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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엄경론 제1권
2. 성종품(成宗品)
[의심을 끊어버리고 대승이 참으로 부처님의 말씀임을 세움]
[釋] 어떤 사람은 이 대승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닌데 무슨 공덕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의심한다.
내가 이제 그 의심 그물[疑網]을 끊어버리고 대승이 참으로 부처님의 말씀임을 세우겠다.
[대승을 성립시키는 인]
게송으로 말한다.
불기(不記)와 동행(同行)과
불행(不行)과 또한 성취와
체(體)와 비체(非體)와 능치(能治)와
문이(文異)의 여덟 가지 인(因)으로 성립되었다.
[釋] 대승이 성립하는 데 대략 여덟 가지의 인이 있다.
첫째는 불기(不記)요, 둘째는 동행(同行)이요, 셋째는 불행(不行)이요, 넷째는 성취요, 다섯째는 체(體)요, 여섯째는 비체(非體)요, 일곱째는 능치(能治)요, 여덟째는 문이(文異)이다.
첫째 ‘불기’라 함은 이전의 법이 다 없어지고 난 뒤에 부처님께서 나오신 것이다.
만일 이 대승이 바른 법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세존께서 처음에 기록하지 않으셨겠는가?
비유하면 미래의 세상에 다른 세존이 있다면 곧 기록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다.
둘째 ‘동행’이라 함은 성문승과 대승은 어느 것을 먼저하고 어느 것을 뒤에 함이 없이 일시에 동행한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이 대승만이 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아느냐?
셋째 ‘행하지 않는다’고 함은, 대승은 깊고 넓어서 남의 마음을 미루어서 헤아리는 사람들도 능히 믿을 수 없는데 하물며 온갖 논박을 일삼는 외도들이 행하겠는가?
그들은 대승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행하지 않는다.
저 외도들이 행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다.
넷째 ‘성취한다’고 함은, 만일 그대가 다른 이가 보리를 얻는다고 말하였다면 그것은 대승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부처님께서 대승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하여 이러한 고집을 지으면 이는 도리어 나[我]를 이루는 뜻이 된다.
그가 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것은 또한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 된다.
다섯째 ‘체’라고 함은, 만일 그대가 다른 부처님에게는 대승의 체가 있고 이 부처님에게는 대승의 체가 없다고 하여 만일 이러한 고집을 지으면 이도 또한 나라는 뜻을 이룬다.
대승에는 다름이 없어서 체가 오직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체가 아니다’라고 함은, 만일 그대가 이 부처님께는 대승의 체가 없다고 하면 이는 곧 성문승에도 체가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성문승은 부처님의 말씀이기에 체가 있고 대승은 부처님께서 말씀한 것이 아니기에 체가 없다고 고집하면 이는 큰 과실(過失)이 있다.
만일 불승(佛乘)은 없으나 부처님께서 출현하시어서 성문승을 말씀하신 것이 있다면 이치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일곱째 ‘능히 다스린다’고 함은, 이 법을 의지하여 닦아 행함으로써 무분별의 지혜를 얻게 되고 무분별의 지혜로 말미암아 능히 여러 번뇌를 깨뜨린다.
그러므로 대승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덟째 ‘글이 다르다’고 함은, 대승은 매우 깊어서 글과 뜻이 같지 않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글을 따라 뜻을 취하여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말하여서는 안 된다.
또는 만일 그대가 말한 대로 처음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 부처님께서 무공용(無功用)의 마음에서 버린 까닭이라고 고집하여서는 안 된다.
이 뜻은 그렇지 않다.
[부처님의 세 가지 인연]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부처님은 세 가지의 인연으로
현저하게 보고 또한 법을 보호한다.
여래의 지혜는 걸림이 없는 것이니
버린다는 것은 마땅히 그러하지 않다.
[釋] 만일 이 대승이 부처님께서 말씀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이는 큰 장애가 된다.
모든 부처님은 세 가지의 인연이 있는데 어찌해서 기록하지 않았는가?
첫째는 무공용의 지혜를 항상 일으켜 이 눈으로 항상 보는 것이요,
둘째는 항상 정근(正勤)을 지어서 바른 법을 수호하는 것이며,
셋째는 여래의 지혜의 힘은 장애가 있지 않은 것이다.
이 세 가지의 인연으로 인하여 그대가 말한 여래께서 버려서 기록하지 않는다고 함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만일 그대가 말한 대로 체가 있는 것은 곧 성문승이요, 이는 곧 대승의 체이니,
어찌하여 그런가?
곧 이 승으로써 큰 보리를 얻기 때문이라고 고집하면 이 뜻은 옳지 않다.
[성문승을 대승의 체로 삼아서는 안 되는 인연]
게송으로 말한다.
완전함도 아니요 어긋나지 않음도 아니며
행(行)함도 아니고 가르쳐 줌도 아니다.
그러므로 성문승이
곧 대승은 아닌 것이다.
[釋] 네 가지 인연이 있어서 곧 성문승을 대승의 체로 삼아서는 안 된다.
완전함[全]이 아니기 때문이요,
어긋나지 않음이 아니기 때문이며,
행이 아니기 때문이요,
가르쳐 줌도 아니기 때문이다.
‘완전함이 아니다’라고 함은 성문승은 남을 이롭게 함을 가르쳐 주는 것에 다만 스스로 욕심을 싫어하여 떠나서 해탈하도록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어긋나지 않음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만일 그대가 말하기를 성문승이 스스로의 방편으로 남을 가르쳐 주는 것이 곧 남을 이익되게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뜻은 그렇지 않다.
어찌하여 그런가?
비록 자기를 이익되게 함으로써 남을 편안하게 하나 그 또한 스스로의 열반을 구하여 방편으로 부지런히 행하는 것이니, 이로써는 곧 큰 보리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행이 아니다’라 함은 만일 그대가 오래도록 성문승의 행을 행하면 큰 보리의 과(果)를 얻는다고 말하나 그 뜻은 그렇지 않으니 방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문승은 큰 보리의 방편이 아니다.
오랫동안 방편이 아닌 것을 행하여서 능히 대승의 과를 얻을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쇠뿔을 당겨서 우유를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대승에서 가르쳐 주는 것과 같은 것이 성문승에는 없다.
그러므로 성문승으로써는 대승을 얻을 수 없다.
[성문승과 대승의 어긋남]
이제 다시 그대에게 서로 어긋나는 뜻을 보이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가르쳐 주는 것과
방편과 머무름과
시절(時節)의 아래와 위에서 승은
다섯 가지의 일이 일체가 다르다.
[釋] 성문승이 대승과는 다섯 가지의 서로 어긋남이 있으니,
첫째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다르고,
둘째는 가르쳐 주는 것이 다르며,
셋째는 방편이 다르고,
넷째는 머무름이 다르며,
다섯째는 시절이 다른 것이다.
성문승에서는 마음을 일으키거나 가르쳐 주거나 부지런히 방편을 닦는 것이 다 스스로 열반을 얻으려는 것인 까닭에 머무는 것도 또한 적고,
복과 지혜의 무더기가 작은 까닭에 시절(時節)도 또한 적어서 나아가 삼생(三生)에 이르러야 해탈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은 그러하지 않아 마음을 일으키거나 가르쳐 주거나 부지런히 방편을 닦는 것이 모두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머무는 것도 또한 많고,
복과 지혜의 무더기가 크기 때문에 시절도 또한 많아서 삼 대아승지겁(三大阿僧祇劫)을 지낸다.
이와 같이 일체가 서로 어긋난다.
그러기에 마땅히 소승의 행으로써 대승의 과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대는 부처님의 말씀에는 세 가지의 상(相)이 있으니,
첫째는 경[修多羅]에 들어가는 것이요,
둘째는 계율[毗尼]을 나타내 보인 것이며,
셋째는 법공(法空)을 어기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대가 모든 법이 자기의 성품이 없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니, 이 세 가지의 상에 어긋난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만일 이러한 고집을 지어도 이 뜻은 옳지 않다.
[대승은 부처님의 모습과 어긋나지 않는다]
게송으로 말한다.
스스로 대승의 경에 들어가면
현재 번뇌는 스스로 멸(滅)하여진다.
넓고 크고 매우 깊은 뜻은
스스로 법공에 어긋나지 않는다.
[釋] 이 대승은 또한 세 가지의 상에 어긋나지 않는다.
스스로 대승의 경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스스로 번뇌로부터 계율을 나타내기 때문이며,
보살은 분별로써 번뇌를 삼기 때문이다.
넓고 크고 매우 깊은 것은 곧 보살의 법공이며 이 공(空)과 어긋나지 않으면서 큰 보리를 얻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대승에서는 부처님의 세 가지의 모습과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대승의 경계]
또한 앞에서 행하지 않음을 말하였는데
내가 이제 이 뜻을 더 보여서 그대로 하여금 믿어 받아들이게 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의지함이 있고 일정하지 아니하고
세속을 인연하고 또한 넓지 않으며
물러나 굴복하여 헤아리는 사람이
어찌 대승의 뜻을 알겠는가.
[釋] 다섯 가지의 인이 있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헤아리는 사람들은 능히 대승의 경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은 지혜는 의지함이 있기 때문이요,
일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요,
세속을 인연하기 때문이요,
넓지 못하기 때문이요,
물러나 굴복하기 때문이다.
‘의지함이 있다’는 것은 지혜가 가르침을 의지하여 생기고 증득한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정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어느 때에는 다시 다른 지혜가 나기 때문이다.
‘세속을 인연한다’는 것은 세제(世諦)를 헤아려서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넓지 못하다’는 것은 비록 세제를 인연하더라도 아는 것이 적어서 일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러나 굴복한다’는 것은 다투어 의논하다가 말이 궁하면 곧 잠자코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에서는 곧 의지할 것이 없으며, 마침내 물러나 굴복하지도 않는다. 물러나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량경(無量經) 가운데 백천 가지의 게송에서 말하기를 대승의 법이라고 한다.
이 법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변재가 다함이 없다.
그러기에 대승은 헤아리는 사람의 경계가 아닌 것이다.
[대승의 방편]
그대가 말하기를
‘성문승은 부처님의 보리 방편이 아니라고 하니, 만일 그렇다면 어느 것이 그것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넓고 크고도 매우 깊어서
성숙(成熟)을 분별할 수 없다.
이 두 가지의 방편을 말하기에
이것이 곧 무상승(無上乘)이다.
[釋] ‘넓고 크다’는 것은,
말하자면 온갖 신통이 매우 부지런한 방편을 말미암아 남들로 하여금 다 믿고 알게 하기 때문이다.
‘매우 깊다’는 것은,
말하자면 무분별의 지혜는 행하기 어렵기에 그 순서대로
하나는 중생을 성숙하게 하고
또 하나는 부처님의 법을 성숙하게 하는데,
이 둘을 말하여 무상보리(無上菩提)의 방편이라 하니,
이 두 가지의 방편이 곧 무상승의 체인 것이다.
[두려움의 과실]
만일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그 가운데서 두려워한다면 과실은 무엇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마땅히 두려워하지 않을 데서 두려워하면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불타게 된다.
두려움은 복 아님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길이 과환(過患)을 일으킨다.
[釋] 만일 사람이 두려워하지 아니할 데서 허망하게 두려움을 내면 이 사람은 곧 매우 뜨거운 악도(惡道)에 떨어져서 불타게 될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이 두려움을 말미암아 큰 복취(福聚)가 아닌 것을 끌어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 죄로 말미암아 능히 이 사람은 한량없는 시겁(時劫)을 지나면서 큰 열뇌(熱惱)를 받게 된다.
[두려움을 내는 인연]
[문] 그 사람이 다시 무슨 인으로 이런 두려움을 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종성(種性)이 아니고 법의 벗이 아니며
지혜가 적고 인연의 힘이 적기에
이 깊고 미묘한 법을 두려워하여
큰 보리를 물러나 잃는다네.
[釋] 사람이 두려움을 내는 데는 네 가지의 인연이 있다.
첫째는 종성이 아니어서 보살의 종성을 떠났기 때문이고,
둘째는 법의 벗이 아니어서 선지식(善知識)을 떠났기 때문이고,
셋째는 지혜의 힘이 적어서 대승의 법이 공함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넷째는 인연의 힘이 적어서 지난 세상에 여러 바라밀다(波羅蜜多)의 자기 성품인 착한 뿌리를 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매우 깊고 미묘한 법에서 그릇되게 두렵다는 생각을 낸다.
이 생각으로 말미암아 큰 보리의 복과 지혜의 두 무더기에서 마땅히 얻을 것을 얻지 못하니 이를 물러선다[退]고 이른다.
그대는 이제 마땅히 이 물러섬의 허물과 근심이 매우 깊고 무거운 것임을 알아야 한다.
[두려워하지 않는 원인]
이미 두려움의 허물과 두려움의 원인을 말하였다.
다음으로 마땅히 두려워해서는 안 될 원인을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다름이 없으면 곧 서로 없고
다름이 있으면 곧 험한 곳
비교할 것이 없는 가지가지의 말과
계속한 말과 다문(多門)의 말은
글의 뜻과 같음이 있지 않아서
모든 부처님의 매우 깊은 체를
총명하고 지혜로워 바로 관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고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釋] ‘다름이 없으면 곧 서로 없다’는 것은,
만일 그대가 성문승은 곧 대승이요,
대승의 체와 다름이 없다고 말한다면 곧 성문과 벽지불(辟支佛)의 승이 다시 체가 없다.
왜냐하면 부처님 됨을 얻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체가 다 불승(佛乘)이니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겠는가?
‘다름이 있으면 곧 험한 곳이다’라는 것은, 만일 그대가 대승의 체와 다름이 있다고 인정하면 이 체는 곧 일체지(一切智)의 도이기에 제일 험한 곳이 되니, 그것은 건너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마땅히 우러러 믿어야만 하는데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겠는가?
‘비유할 이가 없다’는 것은 일시(一時)에 두 개의 대승이 함께 나와서 가히 서로 비교할 것이 없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하나는 두려워하고 둘은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가지가지로 말한다’는 것은 이제 이 대승은 홀로 공(空)만 설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큰 복과 지혜의 무더기를 설한다.
그러나 마땅히 이러한 뜻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유독 공만을 두려워하는가?
‘계속하여 말한다’고 함은 모든 때에 결정코 서로 이어서 공을 말하였으니,
그대가 잠깐 들음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공을 두려워하는가?
‘다문(多門)으로 말한다’는 것은 경들 가운데 다문으로 달리 말하여 큰 요용(要用)을 나타내어 온갖 분별을 깨뜨리고 무분별의 지혜를 얻게 하였다.
만일 이 말씀과 달라서 큰 용이 없는 것에는 여래는 다만 공만을 말씀하시고, 법성(法性)ㆍ실제(實際) 등과 같은 것들은 말씀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이미 다문이 있음을 말하였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유독 공만을 두려워하는가?
‘글의 뜻과 같은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은
대승은 매우 깊어서 글의 뜻과 동일하지 않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글을 따라 뜻을 취하여 공을 두려워하는가?
‘모든 부처님의 매우 깊은 체’라는 것은
부처님의 성품은 매우 깊어서 갑자기 깨달아 알기 어렵기에 마땅히 요별(了別)함을 구한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는가?
이와 같은 것들의 인연이 있다.
그러기에 총명하고 지혜로워 정관(正觀)하는 사람은 이 대승에서 마땅히 두려워하지 않는다.
[법을 행하는 지혜]
이미 마땅히 두려워하지 아니할 인을 말하였다.
다음에는 이 법을 능히 행할 지혜를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순서에 따라 듣고 생각하고 수행하면
법을 얻고 지혜를 얻으리니
이 지혜로 이 법을 행하여서
얻지 못하여도 그르게 여겨 헐뜯지 말라.
[釋] 만일 사람들이 가장 먼저 선지식을 의지하면 능히 바른 들음을 일으키고,
다음으로 정의(正義)에서 능히 바른 기억을 일으키고,
다음으로 진실한 경계에서 바른 지혜를 나게 하고,
다음으로 저것들을 좇아 법과(法果)를 증득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저것들을 좇아 뒤에 해탈의 지혜를 일으키면
그 사람의 지혜는 깊음을 따르고 멀리까지 들어가서 능히 이 법을 행하게 된다.
그러니 그대가 만일 스스로 이러한 지혜가 없다면 마땅히 결정하여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된다.
[두려워함을 막음]
이미 이 법을 행하는 지혜를 말하였다.
그러니 다음으로는 이 법의 글귀를 두려워함을 막아야 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알지 않으면 아는 것이 깊지 못하고
깊으면 헤아림[思度]으로 아는 것이 아니니
아는 것이 깊어 해탈을 얻으면
모든 두려움이 마땅히 그렇지 않으리라.
[釋] ‘알지 않는다’는 것은, 만일 그대가 이와 같이 깊은 법은 자신이 알 것이 아니라고 하여 두려움을 일으킨다면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된다.
‘아는 것이 깊지 못하다’는 것은, 만일 그대가 부처님의 아심도 또한 깊지 못하니, 만일 아시는 것이 깊었으면 무슨 까닭에 깊다고 말하겠는가라고 하여 두려움을 일으킨다면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된다.
‘깊음이 헤아림[思度]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만일 그대가 어찌해서 이 깊음은 생각하여 헤아림의 경계가 아닌가라고 하여 두려움을 일으키는 자는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된다.
‘아는 것이 깊어서 해탈을 얻는다’는 것은, 만일 그대가 어찌해서 유독 깊은 뜻을 알아야 능히 해탈을 얻고 생각하여 헤아리는 사람은 능히 해탈을 얻지 못하는가라고 하여 이와 같이 두려움을 일으킨다면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된다.
[대승을 믿지 않는 자를 일깨움]
이와 같이 이미 이 법의 글귀는 두려워함을 막았다.
다음에는 대승이 성립되었음을 믿지 않는 자를 일깨우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작은 믿음과 경계와 짝으로 말미암아
깊고 큰 법을 알지 못한다.
그대가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무상승(無上乘)을 이루었다고 한다.
[釋] ‘작은 믿음’이란 좁고 용렬하게 믿고 아는 것이다.
‘작은 경계’란 아리야(阿梨耶)의 식 가운데서 작은 종자를 훈습(熏習)하는 것이다.
‘작은 짝’이란 서로 비슷한 믿음의 경계로써 권속을 삼기 때문이다.
이 셋이 만일 작으면 따로 대승이 있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 믿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장하는 것을 이루어서 이를 무상(無上)의 법이라고 이른다.
[대승을 비방하는 것을 막음]
이미 대승이 성립됨을 말하였다.
다음은 대승을 비방하여 헐뜯는 것을 막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들음을 따라 깨달음을 얻지만
듣지 못하였어도 삼가 헐뜯지 말라.
한량없는 나머지를 듣지 못하였다고
비방하는 자는 어리석은 업(業)을 짓는다.
[釋] 그대가 사소하게 들은 것에 깨달음이 있는 듯하더라도 마땅히 들은 것에 의해 다시 비방하여 헐뜯어서는 안 된다. 그대가 듣지 못해서 믿음이 없더라도 관계없으니, 왜냐하면 착한 업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다.
듣지 못한 이가 많다고 하여 삼가 비방하여 헐뜯어서도 안 된다. 그대가 가려 구별하지는 못할망정 만일 비방하여 헐뜯는다면 다시 어리석은 업을 더하여서 앞서 들은 것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삿된 생각을 막음]
이렇게 대승을 비방하여 헐뜯는 것을 막았다.
다음으로는 삿된 생각을 막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글과 같게 뜻을 취할 때에
스승의 마음은 참 지혜에서 물러나고
비방하여 말하고 법을 가볍게 여기면
이를 인연하여 큰 허물이 생긴다.
[釋] ‘스승의 마음’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스스로 보고 취하여서 지혜스럽지 못한 쪽에서 뜻을 구하기 때문이다.
‘참 지혜에서 물러난다’고 하는 것은 참다운 앎은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비방하여 말한다’는 것은 착한 말을 헐뜯기 때문이다.
‘법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은 듣는 것을 시기하기 때문이다.
이 복이 아닌 것의 순서를 인연하여 몸에 큰 괴로움의 보(報)를 받는 것을 큰 허물이 일어난다고 이른다.
[악한 뜻을 막음]
이렇게 삿된 생각을 막았으니
다음으로 악한 뜻을 막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악한 뜻과 자기 성품의 악은
착하지 못한 데서 마땅히 일으켜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착한 곳으로 옮기겠는가?
마땅히 큰 허물을 버려야 한다.
[釋] ‘악한 뜻’이라는 것은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이다.
‘자기 성품의 악’이라는 것은 이 마음은 자기 성품의 죄이어서 오히려 과실의 법에서도 일어날 수 없거늘 하물며 과실이 아닌 법에서 일으키겠는가?
그런 까닭에 마땅히 빨리 큰 허물과 근심을 버려야 한다.
성종품(成宗品)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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