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비바사론 상권
1. 분별색품(分別色品) ①[1]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게 경례합니다.
이제 저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아비달마[對法]의 바다에 대하여
작으나마 바른 뜻을 살피보고자 합니다.
제자 등을 가엽게 여겨서
마땅히 해석하여 지혜가 생기게 하고
『오사론(五事論)』에 대한 어리석음을 소멸시켜
저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하고자 합니다.
[『오사론』을 지은 까닭]
세우(世友) 존자께서 유정들의 이익을 위하여 『오사론』을 지으셨고,
이제 나는 해석을 하고자 한다.
【문】왜 이 『오사론』을 해석하고자 하는가?
【답】깊이 감추어진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만약 이 깊이 감추어진 뜻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지 못하였을 때 세간에서 기쁘게 받아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이 깊이 감추어진 뜻을 드러낸다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낼 때 세간에서 기쁘게 받아 쓸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해와 달이 비록 밝게 빛나지만 구름 등으로 가리워졌을 때는 밝게 비추지 못하고, 그 가린 것이 제거되면 밝게 비추게 되는 것과 같다.
본 논서의 문장도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비록 이미 간략하게 갖가지 수승한 뜻을 밝혔으나 이를 넓게 해석하지 않는다면 광명이 드러나지 않으므로 광명이 드러나게 하고자 하여 나는 마땅히 해석을 한다.
【문】이제 모름지기 『오사론』을 해석해야 할 원인을 알았다.
존자는 어떠한 연유로 이 논설을 지었는가?
【답】제자들이 자세히 들어 지니는 것을 두려워하므로 간략한 것에 의지하여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저 존자는 항상 이렇게 생각하였다.
‘어떻게 모든 제자들이 일체법의 자상과 공상에 대하여 간략한 문장에 의지하여 명료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명료한 깨달음은 금강산과 같아서 모든 사악한 견해[惡見]의 바람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명료하지 않은 깨달음은 갈대꽃 같아서 사악한 견해의 바람이 불어오면 흔들려 공중으로 휙 돌아 날아가 버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제자들이 견고한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이 논서를 지었다.
[자상과 공상]
【문】무엇을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이라고 하는가?
【답】딱딱함[堅]ㆍ습기[濕]ㆍ따뜻함[暖] 등이 모든 법의 자상이고, 영원하지 않음[無常]ㆍ괴로움[苦] 등이 모든 법의 공상이다.
세간에 비록 모든 법의 자상에 대해서는 능히 아는 자가 있을 수 있지만, 공상에 대해서는 모두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모든 제자들이 법의 두 가지 모습에 대해서 여실하게 알게 하고자 이 논서를 지었다.
[『오사론』이라고 이름한 까닭]
【문】이제 모름지기 『오사론』을 해석해야 할 연유를 알았다.
이것을 어찌하여 『오사론』이라고 이름하는가?
【답】이 논서 가운데서 다섯 가지 일[五事]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이 논서를 『오사론』이라고 이름하는 데,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일의 뜻은 차이가 없다.
아비달마의 모든 위대한 논사들이 다 이렇게 말한다.
일에는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성의 일[自性事),
둘째는 소연의 일[所緣事],
셋째는 묶임의 일[繫縛事],
넷째는 원인이 되는 일[所因事],
다섯째는 거두어들임의 일[攝受事]이다.
이 가운데서 오직 자성의 일만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다섯 가지 법을 말하는가?
【답】그것의 일과 법의 뜻이 또한 차이가 없다.
【문】무슨 까닭에 이 논은 오직 다섯 가지 법만을 다루는가?
【답】어떤 이가 말한다.
“이 질책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줄어든다거나 늘어난다고 하면 다 힐난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말한다.
“이 논서는 간략하게 모든 법의 체(體)와 종류, 차별을 드러내어 모든 법을 서로 혼잡하지 않게 거두어들이고자 오직 다섯 가지만을 말한다.
만약 이 다섯 가지를 통틀어 한 가지 법의 이름으로 세운다면,
비록 이 간략하게 말한 것 속에 모든 법을 다 거두어들일 수는 있지만,
심(心) 등의 다섯 가지 법의 체와 종류, 차별을 서로 혼잡하지 않게 드러낼 수 없다.
만약 유루(行漏)와 무루(無漏) 등을 말하여 두 가지로 하고,
유학(宜學)ㆍ무학(無學)ㆍ비유학무학(非有學無學) 등을 말하여 세 가지로 하고,
욕계ㆍ색계ㆍ무색계, 이 삼계(界)에 묶이지 않는 것 등을 말하여 네 가지로 한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문】어찌 이름을 열거하지 않고 다섯 가지 법이 있음을 알겠는가?
무슨 까닭에 논의 맨 앞에 다섯이란 숫자를 세웠는가?
【답】마치 실로 꽃들을 연결한 것은 쉽게 지니고자 하기 때문이다.
실로 여러 가지 꽃들을 연결하여 쉽게 지닐 수 있어 몸과 머리를 장엄하는 것처럼,
숫자라는 실로 뜻이라는 꽃을 연결하여 쉽게 지니고 있다가 마음의 지혜를 장엄하는 것도 그와 같다.
혹은 먼저 숫자를 세우고 뒤에 그 이름을 열거한다.
이것을 지은 이가 뒤의 의식(儀式)을 따랐기 때문이다.
법이라는 소리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곳에서는 설해진 것[所說]을 법이라고 한다.
마치 계경(契經)에서
“그대들은 잘 듣기 바란다. 나는 이제 그대들을 위하여 묘한 법을 말하고자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곳에서는 공덕(功德)을 법이라고 한다.
마치 계경에서
“필추(苾芻)들이여, 법은 바른 견해[正見]이고, 삿된 견해는 법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곳에서는 무아(無我)를 법이라고 한다.
마치 계경에서
“모든 법은 무아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 가운데 무아를 법이라고 함을 알아야 한다.
법이란 지닐 수도 있고, 기를 수[長養]도 있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지닐 수 있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기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