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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보살소문경론 제1권
1.3. 이 경를 말씀하신 이치(2), 정정취를 구하기 위함
[문] 또, 어떠한 이치 때문에 여래께서는 이 수다라를 말씀하셨는가?
[답] 부정취(不定聚)에 의한 보살이 정정취(正定聚)를 구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행을 성취하는가?
정정취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니, 그 보살의 정정취에 들어가서 바른 인연의 행 닦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삼취(三聚) 중생을 세 부류로 나눈 것. (1) 정정취(正定聚). 견혹(見惑)을 끊어 반드시 열반에 이를 부류. (2) 사정취(邪定聚). 오역죄(五逆罪)를 저질러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부류. (3) 부정취(不定聚). 열반에 이를지 지옥에 떨어질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부류. |
그 때문에 여래께서는 이 수다라를 말씀하셨다.
이 뜻은 어떠한 것인가?
보살로서 아직 초지의 바른 지위를 증득하지 못하면,
비록 한량없는 겁 동안 선한 뿌리를 익히고 모은다 하더라도 물러나지 않는 지위[不退轉位]를 얻을 수가 없고
마침내 두려움 없는 곳을 얻지 못하고 마음이 편안하거나 고요하지 못하여 항상 세간의 괴로움에 핍박을 당하고,
보리심의 근본이 되는 사랑함과 가엾이 여김의 마음의 힘을 얻지 못하고 뛰어난 힘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세간 길의 지혜로써 열두 가지 인연을 살피고 사실대로 함이 있는 변천을 살피어 세간의 길에 의지하므로,
고요한 법계를 자세히 살피고 큰 열반을 구하면서도 방편의 지혜[方便智]가 없으므로 성문과 벽지불의 자리에 떨어진다.
만약 성문과 벽지불의 자리에 떨어지면 세 가지의 놓침이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의 놓침인가?
첫째 온갖 대승의 선한 뿌리 종자를 놓침이며,
둘째 일체 중생과 함께 할 수 있는 즐거움의 원인을 놓침이며,
셋째 살바야의 지혜를 놓치는 것이다.
이런 이치 때문에 여래께서는 경전에서 말씀하셨다.
“가섭(迦葉)아, 마치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이 비록 가짜 유리의 구슬을 닦고 깎는다 하더라도 그 가짜 구슬은 끝내 진짜 유리 보배로 만들 수가 없는 것처럼, 그와 같으니라.
가섭아, 모든 성문들이 계율ㆍ선정ㆍ지혜와 두타(頭陀) 등의 온갖 공덕을 닦는다 하더라도 끝내 도량에 앉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없느니라.
가섭아, 마치 큰 비유리(毘琉璃)를 닦고 깎으면 뜻대로 한량없는 백천만억의 값진 보배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그와 같으니라.
가섭아, 보살의 행을 닦으면 그 때문에 온갖 성문과 벽지불 등이며 사람과 하늘을 출생시킬 수 있느니라.”
이런 이치에 의하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보적경(寶積經)』에서 말씀하셨다.
“보살에게는 네 가지의 그릇된 선지식이 있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 성문승을 구하는 사람으로서 자기만 제도되려고 하는 이이며,
둘째 연각승을 구하는 사람으로서 조그마한 일을 기뻐하고 즐기는 이이며,
셋째 외도의 경전인 로가야(路伽耶) 등을 읽는 이이며,
넷째 온갖 글과 말의 수식을 익히고 배우는 이이다.
여기에 있는 이 네 가지를 가까이 하면 세간의 이익만이 불어나고 법의 이익은 불어나지 않느니라.”
또, 어떤 경 중에서 대덕 가섭이 문수사리(文殊師利)에게 말하였다.
“어떤 5역(逆)을 범한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어 모든 공덕을 닦으면 큰 보리를 증득할 수 있지만 아라한은 그러할 수 없습니다.
마치 감관이 부서진 사람은 다섯 가지 욕심의 경계에 능히 하는 것이 없고 더욱 더하게 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그와 같이 성문과 벽지불승의 사람은 모든 번뇌를 여의고서 온갖 부처님의 법에 능히 하는 것이 없고 더욱 더하게 하는 것이 없으며 이와 같이 부처님의 법을 자세히 살피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수사리여, 모든 범부로서는 여래의 은혜를 갚겠지만 성문은 갚지 못합니다.
무슨 까닭인가?
범부인 사람은 부처님의 공덕을 듣고 3보(寶)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낼 수 있지만
성문승의 사람은 비록 죽을 때까지 모든 부처님 법의 열 가지 힘[十力]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四無畏]을 듣는다 하더라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蜜經)』에서 말씀하셨다.
“천자들아, 아직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지 않았으면 그 사람은 큰 보리심을 내어야 하느니라.
이미 성문과 벽지불의 자리에 들었으면 다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낼 수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온갖 성문과 벽지불 등은 나고 죽음의 흐름을 끊었으므로 자주 세간에 받아날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모든 보살마하살은 초지 중에서 진리[實諦]를 보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으며, 그 인연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깊은 마음을 껴잡아 얻었다.
반야바라밀로써 사실대로 껴잡아서 계행 등을 닦았으므로 몸과 목숨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중생을 이롭게 하기만 하나니, 수행하는 그때의 이름을 물러나지 않는 보살[不退轉菩薩]이라고 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10지 수다라 중에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이와 같은 마음을 내면 즉시 범부의 자리를 뛰어넘어 보살의 지위에 들어간다.
부처님의 집[佛家]에 태어나 있으면서 성바지가 높고 귀하며, 헐뜯고 싫어할 수 없이 온갖 세간의 길을 뛰어넘어 보살의 법 중에 잘 머무른다.
보살의 바른 처소에 잘 머물러서 3세에 평등한 진여(眞如)의 법 중에 들어가며, 여래의 종자 중에서 반드시 마지막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마치리라.”
보살로서 이러한 법에 머무르면 보살의 환희지(歡喜地)에 머무른다고 하며,
움직이지 않는 법이기 때문에 다섯 가지 두려움[五怖畏]을 뛰어넘는다.
이른바 살지 못하리라는 두려움[不活畏], 나쁜 이름의 두려움[惡名畏], 죽음의 두려움[死畏], 나쁜 길에 떨어지는 두려움[墮惡道畏], 대중의 위덕에 대한 두려움[大衆威德畏]이니, 그는 모두 멀리 여의게 된다.
무슨 까닭인가?
이 보살들은 나[我] 따위의 고집[相]을 떠났기 때문이다.
범부의 자리를 초월한 이로서 그 초월하는 것에 아홉 가지가 있나니, 알아야 한다.
보살의 지위에 들어간 이는 지위가 뛰어났나니, 처음 세간을 벗어나려는 마음을 이룸이 마치 처음 태 안에 머무르는 것과 같아서 서로 비슷한 법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집에 태어나 있는 이는 집이 뛰어났나니, 방편반야(方便般若)에 의함으로써 집에 태어나서 사는 것과 서로 비슷한 법이기 때문이다.
성바지가 높고 귀하여 헐뜯을 수 없는 이는 성바지가 뛰어났나니, 대승의 행으로써 아들을 낳는 것과 서로 비슷한 법이기 때문이다.
온갖 세간의 길을 뛰어난 이는 나오는 것이 뛰어났나니, 세간의 길로써는 껴잡을 수 없어서 길을 나와서 사는 것과 서로 비슷한 법이기 때문이다.
세간을 벗어나는 길에 들어간 이는 들어가는 것이 뛰어났나니, 세간을 벗어나는 길로써 껴잡아 길에 들어가서 사는 것과 서로 비슷한 법이기 때문이다.
보살의 법 중에 잘 머무른 이는 몸이 뛰어났나니, 크게 가엾이 여기는 것으로써 바탕을 삼아 남의 일을 하면서도 곧 자기의 일이라 여기어 제 몸과 서로 비슷한 법이기 때문이다.
보살의 바른 처소에 잘 머무른 이는 처소가 뛰어났나니, 세간의 방편을 버리지 않고 좋고 교묘한 솜씨에 물들지 않으며 바르게 살 데에 머무는 것과 서로 비슷한 법이기 때문이다.
3세의 평등한 진여의 법 중에 들어간 이는 업(業)이 뛰어났나니, 공(空)과 거룩한 지혜[聖智]를 따르면서 사는 것과 서로 비슷한 법이기 때문이다.
여래의 종자 중에 반드시 마지막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마치는 이는 마지막이 뛰어났나니, 부처님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고 마지막 열반의 도가 성취하는 것과 서로 비슷한 법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범부로 태어나고 보살로 태어날 적의 태 안에 드는 것이 같지 아니함을 보였나니, 물듦이 있고 물듦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다면 차례로 집이 서로 비슷하지 않고 성바지가 서로 비슷하지 않고
나감이 서로 비슷하지 않고, 들어감이 서로 비슷하지 않고,
몸이 서로 비슷하지 않고, 처소가 서로 비슷하지 않고,
생업(生業)이 서로 비슷하지 않고, 성취(成就)가 서로 비슷하지 않다.
이와 같은 것은 존자(尊者) 바수반두[婆藪槃豆]가 ‘마지막에 성취되는 마음’이라고 말하였으며, 그 밖의 논사(論師)는 다시 법 해석이 다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보살마하살은
어떠한 마음을 내게 됨으로써
세간이 허망한 것인 줄로 보는가?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처음 마음[初心]이라 하셨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세간이 허망한 것인 줄로 본다’ 함은 온갖 세간은 오직 인연만으로써 나고 참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존자 용수(龍樹)보살이 게송으로 말한 것과 같다.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는 것이므로
그 법이야말로 참 모습이 없으며
만약 참 모습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법이 있다고 하리오.
거룩한 이 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마하살이『무진경(無盡經)』에서 말하였다.
“인연을 자세히 살피는 방편지(方便智)로써 온갖 법은 인(因)에 의지하고 연(緣)에 의지하여 화합하면서 생기는 줄 알며,
만약 온갖 법이 인에 의지하고 연에 의지하여 화합하면서 생긴다면 그 법에는 나[我]와 사람과 중생과 수명에 의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나가 아니고 사람과 수명이 아니라면 그 법은 과거ㆍ현재ㆍ미래라 함을 헤아릴 수 없으리라.”
보살이 만약에 이와 같이 자세히 살필 수 있으면, 이를 보살마하살로서 인연이 화합함을 자세히 살피는 방편지라고 한다.
‘나에 의하지 않는다’ 함의 이 뜻은 무엇인가?
갖가지 인연의 법에 의지하여 나고, 나에 의하여 나지 않나니, 실제로 나라는 바탕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여러 가지가 반연되어 불이 생기고 불의 본바탕은 열이 있는 것이지만 열은 참 모습이 없고 인연이 화합함으로써 불과 열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그와 같아서 몸의 감관을 여의고서 바깥을 알거나 또 참 나[實我]가 있는 것이 아니니, 참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참 모습이 없다 함은 허공과 같다는 것인가, 함이 있음과 같다는 것인가?
만약 허공과 같다고 하면 곧 이는 물건이 없으며, 만약 함이 있음과 같다고 하면 곧 이는 무상하리라.
나와 사람ㆍ중생ㆍ수명 등이라 함은 중생을 교화할 수 있는 갖가지 이름들이니, ‘참 나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또 경전에서 대해혜(大海慧)보살이 거룩한 이 대비사범(大悲思梵)을 위하여 온갖 부처님 법의 성취를 말하는 것과 같나니,
「문답품(問答品)」중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생기는지라
그 법은 참 모습이 없는 것이며
법이 만약 참으로 모습 없다면
그 법은 실제로 난 것이 아니리라.
보살은 중생들이 이와 같이
실제가 없는 줄 알 것이며
그 실제의 지혜에 의지하여
모든 법의 허망함과 진실임을 알지로다.
이런 이치 때문에, 보살은 온갖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며 중생은 그 참 모습[實體]이 없는 줄 안다.
만약 이와 같다면,
온갖 세간의 마음과 의식은 모두 허망한 분별이며,
그 보살의 마음은 온갖 법의 실제에 평등하고 걸림이 없어서 지혜와 행은 곧 처음의 마음[初心]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이라 한다.
그 때문에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가 범부 자리를 보지 아니함은
그 바탕이 공(空)한 까닭이리니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저 범부 자리를 뛰어넘는다 하셨다.
성인의 법을 멀리 여의고
몸에 대한 소견 등에 물들고 집착하며
다섯 가지 욕심의 자량[資生]에 머문지라
그 때문에 범부인 사람이라 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자리’라 함은 그곳에서 범부를 내는 것이므로 이를 ‘범부 자리’라 한다.
이는 바로 삼계 중에서 번뇌에 얽매인 곳이어서 번뇌에 의지하여 머물러서 나므로 이를 범부의 자리라 한다.
그러므로 그는 처음 마음에서 삼계가 모두 공(空)한 것으로 보고 한 법의 형상도 일으키지 않으며,
그 한 법의 형상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온갖 처소에 낢을 원하지 않으며,
사랑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다스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언제나 고요한 법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나니,
이런 이치 때문에 ‘그 보살은 범부의 자리를 뛰어넘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게송으로 말하겠다.
법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공하고
공하기 때문에 짓는 일이 없으며
온갖 형상을 여의기 때문에
지혜로운 이는 구하는 것이 없다.
‘보살의 자리에 들어간다’ 함을 게송으로 말하겠다.
공을 곧 보리(菩提)라고 하나니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번뇌의 병으로써
벽지불의 자리에 떨어지고
성문의 지위를 취득한다 하셨다.
‘공을 곧 보리라고 한다’ 함은 사실대로 중생이 허공인 것인 줄 깨달아 앎을 보리라고 하나니,
그 때문에 거룩한 분 무진의보살은 4념처(念處)에서 말하였다.
“모든 보살마하살이 법을 닦고 살필 때에, 만약 온갖 법이 공, 형상 없음[無相], 소원 없음[無願], 행이 없음[無行], 남이 없음[無生], 일어남이 없음[無起]을 여의고 12인연을 여의었다고 보면 사실대로의 깨달음이라 말하지 못한다.
만약 적은 법이라도 공, 형상 없음, 소원 없음, 행이 없음, 남이 없음, 일어남이 없음을 여의고 12인연을 여의었다고 보지 않으면, 보살로서 이와 같이 일체 중생은 그 참 모습이 없는 것으로 깨달아 안 것이다. 이를 사실대로의 깨달음이라 한다.”
그러므로 게송으로 말하기를
‘곧 공(空)을 보리(菩提)라고 한다’고 하였다.
만약 초지 보살로서 일체 중생들이 공한 것인 줄 깨달아 알고서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을 버리고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를 취득한다면, 이것은 곧 초지 보살로서 다스려야 할 번뇌라고 하리라.
그 때문에 게송으로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번뇌의 병으로써 벽지불의 자리에 떨어지고 성문의 지위를 취득한다 하셨다’고 하였다.
또 다시 게송으로 말하겠다.
공을 알고 두 가지 치우침[二邊]을 여의면
두 가지 물듦의 열반이 없으리니
열반의 물듦이 없음으로써
부처님께서는 보살의 자리라고 하셨다.
‘공을 알고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읜다’ 함의 이 뜻은 무엇인가?
여래께서 『법인경(法印經)』에서 사리불(舍利弗)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차별이 없는 법이라 함은 곧 공임을 이르느니라.’
사리불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말씀하시는 공이라 함은, 이는 무엇을 말씀하시나이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말하고 있는 공이라 하는 것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만약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라면 그는 표시할 수가 없는 것이며,
만약 표시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는 세간이 아니고 세간을 벗어난 것도 아니다.
세간이 아니고 세간을 벗어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공이라 말하느니라.’”
만약 이와 같이 공을 환히 알게 되면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었다고 하며,
보살이 만약 그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면 번뇌에 떨어지지도 않고 성문과 벽지불 등의 두 가지 열반을 취득하지도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번뇌의 병으로써’라고 함은 다른 자리의 형상을 취득하기 때문이다.
다른 자리의 형상을 취득한다 함은 성문과 벽지불 등의 다른 자리의 형상을 취득한다는 것이며, 또한 중생을 이롭게 함을 버리는 것이라고도 한다.
함이 없음[無爲]의 열반을 취득하기 때문이며, 또 부처님의 보리를 방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시 다른 뜻도 있다.
번뇌의 병이 없다 함은 번뇌의 병을 떠났기 때문이니, 그가 2승(乘)의 열반을 취득하지 않고 본래 서원한 힘에 의지하여 중생들 이롭게 함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와 같다면 2승의 병이 없고 번뇌의 병도 없으므로 사실대로 온갖 법의 공(空)을 닦고 행하리니, 이를 모든 보살마하살이 보살의 자리에 들어간다고 한다.
온갖 번뇌를 멀리 여의고 온갖 다스릴 법[對治法]을 멀리 여읠 수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보살은 두 가지 행이 없고 본래 서원한 힘에 의지하여 중생들 이롭게 함을 버리지 않으며,
그 때문에 성문과 벽지불의 자리에 떨어지지 않고 세간의 번뇌에 물듦을 받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 등의 가장 어려운 훌륭한 일이다.
비록 일체 중생들을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중생을 위하여 모든 행을 닦고 행하므로,
이와 같은 일은 생각할 수도 없고 말로 할 수도 없으며 온갖 세간에서는 깨달아 알 수도 없고 제일의 있기 드문 일로서 온갖 성문과 벽지불 등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치 때문에, 용수보살마하살의 『집보리공덕론(集菩提功德論)』에서 게송으로 말씀하였다.
이는 으뜸가고 있기 드문 일로서
첫째이며 불가사의하나니
보살은 그들을 위해 모든 행을 행하나
중생들을 보지 아니하느니라.
여래께서도 모든 보살마하살을 찬탄하기 위하여 사실대로 있기 드문 공덕을 말씀하셨나니, 경전 중의 말씀과 같다.
“보살마하살에게 네 가지 진실한 공덕이 있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 공(空)을 믿고 알 수 있으며 또한 인과도 믿음이며,
둘째 온갖 법에는 나[我]가 없음을 알고서 중생들에게 사랑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킴이며,
셋째 깊이 열반을 즐기면서 나고 죽음에 노닒이며,
넷째 짓는 것과 하는 일이 모두 중생을 위한 것이지만 과보를 구하지 않는 것이니라.”
만약 이와 같은 이면, 곧 부처님 집에 태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게송으로 말하겠다.
보살마하살은
모든 번뇌를 여읨으로써
곧 보살의 지위를 증득하나니
그러므로 부처님의 집에 태어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또 ‘부처님의 집’이라 함은 어떠한 법을 행하면 여래의 집에 태어나게 되는가?
번뇌를 여의기 때문이며, 공의 행을 알기 때문이며, 스스로의 지위를 알기 때문이며, 또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을 짓기 때문이며, 행을 헷갈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법을 얻으면 보살마하살로서 부처님 집에 태어나게 된다고 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여래의 집이란
방편반야(方便般若)를 말하는 것으로서
보살은 이 집에 태어나게 되나니
그러므로 싫어할 수 없다.
이 뜻은 무엇인가?
방편이라 함은, 간략히 말해서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반야라 함은, 이른바 온갖 법을 취득하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법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집이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방편과 반야에 의하여 나고 방편과 반야의 두 가지 법에 포섭되기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세간에 태어나 있으면서도 진실로 번뇌의 업에 의하여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와 같다면, 보살마하살은 헐뜯거나 싫어할 수 없으며 온갖 하늘 등의 꾸짖을 수 있는 법은 모두 다 멀리 여의었으므로 부처님의 훌륭한 집에 태어난다.
이런 이치 때문에, 성바지가 높고 귀하여서 헐뜯거나 싫어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여래의 수다라에서 바라문을 위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하늘과 사람과 건달바와
용과 야차며 날짐승들의
이와 같은 따위의 모든 업은
모두 다 이미 다하여 없어졌다.
그 번뇌가 흩어지고 다하여 없음은
마치 연꽃이 물들지 않음 같나니
만약 이런 줄을 알 수 있다면
욕심에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으리라.
이와 같은 보살마하살을 참된 부처님의 제자라고 하며, 하늘 따위거나 외도의 제자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게송으로 말하겠다.
보살이 실제(實際)를 알고
그리고 바라밀(波羅蜜)을 닦으며
샘[漏]이 없는 길을 얻음으로써
그 때문에 세간을 넘어 벗어나게 된다.
‘보살이 실제를 안다’ 함은 이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온갖 법은 모두 다 고요함을 밝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여래께서는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온갖 법은 바탕이 없고
진실로 모든 일이 없음으로써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실제라고 이름할 수 있느니라.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은 온갖 법에 바탕이 없어서 참된 실제임을 아나니, 반야바라밀로써 끊는 길의 행을 알고, 다섯 가지 바라밀로써 방편과 공덕의 길을 안다.
이와 같은 보살마하살은 이 공덕과 지혜로써 부처님의 보리를 이룰 수가 있고 모든 번뇌를 다할 수가 있고 중생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
또, 모든 바라밀을 닦고 그대로의 실제를 알기도 한다.
어떻게 아는가?
보시한 이와 받는 이와 재물의 세 가지 법을 보지 않기 때문에 깨끗한 모든 바라밀을 닦고 행하며,
보살이 이와 같이 실제를 닦고 행하므로 샘이 없으며, 샘이 없기 때문에 온갖 세간의 길을 뛰어넘어 벗어난다.
그러므로 게송으로 말하겠다.
분별과 세간의 행이며
번뇌의 빽빽한 숲 속에서
세간의 지위를 잡아서 냄이
바로 세간을 벗어나는 길에 들어감이다.
‘분별과 세간의 행’이라 함은 간락하게 두 가지 분별이 있다.
첫째는 실제대로 분별함[實分別]이니, ‘빛깔은 바로 볼 수 있는 형상이다’라고 하는 이와 같은 따위이며,
둘째는 더 낫게 분별함[勝分別]이니, 곧 ‘그 빛깔 중에는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희다’고 하는 따위이다.
‘세간’이라 함은, 곧 다섯 가지 쌓임[五陰]이다.
‘번뇌의 빽빽한 숲’이라 함은 깊고 험하고 검고 캄캄하고 두렵고 무서울 만한 데로서 자세히 살펴볼 수도 없고 보기가 어렵고 알기가 어려운 데다.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자체로 분별하고 더 낫게 분별하고 다섯 가지 쌓임으로 분별함을 자세히 살피되,
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일 중에서 집착하지 않고 생각하기를
‘나는 어떻게 중생들에게 알게 하여야 할까?’ 라고 한다.
그러므로 게송으로 말하겠다.
사실대로 온갖 법을 알되
실제로 더 낫게 쌓임으로 하나다 둘이다 라고 알며
중생들의 일을 보지 않으면서
어떻게 중생들을 교화할까 한다.
보살마하살은
샘이 없는 지혜[無漏智]를 닦고 행하며
그리고 공덕의 행으로써
세간을 벗어나는 길에 나아간다.
그 때문에 보살은 세간을 벗어나는 길에 들게 된다.
[문] 어떻게 보살의 법 중에 잘 머무르는가?
[답] 게송으로 말하겠다.
보살의 모든 자리에 들어가
이미 그 법 중에 편안히 머물러
신통과 자재함에 의지하여서
일체 중생들을 교화하느니라.
‘보살의 모든 자리에 들어간다’ 함은 아래 경전에서의 말씀과 같이, 지(地)에서 지로 옮기어 가는 것을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을 교화한다’ 함은 아래 경전에서의 말씀과 같이, 백 가지 삼매[三昧]를 얻고 한량없는 백천만억 나유타 겁에 이르기까지 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재함을 얻는다’ 함은 말대로의 갖가지 공덕을 어떠한 때에 어떠한 법으로 어떠한 자재함을 어떻게 성취하며 어떠한 행에 종사하느냐 하는 것이다.
모든 자재함을 얻으면 온갖 부처님 법의 종자와 이치에 물러나지 않으며, 온갖 부처님 법을 성취하기 때문에 보살의 법 중에 잘 머무른다고 한다.
[문] 어떻게 보살의 바른 처소에 잘 머무르는가?
[답] 게송으로 말하겠다.
한때에 모든 부처님의 곁에서
듣고 지니고 생각하고 닦고 말하며
행하고 알며 뜻이 성취하고
바르게 깨달으며 공양하는 따위이니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법을 닦고 행하면
이를 보살의 바른 처소 중에서
편안히 머무른다고 한다.
그 때문에 경전에서 ‘보살의 바른 처소에 잘 머무른다’고 하셨다.
[문] 어떻게 3세의 평등한 진여의 법 중에 들어가는가?
[답] 모든 부처님의 보리를 알고
부처님과 보살의 행을 알며
부처님과 3세가 공(空)한 줄 알면
이것을 뜻으로 잘 들었다[入] 하리라.
이 뜻은 무엇인가?
일체 3세 부처님들의 법신(法身)이 평등함을 안다는 것이다.
또 다시, 모든 부처님들은 육신[色身]에 의지하여 알 수 있기 때문에 온갖 부처님과 보살의 행을 닦고 행하며,
온갖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법은 다 인연으로부터 화합하여 생기고 그 참 모습이 없다 함을 아는 것이다.
‘뜻으로 잘 들었다’ 함은 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3세의 모든 법은 평등하여 둘이 없으므로, 사실대로 한 맛[一味]이며 똑같은 맛인 줄 알면 무너뜨리지 않고 들게 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3세의 평등한 진여의 법 중에 드느니라”고 하셨다.
[문] 어떻게 여래의 종자 중에서 마지막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끝내 마치는가?
[답] 게송으로 말하겠다.
보살이 번뇌를 깨끗이 하고
중생의 마음을 깨끗이 하며
큰 자비를 완전히 갖추면
끝내 보리를 이루어 마치리라.
‘보살이 번뇌를 깨끗이 한다’ 함의 이 뜻은 무엇인가?
초지에서 다스려야 할 몸에 대한 소견 등의 번뇌는 견도(見道)할 때에 그 안에서 모두 다 멀리 여의기 때문에 그 견도하는 가운데서 번뇌를 멀리 여읜다.
이 앞에서 말한 온갖 법이 3세에 평등함과 여실(如實)을 말하는 데서 말한 것과 같다.
‘중생의 마음을 깨끗이 한다’ 함은 아래 경전에서의 말씀인 ‘찰나 동안에 백 중생을 교화하며, 또 서원의 힘으로써 자재하고 훌륭하다’ 함에 이르기까지의, 이와 같은 등이다.
교화하는 힘에 의하여 모든 번뇌를 깨끗이 하기 때문이며 얻기 때문이니,
아래의 경전에서 말씀하되
“그러므로 나는 먼저 선법에 머물러야 하며,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법에 머무르게 하여야겠다”고 하였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사람이 스스로가 선함을 행하지 않고 선한 행을 갖추지 않으면서 다른 이를 위하여 법을 말하며 선법에 머무르게 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
크게 사랑하고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얻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위의 경전에서 말씀하되
‘이 마음은 크게 가엾이 여기는 것으로써 우두머리를 삼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보살은 스스로가 번뇌를 깨끗이 하고 중생의 마음을 깨끗이 하며 큰 자비를 갖추면,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며 반드시 큰 보리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부처님의 제자 금강장(金剛藏)께서
열 가지 법의 처음 마음을 말했나니
바로 부처님의 보리라 이름하며
마침내 부처님 도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거룩한 금강장보살이 “이 열 가지 법은 보살 초지의 샘이 없는 보리심이다”라고 말하였나니,
곧 이 열 가지 마음은 부처님의 보리라고 이름하기 때문에 마지막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
또 게송으로 말하겠다.
비유하면 마치 좋은 종자가
줄기와 잎 따위를 낼 수 있는 것처럼
그와 같아서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의 법과 다르지 않다.
이 뜻은 무엇인가?
처음 증득한 법의 마음이 온갖 부처님 법에서 종자가 되며, 초지의 법이 온갖 부처님의 법에게 원인[因]이 되기 때문이다.
또 게송으로 말하겠다.
초지의 마음이 더욱 자라남을
부처님께서는 모든 지(地)가 된다고 하셨으며
최묘승(最妙勝)보살은
초승달로써 비유를 삼았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문수사리문보리경(文殊師利問菩提經)』에서 게송으로 말씀한 것과 같다.
비유하면 마치 초승달이
더욱 자라서 곧 만월이 된 것처럼
그와 같아서 환희지(歡喜地)가
더욱 자라서 곧 부처님이 된다.
이와 같은 열 가지 구절의 이치에 다른 논사들은 해석이 다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부정취 보살에게 정정취를 구하게 하기 위하여 이 수다라를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