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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진론 상권
[일체불공론(一切不空論)]
여기서 일체불공논자(一切不空論者)는 여러 힐난을 설정하여 말한다.
“일체 유위가 다 공하다는 주장을 한다면 다시 색(色) 등도 없다. 마치 토끼의 뿔처럼,
현량지(現量智)로써는 발생의 이치가 성립하지 못하는 것처럼, 색 등의 연을 현사하여 현량각(現量覺)이 또한 발생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저 실체가 있기에 별개로 내증(內證)한다. 이 까닭으로 그대의 주장은 법성(法性)에 위배된다.
왜냐 하면 다시 현량에 위배되는 과실이 있고,
또 공지(共知)에 위배되는 과실이 있으며,
일체의 소치는 사람들도 모두 아는 눈 등의 실체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제 붕당(朋黨)에 집착하는 독소를 제거해야 하니, 머물면서 지혜로써 함께 생각하여 논의해야 한다.
내가 세운 주장은 자신의 상속(相續)에서 발행하는 현량에 위배[違害]되는가, 다른 것의 상속 중에 발생하는 현량에 위배되는가?
만약 자신의 상속에서 발생하는 현량에 위배된다는 말을 하면 현량각(現量覺)은 승의제(勝義諦)의 입장에서 자성이 모두 공하다. 뭇 연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마치 꿈속에 현량각이 실제의 현량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의 주장도 자신의 상속 중에 발생하는 현량에 위배되지 않는다.
다른 것의 상속 중에 발생하는 현량에 위배된다고 할 경우 맑은 눈을 가지지 않은 자에게 흑은 저 많은 것이 현현하고 눈먼 사람이 실제가 아닌 머리털 파리 등을 보는 것은 허망된 현상이 된다. 현량과 위배되나 바른 도리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나의 주장은 다른 것의 상속에서 발생하는 현량에 위배되지 않는다.
만약 총상(摠相)을 말하면 마치 어리석은 범부 등의 일체 세속(世俗)에서 발생하는 현량처럼, 지금 세속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기에 위배가 없는 것이다.
공지(共知)에 위배되는 과실이 있다는 말을 하면 이 또한 옳지 않다.
만약 자신의 논이나 공지에 위배된다면 마땅히 도리가 아니다. 나의 논에서 허락하기 때문이다.
설령 나의 논에 위배되는 것이 우리의 주장에 위배되어도 저 공지에 위배되는 오류는 없다.
흑은 다른 논의 공지에 위배된다는 말을 해도 마땅히 도리가 아니다. 일체의 논의를 일으키는 것은 모두 다른 논이나 공지(共知)를 논파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소지는 사람 등도 모두 알 만한 것에 위배된다면 도리가 아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일체의 작용은 다 찰나에 소멸한다. 일체법(一切法)은 무아(無我)이기에 또한 유정(有情)은 없다’고 주장한다.
[승론(勝論)과 수론(數論)]
승론자(勝論者)들은
‘실체는 색 등과 다르며 다른 실체 등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
승론(勝論) 모든 현상은 실(實)·덕(德)·업(業)·동(同)·이(異)·화합(和合)의 육구의(六句義)에 의해 생성·소멸되며,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여섯 가지 원리를 이해하고 요가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함. 구의(句義)는 원리·범주를 뜻하며, 실(實)은 사물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 등의 실체, 덕(德)은 실체의 성질, 업(業)은 실체의 운동, 동(同)은 사물에 서로 공통점을 있게 하는 원리, 이(異)는 모든 사물에 차이점을 있게 하는 원리, 화합(和合)은 실(實)·덕(德)·업(業)·동(同)·이(異)를 융합시키는 원리를 뜻함. |
수론자(數論者)들은
‘각(覺)의 실체는 사(思)가 아니니, 이미 소멸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모두 실유(實有)이다’라는 말을 한다.
수론(數論) 신아(神我, puruṣa)와 자성(自性, prakṛti)의 두 원리를 상정하는데, 전자는 순수 정신이고 후자는 물질의 근원임. 자성(自性)은 희(喜)를 본질로 하는 삿트바(sattva)와 우(憂)를 본질로 하는 라자스(rajas)와 암(闇)을 본질로 하는 타마스(tamas)의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세 요소는 서로 평형을 이루어 정지 상태에 있지만 신아(神我)의 영향을 받으면 평형 상태가 깨어져 자성(自性)은 전개를 시작함. 이 때 자성에서 최초로 사유 기능이 생기는데, 이것을 각(覺, buddhi) 또는 대(大, mahat)라고 함. 각(覺)이 다시 전개하여 아만(我慢)이 생기고, 아만이 또 전개하여 안(眼)·이(耳)·비(鼻)·설(舌)·피(皮)의 오지근(五知根)과, 수(手)·족(足)·설(舌)·생식기(生殖器)·배설기(排泄器)의 오작근(五作根)과, 심근(心根)과,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의 오유(五唯)가 생기고, 오유에서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의 오대(五大)가 생겨 이 현상 세계가 성립된다고 함. 이 원리를 이십오제(二十五諦)라고 함. 인간의 신체 기관과 감각·사유·의욕 등은 자성(自性)에서 생성되므로 그들은 모두 물질에 속하며, 신아(神我)가 자성(自性)에 관계하는 한 괴로움의 윤회는 계속되는데, 요가 수행으로 그 둘이 완전히 분리된 상태를 해탈이라 함. |
그와 같은 말들로써 자신의 주장에 내포된 도리를 자세히 드러낸다.
모두 공지에 위배된다는 말을 해야 하나, 그렇다고 허용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는 승의제(勝義諦)에서 일체법을 관찰한 것이며 소치는 사람 등의 공지(共知)에 관하여 말한 것은 아니다.
또한 주장명제 중에서 승의제로써 간별하여 세운 것이기에 ‘위배된다’는 말과 같은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 까닭으로 또한 자신의 주장에 위배되는 오류는 없다.
[그 밖의 사람]
그 밖의 사람이 다시 말한다.
“성공론자(性空論者)는 승의제에서는 등의 12처는 공하다는 말을 하고, 다시 유법(有法)이 성립한다면
주장이 성립 못하는 오류가 있으며,
또한 의지하는 대상이 성립할 수 없다는 이유도 오류가 된다.”
이것은 마땅히 도리가 아니다. 소치는 사람들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극미(極微)로써 형성된 눈 등은 총괄적인 주장이 되기 때문이다.
곧 저 법으로써 이유를 들기 때문에, 이 서로 비슷한 유법(有法)이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은 오류가 되고,
또한 비슷한 의지의 대상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그 이유도 오류가 된다.
[정리론(正理論)]
옳지 못한 정리론자(正理論者)들이 다음의 난문을 한다.
“만약 진성에서 눈 등은 다 공하다. 뭇 연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하면
눈 등이 이미 공한데 무엇을 연하여 발생하는가?
만약 연에서 발생한다면 어째서 실체가 공한가?
이와 같이 주장과 이유가 또한 서로 위배되기 때문에, 다시 주장과 위배되는 과실을 이룬다.”
정리론(正理論) 인간에게 일어나는 괴로움의 원인은 그릇된 인식에 있으므로 그릇된 인식을 제거하고 계율을 지키고 요가 수행을 하면 해탈에 이른다고 함. 올바른 인식에 이르는 추론의 방법으로 오지작법(五支作法)을 내세우고 있는데, 그 논식의 예(例)는 다음과 같음. ‘말은 무상하다〔宗〕’, ‘지어낸 것이기 때문이다〔因〕’, ‘예를 들면, 병(甁)과 같다〔喩〕’, ‘병과 같이, 말도 지어낸 것이다〔合〕’, ‘그러므로 말은 무상하다〔結〕’. 이 논식에서 종(宗)은 주장 명제·판단, 인(因)은 이유, 유(喩)는 구체적인 예(例), 합(合)은 유(喩)를 기반으로 하여 종(宗)과 인(因)을 결합한 것, 결(結)은 종(宗)을 되풀이한 결론임. |
이것이 만약 바로잡으려 주장명제의 오류를 지적한 것이라면 방편에 의해 이유를 드러낼 수 있겠지만 동법(同法)의 비유가 없기에 다시 불성(不成)의 오류가 생긴다.
‘소리는 무상하다. 일체는 무상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처럼, 이 방편으로써 일체가 아님을 드러내기 때문에, 이유가 명료하지 않아 불성의 오류가 생긴다.
소리는 ‘일체’ 중에 섭수되기에 또한 동법(同法)의 비유가 없는데 어떻게 ‘상주(常住)’이지만 ‘일체’는 아니란 말인가? 이것은 도리가 아닌 것이다.
‘연에서 발생하기 때문에’라는 이유와 ‘마치 환화와 같다’는 비유는 모두 공지(共知)이기에 이유와 비유는 아울러 모두 성립한다.
이 까닭으로 그대의 힐난은 지혜로운 사람의 생각으로는 기뻐할 수 없는 것이다.
[유성론(有性論)]
유성론자(有性論者)는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그대는 눈에 속성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작용하기 때문이다.
일체 무성(無性)은 작용하지 않는다. 마치 석녀(石女)의 아이처럼.
눈의 작용이 있어 이른바 안식(眼識)이 발생한다. 마치 말하는 이유처럼 세력이 있기에 눈 등에 반드시 속성이 있다.”
이것은 또한 그것에 의해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것이니, 소치는 사람 등의 지혜로도 자성의 성립을 알 수 있다.
세속에 의하여 눈 등의 유위의 자성이 성립한다면 다시 이미 성립한 것을 세우는 것이 된다.
혹은 승의제에서 동법(同法)의 비유는 없어 오직 이품(異品)을 부정할 뿐이다.
즐겨하는 주장이 성립해도 도리에 상응하지 않는다.
음성(音聲)의 상주(常住)를 계탁하는 논자의
‘소리는 상주한다. 들려지는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병 등은 무상하니, 들려지는 속성이 아니다. 소리는 이미 들은 것이기 때문에, 이 까닭으로 속성은 상주한다’는 말처럼,
또한 세간의 공지에서는 동법의 비유가 작용하기에 상위(相違)의 이유가 성립한다.
주장을 세우는 주체인 눈 등은 다 세속의 언설에 포함되니, 자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
또 다른 사람이 힐난을 한다.
“유위가 공하다면 이유나 비유도 다 거기에 포함된다.
종류가 같으므로 비량이 없는 오류가 생긴다.”
지금 이 게송에서는 총괄적으로 인식방법의 결과를 관찰하거나 인식방법을 세울 때, 눈 등을 낱낱이 달리 세워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오류는 없다. 총괄적으로 일체의 유위를 주장해도 이것은 오류가 아니다.
‘연하여 발생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는 두 주장에서 다 허락하는 것이며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눈은 공하다. 그 속성은 공하기 때문에’라는 말을 하면 이 말한 이유는 오류이며, 또한 비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환화(幻化) 등은 있기 때문이다.
말한 비유 가운데 환화 등을 들어 주장한다면 또다시 이미 세운 것을 세우는 오류가 생기기 때문이다.
[지혜가 적은 자]
지혜가 적은 자가 다음과 같은 힐난을 만들어 말한다.
“‘일체 유위는 속성이 공하다’는 주장을 세우고
‘유위이기 때문에 그 속성도 또한 공하다’라는 이유를 든다면
그 이유에는 불성(不成)의 오류가 있다.”
이것은 불성(不成)과 비슷하나 정말로 불성[眞不成]은 아니다.
[부처님의 제자들, 수론, 승론]
부처님의 제자들은 힐난한다.
“‘일체의 작용에는 다 자아가 있지 않다. 원인이 있기 때문에’라는 주장을 하며
‘이 원인도 모든 작용 가운데 포함되어도 또한 자아가 없기 때문에 불성의 오류가 있게 된다.’”
수론자는 힐난한다.
“‘여러 현사(顯事)는 괴로움ㆍ즐거움ㆍ어리석음으로써 그 자성을 삼는다. 사(思)와 별개이기 때문에’라는 주장을 하고,
‘현사 속에 포함되고 또한 즐거움 등으로써 속성을 삼기 때문에’라는 이유를 들어도 불성의 오류가 있다.”
또한 승론자는 힐난한다.
“‘소리는 무상하다. 작용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라는 주장을 하며,
‘소리로써 실체를 삼아도 또한 무상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를 들어도 불성의 오류가 생긴다.’
이와 같은 부류의 여러 대론자[敵論者]들이 꾸준히 입론자(立論者)의 오류를 찾으려 해도 말한 이치대로는 다른 논을 궁극적으로 파괴할 수 없다.
만약 이치라면 어디서 누가 비량(比量)을 잘 건립하여 내가 즐겨 말하는 도리를 파괴하겠는가?
다시 힐난하여 말한다.
“‘연하여 발생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로는 끝내 세우려는 뜻을 능히 세울 수 없다. 속성이 공하기 때문이다.
마치 석녀의 아이가 내는 소리와 같이. 이 이유는 스스로 불성의 오류가 생긴다.
혹은 다른 주장이 용인하는 것을 이유로 들어도 도리가 아니다.
다른 주장에서 ‘속성은 공하기 때문에’라는 말을 하면 그 뜻을 미처 이해 못한 것이다.
비유(非有)가 곧 이유의 명제가 된다면 이 이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비유(非有)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허망하게 현현하는 존재[有]가 곧 이유명제라면 ‘석녀의 아이의 소리’란 궁극에는 없기 때문에, 이 비유에는 주장하려는 법이 없다.
또한 가상의 소리[化聲]로 인하여 부정인(不定因)의 오류가 생긴다. 그것은 수많은 유정에게 이익과 즐거움의 일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주장만 인정하는 이유는 아닌 것이다. 주장의 내용과 주장의 목적 중 하나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주장에서 성립하지 않는 이유처럼, 비량(比量)에 위배되기 때문이며, 큰 과실이 따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지혜 등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다. 행온(行蘊)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마치 명칭 등과 같다”는 주장을 세우고,
승론자는
“허공 등은 다 상주가 아니다. 덕(德)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마치 지(地) 따위와 같다”는 주장을 세우며,
수론자는
“아(我)는 사(思)가 아니다.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니, 마치 가장 뛰어난 것[最勝]과 같다”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부류는 일체 주장을 파괴하여 과실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두 주장 모두 허용됨을 마땅히 믿어야 한다. 이어 명칭을 이유로 든다. 이 도리로 인하여 말한 것과 같은 오류는 얻을 수 없다.
[옳지 못한 정리론]
다른 옳지 못한 정리론자가 주장의 오류를 드러내기 위해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만약 자성이 공하다면 주장의 목적과 그 내용을 다 성취할 수 없다. 마치 석녀의 아이가 내는 음성처럼,
주장의 내용은 유위(有爲) 중에 포함되기 때문이니, 마치 저 주장의 목적처럼 그 속성도 또한 공하다. 모두 공하기 때문에 주장의 목적과 그 내용이 함께 성취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장의 목적과 그 대상의 법제(法體)를 아울러 부정한다. 즉, 유법(有法)의 자상(自相)을 부정하여 주장명제의 오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자신이나 남이 서로 성립 못하고, 확정적이지 않으며, 비유에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앞서 말한 것도 도리가 아니다. 설사 이단을 설정해도 끝내 자기주장의 과실을 숨길 수 없다.
[또 다른 사람]
다른 사람이 또 다른 방편을 설정하여 자기주장의 오류를 비호하려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진성에서는 유위는 공하다’는 이 주장명제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진성에서 일체 유위는 다 실체로서 있지 않다’는 이 주장명제를 세우면 그 말은 또다시 유위 속에 포함되기에 유위와 같아도 실체는 없어야 한다.
얘기한 말에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면 유위도 마땅히 실체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자신이 세운 뜻을 논파하기 때문이니, 자기 말에 위배되는 주장을 세우는 과실이 있다. 마치 ‘일체 언어는 다 망집이다’는 주장과 같다.
만약 ‘진성에서 일체 유위는 모두 무소유이다’라는 주장명제를 세우면 곧 ‘일체는 다 무소유이다’라는 말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주장의 목적은 거듭 사견에 떨어지게 된다.
여기서 ‘자아는 반드시 자아에 의지하는데, 어떻게 다른 것에 의지한다는 말을 하는가?
지혜로운 자의 자아는 선을 살피기에 승천의 즐거움을 얻는다’는 말과 같이
그들은 세속에서는 마음을 자아라 하고 승의제에서는 자아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에 자신의 말에 위배되지 않는다.
주장명제의 과실도 또한 그와 같다.
이것은 세속의 속성에서 눈 등이 있다는 말을 하고, 승의제에서는 그것이 다 공하다는 주장을 하므로 오류가 없다.
다시 ‘모든 발생하는 것은 다 죽음으로 돌아간다’는 말과 같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말씀에 허망한 것이 없기에 자신도 태어났으니 마땅히 죽어 돌아가야 한다.
서로를 배제하지 않았기에 저 세운 주장에 의해 또한 죽어 돌아감을 증명하였으니, 이것을 용인하기에 자신의 말에 위배되지 않는다.
제시한 주장의 오류도 이와 같다.
‘진성에서 유위는 다 공하니, 뭇 연에서 발생하기 때문에’라는 말을 하면 세우려는 주장도 이미 뭇 연에서 발생하므로 속성도 공해야 한다. 서로를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우려는 주장의 말로써 능히 증명될 수 있으나 여기서 자신의 말도 속성이 공하다는 것을 용인하기에 세운 주장을 자신이 파괴하는 과실은 없다.
범지(梵志)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일체 자아(我)는 모두 참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범지여, 이 일은 참아야 하는가, 참지 말아야 하는가?’
세우려는 주장의 말로써 능히 증명될 수 있으나 여기서 범지가 굳세게 이 일을 참았지만
‘일체 자아를 모두 참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이 허용한 일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말한 것에 위배되는 오류가 생긴다.
어디에도 이 과실은 있지 않다.
세존께서는 그 밖의 곳에서는
‘일체의 작용에는 다 자아가 있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고,
또 다른 곳에서는
‘모든 작용은 무상하기에 생성과 소멸의 법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모든 작용은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하다는 부처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생기겠지만 그렇지만 그러한 과실은 없다.
일체 작용 속의 자아의 속성 및 상주의 속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 주장을 세우는 말 또한 마찬가지로 저 무아의 상주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이와 같이 유위공을 설하지만 주장을 세우는 말 역시 속성이 공함을 용인한다.
이것에 따라 자신이 허락하는 뜻을 성립시킨다.
그러므로 그대의 ‘이 말은 자신이 세운 뜻을 파괴하기 때문이다’라는 이 이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수론(數論)에서
‘모든 현상은 즐거움 등을 속성으로 한다’며 현상에 관하여 힐난할 때,
만약 즐거움 등으로써 속성을 삼는다면 세우려는 주장의 말도 저 즐거움 등으로써 속성을 삼아야 한다.
세우려는 주장의 말이 저 즐거움 등의 속성을 본성으로 하지 아니하면 현상도 마땅히 그것을 본성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세우려는 주장에 이처럼 오류가 없으니, 마치 유위가 무상하고 무아임을 세우는 것처럼 또한 설한 주장과 같은 것에는 오류가 없다.
이 또한 이와 같이 설한 바의 오류는 없다. 의(意)는 허용되기 때문이다.
또한 저 대론자는 주장하는 바를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힐난하여,
‘만약 진성에서 유위에 실체가 없다는 말을 하면 유위에 실체가 없다는 말에도 실체가 없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
이 힐난은 자기주장의 오류를 모면하기 어렵게 되자 미망되게 다른 주장에도 그와 같은 과실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마치 세간의 어리석은 도적이 문초[推徵]를 받자 자신을 변명하려 사리를 따져 ‘그대도 도적이다’는 비방을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이치를 살피고 관찰해서 나온 말이 아니다.
흑은 진성에서 일체 유위는 모두 무소유라면 이 주장명제의 뜻은 곧 모두 무소유라는 말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세우려는 주장은 삿된 견해를 가진 자에 떨어진다. 여기 주장의 뜻은 앞에서 이러한 힐난을 이른바 공(空)과 무성(無性)에는 허망현현문(虛妄顯現門)의 차별이 있음을 일체의 종(種)을 다 비방하여 없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와 같이 힐난을 해서는 안 된다.
[총명하지만 오만한 마음을 품은 논사]
다시 그밖에 총명하지만 오만한 마음을 품은 논사가 이러한 힐난을 한다.
“만약 모든 유위가 승의제에서, 마치 환화 등과 같이 공하여 무자성이라면 곧 있지 않은 것이다. 있지 않은 것에 집착하므로 곧 무견(無見)이 된다.”
그것은 자기주장의 허물을 은폐시키려 거짓되이 비방을 한 것이다.
어째서 모두 오류인가?
공론자(空論者)가 세우는 인식방법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승의제를 비방하는 크나큰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있지 않다는 것은 곧 내용을 부정한다는 뜻이다.
그대가 이 말의 드러남에 뛰어난 것으로 집착하여도 우리들은 이 말의 부정[遮止]을 뛰어난 것으로 삼는다.
이 ‘있지 않다’는 말이 오로지 ‘있음의 속성’만을 부정한다면 공능 이것이 소진하여 세력이 있지 않다. 또한 내용에 다른 뜻이 있다.
마치 세간에서 흰비단이 아니라는 말을 할 경우,
이 말의 내용이 검은 비단을 지시한다고 집착하여, 말한 사람에게 주장의 오류를 지적할 수 없는 것처럼,
흰비단이 아니라는 말이 다만 흰비단만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공능 이것이 소진하여 다시 나머지 힘인 검은 비단, 붉은 비단, 황금색 비단을 내용으로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