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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영락경 제1권
2. 식정품(識定品)
[계품(戒品)의 영락]
그때에 자리 위에 보왕보살(寶王菩薩)이 있었는데, 곧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처님 앞에 나와 꿇어앉아 합장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예, 그러하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보살이 익힌 의식(意識)의 영락은 깨우치는 바가 많아서 제도를 입지 않음이 없으니, 바로 지금 시방 항하의 모래알과 같이 많은 여래와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멸도한 이들입니다.
영락의 계품을 어떻게 닦고 배워야 피안에 이르게 해서 중생들로 하여금 그 향훈(香薰)을 널리 듣게 하오리까?”
이때에 부처님께서 보왕에게 말씀하셨다.
“잘 듣고 자세히 들어서 잘 사유해 보아라. 내가 지금 그대를 위하여 그 뜻을 부연해 말하리라. 보살이 계품(戒品)의 영락을 익히고 행하면 공덕의 향훈이 저절로 몸을 영락하느니라.”
보왕은 답하여 아뢰었다.
“기꺼이 듣고 따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도법(道法)을 받들어 준수할지니,
바로 계율과 선정과 해탈의 슬기를 닦고,
중생들에게 계를 독실하게 믿으라고 권하고,
그 뜻의 성품이 각기 원하는 바를 충족하길 원하며,
밝게 깨달아 마땅함을 따라서 본래의 서원(誓願)을 잃지 말고,
아울러 온갖 어리석은 미혹의 마음을 없애고,
도량을 청정히 장엄해서 온갖 품의(品宜)를 갖추고,
거칠고 추악한 번뇌로 그 마음을 물들이지 말고,
뜻은 늘 일생보처(一生補處)에 원하며,
바른 법의 심원한 곳간을 총지(摠持)하고,
뜻은 늘 백천 삼매에서 노닐어야 하느니라.
감동하여 변화함을 깨달음으로 삼지 말아야 하니,
일체 만물은 모두 무상(無常)하여 귀한 보배도 믿고 의지할 것이 못되며 권도의 방편을 행하되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하며,
중생 마음의 미혹은 정도(正道)를 알지 못하고 마음은 ‘나’에 집착해서 무상함을 알지 못하니,
보살은 큰 서원을 일으켜 이러한 중생들을 위하여 분별하여 설하고,
일체가 비고 허망해서 참이 아님을 밝게 깨닫게 하며,
비록 대도를 숭배하지만 2승(乘)을 버리지 않고,
노니는 세계[刹]가 경축을 받지 않음이 없고,
정진을 더욱 가해서 도의 업을 갑절이나 행하고,
여러 경법(經法)에서 그 망령된 생각을 버리고,
보살의 법요(法要)는 10지(地)를 여의지 않고,
윗자리에 다음하여 그 순서를 넘지 말고, 지혜로 가하여 온갖 번뇌를 녹여 버리고,
도에 미치지 못한 이는 도의 문을 스스로 이루고,
항상 생각하고 질책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보시하는 이는 누구이며, 받는 이는 어떤 사람인가?’ 하고,
재물과 보배를 모두 주인이 없는 것처럼 관(觀)하며,
설사 헐고 욕먹는 일이 있더라도 응당 뜻을 자제하며,
뒤에 만약 과보를 받으면 단정하고 남달리 뛰어날 것이며,
노니는 곳에서 기뻐하지 않음이 없음을 보며,
만일 가난하고 헐벗은 이를 보면 몸소 스스로 바다에 들어가서 여의주를 가져오며,
바른 법으로 말하여 반복을 알게 하고, 감로의 법으로 온갖 어려움을 녹여 없애고 생각이 치달리지 말아야 하느니라.
보왕아, 따라서 보살의 도과(道果)를 영락함은 뜻이 자재해지는 것이고,
다시 용맹한 큰 힘의 가르침으로 건립하고 가르치면 수순(隨順)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다니든 앉든 10념(念)을 여의지 말아야 하고,
마음이 3존(尊)에게 있어서 일찍이 잊은 적이 없고,
지옥 고통의 고달픔을 요달해 알고,
지극한 마음의 적정(寂靜)으로 번뇌의 때를 없애고,
온갖 악한 일을 범하지 않아서 능히 윤회하지 않으며,
응당 올바른 이치로 금하는 법을 받들어 닦고,
덕의 광명을 널리 비추어서 다 윤택을 입게 하고,
스스로 가진 바를 헤아려서 탐내거나 인색하지 않고,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보시하면서 상념의 집착을 일으키지 말지니라.
혹시 방편의 슬기로 왕과 교제하게 되면, 문득 왕으로 하여금 높은 지위를 능히 버리게 하며,
어떤 사람이 와서 머리나 눈이나 귀나 코나 입을 달라고 하면, 곧 기꺼이 보시할 수 있어서 그 사람의 뜻을 거스르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때에 자리에 있던 일체의 제자와 여러 보살들은 이 공훈영락(功勳瓔珞)의 덕을 듣고서 기뻐 날뜀을 스스로 억제치 못하고, 생각이 깊고 그윽해져서 착한 마음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각자 스스로 공경심을 일으켜서 다 함께 공양을 올렸으며, 온갖 이름난 꽃과 약간의 진기한 보배를 흩으면서 일시에 똑같은 목소리로 그 덕을 찬탄하였다.
“저희들은 숙세의 복으로 좋은 이익을 만난 탓에 남달리 묘한 영락의 가르침을 들었나이다.
만일 당장 중생이 이 법의 가르침을 들으면, 보살의 식정(識定)의 요체를 권유하고 발하므로 온갖 복과 공훈이 측량할 수 없을 것이며, 연설한 데에 편안히 머물러서 헛되지 않으리라.
만일 보살로서 이 식정(識定)의 영락을 만나는 이가 있다면, 온갖 법을 관찰해 깨달아서 처소가 없음을 이해하리라.
식정의 영락은 신심(神心)의 맑음이니, 다시는 음식을 탐내지 않고 즐거운 생각 자체를 음식으로 삼으며, 권하고 도움으로써 복의 업을 일으키느니라.
옛적에 나는 부처님께 다섯 줄기의 꽃을 올리면서 스스로 성불(成佛)을 이룩하여 도과가 썩지 않고 정법을 흥성시키며,
다시 금계(禁戒)로써 온갖 더러움을 녹여 없애며, 저 온갖 고통을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구원하며,
갖가지 액난을 반드시 제도 받게 하겠다고 뜻을 세워 크게 서원하였다.
스스로 생각건대, 지난날 바다에 들어가 보배를 구할 적에 마갈어(摩竭魚)와 수형산(水形山)을 만났는데,
나는 길잡이가 되어서 식정(識定)의 영락에 들어갔다. 이윽고 착한 신이 좋은 길을 가르쳐 주므로 쾌락하고 편안하게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서원해서 정진하여 물러서지 않은 탓에 조그만 상념도 없는 선정삼매에 들어가, 모든 부처님이 노니는 당(堂)에서 중생을 범천과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도록 권하였으니, 이 모두가 식정의 영락이 이룩한 것이니라.
만일 인간의 시방 국토에서라면 세속의 물듦에 따라 세상을 제도하는 도를 강설하고,
다시 온갖 도의 과증(果證)인 10선(善)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여 공혜(空慧)를 통달케 하고,
일체에게 선포해 보여서 성인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으며,
본래 공하여 도무지 지을 바 없음을 이해해 알고,
심은 덕의 근본이 스스로 자기를 위하지 않아서 누구나 도법의 과보를 얻게 할 것이다.
만일 법이 기울어져 없어지면 능히 무거운 책임을 지고, 만일 괴로움과 고달픔을 만나면 영원히 근심과 슬픔이 없고,
또한 망상과 집착하는 마음도 없고,
몸과 입을 기르되 누실치 않게 하며,
권도의 방편으로 생사(生死)에 깊이 들어가서 8해탈과 정수(正受)의 맛을 설하고,
세속을 건립하여 불도를 사모해 숭배하되,
일교(一敎)나 혹은 약간의 품(品)을 연설해서 성현의 법[律]에 들어가도록 인도하고 점점 이끌어 보여서 멸도케 하고,
능히 바른 법을 약간의 겁(劫)에 머무르게 하고,
남음 있는[有餘] 중생을 남음 없는[無餘] 고요한 열반에 이르게 해서 나고 늙고 죽고 형상을 받는 근심을 없애 주고,
4대(大)인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에 의지하지 않게 하고,
여러 가지 삿된 소견[邪見]과 어리석은 미혹의 부분에는 정견(正見)이란 한 길[一道]의 법을 보여주며,
혹은 한가한 곳에서 열두 가지 법의 부지런한 행을 닦고,
나무 밑에 기대는 바 없이 정좌하여서 선법(禪法)을 사유하며 오직 공(空)에만 힘쓰며,
일심(一心)의 고요한 선정으로 그릇됨이 없어야 하느니라.
[보살의 식정 영락]
보살의 식정 영락이란 보배도 색의 모습 있음[有相]과 모습 없음[無相]을 생각지 아니하니, 모습은 스스로 비어서 적멸하며 종호(種好)도 또한 마찬가지니라.
안과 밖을 분별하여 하나로 밝게 깨닫고,
3세(世)가 공적하여 과거ㆍ현재ㆍ미래가 없고,
식정심(識定心)으로 다시 5음(陰)의 성품인 갖가지 쇠(衰)ㆍ지(持)ㆍ입(入)이 어디로 좇아 왔으며 어디로 좇아 멸하는가를 관해서 낱낱이 분별하여 교묘한 거짓임을 아느니라.
그리하여 생멸을 두지 아니하고 희망(希望)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또한 다시 옳고 그름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심의(心意)를 인하지 않고 도의 가르침[道敎]을 발하며,
식이 일어나면 일어나고 식이 멸하면 멸하고,
상상(相像)을 보지 않고 또한 아상(我想)도 없으며,
또한 다시 머물고 서있는 처소에 집착하지 않나니,
안팎의 6진(塵)에도 역시 마찬가지니라.
귀와 눈을 계교해도 오히려 있는 바가 없거늘, 하물며 당면해서 보고 듣는 일이 있으랴? 이것은 그렇지 않느니라.
보왕아, 반드시 알라. 보살의 영락심에서 식정법(識定法)은 일어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끝이나 처음도 없느니라.
연(緣)이 일어나면 일어나고 연이 멸하면 멸하나니,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을 보지 않고 멸해도 멸하는 것을 보지 않느니라.
안으로 늘어나고 줄어드는 뜻을 스스로 사유하여 괴로움과 즐거움의 상념이 없으니, 그 까닭은 ‘나’라는 생각을 여의었기 때문이니라.
비록 다시 욕망의 온갖 고통 가운데 있을지라도 마음에 염착함이 없어서 삼계인 욕계ㆍ색계ㆍ무색계를 멀리하고 뜻은 금강과 같아서 헐어 부술 수 없느니라.
근본의 숙명과 구경의 근원을 알아서 갖가지 번뇌를 끊는 것이 어렵다고 여기지 말지니, 유극(有極)을 보지도 않고 무극(無極)을 보지도 않는다.
이것을 보살의 식정 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세상의 가르침을 따라 존장(尊長)을 공경하고 받들되 그 과보를 바라지 말고,
백천 겁에 걸쳐 부지런히 닦고 정진해서 도혜(道慧)의 법을 모두 성취하며,
여러 보살의 평등지인(平等持忍)을 선포해서 외우고 통달하고 깨우쳐 지니어서 잊지 아니하며,
여래 법신의 5분(分)의 성품을 낱낱이 창달하되 말[言]을 꾸미지 아니하며,
말을 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마음은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단(斷)과 멸(滅)의 두 소견의 상념을 내지 않느니라.
만일 대중 가운데 있으면 꼭 해야 함도 없고 꼭 해야 하지 않음도 없으며,
공무(空無)의 법에서는 상념도 없으며, 내실(內實)로 충만하나 밖으로 자문(諮問)을 받으며,
그러면서도 ‘나의 행(行)은 넘치는 것이 있는데 그는 모자란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온갖 이양(利養)을 여의어서 희망하는 바가 없으며,
항상 스스로 사유해서 몸에 주인이 없음을 알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본래 없다고 밝게 깨달아 알며,
6바라밀을 수행해서 고정된 바가 없고 여러 가지 법을 계교해도 다 거짓 이름일 뿐임을 알며,
실제가 없어서 일체의 온갖 법은 볼 수가 없고 음향을 분별하여도 들을 수가 없음을 아느니라.
보왕아, 이처럼 보살대사로서 법 영락의 식정법을 닦는 이는 착한 일을 보아도 기뻐하지 않고 나쁜 일에 대해 들어도 슬퍼하지 않나니,
그런 뒤에야 비로소 정진(精進) 영락에 응하여 백천의 선정에 들어가 흔연하여 상념이 없느니라.
그래서 천둥과 지진과 번개와 벼락에도, 또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치고 사자가 으르렁대어도 심의(心意)가 고요해서 영원히 혼란이 없느니라.
어떤 때는 보살이 선정에 들어가 정수(正受)하면서 한 겁(劫)이나 백천 겁을 지나더라도 몸이 부드럽고 아름답지만 다시 밥을 쳐다보지 않으며,
이 선정의 뜻을 말미암아 선(禪)의 법열로 밥을 삼고 8해탈로 음료[漿]를 삼느니라.
어떤 때는 보살이 다시 신족(神足)으로 보조(普照)라고 하는 삼매에 들면 동쪽 강(江)ㆍ하수(河水)의 모래 보리수같이 많은 부처님 국토에 나타나서 절을 하고 공양하되 위의를 잃지 않고,
이와 같이 남쪽이나 서쪽이나 북쪽의 강과 하수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부처님 국토에서 모든 부처님께 다 공양하고 식정의 영락을 연창(演暢)하고 사유하느니라.
보왕아, 이처럼 보살이 선정에 들어가 느끼는 바가 이와 같으니라.
또 시방의 강과 하수의 모래수의 세계는 그만 버려두고라도,
낱낱의 세계들의 그 속에 티끌을 채우고, 다시 한 개의 티끌을 모든 부처님 세계[佛刹]에 비긴다고 하자.
이 티끌은 오히려 다할지언정 부처님의 국토는 헤아리기 어려우니라.
보살의 삼매는 온갖 대중의 모임을 모조리 보고, 또한 저 부처님께서 연설하는 영락신식정(瓔珞神識定)의 뜻을 들어서 모든 법의 근본이 비고 적멸해서 주재자가 없음을 요달하느니라.
처음 배움을 일으키면서부터 도량에 이르기까지 영락의 도수(道樹)를 사유하고 발의(發意)하여 온갖 번뇌인 음행ㆍ성냄ㆍ어리석음의 병을 모조리 거치면서 그 마음이 굳건하여 옮겨지지 않나니,
가령 하늘의 마군이 억해(億垓)의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식정(識定)의 뜻을 무너뜨리고자 해도 끝내 저들에게 굴복되지 않으며, 삿되게 되어서 그르침을 당하지도 않느니라.
그 뜻은 바다처럼 넓어서 포용하여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으며,
뭇 덕의 영락이 다 판단력을 성취해서 항상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몸이 아니니, 상(常)이라 해도 상(常)이 있지 않은데 어찌 몸이 있으랴?
상(常)을 계교하는 자들은 선정의 원대함을 여의어서 나고 죽는 데에 떨어져서 스스로도 구제할 수 없느니라’라고 강설하느니라.
보살의 닦음은 오직 도에만 힘쓸 뿐이고,
그 마음이 편안해서 뭇 상념이 영영 없고,
모든 부처님이 지으신 덕의 업을 여의지 아니하며,
뜻은 태산과 같아서 옮길 수 없으며,
세계를 홀로 걸으면서도 무서워하는 바가 없으며,
네 가지 지혜의 변재로 모든 법을 포용해 받아들이며,
중생에게 지혜의 요체를 알도록 가리켜 보이며,
내실(內實)이 질박하고 곧아서 속이거나 아첨하는 일이 없나니 그 까닭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며,
온갖 더러움이 이미 없고 갖가지 어둠이 사라져버렸으며,
지혜의 광명이 널리 비추어 혜택을 입지 않음이 없으며,
마음은 크고 넓어서 그 끝이 없고,
뜻의 더러움을 씻어내어 신선하고 밝게 하며,
세상의 좋아하는 것을 따라 모조리 능히 이룩하고,
보리수 아래에 나아가 스스로 법의 뜻을 닦고,
온갖 법에 대해서 의심나는 것이 없고,
모든 연민과 지혜를 모두 성취하고,
온갖 배움을 따르면서 조금 앎을 구제하며,
영락의 정의(定意)로 어지러운 자를 구제하고,
아울러 온갖 익힌 바에서 고요한 선정을 늘 얻으며,
성현의 여덟 가지 도의 품(品)을 닦아 행하며,
일체의 사람을 세워서 바른 법을 보게 하느니라.
보왕아, 이것을 보살의 식정 영락의 요체라 말하느니라.
이를 배우고 지녀서 가슴속에 품고 있는 자는 모든 부처님을 일찍이 멀리 여의지 아니하고,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에서 물러나지 않게 되리라.”
부처님께서 이 식정영락(識定瓔珞)을 설하실 때에 자리에 있던 한량없는 억백천의 하늘ㆍ용ㆍ귀신ㆍ인(人)ㆍ비인(非人)이 모두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발하였고,
다시 다른 곳의 보살 6만 2천 명이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었으며,
다시 8천의 청신사ㆍ청신녀가 번뇌를 멀리 여의고 법안(法眼)의 청정함을 얻었으며,
5천의 비구는 누진(漏盡)의 뜻을 알았으며, 9만의 천자는 온갖 탐욕을 여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