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터넷뉴스는 창간 7주년을 기념하는“당당한 구미”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구미의 각계각층의 리더가 말하는 구미의 어제를 짚어보고, 향후 구미의 비전과 전망을 진단해보기 위해 이렇게 지역 명사들을 초청하여 인터뷰를 갖게 되었습니다.
9번째 손님으로 김경모 국제라이온스 356-E지구 당선총재님을 인터뷰 손님으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고향 김천시 개령면!
내 고향 개령면은 김천 시내에서 선산 방면으로 감천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비스듬하게 자리 잡고 있는, 옛 지명으로 하면 금릉군 개령면이다. 우리 개령면은 일찍이 삼한시대에는 감문국이 자리 잡았으며, 한 때는 김천 일대에서는 가장 큰 개령군이었다가 1914년 이후 개령면이 되었다고 한다.
개령은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 ‘빗내농악’이 유명하다. 빗내농악은 옛 감문국의 ‘나랏제사’와 풍년을 기원하는 ‘빗신제’가 혼합되어 동제(洞祭)형태로 전승되었는데, 강렬하고 경쾌한 가락 등 일반 굿판과는 명확한 차이가 있으며, 모두 12마당(골매기굿, 문굿, 마당굿, 영풍굿, 판안다드레기, 기러기굿, 허허굿, 쌍둥이굿, 판굿, 영산다드레기, 진굿, 상사굿)으로 구성되어 전승된 진굿(군사굿) 농악의 원조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 빗내농악은 각종 전국 농악경연대회에서 대상(대통령상, 국무총리상 등) 등을 많이 수상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으며, 개령초등학교는 전승학교로 지정되어 전교생이 빗내농악을 배우(전승)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개령면 광천리(廣川理)에 빗내농악전수관이 있다.
내 아버지 김복록
나는 이렇게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곳, 개령면 광천2리에서 아버지 김복록 어머니 김종옥의 사이에서 1956년 9월 10일 태어났다. 아버님이 젊었을 때, 일본 생활을 하시느라 마흔 넷이 되시는 해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외동아들이자 독자였다으며, 얼마나 귀여움을 차지했을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개령초등학교와 개령중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중학교 2학년 때 갑자기 아버님이 중풍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나는 서울로 이주하게 되었다. 만약아버님이 계셨다면 현재까지도 개령면 광천리에 살고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정형편으로 보아 비교적 유복한 가정이었지만, 그 시절의 가난의 고통을 함께 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 3천4백원이던가 하는 내 등록금이 모자라 아버님이 끼고 계시던 반지를 팔아 내 등록금을 내주신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아버님 생전 마지막 등록금이었다.
내 아버지는 나의 롤 모델이였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아버님은 술도 안하셨던 분이여고, 또한 농사나 마을일 등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에 많이 참여하신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어릴 때 몇 번 뵌 것이지만, 아버님이 동네일에 대해 중재해주시는 것을 보았다. 아버님은 그만큼 정의로우신 분이며, 경우에 맞게 삶을 살아오신 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버님은 고기 같은 것을 사갖고 오실 때 숨겨서 오는 법이 없었다. 동네에 들어오실 때 아는 분을 보시면 그 고기를 나누어 주시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한 번씩 그러한 일에 대해 불평을 말씀 하셨는데, 어쩌면 아버님의 그러한 것이 내 몸에 배여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다 스스로 계면쩍어 질 때가 있어 얼굴을 붉히곤 한다.
그리고 어머님은 생전에 내게 “숨어서 남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금송아지가 되어라”고 말씀 하신 적이 있었다. 그러한 아들이 되었는지,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러한 금송아지 같은 아들이 되었는지, 4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 역시 그립다.
서울시절
살림살이 등은 모두 개령에 두고 서울로 올라갔다. 처음에 어머님은 안 가시려고 했지만, 내가 조르고 졸라, 단칸방에서 살면서 우리의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서울에는 작은아버님도 계셨지만, 처음 올라온 서울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특히, 경상도 말투가 문제였다.
한번은 축구를 하는데 “일로 차라”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었다. “안그래, 그제” 하는 말도 못 알아듣고, 놀림도 많이 받았다. 그러다보니 상주에 살고 있는 현재는 화가가 되어 있는 친구와 볼펜을 입에 물고, 정말 열심히 서울말을 배웠다. 그렇게 해서 당시에는 누가 서울 사람인지 잘 모를 정도(?)로 서울말을 잘하게 되었다.
나는 단국대학교 경제학과에 들어갔다. 대학에 들어가서 써클(동아리) 생활을 하다 보니 나에게 삶의 변혁기가 온 것이다. 즉, 농촌 봉사활동을 하면서 나는 요즘말로 소위 ‘킹카’가 된 것이었다. 봉사활동으로 충남청양이라는 데를 갔는데, 당시 친구들은 콩과 풀을 구별하지 못하고 다 뽑았는데, 나는 당연히 콩과 풀을 구별하였으며, 낫질 등을 잘(?)해 낸 것이다. 그리고 대학에는 경상도 친구들도 많이 있고 해서, 더 이상 말로(사투리로) 압박(?)받던 설움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고교 때와는 달리 많은 변화가 왔다. 요즘 총학생회 같은 학도호국단 생활 등 많은 면에서 나 김경모를 새로이 발견하는 시기가 된 것이었다.
전공은 상경계열 경제학과였는데, 나는 졸업하면서 무역회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실무에서 엔지니어가 되었다. 나의 첫 직장은 현재 서교동에 있는 태진무역이다. 펌프와 펌프부품을 수입하던 회사였는데,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사업의 모태가 된 것이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세월에서 연락만 하던 친구들이 이제 먹고살만한 나이가 되다 보니, 연락도 많이 오고 서로 간에 좋은 일과 슬픈 일을 함께하는 시간도 늘여나가고 있다.
가정을 꾸미다
환갑 때 어머님의 상(회갑잔치)을 차려주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에는 불문율이었던 같다. 그러다보니 대학 다닐 때 결혼을 하였다. 자연스럽게 연애는 많이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아들만 둘을 두고 있다. 첫째는 연세대학을 졸업하고,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고 둘째는 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삼성엔지니어링에 다니고 있다.
‘기술을 배우니 밥은 먹더라. 기술을 가져라’ 한국은 자원이 없는 나라다보니 사람이 자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하곤 한다. 내가 조금은 유도한 것이 있는지 모르지만 자식들이 모두 공대출신이고 엔지니어로 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4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어머님과 반평생을 함께 살아오면서 크게 얼굴 붉힐 일 없었던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나는 아내의 몫을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절반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집 안팎에서 절반 이상의 도움을 주고 있지만, 내 아내는 지금의 나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자식들 중 첫째는 결혼을 하였고, 아직 둘째는 결혼을 하지 못하였다. 곧 좋은 짝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혼자(독자) 살다보니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분위기 메이커라고 할까 리더역할을 많이 했다. 함께 여행도 가고 봉사활동도 하고 지금 현재는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상우엔지니어링과 민성테크
서울에서 독립하여 처음 제조업을 했었다. 처음 회사를 경영하면서 유리안(유리로 만든 어항같은) 경영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직원의 생일날 케잌도 사주고, 애기를 낳는 직원이 있으면 꽃도 사주고 하였다. 그리고 주식도 15%정도 나누어 주었다. 그러다보니 그 사람들이 경영에까지 참여하려고 했다. 그러한 시스템이 되다보니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게 되었다. 회계 장부고 모든 것을 오픈하면서 나름껏 투명경영을 하고 있었는데, 장부를 뒤지고, 회계여직원을 윽박지르고 했다.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날 한 직원이 ‘노사분규’라는 것을 스프레이로 쓰는 것을 목격하고, 정말 실망이 컸다. 그래서 사업이 싫어졌다. 회한이 들었다. 그러다가 정말 1년을 쉬게 되었다.
나는 40이 되면 고향에 내려오겠다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 내 고향 김천과 이웃한 구미에서 그러한 기회가 왔다. 공구상가를 하나 사게 된 것이었다. 상우엔지니어링은 1996년 내가 구미로 처음 내려오면서 설립한 회사로서 펌프의 판매, 도매 일을 해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1997년 IMF가 터졌다. 그러던 중 내 마음속에 있던 스페이스마케팅이 빛을 발했다. 나는 몽키를 들고 직접 회사를 찾아다니면서 펌프수리까지 맡아서 하게 되었다.
스페이스 마케팅이란 IMF 등 어떠한 일이 발생해도 사각지대, 삼각지대 등 살아남을 공간이 남는다는 것이었다. 만약 아파트에 물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지난 구미 단수 당시 먹는 것은 사먹든지 해결이 되었는데, 문제는 그 뒤처리 즉, 화장실인 것이다. 사장이 직접 몽키를 들고 뛰어다보니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민성테크는 관급, 관공서, 농수용 등의 펌프와 부품을 만드는 제조업체인데 작년부터 준비하여 큰애와 함께 설립한 회사이다. 월급을 직접 주는 고정 직이 10여명 있고, 나머지는 아웃소싱을 하고 있다. 민성테크에 거는 기대가 크다.
김유영기념사업회란?
내가 자연사랑연합회 회장을 하고 있을 때, 어누 후배가 김유영감독을 아느냐고 물어왔었다. 김유영감독을 찾아보니, 구인회 결성을 주도한 구인회의 초대멤버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영화감독 중 한분이었다. 게다가 고향이 현재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라고 되어 있었다. 그 후배가 하는 말이 이분을 재조명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구미 문화의 거리를 조성하는데 김유영 감독으로부터 시작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구미시와 함께 원호리에 김유영감독에 관한 기념비도 세우고, 흉상도 함께 세웠다. 스틸 컷이 몇 컷 남아 있는 것이 있어 인근에 설치하였다. 나는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당시 영화는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대학생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영화제 같은 것을 해보고 싶었는데... 김유영감독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근래 활동이 미미한 것 같아 아쉽다.
박정희대통령의 고장 구미에 문화나 자랑거리가 너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구미에 ‘김유영문화거리’를 만들어보는 것이 꿈이었는데... 지금에서도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누구 한사람 다시 일어나 이러한 문화거리를 만들자고 하는 사람이, 그런 소원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많이 든다.
구미 자연사랑연합회 활동?
구미에 있는 자연사랑연합회는 내가 설립멤버인데, 자연과 함께, 인간과 함께 미래를 같이하자는 것이 슬로건이다. 반딧불이가 자연과 가장 가까운 생물이라고 한다. 금오산이 자연보호 발상지인데, 금오산에 반딧불이를 불러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경상북도 도지사님께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진행을 해온 사업 중 하나이다. 즉, 경북 자연환경연수원에서 자연보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모태가 되어, 전국에 자연사랑 연합이 10여개 존재하고 있다.
우유 팩 하나를 그냥 버리게 되면 3년이 넘어야 제대로 분해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버리지 않고, 재활용을 한다면? 바로 이러한 것이 자연사랑 연합회가 추진하고 있는 생각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그리고 모임이나 야유회를 갔을 때, 우리가 헤어지면서 집으로 다시 돌아 갈 때, 음식을 버리지 않고 집으로 싸가지고 가서,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준다는 것, 이러한 것이 모두 자연보호요 자연사랑연합회에서 이루고자하는 뜻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즉 우리 가까이서 우유팩하나 음식물쓰레기 하나 잘 처리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와 함께 할 자연보호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이러한 것이 바이러스가 되어, 사람들에게 퍼지고, 우리 후대에 물려 줄 자연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자연사랑연합회가 아닌가 한다.
초록우산 경북어린이 후원회 활동?
초록우산은 66년이 된 대한민국 고유의 어린이 자선단체이다. 경상북도에 직접 현금으로 지원하는 것이 27억 정도 된다. 그리고 초록우산이 구미시와 MOU를 체결하는데, 아마 후원금이 5억원 정도 되지 않을까 한다. 초록우산 전국후원회장은 탤런트 최불암씨가 맡고 있고, 이홍열씨와 고두심씨가 홍보대사이다.
지난해 여름에 이홍열씨가 전국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한 달 동안 걸어 다닌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걷게 되었을까하는 의문이 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가 걷는 이유는 아프리카 수단이라는 나라에 물이 없어, 물을 길러 가는 거리가 보통 8km라고 한다. 그 물을 뜨러 가는 시간을 줄여주고자 자전거 1,000대 보내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자전거가 1,300여대가 들어 왔다고 한다. 나도 이홍렬씨가 구미를 통과할 때 왜관에서부터 함께 하면서 나름껏 도왔던 기억이 난다.
초록우산의 지원대상은 아동지원시설에 있는 아동들과 브루겔라 병 같은 불치병에 걸린 아동들이 그 지원대상이다. 전국적으로 매년 850억 원 정도를 지원하고 있으며, 그중 10%정도가 세계 지원으로 나가고 있다. 그리고 지난 3월30일 ‘KBS1 사랑의 리퀘스트’에 방영된 문경시 점촌4동의 교통장애 가족에게 의료비 및 생활지원금 2,000만원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초록우산은 우리나라에 온 외국 선교사들이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 역시 우리의 지원이 필요한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구미 제일라이온스?
처음 친구의 추천으로 라이온스를 하게 되었다. 처음엔 내가 돕고 하는 데가 있으니까 라이온스는 또 라이온스대로 하면 안되겠나 하는데, 친구가 억지로 권유(나중에 내가 지불하였지만, 가입비와 연간회비 등을 대신 지불하였었다)하여 가입하게 되었다. 1998년 이곳 구미에 내려 온지 얼마 되지 않던 때였다.
라이온스는 봉사하는 곳이다. 그런데 봉사라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었다. 말 많은 이웃과 주변 등이 가만히 두지를 않고, 또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안 좋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런데 구미는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외부에서 오다보니 스스로를 낮추게 되고, 제일라이온스의 겸손한 환경이 좋았다그래서 가입하게 되었고, 오늘의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다. 뒤늦었지만 그때 그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나는 소위 ‘선친목후봉사’를 지나치게 하지 말아라하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리고 나는 하루에 1004원을 절약하고, 1004명의 후원자를 만들어서 초록우산 같은 봉사기관 같은 곳에 도움을 주고 싶다. 즉, 1004(천사)요법인 것이다. 담배 한 갑, 소주 한 병 덜 마시는 것을 목표로 삼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내년 라이온스 대회에서는 돼지 저금통을 준비하여 라이온스 회원 뿐 아니라 참가하신 모든 분께, 본인의 두 손으로 가져갈 수 있을 만큼 넉넉히 나눠 드리려 하고 있다. 그래서 그날 그날 봉사할 돈과 자기 자신을 위해 저축할 돈을 돼지저금통에 넣어 볼것을 권하고 싶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우리의 의식 중에 남아있는 나만의 문화의 낡은 점은 깨뜨리고, 좋은 점은 계승하고자 한다.
국제라이온스 356-E지구 당선총재?
국제라이온스 356-E 지구는 우리 행정구역으로 치면 경상북도로 해석할 수 있다. 356-E 지구는 총 106개의 단위별 라이온스클럽이 소속되어 있다. 우리 라이온스의 봉사 주체는 단위별 라이온스가 봉사의 주체가 된다. 그리고 총재의 역할은 배의 선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항해에 대한 목표의식을 주는 역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에 대한 답은 클럽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문화가정을 위해 봉사를 하자라는 목표가 총재로부터 나오면, 각 라이온스 클럽과 라이온 들은 다문화가정을 껴안을 수 있는 봉사활동을 할 것이고, 우리 시각장애자를 돌보자고 하면 우리 라이온스가 적극 나서서 무료개안 수술 등을 해주는 것이다. 즉, 이러한 봉사의 객체를 정하고, 우리 라이온들의 봉사가 잘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총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총재라는 것은 각 라이온스클럽이라는 항해사가 길을 나 갈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고, 또 그 길을 인도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1925년 헬렌켈러여사가 우리 라이온스를 찾아와서 “라이온이여, 우리의 지팡이가 되어주시오”라는 말을 하였고,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LC기금을 모아서, 봉사활동을 활발히 이어나가 이렇게 오늘까지 이어져, 세계적으로도 뛰어난 봉사단체가 되었다. 라이온이라면 기본적으로 다른 봉사를 하고, 1년에 소주 한 병 값을 아껴 다시 또 봉사를 하는 것이 기본 라이온의 모델이 되었다. 이러한 봉사정신을 알고 김관용지사까지도 동참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다문화가정, 즉, 베트남이든 필리핀이든 관계없이 한 클럽에서 한명씩을 정하여-한국에 온지 10년 이상 되신 분, 부모를 모시고 계시는 분, 또는 두 자녀 이상을 두신 분들 중- 고향(국적에 관계없이 고국) 보내주기 운동을 펼치고자 한다.
구미지역에서는 내가 김영도, 이용원. 정재화총재님에 이어서 네 번째로 총재가 된다. 지금은 현시대에 맞는 도·농간의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지역이 많이 있다. 그 어려운 지역에 직접 찾아가서 등반대회를 갖는 등 행사를 펼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행사가 끝나면 그 지역의 불우한 이웃을 돕는 행사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작년의 경우 상주지역에서 행사를 했는데, 도자기를 만드시는 분들이 참가해서, 도자기를 판돈으로 낙후된 지역을 도운 것이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리고 800여명의 라이온들이 영양지역에 고추 따기 농사를 도운 것도 기억이 남는다.
나는 49명의 나를 좋아하지 않는 분과 나를 좋아하는 51분이 함께 하여서 (당선)총재가 되었는것 같다.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49분을 잘 품고 함께 걸어, 100%의 국제라이온스 356-E지구를 이끌어 가고 싶다. 많이들 도와주실 것이라고 믿고 함께 가겠다.
스리랑카 학교 짓기란?
작년에 내가 ‘러브인 아시아’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이레사’라는 사람이 나왔는데, 그분이 하시는 말씀 중에 “비가 오면 학교가 쉬고 있다”는 말을 하였다. 비가 오면 학교를 쉬다니 하면서 방송국에 전화를 하여 알아보았더니, 학교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내게 연락을 부탁한다고 전하니, 한 삼 일 정도 지나 연락이 왔다. ‘이레사’라는 사람은 스리랑카 출신으로 경기도 용인시에서 가내수공업을 하면서 아주 어렵게 살고 계시는 분이셨다. 용인이라고 했지만 아주 농촌이었고, 한쪽 벽에는 스리랑카 음식 등을 판매하고 계셨다. 그래서 내가 “학교를 지어주고 싶다”고 말하였더니, 흔쾌히 그리고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분은 ‘아이러브랑카’라는 모임을 만들어 회장직을 수행하고 계셨다.
이레사를 통해 학교기증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 제일라이온스는 2012년 그러니까 지난해 8월 20일, 8명의 선발대원이 초등학교건립 착공식에 참여하였다. 스리랑카 현지에서 직접 벽돌을 나르고 바닥기초 작업을 하는 등 구슬땀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난 3월 20일 준공식을 하였다. 나는 사실 들어가지 않으려 했으나, 초롱초롱하던 애들의 눈망울을 잊지 못했고 과거 대한민국 역시 저러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에 우리 집사람하고 같이 다녀왔다.
이 자리를 빌러 부족한 경비와 현장을 찾아 직접 땀을 흘리는 등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구미 제일라이온스클럽 박봉한 회장님을 비롯한 임원 여러분과 회원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드린다. 스리랑카 큐류네카라 지역 판시여카마 초등학교 학생들이 새롭게 지어진 학교에서 새롭게 꿈을 다져, 씩씩하고 자랑스러운 어린이들로 자라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김경모 총재가 바라보는 구미의 비전?
어려운 질문인데 두 가지로 말해보겠다. 먼저 라이온의 비전이라면, 우리 구미에도 어려운 사람이 많이 있다. 예전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요즘 같은 시대에는 알려가면서 활성화 시켜 홍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미가 자연보호의 발상지이듯이, 구미가 라이온의 발상지 같은 곳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다져본다. 구미에서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말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구미의 비전에 관해, 구미는 지금까지 너무 잘되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제 뒤를 돌아볼 때라고 생각한다. 지금 현재 구미가 잘되고 어렵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유럽발 금융위기로 인해 너무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욕심을 조금 버리면 가능하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3대가 지나가야 성공한다는 말이 있다. 박근혜정부에 기대를 하지 말고,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미는 전문분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 좋고 기상환경이 좋은 우리 구미,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경모 총재가 존경하는 사람?
유한양행을 경영하셨던 유일한박사님을 존경한다. 그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유일한박사는 하나뿐인 딸을 위해 집한 채만 남기셨다고 한다. 내가 얼마 가진 것이 없지만 나 역시 그러한 삶을 살고 싶다.
구미의 명소를 소개한다면?
안동에 가면 부러운 것이 많다. 하회마을이나 도산서원 같은 곳이 참으로 부럽다. 그리고 간고등어 같은 것도 참 부럽다. 그런데 구미는 막막하다. 전라도의 경우 고택이나 연지 등 많은 것을 해두었는데 구미는 명소를 만들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유영영화감독 같은 분의 문화거리를 만들고, 그런 자리에 먹을거리 같은 곳을 함께 만들어 놓는다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현재로선 박정희대통령생가를 권하고 싶다. 박근혜대통령까지 대통령이 되었으니 두 분의 부녀 대통령이 탄생한 곳이니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경북인터넷뉴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근래에 들어 인터넷 등이 발달하다보니 언론이 너무 멀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번에 경북인터넷뉴스에서 휴대폰에서도 바로 볼 수 있는 앱을 개발한 것을 높이 사고 싶다. 좋은 것을 만들어 놓고, 홍보를 못하면 전혀 알지 못하는 시대가 현재가 아닌가 한다. 경북인터넷뉴스가 그러한 자리를 확실히 차지하길 바란다.
구미(경북)뉴스는 경북인터넷뉴스라는 타이틀을 한번 써 볼 것을 권장하고 싶다. 좋은 것은 홍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대표의 각오와 건투를 새롭게 당부해 본다.
내 아버지 : 김경모(당선)총재님 휴대폰에서 아버지란 누구인가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이름이다.
4살 때 아버지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7살 때 아버지는 모르는 것이 없다.
8살 때 아버지랑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12살 때 아버지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네.
14살 때 아버지하고는 말이 너무 안 통한다.
25살 때 아버지와 대화를 하면 답답하기만 하다.
30살 때 이제 아버지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40살 때 아버지의 말씀이 옳습니다.
50살 때 아버지는 참 대단한 분이셨지.
60살 때 아버지는 저 멀리 있는 뒷동산의 바위 같은 존재이다.
말은 없지만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버지의 존재이다.
첫댓글 참좋은 후배님 앞으로 좋은일 만이하시고 또건강하시길 늘행복하고
즐거운일 가정에 평화있길 기도함 구미 임 장 노 ^^