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제법보최상의론 상권
모든 부처님께 귀명합니다.
모든 법의 창고[法藏]에 귀명합니다.
일체의 지혜와 광대하고 매우 깊은 이치에
머리 숙여 예배드립니다.
[보상(寶上)의 뜻]
나는 지금 보상(寶上)이라는 논을 짓는데, 이것은 모든 법 가운데에서 최상이며 진실하고 결정적으로 수승함이라는 뜻이다.
논하여 말한다.
사람과 하늘 및 유정류(有情類)들은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어리석음과 어둠을 원인으로 한다.
언어로 말하는 도(道)는 악으로 나아가는 근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체 지혜의 청정한 법계에 기쁘게 들어간다면, 이러한 까닭으로 광명이라 불리는 부처님께 귀명하는 것이다.
[‘나’ 등의 성품과 일체의 인을 떠난다는 것]
이 중에서 무엇을, 아(我) 등의 성(性)과 일체의 인(因)을 떠난다고 말하는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 번뇌의 업은 잡염 등의 법을 생하지만, 처음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실체도 없다.
비록 생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꿈이나 허깨비와 같으며, 꿈이나 허깨비 같기 때문에 분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모두 연으로부터 생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연생(緣生)의 뜻 가운데에서 모든 법과 모든 사물의 성품은 공이며, 공이어서 자성이 없다고 밝혀 설하셨다.
그리고 또한 그 가운데에는 실체가 없다는 생각도 짓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청정한 아뢰야식은 비록 받는 바가 있을지라도 집착하는 바가 없다. 이 뜻은 심히 깊고 광대하다.
모든 경의 가르침에서 모두 이와 같이 설한다.
“해탈을 기꺼이 구하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모든 법을 여실하게 깨달아 요별해야 하며, 모든 법은 식(識)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식을 떠난다면 그 성품은 곧 끊어진다.”
[실유한 성품은 없다]
그러므로 법 가운데에 실유인 성품[實有性]은 없다는 것에 대해 『법집경(法集經)』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만일 법이 실유(實有)라고 하든가, 실유가 아니라고 하든가, 자성이 있다고 하든가, 자성이 없다고 한다면, 이 둘은 허깨비나 비유 등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모든 법은 성품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성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가운데 설한 것과 같이, 만일 참으로 성품이 없다고 한다면, 성품이 없는 것은 공(空)을 말하며, 공은 곧 끊어짐을 이룬다.
만일 참으로 성품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성품은 항상하게 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공과 공 아님을 다르다고 말하며, 공과 공아님을 떠나 얻을 것이 없다.
마치 밝음과 어둠의 둘은 서로 합해질 수 없는 것이며, 어둠을 떠나고 밝음을 떠나면 모두 얻을 것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에서 설한 바는 밝음은 어둠이 무엇을 떠나 현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혜와 어리석음의 둘은 서로 합해질 수 없는 것이며, 지혜를 떠나고 어리석음을 떠나 또한 얻을 것이 없다.
지혜도 아니고 어리석음도 아닌 이 둘의 중간이라는 나의 생각[想]도 모두 공(空)이다.
그 일체의 법은 안도 없고 밖도 없으며 또한 중간도 없다. 취할 수 있는 법도 없고 버릴 수 있는 법도 없다.”
『보적경(寶積經)』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만약에 유(有)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첫 번째의 극단[邊]이다.
만약에 무(無)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또 두 번째의 극단이다.
첫 번째나, 두 번째나 그 중간이나 모두 모습[想]이 없어서, 볼 수가 없다.
모습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또한 설할 수가 없다.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으므로 표시할 수 없다.
종류가 없는 법[無種類法]을 거두어 갈무리하는 바가 없으며, 또한 극단의 중간[中邊]에 안립하는 것도 없다.”
이 가운데 설한 것은 진실한 말이다.
성품과 성품 없음은 본래 이와 같다.
이것을 이해하는 자는 참으로 성스러운 진리를 관하는 것이며, 능히 탐욕 등 번뇌와 과실을 떠날 수 있다.
설령 다시 번뇌가 생기하더라도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에서 집착하는 바가 없다.
만약에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곧 여래의 공덕이 모인 몸을 얻어 사자후를 하고 대법륜을 굴려서, 널리 일체의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보고 듣게 한다.
『능가경(楞伽經)』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나의 말은 모습이 없어서, 취할 수 없다.”
『전식경(轉識經)』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식(識)을 떠나 법이 있다는 이치는 상응하지 않는다.”
『수기경(授記經)』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식심(識心)은 일체의 법에 두루한다.”
『십지경(十地經)』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색법은 실체가 없어서 취하거나 버릴 수 없다.”
『나욕구리경(那耨俱梨經)』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만약에 모든 법의 성품을 요달한다면, 곧 지혜로써 아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에서 실체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지혜의 본체는 실체가 아니어서 마땅히 허깨비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경의 가르침에서 이와 같이 설한다.
“보살들은 모든 모습에 따라서 생전하지만, 이 모습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어서, 뜻을 얻을 수가 있다.
승의제(勝義諦)에서는 언설을 세울 수가 없다.”
『보운경(寶雲經)』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만약에 본래 없다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식은 분별을 떠나 이름을 세울 수 없다.
그 승의제의 진리는 언설을 떠난 것이며, 모든 사물의 성품은 실체로 얻을 것이 없다.”
여기서 이와 같이 설한 것은 결정적인 말씀이다.
부처님께서 설한 뜻은 모든 무지를 깨뜨리는 것이다.
『현애경(現愛經)』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만일 어떤 사물이 공[空]이라고 한다면, 중생의 업보는 마땅히 물듦과 깨끗함이 있어야 한다.
만일 물듦과 깨끗함이 있다면, 지음이 있는 것[有作]이다.
만일 지음이 있다면, 곧 갖가지의 모습들이 세간을 따라 바뀐다. 모습의 바뀜이 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있음을 본다.
만일 능히 안주하여 전도된 생각[想]이 없다면, 곧 사물의 성품에 따로 실체가 없음을 안다.
여기서 이와 같은 뜻을 자씨(恣氏)보살이 묻자, 세존께서 여실하게 설하신다.
아(我)는 본래 끝이 없으며[無邊], 보리 또한 끝이 없다.
보리가 끝이 없기 때문에 보리는 얻을 수가 없다.
아(我)는 끝이 없기 때문에 보리를 구하는 자도 없으며, 조그마한 법이라도 지혜로써 아는 바가 없다.
오직 모든 부처님의 지혜만이 능히 비추어 아는 것이다.
그 진여법은 곧 성품이 없는 것이며, 성품이 없는 것이 곧 여래이다.
여래란 곧 생함이 없는 성품[無生性]이다.”
[단견도 아니고 상견도 아니다]
『삽발다설다경(颯鉢多設多經)』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일체 법이 만일 ‘있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항상한다는 말이다.
만일 ‘없다’고 집착한다면, 단견(斷見)을 이룬다.
만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한다면 또한 중간도 세울 수 없다.”
[번뇌의 자성이 청정하다]
『보성경(寶星經)』에서 설하였다.
“탐욕 등의 번뇌는 모두가 물든 법[染法]이다.
만일 해탈한다면 이것은 다함 없는[無盡] 모습이다.
만일 능히 번뇌의 자성이 본래 청정한 것임을 깨닫는다면, 승의제에서 벗어날 것도 없이 벗어난다.
[여래를 관하는 것]
만일 진실로 여래를 관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여래의 해탈이 생겨난 것을 관해야 한다.
인(因)으로부터 생하지 않으며, 연(緣)으로부터도 생하지 않는다.
어떤 모습으로 생하는 것도 아니며, 분별로 생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이름과 언설의 차별을 멀리 떠난 것이다.
색의 모습도 아니며, 색의 진여도 아니다.
나아가 식의 모습도 아니며, 식의 진여도 아니다.
어둠도 아니며, 밝음도 아니다.
상즉[卽]한 것도 아니며, 상리[離]한 것도 아니다.
봄[現]도 아니며, 앎[知]도 아니다.
모든 식의 법[識法]을 떠나 요별하는 바도 아니며, 모든 식의 법 가운데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만일 능히 이와 같이 여래를 관한다면, 바른 관[正觀]이라 이름할 것이다.
만일 다르게 관하면, 삿된 관[邪觀]이라 이름한다.
삿되게 관하기 때문에 그것은 여래의 진실을 볼 수 없다.
이 가운데에서 설한 여실한 뜻은 있음을 떠나고 없음도 떠나며, 성품도 아니며 성품이 아님도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진실로 여래를 본다고 한다.”
[참된 말씀]
『무구칭경(無垢稱經)』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화엄경』 중에 한 천자(天子)가 묘길상(妙吉祥)보살에게 묻는 부분이 있다.
‘무엇이 참된 말씀이며 참된 말씀이 아닙니까? 일체의 번뇌는 어떻게 조복합니까?’
묘길상보살이 대답하였다.
‘마치 사람이 꿈속에서 큰 뱀을 보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이 비록 보지만 독의 해로움을 입지는 않는다.
번뇌가 비록 생하지만 참된 성품이 없다. 성품은 청정하여 스스로 조복한다.’
이것은 참된 말씀이며, 참되지 않은 말씀이 아니다.
또 해혜(海慧)보살이 부사의(不思議) 범천에게 물었다.
‘법은 본래 증험할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는데, 어떻게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법이 있습니까?’
부사의 범천이 대답하였다.
‘만약에 불ㆍ여래가 세상에 나와서 모든 부처님의 법을 설하여 나누어진다면, 혹은 있기도 하고 혹은 없기도 하다. 본래는 스스로 이와 같으니, 본래 설할 것이 없으며, 또한 증험할 것도 없다.
설할 것이 없기 때문에 들을 것이 없고, 증험할 것이 없기 때문에 얻을 것도 없다.
단지 번뇌의 업으로 모든 과보의 성품을 생하는 중생을 위하여 모든 부처님의 대보리심을 끌어들여 생하게 하고, 보살들의 자비심의 경계에 머무르게 한다.
만약에 중생들이 번뇌 등의 성품을 능히 스스로 조복한다면, 모든 행을 가지면서 항상 행하지 않고, 구하는 것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다.
그 번뇌의 성품이 모두 청정하다면, 모든 부처님은 또한 다시 증명할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
또한 선재동자는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모두 다 허깨비와 같고, 아(我)는 허깨비 가운데에서 해탈을 구한다.’
이와 같은 뜻을 『화엄경』에서 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