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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로 성경 읽기 3 - 예수님의 광야 시험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누가복음 4장 1절부터 13절입니다.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눅 4:1-13)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로마서로 성경읽기 세 번째입니다. 제목은 “예수님의 광야 시험”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광야에서의 세 가지 시험을 보면서 로마서의 자세한 복음의 논리를 기반으로 그 시험의 성격과 마귀를 물리치신 예수님의 대답의 의미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히브리서 4장 15절을 보시지요.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도 우리들이 받은 시험과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죄는 없으셨다, 즉 우리와는 달리 그 유혹에 빠지시지는 않으셨다는 말씀이지요. 오늘 본문과 이 말씀에서 시험은 모두 temptation, 유혹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시험으로 번역된 단어가 두 개 있지요. 페이라조는 temptation, 유혹의 의미이고 도키마조는 test, trial, prove 등 연단하다, 시험해서 증명하다의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과 여기서는 모두 페이라조입니다.
예수님도 육을 가지고 태어나셔서 완전한 신이시지만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지요. 그래서 완전한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받으시는데 우리는 그 유혹에 번번이 넘어갔다가 회개하고, 넘어갔다가 회개하고 하는데 예수님은 완벽하셔서 유혹에 넘어가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인 광야에서 시험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세 가지 시험들을 하나씩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서론 격으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받으신 이 세 가지 시험은 모든 크리스찬이 받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3절의 첫 번째 시험에서 마귀가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하는 것을 두고 권능으로 메시야임을 확증해보라는 시험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보다는 먹을 것을 구해야만 하는 모든 크리스찬들이 받는 유혹이라고 보는 견해가 더 합당합니다. 여기서 마귀가 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메시아의 의미보다는 더 넓게 하나님의 자녀의 의미로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세 가지 유혹이 모두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한 유혹이 아니고 모든 크리스찬을 향한 세 가지 유혹으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포함해서 육체를 가진 모든 인간이 마귀로부터 받는 세 가지 유혹과 그것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처하시는가를 보여주시는 계시의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항상 다가오는 이 세 가지 유혹을 예수님은 어떻게 물리치셨는가로 그 모범을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세 가지 유혹에 대한 예수님의 대처는 우리가 목표로 삼고 소망해야 하는 우리의 모습, 즉 새로운 피조물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는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라는 말씀에 대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광야로 예수님을 몰고 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도록 한 것뿐만 아니라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동안 성령께서 계속 같이 계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일은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일입니다. 어떤 장면이 떠오르세요? 욥이 떠오르지요. 욥 경우에 사단이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들어가 당당히 일원으로 참석을 해서 의견을 내고 하나님의 허락을 얻어서 욥을 시험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성령께서 마귀로 하여금 예수님을 유혹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 부분은 제가 아직 성경에서 명확하게 정리가 안돼서 설교를 못하고 있는 부분인데 언젠가는 하게 되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에서 추방하실 때 그 관리를 누군가에게 위탁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거지요. 인간을 간에 갇히고 옥에 갇힌 자들이라고 이사야 42장 7절에서 표현하시는데 마귀가 옥의 간수일 수 있습니다. 욥기와 오늘 본문에서 사단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로 등장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석은 요한계시록 20장의 사단의 멸망과 맞지 않지요. 그래서 제가 아직 설교를 못하고 있는 부분인데 우리가 같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기까지만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앞으로의 과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줄을 믿습니다. 끝까지 안 가르쳐주시면 또 안 가르쳐 주시나보다 하고 아멘하면 되고요. 이 부분에 대해서 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본론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 번째는 마귀의 유혹의 순서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오늘 누가복음을 본문으로 한 이유는 마태복음 4장의 경우와 유혹의 순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돌멩이로 떡을 만들라는 유혹은 모두 첫 번째 유혹이지만 "모든 권세를 줄 테니 나에게 경배하라"고 하는 유혹이 여기서는 두 번째 유혹인데 마태복음에서는 마지막 유혹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마지막 유혹인 "뛰어 내리면 하나님께서 사자로 하여금 받쳐주시지 않겠느냐"는 유혹은 마태복음에서는 두 번째 유혹으로 되어 있어요. 어느 쪽이 옳으냐로 우리가 접근하면 안 되구요, 로마서로 성경 읽기라는 차원에서 로마서의 논리로 이 장면을 이해하기에는 누가복음의 순서가 더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누가복음을 본문으로 선택했습니다.
네 번째는 구약성경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주리신 것에서 어떤 장면이 연상되세요? 첫째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금식한 것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고나서 광야에서 40년 동안 헤맸던 장면도 연상이 되는데 오늘 본문과 밀접하게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귀에 대한 세 가지 대답이 모두 신명기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신명기는 40년 광야생활을 끝내고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가 이스라엘 족속에게 당부한 말씀이지요. 자신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고별사로 언급한 내용의 기록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40년 광야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앞으로의 일에 대한 권면을 하지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 중에서 하나씩을 인용해서 마귀에게 답변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신명기가 기록된 배경을 먼저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건져내서 가나안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시고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40년간 연단을 시키십니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유혹에 빠지고 시험에 들고 죄를 짓고 하면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결국 스무 살이 안 되어서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과 광야에서 새로이 태어난 사람들만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옛사람이 제거되고 새사람들만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상징이라고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은 신약 시대에 새 언약이 성취되면서 벌어질 일들에 대한 Typology, 모형입니다. 상징으로써 제시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 것이지요.
왜 구약과 신약이 그렇게 구성이 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상상을 해 봅니다. 신약 성경의 약속과 그 약속이 성취된 사도 바울의 증언의 논리들은 논리 자체는 인간의 논리이고 그 언어는 인간의 언어이지만 그 내용은 신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약 성경을 볼 때 그 신비한 약속에 대해 현실감이 잘 안 옵니다. 사도 바울이 체험한 그 신비 체험, 즉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눈이 열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임하고 베드로 사도가 표현한 신의 성품이 임하고 하는 이 신비한 일이 실제로 체험이 되지 않으면 신약 성경의 말씀이 감이 잘 안 옵니다. 그러면서 대개 윤리도덕에 대한 말씀으로 오해를 합니다. 인격이 아주 성숙해지는 것으로 보게 된단 말이지요. 이 신약 성경의 약속을 성령의 열매에 대한 신비 체험이 없으면 신약 성경은 윤리도덕 교과서로만 보입니다. 이것이 서구 신학의 가장 심각한 오류인데 새언약의 말씀이 윤리도덕이 아니고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신비한 일이라는 것을 느끼기 어렵지요. 그 신비가 현실화된 체험이 없으면 슈바이처 같은 사람의 눈에는 뜬 구름 잡는 이야기로 보이고 일반 신학자들 눈에는 ‘아, 윤리도덕 얘기구나. 고매한 성품 얘기구나’ 이렇게 보인다는 말이지요.
그 신비가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례들로 모형으로 제시되는 것으로서 구약 성경에 접근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그게 다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측면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게 보면 구약 성경을 봄으로써 신약 성경을 이해하는데 우리가 큰 도움을 받을 수가 있고 동시에 신약 성경을 봄으로써 구약 성경의 현실에서 벌어진 전쟁이라든가 민족의 대이동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또 이해할 수 있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두 성경의 내용이 우리 안에서 결합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지요.
이제 본문의 세 가지 시험과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씩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3절과 4절입니다.
(눅 4:3-4)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인용하신 신명기의 장면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8장 1절에서 4절입니다.
(신 8:1-4)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예수님이 인용하신 것인데 이 말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의 연단은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기간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십자가 위에서 파쎄마, 즉 몸부림을 치는 과정으로 설명했지요. 이스라엘에게 광야 40년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몸부림의 과정입니다. 옛사람이 새사람으로 교체되는 과정이지요. 옛사람식의 삶에서 새사람식의 삶으로 삶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 삶 자체가 바뀐 것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는 바람과 같은 자로 바뀌게 된다고 비유로 설명을 하셨고 사도 바울은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바뀐다, 싸르크스를 섬기던 자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바뀌게 된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여기서 이사야 55장을 보고 말씀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55장 1절부터 3절까지입니다.
(사 55:1-3)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옛사람이 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옛사람이 자기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고자 애를 쓰는 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왜 헛된 것을 그리 구하느냐? 앞으로는 내가 주고자 하는 것을 구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옛사람과 새사람의 차이점입니다. 구하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옛사람이 구하는 것은 떡이고 새사람이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지요. 결국 광야에서 만나를 주시는 장면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눈에 불을 켜고 먹을 것을 찾을 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심으로써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6장 31절부터 33절까지를 보고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마 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떡으로 바꾸면 “어떻게 떡을 구할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필요한 떡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마귀가 40일을 굶으셔서 주리신 예수님에게 “배고프지 않느냐? 너는 지금 먹을 것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먹을 것에 집중하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즉 시급한 생존의 문제에 집중하라는 것이지요.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바로 지금까지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말씀들을 모두 합쳐 놓은 대답입니다. 옛사람은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서 살지만 새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위해서 산다는 말씀입니다. 떡은 자기 생존을 위해서 사는 삶을 상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삶의 목적이 다른 것이지요.
제가 대학 다닐 때인 30여 년 전만 해도 젊은이들 중에서 재테크라는 말을 감히 입에 담는 사람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주변에서 속물로 취급을 당하기 때문이지요. 얼마 전까지도 강남 졸부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한강 이남에서 과수원을 하고 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땅값이 올라서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이 말이 가진 뉘앙스는 돈벼락을 맞아서 돈은 많이 생겼는데 집안 문화고 전통이고 혈통이고 뼈대고 이런 것은 하나도 없이 완전히 저열한 인생이 갑자기 돈만 많이 생겼다는 것이지요. 멸시하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공직자들 청문회를 보니까 위장전입 안 한 사람들이 거의 없단 말이지요. 이 사람들이 모두 저와 비슷한 또래들인데 젊었을 당시 일반 사람들은 “강남 졸부, 재테크?, 이 속물들” 그러면서 자신을 고귀하게 여기면서 살았는데 그때 그 속물들이었다는 거지요. 당시에 위장전입하면서 땅 투기한 속물들이 그 사람들이 지금 장차관 후보들로 나오는 거예요. 청문회만 하면 전부 그 옛날 속물들이 청문회 대상으로 나온다는 말이지요.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야말로 아주 시대를 앞서 간 사람들이더라는 거지요. 지금은 재테크 이야기 안 하는 사람들이 누가 있습니까? 심지어 초등학교 아이들부터 재테크를 가르치자는 얘기까지 공공연히 하는 세상으로 바뀌었지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선각자였다는 겁니다. 어찌 보면 일반 사람들이 이제야 뒤늦게 자기 본능에 솔직해진 거지요. 그 당시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비교를 고위 공직자 후보로 나온 사람들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또 고소영 정권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요. 그래서 저는 ‘아! 저 사람들은 미리 성경을 깨달은 사람들이었구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배부른 돼지나 배고픈 소크라테스나 똑같은 옛사람일 뿐이라고 말씀하시거든요. 그것이 떡을 구하는 자들로 표현이 돼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떡을 부정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떡이 너희에게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떡은 하나님께서 기본적으로 주실 테니까 거기에 집중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라. 즉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실제로 구하는 삶을 살아라. 삶의 목적이 떡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으로 모티브가 완전히 바뀌는 것이 옛사람과 새사람의 구분인 것이지요. 그래서 마귀가 첫 번째 시험한 것이 예수님에 대한 시험이 아니고 모든 크리스찬에 대한 시험이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지요. 너희들이 생존하려면 떡이 필요하지 않느냐?
그런데 이 떡이 일용할 양식의 개념이 아닙니다. 이 떡은 무엇까지 포함되어 있는 떡이냐 하면 나 죽은 다음에 내 자식들이 먹을 떡까지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끝도 없이 끝도 없이 많은 떡입니다. 제 설교에서 항상 예로 등장하시는 이건희 회장님. 그렇게 돈이 많아도 눈에 불을 켜잖아요. 왜냐하면 자기 떡이 아직 작거든요. 그런 겁니다. 사람이 필요로 하는 떡은 거의 온 우주에 채워도 모자라는 양입니다. 끝없는 유혹이지요. “이러다간 너 굶어 죽어. 설혹 너는 어떻게 근근이 살지 몰라도 네 자식들이 나중에 굶어 죽어. 도대체 어떡하려고 그러니?” 그겁니다. 그 유혹이 우리에게 수시로 오는 유혹인데 아주 강력한 유혹입니다. 평생 따라오는 유혹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유혹에 대해서 떡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시는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렇다면 사업이니 직장이니 다 때려치우고 모두 신대원으로 가는 겁니까? 소위 사명을 받았다는 목사들 얘기 듣다보면 자기는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많이들 합니다. 가족이 다 굶어 죽을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산에 올라가서 소나무를 뿌리를 뽑을 때까지 기도했더니 까마귀가 먹을 걸 가져다주더라는 등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서 “봐라!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했더니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시더라” 하면서 아주 자랑스럽게 간증을 하는데 그건 대단히 큰 오해입니다. 그렇다면 평생토록 장막 짓는 일을 한 사도 바울은 믿음이 없어서 장막을 짓고 다녔던 거예요? 그게 아니고 사업을 하는 사람은 그 사업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은 그 직장에서 돈을 버는 것이 하나님이 나라와 의를 위하는 길이에요. 그러면 또 거기서 오류가 생기지요. 대표적인 오류가 칼빈 쪽 장로교가 이야기하는 calling, 즉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맞아. 이 세상 직업도 하나님이 주신 거야. 열심히 일해야지.” 그 논리의 혼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왜 이런 오류들이 생길까요?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종교행위만 할 뿐 실제 자기 인생은 가이사의 세계에 속해 있거든요. 그러니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 도리가 없는 것이지요. 엉뚱한 해석들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왜 사업을 하느냐?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연약한 형제자매들을 섬기는데 사용할 재물이 필요하니까 사업을 하는 겁니다. 직장을 왜 다니느냐? 안정적으로 봉급을 받아서 내 생명도 유지하고 내 활동자금도 확보를 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일하는데 쓰기 위해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고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봉급도 올라야 되니까 열심히 일해서 진급도 하고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걸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은 게 장로교의 그 소명이라는 개념입니다. 이건 속물도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 백성도 아니고 도대체 정체성이 의심스러운 그런 얘기를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이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때 “그렇다면 성직자가 되라는 이야기냐”라는 오해가 나오는 것이 바로 새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약속하시는 새사람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으니까 이 말씀을 보면서 “저는 이 말씀을 보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이 충격을 받고 곧장 다니던 직장을 버리고 신학교를 갔습니다”라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간증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의 구성원이 되어서 밖에 나가서는 어디서 무얼 하든지 자기가 속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사는 삶이 되는 것이지요. 삶의 모티브가 바뀌는 것입니다.
떡을 구해야 한다는 이 유혹은 우리 평생을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 떡은 무한정 필요합니다. 그 한없이 커지는 떡을 둘러싼 공포와 탐욕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게 가로막는 마귀의 유혹입니다. 우리가 회개를 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어도 다시 공포와 탐욕으로 휘둘리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막는 마귀의 유혹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단호히 막으시지요. 만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을 현실적인 모형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으면서 공포와 탐욕에서 해방되는 현실의 모습을 모형으로 제시하시는 계시지요.
히브리서가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예수님은 마귀의 이 유혹에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단호히 물리치시지요. 그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완전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도 여전히 In Christ와 Out of Christ를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갔다 회개하고, 다시 넘어갔다 회개하고 하는 것이지요. 유혹에 넘어갔을 때마다 죄의 열매가 맺힙니다. 하지만 그 죄의 열매를 최후 심판의 자리에서 없는 것으로 해 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입니다. 따라서 죄사함을 주시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는 현실에서의 약속이 아니고 오히려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하여 새사람으로 계속해서 변화되어 가면서 떡을 둘러싼 공포와 탐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점차 더욱 집중하게 변화되어 가는 것이 이 땅에서의 약속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유혹입니다. 누가복음 4장 5절부터입니다.
(눅 4:5-8)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것이 두 번째 유혹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단호한 대처입니다. 완벽한 대처지요. 첫 번째 유혹이 생존의 문제와 관련된 유혹이었던데 반해 이 두 번째 유혹은 번영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네게 주리라.” 무슨 수를 쓰던 번영을 갈구하라는 것이지요.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불교에서 인간의 욕망을 다섯 개로 구분을 하는데 생리적인 욕망인 식욕, 성욕, 수면욕 세 가지를 빼면 - 거기서 물론 성욕은 번영에 대한 욕망으로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만 - 재물욕과 명예욕을 꼽습니다. 상당히 깊은 통찰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통찰력도 필요 없어요. 성경에서 자세하게 설명해주시니까. 그런데 불교보다도 모르는 일들이 생기니까 너무너무 안타까운 거지요.
그런데 이 번영에 대한 유혹을 하면서 마귀가 좀 이상한 말을 합니다. 6절입니다.
(눅 4: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여기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요? 실제로는 다 하나님 것이고 자기는 빈털터리 주제에 거짓말로 예수님을 유혹하는 걸까요? 어떻게 보십니까, 이 말을? 성경에서 확인해야지요. 이 마귀 말이 맞는 말로 보이는 성경 구절이 있고 이 마귀 말이 거짓말로 보이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두 가지 다 보겠습니다. 먼저 요한일서 5장 18절과 19절입니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온 세상은 마귀의 수중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도 공중 권세 잡은 어둠의 영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이 마귀의 말이 맞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시편 24편 1절 보시지요.
(시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정반대의 말씀이지요? 아, 이건 구약이라 그런가?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6절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대로 인용합니다.
(고전 10: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그러면 두 번째 유혹을 하면서 마귀가 했던 말이 거짓말이 될 수도 있고 참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일서를 갖다 들이대면 마귀가 한 말이 참말이고, 시편과 시편을 인용한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말씀을 갖다 들이대면 마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지요.
제가 굳이 이런 모순되는 부분을 지금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성경 말씀 앞에서 지극히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성경을 꿰어 맞추기 시작하면 별 해괴한 결론들이 다 나옵니다. 일단 인간의 논리로 이 두 가지를 합치면 어떻게 될까요? ‘아,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마귀는 고용된 지배인인가 보다’라고 보면 모순이 풀리지요? 그러나 이 논리를 깨트리는 성경의 다른 말씀이 또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 말씀 앞에서 지극히 겸손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 부분에 대해선 지금은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하나님께서 더 허락하시면 다음에 더 깊은 진리를 우리가 알 수 있게 되겠지요.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선 마귀론 등 자료들을 예전에 좀 봤었어요. 그런데 전혀 답을 제시하는 주장은 보지 못했습니다. 아직 없는 걸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마귀의 두 번째 유혹은 번영에 대한 욕구를 건드리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유혹을 물리치시면서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4: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도 신명기에서 모세를 인용한 말씀입니다. 신명기 6장 10절부터 13절입니다.
(신 6:10-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번영을 이룰 것인데 그때 계속 여호와를 경외하고 섬겨야 한다는 모세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그 부요함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사용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지금 신명기 말씀을 이렇게 볼 때 예전엔 이 땅의 기름진 복에 대한 말씀으로 보았다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말씀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 Prosperity Theology, 즉 번영 신학이고 고지 신학도 있고 좀 더 교묘해진 것이 실용주의 기독교입니다. 이 사람들은 말하자면 마귀의 두 번째 유혹에 넘어간 크리스찬들입니다. 그 사람들 눈에는 지금 봉독한 말씀도 ‘아, 하나님을 경외하기만 하면 요단을 넘어 가나안에 들어가서 심지어 우리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도 얻고, 이거 그냥 온통 세상을 다 그냥 차지하게 해주신다는 말씀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번영과 관련된 구약 성경의 말씀들 앞에서 번영을 위한 새사람이냐, 새사람을 위한 번영이냐의 문제에 우리가 부닥치게 됩니다. 이것을 잘 구분하셔야 합니다. 고지 신학이나 번영 신학이 착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면 번영하게 된다는 논리에요. 하지만 그것은 성경과 정반대의 논리입니다. 성경의 논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새사람,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일을 시키시기 위해 군자금을 대주신다는 논리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뭡니까?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입니까? 그게 아니지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할 때 군자금이 필요하니까 군자금을 대주신다는 의미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의 번영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지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번영을 보장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푸른 초장 맑은 물가” 등의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으면 인생이 행복해진다는 말씀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어서 아주 묘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우리가 알지요.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고결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해서 하시는 것이지요.
구약 성경에서 표현되는 이스라엘의 번영, 다윗의 영광, 솔로몬의 영광 등은 새로운 피조물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사명을 감당할 때 그 하나님의 나라의 부족함 없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세계에서의 번영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번영에 대한 유혹으로 다가오는 마귀를 물리치며 말씀하시기를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배와 섬김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로마서를 볼 때 자세히 보았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영적 예배를 제가 합당한 섬김의 예라고 번역을 했었습니다. 여기서 영적이라는 말은 한글 성경이 전혀 근거도 없이 집어넣은 말이에요. 로기코스라는 형용사인데 reasonable, 합리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KJV가 reasonable service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reasonable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고 '합당한'이 더 정확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섬김은 종교 행위가 아니고 현실에서의 삶입니다. 라트레이아라는 단어를 씁니다. 반면에 경배는 프로스퀴네오인데 이것은 종교행위로써의 예배입니다. 예배도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실생활에서도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실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번영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크리스찬은 다 가난뱅이로 살라는 것이냐? 그렇지 않지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하는 사업은 번창하면 할수록 좋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힘을 실어주게 되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기업을 더 키우는 데에 매진하게 되지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내 기업을 성장시키는 일에 정주영 회장보다 더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매일 새벽 세시에 잠을 깼다고 하지요? 오늘 벌 돈 때문에 가슴이 뛰어서. 우리가 정주영 회장보다 더 열심을 내게 되는 것이지요.
두 번째 유혹과 예수님의 물리침, 번영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는 것, 이것이 우리의 평생의 과제입니다. 생존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번영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는 것이 우리 평생의 과제입니다. 예수님은 완벽하게 끝을 내셨지만 우리에게는 평생의 과제입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유혹을 보겠습니다. 9절부터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눅 4:9-13)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이 세 번째 유혹은 종교의 유혹입니다. 마귀가 여기서 처음으로 성경 구절을 두 군데나 동원을 합니다. “기록하였으되”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그리고 11절에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등 성경 구절을 동원합니다.
처음 그 두 가지 유혹은 가이사의 세계 사람들과 똑같이 생존과 번영을 갈망하는 인간의 본성을 타고 들어오는 유혹인데 반해 이 세 번째 유혹은 신앙생활을 타고 들어오는 유혹입니다. 종교적 유혹이지요. 이 종교적 유혹은 앞에서 번영 신학과 고지 신학의 예를 든 것처럼 이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겁니다. “나의 산성이시요 나의 방패시오” 등의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는 유혹인데 하나님은 나의 행복을 위해서 복무하신다고 생각하면서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행복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다.” 이것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조직 신학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도 나를 행복하게 해 주시고, 죽어서도 행복하게 해 주신다는 것이지요. 전도할 때 뭐라고들 전도합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데. 하나님만 믿어 봐. 아이구 답답해. 어서 같이 교회 가자.” 이게 다 뭡니까? 하나님은 내 비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지전능한 비서를 채용할 수 있는데 어째서 바보같이 교회를 안 나오느냐는 것이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게 다 같은 흐름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들에게선 떠나라고 그러시지요. 로마서 16장 17절과 18절입니다.
(롬 16:17-1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여기서 배로 번역된 코일리아는 빈자리, 자기 안의 빈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라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안의 빈 곳을 채우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내 빈 곳을 채워주시는 분이라고 설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은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이고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말이라고 사도 바울이 단언합니다. 마귀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유혹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알아?”라는 말이지요.
제가 지난 고난 주간에 밤에 CCTV 기독교 방송에서 어떤 싱가포르 부흥사가 미국의 거대한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을 끝까지 참고 본 적이 있다고 말씀드렸었지요. 온갖 화려한 성경 구절이 다 동원되고 있었습니다. 청산유수같이 성경 말씀이 나오는데 다 달콤한 말씀만 나오는 것이지요. 사람들 박수치고 아멘을 외치고 난리가 났는데 저는 끝까지 확인하려고 참고 기다렸어요. 회개 이야기를 언제 하나? 끝까지 기다렸는데 결국 안 하더군요. 옛사람이 새사람으로 변화되는 절체절명의 약속의 본질을 빼고 새사람의 사명 감당을 위해 하나님께서 지원해 주시는 군수물자를 뻔뻔스럽게 옛사람이 받아서 누리자는 쪽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거기에 온갖 성경 구절이 다 화려하게 동원이 됩니다. 이것이 배만 섬기는 자들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유혹하는 거예요. 그러니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지금 성경 말씀으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즉 신앙생활을 통한 유혹이에요.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유혹입니다. 다른 사람 쳐다볼 것 없습니다. 예전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가 내 스스로를 유혹하고 서로가 서로를 유혹하고 하는 것인데 우리가 거기서 빠져나온 것이지요. 예수님의 대답을 보시지요. 12절입니다.
(눅 4:12)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시험이 똑같이 페이라조인데 앞에 에크를 붙여서 에크페이라조라는 동사를 씁니다. 마태복음도 마찬가지인데 thoroughly, 철저하게 시험하다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심하게 유혹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유혹하는 것이 바로 강청하는 기도입니다. 내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가서 금식하고 철야하면서 강청하는 기도가 바로 하나님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네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유혹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는 것을 믿고 감사하면서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이지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크리스찬의 삶이 아닙니다. 새사람은 두 가지만 빼고 자기 문제로 하나님께 요구할 일이 없어요. 그것은 일용할 양식과 성령의 권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데 지금 배가 고프고 총을 쏴야 되는데 총알이 없네요. 총알 좀 주세요라는 기도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 일서 5장에서 정확히 표현한 것처럼 “그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때에만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지 나의 행복을 위해서, 내 코일리아,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신앙생활하고 기도원에 가서 울고불고 떼쓰면서 기도하고 그랬더니 응답 받았다고 간증하는 사람도 있고... 그게 모두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이 기록된 신명기 6장 16절에서 19절을 봅니다.
(신 6:16-19)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하신 것과 규례를 삼가 지키며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사 네 대적을 몰수히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하신 아름다운 땅을 들어가서 얻으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 순종하면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게 된다는 말씀이 아니고 모세가 출애굽기 17장에 기록된 장면을 회상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므리바 물 사건이라고 하지요. 출애굽기 17장 1절부터 7절입니다. 이날 현장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었는지를 보시지요.
(출 17:1-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을 이스라엘이 시험하는 장면입니다. 물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물을 주실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하는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마실 물이 없을 때 물을 달라고 하나님께 원망 섞인 강청 기도를 하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장면이지요. 그걸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 뭐라고 그럽니까? “봐라. 반석에 지팡이를 쳐서 물을 주시는 하나님이다”라고 하면서 강청하는 기도를 부추기는 쪽으로 이 말씀을 사용합니다. 반석을 쪼개서 물을 주시는 하나님을 왜 못 믿느냐는 거지요. 믿음이 없음을 질타까지 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정반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끝까지 물을 안 주셔서 전부 기갈이 들어서 죽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옆에 물이 나올만한 자리가 보이는데도 우물을 팔 생각은 안 하고 ‘하나님이 물을 주시겠지, 주시겠지’ 하다가 기갈로 죽어 가면 그것도 대단히 큰 오류지요. 그런 오류가 많이 나타납니다. 자기가 할 노력은 하지 않고 하나님이 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도 엄청난 오류고 하나님이 안 주시기로 작정하셨는데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 일상생활, 우리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지침입니다. 기다려야 할 때는 기다려야 하고, 내가 노력해야 할 때는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과에 대해선 그 결과가 어떠하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제 현실에서의 일상생활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시험치 아니하는 삶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하신 이 말씀의 논리 구조가 명확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실제 우리 마음과 생각과 말과 행동이 정밀하게 성경과 맞아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로운 피조물들이 모이고 또 새로운 피조물이 되길 소망하는 자들도 모여서 공동체가 세워지고 성장해 가는 것에 내 모든 것이 집중되고 그 일에 나 자신과 내 모든 환경과 여건이 쓰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피조물을 소망하면서도 우리가 유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아! 내가 얼마나 행복해 질까? 하나님 제발 저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세요.’ 이것이 마귀의 유혹에 빠진 모습입니다. 마귀가 한 유혹이 그거에요. ‘아! 정말 내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고 신의 성품이 임하고 성령의 열매가 맺히면 얼마나 좋을까?’ 이게 마귀의 유혹입니다. 허전도사님이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울었다 웃었다 하고 계신데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어제 이 내용을 허전도사님이 체득을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감사한 일이지요.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피조물, 집단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나에게 성취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따라서 ‘이 공포와 탐욕에서 해방되면 내가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생각이 방향 설정이 잘못된 것이지요. 공포와 탐욕에서 해방되면 기쁨과 행복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사명 감당으로 진행됩니다. “아니, 뭐 그게 그거 아닌가? 그게 뭐 그렇게 서로 다른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180도 다른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새로운 피조물도 상황이 그런데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개념조차 없게 되면 옛사람들이 마구 날뛰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 복 주세요. 내 소원을 들어주세요” 하면서 옛사람이 날뛰는 거예요. 이 모두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비틀어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지요.
제가 기도원에서 사역을 할 때 그런 이야기 참 많이 들었어요. 부흥사나 전도자 이런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한테 따지면 하나님이 꼼짝 못하신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많이 들어 보셨을 거예요. 그분들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요. 큰일 나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성경 말씀이 모두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요. 왜 그러겠어요? 자기 빈자리 채우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성경이 다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시험했는가를 간증하면서 “여러분도 저처럼 하나님을 시험하면서 사세요”라고 부추기는 것이지요. 무서운 일입니다. 사단의 유혹이 그렇게 교묘한 거예요. 인간의 약점을 아주 정확하게 파고들어오면서 유혹을 하는 것이지요.
그 교묘한 유혹을 새로운 피조물의 모범이 되신 예수님께서 단칼에 쳐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이 되는 날이 온다고 약속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도 예수님처럼 유혹에 대처할 수 있는 성숙한 새로운 피조물로 점차 성장해 가는 것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마귀에게 시험받으시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성경 전체를 보는 눈을 열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사단의 유혹을 받으실 일이 없어요.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굳이 그렇게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어서 돌아가시는 일까지 하셨어야 할까? 하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앞서가신 것입니다. 유혹도 우리가 유혹을 이겨나가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굳이 40일을 금식하시고 주리신 상태에서 사단의 유혹을 받으시고 모범을 보이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이 놀라우신 은혜에 우리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몸소 본을 보이시면서 걸어가신 그 길을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 가운데에서 통과하게 되어서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는 우리들로 만들어 주실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믿습니다. 그 일이 실제로 조금씩 우리들에게 진행이 되고 있는 데에서 우리가 스스로 증거를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성경에 이렇게 자세히 계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확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동시에게 우리에게 앞으로 진행될 일을 정확하게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성령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일이 진행되면서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는 증인집단이 되는 과정이 진행되는 것을 감사를 드립니다.
말씀을 마무리 짓기에 앞서 이와 관련된 사도 바울의 증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6절과 17절입니다.
(고후 5:16-17)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 육체대로 안다는 것에 대한 NIV의 번역이 아주 좋다고 제가 말씀드렸었지요? worldly sight of view. 세속적인 관점, 세상적인 관점입니다. 옛사람일 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도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았으나 이제는 세상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는 증언입니다. 예전에 옛사람인 육에 속한 크리스찬이었을 때는 그리스도도 내 탐욕의 눈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내 공포와 탐욕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으로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이지요. 내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예수님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우리가 그런 세상 시각으로 그리스도를 보지 않는다. 즉 이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는 분이시라고 그리스도를 본다는 겁니다. 나를 행복하게 하러 오신 예수님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로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일하는 존재로 만들려고 오신 분이라는 시각으로 이제는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으로 꼽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형적인 모범이 되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 마귀의 세 가지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모습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약속된 모습이기 때문에 날로 날로 이 일을 성취해 가실 줄을 믿습니다. 이어지는 성찬에서 이 놀라운 일을 또 한 단계 진행하실 줄을 믿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그 시점에 우리가 평생 겪어야 할 세 가지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시는 모범을 보여주신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저희의 평생에 따라붙을 이 원수 사탄 마귀의 교활한 유혹을 예수님을 본받아 단호히 물리치는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게 하시옵소서. 놀라운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 약속을 붙들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성령의 강림과 성령의 충만을 함께 간구하고 서로를 권면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며 나아가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날이 약속을 이루어 가심을 감사드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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