하며 또 기대지 아니하도다.
* [毛+瑟][毛+瑟]한 금金 털이 겨우 떨 시절時節에, 그지없는 청풍淸風이 걸음을 좇아 일어나나니라.
다니는 짐승과 나는 새가 다 멀리 가나니,
사방四方을 돌아보되 요요寥寥하여 일경一境이(한 경계가) 비도다[空].
어찌 이것이 예로부터 옴에 벗이 없으리오?
저 털과 빛이 같지 아니한 까닭이니라.
사자새끼가,
온전한 위엄를 일으켜 떨치니 크게 기특奇特하도다.
굴堀에 들어가 몸을 감추어서는 홀로 묘妙를 얻으니,
예로부터 옴에 상왕象王(코끼리 왕)의 앎을 허許락하지 아니 하나니라.
무리가 뒤를 좇나니,
어금니와 손톱 감춤이 어려워 위엄이 이미 이루어지도다.
빈산에 유희遊戱할 땐 끝이 많음이 있으나,
몸 뒤쳐(뒤집어) 한 번 던짐에 새것과 옛것이 없느니라.
세 살에 곧 능能히 크게 우나니,
종성種性이 다름이 없어 세력勢力이 온전하도다.
동서東西를 끊어 앉아 지날 길이 없으니,
외외巍巍하여(높고 커서) 푸른 바위 앞에 사뭇 있나니라.
만약 이 야간野干이(여우가) 법왕法王을 쫓을진댄,
수풀 아래 산 가장자리에 속절없이 오며 가니라.
여시(여우)가 범의 위세를 빌림은 헛되이 제 기롱欺弄함(속임)이니,
겨우 본색本色을 만나서는 도리어 놀라 두려워 하나니라.
백년百年을 요괴妖怪히 속절없이 입을 여나니,
지智를 멸滅하며 몸을 사름[灰身]이 잠깐의 한가함 같도다.
비람원毗藍園 큰 나무 아래에 갓 나시어 사방四方을 돌아보심에,
쫓아 부여잡음(攀緣) 끊음과 어찌 같으리오?
원돈교圓頓敎는,
금룡金龍이 바다에서 나니(나오니) 농籠을 끼지(덮지) 말지어다.
벽력霹靂이 잠깐 굉轟함에(울림에) 비가 기울인 듯 하나니,
그지없는 인천人天이 꿈이 깨도다.
* ‘비 기울인 듯하다’ 함은, 자비慈悲의 구름을 펴서 감로甘露를 뿌리시는 것이라. ‘인천人天이 꿈 깨다’ 함은 생사生死의 큰 꿈을 영永히 깬 것이라.
인정人情이 없으니,
만약 인정人情에 붙으면(집착하면) 도道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남양국로南陽國老(남양혜충국사)는 구구區區함이 심甚하여,
‘오직 비로정상毗盧頂上을 밟아 다닌다’ 하니라.
* 당唐 숙종황제肅宗皇帝가 충국사忠國師께 묻자오되 “어느 것이 이 십신조어十身調御이닛고(십신十身을 조복調服하고 제어制御하는 것입니까?)” 사師가 이르시되, “단월檀越이 비로정상毗盧頂上을 밟아 다니시나이다.” 하시니, 이 말이 인정人情에 붙어 이르신 듯 할새, ‘구구區區가 심甚하다’ 이르시니라.
의심疑心이 있어 결決하지 못하거든 바로 모름지기 다툴지니라.
진실眞實의 옳음과 진실眞實의 그름은 번뇌煩惱를 여의니라.
아침이 마치도록 옛 길에 사람을 불러서 (이 길을)가라 하거늘,
그렇건마는 모르는 무리는 황초荒草를(거친 풀을) 사랑한다.
이 산승山僧이 인아人我를 가장하는[逞, 극진極盡히 하는] 것이 아님이라.
법法을 위爲하여 몸 잊음이 정正히 이 때이니라.
사병邪兵을(삿된 병사를) 향向하여 지인智刃(지혜의 칼날)을 휘두르지 아니하면, 계주髻珠가 허물없음을 누가 알리오?
수행修行하는 이가 단상斷常의 구덩이에 떨어질까 두려우니,
만약 이 구덩이에 떨어지면 여의어 벗어남이 어려우니라.
오늘 아침에 북 침은 삼군三軍을 위爲함이니,
간과干戈(창과 방폐)를 움직이면 도리어 옳지 아니하니라.
그름이 그름 아니니,
령靈한 움(새싹)이 나지 아니한 때를 보아 취取하라.
대붕大鵬이 낼개를 듦에 하늘을 갈거니,
어찌 찬 매미의 죽은 가지 사랑함을 배우리오?
옳음이 옳음 아니니,
서西녘 집을 동東녘 집 땅에 두도다.
가운데 수자樹子가(나무가, 숲이) 만약 그대에게 속屬하거든,
부지런히 사지四至(是非) 찾음을 말지니라.
*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이룰 때에 사지四至 주변은 수달須達(수달장자)에게 속屬하고 정중正中의 큰 나무 수풀은 태자太子에게 속屬하니 ‘중심수자中心樹子(가운데 나무)’라 하는 말이 이로부터 나니라.
호리毫釐(털끝)만 어기면 잃음이 천리千里이리니,
비非(그름)와 시是(옳음)가 서로 섞여 기령己靈(자기의 신령함)을 혼미하도다. 돌엣 불이 한 번 휘두름에 하늘 밖에 지나가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오히려 달 가의 별을 바라본다.
옳음은 곧 용녀龍女가 문득 부처됨이,
행行 닦음을 삼아승기三阿僧祇가 지남을 기다리지 아니하니라.
이젯 사람은 슬프다, 어둑하여 모르고 거칠어 날마다 남방南方에 이르르되 제 알지 못한다.
그름[非]은 곧 선성善星 비구가 살아서 (지옥에)꺼지니,
인因과 과果를 다 잊어 정지正知를(바른 지견을) 혼미하도다.
전륜성왕의 친족은 높고 낮음이 없거늘,
죽살이(死生, 생사)는 무슨 일로 갈라져 한가지가 아닌고?
* 선성善星은 부처의 사촌四寸 아우라 한가지로 윤왕輪王의 종족種族이니라.
내 일찍 년래年來에(여러 해 전부터) 학문學問 함을 쌓아,
촌음寸陰이 빨라 머무름이 어려움을 길이 한恨 하노라.
원원源源(근원이 깊어 끊임없음)이 마치 찬 냇물에 물과 같으니,
창명滄溟에 이르지 아니하여선 어찌 곧 말리오(쉬리오)?
또한 일찍이 소疏를 얻으며 경론經論을 찾으니,
세상을 생각하여 어두움 헐어버릴 등燈이 되길 기약期約하노라.
분하고 원통히 여겨 항하사수의 뜻을 다하고자 함이어니,
어찌 말 없음이 이 진승眞乘인 줄을 알리오?
명상名相을 분별分別하여 쉴 줄을 아지 못하니,
구름에 격隔하여(막히어) 하늘의 해를 보려함과 같도다.
상相이 다하고 이름 잊음을 그대에게 바로 보이리라.
신라新羅엔 부자附子[극약劇藥]요 금주金州엔 칠漆이니라.
바다에 들어가 모래를 헤아림은 한갓(헛되이) 제 피곤함이니,
오직 성성惺惺함이라 더욱 함 직하지 못하니라.
오직 문수文殊만이 이 수數를 아시어,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라 하시니라.
* 무착無着이 청량산淸凉山에 가시어 문수文殊를 친親히 뵈시어 묻자오되, “대중이 얼마나 많나니잇고?”나니, 문수文殊가 대답對答하시되,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라” 하시니, 이 수數를 밝히면 허물 할 분分이 없느니라.
여래如來의 괴로이 꾸짖으심을 도리어 입으니,
외물外物(바깥 물건)에 나아가(치달려) 구求함을 어느 시절時節에 멈추랴? 의주衣珠(옷 속 보배)가 값없으니 비록 있으나 그렇건마는,
아득히 취醉하여 깨어나지 아니한다.
남의 진보珍寶(무진보배)를 헤아린들 무슨 이익利益이 있으리오?
제 몸엣 가재家財(재산)일랑 도리어 버리도다.
두 손으로 잡아와 만약 씀을 얻으면[得用],
구태여 괴로이 산천山川에(산과 시내로) 다니지 아니하리라.
이전부터 층등蹭蹬하여(비틀거려) 속절없이(공연히) 다닌 것을 아노니,
바로 하늘의 남南녘과 또 북北녘에 다다르도다.
몇 번이나 녹수청산綠水靑山 갓에,
조사祖師를 들이받고도 도리어 알지 못하느뇨?
여러 해를 굽혀 풍진객風塵客이 되오니,
가던 날에 의삼衣杉(삼베옷)이(헤져) 절반도 있지 아니하도다.
지척咫尺인 옛 정원에 돌아감을 얻지 못하니,
자친慈親이(어머니가) 해 비스듬히 넘어가는)문門에 속절없이 기대었도다.
종성種性이 삿되거늘,
또 삿된 스승을 만나니 병病이 더욱 더하도다.
열어서 밝힐 진실眞實의 선지식善知識을 만약 만나면,
비록 마른나무라도 또한 꽃 피게 하리라.
앎과 해解가 착錯하니(그릇되니),
앎이 막힘이 되고 해解가 가림이 되나니라.
공화空花가(허공의 꽃이) 본래本來 남[生]이 아닌 줄을 사무쳐 알면,
어지러이 동작動作함에 미워하며 사랑함이 없으리라.
여래如來의 원돈법제圓頓法制를 알지 못하고,
오직 공유空有를 가져서 머리 다투어 싸운다.
섭공葉公의 그림 즐김도 또한 이와 같아서,
진실眞實의 용龍을 갓 보고는 도리어 제 놀라나니라.
* 섭공葉公이 용龍 그리기를 즐겨하다가 진용眞龍(진짜 용)을 갓 보고는 도리어 제 두려워하여 달아나니라. ‘진용眞龍(진짜의 용)’은 이 원돈교법圓頓敎法이요 ‘화룡畵龍(그림의 용)’은 이 공유空有의 두 견見이라.
이승二乘은 정진精進하나 도심道心을 (發하지)아니하나니,
편공偏空(치우친 공)을 제 증證하여 여의어 벗어남을 구求하도다.
삼도三途의 제자諸子가(모든 아들들) 날로 볶고 달여지거늘,
마음을 돌이켜 비지悲智(자비와 지혜) 씀을 즐기지 아니하도다.
외도外道는 총명聰明하나 지혜智慧가 없으니,
취사取捨를(가지며 버림을) 마음에 두었거니 어찌 잠깐인들 잊으리오?
양주楊朱가 오직 갈림길 많음을 한恨(한탄)하고,
발아래가 이 가향家鄕(고향집)인 줄을 알지 못하니라.
또한 어리석고 미혹하니,
일어나며 앉음이 다 나무로 만든 아이 같도다.
제 두어있는 생애生涯가 조부祖父에게 전해 얻은[傳得] 것이어늘,
초혜草鞋(짚신)을 밟아 다하되 잠깐도 알지 못한다.
또한 적고 어리석으니,
눈 닿은 데 항상함이 없거늘 미우며 사랑함을 임연任然히(되는대로) 한다. 때때로 모래를 가져서 성城 애워쌈을 배우나니,
슬프다! 네 환우寰宇(천하)가 큰 줄을 어찌 알리오?
* ‘성城을 애워쌈’은 [소아론小兒論]에 이르되, 공자孔子가 길을 가실 때에 아이가 모래로 성城을 만들거늘 공자孔子가 수레를 멈추고 물으시되, “어찌 수레를 피避하지 아니하느냐?” 아이가 대답對答하되, “성城이 수레를 피避함이 옳은가요, 수레가 성城을 피避함이 옳은가요?”하니, 공자孔子가 웃으시고 수레를 돌려서 가시니라.
빈주먹 손가락 위에 실實한 앎을 내나니,
어리며 적으며 미치고 미혹한 것이 어두운 사람과 같도다.
만약 이 마음에 득得한(얻은) 바 없음을 알면,
봄의 바람과 가을의 달이 제 소소簫疎하리라.
손가락을 집착하여 달을 삼아 속절없이 공부功夫 드리나니,
달을 잃을 따름이 아니라 도리어 손가락도 모르나니라.
문득 달을 보고 손가락을 도로 잊으면,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찬 광명光明의 속이리라.
근根과 경境의 법중法中에서 속절없이 (눈을)비비어 괴이怪異하니,
그림자의 일이 섞여 벌려져 정正한 닦음을 혼미하도다.
웃을만하다! 환사幻師가 환물幻物을 만나,
스스로 보고 의심疑心하여 두려워함 쉴 줄을 알지 못하나니라.
* ‘근根과 경境’은 내육근內六根(안의 육근)과 외육진外六塵(밖의 육진)이니, 육신六識은 서로를 좇나니라.
한 법法도 보지 못함이 곧 여래如來이니,
봄이 이르거늘 모든 꽃이 비를(무릅쓰고) 맞아 피었도다.
이 색色과 이 마음을 사람이 알지 못할새,
종鐘을 치며 북을 쳐서 높은 대臺에 오르노라.
바야흐로 이름을 얻되 ‘관자재觀自在’이니,
능관能觀이(觀하는 자가) 달 같으나 밝음을 잊지 못하도다.
법법法法이 얽힌 데 없는 줄을 알고자 할진댄,
대지大地와 산하山河가 이 눈자위니라.
알면 곧 업장業障이 본래本來 비니[空이니],
법법法法이 뿌리가 없거늘 망령되이 분별分別한다.
마음 남이 곧 이 법法 나는 때이니,
마음이 만약 나지 아니하면 법法이 제(스스로) 멸滅하리라.
*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 마음이 나면 갖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갖가지 법이 멸한다.
『所謂心性常無念故 名爲不變 以「不達一法界故 心不相應忽然念起」 名爲無明』: 이른바 심성心性은, 항상 무념無念인 까닭으로 이름하여 ‘불변不變’이라 하고, 「일법계一法界를 통달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마음이 상응하지 못하여[心不相應] 홀연히 생각이 일어남」을 이름하여 ‘무명無明’이라 한다.
-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알지 못할진댄 도리어 모름지기 옛 빚을 갚나니,
쇠 장鏘과 말의 밀을 또 어찌 의심疑心하리오?
조사祖師와 부처가 도망逃亡할 곳이 없다고 누가 이르느뇨?
날로 온 몸을 버리시되 오히려 알지 못하시나니라.
* ‘금장金鏘과 마맥馬麥’은 <인과경因果經>에 이르시되, 세존世尊이 인시因時에 치아를 찌르는 억센 밥으로 사람을 대접해드리니, 이 인연因緣으로 성도成道하신 후後에 이 두 난難(어려움)을 보시니라. ‘장鏘’은 창槍 같은 것이라.
주린 사람이 임금의 차반(반찬)을 만나도 능能히 먹지 못하나니,
높고 낮은 마음이 나서 제(스스로) 사이가 벌어지니라.
불러서 오라하여 밥을 주어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슬프다! 굶주려 죽는 사람은 어찌 한정하리오?
병病드니 의왕醫王을 만난들 어찌 좋아짐을 얻으리오?
약藥과 병病을 몰록 덜어도 전筌(통발)을 잊지는 못하니라.
독毒을 바른 한 소리의 북에,
누워서 들으며 다니며 들으니 다 극極에 달達한 초연悄然함과 어찌 같으리오?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하루는 선재동자善財童子에게 약초를 캐어오라 하시며 이르시되, “약 아닌 풀이 있으면 캐오너라”고 하시니, 선재가 이르되, “산에
는 약 아닌 것이 없습니다”라 하였다. 문수가 이르시되, “그럼 약 풀을 캐오너라.” 하시니, 선재가 땅에서 한 줄기 풀을 주워 문수께 바쳤다. 문수가 받아들고 대중에게 보여 이르시되, “이 약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사람을 살릴 수도 있느니라.” 하였다. - 『화엄경행원품소초華嚴經行願品疏鈔』권3.
욕欲에 있어 선禪을 행行함은 지견知見의 힘이니,
티끌에 있으나 날이 맟도록 제 티끌 없도다.
마음 편안함을 구태여 화華와(서울과) 야野를(시골을) 논論하지 말지어다.
눈썹 털을 밟으면 이곳이 진眞이리라.
불 속에 난 연蓮은 마침내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꽃이 수미산須彌山과 같고 잎이 허공虛空과 같도다.
맑은 향香을 삼계三界 안에 널리 흩나니,
서풍西風에 쉽게 떨어짐을 시름하지 말지어다.
용시비구勇施比丘가 중죄重罪를 범犯하고 무생無生을 깨달으니,
선善과 악惡은 예로부터 옴에 서로 어기지 아니하니라.
오음五陰의 구름이 열려 달이 하늘에 가득하니,
구태여 집에 돌아갈 길을 다시 묻지 말지어다.
일찍 부처 되어 지금에 있나니,
상호相好가 단엄端嚴하심이 백만百萬 가지로다.
금구金口로 펴심을 만약 알지 못하였거든,
칠근삼七斤杉(누비옷) 아래에 시험삼아 찾아보라.
사자師子의 울음에,
서른 세 사람[卅三祖師]이 다 놀라 달아난다.
그린 병病을 쳐서 때리고 돌아오니,
푸른 산과 흐르는 물이 도리어 예와 같도다(依舊).
* ‘화병畵甁’은 <출요경出耀經>에 이르시되, 사내가 그림으로 장식한 병甁에 똥을 가득히 담아 마개를 굳게 닫아 계집에게 주고 이르되, “내 몸을 본 듯이 가지라.” 하였는데, 계집이 받아 상완賞翫하더니(귀중히 아끼고 즐기더니), 사내가 쳐서 깨뜨려 보여주고 이르되, “너는 내 몸을 보라. 또한 이와 같을 따름이니라.” 하니라.
두려움 없는 설함은,
바로 미혹한 무리로 더불어서 못과 쐐기를 뽑느니라.
냇가의 야로野老는 눈썹을 비비지 말지어다.
여름엔 더운 해 그림자가 있고 겨울엔 눈이 있나니라.
몽동懵憧하며 완피달頑皮靼함을 깊이 슬퍼하노니,
옛 나라가 멀지 아니하거늘 즐겨 가지 아니하도다.
도리어 뜬 부평초의 뿌리 꼭지가 끊어짐과 같아서,
유유悠悠한 생사生死에서 바람과 물결을 좇도다.
* ‘몽동懵憧’은 슬기롭지 아니한 것이요, ‘완피달頑皮靼’은 쇠고기의 가장 두꺼운 가죽이니 이는 소승小乘이 근성根性이 둔鈍하여 대법大法을 듣고도 알지 못함을 비유하심이라.
오직 중죄重罪를 범犯함이 보리菩提 막음인 줄을 아나니,
죄성罪性은 물결이 얼음 얼어 일어남과 같으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목말라 죽되 머리를 숙이지 아니하나니,
어찌 엉긴 얼음이 온전히 이 물인 줄을 알리오?
여래如來가 비결祕訣 열어주심을 보지 못하나니,
비결祕訣은 어느 사람이 구태여 들어 펴리오?
귀 뚫은 되중[胡僧, 달마達磨]이 마땅히 크게 웃되,
‘밝고 밝은 눈 위에 또 서리를 더함이라’ 하리라.
두 비구比丘가 음淫과 살殺을 범犯하고,
금전金田에 상사上士의 이름에 벌려있음을 부끄러워하니라.
두려워하여 마음이 비롯된 곳을 알지 못하여,
조촐한 계戒를 의지하여 여생餘生을 구救하고자 하니라.
* ‘금전金田’은 승가람僧伽籃을 모아 이름이니, 수달장자須達長者가 기타태자祇陀太子의 정원을 사서 정사精舍를 짓되 그 땅에 금金을 가득하게 깔아 재 쌓아서 주고 사실새[買] 저[彼, 그곳]를 금전金田이라 하나니라.
파리波離(우바리존자)가 반딧불의 광명光明으로 죄罪를 더 맺게 하되,
가벼우며 무거움을 자세히 살펴 헤아려서 호리毫釐(털끝)를 분석分析하니라. 어엿브다(가엽도다)! 감감[憨+鳥][憨+鳥]이 마음이 비록 빠르나,
발아래에 고기 다니거늘 알지 못하도다.
* ‘파리波離’는 계율 가짐이 제일인 우바리존자優波離尊者이라. 두 비구比丘가 산중山中에 암자菴子를 짓고 수행修行하되 청정한 계戒를 굳게 지니더니, 한 비구比丘가 나가 다니거늘 한 비구比丘가 암자에서 선정禪定을 하다가 한 여인이 오거늘 청정한 계戒를 범犯하고서 안의 마음에 기쁘지 아니하여 한 곳에 있던 비구比丘가 돌아오거늘 계戒를 범犯한 일을 이르되 그 비구比丘가 노怒하여 쫓다가 그 여인이 깊은 수렁에 빠져 죽으니, 한 비구比丘는 무심無心으로 음행을 범犯하고 한 비구比丘는 무심無心으로 살생을 범犯하여 둘이 우바리존자優波離尊者께 가서 참회懺悔를 하여 뵈옵거늘, 존자尊者가 소승小乘으로 죄罪를 맺으시는되 두 비구比丘가 의심疑心을 결정하지 못하여 유마거사維摩居士께 가서 참회懺悔하고 저들의 하였던 일을 사뢰었는데, 유마維摩가 꾸짖어 이르시되, “우바리優波離가 근기根機를 잘 보지 못하였도다. 이 두 비구比丘가 대승大乘을 오래 닦으니 어찌 바다를 소의 발자국에 들어가게 하리오?” 하실새 이르시되, “우바리가 반딧불의 광명光明으로 죄罪를 더 맺는다” 하시니라. 대사大士가 이르시되, “죄성罪性이 안에 있지 아니하며 밖에 있지 아니하며 중간中閒에 있지 아니하여, 전제前際에 가지 아니하며 후제後際에 오지 아니하며 중제中際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삼제三際에 구求하여도 조금도 얻지 못하리라.” 하시거늘 두 비구比丘가 홀연忽然히 대오大悟하여 무생인無生忍을 얻으니라. ‘감감(憨+鳥)(憨+鳥)’은 고기를 잡아 먹는 새라.
유마거사維摩大士가 몰록 의심疑心을 덜어내시니,
세 곳에 마음 없음을 잠깐 가벼이 의거하시다.
번인番人[智]이 기린아麒麟兒[理]를 잡아 얻어서,
기원祇園에 놓아 들이니 얻을(찾을) 곳이 없도다.
* ‘기원祇園’은 기타태자祇陀太子가 받들어 바친 정원[園]일새 이로 인因하여 이름하니라.
빛난 해가 서리와 눈을 녹임과 같으니,
눈과 서리가 다 녹거늘 푸른 봄을 보도다.
뉘(누가) 영운靈雲의 눈을 연 곳을 향向하여,
도화桃花(복사꽃)의 옛 주인主人을 알리오?
* 영운화상靈雲和尙이 도화桃花를 보시고 도道를 깨달아 송頌으로 읊으시되, ‘서른 해를 지나옴에 칼 찾는 객客이더니, 몇 번이나 잎 지며 또 가지 돋았던가? 한 번 도화桃花를 본 후後로부터 바로 지금에 이르렀으되, 다시 의심疑心치 아니하노라’ 하시니라.
사의思議 못할것이어늘 속절없이 탁량度量하나니(헤아리나니),
선善과 악惡이 좇아 온 바 없어 성性이 본래本來로 떳떳[常]하니라.
향엄동자香嚴童子는 속절없이 입을 열도다.
발을 듦에 어찌 도량道場임을 알리오?
해탈解脫의 힘은 높은 바람과 같으니,
그림자 없으며 형상 없으되 닿은 곳에 통通하니라.
만리萬里에 뜬 구름이 스러져 흩어 없거늘,
일륜一輪(한 바퀴) 밝은 달이 찬 허공虛空에 있도다.
묘용妙用이 항사恒沙라 극極(다함)이 없으니,
옛의 깊은 연緣이 있어 잠깐 마주봄을 얻도다.
(선지식의)진실한 교화에도 씻어내지 못한[未淘] 날을 돌이켜 헤아려보건댄,
몇 번을 흘러 다니되[流浪] 쑥이 불려 날아다님과 같았는고?
네 가지 일로 공양供養함을 어찌 수고롭다 사양하리오?
비유컨댄 나귀를 먹이며 또 말을 먹임과 같이 하리라.
구유(모이 주는 그릇)에서 주워 바리(발우)에 담으니,
사해四海에 어느 사람이 빚을 갚으리오?
* ‘네 가지 일’은 옷과 음식飮食과 잠자리와 의약醫藥이라.
* ‘나귀 먹이며 말 먹임과 같이 하다’ 함은, 각별各別히 갚음을 바라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 옛날에 양식을 탁발하던 스님이 속인의 집에 가시거늘 속인이 묻되, “무엇을 구求하는가?” 스님이 이르되, “가리지 아니함이 옳으니라.” 하거늘, 속인이 즉시에 말 구유(모이그릇)에 있는 풀을 바리에 담아 주니, 이를 인용하여 이르심이라.
만냥萬兩의 황금黃金도 또한 스러지리니,
이 마음을 메어서 임(짊어져 받듦)은 마침내 논論함이 어렵도다.
비록 보배를 포시布施함이 모래의 수數와 같아도,
조계曹溪의 한 점點 은혜恩惠에 미치지 못하니라.
골骨을 부수며 몸을 부수어도 족足히 갚지 못하리니,
하늘과 땅과 비와 이슬을 속절없이 이르도다.
예와 이제에 뉘(누가) 이 은恩을(은혜를) 갚은 사람인고?
만약 실 끝만큼이라도 있으면 곧 저버리리라(기대를 저버리리라).
* ‘비와 이슬의 은恩’은 색신色身을 길러낼[牧] 따름이어니와, ‘일구一句의 은恩’은 법신法身을 길러냄이라.
한 구句에 요연了然히 백억百億을 건너뛰니,
일구一句를 논論할진댄 내 능能치 못하노라.
이같이 들어 일러 종지宗旨를 밝힐진댄,
서西에서 온 눈 푸른 중을 웃기리라.
법중왕法中王은 이것이 이[是]니,
십체十體와 삼신三身이 서로 같지 아니하니라.
제게 있는 영광靈光이 고금古今(예와 지금)에 비취거니,
어찌 구태여 가슴 앞에 만자卍字를 쓰리오?
* ‘십체十體’는 십신十身이니 십체十體를 이르면 ‘삼신三身’이 섭攝하여 드니라. ‘서로 같지 못하다’ 함은, 십체十體와 삼신三身이 법중왕法中王과 서로 같지 못한 것이니, ‘십체十體와 삼신三身’은 이 오늘날 새로 이룬 부처요 ‘법중왕法中王’은 이 본원자성천진불本源自性天眞佛인 까닭이라.
가장 높아 승勝(수승)하니 어찌 펴리오?
영산靈山(석가)과 소실小室(달마)이 다 속절없이 전傳하도다.
말씀 없는 동자童子라야 능能히 펴 이르리니,
오며 와서 네 초혜草鞋(짚신)의 전錢(값)을 버리라.
* 전錢은 돈이니 초혜草鞋를 사는 값이라.
항사恒沙의 여래如來가 한가지로 다 증證(증득)하시니,
또 각별各別한 법法이 가히 전지傳持함(전하여 가짐) 없도다.
바다의 하늘에 밝은 달이 처음 난 곳이여.
바위의 나무에 우는 납이(원숭이가) 정正히 헐歇할(쉴) 때로다.
내 이제 이 여의주如意珠를 아니,
사무친 광명光明이 앞뒤가 없도다.
이제 모든 사람의 앞에 던져져 있나니,
여겨서 의론議論하며 사량思量할진댄 도리어 보지 못하리라.
신信하여(믿어서) 받아들일 사람에게 다 서로 응應하리라.
웃고 천봉千峯에 들어서 머리 돌이키지 아니하도다.
밥 먹은 후後의 산 차[茶] 두서너 잔盞에,
진사塵沙(티끌 모래) 같은 불조佛祖가 다 유유悠悠하도다.
말갓말갓이(환하게) 봄을 다시 어찌 이르리오?
만물萬物이 오직 새로우니 또 한 해로다.
가며 가서 돌아오지 아니하는 어느 곳의 객客인고?
죽방竹房이 그친 구름 갓에 깊이 걸려(잠겨져) 있도다.
한 것[一物]도 없어 비어서 요요寥寥하니,
어찌 이 겁화劫火의 불사름을 일찍이 지내리오?
월왕越王은 오吳나라 기울일 모책謀策 두심을 무던히 여길지로다.
범려范蠡의 외로운 배를 쉽게 부르지는 못하니라.
또한 사람 없으니,
오직 허공虛空이 이 옛 이웃이로다.
곡도(幻, 환)가 멸滅하며 곡도(환)가 나는 것이 다 있음이 아니어니,
다시 어느 곳을 좇아 소친疎親을 얻으리오?
또한 부처 없으니,
옛 사람이 여룡驪龍[無明] 굴窟[生死]에 속절없이 내려오도다.
상호相好를 백겁百劫을 닦아 헛되이 이르도다.
벌건 화로[無生]의 불꽃 속엔 물物의 머무름이 어려우니라.
* ‘여룡驪龍’은 검은 말 용龍이라.
대천사계大千沙界가 바닷 가운데 거품이니,
일어나며 멸滅함이 좇은 데 없거늘 뉘(누가) 이 주主인고?
설봉雪峯이 일찍이 모든 사람으로 보게 하시니,
만리萬里에 구름 없거늘 해가 낮[正午, 정오]이로다.
일체一切의 성현聖賢이 번게 떨침과 같으니,
또한 형상形狀 없으며 또 이름 없도다.
하늘 비고 흰 달에 사람 돌아간 후後에,
얼마나 취모吹毛를 잡아 불평不平(평등치 못함)을 끊었느뇨?
* ‘취모吹毛[鏌鎁]’는 칼의 이름이니, 칼날에 터럭을 불어도 끊어질새 취모吹毛이라.
비록 철륜鐵輪을 정수리 위에 둘려도,
임운任運하여(움직임에 맡겨) 연緣을 좇아 짓는 바 없도다.
불붙으며 바람 흔들어 만물萬物이 비나(공空하나),
푸른 하늘이 능能히 꺾여 떨어짐을 보지 못할 것이로다.
정定과 혜慧가 두렷이 밝아 마침내 잃지 아니하나니,
진로塵勞를 능能히 이겨 체體가 제 떳떳하도다.
이제와 옛에 또 더하며 덜한 곳이 없으니,
옛 사람이 잡아서 금강金剛에 견주시니라(비유하시니라).
해는 가히 차게 할지어니와,
진금眞金은 어찌 능能히 다시 광鑛(광석)이 되리오?
마공魔工이(마군魔軍의 솜씨가) 풀무를 능能히 펴지 못하여,
만고萬古에 한갓 수고로이 마음이 말갛말갛하니라(말고 환하니라).
* 광鑛은 금金과 돌이 섞인 것이라.
달은 가히 덥게 할지어니와,
이 체體는 허공虛空 같아서 끊어 멸滅함이 아니니라.
인간人閒의 망견妄見은 이지러지며 참이 있을 뿐이언정,
하늘 밖의 외로운 광명光明은 헐歇할(쉴, 그칠) 사이가 없느니라.
중마衆魔(마군의 무리)가 가히 진설眞說(진실한 설법)을 헐지 못하나니,
진설眞說은 길이 ‘잣이 뜰에 있음’과 같으니라.
얼마나 눈과 서리의 만목萬木 떨어지게 함을 보았는가마는,
허공虛空에 서리며 헌함軒檻(마루)에 솟아나 다시 푸릇푸릇하도다.
상象(코끼리)의 수레가 일어나(높아) 가득히 길에 나아가나니,
진체眞體는 허공虛空과 같아서 막힌 바 없느니라.
구름이 부상扶桑(해 돋는 동쪽의 땅)에서 다하여 해가 이미 돋아나거늘,
횃불이 머물지(그치지) 아니하여 무엇을 기다리느뇨?
뉘(누가) 사마귀[螗蜋, 魔外]의 능能히 수레 거스름을 보리오?
수유須臾(잠깐사이)에 부수어지나 뜻이 오히려 모질도다(사납도다).
슬프다! 너, 매미[蟬, 二乘] 나무에 붙어서(의지하여),
이슬 마시며 바람에 울어 일생一生을 지냄에도 미치지 못하는구나.
큰 상象(코끼리)은 토끼의 길에 노닐지 아니하나니,
편偏[치우침, 漸敎]을 그르다 하며 소승小乘을 꺾음이 어찌 속절없으리오?
없는 중中의 있는 길[無中有路]에 만약 능能히 들어가면,
쇠로 걸어 잠근 현관玄關(현묘한 관문)을 다 버리리라.
크게 깨달은 이는 소절小節(사소한 일)에 거리끼지 아니하나니,
상相을 취取하여 마음 닦으면 안(통달한) 사람이 웃으리라.
다니며 가만히 있음에 만약 서자西子(西施, 미인)의 태도 없으면,
‘찡그림을 본받아 추함을 취取함’이라 다시 슬퍼할만 하니라.
* ‘찡그림을 배우다’ 함은 <장자莊子>에 이르되, 서시西施가 마음에 병病이 있어 얼굴을 찡그리는데, 그 마을의 추한 여인이 그것을 보고서 아름답다 여겨 집으로 돌아가 또한 본받아 얼굴을 찡그리는데, 그 마을의 부유한 사람은 그것을 보고서 문門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아니하며 가난한 사람만이 그것을 보고서 처자식을 함께 데리고 나가느니라. 만약 크게 깨닫지 못하여서 거칠게 막힘없는 무애행無礙行을 짓는다면, 어찌 추한 여인이 미인의 ‘얼굴 찡그림’만 배울 따름이리오? 더욱 슬퍼할만 하니라. 이는 큰 깨달음을 칭찬하고 미혹한 이를 경계警戒한 말이라.
대나무 구멍으로 봄을 가져서 창창蒼蒼(하늘)을 비방誹謗하지 말지어다.
뚫린 댓구멍은 비록 경계의 다함이 있으나 하늘이 어찌 그리 적으리오?
심지心智가 열려서 밝아 망견妄見이(망령된 견해가) 비면[空],
법계法界가 갓의 밖이 없는 줄을 비로소 알리라.
‘알지 못할진댄 내가 이제 그대를 위爲하여 결決하리라’ 하시니,
이 뜻이 명명明明하나(밝고 밝으나) 전傳함이 쉽지 아니하니라.
뉘(누가) 즐겨 옛 바위 아래에 돌아오리오?
저 창해滄海가 뽕나무밭이 됨을 무던히 여기리라.
《後序》
법法은 견문각지見聞覺知(보고 듣고 앎)가 아니로되 견문각지見聞覺知가 또한 법法 밖이 아니니, 모르면(미혹하면) 범凡이요 알면 성聖일새 옛에 도道를 득得한 사람이 즉即하지 아니하며 여의지[離] 아니하며 얽매이지 아니하며 벗어나지 아니하여, 기機를 응應하여 현顯히(드러내어) 씀에 이름을[言] 시혹 능能히 면免하지 못하되 그 자재自在함은 비록 날이 맟도록 이르나[言] 잠깐도(조금도) 이르는 것[言]이 아니니,
지난날에 영가永嘉가 육조六祖를 뵈옴에 막대를 흔들고 서서 눈 닿음(마주대함)에 도道가 있거늘, 조금 머물러 하룻밤 주무심을 인因하여 도道를 증證한 노래를 지으시니, 도道는 본래本來 증證이 없거늘 증證하고 노래하시니, 비록 말씀 있음을 면免하지는 못하시나 마침내 허물없으시니라.
그러면 후세後世에 그 노래를 말미암아 깨달아 든 사람이 알지 못하리로다 그 얼마나 되며, 또 좇아서 주註하여 새긴 사람이 또한 알지 못하리로다 얼마나 되느뇨? 그러나 진실眞實로 영가永嘉의 뜻을 득得한(깨달은) 이는, 대개 그러한 사람 있기가 어려우니라.
천공선사泉公禪師가 그 무리에 빼어나게 특출하시어 천경千頃의 도중徒衆(믿는 대중)을 거느리신 여가餘暇에 그 노래 구구句句(구절마다)의 사이에 나누어 송頌을 지으시니, 대저大抵한데(대체로 보아) 색色을 좇아 공空을 이르시며 정定을 즉即하여 혜慧를 이르시며 한 상相도 보지 못하되 법계法界에 가득하며 한 티끌도 여의지 아니하되 불성佛性이 원만圓滿히 갖추시니, 그 말씀이 쇄락洒落하며 그 뜻이 넓게 크고 멀어서 맑고 환하게 영가永嘉의 마음이 수백년數百年 멀리 끊어진 후後에 펼쳐지시니,
내가 그으기(남몰래) 다행으로 여겨 사師의 실마리를 두드려서 인因하여 열어 밝힐새, 사師의 송頌을 뵈옵고 청풍淸風을 사모思慕하여 능能히 내 그만두지 못하여 명命하여 판板에 새겨서 써 그 전함을 넓히노니, 바라는 것은 막힌 사람으로 하여금 통通하게 하며 어두운 사람으로 하여금 밝혀서 한 번 건너뜀에 몰록 깨닫게 함이 사師의 주심(賜, 분부分付하심)이니라.
희령 구년 칠월 십일 괄창 축황 후서
영가대사 남명천선사계송永嘉大師南明泉禪師繼頌
하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