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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명을 맞이하는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이준용
第3章 郡 南 面
연천군 2읍 8면의 하나이다.
이 면은 본래 연천현의 남면(南面) 지역으로, 석현리(石峴里)·진상리(進祥里)·갈묘리(葛墓里)·하심곡리(下深谷里)·상심곡리(上深谷里)·옥계리(玉溪里)·진전리(榛田里) 등 7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왕림동을 왕림리(旺林里)로 개칭하여 8개 리로 개편 관할하였고,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전군 화진면(禾津面)에 속해 있던 황지(黃地)·석문石門)·음대포(音垈浦)·도감포(都監浦)·지곡(芝谷) 등의 5개 리를 병합하여 남면을 군남면으로 개칭하고,
옥계·선곡·진상·왕림·황지·남계의 7개 리로 다시 개편하여 관할하였다. 그 후,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이 되어 군남면 전지역이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7개 리가 완전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면의 동쪽으로는 연천읍과 전곡읍, 남쪽은 전곡읍, 서쪽은 미산면과 왕징면, 북쪽은 중면과 경계가 된다.
□ 일반현황
·면사무소 소재지 : 군남면 삼거1리 400 - 5
(1994년도 통계연보 기준)
+----------+----------+-------------------------+----------+-------------------------+
| 면 적 | | 인 구 수 (명) | 인구밀도 | 리 수 |
| |가 구 수+-------+--------+--------+ +-----+------+--------+---+
| (km ) | | 계 | 남 | 여 |(인/1km ) |법정 | 행정 |자연마을| 반|
+----------+----------+-------+--------+--------+----------+-----+------+--------+---+
| | | | | | | | | | |
| 44,42 | 1,565 | 5,592 | 2,895 | 2,697 | 125,6 | 7 | 12 | 21 |66 |
| | | | | | | | | | |
+----------+----------+-------+--------+--------+----------+-----+------+--------+---+
1. 삼거리(三巨里)
본래 연천현의 남면 지역으로, 마을 중앙에 세 갈래의 큰 길이 있으므로 '세거리' 또는 '삼거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존의 상심곡리(上深谷里)와 하심곡리(下深谷里)를 병합하여 삼거리라 해서 군남면에 편입되었고,
1945년 8 ·15 광복 이후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였으나,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와 12개 반, 4개의 자연마을로 편성되어 있고 군남면의 중심지가 되는 곳이다.
1 장자못 : 섬말 남쪽에 있는 못. 현재 많이 매몰되어 옛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2 둥글못 : 섬말 동쪽에 있는 둥근 못.
3 섬말(島村) : 삼거리 서쪽, 임진강변에 있는 작은 마을. 임진강이 홍수로 범람했을때 이 곳에 있는 둥근 언덕이 섬처럼 남아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섬말 등성이에 신당이 있었으며, 주변에는 소나무, 참나무 고목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었던 곳이다.
풍수지리설로는 섬말의 긴 등이 배를 엎어놓은 형국이라 하여 우물을 파지 못했다 한다.
4 숫못 : 섬말 북쪽에 있는 못.
5 듬밭벌 : 섬말 북쪽에 있는 들판으로, 듬밭나루의 옆에 있는 들판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 둔밭나루(屯田渡, 澄波渡) : 삼거리에서 왕징면 북삼리로 건너다니던 나루터. 최근에 교량이 생겼다.)
7 돌창개울 : 군자산에서 발원하여 삼거리 중앙을 지나 임진강에 합류하는 개울. 지저분하고 불결한 도랑의 뜻인 '도랑창'에서 뜻을 따와 붙여진 이름이다.
8 세바람고지 : 삼거리 북쪽, 임진강쪽으로 뻗은 산부리. 이 산 끝 자락이 세 갈래로 갈라져 벌어진 모양이고, 양지말 뒤에서 임진강으로 뻗어 나온 산이 새의 주둥이처럼 생긴 긴 곶(串)과 닮았다 하여 두가지 뜻이 합쳐 '세 갈래로 벌어진 곶'이란 뜻이 지금의 세바람고지로 굳어진 이름이다.
9 양지말(陽村) : 삼거리 동쪽, 양지바른 곳에 있는 마을. 평해 황씨·광주 노씨·남양 홍씨·죽산 안씨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10 새골 : 양지말 북쪽, 깊이울 안에 있는 작은 골짜기.
11 깊이울(深谷) : 양지말 동쪽에 있는 깊숙한 골짜기. 옛 연천현의 심곡리의 유래가 되는 곳이다.
12 당골 : 삼거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 당고개와 연결되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3 당고개 : 삼거리 당골에서 선곡리의 갈묘동으로 넘어다니는 고개. 정상에 돌서낭당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4 깃대봉(181m) : 당골 동쪽에 있는 봉우리. 일제 강점 초기에 토지 세부측량을 할 당시 이 봉우리 정상에 표준기를 꽂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5 거물개봉 : 깃대봉 남쪽에 있는 거물개 형상의 봉우리.
16 뒷골 : 거물개봉 옆에 있는 골짜기. 윗말의 뒤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7 윗말 : 거물개봉 남쪽에 있던 마을. 삼거리 마을을 기준으로 할 때 위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8 절터골 : 왕자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지금도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문헌에 상세하지 않아 창건연대 및 절이름을 알 수 없고, 전설에 의하면 빈대가 극성을 부려 폐사(廢寺)가 되었다 한다.
19 왕자봉(王子峰. 257m) : 절터골 북쪽에 있는 봉우리.
20 안골 : 왕자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6·25 전에는 깊숙한 이 골짜기 안에 마을이 있었다.
21 엉고개(= 안골고개) : 안골에서 선곡리의 선유동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 정상에 서낭당이 남아 있다.
22 쇠경골 : 안골 동쪽, 군자산에 딸린 골짜기.
23 군자산(君子山. 327,8m) : 군남면 삼거리·선곡리,연천읍의 차탄리와 경계에 있는 산. ("산천"편 참고)
24 돌고개 : 안골에서 가는골로 통하는 고개. 돌이 많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5 가는골 : 돌고개 남쪽에 있는 가는 골짜기.
26 차돌백이 : 가는골 남쪽에 있는 등성이. 차돌이 많은 곳이다.
27 큰골 : 가는골 동쪽, 군자산에 딸린 골짜기.
28 장구맥이산 : 큰골 동쪽에 있는 산. 지형이 장구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9 부처고개(佛峴 = 덕녕이고개) : 부처골에서 연천읍 차탄리의 덕녕이로 넘어 다니던 고개. 정상 부근에 미륵불이 있었다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30 부처고개 미륵불(彌勒佛. 삼거리 미륵불) : 문화유적·유물편 "불상" 참고.
31 덕녕이등 : 군자산과 봉화봉 사이에 있는 긴 산등.
32 봉화봉(烽火峰. 232m) : 군자산 남쪽에 있는 봉우리. 옛날에 이 산 정상에서 봉 화를 올렸던 곳인데, 정상을 꼭지점으로 하여 삼거리· 왕림리, 연천읍 차탄리의 경계가 된다. (문화유적·유물편 "봉수지" 참고)
33 짐진이골 : 봉화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
34 쥐산 : 봉화봉 서쪽에 있는 산. 쥐의 형국이라 한다.
35 큰고개 : 부처골에서 왕림리의 배나무골로 넘어 다니던 큰 고개. 현재 포장도로가 나 있다.
36 남산(247m) : 쥐산 서쪽에 있는 산. 부처골 마을에서 보아 남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7 고조울고개 : 부처골에서 왕림리 고조울로 통하는 고개.
38 부처골(佛峴洞) : 군자산 남쪽에 있는 마을. 부처고개에 있던 미륵불로 인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곡성 임씨가 48가구, 지금은 25가구가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500여년 전에 이 곳에 정착했다 한다.
39 검바위고개(劍岩峴) : 삼거리에서 진상리 제추울의 검바위로 통하는 고개.
40 새장골 : 왕자봉 남쪽에 있는 좁은 골짜기.
41 금바위고개 : 윗말 남쪽, 검바위로 넘어 가는 고개.
42 앞동산 : 삼거리 양지말 앞에 있는 산. 전설에 의하면 정상에 봉수대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멸실되어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43 삼거리(三巨里) : 현 군남면사무소가 있는 마을. 진상리·선곡리·북삼리로 갈라지는 세 갈래의 큰 길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군남면의 중심지가 형성되어 있다.
44 황새둥치 : 6·25 전에 황새, 백로 등이 서식하던 철새도래지. 지금은 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45 긴골 : 앞동산 남쪽에 있는 긴 골짜기.
46 삼거리 선사유물 산포지(三巨里 先史遺物 散布地) : 문화유적·유물편 "선사유적과 유물" 참고.
* 제 보 자 : 황 호 진 (62) 군남면 삼거2리 양지말
임 재 만(57) 부처골
2. 옥계리(玉溪里)
본래 연천현 남면의 지역으로, 옥녀봉 밑에 옥같이 맑은 냇물이 흐르는 곳이라 하여 옥계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진전리(榛田里)를 병합하여 군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45년 8·15 광복이 되면서 3·8선 북쪽에 되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3개의 행정리, 14개 반, 6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온수골(溫水洞) : 옥녀봉 남쪽, 임진강변에 있는 골짜기.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예전부터 이 곳에 피부병에 효험이 있는 온수 우물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만병통치의 효력으로 소문이 널리 퍼져 사방에서 문둥병 환자들이 모여들면서 물을 더럽히고 걸인행각으로 주민들을 괴롭히자 마침 이 곳을 지나가던 어떤 도승이 부적을 돌에 싸서 이 우물에 던져 넣은 뒤부터 온수가 끊어졌다 한다. 6·25 전에는 연주현씨가 살았던 마을이다.
2 상상재 : 옥계에서 온수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지형이 높고 가파르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시대 때 옥계리에 연주현(延州縣)이 있었을 당시 이 고갯마루에서 죄인들을 처형했다 한다.
3 옥계천(玉溪川) : 연천읍 상리의 재궁동에서 발원하여 임진강으로 합류하는 옥계리 중앙의 긴 개울. 옥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 정자골(亭子谷) : 상상재 동쪽, 큰 느티나무 고목이 있던 골짜기. 일제 강점기 때
정자나무로 불리워오던 이 나무 속으로 큰 구렁이가 들어가자 그 것을 목격한 마을청년이 불을 질러 300년 수령의 이 나무가 타 죽었다 한다. 6·25 전에는 강(康) 씨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5 열두마지기논 : 정자골 옆에 있는 열두마지기가 되는 넓은 논.
6 사당골(祠堂谷) : 정자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고려시대 때 연주현에 딸린 사당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7 중간말 : 장거리 서쪽, 중간에 있던 마을. 현재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8 관말(官村) : 중간말 북쪽에 있던 마을. 고려말 연주현의 관아가 위치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지금도 그 터에서는 많은 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9 윗말(上洞) : 관말 서쪽에 있던 마을. 중간말을 기준으로 할 때 위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0 황해도관찰사 강유후 묘(黃海道觀察使 姜裕後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11 잣골(城谷) : 중간말 서쪽에 있는 큰 골짜기. 옥녀봉 정상에 있는 산성(山城)의 아래에 있다 하여 성(城)의 우리 고어인 '잣'에서 음을 빌어 지어진 이름이다. 6 ·25 전에는 청풍 김씨들이 집성을 이루며 살았던 곳이다.
12 백고개(城峴, 百人峴) : 잣골에서 중면 삼곶리의 논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옥녀봉 산성의 밑으로 다니는 고개라 하여 성(城)의 고어인 '잣'에서 뜻을 따와 '잣고개'라 하였으나, 한자로 지명을 옮겨 쓰는 과정에서 '잣(城)'을 '잣 백(栢)'으로 오기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또한 이 고개가 높고 험하여 대낮에도 산짐승과 도둑이 많아 백사람이 모여야만 넘어 갔다 하여 '백고개'로도 불리웠다는 전설이 있다.
13 옥녀봉(玉女峰, 城山, 배꼽봉, 205m) : 잣골 북쪽에 있는 산. 옥계리와 중면 삼곶리의 경계가 된다. 삭녕에서 연천 북쪽으로 내려오던 산맥이 연천읍 상리에 있는 솟을봉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는데, 좌측으로 내려온 산맥은 남자의 정기라 하여 가장 높은 봉우리를 군자산(君子山)이라 하였고, 우측 산맥의 최고봉인 이 봉우리 를 여자로 의인화하여 '옥녀봉'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이 곳의 빼어난 경치 때문에 선녀가 자주 내려와 놀았다 하여 '옥녀봉'이 되었다고도 하며, 산의 모양이 배꼽과 닮았다 하여 '배꼽봉'으로도 불리운다.
옥녀봉은 고려 때 연주현(延州縣)의 진산(鎭山)이 되었고, 지정학적인 중요성으로 인하여 삼국 초기부터 6·25 때까지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이다.
현재 이 산 정상에는 옛 산성의 유지가 남아 있다. (문화유적·유물편 "성지" 참고)
14 매화봉(梅花峰) : 관말 북쪽에 있는 산 봉우리. 매화꽃과 닮은 형상이라 한다.
15 선반밭 : 매화봉 북쪽에 있는 선반처럼 생긴 밭.
16 맨두리 : 매화봉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세 줄기의 산자락. 활짝 핀 매화꽃 형국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7 망근도리밭 : 매화봉 동쪽에 있는 망건처럼 생긴 밭.
18 투미골(鬪美洞) : 매화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 고려시대에 연주현이 있었을 때 관기(官妓)들이 있던 곳으로, 당시 부근에 살던 호색가들이 미색(美色)을 탐하여 서로 투기하며 싸웠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전해 온다. 또한 그 때에는 "미색을 취하려면 그리 가라 !"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다.
19 소리개고개(= 솔개미고개) : 투미골 북쪽에 있는 고개. 골짜기 안에 솔개형의 명당이 있으나, 그 혈(穴)을 찾지 못한다 한다. 현재 중면 삼곶리와 합수리로 넘어가는 포장도로가 있다.
20 광대봉 : 미래 동쪽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이 마을에 살던 광대가 정상에 있는 두 봉우리에 줄을 매고 놀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1 귀골(耳谷洞) : 광대봉 아래에 있는 사람의 귀처럼 생긴 골짜기.
22 옥계리 고분(玉溪里 古墳. 마정승 묘)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23 매봉 : 마정승 묘 뒤에 있는 산. 예전에 이 곳에서 매사냥을 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4 동지미산 : 매봉 아래에 있는 산으로, 모양이 두꺼비처럼 생겼다 한다.
25 군수맥이고개 : 옥계리 작은밤골에서 중면 합수리의 능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예전에 군대가 주둔하던 군막(軍幕)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6 작은밤골(- 栗洞) : 매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연천읍 상리의 밤골과 상대되는 지명이다.
27 옥계리 태봉(玉溪里 胎峰) : 작은밤골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궁실에서 태를 봉했던 곳이었으나, 1926년 경에 도굴 당하여 현재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28 새말(新垈洞) : 작은밤골 입구에 있는 6·25 이후 새로 생긴 마을.
29 청화산(淸華山) : 인성골 동쪽, 연천읍 현가리와 경계에 있는 산. (현가리편 참고)
30 긴등 : 청화산에서 군자산으로 이어지는 긴 산등. 연천읍 현가리와 경계가 된다.
31 인성골(仁聖洞) : 청화산 서쪽에 있는 골짜기.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32 제마밭골 : 미래 마을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33 미래 : 연천아전비 북쪽에 있는 마을. 전설에 의하면 철원에 궁예가 세운 태봉국
이 있었을 때 이 곳까지 조수가 들어와 철원으로 수운(水運)을 하려 했으나, 전방에 조그만 언덕이 있어 통과가 어렵자 여러 명이 힘을 모아 배를 밀며 언덕을 넘어다녔다 하여 '밀어고개'를 불리워오다 차츰 '미래고개'로 어휘가 변했다 한다. (미래고개는 연천읍 상리에 속해 있다.) 현재 미래마을에는 400년 전에 정착한 밀양 박씨가 집성을 이루고 산다.
34 옥계역터(玉溪驛址) : 현 미래마을에 있던 옥계역은 조선시대 중앙관청의 공문을 지방관청에 전달하며 외국 사신의 왕래와 관리의 여행 또는 부임 때 마필을 공급하던 역참(驛站)이 있던 곳으로, 남쪽은 장단도호부의 백령역(百嶺驛 : 현 백학면 백령리 소재)에서 서울로, 북쪽은 철원도호부의 용담역(龍潭驛)을 거쳐 함경도 노선으로 연결되었던 곳이다.
현재 조사되어 있는 사료에 의하면 백령역·옥계역·용담역은 고려시대에도 있던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조선 후기에 편찬된 ≪輿地圖書. 1759년≫ 연천현 역원조에는 이 역의 규모를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 옥계역은 연천관아에서 서쪽으로 5리에 있는데 큰말(大馬) 2필, 기마(騎馬)2필, 짐을 싣는 말(卜馬) 6필과 19명의 종사원이 있다.---
그러나, 이 역원제도는 일제 강점후 철도와 통신의 발달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옥계역의 자리했던 이 곳 역시 역사(驛舍)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고 수복 이후 큰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고려 명종 때의 학자인 노봉(老峰) 김극기(金克己)는 옥계역에서 아래와 같은 시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馬首尋前路 말머리는 갈 길을 찾는데
晨 常未牧 새벽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네.
病 春雨暗 병든 눈엔 봄비가 컴컴하고
迹曉星流 나그네 자취에 새벽별이 흐르네.
獨飮能成醉 홀로 마셔도 능히 취하고
孤遊得瀉憂 외로이 놀며 근심을 쏟네.
還鄕纜幾日 고향에 돌아온지 겨우 며칠인데
邈若隔三秋 까마득한 삼추를 지낸 것 같네.
35 연천아전 김진룡 비(漣川衙前 金震龍 碑) : 문화유적·유물편 "선정비" 참고.(아전비 동쪽 산록에 김진룡의 묘가 있다.)
36 옥계리 충혼탑(玉溪里 忠魂塔) : 아전비 남쪽, 324번 지방도 옆에 있는 전적기념 비로 높이 154m이다. 6·25 때인 1950년 10월 2일, 옥계리를 수복할 당시 이 곳 전투에서 전사한 일등중사 오을용, 이등중사 이종만, 이등중사 김효열, 하사 황마산·정용수·김시태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1950년 10월 16일에 건립된 탑이다.
37 개암밭골(榛田里) : 아전비 남쪽에 있던 마을 이름. 옛날에 개암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8 말가죽대기 : 아전비 남쪽에 있는 밭. 전설에 의하면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사들이 식량이 떨어져 말을 잡아 먹었던 곳이라 한다.
39 숯돌봉 : 샘고개 북쪽, 현가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40 샘고개 : 옥계리와 연천읍 읍내리 사이에 있는 고개. 6·25 전까지 맑은 샘이 있던 곳이다.
41 아지봉(阿只峰) : 샘고개 남쪽, 옥계리·선곡리, 연천읍 읍내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 (연천읍 읍내리 참고)
42 노루메기고개(獐項) : 장거리 동쪽에 있는 고개. 이 곳의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겨서' 노루메기로 불리운다 라고 전해 오나, 원래의 정확한 뜻은 '넓음' 또는'늘어진'의 의미인 '너르'와 '목'의 모음동화현상인 '메기'가 합쳐져 '너르메기'로 불리우던 것이 '노루목'으로 점차 굳어지면서 한자로 음차되어 전혀 다른 의미의 '노루목'이 된 곳이다. 실제로 이 곳의 지형은 긴등에서 내려온 산 끝자락이 넓게 늘어진 목처럼 되어 있어 '노루(獐)'와는 무관한 것 임을 첫눈에 알 수 있다.
43 장거리(場巨里) : 미래 남쪽에 있는 사거리. 고려시대 연주현이 있었을 때 큰 장이 형성되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44 독짓골(탁거리) : 장거리 남쪽에 있는 마을.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 골짜기에서 옹기를 구웠다 하여 독짓골이 되었다 하나, 현재 그 유지를 확인할 수 없다. 또한 고려 때에는 이 곳에 있던 주막에서 탁배기(막걸리)를 팔았다 하여 '탁거리'로도 불리워지는 곳이다.
* 제 보 자 : 김 유 승(82) 군남면 옥계1리
3. 선곡리(仙谷里)
본래 연천현 남면의 갈묘리(葛墓里)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선유동(仙遊洞)과 세곡동(細谷洞)을 병합하여 선유의 "仙"자와 세곡의 "谷"자를 따서 선곡리라 하여 군남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이 되면서 3·8선 북쪽 지역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6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조개못 : 임진강변에 있는 큰 연못. 예전부터 큰 민물조개가 많이 서식하는 곳이 되어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은 조개못 옆에 골재 채취장이 들어서 있어 점점 매몰되어 가고 있는 상태이다.
2 선곡리 백제적석총(仙谷里 百濟積石塚 = 원등산) : 조개못 동쪽에 있는 백제 초기 대형 돌무지무덤. (문화유적·유물편 "고분" 참고)
3 선곡리 선사유물 산포지(仙谷里 先史遺物 散布地) : 문화유적·유물편 "선사유적과 유물" 참고.
4 양천이들(兩川坪) : 원등산 동쪽에 있는 들판. 임진강과 옥계천 두 물이 합류하는 곳에 들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5 창말등 : 원등산 북쪽에 있는 등.
6 오징어밭 : 뱀바리 남쪽에 있는 밭. 오장이라는 사람이 경작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차츰 오징어로 어휘가 변하였다 한다.
7 솔너머등 : 뱀바리 서쪽에 있는 산 등. 6·25 전까지도 소나무가 많았던 곳이다.
8 용바위 : 뱀바리 서쪽, 임진강에 있는 바위. 선곡리 마을의 전설에 의하면 예전부터 가뭄이 심하게 들때에 용바위에서 물을 떠와 자기집 장독을 씻으면 비가 온다고 한다.
9 안골 : 임진강변에 있는 골짜기. 뱀바리 마을의 북쪽 골짜기 안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0 안골고개 : 뱀바리에서 안골로 넘어가는 고개.
11 뱀바리(蛇足洞) : 원등산 북쪽에 있는 마을. 옥녀봉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이 곳에 와서는 뱀의 발처럼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6·25 전에는 전주 이씨가 20여호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12 지내끝 : 뱀바리 동쪽에 있는 산부리. 지내 형상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3 수로다리 : 뱀바리 동쪽, 옥계천에 있는 콘크리트다리. 임진강에서 퍼 올린 농업용수가 이 곳으로 지나간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4 말무덤 : 뱀바리 북쪽, 산 정상에 있는 말을 묻었다는 무덤.
15 아지봉(阿只峰) : 군자산 북쪽에 있는 봉우리. 옥계리와 연천읍 차탄리의 경계가 된다. (연천읍 읍내리편 참고)
16 며치골 : 아지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 선곡리에서 연천읍 읍내리로 넘어 다니던 큰 고개(읍내리에서는 '며치골고개'로 부른다.)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군자산과 아지봉의 두 봉우리에서 뜻을 따온 '뫼(山)'와 고개의 다른 뜻인 '치(峙)'가 합하여 '산 사이의 고개'라는 '뫼치'로 불리워지던 것이 지금의 '며치'로 음이 변하며 뒤에 '골'과 합하여 '며치골'로 굳어져 버린 합성지명이다.
17 큰다리 : 324번 지방도에 있는 큰크리트로 된 다리.
18 애미터골 : 군자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
19 군자산(君子山. 327,8m) : 선곡리·삼거리·연천읍 차탄리 경계에 있는 산.("산천"편 참고)
20 안골고개 : 선유동에서 삼거리의 안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21 왕자봉(王子峰. 257m) : 안골고개 서쪽, 삼거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22 먹음구렁 : 선유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을 많이 해쳤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3 선유동(仙遊洞) : 먹음구렁 북쪽에 있던 마을. 전설에 의하면 군자산에서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며 노닐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4 눈고개 : 선유동에서 갈묘동으로 넘어다니던 고개. 이 곳은 '나직한(緩)', '늘어진', '이어진(連)'의 뜻을 가진 고어의 '늣'이나 '늠(느름)'이 '눈'으로 음이 변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으로, '나지막하게 늘어진 고개'의 뜻을 가진 땅이름으로 보여진다.
25 호랑봉 : 갈묘동 북쪽에 있는 호랑이처럼 생긴 봉우리.
26 갈묘동(葛墓洞) : 눈고개 남쪽에 있던 마을. 고려시대 때 갈가(葛家)의 묘가 많 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6·25 전에는 밀양 박씨가 15호 마을을 이루고 살던 곳이다.
27 돼지물꾸럼 : 갈묘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멧돼지들이 먹던 우물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8 깃대봉(181m) : 돼지물꾸럼 남쪽, 삼거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삼거리편 참고)
29 당고개 : 갈묘동에서 삼거리 당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이 고갯마루에 서낭당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0 뒷동산 : 개무더미 마을 뒤에 있는 산.
31 작은다리 : 큰다리 남쪽, 324번 지방도에 있는 다리.
32 개무더미(犬墓洞) : 뱀바리 동쪽에 있는 선곡리 중심 마을.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혹은 병자호란이라고도 함) 당시 부근 전투에서 전사한 적군의 시체를 이 곳에 모아 큰 도무덤(都墓)을 만들었는데, 당시에는 왜(倭)를 '개'로 비유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라 전한다.
그러나, 큰 동산같던 이 무덤은 6·25가 끝나고 수복이 되어 이 곳에 새로 마을이 형성되면서 완전히 멸실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33 요골 : 개무더미 남쪽에 있는 골짜기.
34 가니골(細谷洞) : 요골 남쪽에 있는 가는 골짜기. 6·25 전에는 동래 정씨가 마을을 이루며 살던 곳이다.
35 긴골 : 가니골 남쪽에 있는 긴 골짜기.
* 제 보 자 : 박 용 하(84) 군남면 선곡리
박 희 서(81)
4. 진상리(進祥里)
본래 연천현 남면의 지역으로, 임진강옆에 펼쳐져 있는 사질 충적평야의 토질이 질고 습기가 많아 (모래밭, 질밭, 피우개라는 소지명에서 증명이 된다) '진사랭이'로 불리워오던 곳이었으나,
한자로 지명을 옮겨 쓰는 과정에서 '進上里' 또는 '進祥里'로 표기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군남면에 편입되었으며, 1945년 8·15 광복이 되면서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10개 반,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마구리들 : 진상리 남쪽, 구석진 마구리에 있는 들.('마구리'는 '구석'의 사투리이다.)
2 큰밭 : 마구리들 북쪽에 있는 큰 밭.
3 도깨비여울 : 큰밭 서쪽, 임진강에 있는 여울. 옛날에 도깨비가 많이 나타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 뱃나드리 : 진상리에서 왕징면 무등리로 건너다니던 나루터. 6·25 때 화이트교가가설되면서 나루가 자연히 없어졌다. (나드리는 나루의 방언)
5 모래밭 : 화이트교 북쪽에 있는 모래가 많은 밭.
6 용림정등(龍林亭 -) : 모래밭 북쪽에 있는 둔덕. 임진강의 용림정소(=용궁정)의 옆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7 관둔전(官屯田) : 용림정등 동쪽에 있던 밭. 예전에 둔전(屯田. 둔전은 왕징면 북삼리의 "둔밭" 참고)이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지금은 군남중학교가 들어서 있다. 일설에는 관군이 진을 쳤던 곳이라고도 한다.
8 오리알들 : 관둔전 북쪽, 임진강변에 있는 들판. 예전부터 오리들이 많이 놀던 곳이라 한다.
9 구래골논 : 오리알들 옆에 있는 논. 지형이 우묵하게 생겨 골짜기와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골(谷)'이 '굴'이 되고 이 것이 다시 '구래'로 연철되면서 뒤에 똑같은 뜻의 '골(谷)'을 합하여 지어진 복합지명이다.
10 신촌방 : 구래골논 동쪽에 있는 마을. 6·25 이후 새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1 검바위(劍岩) : 제추울 동쪽에 있던 마을로, 칼날같은 큰 바위가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칼바위 틈에 돌을 끼워 놓으면 마을 아낙들이 바람이 난다는 사연을 간직하고 있으며, 6·25 전에는 곡성 임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곳이다.
12 남산 : 검바위 동쪽, 삼거리와 왕림리 경계에 있는 산.
13 능모루(陵隅) : 검바위 남쪽에 있는 모퉁이. 예전 이 부근에 릉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4 돌고개(石峴) : 능모루에서 왕림리의 배나무골로 넘어 다니던 이 고갯마루에 천연암벽 사이로 겨우 한 사람만 통과할 수 있는 넓이가 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통행이 금지되어 있고, 6·25 전에는 큰 서낭당이 있던 곳이다.
15 제추울 (車谷洞) : 남산 서쪽에 있던 마을. 전설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500년 전, 이곳에 정착했던 남양 홍씨 중랑장파의 통덕랑(通德郞) 홍서오(洪敍五)가 죽자 많은 조문객들이 수레를 타고 와 이 골짜기 안이 그 수레들로 가득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6 막터골(幕垈谷) : 제추울 남쪽에 있는 골짜기.
17 수느르골 : 막터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18 성주정(聖主井) : 신촌방 남쪽에 있는 우물.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어떤 임금이 이 곳을 지나가다 이 우물물을 마셨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며, 피부병에도 효험이 있다 한다.
19 선유고개(仙人峴) : 성주정에서 오그미로 통하는 고개. 강신봉에 연관되어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20 평안도민 망향탑(平安道民 望鄕塔) : 324번 지방도 옆에 있는 망향탑. 1980년 2월에 건립되었으며, 매년 10월 9일 평안남·북도 실향민들이 망향제를 지내는 곳이다.
21 당묘(唐墓) : 평안도민 망향탑 남쪽에 있는 산. 중국 당나라 사람의 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2 우렁논(= 우렁배미) : 오구미 앞에 있는 우렁이가 많은 논.
23 마산(馬山) : 오구미에 있는 산. 마씨의 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4 오구미(梧琴洞) : 진상동 북쪽, 6·25 전에 있던 마을로, 지금부터 약 300년 전에 정착한 청주 한씨들이 집성을 이루었던 곳이다.
그러나, 이 곳 오금동의 지정학적인 측면과 어원을 분석해 보면 한자 지명의 '梧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엉뚱한 지명풀이가 된 곳으로, 원래 '오구미'는 '외따라 으슥하고 궁벽한 곳' 이라는 뜻의 '외진구미'의 준말로 진상리 내에서도 북쪽 외진 곳에 있는 마을이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었으나, 오그미가 한자의 '梧琴'으로 음차 된 땅이름이다.
25 강신봉(降神峰) : 오그미 동쪽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신선이 내려와 노닐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전하는데 '강신재'라고도 불리운다.
26 대추골 : 강신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대추나무가 많았다 한다.
27 정문거리(旌門巨里) : 오구미 남쪽에 있는 마을. 예전에 열녀정문이 있었다 하나, 건립내용은 자세하지 않다.
28 진상동(進祥洞) : 정문거리 동쪽에 있는 마을. 지금부터 600년 전에 연주 현씨가, 그 후 원주 원씨가 차례로 정착하여 개척한 마을이다.
29 달봉(月峰) : 진상동 동쪽, 왕림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지형이 높기 때문에 달맞이를 했던 곳이라 하나, 실제의 뜻은 옛날부터 산(山)의 뜻으로 써왔던 우리 고어의 '달'이라는 말이 한자의 '月'로 옮겨진 것으로, 하늘의 '달(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단순히 산(山)과 봉(峰)의 합성이름일 뿐이다.
30 큰피우개(大稷洞) : 진상동 남쪽에 있는 마을. 이 곳의 토질이 질고 척박하여 예전에는 피(稷)만 무성히 자라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31 질밭 : 큰피우개 앞에 있는 밭. 습기가 많아 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2 남송정터(楠松亭址) : 큰피우개 언덕에 있는 정자 터. 문헌자료에 의하면 고려 말 삼별초의 난 때 강화도에서 공을 세운 도원수 현문혁(玄文爀)이 관직에 나가기 전에 이 곳에 정자를 짓고 학문의 기틀을 닦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조선 후기까지 연주 현씨의 문중에 의해 보호받던 이 정자가 언제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지만 연천 ≪광무읍지1895≫에는 "이미 정자는 폐허가 되고 유지만 남아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중엽을 전후로 하여 폐허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송정 터에는 200년 수령의 느티나무 한 그루만이 세월의 풍상을 대변해 줄뿐, 정자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유구는 남아 있지 않다.
* 현 문 혁 (玄 文 爀)
생몰년은 미상이며 고려 원종 때의 문신이다. 본관은 연주이고 문하평장사 담윤(覃胤)의 고손이며, 추밀원사 장(璋)의 아들이다. 진상리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용맹이 월등하고 글읽기와 말타기, 활쏘기를 좋아 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원종 때에 장군을 역임하였고, 원종 11년(1270) 도원수(都院帥)로 발탁되었다. 이해 6월, 개경환도에 반대하여 배중손·노영희 등이 삼별초군을 이끌고 강화에서 전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코져 하였으나, 평정하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강화를 탈출하여 개경으로 항할 때 추격해 온 적선에 활을 쏘아 응전했다. 그러나, 배가 물이 얕은 곳에 걸리자 적의 화살에 맞아 배안에 쓰러졌고, 이에 처는 두 딸을 껴안고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으며, 그는 적에게 사로잡혔으나 용기를 인정받아 살해되지 않고 얼마 후, 극적으로 탈출하여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순절한 그의 처는 직학 정문감(鄭文鑑)의 처와 함께 열녀(烈女)로 표창되었다.
현문혁의 묘는 군남면 삼거리 부처골 부근에 있었으나 현재 실전(失傳)한 상태이며, 1987년 후손들의 발의로 남송정터와 가까운 진상리 피우개 마을에 도원수 현문혁의 제향을 받드는 사당인 남송사(楠松祠)가 건립되어 있다.
33 가피우개(小稷洞) : 큰피우개 동쪽에 있는 마을로 '작은피우개'라고도 한다.
34 매봉(鷹峰) : 가피우개 동쪽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꿩사냥을 할 때 이 봉우리에서 매를 날렸다 한다.
35 피우개고개(稷峴) : 진상리에서 왕림리로 넘어 가는 고개. 현재 322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 제 보 자 : 한 근 식(82) 군남면 진상리
한 충 식(76)
5. 왕림리(旺林里)
본래 연천현 남면의 석현리(石峴里)지역으로, 조선조 3대 왕인 태종(太宗)과 청화공 이양소(李陽昭)의 고사(古事)에 의해 '왕림' 또는 '왕림동'이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왕림동이 왕림리로 승격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석현리와 마전군 화진면(禾津面)의 지곡리(芝谷里) 일부를 병합하여 왕림리라 하여 군남면에 편입되었다. 1945년 8·15 광복이 되면서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6개 반,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활터거리 : 지루개 동쪽, 장진천변에 있는 들. 예전에 활을 쏘던 사정(射亭)이 있던 곳이라 한다.
2 지루개(芝谷洞) : 만호터 동쪽에 있던 마을. 지루개고개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지금은 군부대가 들어서 있다.
3 능밖 : 지루개 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안골 안에 릉과 같은 큰 묘가 있어 이 묘를 기준으로 할 때 밖이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 안골 : 능밖 서쪽에 있는 골짜기. 지루개마을에서 안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 만호터(萬戶垈) : 지루개 동쪽에 있는 넓은 골짜기.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어떤 풍수가가 이 곳 지형을 보고 후세에 만가구의 집들이 들어설 자리라는 예언을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6 왕림리 충혼탑(旺林里 忠魂塔) : 만호터와 샛지루개 사이의 산등성이에 있는 충혼탑. 1949년 5월 1일 창설부터 연전연승의 전과를 올렸던 보병 제1사단이 52년 12월 11일 이 곳 왕림리로 이동하여 1953년 7월 16일까지 노리·배티·박고지전투 등에서 적군 1216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는 등 빛나는 무공을 세웠는데,
6·25가끝난 뒤 부대창설 이후 수많은 전투에서 조국의 통일과 겨레의 안녕을 위해 싸우다 전쟁터의 이슬로 순국한 보병 제1사단 김정곤 대령 이하 5288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건립된 충혼탑이다.
전체높이 6m이며 비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길손이여 !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우리는 겨레의 명령에 복종하여
이 곳에
잠들고 있다고 ......
7 샛지루개(間芝谷洞) : 왕림리 충혼탑 북쪽에 있던 마을. 지루개 마을과 서산 마을의 사이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전주 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8 윗댕골(上大陽洞) : 댕골 북쪽에 있었던 마을.
9 지루개고개(芝峴) : 댕골에서 지루개 마을로 넘어 다니던 고개 이름으로, 다른 어떤 장소를 크게 돌아 가지 않고 가까운 지름길로 질러서 넘어 가는 고개가 되어 질러간다는 '질'과 '고개'의 뜻인 '개'가 합하며 '질개'가 되었다가 중간에 매개모음'으'가 따르면서 지금의 '지루개'로 음이 변하였고, 다시 같은 의미의 '고개'가 뒤 에 합해져 합성지명인 '지루개고개'가 되었으나, 한자로 음차하면서 엉뚱하게도 '芝峴'이 되었다.
10 동중골(東亭洞) : 윗댕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11 댕골(大陽洞) : 윗댕골 남쪽에 있던 마을 이름.
12 불당골(佛堂谷) : 댕골 남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예전에 불당이 있었다 하나 현재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곳 '불당골'은 '산'의 옛말 '붇'과 '안'이 복합되어 '붇안골'이던 것이 '불단골(불당골)'로 된 예로 보여진다.
13 피우개고개(稷峴) : 왕림리 죽터골에서 진상리 피우개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14 매봉 : 피우개고개 북쪽에 있는 봉우리. (진상리편 참고)
15 달봉(月峰) : 매봉 북쪽에 있는 봉우리. (진상리편 참고)
16 강신봉(降神峰) : 달봉 북쪽에 있는 봉우리. (진상리편 참고)
17 죽터골(竹垈洞) : 강신봉 남쪽에 있었던 마을 이름. 옛날 어떤 임금이 이 곳을 지나가다 타고오던 말에게 여물(죽)을 먹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전해오나, 한자표시로는 "竹垈洞"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6·25 전에는 경주 이씨가 20여호 집성촌을 이루었고 서정시인 월파 김상용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 김상용(金尙鎔. 1902 - 1951) 시인, 호는 月坡. 일본 릭꾜대학(立敎大學) 영문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잡지 ≪文章≫ 등에 서정시를 발표했다. 그의 시 <望鄕>은 1930년대의 불안에 대한 우수를 노래한 것으로 그의 대표적 작품이다. 8·15 광복후 잠시 관계에 나갔다가 다시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았고, 1948년 미국에 가서 1년 동안 머물렀다가 돌아왔으나 6·25로 부산에 피난 도중 생을 마쳤다.
18 아랫도리개(下石峴洞) : 죽터골 북쪽에 있던 마을 이름이다.
19 도장골 : 아랫도리개 동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도장주머니처럼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전하나, '산 안쪽의 골짜기'란 뜻의 '돋안골'이 '도잔골'로 되었다가 다시 '도장골'로 정착된 이름이다.
20 윗도리개(上石峴洞) : 도장골 동쪽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임천 조씨가 집성을 이루고 살던 곳이다.
21 인천부사 조현기 묘(仁川府使 趙顯期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22 돌고개(石峴) : 왕림리 배나무골에서 진상리의 능모루로 넘어 다니던 고개. (진상리편 참고)
23 남산(247m) : 돌고개 북쪽, 진상리와 삼거리의 경계 지점에 있는 산. (삼거리편 참고)
24 배나무골 : 돌고개 남쪽에 있는 예전에 배나무가 많았던 골짜기.
25 새발터 : 서산 남쪽, 남산에서 내려온 긴 산부리. 지형이 새의 발처럼 생겼다 한다.
26 쪽쪽골 : 배나무골과 서산 사이에 있는 긴 골짜기.
27 부처고개 : 쪽쪽골에서 삼거리 부처골로 넘어 가는 고개. 일명 '큰고개'라고도 한다.
28 봉화봉(烽火峰. 232m) : 부처고개 동쪽에 있는 봉우리. 왕림리·삼거리, 연천읍 차탄리와 경계가 된다. (문화유적·유물편 "봉수지" 참고)
29 높은터 : 봉화봉 아래, 높은 곳에 위치한 넓은 밭.
30 용봉(龍峰) : 봉화봉 남쪽에 있는 봉우리.
31 고조울 : 서산 서쪽에 있는 골짜기, 이 골짜기 옆의 새발터 산부리가 새의 주둥이처럼 길게 뻗어 나온 형상이 되어 이러한 지형을 칭하는 '곶(串)'이 연철된 '고지'가 골짜기의 다른 이름인 '울'과 합쳐 '고지울'이 되었다가 다시 지금의 '고조울'로 음이 변한 땅이름이다.
32 서산(西山) : 새발터 동쪽에 있는 마을. 조선 중기에서 후기까지 서인계(西人系)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대학자였던 조현기(趙顯期, 호는 一峰. 1634 ∼ 1686)·조성기(趙聖期, 호는 拙修齋. 1638 ∼ 1689)·이민곤(李敏坤, 호는 林隱. 1695 ∼ 1756)·이 송(李淞, 호는 老樵. 1725 ∼ 1789) 등을 배출한 곳이며, 조선조 유학과 실학사상 발전의 무대가 되었던 이 곳이 많은 학문교류의 중심이 되었던 양주군의 서산(西山) 마을과 견줄 만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이 마을에는 우봉 박씨가 정착한지 17대가 되어 집성을 이루고 있다.
33 왕림고개 : 서산에서 큰왕림으로 통하는 고개. 현재 이 고갯마루에는 돌서낭당이 있다.
34 새터(新垈, 新垈洞) : 샛지루개 동쪽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전주 이씨가 17대째 세거하며 집성을 이루었던 곳이다.
35 문안개울약수터 : 거물래산 남쪽, 현무암 석벽의 중간에서 떨어지는 약수. 예전부터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 하여 여름철에는 근방의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물맞이를 했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상수원으로 이용되어 옛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36 거물래산(고모산부리. 94m) : 용뱅이고개 남쪽에 있는 동그란 모양의 산. 거물래 형상이 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37 용뱅이고개(龍峰峴) : 새터에서 왕림리로 통하는 고개. 용봉의 산자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8 삼도수군통제사 조덕중 묘(三道水軍統制使 趙德中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39 된박너머 : 거물래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
40 작은왕림 : 된박너머와 큰왕림 사이에 있는 골짜기.
41 큰왕림(旺林洞) : 작은왕림 북쪽에 있던 마을.
42 정자터(亭子 -) : 큰왕림 마을에 있던 큰 느티나무 정자. 조선 건국 초 태종의 재위 중에 포은 정몽주의 문인이며, 태종과는 사마동방(司馬同榜)이었던 고려진사 금은(琴隱) 이양소(李陽昭)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로 연천읍 현가리의 도당골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태종은 이양소를 만나기 위해 연천으로 친행을 하였는데,
마침 이양소가 왕림리 장진천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타고 오던 어가(御駕)를 다시 돌려 왕림리의 이 곳에 이르러 쉬면서 이양소를 기다렸는데, 당시 태종이 친히 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곳에 느티나무를 심고 마을 이름도 왕림(旺臨)이라 지었다 한다. (현재 "旺林"으로 표기되어 있는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550여년 간 의연한 모습으로 역사의 현장을 지켜오던 이 나무는 6·25의 와중에 아깝게 베어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43 해필이모탱이 : 왕림동에서 연천읍 차탄리의 덕녕이로 가는 중간에 있는 길 모퉁이. 장진천 옆으로 길게 뻗은 도로가 이 곳에 이르러 갑자기 심한 경사를 이루며 모퉁이가 되어 하필이면 곧게 뻗어 있는 길에 모퉁이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예전에는 이 곳에 도둑이 많이 들끓었다 한다.
44 장진천( 津川) : 왕림리와 전곡읍 은대리 사이에 있는 하천. ("산천"편 참고)
* 제 보 자 : 박 용 태(72) 군남면 황지리
이 상 우(64) 황지리 5반
박 동 재(57) 황지리 5반
조 승 택(36) 왕림리 1반
6. 황지리(黃地里)
본래 마전군 화진면(禾津面)의 지역으로, 흙빛이 누르므로 '황지리' 또는 '황지대리(黃地臺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석문리(石門里)를 병합하여 군남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이후 3·8선 북쪽 지역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5개 반,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관낭 : 황지리 서쪽, 임진강에 있는 현무암 석벽. 황지리와 남계리에 넓게 펼쳐져 있는 화진벌이 경지정리되면서 이 곳에 농업용수를 퍼 올리는 양수장을 설치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 말여울(馬灘) : 관낭 북쪽에 있는 임진강 여울. 이 곳의 지형이 풍수지리설로는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갈마음수형국(渴馬飮水形局)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를 가지고 있으나, 원래 말여울의 앞음절 '말'은 고어로 '큰'을 뜻하는 말로 씌었으므로 이 여울은 '큰 여울'로 풀이 되어야 옳은 것이라 할 수 있다.
3 기탄( 灘) : 가마소 옆에 있는 여울. 임진강의 물이 이 곳에 이르러 강 가운데 퇴적되어 있는 모래섬으로 인하여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하여 붙여진 여울 이름이다.
4 가마소 : 말여울 북쪽에 있는 소(沼).
5 뱃터거리모퉁이 : 마탄동에서 임진강나루로 가기 전에 있는 모퉁이. 예전에는 이 곳에 있던 나루를 이용하여 마전으로 왕래하였다 한다.
6 도깨비여울 : 가마소 북쪽에 있는 임진강 여울.
7 무쇠봉(134m) : 가마소 북쪽, 임진강 옆에 있는 산 봉우리. 우리나라에는 '무쇠', '무시', '무수'가 들어가 있는 땅이름이 전국에 무척 많이 나타나 있는데, 모두가 강이나 내를 끼고 있어 물(水)과 관련을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물'은 옛날에 '믄', '믐', '뭇', '믓' 등으로 발음되어 왔으며, 그 한 예인 '믓'은 음의 변화를 거치며 '무쇠'로 굳어지게 된다.
믓 > 뭇 > 무스 > 무수 > 무쇠 + 봉(峰)
따라서 무쇠봉은 음차한 한자이름의 '水鐵峰'이 아닌 '임진강 옆에 있는 봉우리' 라는 의미를 가진 땅이름으로 볼 수 있다.
8 마구리약물 : 무쇠봉 북쪽, 산비탈에 있는 약수.
9 등골(藤谷) : 무쇠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원래 산(山)을 뜻하는 고어의 '둠'과 '골(谷)'이 합하여 단순히 '산골짜기'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던 것이 ㅁ이 ㄱ에 동화 되는 자음동화 관계로 '등골'로 발음되어 쓰이면서 다시 한자로 음차하여 엉뚱하게도 '藤谷'이 된 곳이다.
10 망두골 : 등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11 서낭고개 : 등골에서 왕림리 안골로 넘어 다니는 고개. 마루턱에 성황당이 있었다.
12 쇠골고개 : 등골에서 새점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
13 이러니골 : 등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14 도당골 : 이러니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도당(都堂)이 있었다 하며 작은도당골과 도당골로 나뉜다.
15 양지말 : 마탄동 북쪽에 있던 마을. 음지말에 상대되는 이름이다.
16 금계골(金鷄谷 = 음지말) : 양지말 동쪽에 있던 마을, 이 골짜기 안에 있는 산의 형태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현재 그 명혈(名穴)에는 강릉 김씨의 묘가 있으며 6 ·25 전에는 개성 왕씨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17 개미골 : 금계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18 마탄동(馬灘洞) : 양지말 남쪽에 있던 마을. 임진강에 있는 큰 여울인 말여울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6·25 전에는 청송 심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19 오리골고개 : 마탄동에서 오리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로 '벼락재고개'라고도 한다.
20 마산(馬山) : 마탄동 남쪽에 있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산.
21 기와골고개 : 마탄동에서 화진벌로 나오는 고개.
22 오리골(吾柳洞) : 미산 동쪽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고성 이씨·함청 김씨· 전주 이씨· 반남 박씨가 모여 살던 마을이었다.
23 수사막골고개(= 송낙골) : 오리골에서 금계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24 가리상골 : 오리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25 요골 : 현 화진초등학교 북쪽에 있는 골짜기.
26 석문동(石門洞) : 황지리 동남쪽, 322번 지방도 옆에 있는 마을. 장진천변에 펼쳐져 있는 현무암 절벽의 형상이 돌로 된 문과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구석동'으로도 불리워지고 있다.
27 장진낭( 津崖) : 구석동 동쪽, 장진천 변에 펼쳐진 높은 현무암 절벽.
28 좌부승지 백유함 묘(左副承旨 白惟咸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29 동글봉 : 구석동 북쪽에 있는 동그란 모양의 봉우리.
30 빗접산 : 요골 북쪽, 긴등에 딸린 산. 풍수지리설로는 이 곳의 산 모양의 미녀가 머리를 풀고 앉아 머리를 빗는 형국인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또한 한탄강 건너 전곡읍 고릉리 국사봉(國思峰)은 미녀가 마주 대하고 앉아 치장할 때 보는 거울과 같다 하여 '면경산(面鏡山)'으로도 불리워지고 있으나, 미녀가 풀어 놓은 비녀봉에 해당하는 명혈(名穴)을 찾지 못한다 한다.
31 긴등 : 빗접산 동북쪽에 있는 긴 산등.
32 달안이(達遠里) : 빗접산 동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로, 윗달안이와 아랫달안이로 나뉜다. 땅이름에서의 '달'은 처음에 들(野), 산(山), 돌(石), 흙(土) 등을 포괄하는 단순한 '땅'의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곳 달안이와 관계가 되는 '들(野)'의 원래 음은 ' '로 불리웠었으며, 이 ' '이 차츰 '달'로 음이 옮겨가 안쪽의 뜻을 가진 '안(內)'과 합쳐져 '달안(野內)'로 되었다가, '안'이 앞 음절의 말음인 ㄹ을 옮겨 받으며 '다라니' 또는 '달안이'로 불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달안이'는 은대리 가사평과 화진벌을 기준으로 하여 '넓은 들에서 안쪽에 위치한 산골짜기 마을'이라는 지정학적인 뜻을 가지고 있을 뿐 한자의 '達遠'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다.
33 오소리등 : 달원리 남쪽에 있는 산 등으로, 오소리형상이라 한다.
34 회가마골 : 오소리등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회(灰)를 구웠던 곳이라 한다.
35 새점(新店) : 오소리등 동쪽에 있던 마을. 일제 강점기 때 옹기를 굽던 요업(窯業)이 번창했던 곳이다.
36 능골 : 새점 북쪽에 있는 골짜기. 개안 김씨의 큰 묘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7 쇠골 : 능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전언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때 철광을 개발하였으나, 운반여건이 좋지 않아 폐광이 되었던 곳이라 한다.
* 제 보 자 : 심 상 묵(91) 군남면 황지리
김 봉 길(75) 전곡읍 전곡1리
7. 남계리(楠溪里)
본래 마전군 화진면(禾津面)의 지역으로, 조선조 중엽 남계(楠溪)라는 호를 가진 영동이씨 이모(李 ?)의 묘가 있다 하여 남계리라 하였는데,
조선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도감포리(都監浦里)와 음대포리(音垈浦里)로 분할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분할되었던 2개 리를 병합하여 다시 남계리라 하였으나, 1945년 8·15 광복 이후 3·8선 북쪽 지역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10개 반,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도감포(都監浦, 陶哥湄, 陶家湄, 甕岩灘) : 남계리 남쪽, 임진강과 한탄강이 합류하는 곳에 있는 포구 마을. 옛 지리지나 여러 기행문에는 이 곳 합수머리에서 임진강을 따라 전곡읍 마포리 지역에 넓게 펼쳐진 꽃답벌과 동이리 썩은소 앞의 강폭이 좁아지는 지점까지의 지형이 항아리의 형태와 꼭 닮았다 하여 '독안이(壺內)'
또는'호구협(壺口峽)'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워졌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항아리와 닮았다고 하는 지형 안에 있는 도감포의 원래 의미는 '항아리(壺) 형태와 같은 지형안(內)에 있는 포구(浦)'란 뜻으로, '독안개(壺內浦)' 또는 '독안이'로 불리우던 것이 '도감', '독암'으로 음이 변하여 한자로 지명을 옮겨 쓰는 과정에서 엉뚱하게 '都監浦' 외에 여러 한자 명칭을 낳게 되었다.
이 곳은 일제 강점기 때까지도 강화도, 서해안에서 임진강을 따라 올라온 새우젓, 소금배들이 정박하며, 연천지역에서 생산되었던 곡물, 땔감, 도자기 등을 물물교환하던 큰 장이 형성되었고, 이 곳의 빼어난 경관과 상거래를 하던 도감포 상선들로 인하여 조선시대 마전군 때에는 지산8경(芝山八景 = 麻田八景)으로도 꼽혔던 명소였다. (미산면 마전리 지산8경 참고)
6·25 전에는 제주 고씨가 집성을 이루며 살던 곳이다.
2 계림동 : 도감포 북쪽, 임진강 옆에 있던 마을.
3 밤여울(栗灘) : 계림동 서쪽, 임진강에 있는 큰 여울. (미산면 동이리편 참고)
4 중턱굴 : 계림동 북쪽, 임진강 석벽 중간에 있는 자연굴로,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한다.
5 화진벌(禾津坪) : 남계리와 황지리에 펼쳐져 있는 넓은 들판.
6 단풍동(丹楓洞) : 도감포 북쪽에 있는 마을. 6·25 전까지도 단풍나무 고목 3그루가 있었다 한다.
7 신복동 : 단풍동 북쪽에 있는 마을. 6·25 이후 수복이 되면서 새로 형성되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8 진밭고리 : 신복동 북쪽, 남계리 중앙에 있는 밭. 땅이 몹시 질어 곡식이 자라지 못해 피를 많이 심었던 곳이었으나, 화진벌이 경지정리가 되면서 지금은 옥답으로 변해 있다.
9 큰웅댕이 :남계리와 황지리 경계가 되는 332번 지방도 아래에 있는 우묵한 웅덩이.
10 어산(魚山) : 큰웅댕이 옆에 있는 높이 70m의 산. 산의 모양이 물고기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어씨(魚氏)의 묘가 있다 하여 '어산'으로도 불리운다 한다.
11 주란마루 : 어산 남쪽에 있는 긴 둔덕.
12 벌말(坪村) : 어산 동남쪽에 있는 남계리에서 가장 큰 마을. 6·25 전에는 안동권씨들이 집성을 이루고 살던 곳이다.
13 남계리 물푸레나무 : 벌말 남쪽에 있는 물푸레나무 고목. 어렸을 때 부터 이 나무를 보고 자랐던 촌노들의 제보에 의하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그 모습, 그 크기라 한다. 전체높이 15m, 둘레 2.9m, 수령은 약 300년으로 추정되며, 현재 연천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14 정가니골짜기 : 태안개울 옆에 있는 작은 골짜기.
15 태안개울 : 벌말에서 한탄강으로 흐르는 개울.
16 동매기등 : 정가니골짜기 남쪽에 있는 등성이. 지금은 이 곳에 벽돌공장이 들어서 있다.
17 남계리 구석기유적지(楠溪里 舊石器遺蹟址) : 동매기등에 있는 구석기유적지.(문화유적·유물편 "선사유적과 유물" 참고)
18 빨래나드리 : 동매기등 아래, 한탄강에 있던 나루터. 예전에 부근 마을에서 빨래를 했던 곳이며, 전곡읍 고릉리로 연결된다.
19 포촌음터(浦村隱垈, 音垈浦里) : 동매기등 동쪽, 한탄강 언덕 위에 있던 마을. 전곡읍 은대리의 음터(隱垈)와 인접한 포구마을이 되어 지어진 이름으로, 조선 고종조의 광무 ≪마전읍지≫에는 음터의 발음대로 '음대포리'로 기록되어 있다. 6·25 전에 큰 마을을 이루었던 이 곳이 수복후 경지정리가 되어 지금은 농경지로 변해 있 다.
* 제 보 자 : 고 낙 원(84) 군남면 남계2리
안 덕 원(56) 남계1리
첫댓글 그 옛날 지명이 더욱더 정겹군요무슨골좋잖아요정겹고
이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지명에 대해 몰랐었네요~~
좋은글감사하구요,,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