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식보생론 제1권
1. 유식론 개관
유식이십론[0], 개요 대승에서 3계(界)는 오직 식(識)뿐이라고 안립한다.(1.1) 경전에서 3계는 오직 마음[心]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1.2) 심(心)ㆍ의(意)ㆍ식(識) 및 요별[了]은 명칭의 차이이다.(1.3) 여기서 ‘마음[心]’의 의미는 심소(心所)도 포함한다.(1.4) ‘오직[唯]’이란 외부대상만을 부정하며, 상응법[心所]은 부정하지 않는다. 내부의 식이 일어날 때에 외부대상으로 사현(似現)한다. 현기증이나 눈에 백태가 있는 사람이 머리털이나 파리 등을 보는 것과 같다. 여기에는 진정한 대상이 전혀 없다. 곧 이 취지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이 비판을 시설한다.(1.5) |
1.1. 대승에서 3계는 오직 식뿐이다
논(論)36)에서 말하기를
“대승에 의지해서 말한다면, 삼계(三界)의 성립은 오직 식(識)뿐이다”37)라고 하였다.
해석해서 말하리라.
[대승]
또 무슨 뜻에서, 대뜸 대승이라 하였는가?
본래 보살께서 온갖 생명을 건지려는 큰마음을 품고, 금지한 계법[禁戒]을 굳게 지키면서, 온갖 종류의 생명에게 고루 미치어 유정(有情:중생)들을 건진다.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매우 훌륭하고 흠이 없는 행을 이루었다.
지극히 미묘한 길상(吉祥)은, 모든 부처님[善逝]께서 가신 길이며, 또 따라가야 할 한없이 큰길이다. 아울러 이룩한 결과도 지극히 높고 원만하니, 부처님 외에 알 수 없는 경지다. 이 뜻을 근거로 대승이라고 이름하였다.
경에서 말한 대로
“대승은 보리살타(菩提薩埵)가 가야 할 길이며, 부처님의 훌륭한 과위(果位)”이기도 하다.
[유식관]
이 대승을 이루기 위하여 유식관(唯識觀)38)을 닦는 것이다.
유식관은 흠잡을 데 없는 방편의 바른 길이다.
이 모든 것을 위하여, 저 방편을 밝혔으니, 모든 경에는 가지가지 행상(行相)39)으로 널리 설한 내용이 들어 있다.
마치 흙ㆍ물ㆍ불ㆍ바람과 그에 딸린 물건들과 같다. 그 물건의 종류는 알 수 없이 많고, 방위와 장소도 한없이 넓다.
이로 인하여 마음에서 모양이 나타남을 살펴 알고, 드디어 모든 곳에서 바깥 모양을 버리고, 기쁨과 슬픔 따위를 멀리 여읜다. 또 넓은 존재의 바다[有海]에는 시끄러움과 고요함의 차별이 없음을 관찰하고, 저 작은 길을 버린다.
대승의 길을 포기하였거나, 온갖 존재를 즐겨 집착한 무리라면, 대승의 길을 마치 높고 험한 벼랑을 보듯 깊이 두려움을 일으키리라.
올바르게 중도(中道)로 나아가서, 만일 단지 이것이 자기 마음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안다면, 한량없는 양식[無邊資糧]을 쉽게 쌓아 모으게 된다.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으니, 마치 작은 노력으로 큰일을 이룰 수 있는 것과 같고, 부처님이 밟아간 길도 오히려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으리라.
이러한 이치에서 마음속의 소원은 마땅히 뚜렷하게 채워질 수 있어서, 마음을 따라 진행되어 간다.
비록 인정한 바와 같이 바깥 일이 있더라도, 마음속의 의욕이 진실하고 소중한 큰 서원의 힘이기 때문에, 무변한 6바라밀[六度]의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다.
만일 이와 다르다면 베풀 수 있는 물건을 다 가지고 보시를 행할지라도, 베풀어야 할 온갖 생명에게 어찌 고루 미치어 그들을 기쁘게 하며, 구하는 마음을 따라 맞출 수 있겠는가?
이것은 문득 끝없는 경계를 지으리니, 베푸는 일은 끝날 기약이 없으리라.
또다시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계율 등을 가지고, 지장이 없이 지킬 수 있는 중생들에게, 저들의 욕구를 따라 다 뜻에 부합하도록 저들의 희망하는 것을 들어 바르게 보시 등을 행한다면, 빠르게 곧 바른 깨달음의 양식을 거둬 모으리라.
[바깥 경계가 없다]
이에 따르면 단지 자신의 마음뿐이니, 또 어찌 바깥 경계에서 찾으랴?
만일 바깥 일을 인정한다면, 역시 바른 이치와 뜻이 서로 어긋난다. 그러므로 분명히 알라. 경계는 이 훌륭하고 미묘함을 성립시키지 못한다.
만일 자기 마음을 의지하여, 허망하게 분별을 낸다면, 색 등의 견해를 지어 몸이 나라는 생각[身見] 등을 일으킨다.
실제로는 자기 이외의 모든 유정(有情)을 상대로, 인식의 대상(所緣)을 짓지 않음이 없어야만, 오염(汚染)에서 벗어나는 근거가 생기리라.
[無實不待外諸有情, 而作所緣, 因生離染.]
그러나 보시 등에서 각기 그 일을 따라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니, 참으로 식(識) 이외에 경계의 일을 빌리지 않는다.
만일 식 외에 다른 경계가 있다고 한다면, 결국 경계에 의지하여 온갖 번뇌를 일으킨다. 이미 꽉 붙들려 얽매였으니 따라 구르면서 머물게 된다.
이 잘못을 보아야만 벗어날 마음이 생겨서, 깊이 싫어하며 버릴 생각을 품으리라.
큰 깨달음을 바라지 않는다면, 이미 유정세간(有情世間)을 버린 것이니, 어찌 큰 이로움을 베풀려고 하겠는가?
모든 중생을 거둬 주지 않기 때문에 작은 마음으로 자기만을 건질 뿐이요, 큰 행을 이루기는 어려우리라.
그러니 모든 보살[覺情]들은 이를 의지하여 변해야만, 비로소 보리(菩提)의 양식을 길러낼 수 있다. 객진(客塵)40)의 조작된 일[有爲之事]을, 마음속에 싫어하여 등지기 때문에, 조작됨이 없는 법[無爲法]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작됨이 없는 법 자체가 더 이상 자라나지 않기 때문에, 그 외 다른 소승의 적멸[小寂]을 구한 결과, 치우쳐 한쪽만을 깨닫게 되고. 위없는 깨달음의 산은 무너지고 만다.
만일 바깥 경계를 벗어난다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모두 없어져서, 바른 깨달음은 쉽게 이뤄지리라.
[크게 가엾게 여김]
크게 가엾게 여김[大悲]을 항상 마음속에 품었다면, 어찌 보리살타의 최고 과위(果位)가 비로소 성취되지 않으랴? 유식(唯識)이란 말도 곧 어긋나며 해롭다고 하리라.
크게 가엾게 여김이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의탁해서 인연을 맺는 성질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바깥 경계를 없애 버리고, 단지 자신의 식(識)만을 인연할 뿐이라면, 이야말로 곧 자신만을 가엾게 여김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남을 이롭게 하려는 뜻을 품어야만, 큰 행이 비로소 세워지는데도, 오직 자기 몸만을 돌아볼 뿐이라면, 중생을 널리 제도하는 이치에 어긋나리라.
비록 바른 책임[雅責]을 진술하더라도, 이로 인해서 허물이 없어지리라. 밖의 상속(相續)을 빌려서, 더욱 불어나는 연[增上緣]이 되면, 자기의 식(識) 가운데에서 중생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를 연(緣)으로 경계를 삼고, 중생의 경계에 크게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서 널리 이롭게 한다면, 이는 어긋나지 않는다.
결정해서 이와 같이 마땅히 믿는 마음을 일으켜야 하리라. 가령 저 물질의 모양이나 소리 등의 경계에서 낱낱이 추구해 보아도, 거기에는 ‘나’가 없다. 냄새ㆍ맛ㆍ촉각ㆍ법을 다 모아 찾아보아도 역시 ‘나’는 없다. 그렇지만 ‘나’를 찾는 본래의 성품은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然而本性, 不可捨故.]
이미 똑같이 인정한 무아(無我)로 종(宗)을 삼았다면, 앞으로 어디에다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겠는가?
[뒤바뀜, 허망한 집착]
세상에서 공동으로 인정하는 그 감각의 허망한 집착[情妄執]을 인식 대상의 모양[所緣相]으로 삼고, 그것을 중생[有情]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니 또한 감각으로 허망하게 집착한 일을, 곧 바깥 경계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리라.
이를 근거로 마땅히 알아야 하리니, 가령 속으로는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이치로는 반드시 그렇다고 인정해야 하리라.
단지 자기의 식(識)에서만 유정의 형상[有情相]이 나타날 뿐이며, 이 일을 의지하여 색의 모양[色相]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바깥 경계가 없음을 알아야만 한다.
만일 이 식(識)을 떠난다면 결코 얻을 수 없으니, 이는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뒤바뀜이란 무엇인가?
원래 바깥 경계가 없으나, 보고는 실제의 사물로 여겼으니, 허망하게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끝내는 위없이 높은 경지를 이룰 수 있다고 해야, 이치에 맞다,
유식(唯識)의 견해는 진실하기 때문에 위없이 높은 경지[彼]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서, 깊이 도리에 부합하게 된다.
36)
이 논은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을 말한다. 이하 『이십론(二十論)』으로 약칭한다.
37)
『이십론』이 경전(經典)의 삼계유심(三界唯心)을 근거로 대승(大乘)의 삼계유식(三界唯識)을 세운 데 대해, 본서는 그 뜻을 설명하려고 첫머리를 열었다. 여기서부터『이십론』의 “대승의 삼계유식을 안립하노라[安立大乘三界唯識]”에 대한 해석이 시작된다.
38)
유식삼성관(唯識三性觀)이라고도 하는데, 삼성(三性: 遍計所執性ㆍ依他起性ㆍ圓成實性)을 유식으로 관하여 체득한다는 뜻이다.
39)
『유식론(唯識論)』 권2에는 “식의 판별(判別)은 행상(行相) 때문”이라 하였고,
또 『성유식술기(成唯識述記)』3본(本)에는 “마음에 인식의 대상이 떠오름을 행상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구사론광기(俱舍論光記)』제1에는 “심왕(心王)과 심소(心所)의 체(體)가 청정하면, 앞경계를 대할 때 마음이 작용하지 않더라도, 법대로 자유롭게 영상(影像)이 드러나니, 마치 맑은 호수나 밝은 거울에 비치는 그림자와 같다. 이를 행상이라 한다”고 하였다.
곧 이 마음속의 영상을 표현한 말의 모임을 행상이라고 한다.
40)
객진번뇌(客塵煩惱)로서, 번뇌를 나그네[客]와 티끌[塵]에 비유, 허망하여 실재하지 않음을 나타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