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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론 상권
2. ‘나’를 타파하는 장[破神品]
[외도] “모든 법은 공하고 무상(無相)하다”고 말해서는 안 되네. ‘나’[神]등의 법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수투로]
가비라(迦毗羅)ㆍ우루가(優樓迦) 등은
“‘나[神]’와 법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가비라는
“원질[冥初]에서 지각[覺]이 생기고, 지각에서 아만(我慢)[我心]이 생기고, 아만에서 5유(唯:五微塵)가 생기고, 5유에서 5대(大)가 생기고, 5대에서 11근(十一根)이 생긴다.
‘나’는 주재하고 상주하고 지각의 특성을 가지며 모든 법 속에 거처한다. 상주해서 괴멸하지 않고 후패[敗]하지 않으며 모든 법을 포섭한다. 이 25제(二十五諦)를 알면 해탈을 얻고 이것을 알지 못하면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루가는
“나가 실제로 존재하며 상주한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일ㆍ봄ㆍ눈깜박임ㆍ수명 등의 특징이 있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또 탐욕ㆍ증오ㆍ괴로움[苦]ㆍ즐거움[樂]ㆍ지혜 등이 의지하는 곳이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나’가 실제로 존재하는데 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악하고 바르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악하고 바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해탈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공하고 무상(無相)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불자] 만약 ‘나’가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악하고 바르지 못한 일이겠지만,
만약 존재하지 않기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에 무슨 과실이 있겠는가?
이를 찬찬히 관찰해 보건대 ‘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외도] ‘나’가 실제로 존재한다.
『승거경』에서는
“지각의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 ‘나’이다”고 말한다.
[불자] ‘나’[我]와 지각[覺]은 동일한 것인가, 상이한 것인가?
[외도] ‘나’와 지각은 동일한 것이다.
[불자] 만약 지각이 ‘나’의 속성이라면 ‘나’는 무상할 것이네. [수투로]
만약 지각이 ‘나’의 속성이라면 지각이 무상하기 때문에 ‘나’는 무상할 것이다.
비유하면 뜨거움은 불의 속성이니 뜨거움이 무상하기 때문에 불도 무상한 것과 같다.
이제 지각은 실제로 무상하다. 왜 그러한가?
특성[相]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고 인연에 속하기 때문이고 전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하기 때문이고 존재하다가 다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도] 발생하지 않으니 상주하는 것이네. [수투로]
발생의 상(相)이 있는 법은 무상하다.
‘나’는 발생의 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주한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지각은 ‘나’의 속성이 아닐 것이네. [수투로]
그대가 지각은 무상하고 ‘나’는 상주한다고 말하니, ‘나’는 지각과 상이할 것이다.
만약 ‘나’와 지각이 상이하지 않다면 지각이 무상하기 때문에 ‘나’도 무상할 것이다.
또 만약 지각이 ‘나’의 속성이라면 옳은 점이 없다. 왜 그러한가?
지각은 한 곳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네. [수투로]
만약 지각이 ‘나’의 속성이라면 그대의 교법에 의하면 ‘나’는 모든 곳에 편재하니 지각도 5취[道]에 동시에 편재해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지각은 한 곳에서 작용하기에 편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각은 ‘나’의 속성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나’와 지각은 동일할 것이네. [수투로]
그대가 지각을 ‘나’의 속성이라고 한다면 ‘나’는 지각과 동일할 것이니, ‘나’는 편재하지 않을 것이다.
비유하면 불에 뜨거움의 속성과 뜨거움 아님의 속성이 없는 것과 같이 ‘나’도 이와 같아서 편재함과 편재하지 않음의 속성이 없을 것이다.
만약 편재한다고 한다면 지각인 속성과 지각 아님인 속성이 있을 것이네. [수투로]
또 그대가 ‘나’가 편재하게 하고자 한다면 ‘나’는 두 속성이 있을 것이다. 지각인 속성과 지각 아님인 속성이다. 왜 그러한가? 지각은 편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나’가 지각의 처소에 떨어진다면 지각이고, 만약 지각 아님의 처소에 떨어진다면 지각 아님이다.
[외도] 능력이 편재하기에 과실이 없네. [수투로]
지각이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도 지각의 능력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지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실은 없다.
[불자] 그렇지 않네. 능력과 능력을 갖는 것은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네. [수투로]
만약 지각의 능력이 있다면 이 곳에 처할 때 지각은 작용이 있으면서 작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말은 잘못된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지각의 작용이 없는 곳에서도 지각의 능력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단지 이 언설[語]이 있을 뿐이다.
[외도] 인과 연들이 화합해서야 지각의 능력에 작용이 있네. [수투로]
‘나’는 비록 지각의 능력이 있지만 반드시 인과 연들이 화합하는 것을 기다려서야 작용이 있는 것이다.
[불자] 발생의 상(相)에 떨어지기 때문이네. [수투로]
만약 인과 연들이 화합할 때 지각에 작용이 있다면 이 지각은 인과 연들에 속하기 때문에 발생의 상에 떨어진다.
만약 지각과 ‘나’가 상이하지 않다면 ‘나’도 또한 발생의 상을 갖는다.
[외도] 마치 등불과 같네. [수투로]
마치 등불이 사물을 비추긴 하지만 사물을 만들 수는 없듯이
인과 연들도 이와 같아서 지각으로 하여금 작용이 있게 하지만 지각을 생기게 할 수는 없다.
[불자] 그렇지 않다. 비록 등불이 물단지 등을 비추지는 않지만 물단지 등을 얻을 수 있고 또 작용을 가질 수도 있다.
만약 인과 연들이 화합하지 않을 때면 지각을 얻을 수 없어서 ‘나’도 또한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을 지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외도] 마치 색과 같네. [수투로]
색이 비록 먼저 존재한다 해도 등불이 비추지 않으면 인지할 수 없듯이,
그렇듯이 지각이 비록 먼저 존재한다 해도 인과 연들이 아직 화합하지 않았을 때는 인지할 수 없다.
[불자] 그렇지 않네. 자기의 상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네. [수투로]
만약 아직 비춤이 있지 않다면 사람이 비록 색의 상을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색의 상은 스스로 인지한다. 그대의 지각의 상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또 상이 없기 때문이다. 색의 상은 사람이 인지하기 때문에 색의 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설사 보지 않을 때라도 항상 색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의 인식은 ‘나’의 속성이다. 인식이 없는 곳에서 인식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식이 없는 곳에서 인식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대의 교법에 의하면 인식[知]과 지각[覺]은 동일한 의미이다.
[외도] 우루가의 제자는 『위세사경(衛世師經)』을 암송해서
“인식과 ‘나’는 상이하다. 그러므로 ‘나’는 무상(無常)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인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나’와 인식은 합하기 때문이네. 마치 소를 갖는 것[有牛]과 같네. [수투로]
사람과 소가 합하기 때문에 사람을 ‘소를 갖는 것[有牛]’라고 하듯이,
그렇듯이 ‘나[神]’와 근[情]과 의(意)와 경계[塵]가 합하기 때문에 ‘나’를 ‘인식을 갖는 것[有知]’이라 하는 것이다.
[불자] 소의 성질은 소에 있는 것이지 ‘소를 갖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네. [수투로]
소의 성질[相]은 소에 있는 것이지 ‘소를 갖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소가 합한다 하더라도 ‘소를 갖는 것’이 소인 것은 아니다. 소만이 소인 것이다.
이와 같이 비록 ‘나’와 인식이 합한다 하더라도 인식의 특성[知相]은 인식[知]에 있지, ‘나’가 인식인 것은 아니다.
그대가 ‘나’와 근[情]과 의(意)와 경계가 합하기에 인식이 발생한다고 말하지만, 이 인식이 색경[色塵]등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단지 인식만이 인식하는 것이지 ‘나’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불이 태우지 불을 갖는 사람이 태우지 않는 것과 같다.
[외도] 법(法)을 사용하기 때문이네. [수투로]
사람에게 비록 봄[見相]이 있지만 등불을 사용하면 보고 등불을 사용하지 않으면 보지 못한다.
‘나’에게 비록 인식이 있지만 인식을 사용하면 인식하고 인식을 사용하지 않으면 보지 않는다.
[불자] 그렇지 않네. 인식이 인식하기 때문이네. [수투로]
근[情]이 의(意)와 경계가 합해서 인식이 발생할 때 이 인식이 색 등의 경계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인식이 인식하는 것이지 (‘나’에 의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인식이 인식하는데 ‘나’가 다시 무엇을 사용하겠는가?
등불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러한가?
등불은 색 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네. [수투로]
등불이 비록 먼저 존재한다 하더라도 색 등을 인식할 수 없다. 법(法)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지 인식만이 색을 인식하는 것이다.
만약 인식하지 못한다면 인식이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식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을 사용하겠는가?
[외도] 말의 몸[馬身]과 합하기에 ‘나’를 말[馬]이라고 하는 것이네. [수투로]
가령 ‘나’가 말의 몸과 합하기에 ‘나’를 말이라고 하는 것이지만 ‘나’가 비록 (말의) 몸과 상이하더라도 또한 ‘나’를 말이라고 하듯이,
그렇듯이 ‘나’가 인식과 합하기에 ‘나’를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불자] 그렇지 않네. (말의) 몸 속의 ‘나’는 말이 아니네. [수투로]
말의 몸은 말이다.
그대가 “몸이 ‘나’와 상이하다”고 말한다면 ‘나’가 말의 몸과 상이한 것인데, 어떻게 ‘나’를 말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나’로 ‘나’를 비유한다면 부처(負處)에 떨어진다.
[외도] 마치 검은 명주와 같네. [수투로]
비유하면 검은 명주와 같다. 검음이 비록 명주와 상이하긴 하지만 명주와 검음이 합하기에 검은 명주라 하듯이, 그렇듯이 인식이 비록 ‘나’와 상이하긴 하지만 ‘나’와 인식이 합하기에 ‘나’를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나’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네. [수투로]
만약 ‘나’와 인식이 합하기에 ‘나’를 인식이라고 한다면 ‘나’는 ‘나’가 아닐 것이다. 왜 그러한가?
나는 앞에서 “인식이 인식한다”고 말한 바 있다.
만약 인식을 ‘나’라 하지 않는다면 또한 ‘나’를 인식 주체[能知]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다른 것에 합하기에 다른 것을 이름으로 삼는다면 인식이 ‘나’와 합하는데 어떻게 인식을 ‘나’라 이름하지 않겠는가?
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검은 명주를 비유로 든다면 스스로 그대의 경전을 위배하게 된다.
그대의 경전에서 검음은 속성[求那]이고 명주는 실체[陀羅驃]이다. 실체는 속성이 되지 않고 속성은 실체가 되지 않는다.
[외도] 몽둥이를 가진 자와 같네. [수투로]
마치 사람과 몽둥이가 합하기에 사람을 ‘몽둥이를 가진 자[有杖]’라 하지 몽둥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몽둥이가 사람과 합하는 것이지만 몽둥이를 ‘사람을 갖는 것[有人]’이라고 하지도 않고 사람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렇듯이 ‘나’가 인식과 합하기에 ‘나’를 인식 주체[能知]라고 하지 인식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또 이 인식이 ‘나’와 합하기에 인식을 ‘나’라고 하지 않는다.
[불자] 그렇지 않네. 몽둥이를 가진 자는 몽둥이가 아니네. [수투로]
비록 몽둥이가 몽둥이를 가진 자와 합하지만 몽둥이를 가진 자가 몽둥이인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인식의 특성은 인식 속에 있지 ‘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인식 주체가 아니다.
[외도] 또 수론학파의 사람들[僧佉人]은
“만약 인식이 ‘나’와 상이하다면 위와 같은 과실이 있겠지만 우리의 경전에는 그와 같은 과실이 없다. 왜 그러한가? 지각은 ‘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각의 특징이 있는 것을 ‘나’로 삼는다. 그러므로 항상 지각하지 않을 때가 없다”고 말한다.
[불자] 앞에서 이미 타파했지만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만약 지각의 특징이 있다면 ‘나’는 하나가 아니네. [수투로]
지각에는 여러 고(苦)와 낙(樂)등의 지각이 있다.
만약 지각이 ‘나’의 특징[相]이라면 ‘나’는 여럿일 것이다.
[외도] 그렇지 않네. 하나이면서 여러 상(相)이 되네. 마치 파리구슬과 같네. [수투로]
마치 한 개의 파리구슬이 색깔에 따라서 청색이나 황색이나 적색이나 백색으로 변하듯이
그렇듯이 한 지각이 경계[塵]에 따라서 여럿이 되어 고(苦)를 지각하거나 낙(樂)을 지각하거나 등등을 한다.
비록 지각이 여러 상이 있긴 하나 실제로는 하나의 지각이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죄와 복은 동일한 상(相)일 것이네. [수투로]
만약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지각[覺]이라면 이것을 복이라고 한다.
만약 다른 이를 해롭게 하는 각[覺]이라면 이것을 죄라고 한다.
모든 지혜가 있는 사람은 마음으로 이 법을 믿는다.
만약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지각과 다른 이를 해롭게 하는 지각이 동일하다면 죄와 복이 동일한 상일 것이다.
마치 보시와 도둑질 등이 또한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또 가령 구슬과 같은 것은 먼저 존재하고 있다가 색을 따라서 변하지만, 지각은 연(緣)과 함께할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또 구슬은 새로 새로 발생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상이 동일하지 않다.
그대가 구슬은 동일하다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외도] 그렇지 않네. 결과는 여럿이지만 하나이네. 마치 도공이 그러하듯. [수투로]
마치 한 명의 도공이 물단지나 동이 등을 만드는 것과 같다.
만드는 이가 하나이기 때문에 결과가 하나인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하나의 지각이 (다른 이를) 해롭게 하는 행위[業]나 이롭게 하는 행위 등을 행할 수 있다.
[불자] 도공은 구별[別異]이 없네. [수투로]
가령 도공의 몸은 하나여서 구별[異相]이 없기에 물단지나 동이 등과 다르다.
그러나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지각이나 다른 이를 해롭게 하는 지각은 구별이 실제로 존재한다.
또 해롭게 하는 행위나 이롭게 하는 행위 등은 지각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외도] ‘나’는 실제로 존재하네. 인식의 특징이 있는 것[知相]을 보고 추리하기 때문에. [수투로]
어떤 사물은 지각되지는 않지만 추리되기 때문에 인식된다.
마치 사람이 이미 가고 나서 이후에 다른 곳에 도달하는 것을 볼 때나 해와 달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질 때 가는 행위[去]를 보지 못하지만 다른 곳에 도달하기 때문에 가는 행위를 알 듯이,
그렇듯이 속성들이 실체에 의지하는 것을 본다.
인식의 특징이 있는 것[知相]을 보고 추리해서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나’와 인식[知]이 합하기에 ‘나’를 인식 주체[能知]라 한다.
[불자] 이것은 앞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인식하지 못할 때 ‘나’가 존재하지 않네. [수투로]
그대의 교법에 의하면 ‘나’는 편재하고 광대한 데 반해 인식[知]은 적다.
만약 ‘나’가 인식[知]이라면 어떤 곳에서는 어떤 때에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곳은 몸 바깥을 말한다. 어떤 때는 몸 안을 말한다. 수면이나 기절 등 이 때에는 인식하지 못한다.
만약 ‘나’가 인식의 특징이 있는 것[知相]이라면 어떤 곳에서는 어떤 때에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인식의 특징이 없기 때문이다.
“인식의 특징이 있기에 ‘나’가 존재한다”는 그대의 말은 공허해서 실질이 없다.
[외도] 가는 행위가 없기 때문에 인식이 없네. 마치 연기가 그러하듯. [수투로]
가령 연기가 불의 특징이긴 하지만 석탄일 때는 연기가 없다. 이 때에 연기가 없지만 불은 존재한다.
그렇듯이 인식이 ‘나’의 특징이긴 하지만 인식이 있든 인식이 있지 않든 ‘나’는 항상 존재한다.
[불자] 그렇지 않네. ‘나’는 인식 주체이기 때문에. [수투로]
만약 인식하지 않을 때에도 ‘나’를 존재하게 하고자 한다면, ‘나’는 인식 주체[能知]가 아니다. 또 인식의 특징이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그대에 따르면 ‘나’가 인식하지 않을 때에도 ‘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연기가 존재하지 않을 때에 불이 존재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불이 존재하는 것을 인식한다. ‘나’가 인식할 때든 인식하지 않을 때든 봄의 주체[能見者]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또 그대는 공통 표상[共相]을 보고 추리[比知]하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러한가?
가는 자는 가는 행위로써 다른 곳에 도달하기 때문에. [수투로]
가는 자를 떠나서 가는 행위가 있지 않다. 가는 행위를 떠나서 가는 자가 다른 곳에 도달하는 일은 있지 않다. 그러기에 가는 자가 보이는데 다른 곳에 도달한다고 말한다면 반드시 가는 행위가 있다는 것을 안다.
만약 “‘나’를 떠나서 인식이 있지 않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인식하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는 안 된다.
거북이를 보고서 토끼의 표상[想]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되고, 석녀를 보고서 아이의 표상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듯이 인식을 보고서 ‘나’의 표상[神想]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외도] 마치 손이 잡는 것과 같네. [수투로]
마치 손이 어떤 때는 잡고 어떤 때는 잡지 않는 것과 같다. 잡지 않을 때에는 손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된다. 손은 항상 손이다.
‘나’도 그러해서 어떤 때는 인식하고 어떤 때는 인식하지 않는다. 인식하지 않을 때 ‘나’가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된다. ‘나’는 항상 ‘나’인 것이다.
[불자] 잡음은 손의 특징이 아니네. [수투로]
잡음은 손의 행위[業]이지 손의 특징[相]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잡는다고 해서 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대가 인식이 ‘나’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외도] ‘나’는 실제로 존재하네. 고통[苦]이나 쾌락[樂]을 지각하기 때문에. [수투로]
만약 지각[覺]이 없다면, 지각이 없는 몸은 홀로 고통이나 쾌락을 지각할 수가 없다. 왜 그러한가?
죽은 사람은 몸이 있어도 고통이나 쾌락을 지각할 수 없다. 그러기에 몸을 갖는 어떤 것이 고통이나 쾌락을 지각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나’이다. 그러므로 ‘나’가 실제로 존재한다.
[불자] 만약 고통[惱]이 있다면 또한 절단되는 것이네. [수투로]
가령 칼로 몸을 벨 때 고통[苦]이 생긴다. 만약 칼로 ‘나’를 베서 ‘나’에도 고통이 있다면 ‘나’도 절단되는 것이다.
[외도] 그렇지 않네. 감각되는 것[觸]이 없는 것이 마치 빈 공간과 같네. [수투로]
‘나’는 감각되는 것이 없기에 절단되지 않는다.
마치 집이 불에 탈 때 안의 빈 공간은 감각되는 것이 없기에 타지 않고 단지 뜨거움만이 있듯이,
그렇듯이 몸이 절단될 때 안의 ‘나’는 감각되는 것이 없기에 절단되지 않고 단지 고통만이 존재한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가는 행위가 없네. [수투로]
만약 ‘나’에 감각되는 것[觸]이 없다면 몸은 다른 곳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가는 행위[去法]는 의지[思惟]에서 생기고 몸의 움직임에서 생긴다. 몸에는 의지가 없다. 지각[覺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는 움직일 수 있는 힘[動力]이 없다. 몸[身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몸은 다른 곳에 도달하지 못한다.
[외도] 마치 장님과 절뚝발이와 같네. [수투로]
비유하면 장님과 절뚝발이가 서로 의지해서 가는 것과 같다.
그렇듯이 ‘나’에는 의지[思惟]가 있고 몸에는 움직일 수 있는 힘[動力]이 있어서 결합해서 간다.
[불자] 상이하기 때문이네. [수투로]
장님과 절뚝발이의 경우는 두 감각[觸]과 두 의지[思惟]가 있기에 당연히 갈 수 있는 것이지만, 몸과 ‘나’는 두 가지가 없기에 갈 수 없다. 그러므로 가는 행위가 있지 않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위와 같이 (‘나’는) 절단된다는 과실이 있다.
또 그대가 빈 공간에 뜨거움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빈 공간은 감각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미미한 뜨거움이 빈 공간에 편재하기에 몸이 감각해서 뜨거움을 인식하는 것이지 빈 공간에 뜨거움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공간에 뜨거움이 존재한다고 임의로 말하는 것일 뿐이다.
[외도] 마치 집주인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과 같네. [수투로]
마치 집이 불에 탈 때 집주인은 고통스러워 하지만 불에 타지 않듯이, 그렇듯이 몸이 절단될 때 ‘나’는 단지 고통스러워할 뿐 절단되지는 않는다.
[불자] 그렇지 않네. 무상(無常)하기에 불에 타네. [수투로]
집이 불에 탈 때 풀과 나무 등은 무상하기에 타기도 하고 열이 나기도 한다. 빈 공간은 상주하기에 타지도 않고 열이 나지도 않는다.
그렇듯이 몸은 무상하기에 고통스러워 하기도 하고 절단되기도 하지만 ‘나’는 상주하기에 고통스러워 하지도 않고 절단되지도 않는다.
또 집주인은 불에서 멀리 있기에 불에 타지 않는다. 그대의 경전에서 “‘나’는 편재한다”고 말하기에 또한 절단된다.
[외도] 반드시 ‘나’가 존재하네. 색 등을 파악하기 때문이네. [수투로]
5근[情]은 5경[塵]을 인식할 수 없다. 인식[知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가 인식한다는 것을 안다.
‘나’가 눈[眼]등을 사용해서 색 등의 경계를 인식한다. 마치 사람이 낫을 사용해서 5곡을 베서 거두는 것과 같다.
[불자] 왜 귀를 사용해서 보지 않는가? [수투로]
만약 ‘나’에 능력[力]이 있다면 왜 귀를 사용해서 색을 보지 않는가?
마치 불이 탈 때 곳곳이 모두 타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사람이 어떤 때는 낫 없이 손으로 베기도 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집에 여섯 방향으로 난 창문[六向]이 있어서 사람이 그 안에 거주하면서 밖에 있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나’도 이와 같으니 곳곳을 볼 것이다.
[외도] 그렇지 않네. 사용하는 것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도공이 그러하듯. [수투로]
비록 ‘나’에 보는 능력[見力]이 있긴 하지만 눈 등이 감각하는 것[所伺]과 같지 않다. 경계가 각각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귀를 사용해서 색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치 도공이 비록 물단지를 만들긴 하지만 진흙 없이는 만들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렇듯이 ‘나’에 비록 보는 능력이 있긴 하지만 눈 아닌 것을 사용해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장님일 것이네. [수투로]
만약 ‘나’가 눈을 사용해서 본다면 ‘나’와 눈은 상이할 것이다. ‘나’와 눈이 상이하다면 ‘나’는 눈이 없을 것이다. ‘나’에 눈이 없는데 어떻게 보겠는가?
그대가 도공의 비유를 든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진흙 없이는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진흙이 곧 물단지이다. 그러나 눈은 색과 상이하기 때문이다.
[외도] ‘나’가 존재하네. 다른 근[情]이 작동하기 때문에. [수투로]
만약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다른 이가 과일을 먹는 것을 볼 때 입안에서 침이 흘러나오는가? 그렇다면 눈을 사용해서 맛[味]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눈을 소유하는 자가 인식한다.
또 다음과 같다.
한 사물을 눈과 몸이 인식하기 때문에. [수투로]
가령 사람이 눈을 사용해서 이전에 물단지 등을 인식한 일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 비록 눈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몸이 감촉해서 (물단지 등을) 또 인식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불자] 마치 장님과 같다.
논[修妬路]에서 이미 타파했다.
또 만약 눈을 사용해서 다른 이가 과일을 먹는 것을 볼 때 입안에서 침이 흘러나온다면, 다른 근[감관]은 왜 작동하지 않겠는가?
몸도 또한 이와 같다.
[외도] 사람이 태우는 것과 같네. [수투로]
사람이 비록 태우긴 하지만 불 없이 태울 수 없듯이
‘나’ 또한 이와 같아서 눈을 사용해서 보는 것이지 눈 없이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불자] 불이 태우는 것이네. [수투로]
사람이 태운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허위의 말[妄語]이다. 왜 그러한가? 사람에게는 태움의 성질[燒相]이 없다. 불이 스스로 태우는 것이다.
가령 바람이 나무를 움직이고 서로 어울려 불을 일게 해서 (불이) 산이나 못을 태울 때 행하는 자[作者]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이 스스로 태우는 것이지 사람이 태우는 것이 아니다.
[외도] 의(意)가 그러하듯. [수투로]
가령 죽은 사람은 비록 눈이 있긴 하지만 의(意)가 없기 때문에 ‘나’가 보지 못한다. 만약 의가 있다면 ‘나’가 본다.
그렇듯이 ‘나’가 눈을 사용해서 보지 눈 없이 보는 것이 아니다.
[불자] 만약 의(意)가 있다면 인식할 수 있고 의가 없다면 인식할 수 없다면, 단지 의가 눈 등의 문(門)에 작용하면 인식하는데 ‘나’를 다시 어디에 쓰겠는가?
[외도] 의(意)는 자기를 인식하지 못한다. 의와 의가 서로 인식한다면 이것은 무한역행이 된다.
우리의 ‘나’는 하나이기 때문에 ‘나’로써 의를 인식한다. 무한역행이 아니다.
[불자] ‘나’에 또 ‘나’가 존재하네. [수투로]
만약 ‘나’가 의(意)를 인식한다면 누가 다시 ‘나’를 인식하겠는가?
만약 ‘나’가 ‘나’를 인식한다면 이것도 무한역행이 된다.
우리의 교법에 따르면 현재의 의(意)가 과거의 의(意)를 인식한다. 의[意法]는 무상하기 때문에 과오가 없다.
[외도] 왜 ‘나’를 제거하는가? [수투로]
만약 ‘나’를 제거한다면 어떻게 단지 의(意)만으로 대상들을 인식하겠는가?
[불자] 마치 불이 열을 내는 것과 같네. [수투로]
마치 불이 열을 낼 때 행위자[作者]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불은 스스로 열을 낸다. 열을 내지 않는 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듯이 의(意)가 인식의 특징[知相]을 갖는다.
비록 ‘나’가 없긴 하지만 (意의) 본성이 인식이기 때문에 인식할 수 있다. ‘나’와 인식은 상이하기 때문에 ‘나’는 인식하지 못한다.
[외도] ‘나’가 존재하네. 습관[宿習]의 기억이 상속(相續)하기에 태어날 때 슬픔과 기쁨이 작용하네. [수투로]
마치 갓난애가 슬픔과 기쁨 등의 일을 인식하는 것과 같다.
가르치는 사람이 없지만 선세의 습관[宿習]의 기억[念]이 상속하기 때문에 금세에 다시 여러 가지 행위[業]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가 존재하고 또 상주의 특징[常相]을 갖고 있다.
[불자] 편재하는 것이 어떻게 기억하는가? [수투로]
‘나’는 상주하고 경계[塵]들에 편재하기에 기억하지 않을 때가 없다면, 기억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또 만약 기억이 모든 곳에서 발생하다면 기억도 모든 곳에 편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곳에서 동시에 기억할 것이다.
만약 기억이 부분 부분의 장소에서 발생한다면 ‘나’는 부분[分]을 갖는 것이다. 부분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또 만약 ‘나’라면 인식이 존재하지 않고, 만약 인식이라면 ‘나’가 아니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외도] 합하기에 기억이 발생하네. [수투로]
만약 ‘나’와 의(意)가 합한다면 세력이 일어나기 때문에 기억이 발생한다. 왜 그러한가? 비록 ‘나’와 의(意)가 합하긴 하지만 세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기억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자] 비록 앞에서 이미 타파하긴 했지만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만약 ‘나’가 인식의 특징을 갖는 것이라면 기억을 발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인식의 특징을 갖는 것이 아니라면 또한 기억을 발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기억이라면 인식이네. [수투로]
또 만약 기억이 발생한다면 이 때에 인식한다.
만약 기억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 때에는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니 기억이 인식일 터인데 ‘나’를 어디에 쓰겠는가?
[외도] ‘나’가 존재하네. 왼쪽 것으로 보고 오른쪽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네. [수투로]
가령 사람이 전에 왼쪽 눈으로 보고 후에 오른쪽 눈으로 인식할 때 왼쪽 눈[彼]이 보고 오른쪽 눈[此]이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안에 ‘나’가 존재하기 때문에 왼쪽 눈으로 보고 오른쪽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불자] 함께 두 눈으로 답하네. [수투로]
부분의 인식은 인식이 아니다.
또 만약 그렇다면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 편재한다면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또 만약 기억이라면 인식이다.
또 어떻게 귀로 보지 않겠는가? 또 만약 그렇다면 장님이다.
또 가령 왼쪽 눈으로 보는 것을 오른쪽 눈으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또 ‘나’도 왼쪽 눈[此分]으로 보고 저 부분[彼分]으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왼쪽 눈으로 보고 오른쪽 눈으로 인식하기에 ‘나’가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외도] 기억은 ‘나’에 속하기에 ‘나’가 인식하는 것이네. [수투로]
기억은 ‘나’의 법(法)이기에, 이 기억은 ‘나’ 속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나’가 기억을 사용해서 인식하는 것이다.
[불자] 그렇지 않네. 부분의 인식은 인식이 아니네. [수투로]
만약 ‘나’의 한 부분에서 인식이 발생한다면 ‘나’는 부분의 인식이다.
만약 ‘나’가 부분의 인식이라면 ‘나’는 인식이 아니다.
[외도] ‘나’의 인식은 부분의 인식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나’가 부분의 인식이라 하더라도 ‘나’를 인식이라 하네. 몸의 행위[身業]가 그러하듯. [수투로]
몸의 부분인 손에 행위[所作]가 존재할 때 몸의 행위[身作]라고 하듯이,
그렇듯이 ‘나’가 부분의 인식이라 하더라도 ‘나’를 인식이라 한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인식이 존재하지 않네. [수투로]
그대의 교법에 따르면 ‘나’는 편재하는 데 반해 의(意)는 적다. ‘나’와 의(意)가 합하기에 ‘나’의 인식이 발생한다. 이 인식과 의 등은 적다.
만약 적은 부분인 인식으로써 ‘나’를 인식이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찌 많은 부분을 인식하지 못하니 ‘나’를 인식 아님[不知]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또 그대가 몸의 행위를 비유로 든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부분[分]과 전체[有分]의 동일함과 상이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외도] 옷의 일부가 불에 탄 것과 같네. [수투로]
옷의 일부가 불에 탔는데 불에 탄 옷이라고 하듯이,
그렇듯이 ‘나’가 일부를 인식하더라도 ‘나’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불자] 불에 탄 것도 이와 같네. [수투로]
만약 옷의 일부가 불에 탔다면 ‘불에 탄 것’이라 하지 말고 ‘일부가 불에 탄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대가 (옷의) 일부가 불에 탔다고 ‘불에 탄 옷’이라고 한다면 이제 많은 부분이 불에 타지 않았으니 ‘불에 타지 않은 옷’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이 옷은 많은 부분이 불에 타지 않았기에 실제로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설[語言]에 집착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