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선 무궁화호 하행선 밤기차의 널찍한 공간
경부선 무궁화호 기차에 자전거를 싣고 서울서 옥천행 여행은 마치 007작전을 방불케했다. 아직까지 열차에는 원칙적으로 자전거를 싣지 못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그래도 경부선을 제외한 다른 노선에선 몇몇 자전거 탑승이 가능한 열차도 운행하고 있어 이전에 우리가 금강 라이딩을 위해 신탄진을 갈 때 호남선 열차를 이용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무슨 수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웹검색을 해보니 다행히 두어 건의 경부선 기차 자전거 탑승 성공기가 올라 있었다.요지는 검표원과 마찰이 있을 수도 있지만 열차를 타기만 하면 끌어내린 사례는 없다는 것이다. 열차의 충분한 공간에 탑재된 자전거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다. 나는 이걸 의지해서 재미삼아 한번 시도해보기로 했다. 일산에서 옥천까지 시외버스를 이용하면 편안하게 갈 수는 있지만 동부대전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번거롭고 우리가 떠나는 때가 늦은 밤시간이라 버스시간이 맞지않았다.
무궁화호 하행선 카페칸의 신선노름
그래서 선택한 기차가 금요일밤 2250시 서울역 출발, 0059시 옥천역에 도착하는 경부선 무궁화호 밤기차였다.벌써 좌석도 매진되어 입석뿐이었지만 이건 아무래도 좋았다. 자전거만 무사히 탑승시키면 카페칸에 철버덕 주저앉아 한잔 하면서 가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열차에 오르기도 전에 역무원에게 저지당할까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열차 출발 30분 전부터 플랫폼에 미리 대기하며 작전에 돌입했다. 다행히 우리가 노린 4번 카페칸과 3번 객차 사이에는 블로거의 사진에서 보던대로 철봉까지 구비된 2대의 자전거를 탑재할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재빨리 자전거를 싣고 준비한 노끈으로 철봉에 묶고 있는데 우려했던대로 우락부락하게 생긴 역무원이 나타나서 다짜고짜 자전거를 갖고 내리라고 소리를 쳤다. 그는 기차이용 규정을 내세우며 곧 입석 승객이 밀어닥칠 것이니 그들이 불편하면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몇 번 사정조로 이야기해 봤지만 통하지 않아 강수를 두었다. 정그러시다면 이 자전거로 인하여 단든 승객에게 불편을 끼치는 사태가 발생할 때 우리는 무조건 하차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내 말을 빌미로 꼭 그리하라고 몇번 다짐을 둔 뒤 역무원은 총총히 사라졌다.
물론 그 후 승객의 불편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신고식을 치룬 우리는 일찌감치 카페칸에 자리를 잡고 넓은 차창으로 스치는 밤풍경을 마치 영화를 보듯 즐기면 포도주 잔을 기울였다. 모든 게 상상했던대로 순풍에 돛단듯 펼쳐지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런 경험을 한 것이 자신감을 발동시켜서인지 우리는 귀경할 때도 경부선 기차를 이용하기로 작당했다. 처음에는 부산서 올라오는 열차에 승객이 많을 테니 옥천서 자전거를 싣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으니 시외버스를 이용하자고 했다. 하지만 버스로 가면 서울동부터미널에서 일산집까지 거의 두시간을 가야할 걸 생각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한번 저질러보자는 생각이 발동했다. 기차에 안 실어주면 시외버스로 가기로 하고 옥천역으로 내리 쏘았다.
신형 무궁화호 상행선의 빡빡한 자전거 탑재 상태.
이번엔 맨 꽁무니 객차를 노렸다. 주로 카페칸 주위에 역무원이 대기하고 있을 확률이 높아 타기도 전에 저지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뿔싸, 이게 왠 일! 막상 열차에 오르고 보니 계단 외에는 여유 공간이 없었다. 무궁화호 열차에 신형과 구형이 있어 밤에는 주로 너른 구형이, 낮에는 각박한 신형이 배차되는 모양이다. 열차나 사람이나 왜 신식일수록 이리 여유없어지는지 모르겠다. 카페칸 앞뒤의 사정을 정탐나간 친구가 돌아와 하는 말. 거기도 올 때의 구형차량처럼 그리 너른 공간은 없고 자전거 두 대 겨우 세워둘 공간은 되겠다고 했다.
우리는 열차가 다음 대전역에 닿자마자 잽싸게 4~5호차 사이로 이동하여 자전거를 탑재하고 그들을 끈으로 단단이 묶었다. 다행히 제지하는 역무원이 눈에 띄지않았지만 화장실앞 통로가 너무 좁아 거기 세운 자전거로 인하여 오가는 승객들이 불편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아, 이제 역무원이 오면 꼼짝없이 쫓겨나게 생겼다." 각오하고 있을 때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젊고 샤프하게 생긴 역무원이 나타났다. 나는 그에게 이세상에서 가장 공손한 자세로 "죄송합니다"했더니 그는 참으로 뜻밖에도 괜찮다는 손짓을 하며 제 갈 길을 갔다.
휴, 십년감수했네. 그것 참, 역무원도 사람 나름이구나. 올 때는 공간이 그리 넓어도 우리를 쫓아내려 하더니, 이젠 정작 쫓겨나도 할 말이 없을 궁지에 몰려서는 오히려 너그러운 배려를 받다니...
참, 세상일이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구만.
올 때는 카페칸에서 탱자탱자 신선노름으로 왔으니 갈 때는 꼬박 선 채로 두 시간 이상을 가는 것도 공평한 일이다. 인생사가 어디 좋은 일만 있을 수 있는가. 좋고 굳은 일의 반복이 인생사 일진대 오늘 이 좁은 열차간에서 자전거 탑재를 용인받은 게 어디냐. 따져보면 행운이 팔할이야.
자전거 라이더들에게 고함. 가능하면 경부선을 많이 이용하여 분규를 많이 일으키고, 철도청에 자전거 전용칸 설치를 종용하는 민원을 자주 넣어서 라이더의 철도 이용권리를 찾도록 하자.철도청은 기차와 무공해 자전거의 연계를 전략상품으로 선전까지 하면서 경부선에는 여전히 자전거 탑승을 거부하는 이율배반적인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기차가 저공해 탈 것이라면 자전거는 무공해 탈 것이니, 지구를 살리는 일에 동참한 철도청은 마땅히 자전거를 친구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산소같은 자전거 기차의 가슴에 안겨 평안히 여행할 날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